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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예언자가 받은 계시 / 삼상 3:1-10, 요 1:35-42
우리들이 흔히 볼 수 있는 것들 가운데 하나는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자세를 하면서 왼쪽 무릎이 살짝 보이는 어린 소녀 모습의 그림과 함께 ‘오늘도 무사히’라고 쓴 글로 되어 있는 책갈피나 도로표지판, 그리고 자동차 운전석에 매어단 운전주의 안내이다. 우리 사회에는 실로 엉뚱하고 웃기는 일들이 많은데, 이 그림에 대한 이해는 바로 그러한 예 가운데 하나이다. 기도하고 있는 소녀의 그림으로 이해하고서 그 그림에 ‘오늘도 사고없이 무사하게 해 주옵소서’ 하는 우리의 기도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여러 가지 점에서 엉뚱하다. 왜냐하면 이 그림의 주인공은 소녀가 아니고 소년인데 어린 사무엘이다. 그리고 이 그림에 나타난 사무엘의 모습은 기도하는 모습이 아니라, 오늘 본문에서 보는대로 하나님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시는 소리를 듣고 사무엘이 ‘야웨여, 말씀하십시오. 종이 듣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장면의 그림이다. 이 그림이 기도하는 소녀의 그림으로 둔갑을 하여 ‘오늘도 무사히’라는 소원 또는 기도를 이 그림의 이름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이 그림을 기도하는 소녀의 모습으로 보고 ‘교통 사고가 나지 않고 무사히 운전하게 해 주옵소서’라고 우리가 기도하는 장면으로 생각한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다. 그러나 본래 이 그림은 오늘 본문에서 어린 소년 사무엘이 예언자로 소명 받는 장면의 그림임을 알 필요가 있다.
어린 소년 사무엘은 어릴 때부터 성전에서 살면서 제사장인 엘리의 시종을 들었다. 그가 어릴 때부터 성전에서 살게 된 이유는 이렇다. 그의 어머니 한나는 본래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어서 그의 남편의 다른 아내로부터 멸시를 당하고 차별을 받았다. 그래서 한나는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야웨께 눈물로 호소했다. 만일 아들을 낳게 해주면 그를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이렇게 서원했다. 삼상 1:11절 ‘이 계집종의 가련한 모습을 굽어살펴 주십시오. 이 계집종을 저버리지 마시고 사내 아이 하나만 점지해 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그 아이를 야훼께 바치겠습니다. 평생 그의 머리를 깎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평생 머리를 깍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은 하나님게 바쳐진 사람을 의미한다. 이런 사람은 머리를 깍지 않는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사람은 머리카락을 깍지 않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이 머리카락이 초자연적인 힘의 원천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삼손이란 사사의 이야기를 우리가 잘 알고 있지만, 그가 머리카락을 다 잘렸을 때 힘을 쓰지 못했던 이야기를 우리는 알고 있다. 한나가 아들을 낳게 되었다. 이 아들이 사무엘인데 이 이름은 ‘야웨께 빌어서 얻은 아기’라는 뜻이다. 한나는 서원한대로 아기가 젖을 떼자 하나님께 바쳤다. 그래서 사무엘은 아기때부터 성전에서 살게 된 것이다.
