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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04
열아홉에서 스무 살로,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으로 바뀐 것 뿐 인데 시야에 비춰지는 세상이 달라보였다. 진짜 어른으로 살아가는 인생은 내 뒤통수를 치듯 훨씬 더 어렵고 복잡했다.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으려 열심히 살아온 탓에 원하는 대학, 원하는 과에 들어갔지만 과 특성상 여자들이 많아 이리 저리 곤란해야할 일들이 생겨났고 여자들끼리의 팽팽한 기싸움은 나를 더 숨 막히게 만들었다. 어차피 다 거기서 거기인 인간들인데. 자기들끼리 서로 더 잘났다고 나서는 모양새가 꼴 같지 않은 순간도 더러 찾아왔다. 학기 초부터 몇 안 되는 남자 동기와 남자 선배들은 가장 예쁘장하고 가장 접근하기 쉬워 보이는 여자애들을 골라 추파를 던져대기 바빴다.
왜 하는지 모를 신입생 환영회. 내가 이 자리에 왜 앉아있어야 하는 것 인지. 어제까지만 해도 다이어트가 힘들다느니, 밥을 굶는다느니 했던 여자 선배들은 맥주잔에 소주와 맥주를 호기롭게 말아 꼴깍꼴깍 잘도 마시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하하 호호 웃음소리가 들리고 수많은 여자들과 몇 안 되는 남자들 사이에서도 모락모락 애정의 기운마저 피어났다.
대학이란 정말 신기한 곳이었다. 여태까지 이런 이상한 인간들이 어디에 있다가 방생된걸까 싶을 정도로 온갖 이상한 인간들의 집합소였다. 물론 남의 눈에 비춰지는 나 또한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한 잔 받아 수현아.”
“아, 네 선배님 감사합니다.”
유난히 내게 추근덕 거리는 남자 선배가 소주병을 들고 내 옆자리에 앉았다. 동기가 화장실에 간 그 사이를 어떻게 알고 내 옆자리에 앉아버린 것 인지. 속으로는 짜증이 치밀어올랐지만 최대한 상냥하게 웃어보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나쁘게 보여서 좋을 게 없으니까.
“대학생활 적응은 잘 돼? 힘든 건 없구?”
‘지금 당신이 이러는게 힘들게 하는거에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또 최대한 상냥하게 웃어보이며 아직은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힘든게 있으면 이야기 해보라며 뭐든 도와줄 수 있다며 허풍을 떠는 꼴이 우스웠다. 적어도 내 앞에 앉은 남자선배보다야 내가 훨씬 더 영리하고 영악할 것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너나 할 것 없이 술잔을 부딪히고 웃고, 떠들고, 이런 광경이 너무 피곤했다. 빨리 집에 가서 쉬고싶은데 어떻게 빠져나갈 방법이 없을까.
이 자리를 어떻게든 빠져나갈 궁리를 하고 있을 때 가방 속 휴대폰이 소리를 냈다. 열이었다. 친구들이 집에 왔다고 했다. 분명 그 애도 있겠지.
“수현아.”
열이의 문자에 답장을 하려 할 때 눈치없는 남자 선배는 내 이름을 불렀다. 그 쪽 부르라고 우리 엄마가 지어준 이름이 아닐텐데, 자꾸만 끈적한 눈빛을 보내며 내 이름을 불러대는게 무척이나 부담스러웠다.
“네 선배님.”
“그냥 편하게 오빠라고 불러. 괜찮아 우리 둘이 얘기할 땐.”
하마터면 피식 웃음이 새어나올 뻔 했다. 오빠라고 부르라니. 오빠 소리를 듣고 싶은 건 젊은 남자나 늙은 남자나 다 똑같다던 엄마의 말이 떠올랐다. 오빠라니.
“아니에요, 선배님. 조금 더 친해지면 할게요.”
나쁘게 보여서 좋을게 없다는 말을 속으로 수십번 되뇌였다.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 괜찮은 사람으로 비춰지는 것. 평범한 무리 속에 평범하게 섞여 살아가는 것. 그것이 내 인생 목표라면 목표였다. 이 남자선배가 너무 부담스럽고 싫지만 너무 거절의 뜻을 내비추면 어떤 식으로 소문을 만들어낼지 모를 일이었다. 원래 사람은 남얘기를 할 때 제일 적극적으로 돌변하고는 하니까.
