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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UME I FANTINE
BOOK FIRST - A JUST MAN(올바른 사람)
CHAPTER V - MONSEIGNEUR BIENVENU MADE HIS CASSOCKS LAST TOO LONG(비앵브뉘 예하는 같은 법의를 너무 오래 입었다)
The private life of M. Myriel was filled with the same thoughts as his public life. The voluntary poverty in which the Bishop of D- lived, would have been a solemn and charming sight for any one who could have viewed it close at hand. Like all old men, and like the majority of thinkers, he slept little. This brief slumber was profound. In the morning he meditated for an hour, then he said his mass, either at the cathedral or in his own house. His mass said, he broke his fast on rye bread dipped in the milk of his own cows. Then he set to work. A Bishop is a very busy man: he must every day receive the secretary of the bishopric, who is generally a canon, and nearly every day his vicars-general. He has congregations to reprove, privileges to grant, a whole ecclesiastical library to examine,-prayer-books, diocesan catechisms, books of hours, etc., -charges to write, sermons to authorize, cures and mayors to reconcile, a clerical correspondence, an administrative correspondence; on one side the State, on the other the Holy See; and a thousand matters of business. 미리엘 씨의 개인적인 생활은 그의 공적인 생활의 철학과 다르지 않았다. 이 디뉴의 주교님은 스스로가 바라는 청빈한 삶을 올곧이 살아갔으며, 그것은 직접 본 사람에게는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모든 노인과 사상가가 그렇듯이 그는 잠을 오래 자지 않았다. 그러나 짧은 시간 동안 숙면을 취했다. 아침에는 한 시간쯤 명상을 했고, 그 후에 대성당이나 자기 집에 마련한 기도실에서 미사를 드렸다. 그 이후에는 집에서 기르는 젖소에서 짠 우유에 호밀방 한 덩이를 곁들여 아침을 먹었고 그날의 일을 시작했다. 주교는 매우 바쁘다. 거의 매일 주교관의 서기를 만났으며 관할 교구의 사제보들을 만나야 했다. 각종 수도회를 감독하며 기도서나 교구의 교리문답 등 서류를 살피고 교서를 쓰고 강론을 허가하는 일도 빠뜨릴 수 없었다. 중미 사제와 시장이나 읍장 간의 관계를 조율하고 정부나 바티칸에 서신을 쓰는 등 처리해햐 할 일이 수없이 많았다.
What time was left to him, after these thousand details of business, and his offices and his breviary, he bestowed first on the necessitous, the sick, and the afflicted; the time which was left to him from the afflicted, the sick, and the necessitous, he devoted to work. Sometimes he dug in his garden; again, he read or wrote. He had but one word for both these kinds of toil; he called them gardening. "The mind is a garden," said he. He was seen walking alone, buried in his own thoughts, his eyes cast down, supporting himself on his long cane, clad in his wadded purple garment of silk, which was very warm, wearing purple stockings inside his coarse shoes, and surmounted by a flat hat which allowed three golden tassels of large bullion to droop from its three points. 그러한 크고 작은 일들과 미사를 마치고 남는 시간에는 가난한 사람과 병자를 위해 일했다. 어떤 때에는 정원의 꽃밭을 가꾸고, 책을 읽고 글을 쓰기도 했다. 그는 그 일을 밭일이라고 부르면서 “인간의 정신은 밭이다.”라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정오에는 그는 점심을 먹었다. 아침상과 마찬가지로 점심상도 소백했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그는 2시쯤 집을 나서서 들과 시내를 다니며 오두막집들에게도 들렀다. 긴 지팡이를 쥐고, 자줏빛 외투를 걸치고 자줏빛 긴 양말에 큼지막한 신발을 신고서 술 달린 납작모자를 쓴 채 깊은 생각에 잠겨 길을 걷는 그의 모습은 사람들게게 친근했다.
