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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새롭게 다시 만납시다! 16강
예수 믿기∙예수 살기
▷ 오늘이 “예수님을 새롭게 다시 만납시다!” 마지막 강의로군요.
그렇습니다. 성경공부를 마무리하면서 오늘 강의는 우리가 이 성경공부를 왜 시작
했는가를 확인하는 것에서 출발하고자 합니다. 이번 성경공부는 우리가 갖고 있던 기
존의 예수상(像:image) 또는 예수관(觀:view)을 재조명해 보고자 시작했습니다. 이를
위해 지금까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수’와 ‘그리스도’, 즉 ‘부활절 이전의 예수
님’과 ‘부활절 이후의 예수님’으로 구분하여, 역사적 예수는 어떤 분이셨는지 그리고
그 역사적 예수가 초기 기독교 공동체 속에서 어떤 분이 되셨는지에 대해서 살펴보았
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기존에 갖고 있던 ‘짬뽕 예수상(像)’을 해체하고 예
수님의 인성(humanity)을 복원하여 그를 믿기만 하는 것을 넘어 그의 삶을 살아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또한 ‘경험’에서 ‘은유적 표현’을 거쳐 ‘개념 정립’으로 이어
진 몇몇 그리스도론의 발달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예수 전승(tradition)이 역사적 예수
의 현재화(現在化)에 그 핵심이 있음도 공부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첫째, 역사
적 예수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기에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아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 믿기’를 넘어 ‘예수 살기’가 우리 신앙생활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 살기’는 믿음에 대한 기존의 우리 이해를 바꾸어 주고, 그
이해의 지평을 넓혀준다는 것입니다. 셋째, 성경과 기독교의 전통은 “과거에 저들에게
예수님은 누구였는가?”가 아니라 “현재 우리에게 예수님은 누구인가?”를 묻고 대답하
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여기
서’의 예수상(像)은 언제나 ‘그때 거기서’의 예수님과 잇대어 있어야만 합니다. 넷째,
이러한 역사적 예수와의 연속성에 바탕한 역사적 예수의 현재화는 우리의 신앙생활
또는 교회생활을 성찰하는 근거라는 것입니다. 크로산(Crossan)의 말대로 우리는 끊임
없이 “우리의 현재형태의 교회생활이 예수와의 연속성을 반영하고 있는가? 아니면 깨
뜨리고 있는가?”를 물어야 하고, 만약 깨뜨리고 있다면 그것들을 반드시 개혁해야 할
것입니다. 다섯째, 우리의 신앙생활은 단순히 종교적인 영역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사회·교육·문화 등 사회생활 전반과 연결되어 있어서 사회정의(Social
Justice) 실현에 참여함 없이는 ‘예수 살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
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
지를 드러내는 결정적인 계시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결정적인’ 계시는 ‘유일한’ 계시
가 아니며 따라서 종교다원주의에 대해 비배타적인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지난 15번의 강의를 통해서 여러 문제들을 다루었지만,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추려 본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이 가운데 몇 가지를
다시 추려서 복습해 하고자 합니다.
▷ 역사적 예수가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기에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아낼 수 있다
는 말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누구나 모차르트처럼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는 뜻입니다. 비록 예수님이나 모차르트 같은 사람이 흔히 나타나지는 않지만, 모든
인간은 예수님이나 모차르트 같은 사람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 ‘가
능성’을 ‘현실성’으로 바꾸는 것은 여전히 과제로 남습니다.
어떤 분은 보통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실제로 모차르트와 같은 천재적인 음악가
가 될 수 없듯이,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예수님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물론 사람이 타고난 자질(talent, 달란트)은 각각 다르고 차이도 납니다. 하
지만 이것이 ‘가능성’을 ‘현실성’으로 바꾸지 못하는 핑계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
도인의 삶에 대한 고대의 매우 폭넓은 비전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되어야만 한다”(we
are to become like Jesus)고 담대하게 확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 또는 닮는 것”(imitatio Christi)으로 알려진 이 비전은 신약성경 자체의 중심적인
비전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을 통해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에 대해서 말
하고(살전 1:6; 빌 2:5 이하), 복음서들은 제자도를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라고 증언
합니다.