“수현이 너는, 남자친구 있어?”
결국 이거구나. 일주일 넘도록 내게 시선이 끊이질 않았던 이유, 지금 내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끈적한 시선을 자꾸만 보내는 이유. 역시 똑같다.
“네. 있어요.”
“아, 그래? 벌써 씨씨는 아니지?”
“네. 고등학교 때부터 사귄 남자친구에요.”
“그렇구나….”
뒷머리를 긁적이며 아쉬운 티를 팍팍 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남자보다 옥탑방 안에서 있을 열이가 더 신경 쓰였다. 문자 내용은 친구들이 놀러와서 술을 마실거라는 이야기였는데, 그렇다면 분명 그 애도 있을 것이다. 내가 신경 쓰는 그 애. 열이를 생각하다보니 아까보다 더 이 자리를 빨리 뜨고싶다는 욕구가 강해졌다. 한참을 머리를 굴리던 나는 옆에 앉은 남자선배의 팔목을 살짝 터치하며 웃어보였다.
“저기, 선배. 아니, 오빠 저 몸이 너무 안 좋은데 혹시 먼저 가봐도 될까요?”
“아, 그래? 몸이 안 좋으면 가야지. 내가 다른 애들한테는 잘 말해줄게.”
역시나 단순했다. 방금 전 내가 남자친구 있다는 대답을 할 때 까지만 해도 똥 씹은 얼굴이던 표정이 단 한 번의 터치와 오빠 소리에 금세 다시 화색이 돌았다. 서둘러 가방을 챙기고 열이가 둘러준 목도리를 둘렀다. 누가 볼까 싶어 조심 조심 걸어가 술집을 나섰다. 바깥 공기는 뺨이 얼얼하도록 차가웠지만, 술집 안에 있는 것 보다는 훨씬 좋았다.
차가운 공기에 입김을 뱉으며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어쩔 수 없이 받아 마신 소주 3잔 탓인지, 오늘 하루 피곤했던 탓 인지 졸음이 살짝 몰려왔다. 금요일 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지하철에서 콩나물마냥 머리만 위로 빼꼼 내놓은 채 멍하니 창 밖만 바라보았다. 집으로 갈까, 열이에게 갈까. 그렇게 열두번 정도를 고민한 끝에 나는 열이에게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신경쓰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신경이 쓰이니까. 차라리 나도 그 자리에 같이 있는게 나으니까.
지하철역을 나서 열이의 옥탑쪽으로 걸어가면서 생각했다. 걔가 왔을까. 왔겠지. 머릿속으로는 그 애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도 내 발걸음은 슈퍼로 향했다. 열이가 늘 마시는 초코우유 5개를 집어들어 계산대에 올려두었다. 저번에 열어본 열이의 냉장고 안에 초코우유가 몇 개 보이지 않던 것이 생각나서였다.
초코우유가 든 검은 비닐봉지를 달랑 거리며 열이의 옥탑으로 향하는 길 달빛이 밝았다. 열이가 좋아할만한 밤이었다. 달에 사는 토끼가 훤하게 보일만큼 달이 환하게 빛나고 있는 밤.
옥탑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가는데 벌써부터 깔깔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깔깔 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역시 그 애도 왔구나. 현관 문 앞에 서니 문을 여는 것이 망설여졌다. 평소 같았으면 아무 생각없이 벌컥 열었을 문인데도 이상하게 저 안에 나와 열이가 아닌 다른 사람들도 있다고 생각하니 문을 열기가 쉽지 않았다.
“어? 수현아.”
벌컥 열고 들어간 문 앞에는 주방에서 계란후라이를 하고 있는 열이가 서 있었다. 한 손에는 뒤집개를 들고서 동그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왔어? 오늘 신입생 환영회라고 했잖아.”
“그냥 재미없어서 빠져나왔어.”
“잘했어.”
열이는 계란후라이를 접시에 담고는 주방 커튼을 젖히며 친구들에게 내가 왔음을 알렸다. 그 애와 눈이 마주쳤다. 최 성의. 열이와는 중학교 때부터 친구인 아이. 어쩌면 나보다 열이를 더 잘 아는 아이. 그래서 자꾸 신경이 쓰이는 애.