It was a perfect festival wherever he appeared. One would have said that his presence had something warming and luminous about it. The children and the old people came out to the doorsteps for the Bishop as for the sun. He bestowed his blessing, and they blessed him. They pointed out his house to any one who was in need of anything. Here and there he halted, accosted the little boys and girls, and smiled upon the mothers. He visited the poor so long as he had any money; when he no longer had any, he visited the rich. As he made his cassocks last a long while, and did not wish to have it noticed, he never went out in the town without his wadded purple cloak. This inconvenienced him somewhat in summer. 그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잔칫집이 되었다. 그가 지나가는 길에는 언제나 따사로운 빛이 들었다. 어린이와 노인은 태양빛을 반기는 듯 그에게 환호를 했다. 그는 모든 이에게 축복을 주었고, 사람들은 그를 축복했다. 깊은 시름과 절망에 빠진 이들은 모두 주교의 집을 찾았다. 주교는 길을 걸으며 언제나 아이들에게 말을 걸었고, 어머니들에게 미소를 보냈다. 주교는 남는 돈이 있을 때면 가난한 이들을 찾았고, 돈이 없을 때는 부자들을 찾아갔다. 주교가 입은 법의는 너무 낡아서 누더기에 가까웠다. 주교는 그것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하려고 자주빛 솜 외투를 위에 걸쳤다. 여름철이 오면 주교는 매우 곤란하고 불편했다.
On his return, he dined. The dinner resembled his breakfast. At half-past eight in the evening he supped with his sister, Madame Magloire standing behind them and serving them at table. Nothing could be more frugal than this repast. If, however, the Bishop had one of his cures to supper, Madame Magloire took advantage of the opportunity to serve Monseigneur with some excellent fish from the lake, or with some fine game from the mountains. Every cure furnished the pretext for a good meal: the Bishop did not interfere. With that exception, his ordinary diet consisted only of vegetables boiled in water, and oil soup. 주교는 저녁 8시 30분이 되며 마글루아르 부인의 시중을 받으며 누이 동생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평소의 상차림은 아주 검소했다. 하지만 주임 사제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할 때는 마글루아르 부인은 매우 반기면서 싱싱한 생선과 맛있는 고기를 식탁에 놓았다. 주임사제에게는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야 한다는 게 마글루아르 부인의 철칙이었다. 주교는 부인의 뜻을 가로막지 않았지만 보통의 식사는 삶은 채소와 스프가 전부였다.
Thus it was said in the town, when the Bishop does not indulge in the cheer of a cure, he indulges in the cheer of a trappist. After supper he conversed for half an hour with Mademoiselle Baptistine and Madame Magloire; then he retired to his own room and set to writing, sometimes on loose sheets, and again on the margin of some folio. He was a man of letters and rather learned. He left behind him five or six very curious manuscripts; among others, a dissertation on this verse in Genesis, In the beginning, the spirit of God floated upon the waters. With this verse he compares three texts: the Arabic verse which says, The winds of God blew; Flavius Josephus who says, A wind from above was precipitated upon the earth; and finally, the Chaldaic paraphrase of Onkelos, which renders it, A wind coming from God blew upon the face of the waters.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주교님은 주임 사제를 대접하지 않을 때는 마치 트라피스트(매우 검소한 트라프파의 수도사)처럼 식사를 하신다고 해.” 저녁 식사 뒤에는 30분쯤 비티스티 양과 마글루아르 부인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방으로 돌아가서 루스리프나 이절본의 여백에 글을 썼다. 주교는 글을 잘 쓰는 학자이기도 했다. 학문적 성취가 뛰어난 대여섯 편의 원고도 있었다. 그 중 <창세기>의 이런 구절에 관한 논문도 있었다. ‘태초에 하느님의 영이 물을 덮고 있었다.’ 그는 이를 세 가지 원전과 대조했다. 아라비아어 번역은 ‘신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라고 되어 있었고,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유태인 역사학자)은 ‘천상의 바람이 지상으로 불어 내리고 있었다.’ 라고 했으며 옹켈로스는 칼데아어로 이렇게 해석했다. ‘신의 바람이 물 위로 불고 있었다.’
In another dissertation, he examines the theological works of Hugo, Bishop of Ptolemais, great-grand-uncle to the writer of this book, and establishes the fact, that to this bishop must be attributed the divers little works published during the last century, under the pseudonym of Barleycourt. Sometimes, in the midst of his reading, no matter what the book might be which he had in his hand, he would suddenly fall into a profound meditation, whence he only emerged to write a few lines on the pages of the volume itself. These lines have often no connection whatever with the book which contains them. We now have under our eyes a note written by him on the margin of a quarto entitled Correspondence of Lord Germain with Generals Clinton, Cornwallis, and the Admirals on the American station. Versailles, Poincot, book-seller; and Paris, Pissot, bookseller, Quai des Augustins. 주고는 다른 논문에서 이 책을 쓰고 있는 필자의 종증부뻘 되는 프톨레마이스의 주교인 위고의 신학 저술을 검토하며, 18세기에 바를레쿠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몇 가지 저작을 위고가 쓴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때로 책을 읽으며 깊은 명상에 잠겼다. 그러고는 책 글귀 아래에 메모를 했다. 가끔은 책 내용과 아무 관계 없는 내용을 적기도 했다. 여기에 그가 적었던 구절을 옮겨 보고자 한다. 그것은 이런 표제의 책 사절판-글린터 장군, 콘월리스 장군, 그리고 미국 주둔군의 여러 사령관과 교환한 제르맹 경의 서간집, 베르사유, 푸앵소 출판사 및 파리 오귀스탱 강변 피소 출판사 간행-의 여백에 적혀 있었다.
