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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위력 / 렘 1:4-10, 고전 13:1-13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다. 사랑의 씨를 뿌리며, 사랑의 꽃을 피우고, 사랑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종교이다. 그러므로 사랑이 없는 기독교는 아무 존재의 의미가 없는 헛것이 되고 만다. 사랑을 기독교의 전부로 보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랑을 바로 인식하고 실천할 때만 참 기독교라 할 수 있다. 프랑스의 유명한 나폴레옹 황제는 ‘나와 알렉산더 대왕과 시저가 가졌던 대망의 꿈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는데, 한 가난한 유대인 목수였던 예수가 전 인류와 세계를 지배하게 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나는 많은 인간들을 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예수는 세상의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한 분이었다. 알렉산더나 시저나 쉘리메인이나 나 자신은 거대한 왕국들을 건설하였다. 이 왕국들의 기초는 무엇이었는가? 무력!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그의 왕국을 사랑의 토대 위에 세웠으므로 이 사랑의 왕인 예수를 위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수백만의 인간이 기쁘게 자기의 목숨을 바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예수의 사랑을 찬양하고 부러워했다. 이처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위력을 지닌 사랑에 기초한 기독교가 점점 전락하여 그리스도의 참된 사랑을 찾아볼 수 없게 퇴색해짐은 참으로 비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교리도 신학도 사랑할 만한 힘이 없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또한 방언이나 예언이나 깊은 신학적 지식도 사랑 앞에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으며 곧 사라져 버린다고 강조하면서 사랑을 기독교의 최고 윤리와 선으로 내세운 것이다. 이런 고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찾아 교회의 문을 두드린 많은 사람들이 마땅히 교회 안에 있어야 할 사랑 대신에 당파 싸움이나, 교리 논쟁이나, 바알 종교처럼 완전 타락한 광경에 실망하고 교회를 등지게 된다는 사실은 현대교회의 가장 큰 비극이다.
초대교회가 그처럼 놀랍게 부흥한 것은 어느 특정인의 명설교 때문은 절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지금의 교회와 같은 학문적인 조직신학이나 체계화된 교리가 없었다. 설교학을 공부한 적도 없고, 교회성장학이란 것도 없었고, 교회부흥을 위하여 수련회나 심령대부흥회를 가진 일도 전혀 없었다. 그들에게는 단지 ‘네 것과 내 것을 구별없이 서로 통용하며’ 다른 사람을 내 몸처럼 아끼고 높여주는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사랑을 그대로 실행함이 있었을 뿐이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고 하신 주님의 사랑의 정신을 몸소 보여준 것 뿐이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놀랍게 부흥하게 된 것이다. 물론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은 모두 성령충만한 사람들이었다. 그 놀라운 영적 체험인 성령충만은 사랑의 실천으로 입증되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성령충만을 받았다,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는 대신 자기 교만과 독선과 광신에 사로잡혀 기독교의 숭고한 전통을 더럽히고 있다. 초대교회를 뒤흔들어 놓은 예수의 사랑에 대하여 몇가지 살펴보면서 우리들도 이런 사랑이 풍성해지기를 바란다.
1. 예수의 사랑은 ‘오래 참는’ 사랑이었다.