또한 불교에서 “모든 인간이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듯이 성경도 “모
든 인간이 신성(divinity)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될 수 있는 증언을 포함하고 있습니
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신의 형상”(Imago Dei)대로 창조하셨다는 창세기 1장 27절의
증언이 바로 그것입니다. “신의 형상”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신학계에서 아
직도 논쟁 중이지만, 이것이 불교의 여래장(如來藏) 사상이 강조하는 “우리는 모두 여
래의 모태 혹은 씨앗을 품고 있어서 이를 일깨우고 키우기만 하면 모두가 성불(成佛)
할 수 있다”는 생각과 비슷할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을 설명하면서 ‘씨앗’과 ‘식물’에 비유한 것, 중세 독일의 영성가인 마이
스터 에카르트(Meister Eckhard)가 구원을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가 탄생하는 것”으
로 정의하면서 “내적인 탄생”(internal birth)을 강조한 것, 그리고 한국의 영성가인 다
석(多夕) 류영모 선생이 구원을 “우리 안의 참나(얼나, 靈我)를 회복하는 것”으로 해석
한 것 등은 기독교 안에도 인간 안에 내재된 신성(神性)의 씨앗에 대해 긍정하고 있는
전통이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과 모차르트 같은 사람들은 흔히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혀 나타
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인류 역사에는 많은 성인(聖人)들이 있었습니다. 저들은 예
수님과 똑같이 살지는 못했어도 저들이 살았던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
르며 살았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예배하고, 성인
들을 존경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넘어 저들을 ‘역할 모델’ 삼아 우리
의 삶의 현장에서 저들의 삶을 재현해야 할 것입니다.
▷ 하지만 이론과 현실은 다르지 않습니까? ‘예수 살기’를 시작하려고 하니 예수님과 나
사이의 간격이 너무나 커서 두렵고 감히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제8강에서 “사회적 예언자 예수님”을 공부하면서 이와 비슷한 질문에 답한 적이 있
습니다만(pp. 94-96 참조), 여기서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답해보겠습니다. 먼저 “우리
각자가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이 되자”는 것은 누구나 예수님의 경지에 도달해
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면 좋겠지만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에게 그것은 불가능
한 목표일 것입니다. 실현 불가능한 목표를 세우면 작심삼일(作心三日)이 되거나 아예
처음부터 포기하고 시작조차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이 되자”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
이 가지셨던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힘껏 실천하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
의 비전”이라는 말과 “힘껏 실천하라”는 말, 둘 모두가 똑같이 중요합니다. 먼저 “하나
님 나라의 비전”이라는 말은 우리가 지향하는 바가 예수님께서 지향했던 바와 같은
지를 가늠하는 기준이 됩니다. 예를 들어, 과거의 예수 운동은 포용적(inclusive)이었
고 그래서 boundary breaker로 기능했는데 현재의 교회 선교는 배타적(exclusive)이고
그로 인해 boundary keeper나 boundary maker로 기능한다면, 이는 예수님이 지향했
던 것과의 연속성을 깨는 일이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이 반대했던 일을 하는 난
센스를 범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What
would Jesus do?)라는 질문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실천적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
다. 하지만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도 실제로는 자기 바람을 예수님의 뜻인 양 그럴듯하
게 포장해 온 것이 기독교의 부끄러운 역사요 현실이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예수님
이 실제로 어떻게 사셨는가를 묻는 ‘역사적 예수 탐구’는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하고,
그 결과에 바탕해서 ‘그때 거기에서’와는 다른 ‘오늘 여기에서’ 역사적 예수의 삶을
창조적으로 계승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힘껏 실천하라”는 말은 소극적으로 표현하면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행하라”(Do what you can)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당장 수용 불가능한
예수님의 명령이 자주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부자 청년에게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막 10:21)고 하신
것이 그것입니다. 이런 극단적인 명령은 ‘예수 살기’는커녕 ‘예수 믿기’도 포기하게끔
만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이런 명령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거기에 대한
한 가지 해답이 디다케(Didache, 일명 열두 사도의 가르침 이라 불리는 초대 교회의
문서)에 나옵니다.
