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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 머리글]
1. 직지프로젝트 소개
직지프로젝트는 세계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든 우리 조상들의 슬기를 되살려 우리글의 전산화, 정보화, 세계화를 위한 디딤돌이 되고자 하는 정보화운동이다. 한 달에 한 권 우리 문학을 전산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전산화하는 대상은, 첫 번째가 ‘우리 고전’, 두 번째가 ‘전래 동화 및 아동 문학’(어린이가 보는 글을 먼저 바른말로), 그리고 세 번째가 여러 사람들이 많이 읽어서 ‘우리 시대의 고전’으로 인정받은 글이다.
2. 지적저작권에 대해서
지적재산권은 인류가 지닌 가장 근본적인 자산이며, 인간을 동물과 분류하는 특징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그 재산은 모든 인류가 공유해야 하며, 또한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자산이다. '직지'는 지금부터 50년이 지나고, 100년이 지나 더 이상 오늘 찍은 책의 지적재산권을 주장할 수 없고, 더 이상 그 책이 출판되지 않을 때에도 우리 자손들이 자신들의 생활의 일부가 되어 버린 인터넷에서 조상들의 아름다운 글들을 볼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다.
‘직지’는 인터넷과 통신을 통해 이 문서가 널리 퍼저 개인적으로 쓰는 것을 찬성한다. 그러나 글쓴이와 출판사에 인쇄한 글에 대한 지적재산권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이 문서를 그 뿌리로 하여 만들어진 문서는 그 뿌리가 ‘직지’에 있음을 밝혀야 한다. 또한 이 글을 퍼뜨릴 때에는 ‘직지’에서 쓴 이 글을 포함하여야 한다.
3. 도움을 줄 분을 찾습니다!
‘직지’는 비록 개인이 시작을 한 일이지만 결코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글을 입력해서 직지에 올리는 일, 바른 우리글을 살리는 일, 남한과 북한이 가지고 있는 언어의 이질성을 극복하는 일, 셈틀에서 제대로 된 한글을 볼 수 있도록 하는 일, 이 모든 일을 같이 할 분들을 찾습니다. 또한 직지는 쪽을 유지하고, 우리글을 정보화·전산화하는데 필요한 돈을 모으고 있습니다. 직지 쪽에 광고를 실어주시면 참 좋겠습니다. <직지 머리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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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운몽(九雲夢)]
[해제]
『구운몽』의 이해를 위하여 작가 김만중(金萬重)의 생애와 인간, 그리고 문학과 사상 등을 언급하고 나서, 『구운몽』의 대체적인 줄거리와 사상적 배경, 원전비평과 이본상의 문제, 비교문학적인 문제, 그리고 본서에 사용된 텍스트의 문제를 차례로 기술하기로 하겠다.
김만중(1637~1692)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소설가로 본관은 광산(光山), 아명은 선생(船生), 자는 중숙(重叔), 호는 서포(西浦), 시호(諡號)는 문효(文孝)이다. 조선조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의 증손이고, 충렬공 익겸의 유복자이며, 숙종의 장인인 광성부원군 만기의 아우로서, 숙종대왕의 초비(初妃)인 인경왕후의 숙부이다. 그의 어머니 해평 윤씨는 인조의 장인인 해남부원군 윤두수의 4대손이고 영의정을 지낸 문익공 방(昉)의 증손녀이며, 이조참판 지(遲)의 따님이다.
김만중은 어머니의 남다른 가정교육에 힘입어 성장하였다. 그의 아버지 익겸이 일찍이 정축호란(丁丑胡亂, 1637) 때, 강화도에서 순절하였으므로 형 만기와 함께 어머니 윤 씨만을 의지하여, 어머니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유달랐던 것이다. 실은 그의 대작 『구운몽』도 귀양지에서 어머니의 외로움을 덜기 위해 지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그는 만년에 어머니를 술회한 글에서, 어린 시절 가난하고 외로운 환경 속에서도 그의 어머니가 많은 책을 이웃의 홍문관 서리를 통해 빌려 와 손수 등사하여 읽게 하였고, 때로는 베틀에 짜고 있는 피륙을 팔아 독서물을 충당하였을 뿐 아니라, 소학, 사략, 당시(唐詩) 등을 손수 가르쳤다고 회고한 바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어머니 윤 씨가 만기, 만중 형제의 교육을 위해 얼마나 고심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김만중은 위와 같이 어머니로부터 엄격한 훈도를 받고 14세에 진사 초시에 합격하였고, 이어서 16세에 진사에 장원급제하였으며, 그 뒤 1655년에 정시문과에도 급제하여 관료로 발을 내딛기 시작, 1666년에 정언(正言), 1667년에 지평(持平), 수찬(修撰)을 역임하였으며, 1668년에는 경서 교정언, 교리가 되었다. 아울러 1671년에는 암행어사로 경기 및 삼남 지방의 진정득실을 조사하기 위해 부교리가 되는 등 1674년까지 헌납, 부수찬, 교리 등을 지냈다. 그러다가 1675년 동부승지로 있을 때, 인선왕후의 상복 문제로 서인(西人)이 패배하자 관직을 박탈당하였다.