예수의 사랑은 아침 저녁으로 변하는 보통 사랑도 아니다. 달을 두고 맹세하는 남녀간의 사랑과는 질이 다른, 영원토록 참고 기다리는 끈질긴 사랑이었다. 그는 지상에 계실 때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바울이 참된 사랑을 말했듯이, 그리스도는 인내의 눈물을 먹고 자랄 수 있는 특별한 사랑을 보여주셨다. 베드로와 같은 무식하고 변덕스럽고 교만하고 혈기왕성한 어부들을 오래 참고 한결같이 사랑했던 것이다. 그런 끈질긴 사랑이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의 굳은 마음을 녹였던 것이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한결같이 변할 줄 모르는 예수의 사랑은 반드시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미국의 저명한 설교학 교수인 프레드 크래닥 박사는 자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의 아버지는 본래 믿지 않는 완고한 불신자였다고 한다. 그래닥 교수는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열심히 교회를 다녔으나 아버지의 불신앙적 언동과 태도는 그들 모자를 항상 괴롭혔다고 한다. 목사님이 방문하여 예수 믿기를 권하면 그 아버지는 언제나 ‘나는 당신네 교인들의 질을 잘압니다. 당신들은 진정으로 나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교인수 하나를 더 늘리고 교회 재정에 보탬을 받고 싶기 때문이 아닙니까?’ 이런 모독적인 말에 어머니는 자주 부엌으로 가서 울었다고 한다. 유명한 부흥강사가 여러 명 그 가정을 방문하여 교회 출석을 권유해 보았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 정도로 반 기독교적이었고 완고하기만한 아버지였던 것이다. 그러나 어린 크래닥과 어머니는 계속 그를 끝까지 사랑했다. 그들의 목사와 전 교인들도 낙심하지 않고 계속 그리스도가 가졌던 오래 참는 사랑을 보였던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흘렀다. 크래닥은 교수가 되어 먼 곳에서 가르치고 있던 어느 날 갑자기 고향의 재향군인병원에서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달려오게 되었다. 급히 병원에 도착해 보니 아버지는 이미 대수술을 받았고, 전혀 살 가망이 없다는 의사들의 말을 들었다. 고무튜브를 목구멍으로 넣어 겨우 숨을 쉬게 할 정도라서 전혀 말을 못하는 위급한 상태였다. 아버지의 위급함에 초조해 하던 크래닥을 또 한번 놀라게 했던 것은 아버지의 병실이 아름다운 화분들과 선물들과 속히 완쾌되기를 비는 편지와 카드들로 가득차 있었다는 사실이었다.그것들을 보낸 사람들은 모두 아버지가 그렇게도 미워했던 바로 그 교회 성도들과 그 교회의 모든 기관들이었다. 죽음에 임박한 아버지는 아들에게 연필로 가까스로 쓴 크리넥스 통을 보였다. 유명한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인용한 글로 ‘이 거친 세상에서 마지막 숨이 넘어가기 전에 내 한마디 하고 싶다’라고 쓰여진 것이었다. 크래닥 교수는 물었다. ‘아버지, 무슨 말씀이세요.’ 그의 아버지는 다시 연필을 겨우 쥔 채 떨리는 손으로 끊어져가는 마지막 숨을 가까스로 쉬면서 이렇게 썼던 것이다. ‘아들아, 너희 교인들에게 전해다오. 내가 크게 잘못한 것을 알고 있었다고.’ 수없이 면박과 조소를 받았지만 그 교회 성도들은 계속해서 아버지를 사랑했던 것이었다. 이런 예수의 사랑이 돌같은 마음을 녹일 수 있었던 것이다. 여러분들이 아직도 미워하는 사람들이 있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계속 거절하는 분들이 주위에 있나? 오래 참아야 한다. 참을 수 없다면 기독교적 사랑의 진의를 모르는 증거이다.
2. 예수의 사랑은 눈물이 동반된 깊은 연민과 동정심이 가득한 사랑이다.
오늘날 흔히 눈물은 약자의 최상의 무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반항과 공포와 슬픔의 최후 수단으로 눈물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보시며 흘린 눈물은 그가 무력해서 흘린 것이 아니었다. 얼마든지 심판하고 진멸할 수 있는 권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선지자들을 박해하고 죽임으로써 자멸하게 된 예루살렘성의 백성들이 불쌍하여 흘린 동정의 눈물이었다. 언제나 방종하고 반항하는 아들 앞에서 ‘내가 너를 잘못 가르쳤구나’ 하시며 자기 종아리를 때리며 우셨다는 그 어느 아버지가 흘린 사랑의 눈물이 이 시대에 참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자녀들이나 아내가 흘리는 공포와 슬픔과 무기력에서 나오는 그 흔한 절망적인 눈물이 아니라 자녀들의 장래를 위한 아버지의 권위잇는 눈물, 사랑의 눈물이다. 이처럼 강자가 약자를 위해 흘리는 눈물은 사랑의 힘을 내포하고 있다. 이런 눈물을 통하여 참된 사랑을 배우고 바른 길로 돌아선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너무나 많다.
