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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th. Jan. 71(화) 22:00
마치 미쳐서 날뛰던 사람이 고이 잠들고 난 뒤 같은 느낌이다. 1시간 전 울릉도를 떠나 다시 묵호항을 향해 달리고 있다. 아직 섬 부근이라 잔잔한 모양이다.
어제 오후 3시부터 오늘 아침 9시 울릉도 도동 옆 신리라는 곳에 피박(닻을 내리지 않고 띄워둔 체 머무는 것)할 때까지 18시간 동안은 사경(死境)이라고 했어야 했다. 아직도 안심을 금물이다. 목적지에 갈 때까지 80마일 정상적인 항해라면 8시간이지만 어떤 의외의 일로 몇 시간을 허비할는지 모른겠다. 안항을 비는 마음 진실로 간절하다.
어제는 삶과 죽음의 한계를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살아서 간다는 희망을 더욱 강하게 가지면서도 극한의 경우를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10미터 이상의 높은 파고(波高). 그것은 파도가 아니고 물의 산이었고 물기둥, 물의 절벽이었다.
오후 3시반 조타실에 올라갔을 때 선뜻 느껴지던 이상한 분위기! 선장의 긴장된, 그리고 초조한 빛을 역역히 볼 수 있었고 당직자들의 심각한 표정들이 아연해진다. 과연 앞에서 닥치는 파도는 곧 조타실의 시야를 가릴만큼 컸다. Life Jacket의 분배가 마땅히 필요한 것이었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다시 내려와서 몸가짐과 옷차림을 단단히 하고 다시 올라갔다. 선장, 일등항해사 그리고 나 이외에 유능하고 비교적 경험이 많은 문 씨, 이일규 씨. 강 씨등 4명의 선원들을 불러올리고 나머지는 내려 보냈다. 초인적인 어떤 안간힘이었다. 가장 고비는 오후 6~8시 사이였다. 초속 30미터 이상의 강한 바람과 눈보라, 물덩어리, 그 속에 든 배가 왜 그렇게 작아 보이는지 몰랐다. ‘Oh God!'을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가장 위험하다는 삼각파도가 계속 닥친다. 키잡이 한사람의 손에 배의 운명이 좌우된다. 기관실의 안전이 가장 중요하다. Eng. Room(기관실)에도 전원 비상근무를 시킨다. 선장의 지휘아래 Mr.강이 조타를, 내가 Eng.조작을, 1항사는 앞의 파도를 각각 맡아서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잠이 엄습도 보통일이 아니다. 이것도 배의 동요가 심함으로서 오는 일종의 멀미 중세이다. 서로의 등을 쳐주어 잠을 쫒기도 했다. 바람이 배를 때리는 소리 때문에 다른 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유리창에 부딪치는 파도소리가 마치 돌로 유리를 두드리듯 날카로운 금속성의 높은 소리다. Top Bridge(선교 위)의 물소리가 더욱 정신을 교란시키기도 했다. 강한 수격작용(水擊作用)*은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꼭 무슨 변고가 일어날 것만 같았다. 곧 선장의 입에서 퇴선 명령이 내려질 것만 같다. 마지막 어떤 상태를 생각한다. 영아와 정화의 모습이 눈앞에 스친다. 그럴수록 살아야 한다는 강한 욕심과 알지 못하는 자신감도 생기는 듯 했다. 독도가 20마일, 울릉도가 30여마일 떨어져 있으나 그것으로 향하지 못하고 있다. 바람의 방향 따라 배의 선수를 돌려서 배의 유지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 시간에 0.3마일! 그 자리에서 용을 쓰거나 오히려 뒤로 밀리는 것이다. 그래도 Radar(레이더) 상에 울릉도를 포착할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위안이고 다행한 일이 아니다. 가끔 한마디씩 농담만은 오가 갈 만큼 여유가 생기기도 했지만 숙연한 그리고 침통한 분위기는 어쩔 수 없었다. 낮에는 파도의 방향을 볼 수 있어서 좀 나았지만 밤의 어둠이, 칠흑 같은 어둠이 더욱 마음마져 어둡게 했다. 방법, 살 수 있는 방법은 별수 없다. 80%의 운명과 15%의 기관능력, 5%의 사람 즉 우리들의 힘을 믿어야 할 뿐이다. Bridge의 묶여지지 않은 물건들은 죄다 엎어지고 떨어지고 깨지기도했다. 그러나 그것도 필요없다. 그저 어쨌던 배를 파곡(波谷)에 들어가지 않도록 선수를 유지하는 일 그것뿐이다. 최선의 길, 최선의 방법인 것이다. 시간이 왜 그리 지루했는지. 날이 왜 그리 어서 새지 않는지. 혹시 영영 어둠이 계속 되는 것이 아닐까하는 의혹마져 생기기도 했다. 무엇보다 천만다행인 것이 바람의 방향이 자주 바뀜에 따라 파도가 더 이상의 큰 힘을 가지지 않고 그저 크기만 한 채 밀려 왔다는 것이다. 그 파도가 좀 더 센 힘을 가지고 배를 때렸다면 -.
새벽4시경부터 차츰 바람이 세력을 늦추는 듯한다. 7시경 울릉도를 15마일 둔 지점에서 더 이상 나가지 못하고 선수를 울릉도로 조심스레 꺾는데 성공하였다. 참으로 피를 말리는 순간이었다. 눈이 심해 시야를 가린다. 산 만큼이나 큰 파도 끝이 밝은 수은등 불빛을 받아 옥색, 아니면 초록색을 띄고 다시 그 위에 흰꼬리를 달았다. 산이다. 누가 이것을 파도라 하고 바다라 할 것인가. 뒷바람과 아직도 가라앉지 않은 길고 높은 여파를 뒤로 받으며 밤9시반 울릉도 도동을 지나 신리 앞 바다에 표박을 할 수 있었다. 살은 것이다. 휑한 눈들에 밝은 불빛이 돈다. 삶의 기쁨이리라. 피차의 수고에 감사한다. 또 다시 이런 극한의 상태를 맞을까 겁이 난다. 제법 바다를 겪었다는 문 씨, 강 씨, 이 씨 모두 긴장했었고 처음 당해보는 일이더란다. 다른 선원들은 밤새 갑판 위를 넘쳐온 처리실의 물을 퍼내느라 큰 애를 먹었다. 선내의 모든 상황을 점검하도록 갑판장에게 지시했다. 엉망이다. 선수 Store(창고)에 약간의 침수는 다행한 일이고, 통신과 T.V 안테나의 절단, 선미등의 파손, 처리실의 컨베어 등 Lashing(고박)부족으로 인한 많은 물건들의 넘어짐, 흩어러짐 등등. 큰 피해는 없는 게 다행한 일.
