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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감곡 매괴 성모순례지 성당 원문보기 글쓴이: 윤재/프란치스코
黃嗣永 帛書
1. 罪人多黙等 涕泣呼龥于 本主敎大爺閤下 客春 行人利旋 伏聞氣体候萬安 日月馳駛
죄인다묵등 체읍호유우 본주교대야합하 춘객행인이선 복문기체후만안 일월치사
歲色垂暮 伏未審体內更若何 伏惟賴主洪恩 神形廉 佑 德化日隆 望風馳慕 不勝忭賀
세색수모 복미심체내경약하 복유뢰주홍은 신형겸 우 덕화일융 망풍치모 불승변하
죄인 토마스 등은 눈물을 흘리며 우리 주교님께 부르짖어 아룁니다.지난 봄 그곳에 갔다가 무사히
돌아온 사람 편에 주교님께서 안녕 하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만, 날이가고 달이 바뀌어 이제
해가 거의 저물어 가는데 그동안은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엎드려 생각 하건대 주교님께서는
주님의 넓으신 은총으로 영육간에 건강하시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덕화가 나날이 높아지시어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며 기뻐하여 축하를 드리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註
- 황심( 黃沁, 1759-1801, 세례명 : 토마스(多黙) : 燕行使의 일행으로 세 번이나
북경에 가서 조선 교회의 서신을 북경 주교에게 전달함.
- 황사영은 자기의 세례명을 알렉시오(亞勒叔)가 아닌 토마스(多黙)라고 표기함
(황심이 자기보다 북 경 주교에게 더 잘 알려졌기 때문)
- 主敎 : 포르투갈 출신의 프란치스코회 선교사인 구베아 주교(Gouvea 1782-1808,湯士選)
- 本主敎大爺閤下(본주교대야합하) : 교구장 주교 (대야합하:극존칭)
- 옥천희(玉千禧)가 1801년 봄, 북경에 갔다 올 때 주교님의 안부를 황심에게 전하였을 것으로
짐작하 고 쓴 것임.
- 황사영이 “하느님”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한 단어 : 主, 主宰者, 耶蘇, 天地之主, 主命, 主旨,
思主, 主佑, 主恩, 主全能, 主怒, 主洪恩, 報主, 主思, 主赤子, 主博愛之恩, 信主, 天地之使,
主之仁慈 등.
罪人等罪惡深重 上干主怒 才智淺短 下以人謀 以致窘難大起
죄인등죄악심중 상간주노 재지천단 하이인모 이치군난대기
2. 禍延神父 而罪人等又不能臨危捨生 偕師報主 復何面目 濡筆而仰訴乎 第伏念
화연신부 이죄인등우불능임위사생 개사보주 복하면목 유필이앙소호 제복념
聖敎有顚覆之危 生民罹溺亡之苦 而慈父己失 攀號莫逮 人昆四散 商辦無人 惟我大爺
성교유전복지위 생민리익망지고 이자부기실 반호막체 인곤사산 상판무인 유아대야
恩兼父母 義重司牧 必能憐我救我 疾痛之極 我將乎誰
은겸부모 의중사목 필능련아구아 질통지극 아장호수
죄인들이 위로는 죄와 악이 깊고 무거워 주님의 노여움을 샀으며 아래로는 재주와 지혜가 얕고
짧아서 다른 사람들을 헤아려줌을 잃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박해가 크게 일어나 그 화가
신부님께 미쳤습니다. 죄인들은 이 위기에 처하여서도 스승과 함께 목 숨을 버려 주님께 보답
하지도 못하였으니 무너져 죽는 고통속에 있는데도 어지신 아버지를 잃어 붙들고 호소 할 데가
없으며 진실한 형제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서로 의논하고 일할 사람이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은혜 로는 부모를 겸하셨고 의리로는 사목의 무거운 책임을 지셨으니 반드시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 해 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극도에 달한 고통 속에서 저희는 장차 주교님
외에 누구에게 호소하겠습니까.
註
- 주문모 신부(周文謨, 야고보, 1752-1801)는 구베아 주교에 의해서 1793년 말 조선 교회의
선교 사로 임명을 받고 1794년 12월 3일 지황 등의 안내로 입국. 1795년 5월 체포렬이
내려졌으며, 1801. 3. 12일 의금부에 자수하였고, 4.19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 형으로 순교.