어느 이탈리아의 조그만 교회당 안에 예배시간도 아닌데, 어느 한 부인이 와서 흐느껴 울기 시작한다. 기도하고 있었다. 그의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차라리 통곡이었다. 너무나 서럽게 우는 이 부인을 보고 안타깝게 생각한 한 나이많은 감독이 그 곁에 다가와 부인이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부인, 왜 우십니까?’ 부인은 눈물을 흘리면서 ‘내 아들이 타락했습니다. 내 아들이 방종하고 있습니다. 내 아들이 이단에 빠졌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때 늙은 감독은 손수건을 꺼내 그 부인이 눈물을 닦아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주인, 눈물로 기도하는 자의 자녀는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눈물로 기도하는 자의 자녀는 결단코 망하지 않는다. 이 기도하고 있었던 어머니는 바로 그 유명한 모니카였다. 이 기도 때문에 돌아왔던 아들은 기독교 역사에 가장 빛나는 발자취를 남겼던 성 어거스틴이다.
3, 예수의 사랑은 대속적 사랑이다.
‘대속’이란 값을 대신 치러주고 사는 것을 말한다. 슬픔과 아픔을 함께 나누며, 더 나아가서는 대신 당해 주는 것을 말한다. 아버지 심봉사를 위하여 대신 바다에 몸을 던지는 심청이의 아름다운 이야기와 같은 것이다. 남을 위하여 내 것을 버리고 희생하며 대신 고통을 당해 주는 것이다. 대신 받는 손해를 즐거워하며, 제 몸과 목숨을 즐겁게 소모해 주는 테레사 수녀나 슈바이쳐와 같은 사람들의 삶을 말한다. 이것이 예수께서 보여주신 대속적 사랑의 정신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의 이런 숭고한 사랑을 예수 오시기 전에 이미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 주변에 내가 무엇인가 대신 해줄 만한 일이나 도움을 줄 사람이 없는지 부지런히 찾아보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랑의 정신으로만 가능하다. 교회의 진정한 사명도 여기 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두 대신 짐을 져줄 줄 아는 사랍들이었다.
브라질 하면 우리 동포들이 농업이민을 많이 갔었고, 지금도 그곳에 많이 살고 있는 남미의 한 나라로 알고 있다. 로마 카톨릭교회가 그 나라의 지배적 종교인데 이 나라에는 유명한 카톨릭 주교로서 돔 헬더 카마라란 분이 있다. 사랑과 비폭력을 설교하고, 항상 가난한 자, 약자를 위해 설교와 목회를 해온 대주교였던 카마라는 비둘기 같이 온순하고 자비심이 많고 사람들을 늘 이해와 사랑으로 관심하고 돌보며 사랑과 평화를 사랑하고 설교하는 분으로 민중들로부터 광범하게 지지와 존경을 받는 노신부이다. 그러나 당시 브라질의 우익 독재 정권에서는 가장 골치 아픈 존재였고 말썽꾸러기이고 위험한 인물로 소위 블랙리스트의 제1번으로 올라있었다. 한마디로 브라질의 지배 권력층은 이 노신부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여러가지 방법으로 그에게 압력을 가하기도 하고 위협을 하기도 했다. 여러 차례에 걸쳐서 그를 암살할 위협을 하였고, 그의 집을 기관총으로 난사하기도 하였다. 또 실제로 암살을 기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런 방법들이 모두 효력이 없었다. 그의 목회를 돕는 협력자들까지도 체포, 투옥하고 고문하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하였다. 이런 모든 것은 그의 목소리를 잠재우기 위해서 였다. 그러나 카마라 주교는 조금도 요동하지 않고 그의 일을 계속하였다. 그의 운동은 실상 더 커지고 더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게 되었다. 브라질의 부자들, 대지주들, 그리고 군사정권은 더 이상 그 말썽꾸러기 신부를 살려두기 어렵다고 결론을 내렸다. 드디어 암살하려는 음모를 확정하고 암살자에게 청부를 주었다.
