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해남 나들이 기행문 2006.3.13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요즘 날씨가 꼭 그렇다. 3월 중순이면 분명 봄이건만 영하 8도라는 한겨울 날씨에 그저 망연자실. 꽃샘추위로 모처럼 잡은 사삼여동회 봄나들이에 지장은 없을까 걱정이 앞선다. 지난 13일 7시가 채 되기도 전에 출발지인 교대역에 모두 모였다. 죽전에서 합류할 3명을 포함 모두 33명이 이번 여행에 동참했다. 이번 여행은 남도답사 1번지라고 하는 강진과 해남지방을 당일코스로 잡았다. 예전 같으면 어림도 없는 여정이지만 워낙 교통이 편리해져서 당일로 가능한 여행지가 되었다. 강진은 다산 정약용선생의 18년 유배지로 그 유명한 다산초당에서 다산의 역사향기를 흠뻑 마시고, 만덕산 등산을 통해 산위에서 내려다 보이는 아름다운 바다를 감상할 예정이다. 하산하면서 백련사와 동백숲을 거 닐면서 지금 한창 피어 있을 붉은 동백꽃에 취하고 싶다. 해남으로 가서 고산 윤선도 고택인 녹우당과 고산 전시관에서 역사공부를 할 예정이다. 여행에는 풍물,역사문화 등 아름다운 멋을 찾아 다니기도 하지만, 맛 을 찾는 여행도 있기 마련이다. 이번 여행에 꼭 넣고 싶었던 맛기행으로 해남의 해물탕이 우리를 즐겁게 할 것이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이번 행사를 준비하고 진행을 맡은 장곡이 그간의 경과와 이번행사에 가이드 역할을 할 삼도산악회 박대장을 소개했다. 박대장은 전문산악인으로 버스제공과 산행과 여행에 대한 자세한 안내 를 해 주었다. 서울을 떠난지 꼭 5시간만에 강진의 다산초당 입구 주차장에 당도했다. 한반도 땅끝까지 온 것이니 5시간 이 결코 긴 시간은 아니다. 입구에서 설명 안내판을 읽고 우리는 먼저 다산초당을 향해 산책길에 들어섰다. 잘 닦여진 그러나 친자연 등산로는 우리를 편안한 마음으로 이끌었다.
다산의 유배생활과 실학의 집대성 (역사기행이니 공부겸 자료 모아봄) 다산이 처음 유배 생활을 한 곳은 경상북도 장기였다.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가 하도 못마땅하여 형조 참판 자리를 팽개치고 낙향했는데 학문을 좋아하던 정조가 승하하고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증조모되는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벽파(僻派)인 심지환을 영의정에 앉히더니, 1800년 정월에 사학을 금한다는 교를 내리고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만들어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상의 이유이고, 실제로는 노론계열의 벽파가 남인계열의 시파(時派)를 쳐부수려는 정치 싸움으로 여기에 몰린 정약용 삼형제는 의금부에 구속되어 큰형인 정약종은 대역무도죄인으로 사형을 당하고, 겨우 생명을 건진 자산(정약전)은 신지도로, 다산은 장기로 유배를 당했다. 그런데 장기로 유배 된지 반년만에 정약전의 사위인 황서영이 천주교를 탄압한 신유사옥을 적어 북경 주재 서양 교주에게 보내려고 하다가 발각되어 참수형을 당한 백서 사건이 일어나자 여기에 다산 형제가 연루되었다고 하여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다가 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다산은 강진으로 유배를 받은 것이 다산이 강진과 인연을 맺게 된 동기이다. 1,800년 동짓달 그의 나이 40세 때 이곳 강진 땅에 도착한 다산은 형장의 안내로 동문 밖 주막거리 어느 초옥에서 유배 생활을 시작한 것이 무려 18년이란 긴 세월을 강진 땅에서 보내게 된 것이다. 이곳에 도착한 다산은 실망에 빠져 두문불출하고 술만 마시다가 쓴 시가 객중서표(客中書標)로 그 때 그의 심정이 얼마나 괴로웠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북풍이 눈 날리듯 휘몰아치는데, 남쪽 강진의 주막에 와있네. 다행히 작은 산이 바다를 가리고 대밭이 좋아서 사시 경치가 좋기도 하겠구나. 풍토병 있는 땅이라 겨울옷 벗어내고 근심이 많으니 밤술 더 마시네. 설전에 동백꽃 붉게 피어, 나그네 수심을 그나마 풀어주네.
