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여 년 전,
불교 핵이란 삼이 깊은 산에 있음을 알고
열심히 찾다.. 심 보았다!~ 했는데..
이게 참 삼인가?.. 지금도 바라본다.
만일 땅에서 얻은 삼이라면 확인을 할 수 있으련만..
허공에서 얻은 삼이기에 진짜인지 아닌지.. 더욱 확인이 어려운지도 모른다.
삼을 찾아 나선 이유는..
불교를 공부하던 중 석가모니부처님을 만나게 되었고..
석가세존의 가르침인 무상, 무아, 중도를 <반야심경>에 나오는 5온, 12처, 18계, 12연기, 4성제를 통해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을 알았는데..
대승불교인 우리 불교 안에서는 석가세존의 핵심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초기경전인 아함경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1990년대만 해도 한문 경전이었고, 아주 부분만 한글로 번역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2000년에 접어들면서 동 국역경원에서 한글로 번역된 <잡아함경>이 나와 비로서 전 내용을 볼 수 있었으니..
흐뭇한 마음으로 <잡아함경>을 처음부터 하나 하나 볼 수 있었다.
그러다 "심봤다"를 외칠 수 있는 곳을 발견했으니..
얼마나 신이 나고 기뻤던가!
이런 발견을 해 줄 수 있었던 모든 분의 수고에 감사할 뿐이었다.()^^.
그것은 상좌부 논사들이 무시한 부분으로..
대승불교는 무시당한 상좌부 불교를 기반으로 상좌부를 비판하며 지금에 이른다.
그것을 간단히 정리해 보면..
석가세존의 가르침인 정(正)에서..
시간 속에 세존의 정에서 벗어난 <구사론>과 <청정론>이 편집되어 나오니 그것이 반(反)이라면..
그 상좌부를 을 부정하는 반야부는 석가세존의 정통을 다시 이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합(合)이 된다.
그런 합은 석가세존의 정통을 벗어난 매우 중요한 부분이 있었다.
해서 기쁨으로 그 부분을 전하면서.. 나름의 설명을 덧붙여 말하기 시작해 지금에 이르기 수십 년..
그것에 대한 많은 논쟁도 있었지만..
좋은 성과는 아직 못 보고 있다.
첫째 내 능력 부족이라고 생각하지만..
더 궁금한 것은 과연 내가 바르게 본 것은 맞는가?.. 잘못 본 것은 아닌지.. 하는 것이다.
어느 날 스승이 제자들을 모아놓고,
"에이가 삼을 보았다 하고 내가 삼이 맞다고 그에게 말했는데.. 사실 그것은 삼이 아니었어" 하니
어느 제자가 에이를 찾아가 그것을 말하니, 에이가 하는 말
"그게 삼이든 아니든 나에겐 삼일 뿐이야" 하더란다.
내가 본 심[삼]은 무엇인가?.
일체는 존재가 아니라 법[마음] 그림자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일체가 무엇이냐고 묻는 당시 지식인인 바라문이 묻자,
"일체는 12처에 의해 생긴 것입니다" 라고 답한 것이다.
그런데 그 바라문은 (안과 색), (이와 성) 등 2쌍6처로 설명하는 12처가 무엇이냐? 고 재차 묻지 않고 돌아갔다고 한다.
그런 12처에 대해 세존은 다른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12처는 마음에서 생긴 2법6쌍" 이라고 설하신다.
바라문이 12처 설명에 만족하고 돌아간 이유는..
당시 일체를 설명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 설이 있었으니..
하나는 주류였던 브라만교[후에 힌두교]에서 주장하는 천지 창조설이고,
다른 하나는 기원전 6,7 세기 새로 나온 주장으로 물 등 근본 원소가 화합하여 만들어졌다는 원소설이 있었다.
그런데 소문에 의하면 그런 두 주장과 다른 주장을 석가세존이 가르친다는 말을 듣고 바라문이 찾아와 물었고..
그는 석가세존의 가르침은 창조설이나 원소설과 정말 다른다는 것만을 확인하고 돌아간 것이다.
무엇이 다른가?.
창조설이나 원소설은 관찰자와 관계없이 외부에 놓여 있는 것을 일체로 삼고 그런 일체를 창조설이나 원소설로 설명하고 있다.
그에 반해 세존은 일체는 외부에 존재하는 게 아닌 관찰자인 주체와 대상이 만나 있는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곧 외부에는 일체가 있는데..
그것들은 창조주가 창조한 것이거나 아니면 자연의 원소들이 화합하여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일체를 알아채는 자인 주관이 없으면 과연 그런 일체를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창조설이나 원소설은 관찰자인 나를 하나의 존재처럼 취급하고 있는데 반해
불교는 인간 그 가운에서도 세상과 만나고 있는 자인 나를 가장 중요한 자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만일 내가 나의 소중함으로 모르고 생활 속에 묻혀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다면..
그런 자는 그냥 살아 움직이고 있는 하나의 동물일 뿐이다.
일체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냄새가 있고, 맛이 있고, 감촉할 수 있어 인식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존재하는 일체에서 중요한 것은 존재하는 것과 함께 그것을 알아채는 자의 인식임을 강조하는 내용이 <잡아함경>에 나오니..
