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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이화장(梨花莊)을 찾아 나서며
경기향토문화대학 Report 2018. 10. 15
제출자 : 서울지역 박 형 준 (010-8350-8873)
목 차
1. 들어가는 글
2. 이화장
3. 이승만의 생애
A. 이승만의 생애 요약
B. 이승만의 주요 활동과 성과요약
C. 이영훈교수의 이승만에 대한 강연내용 요약
4. 오스트리아에서 온 프란체스카
A. 프란체스카의 생애 요약
B. 언론에 소개된 프란체스카 여사
1. 들어가는 글
우연한 기회에 참여하게 된 경기향토문화대학 과정을 또 한차례 마친 모양이다. 하지만 이 전문가 과정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하고 계신 문화대학의 김성태박사나 관계자 분들의 열정과 노고를 생각하면 과연 전문지식이나 지역성도 결여된 내가 경기도내의 향토문화연구의 정체성 확립과 지역학 연구자들의 학술강화라는 목표에 부합되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 의미있게 수강하고 계신 분들과 비교할 때 여간 부끄럽지 않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미안함에도 불구하고 이 과정에 참여하면서 개인적인 생각이나 사물에 대한 관점이 이번 교육의 영향으로 많이 변화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번 과정에서 특별히 기억나는 김성태박사의 고고학 강의에서 본 주거형태나 토기의 변천사를 통해 인류의 시원과 문명을 생각해 보게 되었고 문화적인 면에서 뒤쳐저 있던 독일에서 시작되었다고 배웠던 향토문화사가 역사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의 하나로서 유럽에서 시작된 세계 1차, 2차 대전을 거치며 각곳의 지역에서 새로이 만들어진 민족국가의 형성에 크게 영향을 주어 18~9C 유럽에서 시작된 자유주의나 사회주의와 함께 전세계인은 물론 현재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하나의 이념으로 자리잡은 민족주의와도 어쩌면 맥을 같이 할지 모른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나는 사실에 근거한 경험적 인식체계를 바탕으로 하는 자연과학을 하는 기술자로서 평생을 살아 왔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또 앞으로도 그러한 모습으로 살게 될 것 생각하고 있다.. 그렇게 살아오던 내게 역사라는 인문학적 지식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계기는 대학시절인 ‘70년대 인기작가였던 최인호가 신문에 연재하였던 “잃어버린 왕국”이라는 일본땅에서 백제를 새로이 발견한다는 소설을 접하면서 부터인데 그때까지 학교에서 배웠었던 한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알려진 고구려나 신라가 아닌 고대3국중에서 당나라의 소정방과 나약한 의자왕으로 인해 가장 먼저 망해버린 삼천궁녀의 낙화암이 생각나는 백제라는 나라에 대해 처음으로 그 역할이나 정체가 궁굼해 지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던 것 같다. 그러다가 ’90년대 중반쯤 강단사학자도 아닌 김성호라는 사람이 쓴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과 “중국진출백제인의 해상활동 천오백년”이라는 책을 보게 되며 고대역사를 한번쯤 공부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었다. 하지만 인문적 소양을 갖추지 못한 내게 정통 역사학은 쉽지 않았고 또한 바쁜 하루하루의 직장생활과 일상에 매어 퇴직전까지는 관심분야에 차분히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었다.
하지만 소위 간척기술자로서 전남 고흥, 장흥, 완도, 진도, 해남, 영산강, 새만금, 금강, 당진, 삽교천, 화성, 안산, 영정도, 백령도등을 다니며 어쩌면 한국의 고대사는 육상이 아닌 해상이 주무대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단순한 의문이 아니라 사실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게 된것은 나만의 특별한 직장생활과 경험을 통해서 였던 것 같다. 앞에서 열거한 지역은 내가 공사감독이나 사업관리자로서 짧게는 6개월에서 길게는 3~4년씩 근무하였던 곳이다. 나의 직장생활 기간과 상당부분이 겹치는 ‘70년도 중반부터 2000년도 초반까지의 4~50년간이 대한민국의 간척사업이 가장 활발하였던 기간이었고 내가 근무했던 곳들의 변화를 통해 역사상으로 우리나라의 해안 변화가 가장 컸었던 시간일 듯 하다. 직장생활의 후반부인 2000년 이후 부터는 새로 근무하는 곳에서 그 지역의 시.군지를 통해 지역의 유래나 역사, 예전의 생활상들을 찾아보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새로운 향토사 자료들을 접하며 내가 알고 있던 상식들이 너무도 쉽게 무너지는 경우를 여러번 겪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한 과정을 겪으며 내나름대로 한국의 역사교과서는 너무도 부실해서 요즈음 분쟁의 주역이 되고 있는 이념적 갈등은 차치하고서라도 반드시 다시 쓰여져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앞서 언급한 비류백제설을 주장한 김성호선생은 우리와 관련된 옛사람들의 해상활동 무대가 한반도만이 아닌 주산군도를 포함한 항주만과 양자강일대, 광동성, 산동반도, 요하하구, 한강하구, 영산강하구, 일본 규슈등 엄청나게 넓은 지역라고 소개하고 있다. 유럽에 지중해 문화가 있다면 동북아에는 황해문화가 있으며 그 황해를 움직였던 주류민족이 백제로 대표되는 우리민족이라는 주장이다. 그러한 주장등을 중국, 일본, 한국의 많은 사서들을 입체적으로 나열하고 새로이 해석하는 방법을 동원한 것이어서 역사적 기본소양이 부족한 내게는 꽤나 설득력이 있는 주장으로 각인되어졌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러한 그의 주장이 단순히 사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97년말 출장지였던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국립박물관에서 마주친 신라승려의 행장유물에서 우리 역사에는 보이지 않는 인물이 이렇듯 먼곳신라에서 자카르타까지 왔었다는 것을 알게 된 때 부터였다.
그 이후 이러한 충격은 출장이나 여행을 통해 만주, 사할린쪽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한국의 대표적인 수종인 소나무가 열대기후에 가까운 중국의 복건성이나 운남성에 집단적으로 서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며 무령왕릉 발굴시까지 남아 있었던 시신을 녛는 관의 재료가 한반도 수종이 아니라는 어렴풋한 기억과도 연결되기도 하였고, 새만금방조제 최종물막이 공사시에 머물렀던 신시도는 선유도, 무녀도 장자도등과 함께 고군산열도로 불리고 있는데 이곳이 고려시대 국가의 중요한 수군기지로서 송나라 사신들이 양자강 하류에서 출발하여 흑산도를 거쳐 개경으로 가는 해상항로의 중간기착지였다는 것은 물론 고려말 왜구들의 잦은 출몰로 그곳의 해군기지를 포기하고 지금의 군산인 진포로 옮겨 왔으며 군산(群山)이라는 지명도 따라 이동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도 군산에서는 진포축제라는 지역 축제가 남아 있다. 이러한 내용들로 확인되는 옛 사람들의 활동범위는 현세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상식이나 상상을 초월하는 이동경로를 갖고 있었다고 밖에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또한 현재의 국경이나 민족의 의미에 의문을 던질 수 밖에 없었다.
한국사에서 해상이 봉쇄된 것은 이성계의 조선이 건국되면서 부터인데 제주도와 진도등 몇몇 큰섬을 제외하고는 모든섬의 주민을 강제로 육지로 불러들이는 공도정책을 18C 중반까지인 숙종연간까지 지속한다. 스스로 바깥세상과 무역이나 인적교류등을 통해 선진문물을 받아들이수 있는 중요한 이동통로를 폐쇄함으로서 고립을 자초하게 되었고 자주성을 상실하는 결과가 되어 결국 유럽에서 보는바와 같이 새로운 해상항로를 개척하여 신대륙을 발견하고 산업화를 통해 선진국으로 발전할 수 있는 동력이 될 기회를 스스로 막아 버리고 명나라에 사대하는 것으로 나라를 보존하고자 하였던 조선은 결국 세계정세에 뒤떨어져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등 왜침에 대한 대응방법 조차 찾지 못하는 무능하고 무기력한 국가가 되어 자멸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현재 한,일간의 영토분쟁으로 치달리고 있는 독도문제의 단초도 어쩌면 바다를 포기하였던 조선의 공도정책이 원인을 제공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재작년인가 처형의 초청으로 집식구와 함께 한 20일 정도 이태리의 피렌체를 비롯한 르네상스의 중심이었던 토스카나지방의 도시들을 둘러보게 된 기회가 있었다. 14C 도시국가 씨에나에서 시작되고 15~6C 피렌체에서 꽃피었던 그들의 문화를 박물관이나 유적지등에서 보면서 동시대였던 우리 조선의 자랑할만한 문화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그리스 로마시대 부터 인류가 알고자 했던 근본적인 가치, 진실의 아름다움, 인간내면에 대한 탐구가 과연 우리의 역사에 시도 조차 있기는 한 것인가?... 깊이 회의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 당시 이태리 토스카나지방 특히 피렌체에서 무슨일들이 있었기에 한 시대에 이토록 많은 예술품과 과학, 공학, 의술, 인문학등이 폭팔적으로 만들어지고 발전되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었던가?
당시 이곳 인구가 얼마나 되었기에 이 많은 건축물과 조각품들이 만들수 있었던 것인가?.. 이런 막연한 의문을 스스로 해결해 보려고 꽤나 고민해 보았던 것 같다. 그러다가 은행업과 유통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척한 메디치가문의 정치적 역할에 생각이 미치자 어쩌면 개인의 능력을 인정하고 선의의 경쟁을 발휘 할 수 있도록 만든 어떤 형태의 사회 시스템적 변화가 일어나 이렇듯 엄청난 생산성과 발전에너지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되었고, 그런 사회적 변화가 일어나야만 르네상스라 불리게 될 엄청난 문명사적 변환기를 만들게 되며 수 많은 천재들을 발굴하고 경쟁시킴으로서 문화의 질을 바꾼 엄청난 기폭재가 되었을 것이라는 나름의 결론을 내리게 되는데 스스로 그 추론에 대해 고개를 끄떡이던 기억이 난다.