그러던 후 다산은 이곳에서 10여 리 떨어진 고성암을 찾아가 혜장스님과 대화를 나누게 되면서부터 서서히 이성을 되찾아 자기가 거처하는 주막집 방을 ‘사의재(四宜齋)’라 이름하고 탐진농가, 탐진어가 등을 지었으며, 이웃집 아이들을 데려다가 글을 가르치기도 했다. 1808년 외가쪽 산정(山亭)인 다산초당으로 이주하여 여기에서 유배가 풀린 1818년까지 10년 동안 기거한다. 처사 윤 단의 아들인 윤규로(尹奎魯) 등 3형제가 아들과 조카들의 교육을 위해 정약용을 다산초당으로 초빙했고 해남의 외가쪽 사람들은 고산(孤山) 윤선도 이래 가전(家傳)되어 오던 천여 권의 장서를 제공한다. 다산초당이 다산학의 산실로 된 데는 이렇게 외가쪽 집안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초당으로 이주하고서 비로소 다산은 마음 놓고 사색하고 연구하며, 영어(囹圄)의 억울함에서 벗어나 생의 즐거움을 느끼며 본격적인 연구 활동을 하여 500여권의 방대한 양의 저서를 완성할 수 있었다. 또 다산은 여기서 18명의 제자들을 가르쳐 모두 학자로 키우면서 실학을 집대성하게 된다.
다산은 모두 18년이란 긴 세월을 이 고장 강진에서 힘든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결코 유배의 한을 좌절과 절망으로 삭이거나 실패로 끝내지 아니했다. 이 곳에서 선생은 소위 ‘다산학(茶山學)’이라 칭하는 1표 2서, 즉 경세유표와 목민심서·흠흠신서를 비롯한 정치·경제·역사·문화를 망라한 방대한 저술인 '여유당전서'의 대부분을 완성한다. 어찌 보면 인간적으로 가장 불행한 시기와 역경을 불굴의 투지와 학문연구를 통해 끝내 우리 민족의 위대한 스승이 되었다.
다산은 1818년 해배되기 전 18제자와 함께 다신계를 만들고 초당의 안위를 부탁한다. 귀향길은 약전 형과 함께 왔던 귀양길을 2년 전에 흑산도에서 병사한 형을 뒤로 하고 홀로 걸어 고향으로 돌아간다. 다산은 고향 경기도 마현(남양주시 조안면)에서 여생을 비교적 자유롭게 보내다 결혼 60주년이 되는 회혼일(1836년)에 자택에서 생을 마감한다.<국정 넷포터 박주인씨 원문 참조>
다산초당 본래의 초당은 1930년대에 허물어 졌으며 현재의 건물은 1957년 강진의‘다산유적보존회’가 옛 건물터에 초당을 기와집으로 복원한 것이다. 초당에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 중에서 뽑아 그것을 본 떠 새긴‘다산초당(茶山草堂)’이라는 현판이 마루 위에 걸려있다 어느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와서 푸른 하늘과 고려 청자와 다산 실학, 이 세 가지가 가장 부럽다고 했다. 그런데 강진은 이 세 가지 부러운 것을 모두 가지고 있는 고장이다. 구강 포구를 내려다보는 높은 하늘은 언제나 푸르고 사적 68호인 집단 도요지가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고려 청자를 재현하고 있으며,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다산 초당은 정약용 선생이 칩거하시며 실학을 집대성한 곳이다. 초당 동쪽에는 조그마한 연못이 있다. 다산이 연못을 파고 그 한가운데 섬을 만들어 소나무 한 그루를 심어놓아 석산을 방불케 했다는 석가산에는 소나무 대신 이름 모를 나무가 한 그루 서있다. 초당 앞마당에는 솔방울을 지펴 차를 끓여 마셨던 다조가 있다. 그리고 초당 서북쪽에는 다산이 샘물로 차를 끊여 마셨다는 약수터가 있고, 그 위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는 다산이 초당을 떠나면서 새겼다는 ‘정석(丁石)’이라 다산의 글씨가 너무나 또렷이 남아 있다. 