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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간탕 때밀이 최
동춘 윤흥식
오늘도 목욕탕 안은 시끌시끌하다.
“뭘 가지고 아침부터 그렇게 열 내고 있어?”
강이 탈의실에 들어서며 최에게 물었다.
“이 인간이 내 말을 믿지 않고 자꾸 고집을 부리잖아.”
“뭔데?”
“아, 글쎄. 여기 좀 봐.”
최가 내민 스마트폰에는 모 대그룹 회장이 이완용의 손자라는 내용이었다. 그걸 가지고 때밀이 최는 입에 거품을 물고, 이게 나라니 어쩌니 하며 열변을 토하는 중이었다.
“야 이 멍텅구리야, 그걸 믿어? SNS상에 떠도는 말의 2/3는 근거 없는 헛소리야.”
“내가 멍텅구리여. 네가 바보지. 이것 좀 봐. 여기 분명히 나와 있잖아. 이 회장이 이완용 손 자라고. 그러니 우리 나라가 엉터리지. 친일파 매국노 후손이 이 땅에서 아직도 떵떵거리며 살 고 있으니 말야.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얼마나 고생하는지 알아? 그러니까 나라를 개조해야 한다고.”
“잘났다. 잘 났어. 여기 대통령감 하나 있네. 뭘 알려면 똑바로 알고 말해야지. 거짓을 진실 인 양 떠들고 있어. 최, 불확실한 얘기 자꾸 떠들면 유언비어 날조죄로 징역 간다.”
“그럼, 이 내용은 무어야?”
“그거야 못난 놈들이 밥 먹고 할 일 없으니 헛소리하는 거지 뭐.”
“네 말이 사실이라면 왜 그 기업은 지금까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어?”
“시끄럿! 나 갈란다. 집에 가서 다시 공부해 봐. 어느 게 진실인지…….”
언쟁을 벌이던 박이 나갔는데도 최는 식식거린다. 핸드폰을 가지고 여기저기 검색하며 이 회장 관련 내용을 살피고 있다. 무슨 대단한 거나 발견한 것처럼 흥분해서다.
“어이, 최. 실은 박이 한 말이 맞아. 최가 알고 있는 건 사실이 아니야.”
“어허 답답하긴 강도 마찬가지구먼. 여기 이렇게 나와 있잖아. 한두 곳이 아니고 여러 곳에서 이완용 손자라는 걸 주장하고 있잖아, 이 사람아!”
“그러니까 정보통신의 발달이 생활의 편리함을 가져온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이처럼 잘못 된 사실이 왜곡 전파 되어 인격 살인을 가져오는 부정적인 면도 있다는 걸 최는 분명히 알아 야 한단 말이야.”
“뭘 그렇게 어렵게 말해. 나는 무식하지만 이건 진실이라고 믿어. 기업이 큰 힘을 이용해 오 너의 허물을 덮는 작 업을 했을 수도 있잖아.”
“아니, 그건 또 무슨 해괴망측한 논리야?”
“족보를 조작했을 수도 있다는 말이지.”
“에끼, 이거 큰일 낼 사람이로군!”
“뭐가 큰일 나? 사회정의 차원에서 진실을 명명백백하게 밝혀야 한다는 것이지.”
“이 사람아, 족보가 어디 한 번만 발간되고 만 건가? 또 한 권씩만 발간하나? 수천수만 부씩 발간해 온 족보를 어 찌 모두 조작한다는 말이야.”
“대기업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니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자, 내 말 좀 들어봐. 진실을 말해 줄 테니까. 우선 본관이 틀려. 이완용은 황해도 금천군의 옛 지명인 우봉이 본 관이고, 이 회장은 경주 이씨야. 그리고 이완용 손자 중에 이 회장과 같 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긴 있어. 그런데 한자가 달라. 이완용 손자는 남녘 ‘병(丙)’ 자고, 이 회장은 잡을 ‘병(秉)’ 자로 이름 첫 자가 다르단 말이야.”
최와 앙숙인 택시 기사 황이 목욕탕 문을 열고 들어서며 “접수”하고 외친다.
“알았어. 푹 절구고 있어.”