대한민국은 오천년 이상의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다고 자랑하고 있지만 내가 알고 있는 한국사의 어느 시기도 현재의 대한민국과 같이 성공하였던 시기는 없었다. 현재의 우리는 실패한 역사가 아니라 성공한 역사시기를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전쟁 종전과 함께 태어난 세대로서 지금 우리는 60년대의 국민소득 90$정도에서 27,000$ 정도로 300배이상의 폭팔적인 성장을 이룬 기적같은 시간을 살고 있다. 이러한 성과는 세계사적으로도 희귀한 사례로서 어쩌면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이태리에서 일어났던 르네상스에 비견할만 한 변화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미 이러한 한국의 성장은 여러나라에서 연구대상이 되고 있고 개발도상국의 롤 모델이 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이러한 우리나라의 성취도 어쩌면 르네상스시기 피렌체에서 일어났던 것과 같은 사회 시스템적인 변화가 한국에서도 일어났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요인으로 우리시대에 이루어진 ‘70~80년대 획기적인 발전은 이시대를 겪고 살아온 사람으로서 “이승만의 건국”과 “박정희의 조국 근대화”, 산업화 과정을 거쳐 전두환 노태우의 “군사정권의 안정된 성장 지속기”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고 생각한다.
특히 민족중흥을 부르짖던 박정희는 그의 재임기간 내내 독재를 하였다는 오명에도 불구하고 르네상스 시대 메디치가문이 천재들을 발굴하여 문화부흥을 하는 것과 같이 정주영, 이건희, 김우중, 최종현등 수많은 천재기업인들을 발굴 육성하고 경쟁시켜 현재의 한국경제를 지탱하는 세계 일류기업으로 성장시켰다는 공로를 대다수 한국인들은 인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19C말 세계사의 변방에서 스스로 자멸해 가고 있던 조선 땅에 태어나 신분상승의 유일한 통로였던 과거시험에 매달리던 극도로 빈궁한 유생이 신학문과 접하게 되면서 당시 조선의 누구도 알지 못하던 선진 서양제국의 발전과 정치사상과 문화등을 이해하게 되고 그 발전된 국가들의 시스템을 통해 낙후된 조선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신념을 갖고 새로운 나라 건설에 매진하여 결국 일본의 태평양전쟁 패전에 따른 천재일우의 기회에 새로운 시스템의 나라, 독립되고 건강한 개인을 지키기 위한 자유가 보장되는 민주공화정과 세계평화에 기여할수 있는 자유무역과 시장경제를 근간으로 하는 대한민국을 건국한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한국인들의 평가는 가혹하리 만치 박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향토문화대학을 다니며 배우게 된 지역에 기반한 향토사도 크게 보면 배타성과 다른 국가와 갈등을 유발하게 되는 민족주의 한 원형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유태인을 탄압했던 히틀러나 지역간 갈등요인을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하는 일부 아프리카나 중동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종간의 살육사태를 보며 우리가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민족주의를 극복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고 향토사나 지역사 또는 각국의 역사도 보편적 인류의 가치가 배제된 좁은 의미의 민족이나 지역인식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이 아마 내가 이해하고 있고 이승만이 만들고자 했던 대한민국의 건국과 한국인의 정신이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
이승만은 우여곡절을 거치며 개화운동에 앞장 서다가 사형수로서 한성감옥에 수감되게 되는데 그의 수감기간은 5년7개월이나 된다. 간신히 고종의 특사로서 사면되어 을사조약후 스스로 자결하는 민영환의 추천으로 고종의 밀서를 갖고 당시 미국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를 찾아 가게 된다. 위태로운 조선을 도와 달라는 청원을 하기 위해 미국 대톨령을 그의 별장에서 만나는데 까지는 성공하나 미국의 도움으로 조선독립을 유지하고자 하는 방문 목적은 일본과 미국간에 체결된 “태프트-가츠라 밀약”으로 인해 성공하지 못하고 만다. 그후 그는 귀국하지 않고 1905년부터 1910년까지 5년동안 워싱턴대(학사), 하바드대(석사), 프리스턴대(박사)에서 철학과 영문학, 국제정치학을 공부하게 되며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가장 뛰어난 논문으로 선정되어 프리스턴대학 출판부에서 그의 논문이 출판되는 영예를 갖게 된다. 이는 당시의 동양인은 물론 유럽인이나 미국인들도 이루기 어려운 업적이다.
이렇듯 장황히 서론을 부연하는 사유는 이번 과제의 주제잡기가 지난번 과제보다 더욱 어려웠기 때문이다. 마지막 수업에서 김성태박사가 과제를 작성하기 위해 인터넷을 통해 자료를 구하는 것은 좋으나 자신의 관점이나 의견이 반영되어야 한다는 말이 나를 계속 어렵게 하였던 모양이다. 그러다 결국은 마감일 다 되어서야 과제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요즈음 가장 많이 생각하고 있던 한국사회 갈등의 핵심인 좌 우의 이념대결과 한국의 정치체제를 생각하다 이승만을 생각하게 되었고 대한민국 최초 영부인이 된 그의 부인 프란체스카, 또 그가 살았었던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가까운 이화장에 대한 내용등을 이번 기회에 정리하고 공부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인간 이승만에 대한 자료는 너무도 많았고 그가 저술한 책이나 신문사설등도 너무나 심오해서 감히 접근하기가 어려워 상당기간 공부를 하여야 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가 사형수로서 한성감옥에 있을 때인 27~28살에 저술한 “독립정신”을 알게되며 어떻게 그 나이에 당시 조선인으로서 또 집필조건도 아주 열악한 여건이었을 사형수가 세계평화를 위해서는 공화정과 국제연맹, 자유무역이 필요하다는 “칸트의 영구평화론”과, 국가의 부강과 개인의 자유를 위하여는 공정한 시장과 재산권의 보호가 필요하다는 “아담스미스의 국부론” 같은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고 책을 저술 할 수 있었는지 그져 놀랍기만 할 따름이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이승만은 노회한 정치가일 뿐이었으나 이번에 정리 하면서 다시 보게 된 그는 세계사적으로도 위대한 사상가이었고 혁명가, 교육가, 외교관, 저술가일 뿐 아니라 진실한 종교인이기 까지 한 인물임을 알게 된 기회가 되었다.
나는 어린시절 지금 종로구청이 자리인 광화문 앞 미국대사관 뒤편에 위치한 수송국민학교을 다니고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인 1960년에 4.19가 있었고 이승만의 하야를 목격하였었으며 이듬해에는 5.16도 목도하였었다. 4.19 당시의 기억으로는 지폐나 우표에 온통 나이든 대통령 이승만이 도안되어 있었고 대다수 사람들은 그를 대통령이 아닌 “이박사”로 호칭하고 있었으며 애국자였던 노인네가 간신배들에게 둘러싸여 나라를 어렵게 만들어 안타깝게 되었다는 말을 당시에 많이 듣고 자랐던 것 같다. 그후 중고등학교 시절에 만난 젊은 교사들은 4.19당시에 대학생이었던 경우가 많아 일반인이 말하는 것과는 달리 4.19 당시의 어두운 사회상황과 그들의 무용담에 가까운 자부심, 이승만은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망친 악인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도 가끔은 듣고 자랐었던 것 같다. 그렇게 그를 매도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점점 커지고 굳어져서 사회에 대한 지식인의 인식은 좀 더 비판적이어야 한다는 우리시대의 강박으로 작용하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요즈음 하게 된다. 4.19이후 나는 사회인이 될 때 까지 거의 대부분의 학창시절, 국민학교에서 중고등학교, 대학교 군대복무기간 까지 모든 시간을 독재 대통령 박정희와 같이 한 기간이었다. 이미 4~50년전 이나라의 대통령이었던 사람들, 이 나라를 망쳐버린 악한으로 상당기간을 내게 자리매김했던 그들이 나이든 지금에 와서 비로서 매우 위대한 지도자였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 아마도 현재 한국사회의 혼란은 좀더 성숙한 국가가 되기 위해 치러지는 불가피한 숙성기간으로 생각해야 될 듯 하다.
얼마전에 보게된 경제사를 전공한 서울대 이영훈교수의 근대사 관련 이승만 강의가 이승만의 생애를 잘 설명하고 있어 그 내용을 나름대로 요약하여 이승만의 생애와 역할을 정리하는데 참고해 보았다. 많은 부분에서 공감 할 수 밖에 없는 내용인 듯 하다....
2. 이 화 장(梨花장)
조선시대 이곳 낙산 언덕에 배나무가 많이 있었으며 그곳에 있던 정자의 이름인 이화장에서 유래되었다. 이 일대는 조선 중종 때의 학자인 기재 신광한(1484~1555)의 옛 집터로 일명 신대(申臺)라 하였다. 또한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1622~1658)이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이화장 정문 앞에는 인평대군(麟平大君)의 석양루(夕陽樓)가 있었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 제택조에 “인평대군의 집은 건덕방 낙산(駱山) 아래에 용흥궁(龍興宮)과 동서로 마주 대하고 서 있는데 석양루가 있다. 기와·벽 등에 그림이 새겨져 있고 또 규모가 크고 화려해서 서울 장안에서도 으뜸가는 집이었다. 지금은 장생전(長生殿)이 되었다.”라고 쓰여 있다. 이 장생전은 이화장 조각 당시에도 그 건물의 일부가 남아 있었다. 이화장 뒷문 개울가 바위에 신대를 기념하는 정조 7년(1783) 한성판윤을 역임한 서화가 표암 강세황이 쓴 ‘紅泉翠壁(홍천취벽)’이라는 큼직한 각자가 1960년대 초까지도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땅에 묻혀 있다.