이 바람은 한랭성 대륙성고기압에 의한 바람이다. 저기압과 달라 이 바람은 그 세기와 방향이 바뀌지 않은 채 계속 분다는 것이다. 이때의 등압선 배치를 보면 한반도와 같은 방향으로 길죽길죽하게 남북으로 길게 뻗는 상황이다. 심할 경우에는 3-4일을 계속 불어 재끼는 경우가 있다. 역시 악명 높은 동해바다다.
밤새 파도에 씻긴 배가 깨끗해 졌다. 배를 두들겨 주고 싶도록 대견스러움을 느낀다. 각 곳에 소주 한 잔씩을 뿌렸다. 완전한 기능을 발휘해 주었다는 감사함이 이렇게 먹지도 못하는 술 한잔씩이지만 각 기기와 계기들에 대한 인간들의 성의요 감사의 표시다.
간밤의 지친 몸을 뉘었다. 파도에 시달리기가 왜 그리 피곤한지? 그래서 뱃놈들이 쉬 늙는다고들 한다. 잔잔한 바다, 먼 외항의 넘실거리는 Swell(너울: 일본어로 우네리)가 보인다. 13년 만에 다시 보는 울릉도. 새롭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눈 속에 뒤덮힌 땅, 가파른 산, 기암들, 눈 속에 파묻힌 체 눈만 내놓은 올망졸망한 집들, 간간이 뵈는 사람들, 아름다운 그림같이 느껴진다. 같은 눈 쌓인 땅이지만 소련의 Onekotan. 일본의 북해도 보담 얼마나 더 아름답고 포근하고 친근감을 갖는다. 정영 같은 민족이요 조국이란 것을 느껴보는 것인가 보다. 조용한 정(靜), 그러나 그 속에 숱한 밀어들이 있고 생동이 있어 보인다. 따뜻한 온들방이 그립다. 가서 푹 묻히고 싶다. 저기 저 옹기종기한 집 속에 아늑한 분위기가 무척이나 좋으리라. 화롯불에 구워먹는 옥수수나 감자의 구수한 맛도 있으리라. 외딴섬 그러나 외로워 보이지 않고 차라리 도심의 아우성과 치열한 투쟁이, 더러움이 없는 낙원이 아닐까 생각된다.
Radio의 뉴스가 더 놀랍다. 어제밤 우리가 生死의 갈림길에 시달리던 그 시간, 국내에서도 많은 피해가 있었단다. 동해안에 강풍과 해일(海溢)이 일어났단다. 수십척의 어선이 침몰, 파괴, 표류, 유실되고 귀한 생명들이 앗겼단다. 가슴 아픈 일이다. 하나의 비극이다. 아직도 구조를 바라는 데도 여파가 심해서 접근치 못한단다.
또한 육상엔 맹렬한 추위가 휩쓴단다. 부산이 영하5도라는군. 집안 식구들이 염려된다. 지난밤 영아도 무척이나 염려했으리라. 그래서 덕분에 이렇게 무사히 건재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마다 다른 바다, 예측을 불허하는 바다, 그러나 최대한의 Data로 가장 정확한 판단을 내려 행동해야한다. 속단, 무계획한 항해는 반드시 실패를 초래하고 숫한 생명을 앗는 불행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깊이깊이 명심해야 한다. 다시 새로이 항해를 위한 준비를 끝냈다. 풀어진 곳을 다시 묶고 부서진 곳은 고치고-. 어제 저녁 불안과 초조에 젖었던 선원들의 얼굴에 다시 환한 웃음이 핀다. 몹시도 그릇된 선장의 얼굴! 한편 감사하고 한편 측은한 생각도 든다. 그러나 그 밑에 얼마나 숫한 사람들이 달려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결코 평범만이 있어서는 안 된다. 평범 속에서 찾을 수 있고 줄 수 있는 믿음스런 신념, 위엄이 있어야겠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Melody가 몹시도 가늘고 간지럽게 들린다. 내일 밤 이맘때는 더운물에 몸을 담그고 이발하고 새 기분에 젖어 술잔을 기울일 것이다. 남은 7시간의 항해 부디 무사와 안전이 있으라.
* 수격작용(水擊作用) : 높은 파도에 의해 선박이 올라갔다 내려오면서 파도와 세게 부딛는 것. 심하면 선박이 절단되는 수도 있음
71. 1. 8(영아가 내 일기장에 몰래 쓴 글)
『하늘은 재색으로 낮게 깔려있고 눈발은 점차 적어지고 있오만 아빠가 배에서 작업하기에는 힘든 날씨에 능률이 오르지 않는 날일 것으로 짐작이 드오. 정화는 잠을 자오. 감기 기운이 있어 콧물도 흘리고 기침도 가끔 하지만 잘 놀고 있오. 부산에서 가져온 약을 먹고 엄마가 먹는 우동을 좀 집어먹다가 잠이 들었오. 아빠! 아빠가 쓴 항해일지는 정말 산 기록이요. 무엇보다 Seamen의 Wife가 읽어 둘만한 아야기의 절실함이 가득차 있오. 지금 주위의 Wife들이 모여서 잡담으로 시간을 보내오. 엄마는 비록 항해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은 없어 그때의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지는 못하지만 사실에 가깝게 짐작이나 간다는 것 보다는 약간 더 깊이, 더 많이 읽음으로써 아빠의 이야기를 들음으로서 또 엄마가 아빠 몰래 읽어온 바다의 이야기란 학교 도서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상상만 해 보아도 1월 4~5일 양일간의 고생은 정말 눈에 선하오.