“또 절구라네. 언어 순화 좀 하라고. 내가 배추야 뭐야. 담그고 있으라는 점잖은 말 놔두 고 절구라는 사투리야. 절이다가 표준말이거든. 뭘 하나라도 제대로 알고 사용하라고.”
“잔소리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지 뭔 말이 그리 많아. 한번 맛 좀 보고 싶어서 그래.”
“뭔 맛?”
“푹 절구지 않으면 살갗 벗겨진단 말이야. 내 손맛 본지 한두 해도 아닌데 아직도 몰라.”
“알았어! 그거 잔소리는…….”
“선수 입장."
말없이 욕조에 몸 담그고 있던 황이, 최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때밀이 대 위로 올라와 누웠다.
“으음, 제대로 절궜구먼. 그래야 A급으로 해준단 말이지.”
“제대로 절였는지 어떤지 밀어도 안 보고 어찌 안다나?”
“그러니까 전문가지. 때밀이 경력 30년은 나이롱뽕 해서 얻은 줄 알아.”
“대단한데. 훌륭하십니다.”
“야, 비꼬지 말고. 나는 척 보면 안단 말이야.”
가볍게 얼굴 마사지를 시작으로 때를 밀기 시작한다. 최의 일에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황도 때 밀 때만은 순한 양이 된다.
“왼쪽으로 돌고!”
얼굴과 배를 밀고 난 뒤 오른쪽 허리를 민다. 위로 아래로, 강하게 약하게, 느리게 빠르게, 좌로 우로 리듬을 타며 민다.
“오른쪽으로 돌고!”
왼쪽 허리에서 최의 손이 춤을 춘다. 최의 때 타월이 오갈 때마다 국숫발 같은 때가 밀려 나온다.
“어이, 시원하겠다.”
“때 민 지 열흘밖에 안 됐는데도 그렇게 많이 나오나?”
황의 손을 끌어다 때밀이 대에 댔다. 라면 발 같은 때 뭉치가 물컹하고 잡힌다.
“엎어지고!”
등을 밀고, 발바닥 각질을 벗겨내고 약식 안마를 거쳐 비누칠한다. 시원하다 못해 나른함까지 느껴진다. 잠이 오는 걸 참느라 애를 쓴다.
“원위치하고, 만세!”
바로 누워 두 팔을 드니, 안마가 시작된다. 어디서 누구한테 배운 게 아닌 순전히 경험에 의한 창작인데 이처럼 시원할 수 없다는 게 황의 생각이다.
황은 반발은커녕 한마디 대꾸도 없이 시키는 대로 잘 따라 한다. 최는 입이 걸고 고집불통이라 그렇지, 때 미는 솜씨 하나만은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황이다.
목욕을 마치고 탈의실에 나와 수건으로 물기를 닦던 황이 말을 건넨다.
“어이, 최. 이제부터 때밀이라 하지 말고 세신사라 부르면 어때?”
“뭔 말?”
“때밀이보다는 세신사가 더 듣기에 좋잖아?”
“때밀이가 어때서? ‘빛나는 목간탕 때밀이 최’, 이게 내 트레이드마크잖아.”
만나기만 하면 그렇게 아옹다옹하던 황과 최가 오늘은 이상스럽게도 제법 진지한 대화를 나눈다.
“때밀이 하면 사회에서 얕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잖아. 그러니까 세신사로 부르자고. 왜 자신 을 스스로 낮추는 거야.”
“나는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봐. 따라서 내가 하는 때밀이 직업이 결코 부끄럽거나 창피하다 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
“그건 최의 생각이고, 일반인들은 그리 생각을 안 한다니까.”
“나는 주위를 의식치 않는단 말야. 이 분야 최고가 되겠다는 신념으로 30년을 버텨왔거든.”
“최의 생각이 그렇게 확고한 걸 보니 존경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구먼.”
“고마우이.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때밀이도 꽤 괜찮은 직업이야.”
“요즈음은 세신사 교육원도 많고, 국가 공인은 아니지만 교육원이나 협회에서 자격증을 발급 한다는데, 공급 과 잉은 아닌지?”
“다 필요 없어. 나처럼 실제로 손님과 부딪치며 갈고닦은 실력이 최고거든. 실전 경험을 어떻 게 당하겠어. 거기 에 한 가지 더 사명감과 자긍심이 있어야 한다고.”