8·15광복 직후 이승만 박사가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거처할 집이 없자 주변의 인사들이 장생전을 그에게 기증하였다. 이 집은 1947년부터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거주하던 곳으로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내각의 조각(組閣)을 발표하였던 당시까지 장생전의 일부 흔적이 남아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거처하면서 내각을 구상하던 조각정(組閣亭), 이화장의 관리와 유족들의 거처인 생활관(1985 건립)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외에 1988년 건국 4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이승만 동상이 있으며 건평 230㎡의 유지이다. 원래는 신대(申臺)라 하였는데, 지금은 ‘이승만기념관’으로 고인의 유품이 소장되어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7년 10월 18일부터 이듬해 8월 12일까지, 4ㆍ19혁명으로 하야한 1960년 4월 28일부터 하와이로 망명한 5월 29일까지 이곳에서 거주했다. 이화장은 1948년 8월 15일 출범한 초대 내각을 구성하였던 정부의 조각 본부(1948년 7월 21일∼8월 4일)이자 이승만 대통령의 집무공간(1948년 7월 24일∼8월 12일)으로도 쓰인 장소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백범 김구 선생이 집무실과 숙소로 사용했던 서울 경교장(京橋莊)과 함께 해방 이후 한국 정치의 중심지 역할을 한 곳이다.한편, 원래 서울시기념물 제6호였던 이곳에 대한 서울시의 사적 지정 요청에 따라 문화재청은 사적으로서의 가치를 인정하여 2009년 4월 28일 사적 제497호로 등록하였다.
3. 이승만의 생애
A.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의 생애 요약
Ⅰ. 신분과 가정 : 전주 이씨(李氏)(왕족)/ ‘가빈고단’(家貧孤單)
Ⅱ. 자질 : 총명 (탁월한 암기력, 필재, 웅변술)/건강/단정한 용모
Ⅲ. 교육 : 도동서당(桃洞書堂), 배재학당(培材學堂), George Washington大(BA), Harvard大(MA), Princeton大 (Ph.D.)
->동서(東西)학문 달통
Ⅳ. 종교 : 기독교 (감리교)
Ⅴ. 취미 : 한시(漢詩)/서예/연날리기/바둑/여행
Ⅵ. 직업 : 언론인, 교육자, 저술가, 독립운동가 (정치 외교가)
Ⅶ. 주요 경력 :
1. 만 23-24세 (1898-1899)
- 『협성회회보』 『매일신문』 『제국신문』의 편집장, 논설기자 또는 사장
-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총대(總代)위원/ 대한제국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
2. 24-29세 (1899-1904)
- 한성감옥서(漢城監獄署)에서 5년 7개월간 옥고(獄苦)
3. 30-35세 (1905-1910)
- 포츠머스 강화회의 개회 직전 대한제국의 대미(對美) 밀사로서
시어도어 루즈벨트 (Theodore Roosevelt) 대통령 면담 (1905.8.4.)
- 미국 동부의 3개 명문대학에서 수학(修學)(1905-1910)
4. 35-37세 (1910-1912)
- 황성기독교청년회관('서울 YMCA') 의 학감(學監)
5. 38-43세 (1913-1918)
- 하와이 호놀루루에서 『한국교회 핍박』저술; 『태평양 잡지』창간 (1913)
- 한인기독학원과 한인기독교회 창립(1918)
6. 44-47세(3.1운동이후 1919-1922)
-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1919.4.11.)
- 통합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1919.9.6)
- 한성(漢城)임시정부의 '집정관총재(執政官總裁)'(President)(1919.4.23)
- (워싱턴DC)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설립, 운영(1919.8-1925….)
(The Korean Commission to America and Europe for the Republic of Korea)
* 상하이를 방문하여 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 직무 수행 (1921.1.1-5.17)
* 호놀루루에 대한인동지회(同志會) 결성(1921.7.21.)
- 워싱턴군축회의(일명: '태평양회의') 한국대표단 '대표장'(1921.9.29-1922)
7. 50-59세(1925-1934)
- 상하이통합임시정부 의정원, 이승만 임시대통령을 탄핵.면직 (1925.3.18-23)
- (제네바)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총회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전권대사’로 활약 (1933.1.4.-5.18)
일본의 국제연맹 탈퇴(3,27)
*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 여사와 결혼(1934.10.8)
8. 66-70세(1941-1945)
- 충칭 임시정부의 ‘주미(駐美)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임명됨 (1941.6.4)
- (센프란시스코) 국제연합(The United Nations)창립총회에 참석할 임시정부의 ‘한국대표단 단장’으로 임명됨(1945.3.8)
->이승만, 유엔 창립총회 기간(.4.25-6.26)에 ‘얄타 밀약설’ 폭로
9. 70-73세(해방후 3년간 1945-1948)
- 이승만의 환국(1945.10. 16)
- 조선독립촉성중앙협의회 회장(1945.10.23-12.25)
- 대한독립촉성국민회(독촉국민회) 총재로 추대됨(1946.2.8)->총재직수락(6.11)
- 미군정의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약칭“민주의원”: Representative Democratic Council of South Korea)
임시의장직 수임 (1946.2. 14)
- 이승만의 방미(訪美)외교 (1946.12-1947.4) -> 트루먼 행정부로 하여금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한 5년간의 신탁통치
계획을 포기하고, 그 대신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를 통해 남한에 과도(단독)정부를 수립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
- 제헌국회 의장으로서 ’대한민국 헌법’ 제정 작업 총괄 (1948.5.31-7.17)
- 제헌국회에서 대한민국 초대대통령으로 당선됨(1948.7.20)
-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1948.8.15.)
VIII. 이승만 인물 총론
<성격> : 거시적 형안(炯眼)과 미시적 분석력 겸비/ 유아독존적 자존심/ 투철한 애국심과 사명감/ 담대. 근면. 인내
/ 고집불통/ 독선적/ 비타협적
<인물총평> : ‘일당백’의 인물 = 희세(稀世)의 위재(偉才)/ 카리스마(charisma)
<이승만을 가까이에서 살펴 본 외국인 지도자들의 이승만 인물평> :
- "He is worth his weight in diamonds." (그는 그의 몸 무게 만큼의 다이아몬드와 같은 존재이다.)
-- 미 8군 사령관 밴프리트 대장 (Gen. James A. Van Fleet)
- “Rhee is one of the greatest thinkers, scholars, statesmen and patriots of our times.”
(그는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 학자, 정치가 및 애국자들 중의 한 사람이다.) -- General Van Fleet
- “Rhee is clearly most astute, and, in spite of his age, is head and shoulders above any of his compatriots
whom I have met.” (그는 확실히 내가 만나 본 한국인들 가운데 가장 영특하며 —고령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도
월등하게 뛰어난 인물이다.) -- Selwyn Lloyd, 영국 국무상
- “He is one of the gentlest and truest Christian gentlemen I have ever known.” (그는 내가 아는 신사들 가운데
가장 점잖고 독실한 크리스찬 중의 한 분이다.) -- Rev. Dr. Frederick B. Harris, pastor of the Foundry Methodist Church
in Washington, D.C. and the chaplain of the U.S. Senate. 해리스 목사/미국상원의회 원목
B. 이승만의 주요활동과 성과 요약
I . 대한제국(大韓帝國) 밀사(密使)로서의 외교활동
* 러일전쟁 중 대한제국(조선왕조) 외교
- 1905. 8. 4: 미 대통령 T.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와 면담, 1882년에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 (Korean-American
Treaty of Amity and Commerce)의 제1조에 명시된 거중조정(居中調: good offices) 의무 이행 촉구
Cf. 태프트 - 가츠라 밀약 (The Taft-Katsura Memorandum) : 1905.7.29,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기게 되는
‘을사보호조약’(1905.11.18.) 체결후 --> 미정부, 주한미국공사관 폐쇄(1905.11.24) = 미국의 일방적 조약 파기
II . 한성임시정부/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으로서의 외교.선전 활동
* 3.1 운동후에 수립된 ‘대한공화국’(The Republic of Korea)에 대한 승인 노력
- 1919.1~6 (3.1운동 발발 전후): 파리 강화회의에의 참석. 발언권 획득 시도
- 1919.8~1925.5 : 워싱턴DC에 설치한 (The Korean Commission to America and Europe)를 통해 대대적인
외교.선전.홍보 및 독립운동 자금 확보 운동
- 1921.11-1922.2 : 워싱턴 군축회의(일명: 태평양회의)에의 참석.발언권 획득 시도
III .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전권수석대표,주미외교위원장’으로서의 외교.선전 활동
* 1932년이후 상해(->충칭)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대표하는 ‘수석대표’ 내지 ‘외교위원장’으로 김구주석이 주도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획득하기 위한 외교.선전 활동
- 1933.1~3 : 제네바에서 개최된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총회에서의 선전활동 -> 일본의 국제연맹 탈퇴(1933.3.27)
- 1941~1945 : 워싱턴DC에서 F.D.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대통령 행정부를 상대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을 위한
외교.선전 활동 -> ‘카이로선언’(1943.12.1)
- 1945.4-6 :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유엔 (The United Nations) 창립총회에서의 선전활동 -> ‘얄타 밀약설’ 폭로(1945.5-6)
IV. 해방 후 이승만의 활동
* 미국으로 하여금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미.소가 합의한 한반도에 대한 4대강국의 5년간에 걸친 신탁통치
계획을 포기하고, 그 대신 남한에 과도정부(interim government)를 즉각 수 립할 것을 촉구하는 외교.선전활동
- 방미외교(1946.12-1947.4) : 도쿄를 거쳐 워싱턴에 도착, 트루먼(Harry Truman) 대통령 행정부를 상대로 모스크바 협정을
파기하고, 그 대신 유엔을 통해 남한과도정부를 즉각 수립할 것을 촉구 -> 미 정부, 이승만의 요구한 대로 한국문제를
유엔에 이관, 유엔이 남한에서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도록 조치함.
V. 이승만의 외교.선전 활동이 거둔 성과
* <해방 전> :
외교.선전활동의 최대 목표였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을 획득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꾸준한 외교.선전 활동의
부산물로서 다음과 같은 주요 성과를 거두었다.
1. 1933년, 미국과 일본을 이간(離間)시킴으로써 미.일간 태평양전쟁의 발발에 기여
2. 1943년 12월 1일에 발포된 ‘카이로 선언’에 숨은 공을 세웠다.
3. 1942-45년간 미 연합참모부 산하 전략첩보국(OSS)이 계획한 첩보수집 및 한반도 침투작전에 협조함으로서 참전외교의
효과를 거두었다.
4. 미국 사회내 기독교교인들과 미정부 주요부서 내에 친한(親韓) 인사들을 확보.
5. 구미(歐美)에 한국역사와 문화를 홍보하고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는데 기여
6. 구미 각국의 외교계, 언론계 및 종교계에서 ‘Syngman Rhee’라는 이름을 ‘Korea’의 동의어(synonym)처럼 여기게 만들었다.
