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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재 : <사회주의자> 기자
2014년 ‘# 나는 페미니스트다’ 해시태그 운동, 2015년 메갈리아 커뮤니티의 등장, 2016년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에 대한 추모 흐름, 2018년의 미투 운동과 낙태죄 폐지 운동, 혜화역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 시위… 새롭게 고양된 여성해방운동은 최근 몇 년 동안 우리 사회를 뒤흔들었다. 서점가에서는 페미니즘이나 여성해방 관련 책들이 널리 읽혔다. 여성이 받는 차별을 다룬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베스트셀러가 되고, 영화화되어 많은 화제가 되었다. 2019년에는 형법상 낙태죄가 폐지되고, 성폭력을 저지른 권력자들이 처벌받는 성과가 있었다. 여성들은 차별과 억압에 맞서 싸우며 일상을, 학교를, 일터를 바꾸어냈다.
하지만 지금, 여성해방운동은 예전의 그 활력을 잃어버린 상황이다. 여성을 상대로 한 각종 폭력 사건, 청년 여성들의 자살률 증가 등 여성들을 분노케 하는 일은 끊이지 않고 일어나지만, 언제부턴가 이렇다 할 대중투쟁이 벌어지지 못하고 있다. 활동가들 사이에서는 자본가 정치세력의 ‘백래시’에 대한 비관이 팽배하고, 무엇에 맞서 어떻게 싸워야 할지에 대한 명확한 전망은 제시되지 않고 있다. 이는 답답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지난 2월 12일 한국여성단체연합(이하 ‘여연’), 한국여성민우회(이하 ‘민우회’) 등 여러 여성단체들이 주최한 ‘2022 페미니스트 주권자행동’ 집회는 지금 여성해방운동의 이러한 답답한 분위기를 잘 보여주었다. 집회 참가자들은 대선 국면에서 나오고 있는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 등을 규탄하며 ‘차별과 혐오, 증오선동의 정치를 부수자’라고 외쳤다. 하지만 여성들이 그런 기존 정치세력들과 어떻게 싸울 것이며, 대안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그랬기에 “성평등이 실현되는 정의로운 민주주의를 원한다”, “나는 페미니즘에 투표한다” 같은 선언문의 문구는 공허하고 추상적으로 들렸다. 여성해방운동은 왜 활력을 잃었을까?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페미니즘
2015년경부터 주로 청년들을 중심으로 새롭게 고양되기 시작한 여성해방운동은 여성억압에 대한 수년간 누적된 분노의 폭발이었다. 그런데 당시 기존 여성해방운동의 지배적인 사상이 페미니즘이었기에, 이러한 분노 역시 페미니즘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었다. 이 때 운동에 새롭게 뛰어든 청년 여성들은 여연, 민우회 등을 위시한 기존 페미니즘 운동과 함께하기도 했지만, 그러한 기존 운동과 구별되는 새로운 흐름을 형성하기도 했다. 이 새로운 흐름은 스스로를 ‘래디컬 페미니즘’이라고 칭했다. ‘래디컬 페미니즘’은 여성억압의 원인이 남성 개개인들이며 오직 ‘생물학적 여성’만 여성해방운동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여성 인권이 우선’, ‘여자만 챙기자’라고 주장하며 여성들이 다른 피억압집단과 연대해야 한다는 주장을 거부하였다. 이에 대해 기존 운동은 여성해방운동의 주체를 ‘생물학적 여성’으로 한정해서는 안 되고, 모든 억압은 연결되어 있기에 여성들이 다른 피억압집단과 연대해야 한다고 반박하며 그 과정에서 상호교차성 담론을 거론하기도 하였다. 위 두 입장은 여성해방운동이 고양되기 시작한 이래로 서로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그런데 지금, 페미니즘 내에서 이렇게 서로 대립하던 두 세력 모두 자기 한계를 드러내며 운동의 활력을 잠식하고 있다. 여성해방운동이 활력을 잃은 것은 이 때문이다.
