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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잘 쓰려면 / 이훈
1. 늘 글을 써야 한다
글쓰기는 중요하다. 사회가 합리적으로 갈수록 학연이니 지연이니 하는 비민주적이고 불합리한 기준보다는 글을 중심으로 평가하게 된다. 개인 주체의 합리적인 생각을 존중하는 경향이 강해질 것이라고 바꿔 말해도 좋다. 한마디로 글이 사람을 판단하는 데 아주 중요한 기준이 된다.
그러니 교육 현장에서는 글쓰기를 어느 공부보다 우선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혹시 공부와 글쓰기를 대립적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들을 수 있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글쓰기 자체가 진짜 공부이기 때문이다. 글을 쓰자면 읽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게 공부가 아니고 뭔가! 당장 글쓰기를 독립 교과목으로, 그렇지 못하면 국어 과목의 가장 중요한 영역으로 대접해야 마땅하다. 단단한 내면으로 세상을 주체적으로 살자면 글을 써야 한다.
글쓰기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았기 우리는 외면을 지나치게 중시하고 유행에 민감하며 남의 눈을 의식하는 사람으로 자랐다. 이런 부정적인 현상이 전적으로 글을 안 쓰기 때문에 나온다고 하면 물론 폭력적인 단순화지만 교육 현장을 조금이라도 고민해 봤다면 그 누구도 둘 사이에 아무 관계가 없다고는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글은 생각대로 잘 나오지 않는다. 즐겁게 글을 쓰는 방법은 없을까? 되풀이하여 쓰는 것, 이게 답이다. 쓰다 보면 말할 거리가 생긴다. 이미 있던 생각만으로는 절대로 좋은 글이 나오지 않는다. 글은 단순히 녹음기가 아니다. 새롭게 발견한 걸 담게 되기 때문이다. 글감을 골똘히 들여다보면서 따지면 따질수록 평소에는 하지 못하던 생각이 신기하게도 떠오른 결과다. 좀 과장하면 글이 글을 부르는 일도 생긴다. 이른바 영감도 아마 이와 비슷할 것이다. 얼른 보기에는 뜻하지 않게 얻은 것처럼 보이는 행복한 표현은 평소에 많이 고민한 결과일 뿐이다. 그러므로 글도 농사와 마찬가지로 뿌린 대로 거둔다고 해야 옳다. 글을 쓰면 평소에 그냥 지나치던 것도 주의 깊게 돌아보고 책도 이전과는 다른 태도로 읽게 된다.
되풀이하여 글을 쓰는 것이 이런 결과를 가져온다면 그 과정이 힘든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글을 쓰면 나를 돌아보고 반성하고 심지어는 부정해야 하므로 고통스럽지만 새로운 나를 만들어 가는 기쁨도 그에 못지않게 크다. 이렇게 하여 내 마음은 넓어지고 깊어진다. 그런데 참 놀랍게도 마음의 넓이와 깊이에는 한계가 없다. 빈 항아리는 물이 가득 차면 더 담을 수 없지만 사람의 마음은 채울수록 빈 데가 늘어난다.
글을 쓰는 습관을 들이자면 어려서부터 아이의 자율성을 존중해 주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라 부모와 마찬가지로 독립적인 존재로 대접해야 한다. 그래야 자유롭게 질문하고 스스로 답을 찾아 낼 수 있다.
* 참고 자료 1
삶을 가꾸는 글쓰기 / 이훈
오늘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삶을 가꾸는 글쓰기’이다. 이 제목에 우리가 살아가는 데 중요한 것이 다 들어 있는 것 같아서 참 마음에 든다. 삶, 가꾸다, 글쓰기. 어느 것 하나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묵직묵직한 화두다. ‘삶’을 얘기하자면 일생을 다 써도 모자라는 데다 내게 그럴 만한 능력도 없으니 이 자리에서는 간단히 ‘사람답게 사는 것’이라고만 해 두고 앞으로 ‘사람다움’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려고 한다. ‘가꾸다’는 사전이 잘 설명하고 있으므로 그대로 옮기는 게 좋겠다.
1. 식물이나 그것을 기르는 장소 따위를 손질하고 보살피다. 예) 정원을 가꾸다.
2. 몸을 잘 매만지거나 꾸미다. 예) 늙을수록 몸을 잘 가꿔야 한다.
3. 좋은 상태로 만들려고 보살피고 꾸려 가다. 예) 우리 민족은 고유문화를 잘 가꾸고 이를 발전시켜 왔다.
4. 쓸모없는 땅을 쓸모 있는 땅으로 바꾸다. 예) 돌밭을 옥토로 가꾸었다.