그 동안 엄마는 정화와 기차에서 밤을 보내고 여관에서 쉬면서 아빠 배를 찾아서 부두를 몇 번이나 돌고 전화를 여러 군데 했오. 허지만 확실한 이야기는 없고 파도 때문에 좀 늦어질는지 모른다는 애매한 대답뿐이었오. 입항 소식을 듣고 정화를 등에 업고 배를 향했을 때는 무어라고 표현하지 못할 가슴 뿌듯해지는 기쁨이 발걸음을 들뜨게 했지요. 아빠가 망원경으로 Bridge에서 우리를 지켜보았다는 얘기는 나중 같이 온 선원이 얘기를 해서 알았지만 나는 정박해둔 배에 아빠의 모습을 찾기에 여념이 없었오. 아빠가 ‘어이!’하고 손을 들었을 때 나도 모르게 ‘아빠’하고 손을 흔들고 소리를 질렀오. 70일 남짓하오만 어쩌면 그렇게 길고 지루하고 안타까운 날들이었는지 모르오. 이제 여름방학에나 올 계획으로 있오만 아빠의 사기 문제가 크게 영향으로 미칠 것 같소. 그러나 며칠만의 해후로 인해서 근무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낙인은 정말 듣고 싶지 않고 또 그런 성질이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아빠가 이해를 해 줄 것 같소. 이제 회사의 주소도 알았으니까 편지는 써 보내리다. 또 한번 그 옛날의 Back Number를 이용해서 서로를 알고 위하고 대화를 나눕시다. 그리고 올해의 목표인 My Home작전에 꼭 결말을 보도록 엄마의 작은 힘이지만 보태고 아끼고 저축하리다. 거듭 아빠에겐 부탁드릴 것도 없지만 옛부터 ‘夫唱婦隨(부창부수)’라는 말은 흔히들 성공한 가정을 두고 이르는 말인 것 같더이다만 그 말이 바로 우리집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71년을 약속합시다. 그리고 부탁은 정화의 돌은 아빠 엄마 셋이서 낯선 땅이지만 여기서 기념사진이나 촬영하고 남은 돈은 정화 몫으로 통장을 만듭시다. 정기거치예금이면 후일 정화가 학교에 들어갈 동안 많은 도움이 되리라고 믿으니까요. 아빠! 올해의 大漁와 건강에 우리집 식구 위에 함께 하기를 바라고 싶소. 아빠 노트에 엄마의 질서 없는 글이 차지해서 미안하게 생각하오. 넓은 이해를 바라오. 엄마가 씀 -』
『1. 10 오늘이 벌써 아빠를 찾아온지 일주일이오. 낯선 땅이지만 낯설지 않았고, 익숙하지 못한 여관생활에 익숙해지고 온 종일 당신만을 위해서 보내고 싶은 날들이었오. 주위의 Wife들고 친해지려고 했으나 별로 흥미를 못 느꼈오. 뱃사람의 아내답게 전형적인 사고방식과 생활습관이 그대로 들어나고 있었오. 한결 내 자신이 B.G(직업여성)라는 것은 어떤 면으로 봐서 크게 Minus의 결과라고 생각키울 때가 있을는지 모르오만 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계속하겠오. 누구보다도 아빠를 위하고 그리고 내 자신을 위하는 동시에 우리 정화에게도 뭔가 Plus가 될 것은 틀림없다고 믿으니까요. 그리고 아빠가 늦게 들어오는 저녁이 많지만 결코 나는 당신을 의심하거나 멀어져서가 아니오. 단지 아내가 남편과 함께 있고 싶어한다는 평범한 지어미의 생각 때문에 화를 낸 적이 있었오. 허나 이해를 못하는 것은 아니니까 절대로 과부족한 아내라고 단정은 마오. 세상의 아내들이 바라는 것은 적당한 생활기반 위에 건강과 함께 있어주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하면서도 아빠들에게는 어떤 부담을 주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바가지를 긁는다.’는 식으로 그 뜻이 전달되는지 모르오. 아내들은 남편의 명예나 높은 지위를 바란 것은 아닐거라고 내 자신을 미루어 생각이 드오. 마담 드골이 선거에서 드골이 패한 것을 제일 기뻐했다고 전하는 외신을 본 적이 있오. 그 이유는 이제 ‘내 남편과 함께 있을 시간이 나에게도 주어졌다’고 믿기 때문에. 엄마는 13일부터 20일까지 일직이요. 내일은 떠나야 하리다. 또 다음 만날 때까지 서로 그리며 부르며 즐거움은 항상 뒤에 있다는 옛말이 결코 허망하게 되지 않도록 서로를 절제하고 노력해 우리의 작은 소망이 함께 이룰 수 있도록 자신들에게 다짐을 합시다. 아빠의 사랑이 엄마와 정화를 위해서 항상 내리기를, 해바라기처럼 해를 따라 돌아가리다. - 엄마가-』
71년 1월 16일(토) 17:00시
여기는 일본 땅. Nigata(新潟)북동쪽 약 20마일 떨어진 Awashima(票島)란 조그마한 섬(길이가 4마일. 폭이 1.5마일)이다. 14일 오전 11시 제3항차 묵호항을 출발하여 어장으로 북상도중 역시 저기압의 영향이 커서 여기로 코스를 돌려 지금 피항중이다.
바람이 자면 다시 계속 항해를 계속해야 한다. 요즘 계절이 계절이니 만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출항 2일만에 벌써 피항을 하다니 좀 심한 감이 든다.
지난 6일 새벽 5시 무사히 묵호 외항에 Anchoring을 했다. 흰눈이 쌓인 묵호항. 제1항차때부터 인상이 별로 좋지 않았고 더 머무르고 싶지 않았던 묵호였지만 그래도 반가웠다. 전날 밤의 기억이 너무나 새로웠기 때문인지 모른다. 또 사랑하는 영아와 귀여운 정화가 와 있을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앞서서 그랬는지 몰랐다. 여하튼 동방51호는 전 선원과 더불어 무사히, 정말 무사히 다시 묵호항에 계류했고 곧이어 정상적인 하역작업에 들어 갈 수 있었으며, 사원들의 격려 소리를 들으며 위로를 받았다.