어린 사무엘이 예언자로 부름을 받게 되었던 때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보통 12살 때라고 본다. 그가 예언자로 부름을 받게 된 계기는 그 시대의 상황이 어땠는가와 관련되어 있다. 이때는 왕이 없었고, 하나님의 제사장과 사사가 다스리던 시대였다. 그 시대의 이스라엘은 민족 역사상 초기였는데 그때는 엘리라는 제사장이 다스리고 있었다. 그런데 엘리는 나이가 너무 많아 눈이 점점 어두워 갔다고 했다. 엘리가 눈이 어두워 갔다는 말은 단순히 나이가 많아서 육체적으로 눈이 잘 안보였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곧 제사장으로서의 엘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암시해 준다는 뜻이다. 우선 그는 나이가 많았고, 생각도 둔해졌고, 제사장 직무도 이행하지 못했다. 그는 무능한 제사장으로서 더 이상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었던 것은 물론이지만 하나님의 뜻에 눈이 멀었다. 그는 또 무능한 아버지였다. 그의 두 아들들에 대하여 아버지로서의 권위가 없었다. 그의 두 아들이 제사장으로 있었으나, 이들은 하나님을 등한시하고 제사장의 직무를 남용하며, 제사장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활 수 없는 온갖 악행과 비리를 일삼고 있었다. 이들의 악행과 비리에 관하여 성서는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2:12-13절상에 ‘엘리의 아들들은 망나니들로서 야훼를 몰라보고, 사람을 대하는 사제의 규정도 무시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을 보아서 그들이 얼마나 악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아들 제사장들의 악행과 비행에 관하여 백성들 간에 소문이 자자하였고 이 소문은 아버지의 귀에 까지 들어갔다. 이 일로 인해 아버지 제사장 엘리가 그의 아들을 꾸중했지만, 아들은 아버지의 꾸중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제사장 엘리는 아들들에 대하여 규율을 세우지 못하고 맹목적 사랑을 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있다. 2:29절에 하나님보다 자식들을 더 소중히 여기고 있다고 하나님께서 나무라는 데서도 알 수 있지만, 그가 자식들을 사랑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율법에 눈이 멀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연로하고 무능한 아버지 제사장과 악하고 불의한 아들 제사장들이 백성들을 다스리던 당시의 소수민족인 이스라엘 민족은 주변의 적대국인 블레셋의 침략을 받고 있었다. 그러면 당시의 종교적 상황은 어떠했는가? 오늘 본문인 1-2절상은 이렇게 말한다.‘소년 사무엘은 엘리 밑에서 야훼를 섬기고 있었다. 그 때는 야훼께서 말씀도 자주 들려주시지 않았고, 계시를 보여주시는 일도 드물었다. 엘리는 이미 눈이 어두워 앞을 잘 보지 못했다.’ 시대가 악하고 인간들의 눈이 멀었는데 하나님이 그의 말씀과 그의 뜻의 계시를 유보하신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다.’ 또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자주 들려주지 않았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주 귀하였다. 하나님이 말씀이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었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성서 원어의 뜻에 더 가깝다. 이러한 이해가 성서를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더 맞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 안계신다거나 어디로 떠나가셨다고 생각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 가까이 계시는 분으로 우리가 찾고 만나기만 하면 되는 분이시라는 것이 성서의 전체적인 사상이다. 사 55:6-7절에도 이러한 사상이 나타나 있다. ‘야훼를 찾아라. 만나주실 때가 되었다. 그를 불러라, 옆에 와 계신다... 야훼께 돌아오너라, 자비롭게 맞아주시리라. 우리의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리라.’ 하나님을 찾아 만나기가 어렵다고 하는 것은 그가 우리로부터 멀리 숨으셨기 보다도 우리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났기 때문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유대교 이야기가 하나 있다. 어떤 유명한 랍비가 회당에서 집에 돌아왔을 때 아홉 살 난 그의 딸이 울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가고 물었더니 울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친구들하고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는데 그가 한번은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에 숨었다. 너무나 잘 숨었기 때문에 애들이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를 찾아내지 못하자 처음에는 매우 만족하고 기뻐했지만 시간이 오래 지나도 찾으로 오지 않으니까 불안해졌다. 오랜 시간이 지났으나 찾으러 오지 않으니까 숨어 있던 곳에서 그냥 나왔다. 그러나 친구들은 다들 떠나고 아무도 없었다. 아주 감쪽같이 숨었기 때문에 친구들이 찾지 못했고, 그러니까 친구들은 포기하고 다른 놀이를 하러 그곳을 떠나버린 것이다. 이 이아기는 저의 어린 시절을 생각나게 한다. 여러분들도 어릴 적에 숨바꼭질 놀이를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저는 어릴 때 동네 친구들과 저녁 무렵에 숨바꼭질을 많이 했다. 놀던 도중에 집에서 저녁 먹으라고 부르면 말도 없이 집으로 돌아와 버리는 경우가 있었다. 숨바꼭질은 다 알겠지만 술래(오니라고도 함)가 된 아이가 얼굴을 벽 같은 데다 대고 눈을 감고 하나에서 백까지 소리내어 빨리 세는 동안 다른 아이들은 모두 재빨리 숨는다. 술래가 백까지 세고 나서 ‘이제 찾으러 간다’ 하고 소리치고는 숨은 친구들을 찾으러 간다. 숨은 친구들을 다 찾아내면 제일 먼저 발각된 아이가 술래가 되지만, 만일 다 찾지 못하면 계속 술래를 해야 한다. 그런데 어떤 때는 만일 아무리 찾아도 찾지 못하면 이미 발각되어 나온 아이들과 술래가 짜고는 그곳에서 다른 장소로 가버리면 꼭꼭 숨은 아이는 그것을 모르고 있다가 외톨이가 되는 수도 있다. 유대교 이야기에 나오는 소녀도 바로 이런 경우를 당한 것이다.