1688년에 남인인 장숙의(張淑儀) 일가를 둘러싼 언사의 죄로 연루되어 추국(推鞫)을 받고 하옥되었다가 선천으로 유배되었다. 이 선천 유배지에서 어머니 윤씨를 위해 『구운몽』을 지었다는 것이 최근 밝혀졌다. 1년이 지난 1688년 11월에 드디어 선천 유배지에서 풀려났으나, 3개월 뒤인 1689년 2월 이른바 을사환국(乙巳換局)을 계기로 다시 남해로 유배되었다. 이와 같이 유배가 계속된 것은 숙종의 계비(繼妃)인 인현왕후 민씨의 여화(餘禍) 때문이었다. 그가 남해 유배지에 있는 동안 그의 어머니 윤 씨는 그의 안위를 걱정한 끝에 세상을 떴다. 효성이 지극했던 그는 장례식에도 참석치 못하고 1692년 남해 유배지에서 56세를 일기로 외로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김만중의 사상과 문학은 조선조에 있어서 이전의 여느 문인과도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즉, 그의 사상은 주자학적 유교 사상권에 있으면서도 불교와 도교의 세계를 자유로이 드나들었을 뿐 아니라, 산수, 음률, 천문, 지리 등 구류(九流)의 여러 방기(方技)에까지 능통한, 말하자면 다분히 자유주의적 성향이 강하였다. 그는 문학에서도 탁월한 업적을 남기었다. ‘조선 사람은 조선으로 글을 써야 한다.’는 소위 국민문학론을 제창한 바 있고, 아울러 통속소설의 문학적 효용을 깊이 인식하여 직접 통속소설을 많이 썼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늘날 전하는 것은 안타깝게도 『구운몽』과 『남정기』뿐이다.
이제 『구운몽』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일찍이 이재가 『구운몽』의 주지(主旨)를 ‘인생의 부귀공명이 일장춘몽’이라고 파악한 바와 같이, 『구운몽』의 주제는 역시 대승불교의 중심인 <금강경>의 공관(空觀)에 있다. 공관은 표면적으로는 인생만사를 헛것으로 부정하는 데 있는 것 같지만, 이면적으로는 인생만사를 역설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구운몽』은 결국 <금강경>의 주제를 소설화한 대작이라고 볼 수가 있다. 문학 내적으로는 인도, 중국 등에서 이루어진 환몽구조(幻夢構造)의 이야기를 예술적으로 형상화한 결과가 『구운몽』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구운몽』은 진작부터 영어, 독일어, 러시아어, 체코어 등으로 번역되어 서양인들에게까지 소개되었다.
『구운몽』의 이야기는 대략 다음과 같다.
중국 당나라 때 남악 형산 연화봉에서 서역으로부터 불교를 전하러 온 육관대사가 법당을 짓고 불법을 베풀었는데, 동정호의 용왕도 이에 참석한다. 육관대사는 제자인 성 진을 용왕에게 사례하러 보낸다. 이때 형산의 선녀인 위부인도 팔선녀를 육관대사에게 보내 모처럼의 법회에 참석하지 못함을 사과한다. 용왕의 후대(厚待)로 술에 취하여 돌아오던 성진은 마침 돌아가던 팔선녀와 석교에서 마주치자 잠시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희롱을 꾀한다. 선방에 돌아온 성진은 팔선녀의 미모에 도취되어 불문(佛門)의 적막함에 회의를 느끼고, 대신 유가(儒家)의 입신양명을 꿈꾸다가 육관대사에 의해 팔선녀와 함께 지옥으로 추방된다.
성진은 회남 수주현에 사는 양처사의 아들 양소유로, 팔선녀는 각기 진채봉·계섬월·적경홍·정경패·가춘운·이소화·심요연·백능파로 태어난다. 양처사는 곧 신선이 되려고 집을 떠나고, 아버지 없이 자란 양소유는 15세에 과거를 보러 서울로 가던 중, 화음현에 이르러 진어사의 딸 진채봉을 만나 서로 마음이 맞아 자기들끼리 혼약한다. 그때 구사량이 난을 일으켜 양소유는 남전산으로 피난하였는데, 그곳에서 도사를 만나 음률을 배운다.
한편 진채봉은 아버지가 죽은 뒤 관원에게 잡혀 서울로 끌려간다. 이듬해 다시 과거를 보러 서울로 올라오던 양소유는 낙양 천진교의 시회(詩會)에 참석하였다가 기생 계섬월과 인연을 맺는다. 서울에 당도한 양소유는 어머니의 친척인 두련사의 주선하에 거문고를 탄다는 구실로 여관(女冠)으로 가장하여 정숙하기가 이를 데 없는 정사도의 딸 정경패를 만나는 데 성공한다. 과거에 급제한 양소유는 정사도의 사위로 정해지는데, 정경패는 양소유가 자신을 만나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준 모욕을 갚는다는 명목으로 시비 가춘운으로 하여금 선녀처럼 꾸며 양소유를 유혹하게 하여 결국 두 사람은 인연을 맺는다. 이때 하북의 세 왕이 역모하여 양소유가 절도사로 나가 이들을 다스리고 돌아오는 길에 계섬월을 만나 운우(雲雨)의 정을 나누는데, 이튿날 다시 보니 하북의 명기 적경홍이었다. 두 여자와 후일을 기약하고 상경한 양소유는 예부상서가 된다.
진채봉은 서울로 잡혀온 뒤 궁녀가 되었는데, 어느 날 황제가 베푼 환선시(紈扇詩)에 차운(次韻)하여 애를 태우게 된다. 까닭을 물어 진채봉과 양소유의 관계를 알게 된 황제는 이를 용서하고, 황제의 누이인 난양공주는 후에 진채봉과 형제의 의를 맺는다.
양소유는 어느 날 밤 난양공주의 퉁소 소리에 화답한 것이 인연이 되어 부마로 간택되지만, 양소유는 정경패와의 혼약을 이유로 이를 거절하다가 투옥된다. 그때 토번왕(吐蕃王)이 침범해 오자 양소유는 대원수가 되어 출전한다. 진중(陣中)에서 토번왕이 보낸 여자 검객 심요연과 인연을 맺게 되고, 심요연은 자신의 사부에게 돌아가면서 후일을 기약한다.
그동안 난양공주는 양소유와의 혼약이 물리침을 당하여 실심에빠진 정경패를 비밀리에 만나보고, 그 인물에 감복, 의형제가 되어 정경패를 제1공주인 영양공주로 삼는다. 토번왕을 물리치고 돌아온 양소유는 위국공에 봉하여지고, 영양공주, 난양공주와 혼인을 하며, 진궁녀와 다시 만나는 가운데 그녀가 진채봉 임을 확인하게 된다.