“이거 뭐야?”
내 손에 들린 검은 비닐 봉지를 열이가 낚아챘다. 안에 든 초코우유를 본 열이가 헤벌쭉 웃음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열이의 책상 위에 놓인 5개의 초코우유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한 열 초코우유 부자 됐네. 나도 사다주고 수현이도 사다주고.”
성의가 웃으며 말했다. 나도 웃어보였다. 그러게, 열이는 좋겠네. 졸지에 초코우유가 열 개 생긴 열이는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나는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같이 맥주 마시자.”
열이의 친구들은 나와 늘 어울리고 싶어했다. 나보다 열이를 더 오래본 아이들이기에 열이의 여자친구인 나와도 친해지고 싶은 모양이었다. 특히 성의가, 나와 유독 친해지고 싶어했지만 나는 유독 성의와는 친해지고 싶지 않았다.
“아니야. 나 신입생 환영회에서 술 마시고 온거라. 너희끼리 놀아 나는 괜찮아.”
아까 남자선배에게 지어보였던 천사같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나는 손사레를 쳤다. 맥주캔을 내게 내밀었던 손이 민망했던지 성의는 괜스레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책상 위에 나란히 나열된 열 개의 초코우유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필이면 왜 브랜드도 똑같은건지. 이런 마음은 정말 유치하고 어린애 같다는 걸 알지만 심술이 났다. 하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유치하게 질투나 하는 여자친구가 되고싶진 않았으니까.
열이는 들떠있었다. 오랜만에 놀러온 친구들과의 술자리 때문인지, 초코우유가 열 개나 공짜로 생겼기 때문인지 생글생글 웃으며 맥주를 홀짝였다. 왁자지껄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에 방 안이 울렸다. 열이는 그저 친구들의 말에 따라 웃으며 어깨를 들썩였고 분위기를 주도하며 말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은 성의였다. 남자 네 명에 여자 한 명. 내가 없었더라면 이 옥탑 안에 유일한 홍일점이었겠지. 아니 어쩌면 나는 이 공간에 없는 셈 쳐야할지도 모르겠다. 즐겁게 웃고 떠드는 저 애들은 이미 침대 위에 자리잡은 내 존재를 의식조차 안하고 있는 듯 했으니.
정말 유치한 감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성의가 자꾸 얄밉게만 보였다. 시원시원한 성격에 남자인 친구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성격. 어쩌면 내겐 없는 성격이었다. 나는 스스럼없다기 보다는 조심스럽고 예민하고, 잘 어울리는 성격보다는 내숭을 잘 떠는 성격에 가까우니까.
갖가지 욕설을 섞어가며 중간 중간 음담패설도 살짝 해가면서 남자인 친구들 사이에 분위기를 주도하는 성의는 나와는 전혀 다른 부류의 여자다. 그래서 신경이 쓰인다. 아무리 열이가 특별한 애라고 해도 또 다른 매력에 끌릴 수도 있는 거고, 사람은 오래 된 것에 약해지는 법이니까.
중학교 시절, 보통의 남자아이들처럼 축구를 하거나 나가놀지 않고 여자에 관심도 두지 않는 열이를 따돌리려던 아이들이 있었다고 했다. 그 때 그 아이들 앞에 나서서 열이 편을 들어주던 사람이 성의였다고 했다. 그렇게 둘은 친구가 됐고, 원래 남자인 친구가 많던 성의는 자기 친구들을 열이에게 소개해주며 원래 친구가 많지 않던 열이에게 친구를 만들어줬다.
내가 앉아있는 침대와 아이들이 앉아있는 바닥이 마치 다른 세상인 것처럼, 심지어 열이 조차 나를 잊은 듯 했다. 내가 같이 안 어울린거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나는 어쩔 수 없이 유치한 인간이었다. 남자친구의 여자인 친구를 신경쓰고 질투하는 아주 통속적이고 유치한 인간이었다.
“수현아!”
거의 한 시간 만에야 열이가 나를 불렀다. 아주 상기되고 해맑은 목소리와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한 시간 만에 나를 본 열이가 반가워 나도 모르게 싱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우리 달 보러 나갈까? 오늘 달 되게 밝다!”