“어허 최, 생각과는 다른데. 욕 잘하고 큰소리 잘 치며, 고집불통인 줄만 알았는데 뚜렷한 철 학을 가진 멋쟁이 때 밀이로구먼."
“나는 지금까지 어떤 손님이고 내 손에 맡겨지면 조금도 소홀히 대해본 적이 없어. 피곤해 누 웠다가도 손님이 부르면 없던 힘까지 솟아나거든. 그래서 나는 이 때밀이 일이 적성에 맞는 다고 보아.”
“아까 사명감이니 어쩌니 하던데 그거나 설명해 봐.”
“사명감이란 내 손맛을 본 손님이 다시 손맛을 보고 싶은 생각이 들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고, 자긍심이란 누 구 한테든지 ‘빛나는 목간탕 때밀이 최!’라고 떳떳하게 말하는 거라고.”
어둠이 짙게 깔린 시골길을 자전거 한 대가 달린다. 때밀이 최의 퇴근길이다. 한적한 시골길이지만 가끔 자동차가 지나니 조심해야 한다. 가로등이 없고, 자전거 불빛이 흐릿해 정신 바짝 차리고 페달을 밟아야 한다.
최는 날씨가 궂은 날을 빼곤 언제나 자전거로 출퇴근한다. 목욕탕과 집 사이 왕복 20km 한 시간 거리를 그는 변함없이 오간다. 별다른 운동을 할 수 없는 최로선 자전거 타기가 유일한 운동이며, 기분 전환의 시간이기도 하다. 아침 일찍 시원한 바람을 가르며 탑정호 호반 도로를 돌아 성겁들을 지나노라면 그렇게 기분이 상쾌할 수가 없다. 여름철 뜨는 해가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의 이마에 비치는 모습은 황홀하기까지 하다.
“여보, 나왔어.”
“수고 많이 하셨어요.”
“아이, 피곤하다.”
“전엔 그런 말씀 없으시더니, 요즘 와서 피곤하단 말을 자주 하시네.”
“나도 나이가 들었나 봐.”
“여보, 내일 목욕탕에 좀 늦게 나가고, 한의원에 들러보지요. 진맥도 받아보고, 보약도 한 제 지어야겠어요.”
“아녀, 그렇게까지 할 건 없고. 그냥저냥 버텨보지 뭐.”
아내가 저녁상을 들여왔다. 동태찌개가 상에 올라왔다. 둘은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식사를 시작했다.
“참, 내 정신 좀 봐.”
“뭔데?”
“당신 드린다고 막걸리 사다 냉장고에 넣어놓고선…….”
“잘됐네. 얼큰한 찌개도 있고 하니 우리 한 잔씩 합시다.”
최 부부는 가끔 막걸리를 마신다. 아내는 삼겹살이나 생선찌개 등 별식이 있을 땐 반주로 막걸리를 준비한다.
“여보, 철상이 있잖아.”
“철상이는 왜요?”
“그 녀석 직장도 변변치 않고 특별한 재주도 없으니 때밀이 한 번 시켜볼까?”
“젊은 애들이 때밀이 직업을 달가워할까요? 아무래도 거부감이 클 것 같은데."
“그게 문제야. 쥐뿔도 없는 것들이 괜한 자존심 어쩌고 하며 때밀이를 우습게 알거든.”
“때밀이도 분명 3D 업종의 하나잖아요. 거기에 사회에서 때밀이를 보는 시선도 그리 호의적 이지 않고요.”
“당신은 현실과 이상을 분명히 구별할 줄 알아야 해. 자 한번 보자고. 때밀이 하면 해고 걱정 없는 평생직장이야. 다음으로 안정적인 수입이 보장된다는 말이지. 때를 미는 건 습관이거든. 따라서 한 번 고객은 영원한 고객이 되 는 거야.”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그러니까 내 손기술과, 고객 관리법을 철저히 가르쳐 준다는 것 아냐. 한 3년 데리고 훈련 시키면, 녀석도 틀림 없이 일류가 될 거야.”
“내가 전에 언뜻 비쳐 보았는데 말도 꺼내지 못하게 하던데요.”
“그건 아직도 인생의 뜨거운 맛을 보지 못해서 그래. 제 아비의 삶을 돌아본다면 아마 마음이 달라질 거야.”