초대 기독교 공동체에는 예수님을 본받아 이곳 저것을 떠돌며 무상의 치유와 열린
밥상공동체를 재현한 유랑하는 선교사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마을에 들어가 보다
안정적인 삶을 살던 집 있는 사람들을 방문했을 때, 집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 비
전을 실현하기 위해 자기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유랑하는 선교사들처럼 당장 길을 나
서야 하는 것이 아닌가 고민하고 갈등했을 것입니다. 그런 저들을 향해 디다케는 다음
과 같이 권고합니다: “만약 주님의 모든 멍에를 질 수 있다면, 당신은 완전해질 것이
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행하라.”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행하라”(Do what you can). 그렇습니다! ‘예수 살기’는 내
가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감당할 수 없는, 그래서 부담
이 되고 멍에가 되는 일을 억지로 의무감에서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속박’이지 ‘해
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바라셨던 바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이
‘예수 살기’를 포기하고 ‘예수 믿기’에만 안주하는 구실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우선은 자신이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일에서부터 ‘예수 살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일단 시작하면 그 지평이 점점 넓어집니다. 지금 당장은 불가능해 보이는 것
들도 나중에 가면 가능해 집니다. 그것은 지금 얼마나 힘껏 ‘예수 살기’에 헌신하고 있
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따라서 때로는 ‘도약’도 필요합니다. 기독교의 전통은 이 ‘도약’을 ‘무조건적인 순종’
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견과 예측이 가능한 곳으로부터
나와서 예측이 가능하지 않는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보장되어 있는 곳에
서 나와서 아무런 보장도 없는 곳, 그러기에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할 수밖에 없는 길
로 나서는 것을 뜻합니다. 마치 그 옛날 아브라함 고향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땅으로 ‘갈 바를 모르고’ 떠난 것처럼 말입니다. 그 길은 부르심에의 ‘순종의 길’이자
동시에 ‘결단의 길’이요, ‘모험의 길’이기도 합니다. 이와 관련한 좋은 예가 마태복음
14장 22-33절에도 나옵니다.
하루는 제자들이 예수님 없이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밤중
에 갑자기 역풍이 몰아쳤습니다. 배는 사정없이 흔들려 곧 뒤집어질 것 같았습니다.
제자들은 죽음이 임박했음을 느껴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때 멀리서 예수님
께서 배도 없이 물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그들 중 누군가가 보았습니다. 그는 당황하여
“유령이다!” 하고 비명을 질렀습니다. 이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정말 유령을 본
것 같았겠지요. 그러자 예수님은 놀란 제자들에게 “힘내시오, 나요. 두려워하지 마시
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물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겁도 없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말 주님이십니까? 그러면 저더러 물위를 걸어 주님께로 오라고 명령하십시오.” 예
수님께서 “오시오” 하시자 베드로는 배에서 물로 뛰어내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물위
를 몇 발자국 걸어갔습니다. 하지만 거센 바람을 보고 그는 그만 겁에 질렸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자 잘 걷던 베드로는 물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
서 그는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라고 소리쳤습니다. 주님께서는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아주셨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풍랑이 이는 물위로 한 걸음을
내디뎌야 했습니다. 거침없이, 망설이지 않고, 높이 이는 풍랑이나 거센 바람을 보지
않고 오로지 주님만을 바라보고, 상대적으로 안전한 배를 떠나 우연과 불확실성이 지
배하는 곳으로 나아가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물위에 오래 서 있지 못했습니다.
그는 곧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갔고, 주님이 내미는 손을 필요로 했습니다. 우리는 이렇
게 신앙을 배워 가는 것입니다. 먼저 미지의 세계로 한 걸음 내디뎌야 합니다. 그 다음
에 우리는 때로는 풍랑을 만나 두려워 떨기도 하고 물 속에 빠지기도 하면서, 또 때로
는 우리 자신 속에서 피어오르는 유혹과 대결하면서 그렇게 신앙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렇듯 신앙이라는 것은 ‘결단의 한 걸음’을 내디디고 그 다음에 차차 배워 가는 것입
니다.
