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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을 찾아보면 고통이나 슬픔을 표현하는 단어는 다양하게 발달해 있는 데 반해서 그 반의어인 안락이나 기쁨을 표현하는 어휘는 숫자도 제한적이고 세분되어 있지도 않다. 대충 주워대면, 전자의 경우 ‘아픔’, ‘고통’, ‘쓰라림’, ‘진통’, ‘격통’, ‘산고’, ‘괴로움’, ‘번민’, ‘상심’, ‘걱정’, ‘근심’, ‘염려’, ‘고민’, ‘고뇌’, ‘고생’, ‘고난’, ‘비참’, ‘슬픔’, ‘비통’, ‘비애’, ‘불행’, 더 세부적으로 ‘에는 듯한 슬픔’, ‘아리는 아픔’, ‘도려내는 듯한 아픔’, ‘쑤시는 아픔’, ‘욱신욱신 아픔’, ‘지끈지끈 아픔’ 등이 있고, 후자의 경우는 ‘안락’, ‘쾌락’, ‘기쁨’, ‘즐거움’, ‘안심’, ‘위안’, ‘위로’, ‘편안’, ‘안녕’, ‘행복’, ‘환희’, ‘희열’, ‘황홀’ 등이 있다.
그만큼 고통이 우리 삶에서 보편적 현상이고 안락은 비교적 드문 경험인 것 같다. 즉 언어적 양상으로 볼 때 안락이 아니라 고통이, 즐거움이 아니라 괴로움이,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 행복이 아니라 불행이 인간 존재의 기본 조건인 것 같다. 인간이나 동물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주어진 환경과의 마찰 혹은 부조화 상태에 놓인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안락 속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고통 혹은 스트레스 속으로 태어난다. 그리고 안락은 그러한 고통을 완화시키고 얻는 일시적인 느낌이다. 그것은 짧은 순간의 경험이어서 곧 사라지고 다시 괴로움의 본바탕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이 고통의 바다 혹은 고해 저편에 신기루처럼 존재하는 안락이라는 희망을 늘 꾀한다. 우리의 희망은 ‘고진감래’이다.
프로이트가 개념화한 쾌락원칙—“사람은 쾌를 추구하고 불쾌를 거부하는 성향을 가진다”—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누구나 고통이 싫은 느낌이어서 그걸 반사적으로 피하게 된다. 예수도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앞두고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신다면 이 고난의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우리는 고통을 피하려고 애를 쓴다. 성공하려고 기를 쓰고, 매사에 조심하고, 열렬히 기도하고, 때론 사주쟁이를 찾아가 먹구름 낀 앞날에 대해 물어보기도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대체로 늘 고통스럽다. 우리의 나날에 맑고 화사한 날이 드물다.
뭉크의 그림 「절규」(“Scream”)를 머릿속에 그려보지 않더라도 우리는 왠지 속 시원히 울고 싶을 때가 가끔 있다. 슬픔이 우리 마음의 밑바닥에 바다 밑 두꺼운 개펄 층처럼 쌓여 있기 때문 아닐까? 인간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고통스러운 삶에 대처하려고 노력해오고 있다. 그래서 인류사에는 고통의 상징이 된 분들이 있었다. 가시관을 쓰고 산 채 못 박혀 죽은 예수나, 왕자로서의 지위와 가정의 안락을 버리고 고행하여 ‘일체개고’를 깨달은 석가모니나, 인생 역전에 된통 당하고도 끝내는 재역전시킨 구약의 욥이나. 어디 그뿐이랴.
감정과 욕구, 의식을 가진 인간의 삶에 괴로움과 슬픔이 기정값(default)으로 주어진 것이라 해도 각 개인마다 짊어지는 고통의 몫이 다 같지는 않다. 사람마다 일생동안 각기 다른 정도와 강도의 쓴맛과 아픔을 경험한다. 그러나 각 개인에게는 누구에게나 자신의 고통의 크기가 가장 크게 느껴진다. 나의 고통과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비교해보고 내 것이 더 작거나 더 커 보인다고 머릿속으로는 생각해도, 감각으로는 자기 자신의 고통이 가장 크게 느껴진다. 내 손톱 밑 비접이 다른 사람의 자상(刺傷)보다 자신의 마음속을 더 무겁게 지배한다. 그만큼 주관적이다.