Here is the note:- "Oh, you who are! "Ecclesiastes calls you the All-powerful; the Maccabees call you the Creator; the Epistle to the Ephesians calls you liberty; Baruch calls you Immensity; the Psalms call you Wisdom and Truth; John calls you Light; the Books of Kings call you Lord; Exodus calls you Providence; Leviticus, Sanctity; Esdras, Justice; the creation calls you God; man calls you Father; but Solomon calls you Compassion, and that is the most beautiful of all your names." Toward nine o'clock in the evening the two women retired and betook themselves to their chambers on the first floor, leaving him alone until morning on the ground floor. It is necessary that we should, in this place, give an exact idea of the dwelling of the Bishop of D-. 그 구절은 아래와 같다. ‘아, 당신은 누구입니까? <전도서>에서는 당신을 전능이라고 말하고 <마카베오서>에서는 당신을 창조주라 하고 <에페소서>에서는 당신을 자유라 하고 바루크는 당신을 광대무변이라 하고, <시편>은 당신을 지혜와 진리라고 하며 요한은 당신을 빛이라 하며, <열왕기>는 당신을 주님이라하고, <출애굽기> 는 당신을 섭리라 하고, <레위기>는 성스러운 자라 하고, <에즈라서>는 정의라 합니다. 당신은 신이라 불리며, 인간은 당신을 아버지라고 합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당신을 자비라 부렀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많은 이름 가운데에서도 가장 아름답습니다. 담소가 끝나고 9시쯤이 되면 두 노부인은 2층의 자기 방으로 올라가고 주교는 아침까지 아래층에 남아 있었다. 여기서 디뉴의 주교 저택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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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FIRST - A JUST MAN(올바른 사람)
CHAPTER VI- WHO GUARDED HIS HOUSE FOR HIM(그는 누구에게 집을 지키게 했나, 주교관의 수호자)
The house in which he lived consisted, as we have said, of a ground floor, and one story above; three rooms on the ground floor, three chambers on the first, and an attic above. Behind the house was a garden, a quarter of an acre in extent. The two women occupied the first floor; the Bishop was lodged below. The first room, opening on the street, served him as dining-room, the second was his bedroom, and the third his oratory. There was no exit possible from this oratory, except by passing through the bedroom, nor from the bedroom, without passing through the dining-room. At the end of the suite, in the oratory, there was a detached alcove with a bed, for use in cases of hospitality. The Bishop offered this bed to country curates whom business or the requirements of their parishes brought to D-. 주교가 사는 집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아래 위층으로 되어 있다. 아래층에 방이 셋, 위층에 방이 셋, 그 위에 고미다락이 하나 있고, 집 뒤에 1000제곱미터 넓이의 정원이 있다. 두여자가 위층을 차지하고, 주교는 아래층에 살고 있었다. 한길 쪽으로 향한 첫째 방은 식당으로, 둘째 방은 침실로, 셋째 방은 기도실로 사용되었다. 이 기도에서 나오려면 침실을 거쳐야 하고, 침실을 나오려면 식당을 거쳐야 했다. 기도실 안쪽에는 손니밍 머물 경우에 대비해 침대 하나가 놓인 침소가 있었다. 주교는 이 침대를 교구의 용무와 필요 땜에 디뉴에 오는 시골 사제들에게 제공했다.