유대교 소녀 이야기를 다시 하겠다. 이 소녀의 아버지는 그의 딸을 무릎에 앉히고 위로를 하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이 났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느끼시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길을 저버린다면 하나님은 우리로부터 그의 얼굴을 감추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을 것이라고 위협하신다. 만일 하나님이 정말 완벽하게 숨으신다면 우리가 그를 찾다가 더 이상 찾기를 포기하고 다른 방향으로 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본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은 외롭게 여기시고 버림받은 것처럼 느끼시지 않을까 라고 나는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저는 이 랍비와 다르게 생각한다. 숨으시는 분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 인간들이 아닌가 한다. 오늘의 세계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찾기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의 보스턴에 있는 이스라엘 사원 교회의 랍비인 해롤드 쿠스너는 ‘왜 현대 세계에서 하나님을 찾기가 그렇게 어려운가?’라고 말한바 있다. 요즘 도시에 나가 밤에 보면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으로 장식된 십자가가 참으로 많다. 이것은 도시마다 교회가 그렇게 많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그 많은 교회에서 매주일 하나님의 존재를 설교로 외치고, 그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도들이 그렇게 많이 있는데 하나님을 찾기가 어렵다니 무슨 말인가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오늘날 성서가 가장 잘 팔리는 책이고 어느 서점이든지 성서를 팔고 있는데 왜 하나님을 찾기가 어렵단 말인가?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오늘 우리가 사는 현대는 하나님을 찾아보기가 매우 힘들다고 생각한다. 눈부시게 밝은 해가 있는 낮에는 별이 안보이고, 또 밤이라도 도시에서는 네온과 전기불이 밝게 비추는 곳에서는 별을 보기가 힘들다. 그렇다고 하늘에 별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현대는 과학, 공업, 온갖 학문, 문화와 예술 등의 밝은 빛들이 있어서 초월적인 존재이신 하나님을 눈으로 보기란 용이하지 않은지 모른다. 그러나 물론 이것이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또는 하나님이 자신을 감추신다는 것을 의미할 수는 없다고 본다. 설령 하나남이 그의 뜻을 계시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바로 듣고 올바로 식별하는 하나님의 종들이 없다면, 우리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바로 듣고 바로 알 수 있겠는가? 또 하나님의 종들이 있다 하더라도 정말 하나님의 계시와 뜻을 올바로 해석하며 전달하지 않고 거짓 예언을 일삼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들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될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귀하게 되는 시절이 오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외적의 침략을 받은 민족적인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귀하게 되었던’ 때였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하나님의 종인 엘리 제사장은 무능하고 그의 아들 제사장들은 악행을 행하고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를 받을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귀하게 여겨지던 때였다. 하나님은 그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과 눈으로부터 멀리 계신 것으로 느껴졌고, 하나님이 숨어버리신 것처럼 여겨졌던 시대였다. 이러한 때 하나님은 어린 소년 사무엘을 그의 종으로 부르셨다. 그 어린 소년 사무엘은 그의 말씀을 대언하고 민족을 이끌어 갈 사사요 제사장이요 예언자로 부르시게 된다. 여기서 사사란 군주제도가 없고 왕이 없던 시절에 나가가 어려움에 처할 때 어려움을 해결하는 정치적 통치자였다. 늙은 제사장 엘리와 어린 사무엘, 하나님의 말씀에 눈이 먼 늙은 제사장과 밤중에 하나님의 계시를 보고 하나님의 부르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예민한 젊은 소년 예언자가 대조되어 있다.