우리는 흔히 “믿는 자가 순종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생각은 온전한 것이 아
닙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해야 비로소 온전해 집니다. 그것은 “순종하는 자는
믿는다”입니다. “믿는 자가 순종하고, 순종하는 자가 믿는다”는 말이 온전합니다. 순
종은 신앙의 결과임과 동시에 신앙의 전제이기도 합니다. 순종치 않는 자는 믿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의 예처럼 믿기 전에 먼저 순종의 첫 출발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말을 자주 듣습니다. “저는 믿음이 없어서, 저는 신
앙이 부족해서….” 여기까지만 말하면 그것은 겸손입니다. 그러나 만약 “저는 믿음이
없어서, 저는 신앙이 부족해서 무엇 무엇을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불
순종입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있는 사람은 평생토록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스스로 부족하다고 말하는 그 신앙을 채울 길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저는 믿음이 부족합니다. 신앙도
부족합니다. 하지만 부족한 저를 쓰시겠다고 주님께서 부르시니 기꺼이 순종하겠습니
다. 주님께서 저를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믿
음이 비로소 성장할 수 있고, 우리 삶의 목적도 찾게 되고, 예수님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참여하는 특권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목사는 그의 저서 나를 따르
라 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믿는가! 그러면 담대하게 한 걸음 내 디뎌라. 예수
그리스도가 너를 반드시 인도하실 것이다. 믿지 않는가! 그래도 한 걸음 떼어놓아라.
이것은 명령이다. 신불신(信不信)의 여부는 문제가 안 된다. 오히려 즉각적인 순종만
을 요구한다. 신앙의 가능성과 존재 여부는 여기서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이렇듯
‘예수 살기’는 내가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하고, 때로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것까지도 순종을 통해 감당할 수 있어야 비로소 진보하는 것입니다.
▷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행하라”는 말이 큰 용기가 되는군요. 그런데 과연 어떤 일에
서부터 ‘예수 살기’를 시작해야 할까요?
그것은 여러분 스스로가 결정해야 할 일입니다. 여러분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부활절
이전의 예수님”처럼 ‘영의 사람’, ‘치병자’, ‘지혜의 교사’, ‘사회적 예언자’, 그리고 ‘운동의
촉매자’ 역할을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좋습니다. 참고로 마더 테레사(Mother
Teresa)가 쓴 책에서 읽었던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한 부유한 힌두 부인이 테레사 수녀를 만나러 왔었답니다. 그녀는 수녀님께 “저도 당신
의 일에 뭔가 나눔이 되고 싶어요” 하고 말했습니다. 수녀님이 “정말 좋습니다” 하고 대답
했더니, 이 여인은 자기의 약점을 이렇게 고백했다고 합니다. “저는 우아한 옷을 너무 좋
아해요.” 사실 그녀는 대략 8백 루피나 되는 값비싼 사리(sari)를 입고 있었다고 합니다.
수녀님의 것은 겨우 8루피밖에 안 되는 것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녀가 입은 옷은
수녀님이 입은 사리의 백배 이상 비싼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수녀님은 자기 일을 도와주고
싶어 하는 그녀에게 이렇게 권했답니다. “저라면 사리에서부터 시작하겠어요. 다음에 사리
를 사러 갈 때는 8백 루피짜리 대신 5백 루피짜리로 사십시오. 그리고 남은 3백 루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리를 사십시오.” 그녀는 그렇게 했고, 지금 그 여인은 백 루피짜
리 사리를 입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도 수녀님이 더 이상 싼 것은 안 된다고 그녀에게 충
고했기 때문에 그 정도에 머문 것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수녀님께 그것이 그녀 인생을 바
꾸었노라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그녀도 진정한 나눔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행하라”는 말은 반드시 자기 장점으로부터 시작하라는 뜻
은 아닙니다. 약점으로부터 시작하라는 말도 됩니다. 여러분의 ‘사리’(sari)는 무엇입니
까?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힌두 여인처럼 그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더 큰 진보를
가져올 수도 있을 지도 모릅니다.