“아직도 고생을 덜 해서 그럴까요?”
“내 당신하고 30년 가까이 살면서 크게 호강은 못 시켰지만, 때 거른 적 없잖아. 아이들 대 학 교육까지 시켰고.”
“그래서 나는 늘 당신한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어요. 이번 주말에 집에 온다고 했으 니 조용히 설득해 보세요.”
“그 녀석 오거든 당신이 먼저 달래봐. 아무래도 엄마 말이 더 먹힐 수 있을 테니까.”
“알았어요. 당신 말대로 해 볼게요. 그런데 너무 강요는 하지 말고 부드럽게 말해야 돼요. 간 신히 맘 잡은 애 오 히려 역효과 날지도 모르니까요.”
목욕탕 안에 돼지고기찌개 냄새가 진동한다. 황과 강이 들어서며 한 마디씩 내뱉는다.
“여기가 식당인지, 목욕탕인지 모르겠네. 문 좀 열어놓지, 손님들이 뭐라고 하겠어?”
“괜찮아. 내가 점심 먹는 데 아무도 시비할 사람 없어.”
“큰소리는, 동네 사람들이 최 무서워 아무 소리 안 하는 줄 알아. 인생이 불쌍해서 그냥 참는 줄이나 알라고.”
“뭐, 내가 왜 불쌍해?”
“나잇살이나 먹어가지고 분별력이 떨어지는 행동을 하니까 그렇지.”
“내가 무슨 분별력이 떨어진다고 헛소리하고 있어. 남 걱정 말고 황 너나 잘해.”
“멍청하기는…….”
“어라, 점점 가관이네.”
“최, 생각해 보라고. 남이 싫어하는지 좋아하는지 그것도 구별 못 하고 마구 제 주장만 해대 는 게 분별력 떨어지 는 행동이지 뭐야?”
“나는 거짓말이나 헛소리는 절대로 하지 않는 사람이야."
“누가 거짓말한댔어? 최가 옳다고 하는 것도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는 걸 왜 모르느냔 말이야. 이 답답한 사람아.”
“나는 지금까지 누구 눈치 보며 살지를 않았어. 내 생각이 옳으면 옳다고 말하는 게 뭐가 잘 못이야.”
“하, 이거 참. 오늘따라 더 답답하네. 최는 자기 생각만 옳다고 우겨대는 돌쇠 같은 사람야.”
“잔소리할 것 없어. 내 찌개 맛있게 끓여 놓았으니, 점심이나 같이 먹자고.”
“아니, 식당까지 차렸남? 무슨 점심을 예서 먹어?”
“잔말 말고 여기 앉기나 해. 식구가 친정 가서 저녁까지 먹으려고 3인분을 싸왔거든. 하여튼 내 솜씨 맛볼 사람 손들엇!”
박과 강 그리고 황과 최 이렇게 넷이 점심을 같이 먹게 되었다. 최는 잽싸게 사물함에서 라면 두 개를 꺼내 김치찌개에 넣고 끓이기 시작했다.
넷은 탈의실 평상에 둘러앉아 최가 밥상 차리는 걸 바라보고 있다. 밥은 보온밥통에 가져왔고, 반찬으로 돼지고기 김치찌개, 배추김치, 골뱅이무침, 홍어회, 더덕구이가 올랐다.
“자, 식사하기 전에 내 레시피 설명 들을 것.”
“또 시작이다. 그놈의 장광설……. 밥 한술 얻어먹으며 그 지겨운 잔소리를 들어야 하니 소화 가 되려나 모르겠 네.”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쓸 말이니 입 다물고 듣기나 해. 우선 밥은 쌀, 보리, 콩, 조, 귀리를 넣은 잡곡밥이야. 귀 리는 흔치 않은 곡물이니 설명을 하자면, 한 마디로 곡물의 왕으로 불리 지. 저열량 고단백 다이어트 식품이란 말 이야. 장군마트에 가면 얼마든지 구입할 수 있어.”
“야, 그놈의 잔소리에 라면 다 불겠다.”