백서에 나오는 神父, 司鐸, 鐸德, 神師, 神司 등은 주문모 신부를 지칭
玆敢畧奏窘難顚末 而醞釀己久 端緖頗多 一筆難述 故具在左方 伏望哀憐而照察焉
자감략주군난전말 이온양기구 단서파다 일필난술 고구재좌방 복망애련이조찰언
方今敎務 板湯無餘 惟獨罪人倖免
방금교무 판탕무여 유독죄인행면
3. 若望不露 或者 主恩未絶於東國歟 嗚呼死者旣損生以 証敎 生者當致死以衛道
약망불로 혹자 주은미절어동국여 오호사자기손생이 증교 생자당치사이위도
然才微力薄 不知攸爲 密與二三敎友 商量目下事宜 披 腹條奏 伏望閱覽之餘 哀比煢獨
연재미력박 부지유위 밀여이삼교우 상량목하사의 피 복조주 복망열람지여 애비경독
速施拯救 罪人等如群羊之走散 或奔竄山谷 或樓遑道路 莫不飮泣呑聲 酸心痛骨
속시증구 죄인등여군양지주산 혹분찬산곡 혹루황도로 막불음읍탄성 산심통골
而晝宵盼望者 惟 上主全能 大爺洪慈 伏望誠求
이주소반망자 유 상주전능 대야홍자 복망성구
4. 主佑 大施憐憫 拯我等於水火之中 措我等於袵蓆之上
주우 대시연민 증아등어수화지증 조아등어임석지상
이제 박해의 전말을 간략히 아뢰고자 하오니 그 일이 빚어진지가 오래 되었고 그 실마 리가
복잡하여 간단히 말씀드리기가 어려우므로 다음에 자세히 적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불쌍히 여기시고 굽어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현재 교회는 여지없이 무너져 아무것도
남은것이 없는데 오직 죄인만이 요행히 화를 면하였고 요한도 발각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은총이 아직 우리나라에서 아주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죽은 사람들은
이미 목숨을 바쳐 성교회를 증명하였거니와 살 아있는 사람은 마땅히 죽음으로써 진리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재능이 미약하고 힘이 부족하여 어찌 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두 세명의
교우가 비밀리에 모여 당면한 해야 할 일들을 의논한 결과 그동안 속에 품었던 사정을 일일이
아뢰기로 하였으니 읽어 보시고 의지할 곳 없음을 불쌍히 여기시어 빨리 구원의 손길을 베풀어
주시기 바 랍니다. 저희 죄인들은 마치 양떼가 흩어져 달아나듯이 어떤 이는 산골로 도망쳐 숨고
혹은 몸 둘 곳이 없어 길바닥에서 헤매면서도 울음마저 터뜨리지 못한 채 흐느끼고 있습니다.
마음이 쓰리고 뼈가 저려 밤낮으로 바라는 것은 주님의 도움을 구해 주시고 연민의 정을 크게
베푸시어 저희를 물과 불 속에서 건져다가 저희를 이부자리 위에 있 게 하여 주십시오.
註
- 박해는 천주교에 대한 정부의 탄압을 나타내는 용어. 백서에서는 窘, 窘難 이라함.
- 옥천희(玉千禧, 요한, ? - 1801) : 황심의 권유로 1799년 북경에서 세례를 받음. 조선 교회의
편지를 구베아 주교에게 전함. 1801년 6월 귀국중 체포되어 11월 5일 치명.
- 두,세명의 교우 : 황사영, 황심, 옥천희 등을 말함.
如今 聖敎己遍天下 萬國之人 無不歌詠聖德 鼓舞神化 而顧此左海蒼生 孰非 上主赤子
여금 성교기편천하 만국지인 무불가영성덕 고무신화 이고차좌해창생 숙비 상주적자
地方遐僻 聞敎㝡晩 氣質孱弱 耐苦狠難 而十載風波 長在淚泣憂愁之中 今年殘害
지방하벽 문교최만 기질잔약 내고한난 이십재풍파 장재루읍우수지중 금년잔해
更出夢 寐思想之外 哀我人斯 胡至此極耶 此難之後 倘無特恩
경출몽 매사상지외 애아인사 호지차극야 차난지후 당무특은
5. 耶蘇聖名 將永絶於東土 言念及此 肝膓摧裂 中西敎友先生們 聽此危苦之情
야소성명 장영절어동토 언념급차 간장최열 중서교우선생문 청차위고지정
寧無側然傷心乎
영무측연상심호
오늘날 성교회가 온 세상에 널리 퍼져 모든 나라 사람들이 성덕을 노래하고 주님의 교 화에
북을치며 춤추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백성들을 돌아보건대 어느 누가 주님의 백성이
아닌 이가 있겠습니까마는 지역이 멀고 궁벽하여 가장 늦게 성교회를 들었고 또 기질이 가냘프고
약하여 고통을 견디기가 어려워 10년 풍파에 늘 눈물과 근심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금년(1801)의 잔혹한 박해는 꿈에도 생각 할 수 없이 나타난 일이었습니다.