초당 양쪽에는 다시 암자 하나씩을 지어놓고 동쪽의 집을 ‘동암(東庵)’ 서쪽의 집을 ‘서암(西庵)’이라 이름하였다. 소나무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는 곳이라 하여 ‘송풍암(松風庵)’이라고도 불렀던 동암은 선생이 거처하며 방대한 저술을 하였던 곳이다. 암에는 다산의 친필을 집자하여 모각한 ‘다산동암(茶山東菴)’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동암에는 추사 김정희의 흔적이 하나 더 있는데 ‘보정산방(寶丁山房)’이라는 현판 글씨가 그것이다. 다산보다 24세 연하로서 학문적으로 다산을 흠모하였던 추사(秋史)가 ‘정약용을 보배롭게 모시는 산방’이라는 글씨를 썼는데 아직까지 전해지고 있다. ‘서암’은 초당의 서쪽 아래편에 있는데 제자들의 숙소였으며 차와 벗하며 밤늦도록 학문을 탐구하였다고 하여 일명 ‘다성각(茶星閣)’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천일각 동암을 지나면 천일각이 나온다. 초당에서 백련사로 가는 길목 잔등에 위치한 천일각은 다산 선생이 흑산도에 있는 약전 형과 고향이 그리울 때면 바다를 바라보며 마음을 달랬던 곳이다. 천일각은 비록 소박하게 꾸며진 조그마한 정자이기는 하지만 전망은 그지없이 좋다. 뒤로는 푸른 산을 등지고 앞에는 잔잔한 바다가 펼쳐져서 철 따라 물새들이 찾아들고 그 너머 푸른 산들은 아련히 섬처럼 떠 있다. 만덕산을 오르며 만덕산의 정상 깃대봉의 높이는 해발 408m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바위산을 종주하는데는 5시간이 걸린다. 장곡이 삼도산악회를 따라 답사해 본 종주코스는 비록 해발은 낮지만 몹씨 힘들었다고 한다. 우리일행은 전코스를 오르지 않고 초당 뒷산으로 올라 정상인 깃대봉에 오른 다음 헬기장에서 백련사 쪽으로 하산하는 쉬운 코스를 잡았다. 초당 뒤로 이어지는 등산로는 양 옆으로 대나무숲이 우거져 환상적이었다. 일열종대로 행군하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중턱으로 오를수록 바위산의 기경을 보게되고 저 멀리 구강포 바다풍경과 어우러져 기막힌 산수화를 그려내고 있었다. 남쪽이라 봄기운이 완연하다. 참꽃이 빨간 봉우리를 피우고 있고 노란 생강나무도 꽃망울을 터뜨릴듯 입을 벌리고 있다. 평소 산행을 게을리 했던 친구들이 땀을 흘린다. 생각보다는 경사가 있어 애를 먹는다. 일렬종대로 늘어선 등산로에는 우리 일행 뿐이다. 풍경을 구경한답시고 서 있으면 모두 다같이 구경을 하고 가야한다. 서울을 떠날 때 워낙 추운 날씨를 각오해서 인지 날씨가 등산하기에는 적당했다. 그러나 바람이 세게 부는 바람골에는 몸이 흔들릴 정도로 강했다. 이름도 바람재라고 이곳에는 유별 바람이 세었다. 만덕산 깃대봉을 쳐다보는 바로 밑에서 중식을 하기로 했다. 정상에는 바람이 너무 심할 것 같기도 하고 시간이 많이 지나 배도 고프고-삼삼오오 가져간 간단한 식사를 했다. 나도 컵라면을 가져간 보온병의 뜨거운 물로 익혀 맛있게 먹었다. 40kg의 김치전을 메고- 밤새도록 김치전을 만드느라 잠을 설쳤다는 K동문의 부인 J여사의 마음씨에 모두들 고마움을 표했다. K동문도 비록 그 무거운 짐을 지고 산을 오느느라 짜증도 났겠지만 친구들 고마워하는 마음에 너무나 흐뭇하고 행복했을 것이다. 고맙기 그지없다. 가져온 과일과 음료를 서로 나누어 먹으면서 즐거운 식사시간을 가졌다. 4시경 해남에 있는 해물탕집에서 맛있는 식사를 위해서는 너무 과식을 해서는 안된다. P동문은 이곳 강진에 두번이나 다녀갔지만 오로지 해물탕에 구미가 당겨 안오고는 못베길 정도라고 - 기대가 보통이 아니었다. 정상은 의외로 바람이 잠잠했다. 기념촬영을 하기 바쁘다.
