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밤 열시 반에 암리차르에 도착을 해서 다시 전용버스를 타고 숙소까지 가서 방을 배정
받으니 11시가 넘었다.
저녁을 준비해서 먹고 샤워를 하고 나기 열두시가 넘었다.
가이드는 내일 아침 5시경에 황금사원을 가 보라고 하는데 황금사원은 밤에 보지 않으면 안된다.
밤에는 사원 전체에 조명을 켜기 때문에 황금사원이 황금색으로 찬란하게 빛나지만 낮에는 조명이
없기 때문에 그냥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것을 알기 때문에 3시에 일어나서 그래서 룸메이트와 같이 호텔 밖에서 30여분을 릭샤를 기다려서
사원에 도착하니 네 시가 넘었다.
여름이기 때문에 새벽도 빨리 오고 새벽이 오면 조명이 빛을 잃기도 하고 5시 반 정도에 조명을
끄기 때문에 잠자는 것을 포기하고 서둘렀던 것이다.
숙소로 가기 위해서 버스에 짐을 싣고...
우리가 묵었던 숙소...이번 여행 중에서 가장 열악한 숙소 중의 하나이다.
암리챠르를 들어가는 입구...별천지에 들어가는 느낌이다.
삼삼오오 황금사원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우리가 암리차르로 가는 것은 파키스탄 쪽의 라호르로 가기 위해서이고 또 암리차르에는 시크교
사원(寺院)으로 유명한 황금사원이 있기 때문이다.
암리차르(Amritsar)는 파키스탄의 라호르에서 동쪽으로 32km 뉴델리에서는 북쪽으로 500여km에
있는 펀잡주에 있는 인도의 변방의 소도시이다.
이곳에 황금사원(하르만디르 샤히브)이 지어지기 전에는 1919년 영국의 식민통치에 반대하는
시위대를 무력으로 학살 사건이 일어난 곳으로 밖에 알려진 것 밖에 없으나, 지금은 인도를 오는
사람이라면 들러보고 가야 할 곳으로 아주 유명한 곳이다.
이 건물이 휘황찬란한 황금색으로 빛나는 것을 보러 오는데 이 건물은 시크교의 본산(本山)으로
시크교의 성지이다.
그러므로 시크교에 대해서 알지 못하면 ‘건물이 아름답기는 한데 어마어마하게 처발라서 건물을
지어 놓았구나’ 정도의 감상으로 끝나게 된다.
여행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자신이 가고자 하는 지역의 종교를 알고 가야하는데 우리가
보는 그 지역의 건물이나 사람들의 삶은 그들이 믿고 있는 종교와 모든 것이 연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행을 하는 사람들은 제일 먼저 지구상에 존재하면서 인류에게 영향을 미쳤던 종교에
대해서 기본적인 상식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건물만 보고 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바깥 광장으로 좌측에 신발을 맡기는 곳이 있고 광장에서부터 신발을 벗게 된다.
사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신발을 맡기는데서 신발을 맡기고 머리에는 반드시 수건 같은 것을 써야 한다.
그리고 사원으로 들어가기 전에 발을 씻고 들어가게 된다.
사원으로 들어가면 휘황찬란한 광경에 일단 놀라게 된다. 그리고 사원을 메우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이곳도 시크교의 본산이기 때문에 전 세계의 시크교도들이 성지 순례를 오는 곳이니 사람들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들어가는 문과 바깥 광장에서 잠을 자는 교인들
자원봉사자들이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안내를 맞는다.
대부분이 가족단위로 보여 있고...
정문으로 들어가면 하리 만디르 사힙(Hari Mandir Sahib)이라는 황금사원이 정면에 나타난다.400키로의 금이 입혀져 있다고...
관측탑과 방문객들에게 식사와 음료를제공하는 구루 카 랑가르
신성한 나무(Ancient Ber Tree) 시크교에서 신성시하는 수백 년 된 대추 나무로 사원 안에 총 세
그루가 심어져 있는 중 한그루다.
이 연못은 암릿 사로바르(Amrit Sarovar)라는 곳으로 사원 중심에 있는 성스러운 연못. 암리차르라는 도시 이름이 이 연못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보내 줄 수도 없는데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하는 젊은이들
구루 카 랑가르가 몇 군데 있다.
아깔 타캇 사힙(Akal Takhat Sahib)..시크교 최고 의회인 SGPC(Shiromani Gurdwara Parbandhak Committee)
회의가 열리는 곳으로 내부에는 시크교 구루들의 칼과 깃발 등이 소장되어 있다. 밤이 되면 하리 만디르에서 옮겨진 그란트 사힙이 이곳에 모셔진다고 한다.
기도를 하는 사람들.
순례를 도는 사람들
구루 카 랑가르.. 몇 군데 있다...그릇에 떠 놓으면 가져다 먹는다.
사진기 기능을 일몰로 하여 찍어서 더 황금색으로
보인다.
여행자들이나 순례자들이 쉬는 곳??
의식을 행하는 곳인 듯...
다르샤니 데오리(Darshani Deori)...구루의 다리 그리고 하리 만디르 사힙으로 연결되는 아치형
문으로 그란트 사힙을 보고자 하는 순례자들로 언제나 북적거린다고.
여명이 시작면서 조명이 빛을 잃기 시작한다.
연못이나 각 건물들은 종교적인 의미가 있어서 시크교도들에게는 커다란 의미로 다가 오겠지만
일반 관광객의 입장에서는 그저 아름다운 건물로만 느껴질 뿐이다.