실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이 어찌 이토록 극단에 이를 수 있습니까. 이 박해가 비록
끝난다 하더라도 주님의 특별한 은총이 없으면 예 수님의 거룩한 이름이 이 나라에 영원히 사라질
것입니다. 말과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 고 보니 간장이 갈기갈기 찢어집니다. 중국과 서양
교우들이 이 위태롭고 괴로운 사정을 듣는다면 어찌 마음 아파하지 않겠습니까.
註
- 10년 풍파 : 1791년 신해박해로 윤지충, 권상연의 순교, 1795년 5월 을묘박해로 윤유일, 최인 길,
지황의 순교, 1797년 말에서 1799년까지 충청도 박해, 1800년 5월 양근,여주의 박해를 말 함.
敢望敷奏敎皇 布告各邦 苟可以救援吾儕者 体吾主博愛之恩 顯 聖敎同人之義
감망부주교황 포고각방 구하이구원오제자 체오주박애지은 현 성교동인지의
以副此切望之誠 罪人等捫心揮涕 哭訴哀情 引領翹足 專候福音 惟我大爺
이부차절망지성 죄인등문심휘체 곡소애정 인령교족 전후복음 유아대야
千萬可憐 我書不盡意
천만가련 아서불진의
감히 바라건대 교황님께 자세히 아뢰시어 각국에 널리 알리시고 진실로 저희를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든지 다 써서 우리 주님의 박애정신을 본받고 성교회에서 가르치 는바대로 모든
이를 두루 사랑하시는 뜻을 드러내어 간절히 바라는 저희의 이 정성을 도와주십시오. 죄인들은
가슴을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 어려운 사정을 호소하고 목을 늘이고 발돋움을 하여 오직
반가운 소식이 있기만 기다립니다. 주님께서는 저 희가 드리고 싶은 뜻을 글로 다 표현치 못함을
가련히 여겨 주십시오.
註
- 교황 : 251대 비오 7세(1800.3 - 1823.8)
6. 自乙卯失捕後 先王疑懼日深 潛譏密察未嘗少間 而終不知神父踪跡 乃使趙和鎭者
자을묘실포후 선왕의구일심 잠기밀찰미상소간 이종부지신부종적 내사조화진자
反托奉敎 深知湖中 (忠淸道之別名) 事情 逐有己未冬淸州之害 湖中熱心敎友死亡畧盡
반탁봉교 심지호중 (충청도지별명) 사정 축유기미동청주지해 호중열심교우사망략진
을묘년(1795년)에 (주문모 신부를) 잡으려다가 놓친 후부터 선왕의 의구심과 두려움이 날로
깊어져 잠시도 멈추지 않고 남모르게 수사를 계속하였으나 끝내 신부님의 종적을 알아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조화진을 시켜 교회를 받아들이는 체 꾸미고 충청도 일대의 사정을
탐지하게 하였습니다. 마침내 기미년(1799년) 겨울 청주에서 박해가 일 어나 열심한 교우들은
거의다 잡혀 죽었습니다.
註
- 선왕 : 정조 임금
- 정조는 주신부를 놓친후 장용위와 연부별군직,선전관으로 하여금 주신부를 찾도록 함.