* <해방 후> :
외교를 통해 미국으로 하여금 5년간의 신탁통치계획을 포기하고, 해방 3년만에 남한에서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를 거쳐"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의 탄생을 지원하도록 만들었다,
C. 이영훈교수의 이승만에 대한 강연내용 요약
1948년 2월, 한국에 온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은 38도선 이남에서 총선거를 실시할지 여부를 두고 심각하게 고민하였는데 남한의 유력 정치인들 사이의 의견이 심각하게 대립하였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대표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가 김구와 김규식은 총선거의 시행을 반대하였고 반면 남한의 자유민주 우익세력을 대표하는 이승만은 필사적으로 총선거를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미 군정의 하지 사령관 주재로 최후의 담판이 열렸는데 하지는 김구, 김규식, 이승만을 초청했다. 하지가 장황하게 1시간이나 총선거를 필요성에 대해 설명했으나 김구와 김규식은 끝내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은 북한의 공산주의자들과 최후의 협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이승만은 그들을 향해 우리가 지난 35년간 독립을 위해 여러 외국에 절규하고 국제회의에 참가하려고 노력했지만 번번히 거절을 당하였는데 이제 국제사회가 독립의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하는데, 제주도에서 만이라도 독립 정부를 세운다면 국제사회에 나가 우리의 주장을 펼칠 수 있지 않느냐, 그 기회를 왜 놓치려고 하는가, 당신들은 당신들이 옳다고 믿는 길을 가라, 역사의 대한 책임은 내가 지겠다. 그렇게 외쳤다고 한다. 당일 그 회담에 참가한 미군정의 자문관들은 김구와 김규식이 역사의 결정적 국면에서 중대한 선택을 해야 할 마당에 어떠한 대안도 없이 자신의 책임을 회피했다고 기록하였다.
이렇듯 이 나라는 이승만 박사의 책임으로 세워진 나라였다. 그는 “공산주의는 콜레라와 같아서 공산주의와 타협하라는 것은 불이 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것과 같아 공산주의와 타협하면 이 민족은 다시는 헤어날 수 없는 구렁텅이에 빠지고 마니 몸이 반쪽에 병이 들었으면 나머지 반쪽의 건강을 먼저 지킨 후 나머지 반쪽의 건강을 회복할 일”이라고 하였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라도 좌우합작을 하여 통일국가를 세우는 것이 긴요한 일이라고 주장하였는데 아직도 그런 사람들의 시각에서 많은 사람들이 좌우합작에 동의하지 않고 단독정부를 주장한 이승만을 민족 분단의 원흉이라고 비난해 오고 있다.
과연 그럴까? 이제 역사가 그로부터 70년이 흘렀다. 당시 세계사의 진행은 캄캄한 안개 속을 걷는 것과 같았고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오리무중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어쩌면 공산주의가 인류의 밝은 미래를 인도하는 등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일찍 1922년에 쓴 '“공산당의 당부당” 이란 사설에서 공산주의를 시행하면, 개인의 사유재산을 부정하게 되고 자본가의 재산을 빼앗아 골고루 나누면, 그것으로 인해 인류 문명의 발전은 중단된다고 보았다. 당시 대다수 사람들과는 다른 인식을 갖고 공산주의 폐해를 절규하듯 지적하였다.
그는 1933년 실제로 소련을 여행하면서 공산주의 소비에트의 현실을 직접 체험하였다. 모스크바의 어느 호텔에 묵을때 밤중에 몰래 호텔 직원이 찾아와 여기서는 배가 고파 살 수 없으니 자기를 미국으로 데려갈 방도가 없는지 알아봐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이승만은 소련정부로 부터 반공주의자로 주목되어 추방당하게 된다. 돌아오는 열차에서 그는 여러명의 미국인과 동석하게 되는데 그 열차가 소련의 국경을 벗어나자 그들로부터 그들이 경험한 많은 사람이 굶어 죽어 길거리에 시체로 넘어져 있는 공산혁명후의 소련내 농촌현실을 듣기도 한다. 이승만은 이미 오래전부터 공산주의의 정체를 잘 알고 있었고 바로 그것 때문에 제2차 대전이 끝난 다음 한반도가 소련의 점령 하로 들어갈 가능성을 가장 경계하였다. 2차 대전 이후 동유럽의 여러 나라가 좌우합작 유혹에 빠져 공산주의자들과 협력하여 정부를 세우게 되는데 헝가리가 그러하였고 체코가 그러하였다. 그러나 그 뒤 사태는 잘 알려진 바와 같다. 정부에 참여한 공산세력은 유명한 자유주의 정치가를 하나씩 테러로 제거하고 그렇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다가 어느 시점에 이르면 공산당에 포섭된 경찰 조직이 쿠데타로 정부를 전복한 다음,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혁명정부 수립을 선언하는 방식이었다. 이승만은 그렇게 좌우합작을 통해 수립된 나라들이 도미노처럼 공산화되어간 동유럽의 사태를 잘 알고 있었다.
1946년 12월 좌우합작 반대주장에 따른 미군정으로 부터의 박해를 피해 이승만은 미국여론에 직접 호소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하게 된다. 당시 동행했던 이승만박사의 정치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의 당시 회고내용을 보면 “우리는 워싱턴에서 백안관이 보이는 호텔에 여장을 푼 다음, 어떻게 해서든 동유럽에서 벌어지는 그 공산화의 비극을 막을 수 있을 것인지를 토론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바로 그러한 이승만이었기에 그는 좌우합작을 한사코 거부 하였다. 당시 북한에서는 점령군 소련의 일사불란한 지도와 감시 하에서 공산화가 사실상 완성된 상태였으며 1946년 3월 북한에 세워진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는 전격적으로 토지개혁을 실시하였다. 3정보 이상을 소유한 지주들이 토지를 강제로 빼앗겼으며 빼앗긴 토지는 농민들에게 무상이란 명분으로 분배되었다. 하지만 공산주의식 토지 무상분배는 개인 소유권이 인정되지 못함으로서 결국 국가에 종속된 농노의 형태가 될 수 밖에 없는 모순이 발생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때 월남한 지주나 지식인 종교인등 공산주의의 악정를 경험한 인원만 1948년말까지 대략 70만 명에 달하게 되는데 이들이 이승만이 주장하는 반공대열에 합류함으로서 남한의 공산화를 막아내는 중요한 교두보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사실상 분단은 현실로 진행되었으며 분단을 항해 먼저 달린 것은 북한의 공산세력이었다. 북한은 1946년 여름까지 전 공업시설의 90% 이상을 국유화하였으며 그 해에 김일성대학을 세우는 등, 전체주의적 동원체제와 우상숭배가 인민을 억누르기 시작하게 되며 1947년 말이 되면 북한에서 공산주의체제의 성립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북한이 주장한 좌우합작은 남한의 정치와 국민은 분열시키기 위한 정치적 구호에 불과하였고 지주들은 고향에서 추방되었으며 그들 대부분은 남한으로 내려오게 된다. 그럼에도 김구와 김규식은 좌우합작을 통한 민족통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였으며 평양에 올라가 통일을 위한 남북협상에 참가했지만,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북한의 공산세력이 짜놓은 각본에 따라 움직이게 되는 꼭두각시가 될 뿐이었다. 그 과정에서도 북한의 공산세력은 소련의 지시와 승인 하에 헌법을 제정하는 등, 독자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남한에 돌아온 김구와 김규식은 끝내 총선거에 참가하지 않았으며, 반대의 선동을 멈추지 않았고 1948년에 건국된 대한민국을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해 12월 유엔총회가 열릴 때 총선거를 통해 수립된 대한민국을 승인하지 말도록 UN에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앞에서 보듯 대한민국은 결국 이승만의 책임하에 세워진 나라이다. 그 모든 과정은 그가 믿는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 조용한 기도 속에서 결정되고 결행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의 회고에 의하면 그가 경무대 안에서 낚시를 하거나 정원수를 전지를 하는 몇 시간은 거의 절반이 기도였다고 한다. 그 기도로 그는 지혜를 얻었고, 용기를 가지고 결정을 하였으며, 불퇴전의 결의로 추진하였다. 그것이 73세에 비로서 새로운 나라의 대통령이 된 이승만의 마지막 12년간 이었다.
인구의 90%가 문맹인 상태에서 국가 건국을 위해 UN참관하의 남한만의 총선거, 자유민주주의 국가체제 건립, 대통령중심제 정부형태, 농지개혁, 국가보안법, 대통령 직선제, 양원제 국회, 지방자치, 귀속재산의 불하, 전쟁의 방어, 반공포로의 석방, 한미군사동맹, 자유시장경제체제, 전후 복구, 기초공업의 건설, 교육혁명을 통한 한글보급 등 그의 통치기간 12년에 이루어진 여러 과업은 장기 지속적으로 대한민국의 국가정체성을 결정하게 되여, 이후 후속 세대가 고도성장을 이룩하는 토대를 구축하였다.
이승만이 기독교인으로 변신하는 것은 한성감옥에 사형수로 수감되어 있던 1899년 2월 경이다. 과거제가 폐지된 뒤 방황하던 그는 우리나이로 20살이 되는 1894년 친구들의 권유로 영어를 배울 요량으로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에 입학하게 된다. 어머니는 그가 기독교에 귀의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입학을 용인한다. 거기서 자유민주의 이념과 철학을 알게 되고 조선을 미국과 같이 민주정치를 하는 나라, 자유인의 공화국을 만들기 위한 혁명가로 인생을 살 결심을 한다. 그는 한성회보, 매일신문, 제국일보와 같은 한국 최초의 일간 신문을 발간하고 나아가 서재필등과 함께 독립협회가 주관한 만민공동회에서 이나라의 애국계몽을 위한 얼혈청년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러다 고종황제를 폐위하려는 사건에 연루되어 한성감옥에 갇히게 되는데 처음 6개월간은 언제 처형될지 모르는 두려움에 몸을 떠는 나날이었고 목과 손은 무거운 형틀에 매인 나날이었다. 어느 날 아침 감옥의 문이 열리면서 간수들이 들어와 작고를 풀기에 드디어 처형되는가 생각하였는데 간수들이 같은 착고에 매인 다른 사람을 끌고 나가 처형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런 생사의 기로에서 문득 배재학당을 다닐 때 선교사들이 하던 하나님께 기도하면 자신의 어려움을 해결해 준다는 설교를 기억하고, 난생 처음으로 “오, 하나님은 나의 영혼을 구원해 주시고 이 민족을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였다고 한다. 그랬더니 갑자기 캄캄한 감방이 환해지면서 이승만의 마음에는 더없이 큰 기쁨과 평안이 찾아왔고 이후 이승만은 달라졌다고 한다. 그 때를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그때 비로서 외국인 선교사들에 대한 자신의 의구심과 증오심이 모두 사라지고, ”저들은 저들이 보배로 여기는 것을 우리에게 주기 위해서 이 땅에 왔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하였다.