양소유는 고향으로 돌아가 노모를 서울로 모시고 오다가 낙양에 들러 계섬월과 적경홍을 데리고 오니 심요연과 백능파도 찾아와 기다리고 있었다. 양소유는 2처 6첩을 거느리고 일가 화락한 가운데 부귀와 영화를 마음껏 누린다. 어느 날 생일을 맞아 종남산에 올라가 여덟 미인과 가무를 즐기던 양소유는 역대 영웅들의 황폐한 무덤을 보고 문득 인생의 무상함을 느껴 비회에 잠긴다. 이에 인생의 무상과 허무를 논하며 장차 불도를 닦아 영생을 구하고자 할 때, 호승(胡僧 : 육관대사)이 찾아와 문답하는 가운데 긴 꿈에서 비로소 깨어나 육관대사의 앞에 있음을 알게 된다. 꿈의 양소유에서 본래의 성진으로 돌아오자, 성진은 이전의 죄를 뉘우치고 육관대사의 후계자가 되어 열심히 불도를 닦아 팔선녀와 함께 극락세계로 돌아간다. 이와 같이 『구운몽』은 대승불교의 중심 경전인 [금강경]이 바탕된 공관(空觀)을 주제로 하면서, 내용과 형식상의 조화의 극을 이루어 한국 서사 문학 사상 인도, 중국, 한국, 일본 등 범동양을 휘감을 대작을 매듭지었던 것이다.
더욱이 근자에 『구운몽』이 중국으로 역수출되어 청대에 <구운루(九雲樓)>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밝혀짐에 따라, 『구운몽』은 환몽구조(Fantasy Structure)의 소설로서 동아시아에 있어서의 대작임이 한층 더 극명하게 밝혀지게 되었다. 이 문제는 한중문학의 비교에 있어서 '중국에서 한국으로'라는 식의 단향(單向)의 관계가 아니라 쌍향(雙向)의 관계에 눈을 돌려야 할 필요성을 밝혀준 것으로, 『구운몽』이 지닌 의의를 극명히 보여준 예가 아닐 수 없다.
이제 『구운몽』의 원전비평적 문제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종래 『구운몽』의 원전이 국문소설로 인식되고 있지만, 현재는 노존본(老尊本) 두 종이 발견됨으로써 원전이 한문으로 지어졌을 가능성이 더욱 뚜렷이 밝혀지게 되었다. 즉, 한문본 계열이 노존본에서 을사본(乙巳本)으로, 을사본에서 다시 계해본(癸亥本)으로 전승되어 온 것 같이 국문본도 노존본 계통의 국역본, 을사본 계통의 국역본, 계해본 계통의 국역본 등으로 이루어져 왔다(정규복의 [구운몽 원전의 연구] 참고).
근자 『구운몽』 노존본의 한 이본(강전섭 교수 소장본)이 출현함으로써 노존본이 이분화 됨에 따라 강전섭본을 B본이라 하고, 종래 필자에 의해 재구된 재구본을 A본이라 할 경우, B본이 A본의 텍스트가 되어 이루어졌다는 것이 밝혀졌던 것이다. 결국 B본이 적지 않은 문제점을 지니면서도 『구운몽』의 최고본이 되는 셈이다(정규복, [구운몽 노존본의 이분화], [동방학지] 59, 연세대 국학연구원, 1988, 참조.
즉, <구운몽> 중요 이본의 전승 과정을 도표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노존 B본(1725년 이전)-> 노존 A본(1725년 이전)-> 을사본(1725년)-> 계해본(1803년)
노존 B본은 본서 주석본의 텍스트가 되었으므로 이에 대한 구체적 설명은 뒤에서 언급할 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구운몽』의 원전이 한문으로 된 노존본임을 재차 밝혀두는 바이다.
『구운몽』의 근원 사상은 유교, 불교, 도교 등 소위 삼교사상의 대화합을 이루는 가운데 대숭불교의 중심 경전인 『구운몽』의 바탕인 공관(空觀)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구운몽』의 공관이 갖는 요체는 '무릇 상(相)은 모두 허망하지만, 이와 대칭되는 불법(佛法)도 역시 허망하므로 상과 불법, 이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끊고 머무는 데 없이 생각하라'는 것이다. 이런 <금강경>의 공관이 『구운몽』의 사상을 기본적으로 이루면서, 『구운몽』에서 현실의 주인공인 성진과 꿈의 주인공인 양소유, 신(身)과 몽(夢), 또는 장주(莊周)와 호접(蝴蝶) 등 현실과 이상의 이분법적 경계를 뛰어넘은 대오(大悟)의 경지에 이르게 한 것이다. 이렇듯 공관의 실제적 풀이가 이루어지게 하였다는 점에서 『구운몽』은 [금강경]을 허구화한 소설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구운몽』의 비교문학적 문제는 『구운몽』의 골격 구조인 환몽구조(幻夢構造)에서 접근할 수 있다. 환몽구조는 주인공이 이룰 수 없는 입신양명과 부귀공명을 간절히 원하다가 그것이 극의 상태에 이르렀을 때, 그 원망이 꿈의 형상으로 드러나고, 꿈에서 깨어남과 동시에 그 입신양명과 부귀공명의 허망함을 깨닫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현실 -> 꿈 -> 현실'이라는 골격을 유지한다.
『구운몽』이 지닌 이런 환몽구조의 원천은 인도의 불경 <잡보장경(雜寶藏經)>의 <사라나비구>에 있고, 이것이 중국으로 전래되어 당대(唐代)의 <침중기(枕中記)>, <남가태수전(南柯太守傳)>, <앵도청의(櫻桃靑衣)> 등 전기소설로 수렴되었으며, 이것들이 한국으로 전래되어 조선시대에 『구운몽』이라는 대작으로 정착되었던 것이다.