무엇보다 영아와의 해우가 있었다. 정화와 정다운 뽀뽀도 나눌 수 있었다. 배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영아는 내가 먼저 알아보았다. ‘어이’하고 소리쳤을 때 ‘아빠’하고 소리치며 손을 들어 주었다. 그 다음에 정화를 가르켰다. 가슴이 뭉클해짐도 금할 수 없었다. 이것이 진정 情이였고 사랑이리라. 그날 저녁 하숙에서 처음 당신을 안았을 때 정화는 잠들어 있었지만 영아는 울었다. 소리없는 울음이었지만 깊은 흐느낌이었다. 두어 달간에 밀리고 쌓였던 모든 그리움과 서러움과 반가움이 한꺼번에 뭉쳐 솟아올랐으리라. 긴 수염, 깎지 않은 것이 미안스러웠다. 그러나 힘끗 당신을 안을 수 있었고 안길 수 있었다. 곧 밝고 맑은 웃음을 담은 영아의 모습이 나를 반겨주었다. 정화의 모습 또한 많이 달라졌었다. 딸이 아빠를 몰라보는 것 이것도 분명히 비극(悲劇)의 하나라고 했다. 그의 재롱이 지금도 너무 눈에 선하다. 그로부터 한 주일동안 영아와 정화는 내 곁에 있었다. 낯선 땅 어색한 여인숙에서 종일 기다림에 지치면서도. 끝내 나를 위해 있어주었고 최선을 다해 주었다. 너무나도 하고픈 또 해야 할 얘기들이 많으면서도 죄다 하지 못하고 만 것이다. 오히려 할 수 없었던 것이었을 것이다. 12일 아침 11시발 기차로 내려 보냈다. 눈발이 내리는 가운데-. 다시 언젠가 만났을 때의 반가움을 그리면서 -.
함께 있었던 한 주일 동안에도 애만 먹였다. 또 ‘개지랄’이 나왔다. 술이 탈이였다. 다시 한번 내 슬픈 약점이 들어났다. 흉한 치부를 들어낸 느낌이다. 영아가 무척 걱정을 하며 갔다. 다시는 그러한 어리석은 짓은 않으리라고 약속했다. 스스로 부끄러움을 깊이 느낀다.
15일 어제는 사랑하는 딸 정화의 첫돌인데도 전보 한 장 치지 못하고 말았다. 영아가 무척 기다렸을 거다. 묵호에서 아빠와 셋이서 하자는 것도 그리고 정화 앞으로 적금 통장이나 만들어 주자는 것도 모두 행하지 못했다. 갈수록 내 자신이 비참해 진다는 결론이다. 유구무언(有口無言)이다. 오늘은 그만두자. 내일이 있을 뿐이다. 진정 나의 生을 성숙시키고 매듭지으려면 정신 차리는 내일. 그리고 오늘이 있어야 한다. 그래도 이번 항해는 외롭지가 않다. 머리맡에 영아와 정화의 사진이 결려 있다. 아빠와 셋이서 찍고 싶어 했는데 이것도-. 내가 잘 때 함께 재워주고 내가 깨면 함께 일어난다. 그런데 내가 웃을 때 웃어주지 않는 것이 못내 안타깝다. 욕심이 생긴다. 같이 웃고 성내는 살아있는 당신과 정화의 모습이 갖고 싶은 것이다. 잠자기 전 가만히 뽀뽀해주고 잔다. 한결 편안한 마음이다. 나는 열이면 열 모두 다 잊었는데 당신은 잊지 않고 배려해준 덕분이다. 역시 내 영아이고 내 아내이다. 13일부터 20일까지 당직이라고 했으니 요즘 수고가 많겠다. 부산 내려가서 후유증은 없는지?
조원술 형이 하선했다. 건강상의 이유이다. 몹시 마음이 무거웠다. 그도 무척이나 운이 나쁜 사람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아쉬운 말로 한 항해만 더 했어도 괜찮았는데-. 내일, 훗날이 있겠지. 대신 갑판장이 얘기한 한홍갑 씨가 승선했고 첫 항차에 갔다가 2항차에 낙오했던 실항사 Mr. 하가 다시 승선. 26명이 됐다.
이번 항해에는 군것질 할 것도 꽤 많이 준비했다. 아내 영아의 덕분이다. 인삼을 넣은 꿀도 준비해 주었고 사과랑, 곶감, 과자 등이다. 잘 먹고 잘 배설하고 튼튼한 몸과 마음을 늘 갖는 것이 그에 대한 나의 보답이 되리라. 그런데 출항초부터 왠지 Condition이 여의치 못하다. 이젠 차츰 회복되는 느낌이지만 멀미 증세겠지. 정박기간 중 무리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내 몸이 체질이 근본적으로 약체인 것인가. 부릅튼 입술에다 개지랄하던 날 술집 얘한테 걸킨 목의 자국이 아직도 쓰린데다 공연스레 난 귀의 부스럼. 모두가 귀찮고 짜증이 난다. 차츰 아물어 가긴 하지만 모두가 내 자신의 못나고 어슬퍼서 그런 것 같아 더한층 실증이 난다. 며칠 안으로 완전한 내 자신으로 다시 환원해야 한다.
다행히 App/O(실습항해사)가 있어 사관 당직도 3교대다. 시간이 좀 있어 좋다. 사온 책도 들 수 있다. 김형석씨의 에세이가 무척 마음을 끈다. ‘김교수 자신의 일’을 엮은 것인데 평범하면서도 무척 깊은 뜻이 서려있는 듯하다. 잠도 자지 않고 하루만에 반을 읽었다. 다음부턴 좋은 책은 다 싸야겠다. 그 속에서 ‘그’라는 인간의 약점을 술회해 놓은 것이 어쩌면 내 자신과 너무나 흡사하기에 여기 옮겨놓고 스스로 반성의 자료로 하련다.