The pharmacy of the hospital, a small building which had been added to the house, and abutted on the garden, had been transformed into a kitchen and cellar. In addition to this, there was in the garden a stable, which had formerly been the kitchen of the hospital, and in which the Bishop kept two cows. No matter what the quantity of milk they gave, he invariably sent half of it every morning to the sick people in the hospital. "I am paying my tithes," he said. His bedroom was tolerably large, and rather difficult to warm in bad weather. As wood is extremely dear at D-, he hit upon the idea of having a compartment of boards constructed in the cow-shed. Here he passed his evenings during seasons of severe cold: he called it his winter salon. In this winter salon, as in the dining-room, there was no other furniture than a square table in white wood, and four straw-seated chairs. 집에 붙여서 정원에 세운 작은 건물은 본래 자선병원의 약국이었는데, 지금은 주방 겸 헛간으로 바뀌었다. 그 외에도 정원에는 전에 자선병원의 조리실이었던 외양간이 있는데, 주교는 거기서 암소를 두 마리 키웠다. 거기서 나오는 우유의 양이 어떻든 간에 그는 변함없이 아침마다 그 절반을 자선병원의 환자들에게 보냈다. 이를 두고 그는 “나는 십일조를 바친다.” 라고 말했다. 그의 방은 쾌 넓어서 난방을 하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디뉴에서는 장작값이 무척 비쌌기 때문에, 그는 외양간에 판자를 질러서 칸막이 방을 하나 만들 생각을 했다. 몹시 추운 날이며 그는 거기서 지냈다. 그는 그곳을 자기의 ‘겨울 객실’이라고 불렀다. 이 겨울 객실에는 식당과 마찬가지로 네모진 휜 나무탁자와 네 개의 짚 의자 말고는 아무 가구도 없었다.
In addition to this the dining-room was ornamented with an antique sideboard, painted pink, in water colors. Out of a similar sideboard, properly draped with white napery and imitation lace, the Bishop had constructed the altar which decorated his oratory. His wealthy penitents and the sainted women of D- had more than once assessed themselves to raise the money for a new altar for Monseigneur's oratory; on each occasion he had taken the money and had given it to the poor. "The most beautiful of altars," he said, "is the soul of an unhappy creature consoled and thanking God." 식당에는 그 외에도 연분홍색으로 칠한 낡은 천장 하나가 놓여 있었다. 주교는 그것과 비슷한 찬장을 휜 식탁보와 모조 레이스로 알맞게 덮어서, 기도실에 차려 놓은 제단으로 삼았다. 그가 회개시킨 부잣집 부인들과 디뉴의 경건한 부인들이 예하의 기도실에 훌륭한 새 제단을 만들 비용을 자주 추렴했지만, 그는 그 돈을 받아서 번번이 가난할 사람들에게 주어 버렸다. “제단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은 주께 감사드리는 위로받은 불행한 사람의 마음이다.” 라고 그는 말했다.
In his oratory there were two straw prie-Dieu, and there was an arm-chair, also in straw, in his bedroom. When, by chance, he received seven or eight persons at one time, the prefect, or the general, or the staff of the regiment in garrison, or several pupils from the little seminary, the chairs had to be fetched from the winter salon in the stable, the prie-Dieu from the oratory, and the arm-chair from the bedroom: in this way as many as eleven chairs could be collected for the visitors. A room was dismantled for each new guest. It sometimes happened that there were twelve in the party; the Bishop then relieved the embarrassment of the situation by standing in front of the chimney if it was winter, or by strolling in the garden if it was summer. 그의 기도실에는 기도용 짚 의자가 둘, 침실에는 역시 짚을 채운 팔걸이의자가 하나 있었다. 혹시 한꺼번에 일고여덟명의 손님을 맞이했을 경우에는, 이를테면 도지나나 장군, 혹은 위수 연대의 참모관이아 신학 예비교의 몇몇 학생들이 찾아왔을 경우에는 외양간에 있는 겨울 객실의 의자와 기도실의 기도용 의자, 침실의 안락의자를 가지러 가야 했다. 그렇게 해서 방문객을 위한 의자를 열한 개까지는 모아 놓을 수 있었다. 새로 손님이 올 때마다 한 방씩 가구를 꺼내는 것이었다. 만일이 손님이 열두 명에 이를 때면 주교는 겨울에는 벽난로 앞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여름에는 함께 뜰을 돌자고 하면서 상황을 모면했다.