한편 『구운몽』은 일본으로 전해져 명치시대의 <무겐:夢幻>으로 서투르게 번안되기도 하였다. 우리는 이러한 환몽구조의 이야기를 통하여 동북아시아 문학의 흐름이 인도에서 시발되어 중국으로, 중국에서 다시 한국으로, 한국에서 다시 일본으로 이어져 온 것을 확인함과 동시에, 『구운몽』이 환몽구조의 이야기로서 동북아시아 문학을 휘감는 엄청난 대작의 모형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구운몽』이 지닌 비교문학적 의의인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최근 더욱 주목을 끌게 한 것은 중국소설의 영향으로 성립된 『구운몽』이 다시 중국으로 역수출되어 대장편 소설인 청대(淸代)의 <구운루(九雲樓)>로 이루어졌다는 뚜렷한 문헌이 출현하였다는 점이다(정규복, 「구운몽의 동아시아에서의 위상」, 『모산학보(慕山學報)』 16, 대구모산학회, 1994 참조).
이는 앞서 말했듯이, 종래 한중문학비교 연구의 큰 흐름이었던, 한국이 일방적으로 중국문화를 받아만 왔다는 소위 단향성(單向性)에서 벗어나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소위 쌍향성(雙向性)이 성립될 수 있는 가능성을 도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뜻을 지닌다.
<해제 끝>
여기서부터 한글 완판 105장본에 대한 설명이다.
[구운몽(완판 105장본)]
[해설]
다음 완판본은 2권 2책으로 된 국문 목판본이다. 그 판각 연도는 이 책 상권 말에 ‘임술맹추’라는 기록으로 볼 때, 철종 13년(1862) 봄이 될 것이다. 또한 이 책의 판각 연도가 1892년이고, 역시 고어투가 군데군데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 책의 성립시기는 경판본과 같이 역시 19세기 초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책의 상권은 55장, 하권은 50장, 도합 105장으로 되어 있으며, 그 체재는 세로가 21cm, 가로가 17cm, 매장 13행, 매행 17자 내지 21자이며 분장(分章)은 전혀 없으나 분장될 만한 곳에 ‘각설이라’를 임의로 삽입해 놓고 있다.
내용의 체재로 말하면, 다른 국문본에 비하여 축약된 곳이 곳곳에 보이지만, 자매본인 경판본보다 훨씬 풍부하며, 구성에 있어서도 경판본에 비하여 비교적 잘 짜여져 있다. 아울러 이 책의 내용은 표현상 한국미를 자아내게 하고 토속적 표현이 많다. 이 책의 텍스트는 한문으로 된 을사본으로 추정된다.
다음 참고로 이번 책에는 원래 계획과는 다르게 분량상 싣지는 못했지만, 위 두 본과 좋은 대비를 이루는 경판본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는 것으로 논의를 맺을까 한다. 경판본은 1권 1책으로 된 국문 목판본으로 완판본과 대를 이루고 있는 자매본에 해당된다.
이 책의 체재로 말하면, 세로가 28.5cm, 가로가 19.5cm이고, 장수는 32장, 매장 13행, 매행 24자 내외로 장(章)도 나누어져 있지 않고 연철(連綴)되었으며, 필체는 행서로 읽기에 좀 거북스럽다. 이 경판본은 『구운몽』 이본 가운데 가장 간략화한 것이 특색이라 할 수 있으나, 완판본에 비하여 무질서한 편이다. 더구나 시, 상소문 따위는 전혀 볼 수가 없다. 말하자면 갱개본(梗槪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경판본이 언제 판각되었는지는 확적하게 알 수 없으나, 이 책 가운데 비교적 고어투가 군데군데 보이는 것으로 보아 완판본과 같이 적어도 19세기 초엽에는 성립되지 않았는가 추측된다. 그리고 이 책의 문체는 역어체로 그 대본은 한문본 가운데 노존본이다.
<구운몽 완판 105장본 해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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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운몽(완판 105장본)]
<구운몽 목록>
-양소유는 초나라 양치사의 아들이니 승명(僧名)은 성진이라.
-팔선녀라.
-정경패는 정사도의 딸이니 영양공주라.
-이소화는 황제의 딸이니 난양공주라.
-전채봉은 진어사의 딸이니 숙인(淑人)이라.
-계섬월은 낙양사람이라.
-가춘운은 유인(孺人)이라.
-적경홍은 하북 사람이라.
-심요연은 검객이니 양주 사람이라.
-백능파는 동정용왕의 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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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운몽 [상]
천하에 명산이 다섯이 있으니 동쪽은 동악 태산이요, 서쪽은 서악 화산이요, 남쪽은 남악 형산이요, 북쪽은 북악 항산이요, 가운데는 중악 숭산이다. 오악 중에 오직 형산이 중국에서 가장 멀어 구의산이 그 남쪽에 있고, 동정강이 그 북쪽에 있고, 소상강 물이 그 삼면에 둘러 있으니, 제일 수려한 곳이다. 그 가운데 축용, 자개, 천주, 석름, 연화 다섯 봉우리가 가장 높으니, 수목이 울창하고 구름과 안개가 가리워 날씨가 아주 맑고 햇빛이 밝지 않으면 사람이 그 근사한 진면목을 쉽게 보지 못하였다.
진나라 때 선녀 위부인이 옥황상제의 명을 받아 선동(仙童)과 옥녀(玉女)를 거느리고 이 산에 와 지키니, 신령한 일과 기이한 거동은 다 헤아리지 못할 정도였다.