사람들을 보면서 건물을 보면서 한바퀴를 도는데 젊은 친구들이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한다.
한 시간 정도 걸려서 한 바퀴를 돌아보는데 동이 트면서 조명도 빛을 잃고 5시40분이 되니 조명이 꺼진다.
조명이 꺼지자 그 화려하던 경관들이 무채색으로 변한다.
사원 안에는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음식을 제공하는 구루 카 랑가르(Guru Ka Langar)곳이
두 군데가 있는데 새벽이어서 아직 배가 고프지 않기도 하거니와 혹시라도 음식을 잘못 먹고
여행초기부터 배탈이 날까봐 먹지는 않았다,
맨발...자원봉사자들이 수시로 물걸레로 바닥을 닦는다.
신성한 나무아래 모여 있는 아주머니들..
신성한 나무...대추나무라는데
밑둥이 이렇게 생겼다.
애기를 업고 온 순례자..
모든 종교에 대해서 냉정한 입장에 있기 때문에 이렇게 밤을 새우는 사람이나 멀리서 순례를 오는
사람들에게 존경의 맘을 가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시크교 같은 경우에는 사회에 순기능(順機能)을
하는 종교라는 것을 알고 시크교 교도들에게 세상에서 열심히 그리고 정직하게 살 수 있는 에너지를
주는 종교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종교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지 않는다.
이 사원은 무굴 제국의 악바르(Akbar) 황제가 기부한 터에 1577년 시크교의 제 4대 구루인 람
다스(Ram Dass)가 암리차르를 건설했으며, 1604년 제 5대 구루인 아르잔 데브(Arjan Dev)가
연못 한가운데 사원을 짓는 것으로 황금사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후 무굴 제국과 투르크족의 침공으로 사원은 끊임없이 파괴되고 복구되었으며, 1802년 시크 왕국을
건설한 왕 마하라자 란지트 싱(Maharaja Ranjit Singh)에 의해 황금 돔(400kg)과 대리석 장식이
더해져 ‘황금사원’이란 애칭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황금사원에는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건축 양식은 물론 시크교 고유의 특징이 혼합되어 있으며,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개방된 출입구는 종교, 인종, 성, 카스트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열려 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24시간 개방이 되어 있어서 언제나 사람들이 순례와 기도를 할 수 있다고 한다.
힌두교인들처럼 목욕을 한다.
조명이 꺼진 황금사원...
바깥 광장
사람들이 들어 오는데 잠자는 사람들도 있다.
광장에 있는 일가족들...기도를 마친 사람들인지 아직 안 한 사람들인지??
암리차르
시크교에 대해서 간단히....
시크교는 나나크(Guru Nanak Dev, 1469~1538)라는 사람에 의해서 창시된 종교로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교리의 일부를 받아 들여 만들어 졌으며 힌두교의 카스트 제도를 거부하여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으며, 시크교 교도가 되면 남자는 사자라는 의미를 가지는
싱(Singh)으로 성이 바뀌고 여자는 공주(公主)라는 의미의 카우르(Kaur)로 바뀐다고 한다.
그리고 신은 영원하며 형체가 없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도 않아서 신으로 다가 가는 길은 오로지
수행과 명상만이 길이다 고하여 수행과 명상을 중요시 한다고 한다.
그리고 시크교도들은 머리와 수염을 깍지 않는데 신이 인간에게 주신 것을 훼손하지 않고 간직한다는
의미로 머리와 수염을 말아서 터번 속으로 넣기 때문에 남자들은 터번을 쓰고 단검을 차는 것은
용기와 약자에 대한 보호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시크교는 교도가 2천 5백만 정도로 세계 5대 종교에 속하지만 소수이다가 보니 무굴제국 시대에는
이슬람으로부터 박해를 받았고, 그 후로는 힌두교로부터 박해를 받았지만 1801년에 란지트 싱에
의해서펀 자브 지방에 시크교 왕국을 세우기도 했으나 1849년에 영국에 의해서 멸망하였다.
시크교도들은 인도인들 중에서 부유하게 살아가는데 교리에 따라 열심히 일을 하기 때문이라고
하며 해외에 있는 시크교도들 또한 부유하게 살아간다고 한다.그리고 시크교도들이 영국군들과
싸워서 전쟁에서 패하기는 했지만 영국이 그 용감성을 인정하여 1.2차 대전에 영국군으로 참전하게
하였고, 지금도 시크교도들을 경비(警備)로 채용하는 나라들이 많을 정도이다.
인도가 영국으로 독립후에 이슬람인인들은 파키스탄으로 분리독립을 하였지만 시크교는
분리독립을 하지 못하게 되자 독립은 하지 못하더라도 자치권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러자 총리였던 인리가 간디가 시크교도를 탄압하면서 황금사원에 무장 난입을 하여 400명을
학살하자, 인디라 간디는 시크교도였던 경호원에게 1984년 암살이 되었고 시크교인들은 인도인들에 의해서 무차별 학살을 당하였다.
그 이후 2004년 인디라 간디의 며느리 소냐 간디가 시크교 교도인 만모한 싱을 총리로 임명하는
등 화해를 하였으나 아직도 과격파 시크교도들이 테러를 하는 등 아직도 시크교도들과 힌두교를
믿는 인도인들과는 갈등이 계속 되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