「그는 내적이며 정신적인 어떤 면에서는 집념이 강하면서도 적극적인 진취력이 약했다. 개척해 나가려는 용기, 해 놓고야말겠다는 결단과 추진력이 없는 편이다. 중단은 퇴락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계속적인 투지를 가지지 못하고 있다. 그는 모든 것을 자기 나름데로 제멋대로 해석하고 평가하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사회적인 공인성(公認性), 객관적인 평가의 대상이 되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강했다. 나쁘게 표현하면 혼자서 우물쭈물하다가 버려두는 약자의 성격 그대로였다. 룰을 무시하고도 경기를 할 수 있는 것 같은 과오를 범할 가능성이 많은 편이였다. 많은 일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어렵더라도 중요한 일은 먼저 처리하는 법이다. 그러나 그는 적극성이 적었기 때문에 쉬운 문제들을 먼저 해결지으려 했고 귀중한 난제들은 미루러 두는 좋지 못한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습관은 사회를 살아가는데 적지 않은 손실을 가져오게 한다. 말하자면 계획을 세울 줄 모르며 수단과 방법도 모르는 편이다. 비록 생각은 앞서 있다 하더래도 실천의 결실은 거둘 수 없는 약자의 근성일는지 모른다. 그는 인정에 약하여 때로는 감상주의에 빠지는 경향이 강했다. 인정 때문에 찾을 것도 못 찾으며 거절할 것은 거절하지 못하는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스스로의 약함을 체념으로 정당화해버리는 습관이었다. ‘귀찮으니까’, ‘나만 손해 보면 되는데’, ‘애쓸 필요 있나 다른 일을 하면 돼지’하는 식의 생활태도를 가지기 쉽다. 그는 작은 일에도 강하게 충격을 받으며 경쟁이나 싸움의 대상을 찾아 발전과 승리를 얻자는 생각은 적은 셈이다. 물론 안일하게 스스로를 지키면 된다는 주장은 아니었다. 그러나 남들이 다 차지하는 링위에 올라가 당당히 우열과 승부를 가리자는 태도는 약한 편이였다.」
섬이 아늑한 감은 없으면서도 산에 나무가 많아 그런지 괜찮다고 느껴진다. 피항하기 위해서 들린 곳이 이번이 4번째다. 계속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린다. 밤이 자꾸 깊어간다. 내일 아침은 광명한 햇살과 함께 대망의 출범을 할 수 있겠지. 또다시 내일에 기대를 걸어 볼 수밖에 없군. 저번 항해 때 저기압에 혼이 나서 그런지 선장이 몹시 신경을 쓴다. 당연한 귀결이겠지.
영아가 내 노트에 몇 자 memo해 줬다. 고맙고 마음 뿌듯한 일이다. 남편과 아내 사이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서로간의 ‘이해’라고 하든데 당신과 나 사이엔 그 이해가 오히려 너무나 충분히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것이 오히려 더 크고 무겁고 강하게 내 자신의 각성을 촉구해오고 있다. 좀 더 당신에게 깊은 사랑을 주고받는 길은 보다 더 내 자신부터 성실해지는 것이다. 해바라기처럼 해를 따라 돌아가는 당신이라면 항상 밝고 맑은 빛과 따스함으로 당신을 향해 부르는 내가 되리라.
17th. Jan. 71 (일)
계속 바람이 분다. 일본 동경 앞 바다에 발달한 저기압 셋이 계속 머무는 모양이다. 왠만하면 항해를 계속 할까 싶어 섬의 북쪽 끝까지 나왔으나 역시 높은 파도가 허락질 않아 다시 피항지로 돌아온다. 벌써 2일째다. 밤엔 부근을 항해하던 일본 화물선 1척과 Tanker(유조선) 1척이 역시 피항차 곁에 와있다. 덩치가 큰 배들도 별수가 없는 모양이다. 자국(自國)이라 닻을 내렸다. 우리도 안심하고 닻을 내리고 피항할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그러나 부득이 닻을 놓지 않을 수 없다. SC2* 와 일본기를 계양하고 잠시 닻을 내리고 피항정박을 했다. 저물어가는 저쪽 하늘이 구름에 쌓여 있으면서도 밝은 자색을 물들어 있다. 얄미운 하늘빛이다.
당직이 2교대로 바뀌었다. 저속 Heaving To 하는데 실항사를 맡겨 둘 수가 없기 때문이다. App/O 자신도 속히 배우고 일에 익숙해지도록 노력했으면 좋으련만 아직도 너무 어리고 약하다. 과연 그를 어디다 얼마만큼의 가치를 활용할 수 있을는지?
*SC2 : 긴급사항이 발생하여 피항 중임을 표시하는 깃발
18일(월) 02:00시
3일째 피항중이다. 너무 아까운 시간이 아닐 수 없다. 지루함과 짜증이 따른다. ‘하루 늦게 난 셈치자’는 자위(自慰)의 말들이 나온다. 자연에 항거치 못하고 굴복하고 있는 인간의 작은 힘을 합리화시키며 위로하자는 뜻이다.
‘1년 늦게 태어난 셈치는 것’이 여러 번 겹치니 결국 ‘아들하고 갑장이 되겠다.’는 맞장구. 며칠 늦게 가서 한꺼번에 많이 잡자는 Mr.강의 자위스런 얘기.
‘어느 아이가 울고 서 있었다. 왜 우느냐고 물으니 돈 10원을 잃었단다. 울지 말라고 10원을 주었더니 그놈의 애 더 큰소리로 운다. 잃은 10원을 주었는데 왜 더 우느냐 했더니 안 잃었으면 20원이 될텐데 -.’
내일 바로 이 시간 이후가 어떤 상황 앞에 다다를 지도 모르면서 서로가 지금의 아까운 시간허송을 Cover해 보려는 약한 마음의 표현들이다.
18일 06:30시
계속 기상상태를 정밀 분석 검토하다. R/O의 노고가 어느 때 보다 크다. 더 머물 수 없고 다소 완화되므로 다시 항해를 시작하기로 하다. 조심스런 항해다. 전속(全速)을 낼 수도 없다. 수격작용이 너무 심하기 때문이다. 심하게 한번 씩 배와 부딪칠 때는 정말 간이 떨어진다. 배 전체가 거대한 쇠망치로 얻어맞는 느낌이다. 무서운 일이다. 선체의 구조나 모양이 다소 감항성이 있으니 다행이다.