당나라 시절에 한 노승이 있어 서역 천축국에서 와 연화봉 경치를 사랑하여, 제자 오륙백 인을 데리고 연화봉 위에 법당을 크게 지었으니, 혹 육여화상이라 하기도 하고 혹 육관대사라 하기도 하였다. 그 대사가 대승법(大乘法)으로 중생을 가르치고 귀신을 다스리니 사람이 다 공경하여 생불이 세상에 나왔다 하였다. 무수한 제자 가운데 성진이라 하는 중이 삼장경문(三藏經文)을 모르는 것이 없고 총명한 지혜를 당할 사람이 없으니, 대사가 극히 사랑하여 입던 옷과 먹던 바리때를 성진에게 전하고자 하였다.
대사가 매일 모든 제자와 함께 불법을 강론하는데 동정(洞庭) 용왕이 백의(白衣) 노인으로 변하여 법석(法席)에 참예해 경문을 들었다. 대사가 제자를 불러 말하였다.
"나는 늙고 병들어 산문(山門) 밖에 나가지 못한 지 십여 년이니 너의 제자 중에 누가 나를 위하여 수부(水府)에 들어가 용왕께 보답하고 돌아오겠는가?“
성진이 두 번 절하며 말하였다.
"소자가 비록 불민(不敏)하오나 명을 받아 가겠습니다.“
대사가 크게 기뻐 성진을 명하여 보내니 성진이 일곱 근이나 되는 가사(袈裟)를 떨쳐입고 육환장(六環杖)을 둘러 짚고 표연히 동정을 향하여 갔다. 얼마 후에 문을 지키는 도인(道人)이 대사께 고하여 말하였다.
"남악 위부인(衛夫人)이 여덟 선녀를 보내어 문밖에 왔습니다."
대사가 명하여 부르시니 팔선녀가 차례로 들어와 인사하고 끓어 않자 부인의 말씀을 여쭈어 말하였다.
"대사는 산 서편에 계시고 저는 산 동편에 있어 떨어진 거리가 멀지 아니하지만 자연히 일이 많아 한 번도 법석에 나아가 경문을 듣지 못하오니, 사람을 대하는 도리도 없고, 또한 이웃과 교제하는 뜻도 없기에 시비를 보내어 안부를 묻고, 하늘 꽃과 신선의 과일 그리고 칠보문금(七寶紋錦)으로 구구한 정성을 표합니다.“
하고, 각각 선과(仙果)와 보배를 눈 위에 높이 들어 대사께 드리니, 대사가 친히 받아 시자(侍子)를 주어 불전에 공양하고, 또 합장하여 사례하며 말하였다.
"노승이 무슨 공덕이 있기에 이렇듯 상선(上仙)의 풍성한 선물을 받겠는가?"
하며, 이어서 큰 재(齋)를 베풀어 팔선녀를 대접하여 보냈다.
팔선녀가 대사께 하직하고 산문 밖에 나와 서로 손을 잡고 말하였다.
"이 남악의 물 하나 산 하나가 다 우리 집 경계인데 육환대사가 거처 기거하신 후로는 동서로 분명히 나뉘게 되어 연화봉 아름다운 경치를 지척에 두고도 구경하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 이제 우리 부인의 명을 받아 이 땅에 왔으니 만나기 힘든 좋은 기회라, 또 봄빛이 좋고 해가 저물지 아니하였으니 이 좋은 때를 맞아 저 높은 대에 올라 흥을 타며 시를 읊어 풍경을 구경하고 돌아가 궁중에 자랑하는 것이 어떠한가?“
하고, 서로 손을 이끌고 천천히 걸어 올라 폭포에 나아가 흐름을 보고 물을 쫓아 내려가 돌다리 위에 쉬니 이때는 바로 춘삼월이었다. 화초는 만발하고 구름과 안개는 자욱한데 봄 새 소리에 춘흥이 호탕하고 물색이 사람을 붙잡는 듯하여, 팔선녀가 자연 몸과 마음이 산란하고 춘흥이 일어나 차마 떠나지 못하여 편안히 웃고 말하며 돌다리에 걸터앉아 경치를 희롱하니, 낭낭한 웃음은 물소리에 어울리고 아름답고 고운 얼굴은 물 가운데 비치어 완전히 한 폭의 미인도라 하면 미인도를 잘 그린 주방(周昉)의 손아래에 갓 나온 듯하였다.
온갖 희롱하며 떠날 줄 모르더니, 이때 성진이 동정에 가 물결을 헤치고 수정궁(水晶宮)에 들어가니 용왕이 크게 기뻐하여 몸소 문무(文武)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궁문 밖에 나가 맞아 들어가 자리를 정한 후에 성진이 땅에 엎드려 대사의 말씀을 낱낱이 아뢰니, 용왕이 공경하여 사례하고 잔치를 크게 베풀어 성진을 대접할 때, 신선의 과일과 채소는 인간 세상의 음식과 같지 않았다.
용왕이 잔을 들어 성진에게 삼배(三盃)를 권하여 말하였다.
“이 술이 좋지는 않으나 인간 세상의 술과는 다르니 과인(寡人)의 권하는 정을 생각하라.”
성진이 재배하여 말하였다.
“술은 사람의 정신을 헤치는 것이라 불가(佛家)에서 크게 경계하니 감히 먹지 못하겠습니다.”
용왕이 지성으로 권하니 성진이 감히 사양치 못하여 석 잔 술을 먹은 후에 용왕께 하직하고 수궁에서 떠나 연화봉을 행하였다. 연화산 아래에 당도하니 취기가 크게 일어나 갑자기 생각하여 말하였다.
‘사부(師傅)께서 만일 나의 취한 얼굴을 보면 반드시 무거운 벌을 내리실 것이다.’ 하고, 가사를 벗어 모래 위에 놓고 손으로 맑은 물을 쥐어 얼굴을 씻는데, 문득 기이한 향내가 바람결에 진동하니 마음이 자연 호탕하였다.
성진이 이상히 여겨 말하였다.