이 일을 위해 한 총잡이가 선정되었다. 돈을 미리 지불받은 이 사람은 사전 조사와 모든 준비를 마치고 총을 가지고 대주교가 살고 있던 주교관을 찾아갔다. 이 청부살인자는 아주 검소한 주교관의 문을 두드릴 때까지 그의 마음은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그는 집 문앞에 가서 허술한 나무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한 늙은 난장이 같은 사람에게 그는 ‘돔 헬더 카마라 주교를 만나러 왔다’라고 겁주는 목소리로 말했다. 문을 열로 선 그 난장이 노인은 ‘제가 돔 헬더요’라고 대답했다. 150cm 정도의 키, 정말 난장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키가 작았다. 얼굴이 조그맣고 쭈글쭈글 주름이 잡힌 79세의 노인 신부, 화려한 주교복으로 차려입고 당당하게 생겨서 남을 압도하는 권위있는 성직자로 보기는 어려운 노인, 그저 평범한 시골 노인으로 보였으나 그러면서도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하면서도 사랑과 인자함이 넘치는 눈으로 상대방이 눈을 들여다 보고 있는 이 노신부의 앞에 서게 된 이 청년 암살자는 ‘당신이 돔 헬더란 말이오?’라고 말을 더듬으며 다시 묻는 것이었다. ‘그렇소. 무슨 일이요? 들어오시오.’라고 하며 대주교는 그를 집안으로 안내하여 의자에 앉게 하였다. 그리고 ‘뭘 원하시오? 내가 당신에게 무슨 도울 일이라도 있소?’라고 물었다. 점점 더 당황하게 된 이 젊은이는 ‘아닙니다. 없습니다. 저는 도저히 당신같은 사람을 죽일 수가 없습니다’라고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대주교는 태연하게 ‘죽인다고? 왜 나를 죽이려 하지?’라고 물었다. 그때 젊은이는 ‘저는 사실 당신을 죽이라고 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에게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 주교는 ‘돈을 받았으면 나를 죽이지 뭘 주저하시오? 나야 죽으면 내 주님께로 가지 않소?’라고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대답하였다. 그 암살 청부업자는 ‘안하겠습니다. 당신은 주님에게 속한 사람입니다.’라고 하면서 그는 일어나 서둘러 나갔다. 이 이야기는 1987년에 있었던 실화이다. 이것은 분명히 보통 사람에게서 기대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겠다.
이렇게 암살자가 마음을 바꾸어 카마라 주교를 암살하지 못하고 물러간 것은 카마라가 지닌 사랑의 힘 때문이었다. 카마라 주교의 몸과 인격에서 번져나오는 사랑의 힘이었다. 암살자는 죽음의 세력을 대표하는 사람이고, 카마라 주교는 사랑의 세력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여기 두 사람이 회동에서 사랑의 힘과 죽음의 힘 간의 대결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 대결에서 죽음의 힘이 사랑의 힘 앞에 굴복하고 무장해제 된 것을 본다. 사랑의 사도 카마라는 죽음의 세력의 사절인 암살자를 무장해제시키고 물리쳤다. 이것은 교묘한 말이나 이론으로 된 것이 아니다. 사랑의 힘으로 된 것이다. 여러분은 과연 이같은 상황에서 카마라 주교가 당했던 것과 같은 생의 위기를 당한다면 그렇게 태연하게 행동할 수 있겠나?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나? 철저히 비폭력을 설교했던 카마라 주교는 그 자신의 소명을 ‘평화의 순례자가 되는 길’이라고 인식하고 일생 이를 실천하고 살았다. 그는 어느 누구도 미워한 적이 없었고, 어떤 사람이건 사랑하고 연민의 정을 가지고 대하였다. 비록 그를 죽이려는 원수에게까지라도. 그는 다른 사람 한 사람을 죽이기 보다 자신이 천번 죽는 길을 더 원하고 택한 사람이었다. 그는 철저히 사랑과 비폭력을 옹호하고 실천하였으며 또 실천하도록 역설한 사람이다. 그는 ‘가난한 자의 항거는 하나님의 목소리다’라는 유명한 말을 하였는데, 이 말처럼 그는 일생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살았고 마침내 ‘가난한 사람들의 감독’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다. 이것은 기독교인들만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기독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대속의 사랑에서 완성을 이룬다. 우리 현대인들이 꼭 필요로 하는 고상한 사랑이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특별한 사랑의 이야기들이 여러분의 가정에, 그리고 우리가 섬기는 교회에 가득해 지기를 바란다. (1996-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