하산길은 경사가 심했다. 갑자기 눈보라가 날린다. 3월 중순에 눈이 내리는 산행이라- 생각만해도 멋지다. 눈이 쌓일 정도가 아니니 전혀 위험한 것도 아니고, 분위기만 들뜨게 만든다. 내려가면서도 내려다 보이는 경치는 너무 좋았다, 바다와 겹겹이 싸인 산들- 발아래에 그림같은 백련사 전경이 시선을 끈다. 역시 산행에서 아름다운 풍경이 없으면 힘도 훨씬 더 들 것이다. 어느 정도 내려오니 길이 평탄해지고 산책로로 이어진다. 백련사가 가까워진 모양이다. 백련사가 너무 아름다워 사진 샷다가 쉴 틈이 없다. 들이대면 모두 멋진 장면이다. 백련사 옆 동산은 모두 동백숲이다. 정확히는 모르나 7천그루가 넘는다고 한다. 국내 제1의 동백단지이다. 나무가 굉장히 크다. 동백꽃은 계속 피고 또 진다. 꽃채로 그대로 떨어져 바닥이 벌겋게 물든다. 춘설(春雪)이 난분분(亂紛紛) 동백숲길을 따라 내려오니 버스가 정차해 있는 곳에 도착했다. 눈발이 점점 세 지더니 마치 한겨울 눈이 내리듯이 휘날린다. 그야말로 춘설이 난분분하다. 옛 평양기생 매화의 시조가 생각난다. 매화 옛등걸에 봄철이 돌아오니 옛 피던 가지에 피음직도 하다마는 춘설(春雪)이 난분분(亂紛紛)하니 필동말동 하여라
신기한듯 눈을 맞이한다. 어린애 마냥 즐거워하는 모습이 행복해 보인다. 일부는 미리 와서 상점에서 마신 검정콩 두부와 막걸리 맛이 그렇게 좋더라고 약을 올린다. 시간이 되면 강진읍내에 있는 김영랑 생가를 찾고 싶었으나 좀 무리한 것 같아 바로 해남으로 향했다.
다산동암 천일각에서 부인들도 산행전문가 내려다 보이는 경치가 너무 좋다. 정상 부근에서 단체사진 깃대봉에서 강진 백련사 대웅보전 만덕산 동백숲은 국내 최대크기- 춘설이 난분분
녹우당/고산윤선도유물관 30여분 차를 타고 가니 고산 윤선도와 윤두서의 후손들이 사는 고택인 녹우당이 보였다. 녹우당 오른쪽에는 잘 지어진 전시관 건물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고산윤선도유물관'이다. 유물관 안에는 윤선도와 윤두서의 작품과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너무나 값진 전시품이라 시간만 많으면 오래오래 음미하면서 보고 싶지만 그러지 못해 아쉽다. 녹우당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었다. 여행에는 사진이 필수이다. 남는 것은 사진뿐이라는 말 때문일까- 증명사진을 남기듯 기념 될만한 곳에는 인물사진을 찍게 마련이다. 다시 버스를 타고 학수고대하던 해물탕집으로 갔다. 가까운 거리에 우리가 미리 예약해둔 '용궁해물탕'집에 도착했다. 역시 맛자랑집으로 요란한 간판이 시선을 잡아당긴다. 인터넷 때문에 전국에 어디이든 소문난집은 손님이 모이게 마련이다. 소주를 곁들인 해물탕은 맛기행에 전혀 손색이 없었다. 배불리 먹고 행복한 얼굴들을 하면서 귀가 채비를 한다. 3월의 봄나들이는 비록 날씨는 꽃샘추위로 변덕스런 날이었지만 위대한 선조의 역사의 향기를 맡으며 좋은 기행이 되었다. 상경하는 버스에서 B동문의 부인 L여사의 다산과 다산초당에 관해 해박한 강의가 있었다. 다례에 관한한 추종을 불허하는전문가이면서 전국 유명사찰을 안 가본 곳이 없다고 한다. 우리 여동회에 빠질수 없는 분이라 앞으로 큰 기대를 해 본다. 일행을 태운 버스는 비교적 빨리 달려 서울에 도착하니 10시반- 금년도 첫 나들이는 비록 거리가 멀어 차타는 시간이 긴 것이 흠이었지만 하나같이 즐거운 여행, 행복한 여행이 되었을 것으로 믿는다. 친구따라 어디인들 안가고 싶은 곳이 있으련만, 이번 강진 봄나들이는 특히 역사문화는 물론 맛기행까지 겸하여 더욱 멋있는 여행이 되었다. 진행을 매끄럽게 잘 한 장곡과 박대장 수고 많았고, 날씨 궂은데도 빠짐없이 즐거운 여행이 되도록 협조해준 여러 회원님들께 감사를 드린다.
고산유물관 녹우당
녹우당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