바로 그 순간 이승만은 진정한 의미의 자유롭고 독립된 인간으로 거듭난 경험을 하였고 자유롭고 독립적인 인간은 원리적으로 세계인이라는 그의 철학은 5년 7개월 동안의 수감기간동안 수많은 일을 보고 겪는 가운데 완성하게 된다. 1904년 2월부터 6월까지 4개월간 저술한 『독립정신』은 완숙한 자유주의 사상가로서의 이승만을 잘 보여준다 할 것이다.
“제가 이승만을 알게 된 것은 지금부터 꼭 10년 전입니다, 2008년 7월 이승만의 『독립정신』이란 책이 현대어로 번역되어 출간되었습니다. 번역자가 그 책을 하나 전해 주었습니다. 무심코 그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저는 깊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저는 나이 27세에 대학원에서 들어간 이래 그때까지 30년간 줄곧 대학의 연구실에서 연구자로서 생활하였습니다. 그 사이 어느 교수도, 어느 선배도, 어느 동료 연구자도 이승만을 읽어보라고 권한 적이 없습니다. 이승만의 『독립정신』은 19세기 말 조선사회의 실상이 잘 나타내고 있으며 이승만이 추구한 자유와 독립의 정신, 그 자유민주주의 정치철학은 그 논리의 구조에서 18세기 영국의 존 로크라든가 그 계보를 잇는 애덤 스미스의 그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는 사실이다. 정규 대학교육을 받지 않은 이승만이 감옥에서 선교사들이 건네준 당시대 첨단 사상들의 책들을 통해 독서와 사색을 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존 로크의 정치철학과 애덤 스미스의 경제학에 도달하였다는 것 입니다.” (- 이영훈교수의 회고-)
이승만 이 『독립정신』에서 서술한 19세기 말의 조선사회의 실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천분의 일밖에 되지 않은 양반이 온 인민 위에 걸터앉아서 인민을 착취해 먹고 살았습니다. 양반 집 자제는 재주가 있건 없건 벼슬을 했으며 허학과 주색잡기로 한 평생을 허비하였습니다. 상민의 자식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졌어도 출세를 할 수 없는 그런 세상이었습니다. 그렇게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습니다. 소수의 양반신분이 모든 것을 독점한 세상이었습니다. 상민의 입장에선 적당하게 가난하게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하게 사는 길이었습니다. 조금 열심히 일하여 재산을 축적하면 양반관료들이 온갖 명분을 붙여 빼앗아갔습니다. 당시 조선을 여행한 영국의 비숍 여사는 양반관료를 가리켜 면허받은 흡혈귀라고 하였습니다.
상민의 아이 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남의 것을 훔치거나 빼앗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짓말이 그 수단이었습니다. 그래서 거짓말이 온 하늘 아래에 가득하였습니다. 한마디 한마디의 말이 거짓이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친구 사이의 말도, 심지어 부모 처자 간의 말도 거짓을 내포하였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고, 뺏고 빼앗기는 아비규한이었습니다. 최근의 어느학자는 그러한 사태를 두고 “국가가 해체된 홉스적 자연상태”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큰 고기는 중고기를 먹고 중고기는 소고기 송사리를 먹는 먹고 먹히는 거짓말과 사기가 넘치는 허랑방탕과 주색잡기로 뼈가 녹아나는 그러한 시대였습니다. 그리하여 내 재산이 있어도 과연 내 것인지, 내 처자가 있어도 과연 나의 가족인지가 불명한, 그리하여 과연 내가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조차 의심스런 가사(假死) 상태가 조선사회의 삶의 실태였습니다.
당시 이승만은 조선사회의 헐벗음과 부정직 낙후된 사회제도는 조선인들 각자가 자유와 독립 정신이 결여된 것이 근본적인 문제로 이해하였던 것 같다.
“인간이 자유인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귀중한 존재로 창조하였기 때문입니다 귀한 자나 천한 자나 그 육체를 보면 하나같이 긴요한 것들로 가득 차 있으며, 그 점에서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소중하고 평등한 존재로 창조하였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그 기묘한 것들이 다 인간에게 소중한 것들로 가득 합니다. 인간은 이 자연에 노동을 가하여 그 생산물을 먹고 사는 존재이며 근로의 주체로서 노동의 생산물을 자기의 것으로 소유하는 권리의 주체이기도 합니다 누구도 그의 신체와 노동의 성과를 소유하거나 빼앗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유와 독립의 존재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 세상을 기묘하게 창조하심에 있어서 인간에게 골고루 나누어 쓰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의 자연과 자원은 인간들의 공유물과 같습니다. 나누어 쓰는 범위가 넓을수록 인간이 쓸 수 있는 물건은 그 양이 많아지고 그 질이 높아집니다. 서로 물건을 교환하게 되면 지식이 발전합니다. 서로 경쟁하는 범위가 넓어집니다. 경쟁은 남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남보다 앞서 성공하고자 하는, 스스로 이롭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이 경쟁이 없이는 학문도 장사도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교환하고 경쟁하면, 그리고 그 범위가 넓어지면, 새로운 기술이, 새로운 지식이, 새로운 상품이 널리 개발되고 전파되니 이것이 곧 문명과 개화의 원리입니다“
그렇게 이승만이『독립정신』에서 피력한 자유의 정신은 동시에 평등, 독립, 개방, 교역, 축적, 진보의 논리다. 이승만은 이러한 문명의 이치를 가장 먼저 깨달은 사람들이 종교개혁 이후의 서유럽이라고 하였다. 그 원리가 점점 전파하여 전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점점 자유롭고 점점 소통하고 점점 부유해 지는 가운데, 세계가 점점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고 했으며 나중에는 흑인이든 황인이든 백인이든 모두 하나가 되어 자유로운 세상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실제로 오늘날 세계를 다녀보면 선진국이 바로 그와 같은 상태에 도달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승만은 놀랍게도 감옥속에서 앞으로 닥칠 세계사의 큰 흐름을 예언하였으며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고 자연을 창조하고 그 속에서 학목하고 번성하라고 내린 큰 법이라고 하였다.
오늘날의 경제학은 그것을 신고전파 주류의 정신세계로 삼고 있다. 오늘날의 정치학도 바로 그것을 세계평화의 원리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것이 다름 아닌 “칸트의 영구평화론”입니다. 그 영구평화론에 기초하여 지난 19, 20, 21세기 오늘날 세계는 한 걸음으로 평화와 번영의 길을 걷고 있으며 그것이 지난 2~3세기 간의 세계사를 이끌어온 주류로 작용하고 있다. 바로 그 문명과 개화의 정신세계를, 바로 그 광명정대한 세계사의 주류를 이승만은 110년 전에 벌써 그의 『독립정신』에서 설파 했던 것이다
나아가서 이승만은 이 같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사람을 가두고, 남과 통하지 못하게 하고, 사람을 억누르는 국가는 해체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문명과 개화의 큰 흐름을 거역하는 민족은 결국 소멸하고 말 것이라고 했다. 바깥에 극락과 같은 세상이 있는 줄 모르고, 대륙을 연결하는 전신과 전화가 가설되고, 비행선이 나르고, 기차가 달리는 그 세상이 있는 줄 모르고, 내 것이 제일이라 하면서 울타리를 치고 외국 손님이 오게 하지 못하게 하고, 백성을 나가게 하지 못하는 것은 그야말로 이 인간과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이 아니니, 다소간의 압제를 써서라도 반드시 풀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오늘날 우리 한국인들이 이 같은 이승만의 자유 정신에 투철했더라면, 그에 담긴 하나님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였더라면 오늘날의 북한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민의 노예 상태는 진작에 종식되었을 것이다. 북한 동포를 노예 상태로 묶어두고 함께 평화 공존한다는 것은 세계가 공유하고 그로 인해 번영하는 자유, 독립, 통상, 평화의 원리를 정면에서 거슬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할 것이다
1904년 8월 이승만은 5년 7개월의 감옥 생활을 마치고 민영환, 한규설 두 대신의 지원을 받아 미국 하원의장에게 한국의 독립청원서를 전달하는 밀사로 미국에 파견된다. 그때 서울에 주재한 많은 미국인 선교사들이 이승만을 미국 교회에 적극 추천하는 편지를 전달하도록 하는데 이승만은 하원의장을 만나 밀서를 전달하는 한편, 하와이 윤병구 목사와 더불어 데오도르 루즈벨트 대통령을 접견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
이후 이승만은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학부를,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꼭 5년의 세월이었다. 5년에 만에 3개 학위를 취득한 것은 이승만의 영어와 인문과학의 실력이 이미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었기에 가능 하였을 것이며 그가 지닌 천부의 재능도 한 몫의 큰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그가 프린스턴대학에서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은 독립 후 미국이 중립국으로서 전쟁상태에 있는 두 나라와 자유롭게 항해, 교역하는 권리를 누림을 전쟁 당사국으로부터 인정받고 성립시켜온 역사에 관한 것이었다 이미 감옥속의 『독립정신>에서 자유와 통상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는 입장을 정리하였고 그러하기에 미국 통상의 역사를 세계 자유의 역사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추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학위 논문은 매우 훌륭 하였으며 영어 작문에서는 물론, 실증의 사료에서까지, 논리 전개의 수준에서, 또 전례가 없는 논문 주제에서 까지 매우 우수하였다. 그로 인해 프린스턴 대학은 1912년 이승만의 박사학위 논문을 대학 출판부에서 책으로 출판하였다.
