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층 아파트에서 살고 있고, 내 서재는 북향이다. 나는 매일 아침 그 방의 책상 앞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뭔가를 한다. 그러면서 북쪽 면으로 난 통유리창을 통해서 뒷산인 한새봉과 그 주변을 감상한다. 산기슭에는 어느 가문의 조상들 묘 예닐곱이 사이좋게 지내고 있었는데, 3년쯤 전에 근린 공원화 하는 과정에서 그 눈엣가시들은 모두 강제 철거당해서, 살아있는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어딘가로 쫓겨 갔다. 붉은 흙이 드러났던 그 자리가 계절이 몇 차례 순환하는 동안에 풀들이 퍼져 자라더니 어느덧 상처가 완전히 아물었고, 이제 어엿한 푸른 풀밭이 되어 주위 나무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그리고 그 기슭이 끝나고 평지가 펼쳐지는 곳에는 근처 아파트 주민들이 누덕누덕 불법 텃밭을 경작하고 있었다. 그분들의 녹색 향수를 나무랄 수는 없지만, 도시 안에서 행해지는 불법 경작이라는 게 너무도 너저분하고 지저분해서 사실 경관을 망치고, 보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온갖 페트병에, 넝마 같은 검정 비닐과 현수막, 스티로폼 조각들, 닥치는 대로 아무거나 주워 모아 세워놓은 울타리들이 눈에 들어오면 기분이 그다지 상쾌하지는 않다. 하지만 성실한 도시 농부님들의 뜨거운 목가주의를 나무랄 수는 없다. 다만 조금 더 깔끔한 방식으로 그게 실행되기를 바랄 뿐이다. 어느 날 구청에서 그 불법 경작지 여기저기에 “불법 경작을 금한다”는 엄중한 팻말을 세웠지만, 그것도 도시 농부님들의 농경 의지를 꺾을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리하여 당국의 경고 팻말과 온갖 작물들이 나란히 서서 함께 지내고 있다.
녹색 갈망과 당국의 경고가 그렇게 데면데면 공존해 가던 도중에, 올해 7월 어느 날 느닷없이 포크레인 한 대가 그 농장에 침입하여 그 동안 온 정성을 쏟아 가꾸던 작물들을 졸지에 짓밟고 땅을 파 뒤집어서 그 자질구레한 경작을 졸지에 갈색 땅바닥으로 평정해버렸다. 궁금증에 다가가서 세워진 입간판을 읽어보니 거기에 국립 어린이집이 지어진다는 것이었다. 며칠 터파기 작업이 진행되고 나서는 둘레에 높다란 울타리가 쳐지고 그 터전에 모종의 설계도에 따른 모양으로 콘크리트 바닥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지금 현재 다소 복잡한 모양의 거푸집이 세워져 올라가고 있다. 어떤 모양의 몇 층짜리 멋진 건물이 지어져서 거기에 잔챙이 아이들의 종종거리는 발걸음과 분수 물방울들처럼 솟구칠 까르르 노는 소리에 대해 나는 사뭇 기대가 크다. 산기슭에 문중의 무덤이 들어섰다 철거되고, 앞쪽 평지에 불법 텃밭을 경작하고, 그 자리가 파헤쳐져 국립 어린이집이 들어서고, 그런 과정이 문명이 자연을 대하는 방식이다.
관용적인 영어 표현에 ‘어머니 자연’(mother nature)이라는 말이 있다. 실제로 인간은 자연의 산물이고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 당신 덕분에 살아갈 수 있다. 당신 없이 나는 잠시도 생존할 수 없다. 공기와 물이 없이 내가 몇 초나 버틸 수 있을까? 그런 줄 뻔히 알면서도 나는 당신을 나 자신의 욕구대로 폭력적으로 파괴하고 착취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당신을 사랑한다거나 좋아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그러나 별로 고맙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세상 속에서 정신없이 살아가다가 몸이 지치고 마음이 괴로우면 위로받고 치유받기 위해 숲으로 산으로 바다로 당신을 찾아간다. 하지만 나의 마음은 세상과 도시라는 ‘콩밭’에 있으므로 잠시 당신 품속에 머문 다음, 서운한 척하면서 발길을 돌려 다시 도시 문명 속으로 돌아와 당신을 잊고 살아간다. 그러면서 마음 한편에 이따금씩 당신을 그리워한다. 그것이 나와 어머니, 나와 자연의 관계이다.
첫댓글 그런데 남자들이 더 많이 '나는 자연인이다'를 갈망하는 이유는 뭘까요?
원시 시대에 남자들이 주로 들이나 산에 돌아다니며 수렵채취를 했었고, 그 아득한 기억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가 아닐까요?
국립 어린이집이 자연속의 놀이터 형식으로 지어지면 좋겠네요.
호미님께서는 왜 닉을 호미라고 하셨을까요?
푸른 밭에 대한 향수가 누구보다도 강하셔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라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습니다^^
지금 노동에 대한 글을 집필 중이시잖아요... ^^
나는 문명인이다... 나라는 존재의 정체성을 약간 부정적으로 확정시키고 계시다는 느낌을 받는 건 제 오독의 결과일까요?^^
저도 문명인 같습니다만... 호미님의 글에 나오는 문명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