19일(화) 01:35시
드디어 Tugaru(津輕)해협에 들어서다. 매항차 2차례씩 통과할 때마다 내 당직 차례다. 오히려 경험을 쌓을 수 있어 좋다고 본다. 해협이자만 파고가 꽤 높다. 06:20시 해협을 완전히 통과도 하기 전에 다시 피항하다. Esan Misaki(惠山岬)부근이다. 09:30 다시 항해 시작하다. 너무 ‘지나친 조심’이란 감이 있다. ‘행하기 전의 신중한 판단’을 다시 한번 되새겨본다.
19:30시 드디어 Erimo Misaki(襟裳岬) Light house를 Abeam Pass(정횡통과)하고 코스를 북으로 꺾었다. 그러나 일본 북해도 동안을 붙어서 간다. 그러나 우리가 가야할 정식 코스는 아니다.
20일(수) 오전 10시반:
본격적인 진로에 들어서다. Co.55도. 풍향은 북동. 풍속은 10-15m. 그러나 이젠 더 머물 수 없다. 속력을 줄여서라도 서서히 북상해야 한다. No.1 행복호가 조금 앞서가는 모양이다. 301호 화영호에서 전보가 왔다. 현우형님이 승선했단다.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그 사이 욕은 좀 했겠다.
1월 21일(목) 14:00시
이제부터 일본을 완전히 벗어나다. Kulil(千島)열도에 들어섰다. 지금은 오전중에 擇足島(에도로후섬)를 지나 得無島(우루푸섬)를 10마일까지 접근하여 계속 북상중이다. 낮게 눈 덮인 산이 언제봐도 인상적이다. 앞바람에다 수격작용으로 속력을 계속 조정해가며 간다. 안타까운 마음이 앞서 달린다. 구름이 낮게 깔렸으나 바람은 잔다. 길고 큰 너울(Swell)이 선체를 울렁이게 한다. 차츰 제 속력을 내면서 달린다. 23일 아침이라야 첫 투망이 시작되겠다. 완전히 4일하고도 12시간이 늦었다. 정말 아깝고 아쉬운 시간이 아닐 수 없다. 선원들도 차츰 지루한 표정이 보이기 시작한다. 역시 바다는 어느 정도 거치럼이 있어야 하고 뱃놈은 잡념을 잊을 수 있는 움직임이 있어야 하는 것 같다.
계속 몸의 컨디션이 좋질 않다. 원인을 찾지 못하겠다. 메스껍고 약간 가래가 있다. 중이염이 재발하여 좀 심해지기 때문인 것도 같다. 삼(參)이 든 꿀을 먹어서 그런가? 며칠 복용을 중지해 볼까한다. 첫째 몸이 개운치 못하니 만사가 여의치 못하다. 의지가 약한 탓이기도 하고 -.
선원들의 조타실 당직근무 태도들이 많이 해이해졌다. 출항 전 경고 하지 않은 것이 무척 후회된다. 자료를 준비해 두었으면서도-. 완전한 실책이다. 특히 배를 처음 타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뱃 생활의 습성을 들이는 것이 내 책임에 속한다. 개개인을 상대로 일일이 얘기를 할 수도 없다. 자료를 계속 모으자 결정적인 기회를 잡았을 때 처음부터 끝까지 욕설과 함께 퍼 넘길 거다. 전체를 상대로-.
71년 2월 1일(월)
벌써 2월이다. 누가 세월은 유수(流水)같다고 했었는데 과연 그렇게 빠른가도 싶다. 그러면서도 지금의 하루하루가 왜 이렇게 지루한지 모르겠다.
31일 영아의 전보를 받다. ‘大漁, 健康祈願(대어, 건강기원), 정화걸음마 제법, 조 씨 하선여부’이다. 반갑고 반갑다. 어제 310호에 있던 현우 형님 편으로 편지를 보내긴 했지만-.
정화가 이젠 제법 걸음마를 한단다. 보고 싶군. 밥 한 숟갈 받아먹고 어! 어! 하는 소리가 지금도 눈에 선하고 귀에 쟁쟁거린다. 너의 어린 재롱을 받아줄 수 없는 지금의 ‘아빠’ 마음도 무척이나 무겁다. 조용히 웃으면 사진을 펴본다.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은데-.
지금 우리가 머무르는 곳은 일본 북해도 북동쪽 Kushiro(釧路)항이다. 지난 1월 26일 조난(遭難)당한 301호 화영호 선원을 여기서 인계하기 위해서 예까지 온 것이다. 여기서 25명의 선원과 고 김광수(故 金光洙)* 301호 선장의 유해를 인계하고 다시 중간 보급을 받아 조업장으로 갈 예정이다. 결국 우리들만 막대한 손해를 보는 셈인가 싶다. 귀중한 25명의 생명을 구하긴 했지만 그 후엔 양 회사간에 충분한 합의가 있어야겠고 절차가 지시됐어야 했었는데. 30일 오전에 입항 31일 301호 선원과 유해를 인계했다. 오늘쯤 다시 출항할 수 있을 것인지 모르겠다. 하루가 아깝고 지루하다. 본사 윤 사장과 형님의 친구인 이금우(李金雨) 형도 다녀갔다. 그간의 사정을 적어보자
〔1월 21일 밤늦게 첫 투망을 했었다. 그러나 23일 아침까지 4차 투망 했을 때 다시 저기압 피항을 했었다. 억수로 재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피항이라면 질색이다. 마음부터 짜증이 앞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 눈앞에, 코밑에서 당하고 있는 엄연한 현실인 것을-.
24일부터 다시 시작한 조업을 예상외로 성적이 좋았다. 1일 20톤 가까운 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 모두들 기대와 환희에 찬 얼굴들 이였고 몸의 움직임이었다. 전번 항해와 같은 대어에다 Hit를 또 칠거라고 좋아했다. 예정보다 빨리 정월 대보름 전에 입항하리라는 즐거움으로 가득 찬 시간들이었다. 48시간씩 눈을 붙이지 않아도 거뜬히 이겨 낼 수 있었다. 지치지도 않았다. 고기냉동처리 문제는 오히려 골치를 앓을 지경이였다.
1월 26일. 그날은 날씨마저 더없이 좋았다. 일본선 30여척 속에 101행복호와 301화영호 그리고 우리 동방51호의 3척의 한국선이 있었을 뿐이지만 그날은 모두 20여톤의 어획들을 올리고 있었다. 잔잔한 수평선에 숱한 기대와 계속 좋은 일기를 빌며서-.