이후 미국의 하와이와 워싱턴에서 35년간 전개한 이승만의 독립운동은 이 같은 철학과 신앙에 입각한 것이고 일관된 것이었다. 그는 한국인이 자유와 독립의 인간으로 거듭날 필요가 있으므로 우선 교회와 학교를 세워서 하와이 교민들 부터 자유와 독립과 신앙의 인간으로 교육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는 기회가 있을 때 마다 미국 신문과 잡지에 투고하여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외쳤다. “저 국무성 창고에는 아직도 유효한 한 조각의 조약문서가 있다. 1882년 조선정부와 체결한 우호통상조약이다. 그 조약의 제1조에 조약 체결의 한 나라가 강한 나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조약 체결의 다른 나라는 선의의 거중을 든다는 내용이 있다. 미국은 그 조약을 위반하였다. 조선이 힘이 없고 부패 했다고 하나 그것은 이유가 되지 않는다. 미국은 미국의 독립정신을 하나님의 정의를 버린 것이나 다를바 없다.” 그렇게 그는 미국이 조선을 일본에 넘긴 것의 부당함을 끊임없이 지적하면서 미국의 양심을 파고들었다.
그는 미국과 일본이 태평양에서 충돌할 때 한국 독립의 기회가 올 것이라고 믿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독립운동을 외세 의존의 허무주의에 불과하다고 비난했지만, 실제 역사는 그의 기도와 예언대로 이루어졌다. 누가 이것을 감히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였을 때 이승만은 국제연맹 총회가 열리는 제네바로 달려가서 각국 대표들에게 일본의 영토 야욕과 한국인에 대한 학살과 약탈을 폭로하는 한편, 만주 문제가 만주에 거주한 한국인의 문제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음을 호소하였다. 이승만의 호소는 결국 일본이 세운 만주국을 국제연맹이 부인함으로써 일본이 국제연맹을 탈퇴하게 되는데 상당부분 기여하게 된다.
1937년 일본이 상해와 남경을 침략함으로서 중일전쟁이 본격적으로 벌어졌다. 1939년에는 제 2차 세계대전이 벌어졌다. 이승만은 바로 하와이에서 워싱턴으로 거주를 옮기게 되는데 드디어 그가 그토록 기다리던 일본과 미국의 이익이 서로 배치되는 그래서 전쟁이 발발하게 될 날이 가까워졌던 것이고 대한이 독립할 수 있는 시기가 도래하였기 때문이었다. 워싱턴에 도착한 그는 급하게 책을 쓰기 시작하여 근 1년이 걸렸다. 이것이 바로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예언하여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1941년 8월에 출간한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이다.
『일본내막기』에서 이승만은 일본의 실체를 바로 보라고 미국인에게 역설한다.
“미국은 일본의 선전에 속아 넘어가 있다 많은 미국 사람들은 일본을 평화의 나라 라고 생각한다. 반면 한국은 독립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우리 조선은 오래전부터 평화를 사랑하는 자유와 독립의 나라였다. 일본은 태평양, 미국·인도까지를 자기들이 지배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 신의 나라 이다. 전체주의 체제이다. 야마도의 제국이다. 일본은 전체주의 국가로서 무력에 의한 통상을 추구한다. 그리하여 조만간 개인의 자유와 국제자유통상을 추구하는 미국과 충돌할 것이고 침공할 것이다. 그럴수 밖에 없다.”
이승만이 『일본내막기』를 출간한지 불과 4개월 뒤 1941년 12월에 일본이 미국 진주만의 해군기지를 공격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승만의 책은 일약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승만은 난생 처음 인세 수입으로 백악관 뒤편 거리에 있는 붉은 벽돌집을 하나 구입하게 되는데 그곳을 임시정부 구미 위원회 본부로 활용하였다.
『일본내막기』는 미국의 모든 장교들이 읽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한국이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으로서 그들의 자유를 부당하게 박탈당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바로 그러했기 때문에 1943년 12월 카이로선언에서 미국은 한국의 독립을 약속하게 되는데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당초 미국은 전후처리 방안으로 조선에 대하여는 일본과의 병합을 찬성하였었다. 중국과 만주만 떼어내서 장개석 국민당정부에 넘기고, 한반도는 여전히 일본에 병합된 채로 남겨둘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한반도의 불안한 장래를 고려하여 그렇게 하는 편이 미국의 득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미국은 1910년까지 소급하여 한국을 일본으로부터 분리시킨다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것은 아무래도 이승만 박사의 오랜 세월에 걸친 대한에 대한 독립 호소가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지도에서 사라진 나라가 영구 소멸하는 것은 결국 남에게서 잊혀지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30년간 줄기차게 미국이 일본을 도운 정책은 실책이며, 한국인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함은 극동의 평화와 세계민주주의의 발전에 기여하는 길임을 호소하였었다.
미국인은 이승만의 외침을 들으면서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아직도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점차 그들의 이야기는 들을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카이로선언은 다름 아니라 세계의 자유인 사회로 부터 잊혀지지 않기 위해 그렇게 소멸하지 않기 위해, 이승만이 벌인 30년 사투의 결실인 것이다. 뒤이어 1945년 2월 얄타회담이 열리게 되는데 이승만은 미국과 영국이 한국을 소련에 넘기는 밀약을 체결했다고 폭로를 하게 된다. 전쟁을 수행하는 있는 미국, 영국등을 상대로 무모한 싸움을 걸었던 것인데 그것은 작가 복거일이 묘사한 대로 "영웅적으로 미친" 한 위대한 인물의 고결한 성품과 탁월한 예지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행위였을 것입다. 미국과 영국은 곧바로 이승만의 폭로를 부정하고 비난하였고 그것은 역설적으로 미국인과 미국 정부가 한국을 전승국 소련의 전리품으로 들어가는 것을 방치하지 않겠다는 다짐과도 같은 것이었다.
1948년 8월 11일 소련군이 한반도로 밀고 들어올 때 미국의 군부가 황급하게 38도 선에서 멈추라고 요구한 것도 따지고 보면 이승만이 혼신의 정열과 용기로 얄타 밀약설을 폭로한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승만은 일찍부터 보통의 조선인들에게 신화적인 인물로 부각되었는데 “최초의 영어 연설가”, “최초의 언론인”, “만민공동회의 활동”, “6년여의 감옥생활”, 기독교로의 개종과 전도“. ”미국 유학과 박사학위 취득“,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 등등. 이런 이유로 그는 3.1운동 이후 연해주와 상해, 한성등 여러곳에 세워졌던 임시정부들에서 수반으로 추대됨은 물론 이후 이 모두를 통합한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추대되게 된다.
그가 미국에서 구축한 미국 정치인, 언론인, 군부의 엘리트등과의 네트워크는 해방과 환국 이후 그가 자유인의 공화국으로서 대한민국을 건립하는 데 고비 고비마다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33년 만에 70세의 노령으로 고국으로 환국한 이승만을 다수의 한국인은 가부장으로서 환영하였으나, 그가 자유인의 공화국을 세우자며 개인의 근본적 자유가 새 나라의 기초이념이라고 소리칠 때, 많은 사람들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조차 알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승만을 국부로 봉대하고 그를 따름으로써 자유인의 공화국 대한민국을 건설하는 역사적 대오에 동참하였고 6.25라는 대 참화를 극복하였다. 그러나 1960년의 4.19로 이승만 대통령은 불명예 퇴진을 하게 된다. 4.19를 두고 흔히들 혁명이라 하는데 “혁명”의 원어적인 의미를 “새로운 이념에 입각하여 새로운 체제를 세운다”는 뜻이라면 진정한 의미의 혁명은 4.19가 아닌 자유와 독립의 새로운 이념에 입각하여 민주공화국이란 새로운 정치체제를 세운 1948년 8월 대한민국건국이라 할 수 있다.
4.19는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가 뿌리 깊은 역사적 제약조건등으로 인해 고작 12년 만에 기능부전의 심각한 위기에 빠짐으로써 발생한 일대 정치적 사고였다. 이승만 정부를 무너뜨린 민주당 정치세력도 1년도 집권하지 못하고 군인들의 구테타인 5.16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된다. 4.19로 대통령 이승만과 자유당만의 실패는 아니었으며 여야를 막론하고 기존의 정치세력 모두가 함께 쓰러져 갔다. 이후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민족적 민주주의 세력”이 경제와 사회를 일대 개조하는 시대가 열리게 되는데 크게 볼때 이승만은 역사의 미루어진 과업을 쇄신할 젊고 혁신적인 정치세력에게 길을 열어준 셈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승만시대의 12년을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할 것이다. 이승만이 불운했던 것은 건국 과정이 너무도 그의 개인적 능력이나 선택에 의존했다는 점, 그의 정치적 식견을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지식층이나 여론층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 그와 권력을 분점 할 정도의 정치적 권위나 지도력이 있는 인물이 없었다는 점, 국민들이 사상과 이념을 공유하지 못했고 정치가 역사적 요인으로 심하게 분열해 있었다는 점, 전통사회의 타성으로 인해 사회는 심하게 부패해 있었다는 점, 낙후된 산업구조와 전쟁으로 인한 경제부실, 그런 상황에서도 자유민주체제의 자율적 조정 능력을 지나치게 신뢰함으로서 모순을 방임했다는 점 등을 들수 있다.
이승만의 개인적 과오가 있었음을 부인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역사의 긴 관점에서 되돌아볼 때 자유국가로 새로 건국된 한국사회의 모순은 대부분 주자학에 근거한 정치철학으로 오래 통합되어 왔던 전통 소농사회가 전혀 이질적인 외래의 정치체제와 갑자기 접목됨에 따라 나타난 거의 피할 수 없는 마찰과 부작용인 것이다. 그러한 사회적 모순과 갈등은 지금도 마찬가지로 한국인들 대다수가 아직도 이 나라가 어떻게 세워졌는지 그 역사과정이 어떠하고 대한민국의 건국의미나 그 세계사적 의의가 무엇인지, 누가 중심적 역할을 하였는지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데 그 문제점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 점에서 대한민국은 110년 전의 대한제국과 마찬가지로 아직도 위기의 한가운데일지 모를 일이다.
마지막으로 작가 복거일의 이승만에 대한 해석을 소개한다.