“으이구, 또 달 타령이냐. 으이구 으이구.”
열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성의가 손을 뻗어 열이의 머리카락을 헝크렀다. 순간 마음 깊숙한 곳에서 뜨거운 불덩이 같은 것이 치솟는 것만 같았다. 머리카락이 엉망이 된 채 뭐가 좋다고 실실 웃는지. 열이는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나는 열이의 손을 뿌리쳤다.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짜증이었다. 성의의 행동 때문에, 그리고 너무 아무 생각 없는 열이 때문에. 한 시간 만에 나를 보고 한다는 소리가 밖에 달이 밝다는 얘기라는 게 순간적으로 짜증이 나서 나도 모르게 열이에게 짜증을 냈다. 갑자기 무슨 달이냐고. 내 짜증에 옥탑 안은 찬물을 끼얹은 듯 분위기가 싸해졌다. 성의는 묘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있었다. 재수가 없어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수현아 왜 그래.”
“아, 미안, 내가 좀 피곤한가봐. 나 때문에 분위기 이상해졌네. 미안 얘들아.”
상처 입은 강아지 같은 표정을 하고서 나를 올려다보는 열이의 시선을 회피한 채 당황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열이의 친구들에게 사과를 했다. 그리고 여전히 묘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는 성의에게는 일부러 더 환하고 천사같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신입생 환영회 가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아니야, 정말 피곤해서 그래. 정말이야.”
열이는 상처입은 표정을 금세 감추고는 나를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나 때문에 가라앉은 분위기를 성의는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활기차게 만들었다. 달빛이 환하게 스며드는 창을 뒤로 한 채 토끼 인형을 만졌다가, 책상 위에 놓인 열이의 원고 끝을 만지작거리기를 반복했다. 성의가 다시 띄워놓은 분위기에 휩쓸려 열이를 포함한 세 명의 남자들은 모두들 즐거워했다.
나에게는 없는 모습. 분위기를 이끌고 스스럼없이 웃고, 떠들고, 내가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절대로 가질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더 껄끄럽고 그래서 더 싫었다.
그렇게 아이들은 한 시간 가량을 더 웃고 떠들다가 이제 피곤해서 노는 것도 못하겠다며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갔다. 마지막으로 성의만이 홀로 남아 먹고 마신 것들을 치우고 있었다. 내 눈 앞에서 열이와 성의 두 사람은 농담을 주고 받으며 상을 치우고 있었다. 일어나서 같이 치울까, 아니면 내가 치워줄테니 먼저 가보라고 할까 고민하는 사이에 이미 상은 치워지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성의는 겉 옷을 주워입고 있었다.
“이제 가야겠다. 나 이제 갈게 열아, 수현아 다음에는 꼭 맥주 한 잔 같이 하자.”
“응 그래. 조심히 가 봐.”
미소를 지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열이는 성의를 밑까지만 데려다주고 오겠다며 패딩을 걸쳐입고 성의를 따라 집을 나섰다. 나만 빼고 모두가 빠져나간 옥탑 안은 기분 나쁠만큼 훈훈했다. 손을 뻗어 보일러 온도를 낮췄다. 책상 위에 놓인 초코우유 열 개가 눈에 띄었다. 정말로 유치하지만 책상 앞으로 걸어가 내가 사온 다섯 개를 품 안에 안아들고 냉장고로 향했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이지 유치한 행동이었다.
냉장고에 초코우유를 나란히 줄 세우고 있을 때 열이가 현관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열이에게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냉장고 안을 응시했다.
“아이구, 춥다---.”
차가운 냉기를 가득 묻히고 와서 나를 끌어안았다. 순간적으로 또 울컥 짜증이 올라왔다. 왜 이렇게 짜증이 나는 것 인지. 그 이유를 알았지만 모르고 싶었다. 그건 정말 너무 유치하니까.
허리에 둘러진 열이의 팔을 떼어내고 커튼을 젖히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강아지마냥 내 뒤를 쫄래쫄래 쫓아들어온 열이는 동그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왜 그렇게 화가 난거야?”
“화 안났어.”
“그럼 왜 그렇게 심통이 났어?”
“아니라니까?”