- 조화진은 청교 조씨로(서파) 영조의 밀명을 받고 사학을 염탐하기 위해 필공(筆工), 행상(行商)
이 라 칭하면서 신자들과 접촉하고 천주교를 배우는 척 손으로 십자가를 그으며 천주교 책을
외우면 서 이 사실을 음성 현감 노숙에게 연락.(1801년 감옥에 갇혔다가 목매어 자살)
崔多黙必恭者 中路人也 性直志毅 仗義疎財 有卓犖不羣之風 辛亥之窘 不幸被誘背敎
최다묵필공자 중로인야 성직지의 장의소재 유탁락불군지풍 신해지군 불행피유배교
先王甚喜之 爲之娶
선왕심희지 위지취
7. 妻拜官 多黙不得已順受 近年家居 深痛往失 常思損軀補贖 己未八月 先王忽然召致刑曹
처배관 다묵부득이순수 근년가거 심통왕실 상사손구보속 기미팔월 선왕홀연소치형조
問你尙奉邪學否 多黙適中所願 自分必死 遂直陳聖敎忠孝之理 自己痛悔之情 所言光明後偉
문니상봉사학부 다묵적중소원 자분필사 수직진성교충효지리 자기통회지정 소언광명후위
感動旁聽 而刑官駭憤殊甚 據辭上聞 先王不復加刑
감동방청 이형관해분수심 거사상문 선왕부복가형
8. 因循放釋 臺臣抗疏請誅 亦糢糊賜批 頗示包容之意 事遂寢
인순방석 대신항소청주 역모호사비 파시포용지의 사수침
최필공 토마스는 중인 계급의 사람으로 성품이 곧고 의지가 굳세며 의로움에 의지해서 재물을
멀리하고 그 열심히 가장 왕성하여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풍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해박해 때에 불행히 유혹에 빠져 배교하였습니다. 그러자 선왕이 몹시 기뻐하여 그를
장가들게 하고 벼슬까지 주니 토마스는 하는 수 없이 다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근년에 와서는
집에 들어앉아 있으면서 과거의 잘못을 몹시 마음 아파하고 항상 몸을 바쳐 보속할 것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기미년(1799) 8월에 선왕이 뜻밖에 그를 형조로 불러들여 “네가 아직 사학을
신봉하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토마 스는 자기가 바라던대로 이제야 죽게되었구나 하고 충효에
대한 성교회의 도리와 자기의 잘못을 뼈저리게 뉘우치는 심정을 솔직히 진술하였습니다.그 말이
빛나고 위엄이 있어 옆에서 듣는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였습니다. 그러자 형관은 몹시 놀라고 화가
나서 진술 사항을 그대로 임금께 보고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왕은 더 형벌을 내리지도 않고 옛날과
같이 그냥 석방하였습니다. 그러자 사헌부 신하들이 임금에게 반대 상소문을 올려 토마스를
사형에 처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선왕은 역시 모호한 대답을 내려 그를 포용하는 뜻을 보였기에
일은 그정도에서 가라앉았습니다.
註
- 최필공(1744-1081)은 1790년(46세)에 사촌동생 최필제와 함께 이존창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
1791년 박해때 체포, 정조의 명에 의해 배교, 주문모 신부 입국후 회개. 1801.2.26 순교.
- 신해박해 : 1791년(정조 15년) 8월,전라도 진산에 사는 윤지충,권상연이 모친의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운 사건. 척사자인 홍낙인은 이들의 체포를 독촉하고 천주교 탄압을 요청하는 장서 를
올림. 11.13일 윤지충, 권상연 순교.
- 배교(背敎, apostassia) : 세례를 통해 참된 신앙을 받아들인 자가 그 신앙의 진리를 포기하고
신 앙생활을 저버리는 행위(황사영은 훼교(毁敎), 해교(害敎) 엄교(嚴敎), 훼척성교(毁斥聖敎)라 함.
- 형조판서 : 이득신
李瑪爾定中培者 少論一名也 (士夫妾子孫謂之一名) 居京畿道驪州 勇力絶倫 志氣豪快
이마이정중배자 소론일명야 (사부첩 자손위지일명) 거경기도여주 용력절륜 지기호쾌
素與金健淳爲生死之交 及健淳奉敎 瑪爾定亦信從領洗 熱心如火 明日張担而行 不怕人知覺
소여김건순위생사지교 급건순봉교 마이정역신종영세 열심여화 명일장단이행 불파인지각
庚申復活占禮 煮狗釃酒 與同里敎友 會坐路邊 山僻小路
경신부활점례 자구시주 여동리교우 회좌노변 산벽소로
9. 高聲念喜樂經 擊匏樽按節 歌竟飮酒爵肉 飮訖復歌 如是終日
고성념희낙경 격포준안절 가경음주작육 음흘부가 여시종일
이중배 마르티노는 소론의 일명(사대부 첩의 자손을 일명이라함)출신으로 경기도 여주에 살았는데
맹이 남달리 뛰어나고 의지와 기개가 아주 쾌할하였습니다. 전부터 김건순과 생사를 같이 할 만큼
가깝게 사귀어 왔는데 그가 성교회를 믿어 받들자 마르티노도 그를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열심이 불같이 뜨거웠고 항상 눈을 크게 뜨고 대담하게 행동하여 남들이 아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경신년(1800) 부활 축일에는 개를 잡고 술을 빚어 한 마을 교우들과 길가
(두메산골의 작은 길)에 모여 앉아 큰 소리로 부활삼종 기도를 외우고 바가지와 술통을 두드려
장단을 맞추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노래가 끝나면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고 나서는
다시 노래를 부르며 이렇게 날이 저물도록 계속 하였습니다.