“또 잡음 넣고 있네. 하던 이야기는 다 하고 끝내야 돼. 홍어회는 내가 잘 아는 식당에 부탁 해서 한 접시 사 왔고, 골뱅이는 통조림을 사 가미한 것이며, 더덕은 강원도에서 택배로 주문 한 거야. 이상 끝. 맛있게 먹을 것.”
아옹다옹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우정의 꽃을 활짝 피우는 단짝 들이다.
“야, 빛나는 목간탕 때밀이 최, 최고닷!”
기다리고 기다리던 여름휴가다. 최는 이번 휴가를 두 눈 딱 감고 아내와 단둘이 닷새간 동해안 자전거 여행을 하기로 했다. 경비도 다달이 조금씩 모아 일백만 원을 마련했다. 시집와 여태껏 기 한번 펴지 못한 아내를 위해 통 큰 결정을 한 거다.
“모처럼 큰맘 먹고 당신과 둘만의 여행 떠나는 거야. 우리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고 떠나 신 나게 즐기고 옵시다.”
강구항은 온통 대게 간판으로 덮여있다. 여기도 대게, 저기도 대개 하여 대게 거리로 불린다.
“여보, 우리 대게 고장에 왔으니 맛 좀 보고 갑시다.”
“눈요기 실컷 했으면 됐지, 그 비싼 걸 뭣 하러 먹어요.”
“그래도 대게 고장에 왔는데.”
“우리 둘이 먹으려면 대게 값만 16만 원이래요. 그 비싼 값 치르고 맛본다는 건 낭비고 사치예요. 여기서는 구경 만 하고, 다른 데 가서 만 원짜리 시원한 물회로 점심 때워요.”
둘은 강구항을 떠나 해변도로를 달려 축산항에 도착했다. 강구항처럼 번잡하지 않은 조용한 항구다. 한가한 식당을 찾아 들었다. 주인을 불러 물회를 시켰다. 땀 흘리고 난 후에 먹는 물회 맛이 참 좋았다.
식사를 끝내고 죽도산 전망대에 올랐다. 간혹 블루로드를 걷는 사람이 눈에 띄었지만, 때밀이 최 내외만을 위한 둘레길이나 마찬가지로 한적했다. 언덕에 올라 시원한 바람에 이마의 땀을 씻으며 절경을 감상했다. 해변의 바위가 기묘하다.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 아이들에게 카톡으로 보냈다.
아내는 들떠있다. 결혼 후 처음 갖는 단둘만의 호젓한 여행에 감격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감정이 고조돼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내려오는 데 슬그머니 팔짱을 낀다. 실로 얼마만의 팔짱인지 모를 정도로 오랜만에 보는 아내의 사랑스러움이다.
“여보, 그간 고생 많았어. 그리고 고마웠어. 없는 집에 시집와 친척들로부터 그렇게 무시를 당 하면서도 잘 참아 준 게 정말 고마웠어.”
“별소리 다 하네요. 나처럼 시집와 고생 안 하고 산 사람 흔치 않을걸요. 호밋자루 한 번 잡지 않았고, 돈 버느라 고생 안 하고 집안 살림만 했으니 정말 호강하며 산 게 아닌가요?”
“때밀이 만나 남들로부터 무시를 당했잖아. 특히 작은집 식구들은 대놓고 우리를 무시했고.”
“그게 뭐 대수에요. 도둑질 안 하고, 남한테 손 벌리지 않고 우리 힘으로 살아왔으면 됐지요.”
“그래도 당신 마음고생이 매우 심했을 거야. 인간적인 모욕감에 치를 떨 수도 있었을 테고.”
“나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어요. 남 헐뜯는 사람들 입 아프고 더러워지지 무어 남는 게 있어요.”
“여보, 우리 앞으로 자주 이런 기회 갖도록 합시다. 나 오늘처럼 당신이 사랑스럽고 소중하게 생각되기는 처음이 거든.”
“고마워요, 그렇게 생각해 주니. 주변머리 없는 내가 당신에게 힘이 되어 주지 못하고, 너무 의지만 했어요. 가을 부터는 부업을 가지려고요. 이제 우리도 노후 준비를 해야잖아요.”
‘빛나는 목간탕 때밀이 최, 여름휴가 끝. 손맛 보러 오세요.’