또한 감각과 감정의 차원에서 개인의 경험은 그 자신의 내부에 철저히 유폐된 상태이기 때문에 한 사람이 자신의 고통을 다른 사람과 고스란히 공감하거나 공유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의 고통은 근본적으로 피상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반면에 자기 자신의 고통은 심층적이다 못해, 우주적인 것이 되기도 한다. 고통은 그 크기나 강도나 무게가 객관적으로, 상대적으로 기능하지 않다. 흔히 ‘내가 너의 고통을 나누어 가질게’라고 말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그건 불가능하다. 나와 긴밀하게 삶을 관련 맺고 있는 네가 아프니 내가 괴로울 수 있고, 그러한 정도의 공감이 너에게 어느 정도 위안을 줄 수는 있을지라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만이 다른 존재의 고통에 대해 동정하고 연민한다. 물론 다른 사람의 통증이 나에게 신체적 감각으로는 피상적인 느낌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그걸 뛰어넘는 특이한 작용을 하는 경우가 생겨난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몸이나 마음의 통증을 자신의 심리적 아픔으로 변환시켜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쾌감 추구를 바탕으로 하는 사랑인 ‘연애’ 말고, ‘또 다른 차원의 사랑’을 구성하는 내용물이고, 동시에 그걸 가능하게 하는 이상한 힘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고통을 공감하는 경우에 그 대상이 되는 다른 사람이 그 자신과 관계가 멀수록, 이해관계가 희박할수록 그리고 그가 공감하는 정도가 강할수록, 우리는 그 사람의 그러한 공감능력을 숭고하다거나 거룩하다고 여긴다.
헨리 제임스는 『메이지가 알았던 것』(What Maisie Knew, 나희경 역, 2021)이라는 소설에서 주인공인 메이지라는 열 살 전후의 여자아이—이혼한 부모 양쪽으로부터 거의 버림받은—와 그 애의 여가정교사 사이에 생겨나는 이별의 고통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러나 윅스 선생님과의 이번 첫 번째 헤어짐은 그보다 훨씬 더 괴로웠다. 그 애는 최근에 치과에 다녀왔었기에 윅스 선생님과 이별하는 상황에서의 조여드는 듯한 긴장감의 강도를 비교할 수 있는 조건을 갖게 되었다. 그 이별의 순간은 자기 치아가 뽑혀질 때만큼이나 무서울 정도로 고요했다. 그 경우에 윅스 선생님은 그 애의 손을 움켜쥐고 있었고, 그 두 사람은 소리를 지르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다짐하며 서로 꼭 붙들고 있었다. 메이지는 치과에서 영웅적으로 침묵했었다. 그러나 그 애가 최고의 통증을 느꼈던 바로 그 순간에 자기 상대방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가느다란 비명을 듣게 되었었다. 그것은 억눌린 동정심이 복받쳐 나오는 소리였다. 그 비명은 한 달 뒤에 그 애의 정기적인 뿌리 뽑히기를 뜻하는 이른바 ‘조정’이라는 것이 무시무시한 니퍼의 역할을 했을 때, 그 두 사람의 격렬한 포옹을 깨뜨리는 유일한 소리에 의해서 재생되었다. 윅스 선생님의 치아가 그녀의 잇몸 속에 박혀 있듯이 메이지를 떼어내는 수술은 윅스 선생님의 본성 속에 끼워 넣어져 있어서 진정으로 마취제를 필요로 하는 경우에 해당했다.
고통과 관련된 또 하나의 특징은 우리가 그걸 어떻게든 피하려고 하면서도, 역설적이게도 다른 한편으로 그걸 자초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인도에 극한의 고행을 자발적으로 실행하는 힌두교의 수행자들이 많다고 들었다. 나는 인도는 못 가봤지만 싱가포르 속의 작은 인도라 불리는 리틀 인디아 거리에서 희한한 장면을 목격했다. 유명 관광지여서 중심도로의 양쪽 인도—그 인도 말고 다른 인도—에는 걷기에 불편할 정도로 관광객들이 붐비는데 차도 한 가운데로 한 무리의 인도사람들이 길게 대열을 이루어 행진하고 있었다. 행렬의 선두와 중간중간에 수행자인 듯한 사람들이 특이한 모습으로 걷고 있고 그 뒤에 신자들이 따라가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수행자들의 모습이 나에겐 역겨울 정도로 기괴했다. 얼굴과 등, 어깨와 배 등 몸의 이곳저곳에 구멍을 뚫어 거기에 노끈인지 철사인지를 꿰어 그 줄 끝에 무거운 추들을 매달고 걷고 있는 게 아닌가. 일종의 고행으로 보였다. 그건 일종의 자초한 고통이었다. 나는 경악했다. 저게 무슨 짓거리인가? 하지만 그 행위가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고상한 의미가 담겨 있으리라는 짐작이 들었다.