There was still another chair in the detached alcove, but the straw was half gone from it, and it had but three legs, so that it was of service only when propped against the wall. Mademoiselle Baptistine had also in her own room a very large easy-chair of wood, which had formerly been gilded, and which was covered with flowered pekin; but they had been obliged to hoist this bergere up to the first story through the window, as the staircase was too narrow; it could not, therefore, be reckoned among the possibilities in the way of furniture. Mademoiselle Baptistine's ambition had been to be able to purchase a set of drawing-room furniture in yellow Utrecht velvet, stamped with a rose pattern, and with mahogany in swan's neck style, with a sofa. But this would have cost five hundred francs at least, and in view of the fact that she had only been able to lay by forty-two francs and ten sous for this purpose in the course of five years, she had ended by renouncing the idea. However, who is there who has attained his ideal? Nothing is more easy to present to the imagination than the Bishop's bedchamber. A glazed door opened on the garden; opposite this was the bed, -a hospital bed of iron, with a canopy of green serge; in the shadow of the bed, behind a curtain, were the utensils of the toilet, which still betrayed the elegant habits of the man of the world: there were two doors, one near the chimney, opening into the oratory; the other near the bookcase, opening into the dining-room. 기도실 안쪽 침소에도 의자가 하나 있기는 했지만, 채워 넣은 짚이 절반이나 빠져 버렸고 다리도 세 개밖에 없었기 때문에 벽에 기대어 놓고 쓸 수밖에 없었다. 비티스틴 양의 방에도 옛날에 금칠을 한, 꽃무늬 베이징 비단을 덮어씌운 썩 큼직한 나무 안락의자가 하나 있었다. 그러나 그 안락의자는 계단이 너무 좁아서 창을 통해 2층으로 올려야 했다. 그러므로 그것은 예비용 기구 축에 넣을 수 없었다. 바티스틴 양의 야망은 장미 무늬의 노란 위트레흐트 비로드를 깔고 백조 머리를 새긴 객실용 마호가니 가구 한 세트를 긴의자와 함께 사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자면 적어도 500프랑은 있어야 할 텐데, 그러기 위해서 아무리 저축을 해도 5년간 42프랑 10수밖에 모으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는 마침내 그 희망을 포기하고 말았다. 하기야 제 이상을 이룩하는 자 누가 있으냐? 주교의 침실은 침실로서 다시없이 간단했다. 창과 문을 겸하는 출입구 하나가 정원 쪽으로 나 있고, 그 맞은편에 침대가 있는데, 녹색 서지 휘장을 둘러친 병원용 철제 침대였다. 침대 안쪽 휘장 뒤에는 옛날 사교계를 드나들던 사나이의 우아한 습관을 나타내는 화장 도구가 있었다. 문은 둘 있었다. 하나는 벽날로 옆에 있는 것으로 기도실로 통하고, 또 하나는 서가 옆에 있는 것으로 식당으로 통했다.
The bookcase was a large cupboard with glass doors filled with books; the chimney was of wood painted to represent marble, and habitually without fire. In the chimney stood a pair of firedogs of iron, ornamented above with two garlanded vases, and flutings which had formerly been silvered with silver leaf, which was a sort of episcopal luxury; above the chimney-piece hung a crucifix of copper, with the silver worn off, fixed on a background of threadbare velvet in a wooden frame from which the gilding had fallen; near the glass door a large table with an inkstand, loaded with a confusion of papers and with huge volumes; before the table an arm-chair of straw; in front of the bed a prie-Dieu, borrowed from the oratory. 서가는 카라란 유리 책장으로 책이 가득차 있고, 벽난로에는 대리석 무늬로 칠한 나무가 붙어 있고, 평소에는 불을 붙이지 않았다. 이 받침쇠는 옛날에는 잘게 썬 은을 입힌, 화환 무늬가 들어 있고 세로로 흠이 팬 두 개의 단지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것은 주교 댁의 일종의 사치품이었다. 벽난로 위, 보통 거울을 놓는 곳에는, 은칠이 벗어진 구리 십자가가 금박이 벗어진 나무틀 속에 헐러 빠진 검은 비로드로 비끄러매여 있었다. 창문 문을 겸하는 출입구 옆에는 잉크병이 놓인 커다른 탁자가 있었고, 그 위에는 지저분한 종이와 큼직큼직한 책들이 놓여 있었다. 탁자 앞에는 짚 의자가 있었다. 침대 앞에는 기도식에서 갖자 놓은 기도대가 있었다.