사무엘이 소명을 받는 장면을 소개한 오늘 본문은 여러가지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시대가 악하고 하나님의 종들인 제사장들의 눈이 멀면 하나님은 숨으시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을 오늘 본문은 암시하고 있다.,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을 우습게 생각하고 자만하게 될 때, 탐욕으로 가득찰 때, 백성들을 착취할 때, 백성들은 하나님을 찾기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엘리의 아들 제사장처럼 이 세상에 속한 온갖 욕망과 욕심으로 정신이 팔리고 배부를 때 하나님을 찾기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감추신다기 보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이고, 우리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숨어버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 만나기가 어렵다. 타조가 급하면 머리를 모래 속에 파묻고 나 몰라라 한다고 한다. 이와같이 우리도 눈을 감고 보지 않으려고 거부하는 경우가 있다. 또 우리의 눈을 멀게 하는 것이 있을 수 있다. 나이가 들면 우리들의 눈에 백내장이란 것이 덮이는 수가 있다. 그러면 잘 볼 수 없다. 이와같이 우리의 신앙의 눈을 멀게 하는 백내장이란 것도 있을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불신과 회의, 미움과 시기, 질투라는 이름의 백내장, 인간의 육체적 욕망과 쾌락과 안일이란 이름의 백내장, 물질과 권력애 대한 탐욕과 욕심의 백내장, 이런 것들이 우리 눈을 멀게 하는 것들이다. 우리들에게 이런 신앙의 백내장이 덮일 때 우리는 수술을 받아 그것을 걷어내야 한다. 우리 자신의 눈에 백내장이 끼어서도 못보지만, 안개가 끼고 어둠이 닥쳐와도 우리는 잘 보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들의 삶의 외적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질병, 온갖 자연적 재앙이나 사고, 인생의 운명적인 죽음과 같은 불행과 슬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와 모순인 차별과 불이익과 가난과 실패 등등의 안개나 어둠이 닥쳐올 때 우리는 앞을 잘 볼 수 없다. 그러나 진지한 신앙인은 안개와 어둠의 기둥을 뚫고 밝은 햇빛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항해 중 안개를 만난 일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영국의 죠지 뮐러 목사가 카나다의 집회에서 설교하기 위하여 대서양을 항해하는 배를 탔다. 이 배가 대서양을 건너가다 짙은 안개를 만나게 되어 이 배의 선장은 매우 걱정하며 불안한 가운데 잠도 자지 못하고 긴장하고 있었다. 이 배를 탄 손님 중에 죠지 뮐러 목사가 선장에게로 다가가서 자기는 어떤 일이 있어도 토요일인 내일 저녁까지는 카나다의 퀘백에 도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선장은 짙은 안개로 파선하여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로 걱정하고 밤을 세우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줄 것도 없이 몇시까지 퀘백에 도착해야 한다는 요구를 하는 이 목사를 한참동안 말없이 멀겋게, 그러나 원망조로 노려보았다. 선장은 속으로 ‘저런 정신나간 영감은 도대체 어디서 왔는가?’라고 생각하면서 그 목사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보세요! 지금 안개가 얼마나 짙은 지 안 보이십니까?’ 이 선장 자신도 매우 신앙심이 깊은 경건한 성도였다. 선장의 표정을 읽고 대답을 들은 뮐러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다. ‘내 눈은 안개가 얼마나 짙은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생의 모든 환경을 지배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고 있소. 선장님 이 배가 나를 예정시간 내에 도착하게 못한다면 하나님이 다른 방법으로 나를 도착하게 하실 것입니다. 나는 57년 동안 설교 약속을 어겨본 덕이 없습니다. 매번 하나님께서 나를 나의 설교를 들을 청중들에게 인도해 주셨습니다. 내가 내려가서 하나님께 기도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내려갔다. 그가 기도를 긑낼 무렵 선장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기도하고 있던 뮐러 목사를 일으켜 세우며 소리쳤다. ‘목사님, 안개가 싹 걷혔습니다. 토요일 오후까지 퀘백에 도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지금 이러한 짙은 안개와 어둠 속을 허우적거리고 있는 듯한 상황에 있다. 이것이 오늘 세계인들이 새해를 맞이한 상황이다. 95년은 새해 첫날부터 안개가 자욱히 깔리고 어둠이 깃든 상황이다. 이 나라는 정치적으로 정당마다 문제가 시끄럽다. 러시아는 체첸을 정복했고, 며칠 전 일본 오사카 옆 고베에서는 지진이 발생했다. 사망자가 5천명을 넘는 큰 지진이다. 사흘간 계속 불길이 일어났고 불을 끌 물이 없어서 소방수들이 멍하니 보고만 있는 실정이다. 고속도로, 철도, 항만 등이 모두 파괴되어 원상태로 복구하려면 1년이 넘게 걸릴 것이다. 이로 인해 산업이 마비되어 중소기업들이 도산할 처지에 있다. 그런데도 아직도 지진의 여파가 계속되고 있다. 어느 학자는 한달 후 이와같은 지진이 또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참으로 숨가뿐 긴장과 초조의 상황이다. 그렇다고 우리나라라고 안심할 수는 없다. 지진이 일어날 수 있는 가망이 있다는 것이다. 지진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가 힘써 기도하고 하나님께 매달려야 겠다. 그리고 지진에 대비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믿음의 눈을 갖고서 안개와 어둠을 뚫고 오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빛이 있는 것을 바라보며 용기를 가지고 올 한해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195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