① 여성억압을 근절하려는 절실한 열망에서 출발했으나, 자기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퇴행적 세력이 된 ‘래디컬 페미니즘’
‘래디컬 페미니즘’이 제기한 화두는 간단하면서도 절실하고, 핵심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어떻게 하면 여성들이 지금 당장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었다.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여성이 지금 억압받는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여성들이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답이 이루어져야 했다. 가장 간단하게, 여성이 남성보다 낮은 임금을 받는 등 사회적 생산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는 근본 원인이 무엇인가? 언제부터 남성은 여성에 대해 각종 폭력과 가해를 저질렀는가? 이것은 남성의 본성인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이 이루어져야 했다. 그렇기에 이들에게 여연, 민우회 등을 위시한 기존의 페미니즘 운동은 너무나 불철저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기존 운동은 여성억압의 문제를 철저히 파고들지 않은 채 ‘모든 억압은 연결되어 있다’ 등의 애매한 말을 늘어놓았다. 기존 운동이 말하는 다른 피억압집단과의 연대는 도덕적인 차원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다. ‘래디컬 페미니즘’은 기존 운동의 이러한 애매함, 불철저함에 대한 여성들의 정당한 반감을 일부 반영하고 있었다. 이러한 반감이 ‘여성 인권이 우선’, ‘여자만 챙기자’ 같은 슬로건으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래디컬 페미니즘’은 지금 당장 억압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이를 위해 여성이 억압받는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내어 철저하게 끝까지 싸우고 싶어 하는 많은 청년 여성들의 강력한 열망을 대변하였다. 일상 속 가장 내밀한 영역의 억압에까지 저항하자는 탈코르셋 운동이 적지 않은 여성들의 공감과 동참을 이끌어낸 것, 2018년에 혜화역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 시위에 연인원 35만 명 가량의 여성들이 모일 수 있었던 것, ‘여성의당’이 2020년 총선에서 창당 38일 만에 20여만 표를 얻을 수 있었던 것 등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래디컬 페미니즘’은 핵심적인 질문을 제기했으면서도, 그 질문에 대한 올바른 답은 할 수 없는 사상이라는 태생적인 한계를 갖고 있었다. ‘래디컬 페미니즘’은 여성억압의 원인으로 남성 자체를 지목했다. 이에 따라 여성억압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해결을 추구했다. 그것은 여성 개인들이 남성과의 연애, 결혼과 출산 등을 거부하는 것, 야망을 갖고 출세하여 남성보다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이었다(‘야망 페미니즘’). 가령 래디컬 페미니스트로 잘 알려져 있으며 여성의당 공동대표를 역임하기도 했던 김진아는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에서 여성들이 결혼 대신 재태크, 펀드나 아파트를 선택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하였다. 또한 여성의당은 신라호텔 이부진 등 여성 자본가들에게 노골적으로 후원을 요청하는 선전물을 제작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이런 식의 활동은 미국 등에서 이미 많은 비판을 받은 ‘린-인 페미니즘’, ‘기업 페미니즘’을 답습한 것에 불과하였다. 자본가계급 여성, 소수 엘리트 여성들의 출세에만 도움이 될 뿐 다수의 여성 노동자, 민중이 억압에서 벗어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래디컬 페미니즘’은 남성을 여성억압의 원인으로 지목하면서 협소하게 정의된 ‘생물학적 여성’만이 여성운동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보는 극단적인 정체성 정치의 입장에 섰다. 그러면서 트랜스젠더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자행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혜화역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 시위에 ‘생물학적 여성’이 아닌 트랜스젠더나 남성은 참가할 수 없었다. 또한 이들은 트랜스여성이 여성의 안전을 위협한다고 주장하며, 법적 성별 정정까지 완료하고 숙명여대에 합격한 트랜스여성의 입학을 포기시켰고, 트랜스여성인 고 변희수 하사에 대한 차별과 억압, 각종 혐오 선동에 동조하였다. ‘래디컬 페미니즘’ 출판사로 잘 알려진 ‘열다북스’는 보수 기독교계의 논리와 다르지 않은 논리를 구사하며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제정을 반대하는 데 이르렀다.