천일탕 단골들에게 일제히 문자가 날아들었다. 때밀이 최가 닷새간의 여름휴가를 끝내고 복귀했음을 알리는 문자다. 그간 많은 사람이 최의 손맛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닷새,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이었지만, 최의 등장을 많은 이들이 애타게 기다렸을 것이다. 올백으로 손님을 요리하는 마술사 최의 출현을.
강은 1주일에 한 번꼴로 때를 미는 게 습관이 되었다. 최가 없는 동안 한 번 다른 곳에서 때를 밀었으나 영 신통치 않아 집에서 대충 샤워만 하고 최를 기다려왔다. 강은 최의 문자를 받자 조바심이 났다. 어서 가 최의 손맛을 보고 싶은 마음에서다. 시계를 보며 퇴근 시각을 기다렸다. 근무 끝나자마자 곧장 목욕탕으로 차를 몰았다.
“어이 최, 휴가 어디로 갔다 왔어?”
둘은 오랜 이별 끝의 해후인 양 뜨겁게 포옹하며 반가워했다. 가끔 의견 충돌로 아옹다옹하다가도 떨어지면 금세 보고 싶은 게 그들 사이다.
“마누라하고 자전거로 동해안 한 바퀴 돌고 왔지.”
“그래, 참 좋았겠네. 아주머니도 자전거 잘 타시남?”
“그럼, 나 못지않아. 선수야, 선수!”
“어디 어디 갔다 왔나 형한테 보고해야지.”
“에끼, 이 사람. 그새 며칠 안 봤다고 버르장머리가 없어졌구먼.”
“그건 그렇고 재미난 얘기나 해봐.”
“여행 주제는 ‘빛나는 목간탕 때밀이 최, 동해 7번 국도 달리다’였거든.”
“그래서?”
“자전거로 시작해 자전거로 끝난 여행이었지. 가다 힘들면 쉬고, 배고프면 먹고, 아름답다 싶 으면 구경하고, 밤 되면 자는 유유자적한 여행이었다는 거야.”
“최가 부럽구먼. 나는 지금까지 그런 여유를 가지고 휴가를 즐겨본 적이 없어.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내 식구가 불쌍하지 뭐. 멋대가리 없는 남편 만나서…….”
“야 이 사람아, 아직도 창창한 인생인데 뭘 그리 생각하나.”
“최, 아주머니가 퍽 좋아했겠네. 어디 탈 난데는 없고?”
“없어. 얼굴이 좀 탔다고나 할까.”
“자, 그럼 ‘빛나는 목간탕 때밀이 최의 동해 7번 국도 여행기’를 들어봅시다.”
“이야기는 나중에 듣고 우선 절구라고. 때 좀 나오겠는걸.”
강을 온탕으로 들여보내고 화장실에 들어가 곰방대에 불을 붙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탈의
실에서 담배를 피웠으나, 하도 손님들 항의가 심해 지금은 화장실을 이용한다. 물론 화장실에
서도 연기는 탈의실로 새어 나온다. 그러나 최는 고집스럽게 항의를 무시해 버린다. 환풍기 틀
어 놨는데 무슨 냄새냐며 오히려 지청구를 해대는 최다.
“어이 최, 잘 다녀왔어?”
칠보사 스님이 들어서며 소리친다.
“스님, 잘 지내셨어요?”
“나 최 보고 싶어 눈이 짓물렀어. 접수!”
“2번인데요.”
“나 바쁜데.”
“우선 절구세요. 내가 강한테 양보받을 테니까요.”
사우나실에서 땀 빼고 있는 강에게 다가가 한마디 한다.
“강, 칠보사 스님 오셨어. 1번 양보해.”
“나도 바쁜 일 있어 곤란한데.”
“야, 인간아. 스님은 8학년 8반이야. 경로 정신이 이렇게 없어서 되겠어. 정 바쁘면 그냥 가. 오늘 펜치야!”
“알았엇! 양보할게.”
토요일 오후, 조기 축구 선수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신발이고 옷이고 제멋대로 벗어놓았다.
“야, 너희들 제대로 정리 못 해. 신발은 신발장에, 옷은 옷장에, 그렇지 않으면 모두 쓰레기통 으로 직행인 줄 알 앗!”
“형, 좀 봐줘.”
“너희들은 초등학교도 안 다닌 놈들 같아. 생활의 기본인 정리 정돈도 못 하니까.”