Two portraits in oval frames were fastened to the wall on each side of the bed. Small gilt inscriptions on the plain surface of the cloth at the side of these figures indicated that the portraits represented, one the Abbe of Chaliot, bishop of Saint Claude; the other, the Abbe Tourteau, vicar-general of Agde, abbe of Grand-Champ, order of Citeaux, diocese of Chartres. When the Bishop succeeded to this apartment, after the hospital patients, he had found these portraits there, and had left them. They were priests, and probably donors-two reasons for respecting them. All that he knew about these two persons was, that they had been appointed by the king, the one to his bishopric, the other to his benefice, on the same day, the 27th of April, 1785. Madame Magloire having taken the pictures down to dust, the Bishop had discovered these particulars written in whitish ink on a little square of paper, yellowed by time, and attached to the back of the portrait of the Abbe of Grand-Champ with four wafers. 침대 양쪽 벽에는 타원형 초상화 액자가 두 개 걸려 있었다. 캔버스의 한쪽 여백에 그 초상화의 주인공 이름이 조그만 글씨로 적혀 있었는데, 하나는 생클로드 주교인 샬리오 신부이고, 또 하나는 아그드의 부주교이자 그랑샹 수도원장이며 시토 수도회 소속인 투르토 신부였다. 주교는 자선병원 환자들로부터 이 방을 이어받았을 때, 이 초상화를 발견하고 그대로 두었던 것이다. 두 사마은 목자였고 아마 금품을 기부했으리라. 이러한 두 가지 이유로 주교는 그들을 존경했다. 그 두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그들이 같은 날인 1785년 4월 27일에 한 사람은 주교직에, 다른 한 사람은 유급 성직에 올랐다는 것이었다. 마글루아르 부인이 먼지를 털기 위해 초상화를 벽에서 떼어 낼 때 주교는 잉크로 그러한 내용을 써 놓은 종잇조각을 발견했다.
At his window he had an antique curtain of a coarse woollen stuff, which finally became so old, that, in order to avoid the expense of a new one, Madame Magloire was forced to take a large seam in the very middle of it. This seam took the form of a cross. The Bishop often called attention to it: "How delightful that is!" he said. All the rooms in the house, without exception, those on the ground floor as well as those on the first floor, were white-washed, which is a fashion in barracks and hospitals. However, in their latter years, Madame Magloire discovered beneath the paper which had been washed over, paintings, ornamenting the apartment of Mademoiselle Baptistine, as we shall see further on. Before becoming a hospital, this house had been the ancient parliament house of the Bourgeois. Hence this decoration. The chambers were paved in red bricks, which were washed every week, with straw mats in front of all the beds. Altogether, this dwelling, which was attended to by the two women, was exquisitely clean from top to bottom. This was the sole luxury which the Bishop permitted. He said, "That takes nothing from the poor." 창에는 올이 굵은 구식 모직 커튼이 드리워 있었는데, 어찌나 낡아 빠졌던지, 새로 살 돈을 절약하기 위하여 마글루아르 부인이 그 한복판을 커다랗게 꿰매야 했다. 그 꿰맨 자국이 십자가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주교는 가끔 그것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참 잘됐어!” 아래층이고 위층이고 방들은 모두 빠짐없이 석회유로 하얗게 칠해져 있는데, 그것은 병사나 병원에서 하는 식이었다. 그렇지만 근년에 마글루아르 부인은(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바티스틴 양의 방에서 그 햐얗게 칠한 벽지 아래쪽에 그 방을 장식하는 그림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자선 병원이 되기 전에 이 집은 시민의 집회쇠였다. 그래서 그런 방식이 있었던 것이다. 방바닥에는 붉은 벽돌이 깔려 있는데, 그 것을 매주 물로 닦았다. 그리고 침대마다 앞에 짚으로 엮은 방식이 놓여 있었다. 게다가 이 집은 두 여자가 살림을 맡아 보고 있었으므로 구석구석이 말할 나위 없이 깨끗했다. 그것은 주교가 허락한 단 하나의 사치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건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아무것도 빼앗지 않는다.”