319. 일체경(一切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이 때 생문(生聞) 바라문이 부처님 계신 곳으로 찾아와 서로 문안 인사를 나누고, 한쪽에 물러나 앉아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구담이시여, 이른바 일체(一切)라 하는데 어떤 것을 일체라고 합니까?"
"일체는 12처(處)
[안색(眼色)], [이성(耳聲)], [비향(鼻香)], [설미(舌味)], [신(촉身觸)], [의법(意法)]에 의해 생기니,
이것을 일체라고 합니다.
만일 또 어떤 사람이 '그것은 일체가 아니다.
나는 이제 사문 구담이 말하는 일체를 버리고 따로 다른 일체를 세우겠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다만 말만 있을 뿐이니, 물어도 알지 못하여 그 의혹만 더 커질 것입니다.
왜냐 하면 경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때 생문 바라문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안과 색 등 2법인 6쌍으로 생긴 것을 일체라 하여..
우리의 감각 능력을 일체의 전방에 세우고 있다. 그러기에 일체라 하려면
그것은 우리 감각기관에 접촉이 되어야 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경계는 감촉기관에 접촉이 가능하면 경계 안이 되고, 감촉을 벗어나면 경계 밖이 된다.
창조설이 옳으냐 그르냐는 판단의 잘못을 하기 전에.. 창조설 문제는 창조주가 있음을 누구든 감촉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기독교에서는 자기들 신을 유일한 창조주라 하면서 타 종교의 창조주는 무시하고 있는데..
힌두교는 브라만을 창조주라 하고.. 우리나 중국은 고유 창조신이 있다.
그렇다면 과여 누가 진정한 창조주인가?.
우리는 알 수 없다. 왜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를 경계를 벗어난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당시 유물론으로 현대는 과학이라 불리는 유물론만 인정하자는 게 석가 가르침인가?.
과학은 주관을 무시한 제3자적 입장에서 관찰할 수 있는 것만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불교는 잘났든 못난든 우리가 감촉하는 것을 일체라 했다.
부처님 당시 그들이 감촉한 것은 그들의 일체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그들이 감촉하지 못했던 우주를, 미세한 바이러스 세계를 현미경과 망원경을 통해 감촉하며 살고 있다.
그들은 들을 수 없던 수천 수만리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듣고 보면서 살고 있다.
미래 세계는 우리보다 어떤 것을 더 감촉하며 살아갈지..
그런가 하면 아프리카 오지에 사는 이들이나 감각기관 일부가 망가진 이들은 정상인만큼 감촉을 하지 못하니 그들이 접하는 일체는 정상인보다 훨씬 작다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일체는 사람마다 다르게 알면서 살아간다.
그것을 <잡.319경>은 설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319경>에서 세존이 강조하고픈 정말 중요한 곳을 슬쩍 지나가고 있으니..
일단 감촉의 중요성을 강조하다 보니.. 그만큼 또 중요한 감촉한 것을 인식하는 중요성이 빠진 게 그것이다.
감촉이 있으면 당연히 그것을 인식[수, 상]하는데..
감촉이 있어도 인식이 되지 않으면 시체가 감촉한 것처럼 감촉은 있으나마나가 된다.
그런 수[느낌]과 상[이미지, 인상]에 대한 설명 대상은 바라문이 아닌 제자 그것도 몇 명에 국한된다.
왜냐면 제자라 해도 그들이 잘 이해할 수 없다고 보았기에..
214. 이법경(二法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두 가지 인연이 있어서 식(識)이 생긴다. 어떤 것이 두 가지인가? 이른바
[안(眼)과 색(色)], [이(耳)와 성(聲)], [비(鼻)와 향(香)], [설(舌)과 미(味)], [신(身)과 촉(觸)], [의(意)와 법(法)]이니라.
안(眼)과 색(色)을 인연하여 안식(眼識)이 생기나니,
그것은 무상하고 유위(有為)이며 마음을 연하여 생긴 것이다[心緣生].
만일 색과 안과 식이 무상하고 함이 있으며 마음을 연하여 생긴 것[心緣生]이라면,
이 세 가지 법이 화합하는 접촉[觸], 접촉 뒤의 느낌[受], 느낌 뒤의 의도[思], 의도 뒤의 생각[想],
이러한 모든 법도 다 무상하고 함이 있으며 마음을 연하여 생긴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이른바 접촉[觸]·생각[想]·의도[思]이다.
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였다.
눈[안]이 사과[색]를 보면 사과라는 인식[안식]이 생긴다.
안과 색과 안식 1이 접촉하는 것은 3사화합이라 하는데..
이때 안식 1과 3사화합으로 생긴 안식은 다르다.
안과 색이 만나면..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과거 경험인 안식이 생기니..
그것을 안식 1이라 했고..
안과 색과 경험인 안식1이 화합하는 것을 3사화합이라 한다.
그렇다면 내가 보았다는 "심[삼]"은 무엇인가?
3사화합에 있는 안식이 마음에 생긴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214경>을 바르게 보면..
3사의 요소인 안식은 물론 보는 자인 안과 보이는 대상인 색 역시 마음에 일어나 있는 '심연생[心緣生]'이라고 하는 곳이다.
안(眼)과 색(色)을 인연하여 안식(眼識)이 생기나니,
그것은 무상하고 유위(有為)이며 마음을 연하여 생긴 것이다[心緣生].
왜 이곳이 나에겐 "심"이고.. 의심이 끝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