목욕 마친 축구선수 몇이 최 앞에 엎드린다.
“너는 어디여?”
“왼쪽 어깨 아파 죽겠어요.”
“자, 여기 누워. 이 테이프가 얼마짜리인 줄 알아?”
“알았어, 알아. 통증이나 우선하게 해줘. 내가 사례는 톡톡히 할 테니까.”
“어허, 이거 어디서 온 돌팔이신가? 벌건 대낮에 무면허 의료행위라니.”
“뭣, 이게 무슨 의료행위야?”
“맞지. 무면허 의료행위. 의사 면허도 없이 아픈 사람 치료해 준다 하고, 사례를 요구하니까.”
“헛소리하고 있네. 내 돈 들여 테이프 사다 공짜로 테이핑 해준단 말야.”
“그럼, 물리치료사 역할인가?”
“하여튼 내 테이핑 솜씨 맛보고 여러 사람 통증 멎었거든.”
“그러면 지하에 있던 나이팅게일이 나타난 게로군.”
“잔소리 집어치우고 꺼졋!”
박은 그렇게 최의 속을 긁어놓고 목욕탕을 나갔다.
배불뚝이 황이 느지막하게 목욕탕에 들어선다.
“오늘은 어째 늦었댜?”
“휴차야, 샤워하고 병원 좀 가봐야겠어.”
“어디가 아프간디?”
“자꾸 체중이 불어서 그래.”
“뭘 그런 걸 가지고 병원을 가.”
“아녀, 심각해. 대변보고 밑 닦는 것도 여간 불편한 게 아냐.”
“그거야 운동 부족이지. 하루 종일 택시 몰고 다니다가, 일 끝내고 나선 삼겹살에 소주 마시 고 바로 잠자리에 드 니, 그게 모두 뱃살이 되는 건 불문가지지 뭐.”
“아녀, 그것도 한 원인이 되겠지만, 왜 요즘 와서 급작스레 체중이 부느냐고.”
“걱정 마. 당장 오늘부터 매일 20분씩 내 트레이닝 지도받으면 일주일 후부터 체중이 줄어들 기 시작할 거야.”
“어디서 또 돌팔이 트레이너 노릇 하려고 그래.”
“야, TV에서 보고 배운 것이란 말이야. 나 봐. 배에 임금 왕 자가 생겼잖아.”
“그럼, 어떤 운동인지 한 번 시범을 보여 봐.”
“세 가지가 있어. 매일 번갈아 가며 하자고. 한 달만 꾸준히 해도 똥배 어지간히 들어갈걸.”
황은 목욕탕 바닥에 누워 최의 동작을 따라 하느라 땀을 뻘뻘 흘린다. 따라 하마 해놓고 포기할 수도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구슬땀 흘리는 황이다.
“철상아, 너 지금부터 아비가 하는 말 잘 들어.”
“말씀 안 하셔도 잘 알아요. 이미 엄마한테 다 들었거든요.”
“그러면 아비 뜻 충분히 알았겠구나. 네 생각은 어떠냐?”
“그야 당연히 싫지요. 지금 세상에 어느 누가 때밀이를 직업으로 가지려 하겠어요?”
“야, 너 단순하게 생각하지 마. 때밀이 꽤 매력 있는 직업이거든.”
“아버지한테는 죄송하지만, 솔직히 말해 창피한 직업이지요.”
“야, 뭐가 창피해. 다 생각하기 나름일 뿐이야.”
“사회에선 그렇게 보지 않는단 말이에요.”
“그럼, 의사도 창피한 직업이겠구나. 환자 벗겨놓고 이곳저곳 살피며 진찰하니까.”
“의사하고는 다르지요. 의사는 누구나 선망하는 직업이지만, 때밀이는 하찮은 직업 중 하나거 든요.”
“너야말로 생각을 바꿔야겠구나. 의사나 때밀이나 모두 사람 몸을 다루잖니?”
“그래도 저는 싫어요.”
“그럼, 너 앞으로 무얼 하며 살아갈 계획인지 말해봐. 지금까지는 아비가 너희들 힘이 되어 주었지만, 제 길로 한 길씩 컸으니 홀로 서야지.”