결국 ‘래디컬 페미니즘’은 점점 더 자기 한계를 드러내며 여성들의 대안이 될 수 없음을 스스로 드러냈다. 특히 최근 몇 년간 트랜스여성의 숙명여대 입학 포기 사건, 변희수 하사의 죽음 등을 계기로 트랜스젠더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전보다 활발해지면서, 한국 사회 전반의 의식 수준에도 진전이 있었는데, 그 속에서 이들이 퇴행적인 세력이라는 점이 점점 더 명백해졌다. 2020년 이후 이들은 이렇다 할 큰 대중투쟁을 만들어내지 못하였다. 여성의당 역시 2021년 공동대표 중 한 명이 타로 점을 쳐서 당무를 결정하였다는 등의 폭로가 나온 후 동력을 잃었다. 나머지 공동대표들이 모두 사퇴한 상태에서 보궐선거 역시 입후보자가 없어 무산되었으며, 현재 대선후보도 세우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이 ‘래디컬 페미니즘’은 자기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퇴행적 세력이 되었다.
② 자유주의세력과 일체가 되거나, 자유주의세력과 단절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의 한계를 드러낸 기존 페미니즘
아주 오랫동안, 일반 여성들의 입장에서 ‘여성운동’ 하면 떠오르는 것은 여연, 민우회, 한국여성의전화, 한국성폭력상담소 등을 중심으로 한 운동이다. 2015년에 여성해방운동이 고양되고 그 속에서 ‘래디컬 페미니즘’ 흐름이 생겨나면서 기존 페미니즘 세력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여자만 챙기자’는 ‘래디컬 페미니즘’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 청년 여성들은 여연으로 대표되는 기존 페미니즘으로부터 사상적으로, 실천적으로 매우 큰 영향을 받아 왔다.
‘래디컬 페미니즘’이 핵심적인 질문을 제대로 던져 놓고 그에 대한 잘못된 답을 제시했다면, 기존 페미니즘은 그 핵심적인 질문 자체를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기존 페미니즘은 ‘래디컬 페미니즘’의 ‘여성 인권 우선’, ‘여자만 챙기자’ 등의 슬로건에 대해 비판하면서 상호교차성 담론을 거론하고 ‘모든 억압은 연결되어 있다, 다른 피억압집단과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했다. 하지만 이들은 그래서 여성들이 어떻게 하면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인지, 여성억압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그랬기에 이들의 ‘래디컬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은 도덕적, 윤리적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며, 이들이 주장한 상호교차성 담론은 그저 ‘래디컬 페미니즘’이 타당하게 제기한 질문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였다.
나아가, 기존 페미니즘은 그 정치적 내용 자체가 자유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성들의 대안이 될 수 없었다. 기존 페미니즘 진영은 ‘래디컬 페미니즘’과 대비하여 ‘상호교차성 페미니즘’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상호교차성 담론 자체에 큰 한계가 있음은 차치하고서라도, 미국 등지의 여성운동은 상호교차성 담론을 통해 최소한 자유주의 페미니즘과 단절하고 반자본주의 입장으로까지는 나아가는 진전을 이루었던 데 반해, 한국의 여연 등의 기존 페미니즘은 자유주의세력과 이미 일체가 되어버렸거나, 자유주의세력과 단절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 즉 기존 페미니즘의 실제 정치적 내용은 상호교차성에조차 미치지 못하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이다.
기존 페미니즘 세력은 1980년대에는 반독재 민주화투쟁의 일부인 ‘진보적 여성운동’으로 출발하였지만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점차 우경화하였고, 자유주의세력이 집권하면서 본격적으로 자유주의화되었다. 김대중 정권 시기부터 지은희, 한명숙 등 여성운동의 핵심 인물들이 자유주의 정권의 장관으로 대거 입각했고, 여성운동단체들은 자유주의 정권의 협력 파트너가 되어 자유주의 정권이 위탁하는 사업을 처리했다. 이런 모습은 문재인 정권 하에서도 계속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정현백이 여성부 장관에 임명되고 남인순 등이 민주당 국회의원이 되는 등 여성운동과 문재인 정권, 민주당은 인적으로 매우 강하게 결합되었다. 또한 기존 페미니즘은 늘 결정적인 순간에 문재인 자유주의 정권에 힘을 실어 주었다. 어느새 3. 8. 여성의 날에 한국여성대회를 개최할 때 여성가족부의 후원을 받는 것, 관련 활동가들이 정부나 서울시의 성평등, 젠더 문제 관련 위원회에 참여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게 될 정도로 여성운동과 자유주의세력은 일체가 되었다.