It must be confessed, however, that he still retained from his former possessions six silver knives and forks and a soup-ladle, which Madame Magloire contemplated every day with delight, as they glistened splendidly upon the coarse linen cloth. And since we are now painting the Bishop of D- as he was in reality, we must add that he had said more than once, "I find it difficult to renounce eating from silver dishes." To this silverware must be added two large candlesticks of massive silver, which he had inherited from a great-aunt. These candlesticks held two wax candles, and usually figured on the Bishop's chimney-piece. When he had any one to dinner, Madame Magloire lighted the two candles and set the candlesticks on the table. 그러나 주교에게 여섯 벌이 은그릇과 커다란 스프용 스푼이 있다는 것은 여기에 밝혀 두어야겠다. 마글루아르 부인은 초라한 식탁 위를 그것들이 알차게 꾸며 주는 것을 보며 늘 즐거워했다. 그리고 우리는 디뉴의 주교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기 위해 다음 사실도 짙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그는 몇 번이나 이런 말을 해 왔다. “나는 식사 때 은그릇 쓰는 것을 그만두자고 하고 싶지만 쉽지가 않을 것 같군.” 커다른 은 촛대도 두 개나 있었다. 그것은 그가 대고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두 은 촛대에는 초를 꽂아 주교의 벽난로 위에 두고 있었다. 저녁 식사에 손님이 오는 날이며, 마글루아르 부인은 초에 불을 붙여 테이블에 놓았다.
In the Bishop's own chamber, at the head of his bed, there was a small cupboard, in which Madame Magloire locked up the six silver knives and forks and the big spoon every night. But it is necessary to add, that the key was never removed. The garden, which had been rather spoiled by the ugly buildings which we have mentioned, was composed of four alleys in cross-form, radiating from a tank. Another walk made the circuit of the garden, and skirted he white wall which enclosed it. These alleys left behind them four quare plots rimmed with box. In three of these, Madame Magloire ultivated vegetables; in the fourth, the Bishop had planted some lowers; here and there stood a few fruit-trees. 주교의 방에는 침대 밑에 작은 벽장이 있었다. 마글루아르 부인은 저녁마다 여섯 벌의 은그릇과 커다른 스프용 스푼을 거기에 넣았다. 벽장 열쇠는 늘 그곳에 꽂힌 채였지만 말이다. 건물이 초라해서인지 뜰의 풍경도 조금은 을씨년스러웠다. 하수도 웅더이 주변에는 십자 형태로 놓인 통로가 네 개 있었다. 다른 통로는 흰 담을 따라서 둥글게 둘러쳐 있었다. 통로들은 다른 길 사잉 네 개의 장뱡형으로 되어 있었고 그 사이에는 회양목이 있었다. 그 중 세 개는 마글루아르 부인이 텃밭으로 썼고, 나머지 하나는 주교가 꽃을 심어 놓았다. 군데 군데 과일나무도 보였다.
Madame Magloire had once remarked, with a sort of gentle malice: "Monseigneur, you who turn everything to account, have, nevertheless, one useless plot. It would be better to grow salads there than bouquets." "Madame Magloire," retorted the Bishop, "you are mistaken. The beautiful is as useful as the useful." He added after a pause, "More so, perhaps." This plot, consisting of three or four beds, occupied the Bishop almost as much as did his books. He liked to pass an hour or two there, trimming, hoeing, and making holes here and there in the earth, into which he dropped seeds. He was not as hostile to insects as a gardener could have wished to see him. Moreover, he made no pretensions to botany; he ignored groups and consistency; he made not the slightest effort to decide between Tournefort and the natural method; he took part neither with the buds against the cotyledons, nor with Jussieu against Linnaeus. He did not study plants; he loved flowers. He respected earned men greatly; he respected the ignorant still more; and, without ver failing in these two respects, he watered his flower-beds every ummer evening with a tin watering-pot painted green. 마글루아르 부인은 이런 말을 꺼낸 적이 있었다. “예하께서는 모든 것을 잘 활용하시면서도 이 땅만은 버려두시네요. 꽃보다는 채소가 낫지 않을까요?” 주교가 대답했다. “마글루아르 부인, 그렇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것은 쓸모 있는 것만큼이나 유익하지요.” 그러고는 잠시 뒤 이런 말을 덧붙였다. “아니요. 아마 그 이상일지도 모릅니다.” 주교는 서너 개의 꽃밭이 놓인 네 번째 땅을 책만큼이나 사랑했다. 주교는 짬을 내서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며 풀을 뽑고 여거저기 땅을 일구고 씨앗을 뿌렸다. 그는 벌레를 보고서도 놀라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식물학에 대해서도 별다른 주의나 주장을 믿지 않았다. 갖가지 분류나 조직의 경화에 관한 병리학에서 대해서도 무심해싿. 투른포르의 분류법과 자연분류법 중 어는 쪽을 고민할 필요도 없이 떡잎에서 열매를 얻으려고 하지도 않고 취시에와 린네의 학설 가운데 어느 것도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일도 없었다. 교는 식물을 연구로 대하지 않고 사랑으로 대했다. 그는 학자들을 매우 존경했지만, 무지한 사람에 대해서도 그만큼 사랑을 보내싿. 그래서 양쪽 중 어디에에도 치우지지 않고 여름이 오면 저녁마다 푸른 함석 물뿌리개로 화단에 물을 뿌렸다.
