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레쉬트의 베는 ~안이라는 전치사이고 레쉬트는 시작, 머리, 첫 열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베레쉬트는 머리 안에, 첫 열매 안에서 그래서 이 베레쉬트를 태초에라고 번역을 하면 시간이지만, 장소로 보면 배경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빠라 “창조하시니라” 이 단어는 무에서 유의 창조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성에서 창조하는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여기까지만 번역을 하자면 그리스도의 머리 안에서 말씀으로 창조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창조되어진 것을 뭐라고 말하나요? 엘로힘/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엘로힘을 어떻게 보여주나요? 하늘과 땅으로 보여줍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하늘과 땅에 대한 개념을 정확하게 결정을 내리지 못해서 간단히 부연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하늘은 우리가 볼 수 없고 알수 없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으로 묘사합니다. 이것이 구약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없는 상태를 가리켜 땅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땅은 반드시 하늘의 하나님이 계셔야 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시던 하나님이 땅으로 내려온 것이 바로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단 1회적으로 육신을 입고 오신 분입니다. 땅에 있으면서 하늘의 삶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예수처럼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하늘처럼 살수 있도록 성령을 보내주신 내용이 바로 성경의 핵심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2절부터 등장하는 이야기는 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왜? 하늘의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고 땅의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성경의 관심은 하늘에 있지 않고 땅에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하늘의 대한 설명이 없을까요? 하늘은 땅의 거울입니다. 땅의 상태가 어떻느냐에 따라 그 땅의 하늘의 상태를 알수 가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하늘은 아무 문제없는데 땅이 문제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땅을 알면 하늘을 아는 것입니다.
요 3: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여기에서 말하는 땅의 일은 무엇일까요?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의 죽는 것이 땅의 일입니다. 이것이 끝나야 하늘의 일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땅의 일.!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알지도 못하면서 하늘의 일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웃긴 일입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안다는것은 그분의 죽음처럼 우리도 죽어야 하는것을 의미합니다. 그때 예수와 함께 죽었다고 말하는것이지 2000년전에 역사적인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것은 껍데기만 알고 있는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하늘은 설명해 놓치 않았습니다. 하늘은 땅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땅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땅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하늘만 알려고 하니까 무속이 되는 것입니다.
창 1:2 그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땅의 상태가 등장합니다. 제일 먼저 등장하는 단어가 혼돈입니다. 이 단어는 혼돈이라기 보다는 “황폐하다”는 의미가 더 정확한 의미입니다. 쓸모가 없다. 무가치하다의 의미입니다.
신 32:10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여기에서 광야라는 단어가 혼돈과 같은 단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시는 장소가 바로 광야입니다.
사 41:29 보라 그들은 다 헛되며 그들의 행사는 허무하며 그들이 부어 만든 우상들은 바람이요 공허한 것뿐이니라
사 44:9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그들이 원하는 것들은 무익한 것이거늘 그것들의 증인들은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니 그러므로 수치를 당하리라
사 40:17 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
두 번째 등장하는 단어가 혼돈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텅 비어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땅의 상태가 혼돈하고 공허하다는 것은 황폐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또 보니까 흑암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흑암이 어떻게 있나요? 깊음 위에 있고... 깊음이라는 것이 등장합니다. 히브리어로는 테홈이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깊음이라고 하는 것은 바다에도 있고, 땅에도 있습니다. 땅의 깊음은 어디로 연결되나요? 음부, 스올로 연결됩니다. 바다의 깊음도 있죠? 누가 여기에 들어가나요? 요나가 여기에 들어갑니다. 예수님도 삼일 밤낮을 땅 속에 있는다고 할 때 바로 이 깊음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흑암이라고 하는 것이 땅이든지 물이든지 그 위에 통치자의 개념으로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땅을 누가 다스리고 있나요? 흑암이라는 것이 다스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흑암이 나쁜 것인가요? 우리가 생각하기에 흑암, 어두움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이 나쁜 것을 누가 만들었어요? 하나님이 만들었나요? 그러면 하나님에게 어둠의 요소가 있는 것인가요?