“이 향내는 예사로운 초목의 향내가 아니다. 이 산 중에 무슨 기이한 것이 있는가?”
하고, 다시 의관을 정제하고 길을 찾아 올라가니, 이때 팔선녀가 돌다리 위에 앉아 있었다. 성진이 육환장을 놓고 합장하여 재배하고 말하였다.
“모든 보살님은 잠깐 소승(小僧)의 말씀을 들어주십시오. 천승(賤僧)은 연화 도량 육관대사의 제자로서 사부의 명을 받아 용궁에 갔다 오는데, 이 좁은 다리 위에 모든 보살님이 앉아 계시니 천승이 갈 길이 없어 부탁합니다, 잠깐 옮겨 앉아서 길을 빌려주십시오.”
팔선녀가 대답하고 절하며 말하였다.
“첩 등은 남악 위부인의 시녀인데 부인의 명을 받아 연화 도량 육관대사께 문안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 다리 위에 잠깐 쉬고 있습니다. <예기(禮記)>에 ‘남자는 왼편으로 가고, 여자는 오른편으로 간다.’ 하였습니다. 첩 등이 먼저 와 앉았으니, 원컨대 화상(和尙)께서는 다른 길을 구하십시오.”
성진이 답하여 말하였다.
“물은 깊고 다른 길이 없으니 어디로 가라 하십니까?”
선녀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옛날 달마존자(達磨尊者)라 하는 대사는 연꽃잎을 타고도 큰 바다를 육지같이 왕래하였으니, 화상이 진실로 육관대사의 제자라면 반드시 신통한 도술이 있을 것이니, 어찌 이 같은 조그마한 물을 건너기를 염려하시며 아녀자와 길을 다투십니까?”
성진이 크게 웃으며 말하였다.
"모든 낭자의 뜻을 보니 이는 반드시 값을 받고 길을 빌려주시고자 하는 것이니, 본디 가난한 중이라 다른 보화는 없고 다만 행장에 지닌 백팔염주가 있으니, 빌건대 이것으로 값을 드리겠습니다.“
하고, 목의 염주를 벗어 손으로 만지더니 복숭아꽃 한 가지를 던지거늘, 팔선녀가 그 꽃을 구경하니 꽃이 변하여 네 쌍의 구슬이 되어 그 빛이 땅에 가득하고 상서로운 기운은 하늘에 사무치니 향내가 천지에 진동하였다.
팔선녀가 그제야 일어나 움직이며 말하였다.
“과연 육관대사의 제자구나.”
하며, 각각 하나씩 손에 쥐고 성진을 서로 돌아보고 웃으며 바람을 타고 공중을 향해 갔다. 성진이 홀로 돌다리 위에서 눈을 들어보니 팔선녀는 간 곳이 없었다.
한참 후에 채색 구름이 흩어지고 향내가 사라지니 성진이 마음을 진정치 못하여 홀린 듯 취한 듯 돌아와 용왕의 말씀을 대사께 아뢰자, 대사가 말하였다.
“어찌 늦었는가?”
성진이 대답해 말하였다.
“용왕이 심히 만류하기에 차마 떨치지 못하여 지체하였습니다.”
대사가 대답하지 아니하고,
“네 방으로 가라.”
하였다. 성진이 돌아와 밤에 혼자 빈방에 누우니 팔선녀의 말소리가 귀에 쟁쟁하고 얼굴빛은 눈에 아른거려 앞에 앉아 있는 듯, 옆에서 당기는 듯 마음이 황홀하여 진정치 못하다가 문득 생각하였다.
‘남자로 태어나서 어려서는 공자와 맹자의 글을 읽고, 자라서는 요순 같은 임금을 섬겨, 나가면 백만 대군을 거느려 적진에 횡행하고, 들어서는 백관(百官)을 장악하는 재상이 되어 몸에는 비단 두루마기를 입고, 허리에는 황금으로 만든 도장을 차고, 임금을 섬기고 백성을 달래며, 눈에는 아리따운 미색을 희롱하고, 귀에는 좋은 풍류 소리를 들으며, 영화를 당대에 자랑하고 공명을 후세에 전하면 그것이야말로 진실로 대장부의 일일 텐데 슬프다, 우리 불가는 다만 한 바리때 밥과 한 잔 정화수요, 수삼 권 경문과 백팔염주일 따름이요, 그 도가 허무하고 그 덕이 사라져 없어지니, 가령 도통한 들 넋이 한번 불꽃 속에 흩어지면 뉘 한낱 성진이 세상에 났던 줄을 알리오.’
이럭저럭 잠을 이루지 못하여 밤이 이미 깊었다, 눈을 감으면 팔선녀가 앞에 앉았고 눈을 떠보면 문득 간 데가 없었다. 성진이 크게 뉘우쳐 말하였다.
“불법(佛法) 공부는 마음을 정하는 것이 제일인데 이 사사로운 마음이 이렇듯 일어나니 어찌 앞날을 바라겠는가?”
하고, 즉시 염주를 굴리며 염불을 하는데 갑자기 창밖에서 동자가 급히 말하였다.
“사형은 주무십니까? 사부께서 부르십니다.”
성진이 크게 놀라 동자를 따라 바삐 들어가니 대사가 모든 제자를 거느려 있는데 촛불이 대낮 같았다. 대사가 크게 화를 내며 말하였다.
“성진아, 네 죄를 아느냐?"
성진이 크게 놀라 신을 벗고 뜰에 나려 엎드려 말하였다.
“소자가 사부를 섬긴 지 십 년이 넘었지만 조금도 불순 불공한 일이 없었으니 죄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대사가 크게 화를 내며 말하였다.