註
- 이중배(? - 1801)는 1797년 친구인 김건순으로부터 교리를 배움. 1801년 이종사촌인 원경도
(요 한) 와 함께 정종호의 집에서 부활축일을 지내다 체포. 1801.3.13 참수. 부인 조희는 남편에게
교리를 배운 죄로 울산으로 유배.
- 희낙경(喜樂經) : 부활삼종기도
未幾爲仇家所告 與同敎友十一人 被捕到官 友中亦有弱者 皆賴瑪爾定鼓動勸勉之力
미기위구가소고 여동교우십일인 피포도관 우중역유약자 개뢰마이정고동근면지력
屢經毒刑 一幷堅固 遂拘囚不放 瑪爾定本來畧知醫術 而不甚精工 入獄後 或有問疾者
누경독형 일병견고 수구수불방 마이정본래략지의술 이불심정공 입옥후 혹유문질자
則先求主佑 後施鍼藥 莫不痊愈 從此聲名大播 遠近輻奏 獄門如市
즉선구주우 후시침약 막불전유 종차성명대파 원근폭주 옥문여시
10. 本官不能禁 自己有病 還來問藥 因此獄中 日用不匱
본관불능금 자기유병 환래문약 인차옥중 일용불궤
그러나 그 후 얼마 안되어 그는 원수진 집의 밀고로 열한 명의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어 관청으로
끌려갔습니다. 교우 중에는 마음이 약한 이도 있었지만 그들도 마르티노의 격려와 권면에 힘입어
혹독한 형벌을 여러 차례 겪으면서도 모두 한결같이 굳게 버티어 끝내 석방되지 못하고 갇혀 있게
되었습니다. 마르티노는 본래 의술을 알고 있었으나 그다지 깊이 알지는 못하였습니다. 옥에 갇힌
후 혹 병에 대하여 문의하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주님의 도우심을 구한 다음 침을 놓고 약을
처방하였는데 낫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그의 명성이 크게 퍼져서 멀고 가까운
각처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옥문 밖은 늘 장날 같았습니다. 본관도 이것을 금할 도리가 없었고
자기도 병이 나면 와서 약처방을 얻어 갔습니다. 이 때문에 옥 안에서도 일용 물품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註
- 11명중 2.14일 옥중 대세를 받은 조용삼(베드로)는 杖死, 3.13일 이중배,원경도,최장주 참수,
3.15일 임희영,유한숙,정종호,윤유오(야고보) 참수, 나머지 3명은 불분명.
- 권철신은 그의 손자가 마마(천연두)에 걸리자 마마의인 이중배를 찾아가 치료받음
金健淳嘗言 人或問瑪爾定療病之能 惧名稱之太籍 答以爲十之八九 然其實十之十 百之百
김건순상언 인혹문마이정요병지능 구명칭지태적 답이위십지팔구 연기실십지십 백지백
無一不效 獄吏求見醫方 答日我無方書 只是 恭敬天主 汝欲學醫 亦當信主
무일불효 옥리구견의방 답일아무방서 지시 공경천주 여욕학의 역당신주
吏曰書冊巳盡燒燬 從何而學 瑪爾定笑曰 吾胸中不燬之書 猶足以誨人奉敎
이왈서책사진소훼 종하이학 마이정소왈 오흉중불훼지서 유족이회인봉교
김건순은“사람들이 마르티노에게 병 고치는 능력을 물으면 칭찬이 너무 지나치다고 하지 않을까
두려워서 열 명 중에 여덟 아홉 명은 고친다고 대답 하였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열이면 열,백이면
백,한 사람도 효험을 보지못한 이가 없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 다. 하루는 옥리가 의서를 좀 보자
고 하였으나 그가 대답 하기를 “내게는 의술을 적은 책은 없소. 다만 천주를 공경 할 뿐이오.
당신도 의술을 배우려거든 주님을 믿으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옥리가 “책들은 다 불태워
버렸는데 어찌 배울 수 있단 말이오?"이 하고 다시 묻자 마르티노는 웃으면서 “내 가슴속에 있는
불태워 버리지 못하는책으로 충분히 남들을 가르쳐서 교회를 믿고 행하게 할 수 있소” 하고 대답
하였습니다.
多黙/다묵 = 토마스
若望/약망 = 요한
瑪爾定/마이정 = 마르티노
葛隆巴/갈륭파 = 골롬바
伯多祿/백다록 = 베드로
斯德望/사덕망 = 스테파노
奧斯定/오사정 = 아우구스티노 (정약종)
方濟各沙勿畧/방제각사물략 =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瑪弟亞/마제아 = 마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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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감곡 매괴 성모순례지 성당 원문보기 글쓴이: 윤재/프란치스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