“아직은 별다른 계획이 없고요, 지금 다니는 회사 계속 다니며 생각해 보겠어요.”
“아비가 보기엔 지금 네가 다니는 오토바이 대리점은 전망이 밝지 않아. 자동차가 대세지.”
“돈 모아서 친구하고 장사하기로 했어요.”
“무슨 장사?”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봐야지요.”
“그것 봐. 너는 목표가 없어. 목표가. 아비는 대한민국 최고의 때밀이 소리를 듣는 게 삶의 목 표거든. 지금 내 핸 드폰에는 100여 명의 고객 전화번호가 저장돼 있어. 너 시골 목욕탕에서 고객 100명을 확보해 관리한다는 게 얼 마나 힘든 줄 아니?”
“제가 만약 때밀이를 한다고 해 보세요. 어느 여자가 저한테 시집오겠어요. 저는 그게 가장 두려워요.”
“직업에 대한 이해가 그렇게 부족한 사람과는 부부의 연을 맺었다 하더라도 행복하질 않단다. 때밀이가 어때서 거부감이 그리 심한지 아비는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는구나.”
“아버지께 말씀은 안 드렸지만,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이웃 사람들이 저보고 때밀이 아들이 라며 얕보는 태도로 말했거든요. 저는 그 말을 듣는 게 굉장히 창피했어요.”
“아비는 몰랐구나. 네게 그런 아픔이 있었다는 걸. 그러나 `/이제 철이 들었으니, 생각을 바꿔 보면 어떻겠니?”
“알았어요. 좀 더 깊이 고민해 볼게요.”
아들을 보내고 밖에 나온 최는 담배를 깊이 빨아 연기를 허공에 뿜는다. 공기 중으로 사라지는 연기를 보며, 인생도 연기처럼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것이라 생각했다.
최가 며칠째 목욕탕에 나오질 않았다. 전화를 해도 받질 않는다. 걱정이 됐다. 강이 박을 불러 황의 택시를 타고 최의 집을 찾았다. 문이 잠겨있다. 이웃 노인에게 물으니,
“최 씨 사고 났어요. 자전거 타고 집에 오다가 낭떠러지로 굴렀대요.”
논산병원 정형외과 병동 침대에 최가 누워있다. 한 쪽 다리와 머리에 하얀 붕대 칭칭 감고서.
“최, 어떻게 된 거야?”
“좀 다쳤어.”
“좀 다친 게 아닌 것 같은데. 머리 사진은 찍어봤겠지?”
“머리는 깨지기만 했을 뿐 뇌는 이상이 없대.”
“그거 불행 중 다행이로구먼. 그럼, 다리는?”
“그야 부러졌지. 깁스를 했으니 한 달 후면 걸을 수 있을 거라는군.”
“사고는 어떻게 해서 난 거야?”
“지난 주말에 아들놈 불러 대화를 나누었지. 그런데 그 녀석이 제 아비 때밀이 직업으로 인해 마음의 상처가 있 었더러군.”
“아니, 무슨 상처?”
“애들 초등학교 때 지산동 마을 회관에 살았어. 그때 이웃 사람들이 우리 철상이를 때밀이 아 들이라며 얕잡아보 았다는 거야. 철상이는 그 말을 듣는 게 매우 창피했데. 그 말 듣고 속상한 김에 한잔하고 가다가 그만…….”
“사람도 참, 그런 일 있으면 우리한테 털어놓고 마음을 달랬어야지.”
“미안하이. 친구들!”
최의 침대맡에 놓인 난 화분에 매달린 글귀가 유난히 또렷하다.
‘빛나는 목간탕 때밀이 최, 쾌유를 빕니다. 당신의 손맛을 그리워하는 친구들!’
첫댓글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친구들 간의 대화체가 아주 매끄럽고 읽는 데 부담이 없네요.
이만한 글을 쓰려면 수많은 고뇌가 있었을 것이고 웬만한 습작이 되어있지 않으면 쓰기 어려운데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듭니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지만 시회적인 시선이 여전하니 때밀이 직업을 가진 부모 때문에 상처를 받았을 자식 생각에 술 한 잔 걸치고 오다가 사고까지 난 아비의 마음이 곧 구 세대들의 마음 아닐까요.
좋은 글 자주 올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