한마디로, 우리 자신이나 이 세계를 좋게 바꾸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꾸지 않으면 자연(무위)으로 돌아가고 만다. 인위적인 것,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문화나 문명은 우리 인간이 가꾸어 낸 결과이다.
‘글쓰기’는 사람이 가꾸는 것 가운데 최고의 영역이 아닐까?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는 사람인데 이 존재를 여러 가지로 정의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사람의 고유한 성질, 다시 말하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특성에 초점을 맞춰 호모 사피엔스(생각하는 인간), 호모 파베르(만드는 인간)라고 부르는 게 대표적이다.
이 밖에도 호모 루덴스(노는 인간)도 있는데 삶의 목표가 일하는 데 있는 것처럼 굴다가 과로사하는 사람이 많은 요즘에 곰곰이 되새겨 봐야 하는 정의가 아닐까 한다. “공부(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바보가 된다”는 외국 격언은 삶의 지혜를 담고 있다. 즐겁게 노는 것은 열심히 일한 대가로 얻는 보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추구해야 삶의 가치여야 한다. 그러므로 퇴근 시간까지 어겨 가며 열심히 일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 놀이처럼 일할 수도 있을 테니 그런 분은 예외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예는 극히 드물다. 원래 놀이였던 걸 돈벌이 수단으로 만든 프로 스포츠가 인기를 끌고 덩달아 아마추어 선수마저도 이런 추세를 거스를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체육계에 만연한 폭력도 운동을 놀이로 즐기지 못하고 생계 수단으로 삼아 억지로 하는 데서 나오는 필연적인 결과일 것이다. 스스로 즐기지 못하니 지도자가 감시하며 강요할 수밖에 없다. ‘노는 인간’ 얘기가 좀 길어져 버렸다. 노는 것처럼 즐겁게 글을 쓰자는 말을 하려는 마음이 앞서서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생각하고, 도구를 만들고 노는 건 사람만 하는 행위는 아니다. 유인원도 질적인 차원에서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이 낮은 수준이기는 하지만 저런 일을 한다. 생각도 하고 감정도 느끼며 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인원이 못 하는 게 하나 있다. 그게 뭘까? 다른 말로 물어보자. 우리 사람만이 유일하게 하는 일이 무얼까? 글쓰기다. 유인원이 그림까지는 그린다는 기사를 보기도 하지만 글은 어림도 없다. 이런 사실은 우리에게 뭘 말하는 걸까? 그 답은, ‘사람답게 되려면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글을 안 쓰면 사람이 아니라는 결론에 저절로 이르게 된다.
이제, 글이 왜 사람에게 꼭 필요한지, 다시 말하면 삶을 가꾸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지를 살펴볼 차례다. 가장 먼저, 글을 쓰면 생각하고 묻게 된다. 여러분은 사람이니까 다들 글을 써 봤을 테니 그 과정을 떠올려 보자. 막연한 상태에서 글쓰기는 시작된다. 미리 머릿속으로 생각하거나 정성스럽게 자료를 준비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의도대로 된다면 좋겠지만 세상일과 크게 다르지 않게 글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쓰기 전에는 미처 생각지 못한 문제가 반드시 생기기 때문이다. 이걸 풀어 나가는 것이 글쓰기의 실제다. 그래서 답을 찾고자 고민하면서 책도 열심히 찾아 읽고 옆 사람과도 얘기를 나누게 된다. 전문적으로 쓰는 사람이 글쓰기가 어렵다면서 늘어놓는 하소연도 이런 사정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이런 준비 과정이 힘들어서 아예 포기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렇게 글쓰기가 온통 고통뿐이기만 할까? 아니다. 글을 쓰지 않았다면 모른 채 그냥 지나쳤을 것을 발견하고 깨닫는 기쁨도 누리게 된다는 점을 강조해야 사실에 부합한다. 물론 내 무식이나 편견, 무관심을 확인하는 괴로움도 피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런 고통은 나를 더 넓고 깊게 만드는 과정에서 만나는 것이므로 즐거움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고통이 있으니까 오히려 즐거움이 더 크게 느껴진다고 얘기해도 좋다. 한마디로 즐거운 고통이다.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함께 하면 고통의 잔치(축제)가 될 것이다. 이런 기쁨도 없이 기존의 생각을 녹음기처럼 그냥 저장만 하는 것이라면 왜 따분하게 글을 쓰겠는가!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글쓰기가 생각을 만들어 준다고 강조한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경험했겠지만, 어떤 생각을 갖고 글을 쓰더라도 글을 쓰면서 생각이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이는 글쓰기를 함으로써 깊이 있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걸 의미한다.