“우남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개항기 조선 이라는 어둑한 시공에 그처럼 밝은 인물이 나타났다는 것은 생각할수록 설명하기 어려워지는 현상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누구도 자기가 태어난 시대를 뛰어넘을 수 없다고, 그리고선 덧붙인다. 자기 시대를 뛰어넘으려면 미쳐야 한다고. 그러고 보면, 우남의 행적엔 광기라고 부를만한 기운이 후광처럼 어린다. 자신이 태어난 시공을 벗어나 큰 세상으로 나아가려는 그의 노력에, 자신만이 아니라 자기 민족 모두를 이끌고 크게 발전된 세상으로 나아가겠다는 그의 비장한 염원에, 광기가 어리지 않을 수 없었을 터이다. 위대한 시인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영웅적으로 미친 (heroically mad)" 것이다.
내 생각엔 우남의 그런 "영웅적 광기”가 적잖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그를 미워하게 만든 것 같다 뛰어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믿고 따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지도자들을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미워하게 된다 아마도 그래서 우남을 잘 알게 된 서양 사람들이 불운한 그를 저버리지 않고 끝까지 도왔을 것이다. 자신이 태어난 시대를 뛰어남은 우남의 “영웅적 광기"가 서양 사람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고귀하고 합리적인 태도로 다가왔을 것이다.”
"(복거일 『樂劇 프란체스카-우연히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한국 여인-』, 북앤피플, 2018, 211~212)“
4. 오스트리아인 프란체스카 여사
A. 프란체스카 여사 생애 요약
1900년 6월 15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사업가 루돌프 도너의 막내딸로 출생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기 위해 상업전문대학 졸업 후 스코틀랜드에서 유학
1920년 개신교 자동차경주선수 헬무트 뵈룅과 결혼
1923년 헬무트 뵈룅과 이혼
1933년 2월 어머니와 구라파 여행 중 스위스 제네바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방문한 이승만 박사 만남
1934년 10월 8일 뉴욕 클레어몬트 호텔에서 이 박사와 결혼
1934년 워싱턴으로 독립운동 근거지 옮김
1940년 이 박사의 저서 ‘일본 군국주의의 실상’(원제: Japan Inside Out) 원고 타자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워싱턴 이승만 박사의 독립운동 도움
1945년 8월 15일 광복 / 10월 16일 이 박사와 함께 귀국
1947년 겨울부터 이화장에 기거
1948년 7월 20일 이승만박사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
1950년 6·25 전쟁 발발. 임시수도 부산 피난
1960년 4월 19일 4·19 혁명 발발
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 하야
5월29일 이승만 박사와 하와이 망명길 동행
1965년 7월 19일 이승만 박사 별세
1970년 5월 16일 박정희 대통령의 권유로 귀국. 20여년 간 이화장에서 생활
1990년 소피텔 엠배서더 호텔에서 90회 생일 축하연
1992년 3월 19일 0시 15분 92세의 나이로 타계
1992년 3월 23일 정동제일교회에서 영결식
B. 언론에 소개된 프란체스카여사의 일생
대한민국 최초의 영부인인 이승만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여사
비서로...민간외교관으로...든든한 그림자 역할 ‘톡톡’부잣집 셋째딸서 가난한 독립운동가의 아내로 축첩 타파· 부부동반 문화 만들기에 애써
유언으로 남편인 이승만 대통령이 독립운동 시절 사용하던 ‘바른 태극기’를 자신의 관에 넣어달라고 부탁했던 프란체스카 여사. 아들 이인수 박사(정치학)· 조혜자 부부는 “어머님께선 아버님을 뵈러 매주 금요일 국립묘지에 가시곤 했는데, 80년대 초 거기서 만난 한 오스트리아인이 어머님께 ‘오스트리아인이시죠?’했더니 대번에 ‘아니요, 난 한국인이예요’하실 정도로 한국 사랑이 끔찍하셨다”고 회상한다. 그런만큼 이들은 ‘오스트리아’(Austria)와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 호주)를 구별 못하고 편의대로 프란체스카 여사를 ‘호주댁’으로 불렀던 한국 국민의 무신경이 지금도 안타깝기만 하다. 시정 물가를 몰랐다던가 한국어를 배우려 하지 않았다는 것,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과잉보호로 인의 장막을 쳤다는 등 세간에 떠도는 프란체스카 여사에 대한 이런 저런 소문에 대해서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혈육으로서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초대 대통령 부인으로 기록되는 프란체스카 여사의 90여 년 삶을 이화장의 이인수· 조혜자 부부의 증언을 중심으로 여러 자료를 취합해 재구성해본다. 결혼 이전프란체스카 도너는 1900년 6.15일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중고시절 수학성적은 ‘수학의 진주’라는 애칭을 얻었고 상업 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영국 스코틀랜드에 3년간 영어 연수를 하여 영어 통역사자격과 타자-속기자 자격을 취득하였고 모국어인 독어와 불어를 구사하고 철물 무역과 청량음료 공장을 운영한 아버지 사업의 후계자로 현장 수업을 받아 행정과 사무의 능력을 고루 갖추었던 학식과 교양을 갖춘 부잣집 셋째 딸이었다.이승만 박사를 만나다
1933년 2월 어머니와 함께 파리 경유 스위스 여행길에 레만 호반의 뤼씨 호텔엘 묵었다. 국제 연맹 회의에 참석하는 세계 각국 사람들로 호텔식당은 만원을 이루고 있었고 프란체스카 모녀가 앉은 4인용 식탁 빈자리로 이승만 박사가 합석하게 되었다.이 박사는 이틀 동안 국제연맹이 다루는 일본의 만주침략 건과 관련하여 만주의 한국동포들이 일제의 학정에 시달리는 사연을 홍보하고 극동의 평화를 위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러 미국서 급히 날라 와 국제연맹 방송, 각국 대표와 신문기자들과의 면담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중이었다.프란체스카가 다음날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이승만의 전면 인터뷰 기사와 사진을 보고 이승만을 위해 스크랩해서 호텔 안내에 전하고 또 다른 신문에 난 기사도 잘라서 보내자 답례의 차대접으로 발전했다. 프란체스카 어머니는 여행을 중단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으나 프란체스카는 제네바의 이승만과 서신 연락을 계속했다. 7월 초에는 소련 입국비자를 받으러 비엔나에 온 이승만과 재회할 수 있었다.프란체스카는 일손과 돈이 한없이 필요한 이 독립투사를 위해 자기의 시간과 능력을 제공하였고 마침내 1년 3개월을 지나 두 사람은 34살, 59살로 사랑하는 가족의 반대와 한국인 동지들과 동포들의 반발을 받으며 1934년 뉴욕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반지도 여자가 준비했다. 가난한 독립운동가의 아내로 험난한 인생행로를 시작하는 것이다.1910년 한국 최초의 미국 박사학위를 얻은 이승만은 미국 정관계, 언론계를 통해 일제의 학정을 알리고 한국의 자주독립을 호소하고 있었다. 1913년부터 39년까지 하와이를 근거지로 민족교육과 홍보활동을 통한 독립운동에 전념하였다. 1918년 기독교를 통한 한국민족의 갱생을 목표로 한인기독교회(KCC)를 세우고 선교단을 만들어 하와이 뿐 아니라 아이오와, LA로 확산시켰고 또 한국 민족화를 위해 기독교 학교인 한인 기독학원을 만들어 하와이 일대에 있는 청소년들에게 민족교육과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 한편 1921년에는 독립운동단체인 대한인동지회를 조직하였다. 1919년 3.1 독립만세 때 서재필과 함께 필라델피아 한인대표자 대회에서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20년에는 상해에 가서 임시정부 대통령 직무를 수행하였다.독립운동가의 아내가 되다
결혼 직후 하와이 동포들은 서양부인을 데리고 오지 말라고 전보를 두 번씩이나 쳤으나 이 박사는 아내와 같이 승선을 했다. 프란체스카는 수심 가득했던 어머니 얼굴을 떠올리며 눈물을 많이 흘렸다. 부두에는 뜻밖에도 수많은 동포들이 나와 마중을 했고 1천명이 넘는 하와이 동포들이 큰 잔치도 벌여주었다.호놀룰루에서의 생활이 시작됐다. 첫 번째 한 것이 한국말을 배우려 노력하고 한복을 입고 김치를 담구는 것이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주부로 안주할 수가 없었다. 세 기관을 움직이는 남편을 따라 할 일이 많았고, 특히 한인기독학원의 실무를 지원했다. 학생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고, 아이들 머리도 감겨주고 식사도 준비했다.대한YWCA 고문을 한 박에스더는 10살부터 한인기독학원 기숙사 생활 중에 일본으로부터 빼앗긴 주권을 찾아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는 교장선생의 외침이 어린 마음에도 민족에 대한 어떤 자각심을 싹트게 하였다고 회상하고 있다.이박사 내외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워싱턴 D.C.로 옮겼다. 41년에 이 박사는 태평양 전쟁을 예언하는 영문 저서 ‘일본 군국주의의 실상’(Japan Inside Out)을 발간하여 미국 국무부와 의회에 경고를 주었고 ‘대지’의 작가 펄벅 여사는 “무서운 예언서”라고 평가했다.
세 번의 타이핑에 아내의 손끝은 무르고 터졌다. 베스트셀러가 되자 독립운동 자금도 많이 확보할 수 있었고 아내에게도 여윳돈을 주어서 이때 맞춘 검정 예복이 40년을 넘어 며느리가 물려받아 입고 있다. .이 박사의 집은 지식인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다. 이들이 공통으로 말하는 프란체스카 여사의 인상은 “웃음으로 반짝이는 눈, 남편에 대한 사랑의 충만, 남편과 남편의 일에의 전력투구”를 꼽고 있다. 프란체스카는 미모와 능란한 사교로 워싱턴의 저명인사의 부인들과도 교제를 했다. 가난한 독립운동가의 생활은 내핍과 검약뿐이었고 독립운동을 위해 밤낮없이 넓은 미국 땅을 이동할 때 프란체스카는 운전을 담당하였으며 무릎 담요는 온기 없는 차에서 남편을 기다릴 때의 필수 품목이었다.45년 해방되던 날 이승만 박사는 워싱턴의 신문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아내의 지혜와 용기, 인내와 슬픔, 노력이 나로 하여금 오늘 이날을 맞게 했다”고 하며 아내의 은공을 높이 치하하였다.