The house had not a single door which could be locked. The door of the dining-room, which, as we have said, opened directly on the cathedral square, had formerly been ornamented with locks and bolts like the door of a prison. The Bishop had had all this ironwork removed, and this door was never fastened, either by night or by day, with anything except the latch. All that the first passerby had to do at any hour, was to give it a push. At first, the two women had been very much tried by this door, which was never fastened, but Monsieur de D- had said to them, "Have bolts put on your rooms, if that will please you." 집에는 자물쇠를 채운 문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돌층계도 없이 바로 대성당 광장으로 나갈 수 있는 식당 문은 옛날에는 감옥 문처럼 자물쇠와 빗장이 붙어 있었다. 주교는 그러한 철물을 모두 뜯어 없애 버리게 했기 때문에, 문은 낮이나 밤이나 걸쇠로만 닫혀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이 어느 때고 그것을 밀기만 하면 열렸다. 두 노부인은 이를 두고 매우 걱정을 했지만 디뉴의 주교는 그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가 방의 문을 잠그는 건 간섭하지 않겠소.”
They had ended by sharing his confidence, or by at least acting as though they shared it. Madame Magloire alone had frights from time to time. As for the Bishop, is thought can be found explained, or at least indicated, in the three ines which he wrote on the margin of a Bible, "This is the shade of ifference: the door of the physician should never be shut, the door of he priest should always be open." On another book, entitled Philosophy of the Medical Science, he had written this other note: "Am not I a physician like them? I also have my patients, and then, too, I have some whom I call my unfortunates."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들 역시 주교와 마찬가지로 안심하게 되었다. 아니, 마글루아르 부인만큼은 안심하는 척했다고 봐야 할지도 모른다. 그녀는 종종 무서움에 떨었다. 주교는 그에 대해서라면 언젠가 성서의 여백에 그가 적은 놓은 글귀처럼 생각했다. ‘여기에 그 묘한 의미가 있다. 의사의 문은 결코 닫히는 법이 없고, 사제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어야 한다.’ 의학의 철리> 라는 칙에 그는 이렇게 적은 적도 있었다. “나 역시 그들에게 의사가 아닌가? 내게는 병자가 있다. 그들 스스로를 병자라 부르는 이들, 그리고 내가 불행한 이들이라고 부르는 병자들.”
Again he wrote: "Do not inquire the name of him who asks a shelter of you. The very man who is embarrassed by his name is the one who needs shelter." It chanced that a worthy cure, I know not whether it was the cure of Couloubroux or the cure of Pompierry, took it into his head to ask him one day, probably at the instigation of Madame Magloire, whether Monsieur was sure that he was not committing an indiscretion, to a certain extent, in leaving his door unfastened day and night, at the mercy of any one who should choose to enter, and whether, in short, he did not fear lest some misfortune might occur in a house so little guarded. The Bishop touched his shoulder, with gentle gravity, and said to him, "Nisi Dominus custodierit domum, in vanum vigilant qui custodiunt eam," Unless the Lord guard the house, in vain do they watch who guard it. Then he spoke of something else. He was fond of saying, "There is a bravery of the priest as well as the bravery of a colonel of dragoons, -only," he added, "ours must be tranquil." 는 다른 책에는 이렇게 적어 두고 있다. ‘잠자리를 청하는 자에게 이름을 물어서는 안 된다. 몸을 의지할 곳을 찾는 자는 스스로 이름을 알리기 꺼리기 때문이다.’ 언젠가 쿨루브루의 주임 사제였던가 혹은 퐁피에리이ㅡ 주임사제가 마글루아르 부인의 청을 받고 주교에게 물어본 적 있다. 들어옥 싶어하는 자들을 위해 문을 열어 두고 밤에도 자물쇠를 채우지 않는 것이 좀 불안하지은 않는지, 그렇게 문단속을 했다가 혹여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까 걱정이 되지는 않느냐고. 그러자 주교는 상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너그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주님께서 집을 지켜 주시니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소.” 그는 이런 말을 자주 쓰곤 했다. “용기병 대장의 용기처럼 사제에게도 용기가 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다만 사제의 용기는 조용해야 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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