그런데 내가 만약 그 힌두교 고행자들뿐만 아니라 우리들 대부분도 그와 비슷한 행위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억지 주장일까? 나는 내 자신이 경험하는 고통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그것 중 대부분을 내가 스스로 만들어 내고 내 스스로 느끼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닥치는 불행에 의한 고통을 내가 자초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데 고통을 피하고 안락을 추구하는 우리의 경향과 관련해서 매우 고약한 역설은 우리에게 운 좋게도 안락이 상당 기간 지속되면 그 안락 자체가 고통스럽게 느껴지게 된다는 점이다. 외적 고통의 자극이 주어지면 우리는 그걸 피하거나 극복하려고 애쓰지만 그런 자극이나 신호가 약해지거나 없어지면 그런 편안함 자체가 고통으로 느껴지며 그래서 우리가 스스로 고통을 염원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스스로 고난을 자초하려는 경향을 나타낸다. 그것이 곧 “고난의 갈구”(hunger for trouble)이다. 모든 외적 조건이 충족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는 미국 교외 중산층의 심리적 모순을 그리는 존 치버의 단편소설들이 그걸 잘 보여준다.
내 아내는 종종 자신의 슬픔이 슬픔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슬퍼한다. 자신이 느끼는 고뇌가 참담한 고뇌가 아니라는 것 때문에 마음이 아파진다. 자신의 비통함이 통렬한 비통함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비통해한다. 그리고 내가 그녀에게 자신의 ‘슬픔의 부적절성에 대해 슬퍼하는 그런 슬픔’이 인간 고통의 스펙트럼에서 새로운 색조가 될 수 있다고 말해주어도 그녀는 위안을 받지 못한다. 「세상의 비전」(“A Vision of the World”) 존 치버 John Cheever)
행복에 겨워 고난을 갈구하는 건 미국 중산층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선진국에 진입했다고 자평하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 문제로 고통을 겪는다. 의사들의 전문 분과 중에서도 오늘날에는 정신과가 잘나가는 분야라고 들었다. 삼사십 년 전만 해도 그 분야는 아주 찬밥 신세가 아니었던가? 미국에서 상류층에 속하려면 자신만의 정신과 주치의나 심리 상담가 한 명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선진국은 선진국대로, 후진국은 후진국대로, 상류층은 상류층대로, 중산층은 중산층대로, 서민은 서민대로, 청소년은 청소년대로, 청년은 청년대로, 중년은 중년대로, 노인은 노인대로, 모든 사람은 각자 자신만의 최대치의 고통을 안고 살아간다. 지금 나도 그렇다.
첫댓글 '인간은 각자 자신만의 최대치의 고통을 안고 살아간다' 악몽에서 깨고나니 호미님께서 이 글을 쓰셔셨네요.^^
와~~ 고통과 감정에 관한 명강의를 듣는 것 같아 이글 복사해서 소장하고 싶어요!
고통을 표현하는 우리말이 저리 많다니 외국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들겠어요. ^^ 하하
그리고 알라딘에서 당장 구매할 책 '메이지가~~'한 권이 생겼습니다. ^^
아직 안고 있는 제 "불쾌"를 들여다보게 되네요
언제까지 들고 있을거냐는 반문도 하게됩니다
책바구니에 추가합니다 감사드려요
.... 저의 불쾌를 내려놓고자 하자는대로 합의해주고 왔습니다....
저는 평화롭습니다
저는 평소 가방도 최소한 가볍게 들려고 하듯이. 고통도 최대한 적게 느끼고 싶어요.
그런데 이런 평범하고 소박한 감정이 선생님의 글 앞에서는 굉장히 진부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저는 "모든 사람은 각자 자신만의 최대치의 고통을 안고 살아간다"라는 말에 동의를 안하려고요ㅎㅎ
저는 쾌에 관해 세세함이 적은 것은 쾌에 젖어있기때문이고 고통에 대해 세세히 분류할 수 있는 것도 그것때문일 거 같습니다.
알중에게만 그럴듯한, 의심이 가는 것 같습니다만…
호미님의 고통이.....
고통이 있어서 행복도 있는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