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HXideG0KGww 이승만사주풀이
제5편 고금 유명인 명조
1. 대통령직에서 두번 쫓겨난 이승만(1875~1965)
庚辛壬癸甲乙丙丁戊 7운
午未申酉戌亥子丑寅
庚丁己乙 남 2
子亥卯亥
丁화가 묘월에 태어나 편인은 억제할 흉성이며, 해묘합목으로 왕강하고 丁화는 목왕하면 불이 꺼지니 庚금으로 벽갑을 요하므로 경금을 상신한다. 즉 살중용인격으로 일간이 득령하고 亥卯반합하여 인성이 강해진 사주이므로 庚金재성을 상신으로 하여 다시 인중용재격을 이룬다.
따라서 시간의 庚金이 격을 이루는 상신인데 子水 위에 있어 庚金의 뿌리가 약하다. 만일 庚金이 투하지 못했다면 격을 이루지 못하니 평범한 명으로 본다.
庚금이 무근하여 무력하며, 癸甲乙丙丁운에 극설이 교가하여 뜻을 얻지 못하고 酉운은 평안하나 월건이 묘유충으로 효력이 약화된다.
申운에는 상신이 록을 얻으며 74세 戊子년은 무토가 생금하여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庚子년은 만 85세로 未운에 목강금약인데 子년은 경금이 경자-사지가 되어 하야했다.
庚子년 3월15일에 부정선거를 치렀는데 이를 안 마산 시민들이 들고 일어났고, 곧이어 4월19일에는 혁명이 터졌기 때문이다.
91세 乙巳년은 庚午대운에 경금이 경오-욕지요 을경이 합거되니 거세했다. 본명은 용신이 시지에 경자-사지로 앉고 일간과 정자-절지라 후사가 없다.
일지와 년지에 천을귀인의 해수(亥水)를 만나고, 정해(丁亥)일주 자체가 간지암합(干支暗合)을 하면서 월지와 해묘(亥卯)합으로 관인상생을 이루니 건왕에 가깝다. 지지로는 관살혼잡에 수왕함이 병이라 수를 억제하는 조토와 생조하는 화를 기뻐한다.
그러므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독립협회에 헌신하며 행동대장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그의 과격한 행보가 탄압의 빌미를 주어 31세 되는 1905년 子대운 乙巳년에는 미국에 건너갔다.
45세인 1919년 亥대운 己未년에는 해방된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 되어 외교에 노력을 기울였으나 독단적인 성격이 적을 만들어 성과는 없었다. 51세인 1925년 戌대운 乙丑년에는 축술형으로 편인격인 乙목이 묘술합과 을술-묘지가 되므로 탄핵을 당해 대통령 자리를 잃었다.
이승만 독재정권 시절의 사회 분위기는 매우 엄했다.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낸 조봉암(1899~1959)은 평화통일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간첩으로 몰려 사형을 당했다.
조봉암이 이승만 정권의 표적이 된 건 농지개혁 때문이다. 그는 농림부 장관이 되자 농지개혁에 전력을 쏟았다. 그는 농사 짓는 사람이 토지를 소유하는 사회가 실현돼야 한다는 신념의 발로였다. 그의 노력에 힘입어 농사 짓지 않는 자가 소유한 농지를 땅 없는 농민에게 유상분배하는 농지개혁법이 제정됐다.
그로 인해 조봉암은 지주들의 정당인 한국민주당의 정치공작으로 공금 유용 누명을 쓰고 취임 6개월 만에 농림부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이승만 정권은 거기에 머물지 않고 농지개혁 등 활발한 민생정치 활동으로 신뢰를 얻은 조봉암이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200여만 표를 획득하면서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자 진보당 사건을 일으켜 죽여버렸다.
조봉암은 억울하게 숨졌지만, 그가 뿌린 씨앗은 엄청난 결실을 낳았다. 1945년 말 우리나라 전체 경지 면적의 35%에 불과했던 자작농지가 농지개혁 직후인 1951년 말에는 96%로 치솟았다. 수천 년 우리 역사 내내 민중들이 염원했던 경자유전 혁명이었다.
그러나 농지제도 사후관리의 미비로 농지개혁 이전 상태로 차츰 되돌아 갔고 전 국토의 대부분이 부동산 부자의 수중에 들어가버렸고 그들은 불로소득을 얻었다.
사실 토지는 사유물이 아니라 햇볕처럼 천연의 공공자산이기 때문에 그것에 투자하고 커다란 부를 얻는다면 서민들은 점점 설 자리를 잃게 된다.농지개혁 70주년을 맞은 오늘 조봉암씨가 이루고자 했던 토지개혁에 대한 염원이 간절해지는 시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