맞다. 다 맞다. 짜증이 난 것도, 심통이 난 것도. 다 맞다. 괜스레 마음을 들키기 싫어 자꾸 나와 눈을 맞추려는 열이를 앞에 둔 채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항상 아이처럼 순수한 열이의 모습이 좋았지만, 이런 순간엔 어쩐지 나를 약올리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보통의 남자라면 진즉에 내 기분을 알아차렸을텐데, 내 남자친구는 너무 특별한 한 열이라서 그래서 내 마음을 몰라주는 것 같았다. 아니, 사실은 몰랐으면 하는 마음 반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 반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인 인간이다. 정말 이기적이다 모 수현.
“이건 왜 냉장고에 안 넣어놨어?”
책상 위에 놓여진 다섯 개의 초코우유를 바라보며 열이가 말했다. 대답하기 싫었다. 잘못한 일을 들킨 것처럼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래서 더 입을 꾹 다물었다. 초코우유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대답을 기다리던 열이는 내 앞에 쭈그려 앉아 나와 시선을 맞췄다.
“기분 안 좋은 거 맞는 거 같은데.”
“아니야 그런 거.”
“그럼 진짜 환영회에서 아무 일 없었어? 안 좋은 일 있었던 거 아니야? 막 싫은 사람이 가까이 왔다거나, 아니면….”
“아니라니까? 니가 뭘 알아.”
아니다, 이게 아니다. 괜한 심술이 마음을 모나게 만들어 열이에게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안 그래도 대학을 다니는 나에게 매일 대학생활은 어떠나며 궁금함을 내비추던 열이었다. 본인이 하고자 하는 일을 위해서 대학 진학을 하지 않는 것을 스스로 결정했지만, 그 결정에 조금도 후회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열이는 궁금해 했다.
열이에게 상처가 될만한 말을 내뱉고도 이기적이고 못난 나는 오히려 화난 표정을 지어보였다. 더 이상 한 공간 안에 열이와 둘이 있다가는 더 유치해질 것만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데 왜 자꾸 캐물어.”
“난 네 기분이 항상 제일 중요해. 그런 네가 나한테 화난 것처럼 행동하고 있고, 그래서 네가 뭐가 마음에 안 드는건지 궁금한건데. 내가 잘못한거야?”
잔뜩 상처받은 눈을 하고서 열이는 또박또박 조리있는 말로 나를 할 말 없게 만들었다. 필력은 훌륭한 열이었지만 평소 말하는 것에서는 허당끼가 가득했다. 하지만 이렇게 진지해지는 순간이면 열이는 나보다 침착했고 조리있게 대화를 유도했다. 덕분에 나는 자괴감이 들었다. 못된 말은 내가 다 해놓고서 열이 앞에서 오히려 더 화를 내고 있는 나는, 이렇게 이기적이고 모난 인간이었다.
“너 혹시 성의 때문에 그래?”
콕—하고 정곡이 찔렸다. 열이는 늘 이런 식이다. 허당처럼 눈치 없이 천방지축 굴다가도 내가 가장 들키기 싫어하는 감정을 잡아낸다. 나는 이런 순간이 너무 싫다. 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내 진심을 들켜버리고야 마는 순간.
더 이상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너무도 불편했다. 나는 집으로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를 챙겨들었다. 열이는 내 손목을 잡아채며 평소엔 잘 보여주지 않는 단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처음 다투는 것은 아니었지만 열이는 다툴 때 마다 늘 이런 식이었다. 이야기를 다 끝내야만 나를 놓아주었다. 하지만 난 늘 다툼이 일어날 때면 그 자리를 피하기에 급급했다.
“얘기 다 안 끝났잖아. 이런 식으로 피하려고 하지마. 나 피하는 거 싫어.”
열이는 내 두 팔목을 살며시 잡아쥐고 나를 침대에 앉혔다. 그리고 나와 눈을 맞췄다. 가슴이 뛰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가 입 밖에 꺼내지 않은 감정을 들키는 순간이 너무나도 곤욕스럽다. 그리고 꼭 이런 순간은 열이와 함께 있을 때 일어난다. 아마도 그건 열이가 내 속마음을 가장 잘 들여다보는 사람이라는 뜻일테지.