▷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마더 테레사보다 10배 이상 비싼 사리를 입고 있지 않습니까?
만약 그녀도 8루피짜리 사리를 입는다면 더 많은 구제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카스트 제도(caste system)가 엄존하는 인도에서 귀족이
평민이나 노예의 옷을 입을 수는 없겠지요. 그렇다면 그것은 체제에 대한 정면 도전이
되고 예수님처럼 죽임을 당하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그녀가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일일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평가하
는 방식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출발선에 상관없이 누가 앞섰나를 가지고 인생을 평가합니다. 이런 평
가방식을 ‘상대평가’라고 합니다. 남과 비교해 자신을 평가하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하
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네 인생을 누가 누구보다 앞섰는가를 가지고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가 출발선에서 얼마만큼 나아갔는가를 가지고 평가합니다. 이것
을 ‘절대평가’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25장 14-30절에 실려 있는 “달란트의 비유”가 바
로 그 증거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 달란트의 비유에서, 주인은 세 종에서 각자 다른 양
의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가 그것입니다. 여기서 달
란트는 영어 talent의 어원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천부적인 재능 등을 뜻합니
다. 주인은 나중에 돌아와서 그 종들과 셈을 합니다. 그런데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았던 종들은 칭찬을 받았고,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심판을 받았습니다. 왜 입니까?
앞의 두 종이 남보다 더 많은 양의 달란트를 남겼기 때문입니까? 남보다 앞섰기 때문
입니까? 만약 그게 이유라면 다섯 달란트를 남긴 종이 두 달란트를 남긴 종보다 더
크게 칭찬을 받았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두 종이 똑같이, 한 글자도 틀리
지 않은 같은 말로 주인에게 칭찬을 받았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잘했다! 착하고 신
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마 14:21.23).
이 종들이 칭찬을 받은 이유는 많은 양의 달란트를 남겼기 때문이 아니라, 맡겨진 일
에 신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출발선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로 각각 다른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각자의 출발선에서 얼마만큼 신실하게 맡겨진 일에 신실했는가
가 하나님의 평가 기준입니다. 하나님은 출발선이 다르고, 그러기에 성과물의 양도 다를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이 사람과 저 사람을 비교해서 우리 인생
을 평가하지 않으십니다. 그 사람이 자신의 출발선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달란트를 가지
고 얼마나 신실하게 살았는가를 가지고 우리 인생을 평가하십니다.
따라서 남과 비교하며 나는 왜 저 사람처럼 살지 못하는가 하고 열등감을 가질 필요도
없고, 왜 저 사람은 나처럼 살지 않는가 하고 정죄해서도 안 됩니다. 자신의 달란트를
가지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행하며, 그 지평을 넓혀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 앞에서 ‘예수 살기’는 믿음에 대한 기존의 우리 이해를 바꾸어 주고, 그 이해의 지평을
넓혀준다고 했는데, 이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우리가 늘 사용하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에서 ‘예수’는 역사적 인물을 가리키고,
‘그리스도’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가 누구인지 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이름과 칭호를 나타내는 말로서 “그리스도(구원자)이신 예수”라
는 뜻입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적 예수가 그리스도(구원자)라는 ‘주
장’(affirmation 또는 assertion)이요 ‘믿음’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기초입니다.
실로 “예수님을 믿는 것”(believing in Jesus)은 우리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그런
데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많은 그리스
도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을 구원의 전제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구원, 불
신 지옥”이라는 표어가 이를 잘 웅변해 줍니다. 그런데 믿음을 구원의 전제 조건으로
내세우게 되면 신앙은 요구조건의 틀 속에 갇히고 맙니다. 인간은 구원을 얻기 위해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따라서 구원은 ‘은혜’(grace)가 아니고 ‘보상’(reward)이 됩니다.