이와 같이 기존 페미니즘이 자유주의세력과 일체가 되어있었기에, 기존 페미니즘은 문재인 정권과 함께 위기를 맞고, 스스로의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박원순의 성추행 피소 사실이 다름 아닌 김영순 전 여연 상임대표, 남인순 민주당 의원, 임순영 서울시 젠더특보를 통해 유출되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은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오랫동안 반성폭력 운동을 해오면서 성폭력 피해자 보호라는 기본 원칙을 만든 바로 그 사람들이, 자유주의세력의 이해를 위해서 스스로 만든 원칙을 내팽개친 것이다. 청년 여성들은 이 사건을 통해 기존 페미니즘이 성폭력 피해자의 편이 아니라 자유주의세력의 편에 서 있음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이후 여연은 이 사건에 대하여 김영순 전 여연 상임대표를 해임하고, 혁신안을 발표하였지만, 정작 혁신안에는 피해자가 요구해왔던 남인순 의원에 대한 규탄, 의원직 사퇴 요구는 없었으며, 자유주의세력과의 관계 설정이라는 핵심을 피해가는 미사여구들만 가득하였다. 결국 이로써 기존 페미니즘은 스스로의 한계를 드러냈다.
[사진: 월간중앙]
한편 지난 12월 신지예가 국민의힘 새시대준비위원회 수석부위원장으로 영입된 사건 역시 기존 페미니즘의 상태를 잘 보여준다. 신지예는 2018년 페미니스트 서울시장 녹색당 후보로 출마하여 4위를 한 이래로 청년 여성을 대변하는 정치인이자, ‘래디컬 페미니즘’과 구별되는 상호교차성 페미니스트로 포장되었다. 그와 함께 녹색당 역시 기존 페미니즘 내에서 진보적인 집단인 것처럼 포장되었다. 신지예는 녹색당을 탈당한 이후에도 국민의힘에 영입되기 바로 며칠 전까지 ‘제3지대’를 이야기하며 민주당, 국민의힘 모두 답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였다. 그런 신지예가 수구정당인 국민의힘에 합류하였다는 것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신지예의 국민의힘 영입은 실제 진보가 아님에도 진보로, 실제 상호교차성에조차 미치지 못함에도 상호교차성 페미니스트로 포장되던 세력의 본질을 드러낸 사건일 뿐이었다. 신지예는 처음부터 전혀 진보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자유주의세력이 지방자치단체장들의 성폭력 및 2차 가해 등으로 여성 문제에 있어서 민낯을 드러내고 기존 페미니즘 역시 자유주의세력과 함께 위기를 맞자, 여성들을 위한 다른 진보적인 대안을 찾는 게 아니라 자본가 정치세력의 독점적 정치구조 속에서의 ‘정권교체’와 자신의 정치적 출세를 위한 길만을 모색했다. 바로 그 귀결이 수구정당인 국민의힘에 합류하는 것이었다. 신지예의 국민의힘 영입 역시 이른바 ‘상호교차성 페미니즘’이라 불리는 세력이 실제로는 진보적이지 않으며, 여성들의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잘 보여주었다.