“네 용궁에 가 술을 먹었으니 그 죄도 있거니와 오가다 돌다리 위에서 팔선녀와 함께 언어를 희롱하고 꽃 꺾어 주었으니 그 죄 어찌하며, 돌아온 후 선녀를 그리워하여 불가의 경계는 전혀 잊고 인간 부귀를 생각하니 그러하고서 공부를 어찌 하겠느냐, 네 죄가 중하여 이곳에 있지 못할 것이니, 네 가고자 하는 데로 가거라.”
성진이 머리를 두드리고 울며 말하였다.
“소자가 죄 있어 아뢸 말씀이 없지만, 용궁에서 술을 먹은 것은 주인이 힘써 권하였기 때문이요, 돌다리에서 수작한 것은 길을 빌리기 위함이었고, 방에 들어가 망령된 생각이 있었지만 즉시 잘못인 줄을 알아 다시 마음을 정하였으니 무슨 죄가 있습니까? 설사 죄가 있다면 종아리나 때리셔 경계하실 것이지 박절하게 내치십니까? 소자가 십이 세에 부모를 버리고 친척을 떠나 사부님께 의탁하여 머리를 깎아 중이 되었으니, 그 뜻을 말한다면 부자의 은혜가 깊고 사제의 분별이 중하니, 사부를 떠나 연화도량을 버리고 어디로 가라 하십니까?”
대사가 말하였다.
“네 마음이 크게 변하여 산중에 있어도 공부를 이루지 못할 것이니 사양치 말고 가거라. 연화봉을 다시 생각한다면 찾을 날이 있을 것이다.”
하고, 이어서 크게 소리쳐 황건역사(黃巾力士)를 불러 분부하여 말하였다.
“이 죄인을 압송하여 풍도(豐都)에 가 염라대왕께 부쳐라.”
성진이 이 말씀을 듣고 간장이 떨어지는 듯하였다. 머리를 두드리며 눈물을 흘리고 사죄하여 말하였다.
“사부, 사부님은 들으십시오. 옛적 아란존자(阿難尊者)는 창가(娼家)에 가 창녀와 동침하였지만 석가여래께서 오히려 죄하지 아니하였으니, 소자가 비록 근신하지 않은 죄가 있으나 아란존자에게 비하면 오히려 가벼운데, 어찌 연화봉을 버리고 풍도로 가라 하십니까?”
대사가 말하였다.
“아란존자는 비록 창녀와 동침하였으나 그 마음은 변치 아니 하였지만, 너는 한번 요색(妖色)을 보고 전혀 본심을 잃으니 어찌 아란존자와 비교하겠는가?”
성진이 눈물을 흘리고 마지못하여 부처와 대사께 하직하고 사형(師兄)과 사제(師弟)를 이별하고, 사자(使者)를 따라 수만 리를 행하여 음혼관(陰魂關) 망향대(望鄕臺)를 지나 풍도에 들어가니 문을 지키는 군졸이 말하였다.
“이 죄인은 어떤 죄인이요?”
황건역사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육관대사의 명으로 이 죄인을 잡아왔노라.”
귀졸(鬼卒)이 대문을 열자, 역사(力士)가 성진을 데리고 삼라전(森羅殿)에 들어가 염라대왕께 뵈니 대왕이 말하였다.
“화상(和尙)이 몸은 비록 연화봉에 매였으나, 화상 이름은 지장왕(地藏王) 향안(香案)에 있어 신통한 도술로 천하 중생을 건질까 하였는데, 이제 무슨 일로 이곳에 왔느냐?”
성진이 크게 부끄러워하며 고하여 말하였다.
“소승이 사리가 밝지 못하여 사부께 죄를 짓고 왔으니, 원컨대 대왕은 처분하십시오.”
한참 후에 또 황건 역사가 여덟 죄인을 거느리고 들어오자, 성진이 잠깐 눈을 들어 보니 남악산 팔선녀였다.
염라대왕이 또 팔션녀에게 물었다.
“남악산 아름다운 경치가 어떠하기에 버리고 이런 데 왔느냐?”
선녀 등이 부끄러움을 머금고 대답해 말하였다.
“첩 등이 위부인 낭랑의 명을 받아 육관대사께 문안하고 돌아오는 길에 성진 화상을 만나 문답한 말씀이 있었는데 대사가, 첩 등이 좋은 경계를 더럽게 하였다 하여 위부인께 넘겨 첩 등을 잡아 보냈습니다. 첩 등의 괴로움과 즐거움이 다 대왕의 손에 매였으니, 원컨대 좋은 땅을 점지해 주십시오”
염라대왕이 즉시 지장왕(地藏王)께 보고하고 사자(使者) 아홉 사람을 명하여 성진과 팔선녀를 이끌고 인간 세상으로 보냈다.
각설이라.
성진이 사자를 따라 가는데 문득 큰 바람이 일어 공중에 떠 천지를 분간치 못하였다. 한 곳에 다다라 바람이 그치자 정신을 수습하여 눈을 떠보니 비로소 땅에 서 있었다. 한 곳에 이르니 푸른 산이 사면으로 둘러 있고 푸른 물이 잔잔한 곳에 마을이 있었다. 사자가 성진을 기다리게 하고 마을로 들어간 후, 성진이 한 참 서서 들으니 서너 명의 여인이 서로 말하기를,
“양처사 부인이 오십이 넘은 후에 태기가 있어 임신한 지 오래인데 지금 해산치 못하니 이상하다.”
하더라. 한참 후에 사자가 성진의 손을 잡고 말하였다.
“이 땅은 곧 당나라 회남도(淮南道) 수주(秀州) 고을이요, 이 집은 양처사의 집이다. 처사는 너의 부친이요, 부인 유씨는 네 모친이다. 네 전생의 연분으로 이 집 자식이 되었으니 너는 네 때를 잃지 말고 급히 들어가라.”
