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가 바뀌고 시대가 변하면서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도 변한다. 특히 젊은이들은 새로운 말을 만들고 이미 있는 말을 재미있게 비틀어 쓰는 걸 좋아한다. 비속어는 그런 변화에 더 민감하다. 아마도 그런 게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말이 바뀌는 원인 중 하나인 것 같다. 내가 어렸거나 젊었을 때 즐겨 사용하던 비속어적인 표현들 중에는 ‘개창나다’(맞아서 초주검이 되다)가 있었지만 요즘 사람들은 그런 표현을 쓰지 않는다. 요즘 젊은이들 신조어에는 ‘돼지런하다’(먹을 때만 부지런하게 처먹는 인간), ‘강직인’(강아지를 키우는 직장인) 등이 있다고 한다. 특히 요즘에 ‘개’—견(犬) 혹은 구(狗)—라는 단어의 의미 변화가 심상치 않다. ‘개’라는 접두어가 붙으면 다소 부정적인 뉘앙스를 띄었다. ‘개고생’, ‘개작살’, ‘개복숭아’, ‘개살구’, ‘개떡’ 등 그 수많은 예가 있다.
한편 ‘개새끼’나 ‘개자식’은, 한국어에서든 영어에서든, 가장 보편적인 욕설이다. 그 표현이 ‘새끼 개’ 즉 강아지를 가리키지 않는다. 돼지 새끼는 욕이지만 새끼 돼지는 귀엽다. 어순을 바꾸었을 뿐이다. 그런데 요즘은 다 큰 개든 어린 개든 상관없이 ‘강아지’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다. 내가 산책하는 공원에 “강아지 똥을 배변봉투에 담아 가져가세요.”라는 게시물이 있다. 그때 강아지는 새끼 개를 뜻하지 않는다. 모든 개를 뜻한다. 개라는 단어가 본래의 의미를 잃고 강아지라는 단어가 그 의미를 대신하게 된 것이다. 개라는 어휘에 덧붙여진 부정적인 뉘앙스를 피하기 위해 일종의 완곡어법(euphemism)이 사용되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사회적 분위기가 애완견의 시대에서 반려견의 시대로 바뀌면서 ‘개’라는 단어가 또 다른 기능과 의미를 띠게 된다. 그 말이 ‘몹시’를 뜻하는 부사적 어휘로 사용되는 것이다. 예컨대 ‘개 맛있어’, ‘개 짜증나’, ‘개 싫어’, ‘개 좋아’, ‘개 배불러’ 등이 그것들이다.
‘개’라는 말에 대한 그러한 변화에는 개에 대한 인간의 다분히 모순적인 태도의 변화가 반영되어 있다. 모든 가축이나 애완동물 혹은 반려동물 중에서도 특히 개에 대한 인간의 사랑은 유별나고 모순적이다. 수만 년 전부터 인간은 개를 조수이자 친구이자 동반자로서 노동을 돕고 정서적 위안을 주는 대상으로 삼아 데리고 살아오고 있다. 목줄을 매서 동행하기도 하고, 품에 꼭 안고 다니기도 하고, 유모차에 태워서 다니기도 하고, 운동시키려고 데리고 나와 함께 걷거나 달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모든 행위를 뭉뚱그려 표현하면, 사람이 개를 끌고 다닌다. 맛있는 음식 사주고, 신나는 장난감 사주고, 고운 옷 입혀주고, 병원에 데리고 가 정기 검진 받게 하고 예방주사 맞히고, 세상 떠나면 눈물 찔끔거리며 엄숙한 장례식을 치러준다. 그리고 개 묘지에 생전 사진 붙여놓고 오래도록 추모한다. 개에 대한 인간의 그 모든 배려와 관심은 뭉뚱그려 표현하면, 사랑을 표방한 이기적인 이용이다. 그러다가 상황이 바뀌거나 싫증이 나면 가뿐히 버린다. 본향인 야생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인간 사회로 되돌아갈 수도 없어서 도시 어귀나 으슥한 길모퉁이에서 어슬렁거리거나 쓰레기봉지를 뒤지며 먹이를 찾다가 사람이 다가오면 눈치를 살피며 슬슬 도망가는 유기견들을 보라. 인간이 개에게 베푸는 사랑의 모순을 보라.
사회가 문명화될수록 사람들의 삶이 점점 더 개인화·파편화되면서 우리는 그만큼 더 외로워진다. 각 개인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분리되어 고립되고 공허해지면서, 정서적 위안을 얻기 위한 대체물로 개를 이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꺼이 ‘개아빠’가 되고 ‘개엄마’가 되어 ‘개자식’을 기르는 것이다. 전직 대통령도 현직 대통령도 개자식들을 데리고 살고 있다. 그게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의 사랑의 대상은 무엇보다도 먼저 다른 인간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 바로 가까이에 대형 동물 병원이 들어설 예정이라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첫댓글 옳소~~
'돼지런하다'는 말, 개재밌네요. ㅎㅎㅎ
*중앙일보 3월 20일자 기사에서 발췌
오은영 왈왈왈,
"벌써 8년이 흘렀지만 그날의 기억은 또렷하다. 빡빡한 스케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밤, 오빠에게 전화가 왔다. ‘은영아, 뽀삐가…’ 듣자마자 눈물이 솟구쳤다. 집에 함께 사는 부모님이 마지막 순간을 지켰다고 했다. 자동차를 세우고 한 시간 동안 말 그대로 통곡했다. 노령인 19살이라 마음의 준비를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날따라 뭐가 그리 바빠 부랴부랴 나갔을까요. 평소 같으면 출근 전 안아줬을 텐데, 하필 그날은 아무것도 못 했어요. 물끄러미 저를 쳐다보던 모습이 마지막이었네요.” 가까운 사람이 떠나면 잘못해준 것만 기억이 납니다. 반려동물 역시 ‘먹고 싶어 하던 것 더 줄걸’ ‘집에 너무 혼자 둔 것 같아’ 이런 후회가 밀려오죠. 부모와 사별하고 ‘그때 찾아가 한 번 더 뵐걸’이라고 자책하는 것과 같습니다. 노년기에 반려인이 되면 특히 자존감이 높아진다. 오 박사는 “누군가를 돌볼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삶에 굉장히 의미가 큰데, 반려동물에게 세상의 전부인 만큼 ‘나는 여전히 중요한 사람’이라는 걸 느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돌봄의 손길과 마음길을 애타게 필요로 하는 존재가 뽀삐 말고도 너무도 많은데요. 친정 부모님도 있고, 시부모님도 있고, 자기 동네에도 있고 남의 동네에도 있고. 그렇다면 오은영은 진정으로 다른 존재를 돌보는 데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기보다는 자신의 외로움을 달랠 대상으로 가장 만만하고 편한 대상인 뽀삐를 이용한 건 아닐까요.
저, 그런데 호미님께서 시즌 14에 글을 올리지 않고, 이 방에 글을 지속적으로 게재한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일부러? 무슨 이유라도?
뮤즈님, 제가 그런 구분이 있는 걸 모르고 writing club란에만 파일을 올렸군요. 알려주어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