③ 페미니즘이 한계를 드러낸 이유: 여성억압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규명하지 못하는 사상
이렇듯 2015년 이후 페미니즘 내에서 서로 치열하게 대립하는 듯 보이던 ‘래디컬 페미니즘’과 기존 페미니즘 모두가 한계를 드러내며, 여성해방운동의 활력을 잠식하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2015년 이후 여성해방운동을 새롭게 일으킨 여성들은 지금 당장 억압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절실한 열망을 갖고 ‘여성억압의 근본적 원인은 무엇인가? 이를 어떻게 근절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래디컬 페미니즘’도, 기존 페미니즘도 그 질문에 속 시원한 답을 제시하는 데 실패하였다. ‘래디컬 페미니즘’은 ‘개별 남성’이 여성억압의 원인이라는 잘못된 답을 제시하였고, 이 때문에 여러 퇴행적 실천으로 나아갔다. 한편 기존 페미니즘은 상호교차성 담론을 거론하고 ‘모든 억압은 연결되어 있다’ 등의 애매하고 상투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여성억압의 근본 원인이라는 질문 자체를 회피하였다. 더 나아가 자유주의세력과 일체가 되며 자기 바닥을 드러냈다. 두 ‘페미니즘’들은 결국 여성들이 운동 속에서 제기한 핵심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기에, 지금과 같이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래디컬 페미니즘’과 기존 페미니즘 모두 여성억압의 근본 원인에 대한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것은, 애초에 페미니즘 자체가 여성억압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규명할 수 없는 사상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남성에 의한 여성억압이 다른 모든 억압에 앞선 사회의 근본 모순이라 보고, 이 관점에서 사회를 본다. 그리고 여성과 남성의 관계를 고정불변한 것으로 보고, 여성억압이 시대와 사회를 초월하여 늘 존재한다고 본다. ‘가부장제’ 개념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페미니즘은 어떻게 해서 평등하던 여남 관계가 변화하고 여성억압이 출현하였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여성억압이 출현한 원인을 설명할 수 없기에 여성억압을 없앨 수 있는 전망도 제시하지 못한다. 즉 페미니즘은 현존하는 여성억압에 대하여 규탄할 뿐 여성억압의 이전도, 이후도 상상하지 못하는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페미니즘 운동에 열정적으로 헌신하던 활동가들은 시간이 갈수록 매일매일 새롭게 터지는 개별 사건에 대응하느라 ‘번아웃’을 겪고, 열심히 싸웠지만 어느 순간 결국 쳇바퀴 돌 듯 같은 지점에 다시 돌아와 있다는 답답한 느낌을 받아 왔다. 여성들은 페미니즘 운동 속에서 개별 남성 가해자들을 처벌하는 것 이외에, 무엇과 어떻게 싸워야 여성억압을 완전히 근절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전망을 발견할 수 없었다. 페미니즘이라는 틀은 어느 순간부터 여성해방운동이 발전해야 할 때 발전을 하기 어렵게 만드는 질곡이 되었다. 여성해방운동이 활력을 잃어간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제 사회주의 여성해방운동이 필요하다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페미니즘과 여성해방을 동의어로 생각하고, 페미니즘이 아닌 여성해방운동을 상상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하지만 기존의 익숙한 틀이 여성해방운동의 발전을 촉진하는 것이 아니라 어렵게 만들고 있다면, 여성해방운동의 발전을 위해서는 그 틀을 깨야만 한다. 우리는 2015년부터 페미니즘 운동이라는 형태로 새롭게 고양되어 온 여성해방운동이 어느 순간부터 페미니즘이라는 사상에 의해 발전이 가로막히는 것을 직접 보고 있다. 페미니즘은 2015년부터 여성해방운동의 새로운 물결을 만들어온 여성들이 던진 절박한 질문, 여성억압의 근본 원인과 여성해방이라는 질문에 답하는 데 실패했음이 확인되었다.
이제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페미니즘이라는 틀을 깨고, 페미니즘이 아닌 다른 사상에 입각한 여성해방운동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여성억압의 이전과 이후를 그릴 수 있게 하는 운동, 여성억압의 근본 원인을 과학적으로 규명하고 여성해방의 전망을 제시할 수 있는 운동, 무엇보다 여성들이 제기하였던 절박한 질문에 제대로 답할 수 있는 운동이 필요하다. 이제 페미니즘이 아닌 사회주의 여성해방운동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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