그러면 성경에서 흑암, 어두움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성경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출 14:20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쪽에는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쪽에는 밤이 밝으므로 밤새도록 저쪽이 이쪽에 가까이 못하였더라
창세기 1장 3절에서 나오는 빛과 어둠의 이야기입니다. 이 둘이 같이 있을 수 있나요? 빛과 어두움을 구별할 수 있나요? 육안으로!! 빛과 어두움의 경계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면 빛과 어둠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애굽 쪽은 흑암이 있고 이쪽에는 밤이 밝으므로? 이 단어가 오르 = 빛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애굽 진영은 밤을 흑암으로 가지고 있고, 이쪽 편은 밤을 빛으로 가지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도 밤에 있고, 진리를 모르는 사람도 밤에 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밤을 어두움으로 가지고 있느냐? 빛으로 가지고 있느냐의 차입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에서 마 6: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지금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어두움인데 그것이 어둠으로 가지고 있으면 모든 것이 어두움이고, 내가 가지고 있는 어두움이 빛이면 모든 것이 빛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어두움속에서 살고 있는데 빛이 비추어서 빛을 아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어두움인데 누군가에게는 그 어두움이 빛으로 가지고 있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어떤 빛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한 빛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욥 5:14 그들은 낮에도 [어두움을] 만나고 대낮에도 더듬기를 밤과 같이 하느니라
사 45:7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어두움은 창조되고 빛은 지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빛은 창조한 걸로 아는데 빛은 손으로 지으시고, 어두움을 창조하셨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어두움이고 거기서 빛을 지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어두움 속에 빛으로 지으신 것이 무엇인가요? 성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만들라고 한 것은 성전밖에 없습니다. 그럼 성전이 우리에게 무엇으로 주어졌나요? 빛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빛으로 온 성전을 무엇으로 알고 있나요? 어두움으로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에게 물어보세요. 빛은 하나님이 창조했느냐고? 다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창조했다고!!!
그러니까 어두움이 왜 창조되었나요? 빛으로 지을려고 창조한 것입니다. 환난(악)을 왜 창조했나요? 평안으로 지을 려고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창 1장 2절로 돌아가서 땅이 혼돈하고, 곻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러한 것으로 눈에 보이지 하늘의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땅의 있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무엇인 줄을 깨닫게 되면 그때 무엇이 보이나요? 하늘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 상태를 가리켜 엘로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땅에 있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요? 어떻게 하늘의 것으로 알 수 있을까요? 우리의 본질 태생이 혼돈이고 공허인데 우리가 그 흑암을 알 수 있을까요? 절대 알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일을 누가 하시느냐면 하나님의 신이 이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신이 땅에 있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하늘의 것으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일을 하겠다는 계획이 기록 되어있는 것이 1장 2절입니다. 그렇다면 땅에 있는 혼돈, 공허, 흑암이 나쁜 것인가요? 그것이 없으면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그 하늘을 우리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혼돈, 공허, 어두움 이런 말만 나오면 우리생각에 나쁜 것, 안 좋은 것, 필요 없는 것으로 못 박아버리는데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전혀 나쁘지 않습니다.
시 107:10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107:11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사 9: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이 단어를 신약성경에서 몇군데 찾아볼까요?
마 8:12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큰소리로 부르짖다) 이(먹을양식이 없다)를 갈게 되리라
어떤 어두운 장소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어두움으로 쫒겨나는 것입니다. 내가 어두운 상태로 쫒겨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어두움이 무엇인지 설명해놓았습니다. 어떤 상태가 어두움이라는거죠? 슬피울며 이를 갈고 있는 상태를 가리켜 어두움이라고 이야기하고 밖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요 3: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세상이라는 단어가 호 코스모스이다. 이것은 성전이다. 그럼 성전이 우리에게 빛으로 주신 것이다. 그런데 그 성전을 빛으로 사랑하지 못하고 어두움으로 사랑해 버린 것이다. 그러면 우리에게 어두움이 나쁜것인가요? 반대로 어두움이 우리에게 있다는것은 이제 우리가 그 어두움을 통해 빛을 알수 있는 때가 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어두움이 있다는것은 이제 어두움을 끝낼수 있다는 말이 되는것입니다.