나아가 이는 구원의 주도권(initiative)을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 갖게 되는 결과마저 초
래합니다. 내가 믿음을 가지면 구원을 얻고, 믿음을 가지지 않으면(혹은 못하면) 구원
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율법의 행함(work)’이 ‘믿음’으로 대체된 것뿐이지,
사도 바울이 반대한 기존의 구원 도식과 근본적으로는 똑같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을 예수님에 대한 성경의 증언이나 교회의
교리를 믿는 것과 동일시합니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믿음 이해는 기독교 역사에서 아
주 후대에 와서야 등장한 것입니다. 16세기에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여러 종교개혁
자들은 자기들을 가톨릭교회나 다른 종교개혁자들과 차별화하기 위해서 자기들만의
‘믿는 바’를 천명하기 시작했습니다. 루터교인은 x를 믿고, 장로교인은 y를 믿고, 침례
교인은 z를 믿고 등등. 이렇게 하여 각 교파들은 자기들만의 ‘믿음’ 혹은 ‘신조’(信條,
beliefs)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이라고 하면 이런 신조나 교리를 받아들이
고 고백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17세기 계몽주의와 더불어 과학
이 발전하면서 진리를 ‘사실성’(factuality)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생겼습니다. 그러면서
성경 이야기에서 사실이라고 인정할 수 없는 것들을 배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기독교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에 씌어있는 이야기들을 모두 ‘사실’
이라고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매우 의문스러운 것들
을 믿는 것”을 뜻하기 시작했고, 지식과 대립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이런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믿음이란 어떤 교리나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과 동
일시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을 구원의 전제 조건으로 이해하는 것이나 성경의 증언이나 교회의 교
리를 문자적인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성경이나 기독교 전통에서
믿음이 본래 의미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응답으로서
여러 차원의 의미를 가진 풍부한 개념입니다.
그 중 우리의 논의와 관련하여 꼭 살펴보아야 할 개념은 ‘신의’(信義, faithfulness)로
서의 신앙입니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신의를 지키는 것
입니다. 이 신의로서의 신앙은 자신의 마음(heart), 즉 가장 깊은 차원에 있는 자아
(self)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라틴어 credo의 어원적 의미인데, 신조(信
條)라는 뜻의 영어 단어 creed가 여기서 나왔으며, 통상 “나는 믿습니다”(I believe)라
고 번역합니다. 따라서 “나는 믿습니다”라는 말은 본래 일련의 교리적 주장들을 지적
으로 ‘승인’(assent)한다는 뜻이 아니었고, 보다 깊은 차원의 자아를 하나님께 ‘헌
신’(commitment)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영어로 표현하면, “I believe”는 “I give my
assent to”가 아니라 “I give my heart to”이고, 나아가 “I commit my loyalty to”나
“I commit my allegiance to”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에 관한 증언이나 교리를 믿는다 것’이 아
니라, ‘예수님께 (또는 예수님 안에서 알려진 하나님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헌신하는 것’을 뜻합니다. 헌신(獻身, commitment)은 머리나
생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관념이 아닙니다. 헌신은 몸으로 그리고 삶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어 단어 believe의 어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영어
believe는 독일어 belieben에서 왔는데, 이 단어는 ‘믿는다는 것’(to believe)이라는 뜻
보다는 ‘사랑한다는 것’(to love)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영어 believe는
belove와 깊은 관계가 있으며, 우리가 믿는 것은 곧 우리가 사랑하는 것과 다르지 않
다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신앙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
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To believe in God is to belove
God). 나아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실로 신앙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입니다(faith is our love for God).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
마음에 충만하면 우리는 행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 “과거에 저들에게 예수님은 누구였는가?”가 아니라 “현재 우리에게 예수님은 누구인
가?”를 묻고 대답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라는 말을 보충해서 설명해 주시겠
습니까?