해방
대한민국에서 남편이자 대통령의 일등 비서가 되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자 이박사는 긴 해외생활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신탁통치반대, 모스크바 3상결정 취소 요구, 국토분단과 공산테러, 폭력, 혼돈이 난무하는 미군정 치하에서 이 박사는 좌우합작을 강요하는 하지중장과 결별을 선언하고 민족자결주의를 표방,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제헌국회구성 총선거가 유엔한국임시위원단 감시아래 48년 5월 10일 실시하여 198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했다.프란체스카는 처음 돈암장에 거주하고 다음해에 마포장으로 2개월간 이사했다가 10월에 이화장에 정착한다. 그녀는 한국이 독립하여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아담한 내 집을 갖는 것이 꿈이어서 “돈암장의 안마당 청소하던 때가 제일 행복했다”고 기억한다.해방 당시 훈련된 비서가 없었던 시절로 남편의 영문 구술에 따라 외교 문서를 타자기로 쳐서 정리하는 일이 많았다. 요인 암살과 정치인에 대한 총격이 난무하던 이 시기에 70세의 이승만 옆에는 프란체스카 여사는 총받이로 자처하며 붙어 다녔다.
영부인 시절 축첩 타파에 힘써...임영신 초대 상공장관 임명에 영향력
1948년 8.15일 대통령 취임으로 서양계 영부인에 대한 비판이 들끓었다. 그녀는 꿋꿋했다. 대통령이 된 후 미 군정으로부터 모든 것을 이양받는 과정에서 프란체스카 여사가 타이핑은 도맡았다.
경무대 안주인이 되면서 한 가지 관행을 바꾸려 애썼다. 손님을 초대할 때 부부 동반을 원칙으로 했다. 남자들의 회합에 기생이 노래와 춤을 하고 첩이 동행하는 풍습을 바꾸려 한 것이다. 축첩을 금지하는 내용을 임시국회 첫 회기에 반영시키려 하였다. 아내의 보좌를 받아온 이 대통령은 여성에 대한 신뢰가 높아 초대 상공장관에 임영신 여사를 임명하였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내핍과 검약으로 경무대 안살림을 꾸렸고 ‘쪼끔,쪼끔 사모님’으로 별칭을 얻었다. 나이가 많은 대통령의 건강과 식사에 제일 많이 신경을 썼다. 일본 총독과 미군정 하지 준장이 살았던 경무대를 전혀 수리하지 않고 지냈으며 목욕통이 짧아서 다리를 펼수 있도록 구멍을 더 파는 것으로 만족했다. 미장원엔 가지를 않고 블라우스는 천을 끊어서 만들어 입고 옷, 양말은 기워 입었고 내외의 내의와 양말은 직접 손으로 세탁하였다.
허술한 데가 없었다. 장교들의 도미시찰 여비를 일찍 귀국한 날짜만큼 반납을 받았고 도미유학장교단의 여비가 1.3배 과다 청구되었다고 미국 지도를 펴놓고 설명할 정도로 “돈 한 푼 물건 하나 절약하는 것이 애국”이라고 설득했다는 것이다.
여성계에서는 박마리아 여사만이 아니라 박에스더, 김활란, 김신실, 임영신, 편정희씨 등 영어가 통하는 사람들과는 교류가 많은 편이었다.
6.25전쟁 초기 석달 간 비망록 기록...영문편지로 세계 각지에 구호손길 요청 6.25 전쟁이 발발하자 27일 새벽 3시 경무대를 떠나 기차로 대구를 향했다. 작전상 탈출이었으나 이 결정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무초대사가 영부인의 도쿄 피난을 권했으나 거절했다. 수원, 대전, 부산으로 임시 정부수도를 옮겨가는 누추하고 헐벗은 피난생활은 대통령 부부라고 다를 것이 없었다.
그녀의 검은 머리는 은색으로 변해갔으나 그의 명랑함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녀의 웃음과 재빠른 언변은 남편을 늘 생기 있게 하였고, 남편이 실의에 빠지지 않도록 매일 최선을 다했다. 일주일에도 몇 번씩 일선 장병, 부상병, 포로 등을 접해야하는 최전방의 영부인이었고 학교, 병원 고아원, 30만명의 과부와 10만명의 고아들을 보살피는 일에 한국부인회가 함께 하기도 했다. 피난민의 생활을 둘러보고 미군 병사들도 방문하는 일정도 바쁘다.
항상 한복 긴치마, 앞섭이 긴 저고리, 손에 든 큰가방, 검은 선글라스의 차림이다. 부산에서의 생활환경은 척박했다. 여사는 남편의 체력과 건강을 위한 스케줄을 관리하고 하루의 많은 시간을 이대통령을 위로하는 세계 각지로부터 답지하는 글에 답장을 쓴다. 영어로 바로 쓸 수 있는 것이 큰 장점이었다.
하루는 대통령과 같이 밤새워 하와이와 미주에 있는 친지들에게 그리고 빈에 있는 친정가족에게 우리 부상병들을 위한 담요와 구호품을 보대달라고 37통의 편지를 썼다. 대통령의 편지를 받은 우리 동포들은 모두 울었다고 한다. 여사의 친정에서 제일 먼저 구호품을 보내왔고 하와이 미주에서도 속속 구호품이 도착했다
전쟁 중에 미국사령관을 만나는 등 미국과의 관계도 내외가 함께 나서서 많이 풀어나갔다. 영부인은 6.25일부터 9월 5일까지 전쟁 비망록을 써놓았다. 9.28 수복을 앞두고 서울로 돌아갈 수 있게 됐다는 희망과 기쁨을 김활란 박사와 나누기도 했다.
서울 환도 짐 속에 제일 먼저 타이프라이터를 챙기고 대통령의 낡은 스프링 코트을 접다가는 석달 전 한강철교를 건너 남하할 때 침통한 표정으로 자꾸 서울 쪽을 바라보던 대통령의 모습이 떠올라 눈물이 괴었다.‘이제 다시 한강을 건너 서울로 돌아가게 되다니… 정말 꿈만 같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YWCA, 한국부인회 등의 활동…박에스더, 김활란, 김신실, 임영신, 편정희 등과교우
서울YWCA 회관건립 건축모금 위원회가 프란체스카 여사를 명예회장, 다울링 대사부인을 회장으로 한 국제바자를 57년 5월 25일 미 대사관저에서 3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었고 이날 모인 1만2천 달러는 최이권 회장에게 건축기금으로 전달되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후원금을 박마리아 연합회 회장에게 전달하고 다음해 1958년 6월 23일 기공식에 박에스터와 함께 회관 건설의 첫 삽을 함께 떴다. 임영신이 회장인 한국부인회와의 교류 정도로 관계를 맺었다.
60년 대통령 하야 후 하와이 병상의 ‘베스트 와이프’로 헌신 간호
1960년 4.26 하야 성명을 내고 28일 이화장으로 돌아갔다. 대통령의 건강과 휴양을 위해 하와이에 다녀가라는 제의를 받고 한 달 후에 돌아온다는 말을 남기고 5월 29일 출발했다. 하와이에서는 옛 친구들, 한인기독학원의 옛 제자들이 공경과 사랑으로 받들었으나 고국을 그리는 마음과 나라 걱정만 커져갔다.
양자를 들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전주 이씨 양녕대군 문중에서 추진하여 17대 손 중에서 조카뻘 되는 청년 이인수씨를 입적시키고 12월 13일에 하와이에서 처음 대면했다. 이박사는 자나깨나 귀국만 생각하여 여비를 생각해서 이발비도 아꼈다. ‘내가 우리 땅을 밟고 죽는 것이 소원인데 여기서 죽으면 어떻게 해’ 상기된 눈에 눈물이 가득 맺혔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마우날라니 요양원에서 남편을 보살피고 방문객을 맞고 감사한 분들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 일과였다. 주치의의 조언을 받고 62년 3월 17일 출발 준비를 마쳤는데 박정희 정부가 귀국을 만류한다는 전갈을 갖고 총영사가 나타난 것이다.
그후 이 박사는 다시는 혼자서 일어나지 못했다. 65년 6월 말에 병세가 위독하여 인수씨가 다시 왔고 7월 19일 0시 35분에 임종했다. 조국의 품안에서 생을 마감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설움으로 남아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의식을 잃었다. 실의에 차고 병들기까지 한 남편을 헌신적으로 돌본 프란체스카여사의 별명은 베스트 와이프(best wife)였다.
그녀는 탈진하여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며칠 후 모국 오스트리아 빈으로 돌아가 여동생과 조카의 보살핌과 한국 유양수 대사 내외의 염려 속에 잘 지냈다. 아들 이인수씨는 68년에 조혜자씨와 결혼을 하고 70년에 첫 아들을 낳았고 프란체스카 여사는 5월 16일에 한국으로 영구 귀국하여 70회 생일을 맞이했다.
이화장에 다시 돌아와 ‘행복한 할머니’로 20여 년 여생 보내
나이와 국경을 초월한 국제결혼으로 32년 같이 보낸 사랑하는 남편인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추방지 하와이에서 한스럽게 떠나보내고 마지막 귀착지 이화장의 22년간은 행복한 할머니로서의 생활이었다. 아들 이인수 씨와 며느리 조혜자씨의 극진한 보살핌 속에 손자 병구와 병조를 1살 때부터 장성할 때까지 옆에서 지켜보며 가족의 기쁨을 맛보았다.
근검절약의 정신과 가족 건강을 지키는 우리 음식 솜씨는 며느리가 고스란히 전수받았고 기운 양말과 내복은 손자들도 다 수용한다.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국립묘지 공작봉을 매주 찾으며 날마다 남북통일과 집없는 사람을 잘 살게 해달라는 기도를 빼지 않고 쪽진 머리와 한복을 입고 한국 사람보다 더 한국적인 여인이 되어 한국을 사랑했다.
이화장 뜨락에 꽃이 만발할 때 많은 손님을 맞는 것이 늘 가족보듯 반가운 일이다. 안분지족을 잘 아는 분인 것 같다. 1992년 3월 19일 이화장에서 가족의 기도 속에 영면하고 사랑하는 남편 곁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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