성진이 들어가며 보니 처사는 갈건(葛巾)을 쓰고 학창의(鶴氅衣)를 입고 화로에서 약을 다리고 있었다. 부인이 이제 막 신음하자, 사자가 성진을 재촉하여 뒤에서 밀쳤다. 성진이 땅에 업어지니 정신이 아득하여 천지가 뒤집어지는 듯하였다. 급히 소리쳐 말하였다.
“나 살려! 나 살려!”
그러나, 소리가 목구멍 속에 있어 능히 말을 이루지 못하고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만 나왔다. 부인이 이에 아기를 낳으니 남자였다. 성진이 다만 오히려 연화봉에서 놀던 마음이 역력하더니 점점 자라 부모를 알아 본 후로 전생 일을 아득히 생각지 못하였다.
양처사가 아들을 낳은 후에 매우 사랑하여 말하였다.
“이 아이의 골격이 맑고 빼어나니 천상의 신선이 귀양 왔다.”
하고, 이름을 소유라 하고, 자는 천리라 하였다. 양생이 십여 세에 이르러 얼굴이 옥 같고 눈이 샛별 같아 풍채가 준수하고 지혜가 무궁하니 실로 대인군자였다. 하루는 처사가 부인에게 말하였다.
“나는 세속 사람이 아니요, 봉래산 선관(仙官)으로서 부인과 전생연분이 있어 내려왔는데, 이제 아들을 낳았으니 나는 봉래산으로 가거니와 부인은 말년에 영화를 보시고 부귀를 누리시오.”
하고, 학을 타고 공중으로 올라갔다.
처사가 승천한 후에 양생이 이십 세를 당하여 얼굴은 백옥 같고, 글은 이적선(李謫仙) 같으며, 글씨는 왕희지(王羲之)같고, 지혜는 손빈(孫殯) 오기(吳起)도 미치지 못하였다. 하루는 성진이 모친께 아뢰어 말하였다.
“들어보니 과거 시험이 있다 합니다. 소자 모친 슬하를 떠나 서울 황성에 유학하고자 합니다.”
유씨가 그의 뜻이 본디 평범하지 않음을 보고 만리 밖에 보내기 민망하지만, ‘공명을 얻어 가문을 보전할까 한다.’ 하고, 즉시 봉황이 새겨진 금비녀를 팔아 행장을 차려주니, 양생이 모친께 하직하고 한 필 나귀와 삼척 서동(書童)을 데리고 떠났다. 한 곳에 도달하니 수양버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한 작은 누각이 있어 단청은 밝게 빛나고 향기 진동하니 이 땅은 화주 화음현(華州 華陰懸)이었다. 소유가 춘흥을 이기지 못하여 버들을 비스듬히 잡고 <양류사(楊柳詞)>를 지어 읊으니 그 글은 다음과 같았다.
버드나무 푸르러 베 짠 듯하니,
긴 가지 그림 같은 누각에 드러웠구나.
원컨대 부지런히 심으세요.
이 버들이 가장 멋지다오.
또 하였으되,
버드나무 어찌 이리 푸르고 푸를까?
긴 가지 비단 기둥에 드리웠구나.
원컨대 그대는 잡아 꺽지 마오.
이 나무가 가장 다정하다오.
하고 읊으니 그 소리 청아하여 옥을 깨치는 듯 하였다. 이때 그 누각 위에 옥 같은 처자가 있으니 이제 막 낮잠을 자다가 그 청아한 소리를 듣고 잠을 깨어 생각하되,
‘이 소리는 필연 인간의 소리가 아니다. 반드시 이 소리를 찾으리라.’
하고, 베개를 밀치고 주렴을 반만 걷고 옥난간에 비껴 서서 사방을 두루 볼 때, 갑자기 양생과 눈이 마주치니 그 처자의 눈은 초생달 같고, 얼굴은 빙옥 같으며, 머리 구비가 헝클어져 귀밑에 드리워졌고, 옥비녀는 비스듬히 옷깃에 걸친 모양이 낮잠 자던 흔적이었다. 그 아리따운 거동을 어디 다 헤아리겠는가.
이때 서동이 객점(客店)에 가 묵을 것을 잡고 와 양생께 고하여,
“저녁밥이 다 되었으니 행차하십시오.”
라고 하자, 그 처자가 부끄러워 주렴을 걷우고 안으로 들어갔다. 양생이 홀로 누각 아래에서 속절없이 바라보니, 지는 날 빈 누각에 향내뿐이었다. 지척이 천리 되고 약수(弱水)가 멀어지니 양생이 할 수 없이 서동을 데리고 객점으로 돌아와 애만 태웠다.
대개 이 처자의 성은 진씨요, 이름은 채봉이니 진어사의 딸이다. 일찍이 자모를 잃고 동생이 없어, 그 부친이 서울 가 벼슬하는 까닭에 소저가 홀로 종만 데리고 머물렀는데, 뜻밖에 꿈 밖에서 양생을 만나 그 풍채와 재주를 보고 심신이 황홀하여 말하였다.
“여자가 장부를 섬기기는 인간의 대사요 백년고락이라. 옛날 탁문군(卓文君)이 사마상여(司馬相如)를 찾아갔으니 처자의 몸으로 배필을 청하기는 가하지 않지만, 그 상공의 거주지와 성명을 묻지 아니 하였다가 후에 부친께 고하여 매파를 보내려 한들 어디 가서 찾겠는가?”
하고, 즉시 편지를 써 유모를 주어 말하였다.
“객점에 가 나귀를 타고 이 누각 아래에 와 <양류사>를 읊던 상공을 찾아 이 편지를 전하고 내 몸이 의지하고자 하는 뜻을 알게 하라.”
유모가 말하였다.
“이후에 어사도가 노하여 물으시면 어찌하시렵니까?”
소저가 말하였다.
“이는 내가 당할 것이니 염려치 말라.”
유모가 말하였다.
“그 상공이 이미 배필을 정하였으면 어찌하시렵니까?”
소저가 한참을 생각다가 말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