그것에 대해서는 제12강 “부활절의 진실⑵”를 공부하면서 이미 자세히 다루었습니
다. ‘복음’은 문자 그대로 ‘기쁜 소식’이기에 소식(news)이라는 그 본질적 성격상 반드
시 업데이트(update)되어야 하고, 발전하는 전승으로서의 각 복음서들은 자신들이 전
해 받은 역사적 예수를 취하여 그 때의 예수를 어떻게 지금 자신들이 체험하고 있는
현재의 그리스도로 이해하는가(how we see Jesus-than as Christ-now)를 규범적으로
보여준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예수의 현재화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요 과제
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오늘은 조금 다른 각도에서 접근해 보고자 합니다. ‘대속
(代贖) 신앙’의 재해석이 바로 그것입니다. ‘대속 신앙’(redemption faith)은 “예수님께
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었다”(Jesus died for us)는 것에 대한 다른 표현입니다. 왜 저들
은 예수님이 자신들을 대신해서 죽었다고 생각했을까요? 교리라는 안경을 벗고 저들
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되었을 때 그의 추종자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자식을
낳아 키우는 부모들은 누구나 자식을 앞세운 부모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앞길이 창창한 젊은 자녀가 불의의 사고나 병으로 요절을 했다면 부모들은, 특히 어머
니들은 자기 목숨과 자식의 목숨을 맞바꾸었으면 하고 소원할 것입니다. 반드시 누군
가 한 사람이 죽어야 한다면, 부모들은 당연히 자식이 아니라 내가 죽기를 자처할 것
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추종자들이 자식을 앞세운 부모의 심정과 꼭 같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맛보게 된 참 세상, 이 세상에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사람대
접을 받으며 살지 못했는데 예수님이 벌인 하나님 나라 운동을 통해서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체험한 그들,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지는 것이 어떤 것인지
를 실재로 경험한 그들이 느꼈을 가슴 벅찬 감동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
까! 예수님에 대한 감사와 감격, 사랑과 존경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자기들이 체험한
살맛나는 세상이 예수님에 의해 더 널리 널리 확산되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랬겠습니
까! 그런데 그만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으로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살아서 계속
일을 해야 하고, 이제 더 이상 원도 한도 없는 나는 죽어도 되는데, 내가 죽고 그가
살아야 하는데, 그가 죽고 내가 살다니…. 그 심정이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내가 죽고 그가 살아야하는데, 내가 살고 그가 죽다니, 그가 나를 대신해서 죽다
니….” 이것이 바로 대속 신앙입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이사야서 53장에 나오는
고난 받는 종의 노래를 통해 예수님의 죽음을 그렇게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
간 관점이 바뀝니다. “그가 나를 대신해서 죽었다면, 내가 그를 대신해서 살아있다는
말이 되는데, 그렇다면 살아남은 내가 할 일, 살아남은 자의 몫이 무엇인가”를 자연스
럽게 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서 죽었다고? 그렇다면 지금 나는 예수
님을 대신해서 살아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예수님이 살던
삶을 본받아 살아야 옳겠지.” 이렇게 이어지는 것입니다. 대속 신앙이란 흔히 우리가
오해하듯이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덕분에 그 보혈의 공로로
내 죄는 모두 씻겼으니 이제 만사형통이다”가 아닙니다. 대속 신앙의 초점은 대신 살
아남은 자의 몫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나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죽었다’는 관점에서 ‘이제부터는 살아남은 내가 예수님을
대신해서 그가 남기고 간 몫을 기꺼이 감당하며 살아야지’ 라는 관점으로의 변화, 그
전환점(turning point)이 바로 부활 체험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내가 남남이 아니라
‘우리’라는 운명공동체로 묶여있음을 확신할 때 가능한 경험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있고 내가 예수님 안에 있다는 확신, 예수님과 내가 한 운명공동체임을 믿는 믿음, 여
기서 예수님의 죽음이 곧 나의 죽임이요 예수님의 부활이 곧 내 부활이라는 신앙고백
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이렇게 고백
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중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답니다: “What I hear I forget, what I see I remember,
what I do I understand”(나는 들은 것을 잊어버립니다. 본 것은 기억할 것입니다. 그
런데 실천해보니 비로소 이해가 됩니다). 이제까지 총 16번의 강의를 통해 참 많은 것
을 들었을 것입니다. 저의 부족함 때문에 이해하지 못한 것도 굉장히 많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살기’를 시작해 보십시오. 그러면 분명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
른 삶의 ‘차원’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도 바울의 다음 기도가 여러
분의 현실이 될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마는,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고전 13:12). 새만남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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