열이의 말이 다 맞다. 최 성의, 나는 그 아이가 신경 쓰인다. 처음부터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하지만 나는 그 애 앞에서 항상 미소를 지었고 단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한 적이 없었다. 늘 상냥했고 늘 친절했고 늘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애가 거슬린다. 그 애가 거슬릴수록 나는 더 미소를 지어보인다. 난 그런 사람이니까.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든, 싫어하는 사람이든. 어떤 사람앞에서도 나는 늘 좋은 사람이고 싶고 그렇게 살아왔다. 누구에게나 항상 웃어주는 사람, 뭐든지 열심히 하는 사람. 뒤에서 내가 짓는 표정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성의가 신경 쓰이면 그렇다고 얘기하면 되잖아. 수현이 넌 내 여자친구니까 충분히 그래도 돼. 그럴 자격 충분히 있어. 근데 왜 표현하지 않는건지 모르겠어. 난 차라리 수현이 네가 성의 앞에서 싫은 티도 내고 그랬으면 좋겠어. 보통 사람은 다 그렇잖아.”
차분히 이야기를 해나가는 열이 앞에서 나는 더욱 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도 열이는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눈을 맞추며, 내 손등을 쓸며 가만히 기다려 줄 뿐 이었다.
열이에게 사사건건 친구관계까지 관여하는 여자친구가 되고싶지 않았고, 그 아이에게 남자친구의 여자 사람 친구를 질투하고 의식하는 그저 그런, 그렇고 그런 사람으로 비춰지고 싶지 않았다. 열이가 말하는 사랑의 범주 안에는 오롯이 나 뿐 이라는 것을, 나는 매일 매 순간을 느끼고 있었지만, 내가 가지지 못한 성격과 내가 가지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는 그 애가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네 친구관계까지 해치고 싶지 않아. 그건 나랑 안 맞아. 그리고 나는 사람 사이에 트러블 나는게 제일 싫어. 나한테 그게 최악의 스트레스야. 그래서 나는 가능하다면 모든 사람에게 보통으로 착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넌 이해 못하겠지.”
솔직한 속마음을 입 밖으로 내뱉는 건 정말이지 어렵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가슴 속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솟구치듯,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머리를 처박고 눈을 꼭 감고만 싶었다.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열이가 나를 품 안에 끌어안았다. 참고있던 마음을 쏟아내듯 뜨거운 숨을 토해내며 못 이기는 척 열이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나한텐, 제일 소중한 친구도 제일 재미있는 친구도, 다 너야 수현아. 난 너만 있으면 돼. 너만 있으면, 성의도 다른 애들도 다 별로 필요없어. 그러니까 네가 싫은 거 네가 불편한 것들, 다 솔직하게 말해줘. 난 네가 그랬으면 좋겠어. 그렇게 혼자 담고있으면 계속 계속 힘들다가 결국 무너지잖아.”
딱히 힘들다고 생각했던 적이 없었지만, 내 인생이 늘 피곤했던 것 같다. 늘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여야 하는 건 아주 피곤한 일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난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 수 없겠지. 나는 이제 그런 사람이 되어버렸으니까.
열이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가만히 숨을 쉬었다. 오늘의 싸움도 이렇게 맹물처럼 끝이 나는구나. 어떤 일로 다툼이 일어나든 항상 뭐든지 이해하는 쪽은 열이, 상처주고 모나게 구는 쪽은 나.
내가 보통 사람처럼 징징대고 화를 냈다면, 왜 여자인 친구를 집에 들여 노는거냐며 길길이 날뛰고 소리쳤다면, 열이가 보통의 남자처럼 핏대를 세우고 변명하기에 급급했다면 나에게 소리치며 이기려고 들었다면 아마 지금쯤 우리는 한 뼘 쯤 더 멀어졌겠지.
한참을 열이의 품에 안긴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미안하다, 고맙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 내게는 제일 어려웠다. 그냥 내뱉으면 그만인데, 그 말들이 목구멍 안쪽에 걸려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말할 수 있을 때 말해야 후회에 몸서리치는 훗날이 오지 읺는 것 인데. 나는 아직 그걸 알기에 미숙하고 어리석었다.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 대신, 앞으로 안 그러겠다는 지킬 수도 없는 약속 대신 나는 열이의 팔을 잡아끌며 말했다.
“달 보러 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