17시 50분 여덟 번째의 투망을 끝내고 20분도 안됐는데 양망 준비 명령이 떨어진다. 모두들 의아해 했으나 수심이 고르지 못했으리라 짐작했다. 저녁 식사 중에 C/E(기관장)와 그런 얘기를 나누면서 빨리 식사를 끝내고 조타실로 올라오니 사뭇 긴장된 분위기에 부산하다. 301화영호의 화재로 조난중이라 구조를 요청하는 소리가 S.S.B(무전전화)를 통해 Voice로 나온다. 벌써 바깥은 어둠이 깔리고 멀리 또는 가까이서 작업 중인 일본선들의 불빛이 유난히 반짝거리고 있었다. 긴급 양망이 시작되고 방향탐지기(Direction Finder)로 330도로 잡고 조난예상위치를 점검하고 전속 전진했다. 당시 본선의 위치는 북위 49도 09.2 동경 155도 34분이었으며 조난예상위치는 북위49도 20분에 동경 155도 25분이었다.
19:10시 항해 중 계속 조난선을 탐색했으며 Voice로 연락을 취하고 101행복호와 상호 위치를 육안으로 확인했다. 약 4마일 떨어져 뒤따르고 있었다.
19:20시 드디어 301호와 계류하고 구조작업 중이던 일본선 No.1 료호마루를 발견했다. 불과 0.8마일 앞에 있었다. 서서히 감속 접근했다.
19:30시 301화영호의 우현으로 접근하면서 계류색 하나를 연결하기 직전 일본선을 떨어져 나갔다. 301호에서 조타실 아래 선원실에서 계속 연기가 품어 나오고 있었다. 선원들이 반가워하는 표정들을 역력히 볼 수 있었다. 선미에서 나를 알아본 사람은 바로 현우 형님이었다. 목이 쉴대로 쉬었고 지쳐 있었다.
갑판 위엔 모든 퇴선 준비가 되어있었다. Life Jacket(구명조끼)와 Ling(구명대), Life Raft(구명정) 그밖에 필요한 사항이 되는 데로 준비되어 있었다.
20:00시경 양선사이에 Air fender(방충구) 3개를 넣고 계류하는데 성공했다. 날씨가 맑고 바람과 파도가 없는 것이 무엇보다 다행한 일이었다. 바다위에서 양선이 계류할 수 있었으니까. 101행복호가 접근하여 301호의 좌현에서 선회하고 있었다. 301호 통신장과 선장이 건너오고 본격적인 교신이 시작되었다. 미리 준비했던 펌프를 건네주고 소방시설을 준비해 주었어나 당장 진화작업이 시작되지는 못했다. 301화영호 선원들이 지친 때문이었다. 오전 식사 후 지금끗 아무것도 먹지 못했을 뿐 아니라 추위와 진화작업에 지쳤고 심한 Gas(연기)에 목들이 쉬어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우리 배에서 만든 식사가 제공되었다.
21:20시경 밀폐시킨 선원침실 각 문을 열고 본선에서 보낸 G.S Pump(해수펌프)로서 진화하기 시작했다. 심한 연기가 내품었지만 필사적인 선원들이 진화작업은 2시간만에 겨우 완전히 잡혔다. 화재는 오전 9시45분경 3차 투망 직전 갑판부 선원침실에서 발생한 것이라 한다. 모두 조업위치에서 뛰어 내려왔을 때는 이미 짙은 연기로서 접근이 어려웠던 것이었으며 그 속에서도 겨우 불난 곳을 찾고 소화호수를 연결하자 곧 발전기가 꺼지고 Main Eng.(主機)이 죽었단다. 이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고 치명적인 타격이었나 보다.
모든 문은 밀폐시키는 수밖에 없었단다. 통신이 두절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로부터 구조요청을 위한 온갖 수단방법이 동원되었던 모양이다. 선미 Gallows*위에서 타이어 팬다를 9개나 불살라 연기를 내었고, 신호탄도 쏘았단다. 바로 부근에서 조업중이던 일본서도 알지 못한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낮에 조업 중 연기를 내뿜는 배를 나도 본 생각이 든다. 그러나 조난선에서 내는 것 인줄은 생각지 않았다. 겨우 15:40시경 일본선 No.1 료호마루가 발견, 접근하여 계류하고 진화했으나 별 효과를 보지 못한 채 겨우 그 배에 건너간 통신장이 27MC SSB를 이용하여 101호와 본선에 연락을 한 것이다. 울먹이는 소리도 들었다.
27일 새벽 6시경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순시선, 서캄자카 해상에 상주하면서 일본작업선의 구조임무를 띈 PL107 宗谷丸(소오야마루)가 현장에 도착. 본선과 교신했었다. 2700톤급의 흰색선박이었다. 선미엔 헬리콥터가 앉을 수 있도록 장치된 배였다. 조난선의 예인과 구조를 요청했으나 인명이외는 구조하지 못한다고 했다. 자기들의 본연의 임무를 버릴 수 없단다. 다른 구조방법을 묻자 일본수산청과 한국대사관에 연락해 주겠단다. 기상이 차츰 악화되는데 피항할 수 없는가에 대해서도 주선하겠다고 했으나 어디까지나 일본의 예로 봐서는 소련영해내로 피항할 수 있으나 한국선은 가능여부를 모르겠단다. 피항지마져 선정해 주었지만 결국 외교적으로 국제적인 합의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답이 왔다. 답답할 뿐이다. 누구를 원망하고 나무랄 수도 없다. 차츰 기상이 악화현상을 보인다. 만약 소련 영해로 피항했을 경우에라도 선박과 인명 더욱이 예인했던 본선까지도 책임질 수 없단다. 할 수 없다. 좀 더 기상이 악화되기 전에 본선이라도 예인해 보기로 했다. 그러면서 301호 기관가동여부와 독항 여부를 판단하여 그 다음 대책을 강구하기로 하고 301호 선장이 자선(自船)으로 옮겨가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지휘하기로 했다.