롬 13: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집어 치우다) 빛의 갑옷을 입자
밤의 때가 지나가고 있고 낮의 때가 가까웠다. 이것은 시간개념이 아닙니다. 깊다는라는 단어가 찍어 내버리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밤은 찍어내버리고 낮이 가까이 온다는 것은 상태적 개념으로 내게 다가 온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까 말했던것처럼 어두움이 있다는것은 이제 끝낸다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어두움은 끝낼려고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 날이 끝날때 항상 등장하는 말이 있죠?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밤은 반드시 아침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침이라는 완성이 될려면 어두움이라는 밤은 반드시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것입니다. 그 밤이 무엇인지를 알면 아침이 되는것입니다. 그 상태를 빛의 갑옷을 입은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고후 4: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드러내고 나타난것)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얼굴안에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어두운 상태에 있는데 횟불을 켠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빛은 어두움으로 비쳐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빛을 비출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을 가지고 빛을 비추나요? 어두움으로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빛을 비추나요? 예수가 비추나요? 예수가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나요? 그리스도가 예수를 가지고 있나요? 그리스도가 예수를 가지고 있는것이다. 그러면 예수의 주인은 누구인가요?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면 예수는 그리스도의 얼굴인 것이죠? 그리스도는 나타내는 얼굴입니다. 그럼 예수가 뭐가 되는 거죠? 흑암 입니다. 어두움입니다. 이해가시나요? 그 예수라는 얼굴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얼굴로 온 예수만 열심히 믿고 아는 것은 뭐하고 있는 것인가요?
그리고 땅의 상태를 바라본 다음에 어디를 바라보나요? 물의 상태를 바라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1장 2절은 크게 땅과 물로 나뉘어져 있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땅의 상태는 도저히 희망이 없고, 황폐하고 무질서하고 텅 비어있는 죽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물을 바라보니까 하나님의 신이 물위에서 운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까 땅 위에서는 흑암이 있고, 여기 물위에는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물은 바다와 다른 개념입니다. 바다는 셋째 날에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운행하시느니라 이 단어는 여러분들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닭이 알을 품고 있는 상태라고 그런데 이렇게만 이야기하면 아무 의미 없습니다. 왜? 닭이 알을 품고 있나요? 새끼를 낳기 위해서 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하나님의 신은 새끼를 낳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신이 품고 있으니까 뭐를 낳을까요? 하나님의 신이 나오겠지요!! 닭 새끼가 알을 품으면 닭이 나오는 것처럼. 다른 것이 나오면 안되잔아요!!
땅의 상태가 혼돈하고 공허하면 흑암이 있는 상태를 땅의 본질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상태가 땅의 본질이고, 우리의 밑바닥을 말해주고 있느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땅은 아무런 소망이 없는상태입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계속해서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어떻게 혼돈과 공허와 흑암인 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빛의 나라로 들어가게 되는가?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땅을 하늘로 연결해주시는 분은 예수이고, 하늘을 땅으로 연결해 주신분은 누구인가요?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을 오르락 내리락이라고 말씀하는것입니다.
창세기에서 1장에서 등장하는 죄가 무엇인가요? 신학교에서는 창세기 1장에서는 죄가 등장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창세기 1장에서 죄가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다. 창세기 1장에서 말하는 죄는 하늘을 알지못하는것이 죄다. 그래서 하늘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려 내려오신 분이 바로 에수그리스도이다. 그래서 그분이 이땅에서 하신 말씀은 이미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을 말하러오셨다. 그렇다면 그 에수의 말이 하늘에 대한 말씀이라면 그 예수의 말이 하늘의 말로 들려지지않으면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속해있는것인가? 죄에 속해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