그러나 여기서 또 하나의 예기치 못했던 불상사가 있었다. 이미 해상이 거칠어 양선의 Rollong이 심해 더 이상 계류해 둘 수도 없었다. 화영호 김 선장이 무사히 이선(移船했었드라면 상황을 또 달라졌을지 모르겠다.
08:50시 본선에서 자선으로 옮겨타던 301호 김 선장이 자선의 난간을 잡으려다 실패, 양선사이 바다에 빠졌다. 너무나 의외의 일이었다. 즉시 양선의 계류색을 끊고 구조에 임했다. 일본 순시선 PL107호에도 구조를 요청했다. 던질 수 있는 모든 것을 던져주었다. 그러나 빠진지 불과 몇 분이 안 되었는데 벌써 움직이질 못했다. 눈물이 솟는다. 본선의 강 선장도 울었다. 배를 다시 돌렸으나 이미 찾을 길이 어려웠다. 이미 바람은 세어져 있었다. 파도도 일기 시작했다. 301호는 그냥 표류시킨 채. 전 선원이 김선장을 찾기에 혈안이 됐다.
09:30시경 겨우 발견, 인양했으나 이미 운명한 뒤였다. 일본 순시선에 의사의 승선여부와 구명보트를 문의했으나 의사도 없고 구명보트도 내릴 수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소련 영해 12마일 이내에는 접근을 불허하니 들어가지 말라고 한다.
08:00본선 위치는 북위49도 24.1 동경 155도 14.0으로 확인. 08:40시에는 북위 49도25.0분 동경 155도12.5도로 확인했다. 301호는 강한 동풍을 타고 서서히 소련 영해쪽으로 표류하고 있었다. 계속 확성기를 통해 301호 기관가동여부를 문의하면서 선회했다. 정 여의치 못하면 선원들만이라고 구조할 작정이었다.
11:30 현재의 기상상태를 넘기면 선원구조조차 어려워질 것 같아 다시 확인했으나 기관가동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301호 선원은 전원 Life Jacket(구명조끼)를 입고 퇴선준비가 되어 있었다. 본선에서도 선교에서 의논이 분분했다. 어떻게 구조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였다. 단연 김원술 기관장의 주장이 강력했다. 그는 제2차 대전중 일본의 화물선을 타고 동남아를 다니면서 두 번의 기뢰공격에도 살아남은 기적의 사나이다. 일본 순시선과의 교신도 그의 일본어 능력 덕분이었다.
사람을 해중에 띄워두고 건져 올린다는 것은 위험천만이랬다. 더구나 이 차가운 바닷물에서. 배가 부서지거나 말거나 구조하려면 본선이 화영호에 붙어서 밀어붙이는 동안 넘어 올 사람은 넘어오고 그렇지 못하면 희생되는 수 뿐이라고 했다.
11:50시 본선 자체의 위험이 따른다는 것도 무릎서고 본선 우현 선미를 301호 좌현 중앙에 접근하여 밀착시키고 후진으로 밀어붙이는 동안 전원 25명을 본선으로 이선시키는데 극적으로 성공했다. 정말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순간이었다.
위치는 북위 49도 26.8 동경155도 06.8. 이미 소련영해 10마일 가까이 접근되고 있었다. 즉시 영해를 벗어나야 했다.
12:00시 현재 심한 눈바람이 불어 이미 시계가 흐려지기 시작하였고 전속 전진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거칠어 있었으나 부근에 있는 일본 순시선 소야마루에게 301호의 선체감시를 부탁했으나 그것마져 책임질 수 없으며 자기들은 곧 그들의 본연의 임무에 돌아가야 한단다. 안타까운 일이다. 어느 한 개인의 재산이라기보다 가난한 나라의 어려운 달러로 사드린 배. 비록 일인들이 쓰다 판 것이라 할 망정 우리들에겐 더 없는 중기이며 재산인 것이다. 하지만 버리고 돌아서는 길 뿐이다. 선원들만 구조한 체 서서히 남하하면서 본국의 양 회사와 교신이 계속되었으나 신통한 대책이 오지 않았다.
(당시 301 화영호는 일본에서 수입하여 한국으로 와서 통관절차를 이행하지 않은 채 바로 어장으로 직행, 어로작업를 하여 귀국하고자 했던 것이다.)
역시 이런점에서는 우리 한국인의 어떤 공통적인 결점이랄까 좀 더 깊이 생각하고 개선해야 할 문제점이 있다. 할 수 없다. 26인용의 침실과 선내 생활도구를 51명이 써야했다. 침실이 없다. 날씨는 추운데 해수마져 0.3도이다. 조난구조 선원들은 처리실 바닥에 긴급 준비한 모포와 이불 1장에 입은 옷 그대로 모여 밤을 세워야했다. 주부식도 충분하질 못했다. 기어이 귀항키로 하고 코스를 꺾은 것이다. 그 동안 어떤 지시가 있으리라 믿고. 그것이 결국 지금 이곳 구시로항에 입항하게 된 것이다.〕
* 김광수 선장 : 거제 통영수고와 부산 수대를 거쳐 처음 트롤선 선장이 된 사람으로 51 동방호 강 선장의 수고 선배였다.
* Gallows : 교수대 모양의 튼튼한 지지대로 투‧양망 때 사용되는 대형 고리 등이 달려 있다.
오늘 아침 우리 회사 윤 사장이 왔었다. 반가웠다. 들은 얘기지만 부산에서는 양 사간에 합의는커녕 아무 대책도 없었단다. 이곳에 입항케 된 것도 결국 윤 사장이 답답해서 외무부를 거쳐 Sappolo 영사관에 긴급 연락해서 겨우 입항허가를 얻었다는 것이다. 왠지 서글픈 생각이 든다. 구조된 25명의 선원들의 처지와 이미 싸늘하게 식은 유해로 변한 체 갑판 위에서 얼어붙은 고 김 선장의 입장과 또 그들이 속해 있은 화영수산의 태도. 아울러 윤 사장의 사고방식. 결국 자기들만의 손익을 따져 생각하고 주장하며 처신하는 Owner들 속에서 억울하게 취급당하고 마는 것이 일선의 선원들 뿐이니 뱃놈이 된 나 자신부터가 한스러워 지는 듯 했다. 무척 우울하고 무거운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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