뭘 알아서 쓰는 게 아니라 쓰면서 뭘 알게 된다. 이건 내가 매일 겪는 경험이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글을 쓰기 전 이미 어떤 구상을 해놓고 써내려간다. 머릿속에선 전혀 문제가 없는 멋진 아이디어였다. 그런데 글을 쓰다 보면 중간에 막힌다. 내 주장의 근거가 부실하다는 걸 깨닫기도 하고, 더 중요한 건 이게 아니라 저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그러면 다시 고쳐 써야 한다. 나는 뭘 알아서 쓴다고 생각했지만, 정반대로 쓰면서 알던 것과는 다른 걸 알게 된 셈이다.(강준만, <<글쓰기가 뭐라고>>, 인물과사상사, 2018, 37쪽.)
글은 쓰면 써진다고 믿고 써야 한다. 쓸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술술 써지는 기적이 일어나겠는가. 기발한 생각은 기다린다고 오지 않는다. 개요도 써야 정리되고 짜인다. 시작할 때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써가며 알게 된다. 알아서 쓰는 게 아니다. 모르니까 쓰는 것이다.(강원국, <<강원국의 글쓰기>>, 메디치미디어, 2018.)
어쩌면 글은 ‘내’가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이 쓰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으니까요. 마치 실타래에서 실이 풀려 나오듯 내 안에서 글이 풀려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글에서 글이 나오는 것뿐이랄까요. 그러니 ‘나만의 것’ 또한 표현될 기회를 얻지 못하면 존재하지 않는 거죠.(김정선, <<열 문장 쓰는 법>>, 유유, 2020.)
이렇게 하여 글쓰기는 자기 생각이 분명한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인간을 만들어 준다. 글쓰기만큼 이런 일을 잘할 수 있는 영역은 없다. 우리가 유행에 민감하고 외모를 지나치게 중시하며, 심지어 미래의 진로마저도 남이 하거나 부모가 추천(강요?)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따라가는 것은 학교에서 글쓰기 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한 탓이 아주 크다.
둘째로 글은 교감하는 능력을 키워 준다. 보통, 좋은 글의 조건으로 구체성을 든다. 여기 내 앞에 꽃이 있다. 내가 아무리 아름답다고 얘기해도 독자는 무슨 말인지 모른다. 눈으로 직접 보고 코로 냄새를 맡고 손으로 만져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독자의 공감을 얻으려면 꽃의 모양이나 향기를 마치 눈앞에서 보고 냄새 맡듯이 보여 줘야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다루는 대상을 오감으로 느낄 수 있게끔 감각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이것이 구체성이다.
우리 동물은 감각 기관의 매개를 거쳐 바깥세상과 생생하게 소통한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손을 조금 다치기만 해도 세상이 아주 달라지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치가 이러하니, 글도 이 세상을 직접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고 맛 보는 기분이 들도록 써야 한다. 이처럼 대상을 감각적으로 되살리는(재현하는) 것이 이미지다. 영화가 그 예술적 질에 관계없이 쉽게 감동하게 하는 것은 이미지로 말을 걸기 때문이다. 영화는 관객에게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직접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쉽게 마음이 움직이는 것(감동)이다. 왜 그럴까? 동물은 오감을 거쳐 세상과 마주하도록 타고났기 때문이다. 말을 압축적으로 사용하는 시가 이미지를 애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한마디로, 시는 감각의 언어로 이뤄진 집이다.
이 구체성은 우리가 다루는 대상은 물론이고 내 글을 귀한 시간 내어 읽어 줄 독자에게도 아주 중요하다. 그러므로 나는 독자의 마음을 상상하면서 어떻게 써야 상대방이 내 말을 오감으로 실감나게 듣고 느낄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최대한의 친절과 정성으로 독자를 모셔야 한다. 이런 과정에서 나는 내 영역을 넘어서 다른 사람과 교감하면서 공감하는 능력을 키우게 된다.
그러므로 글쓰기는 대상과 독자를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독자와 대화를 나누는 일을 놓고는 요즘 글쓰기로 인기가 많은 강원국의 얘기를 들어 보는 게 좋겠다.
“글쓰기는 독자와의 대화이다. 글은 썼다고 끝난 게 아니다. 독자의 반응까지가 글의 완성이다. 공감력 있는 필자는 독자의 반응을 실시간으로 느끼며 쓴다. 무슨 말을 듣고 싶을까, 무엇을 궁금해할까, 이렇게 쓰면 독자가 알아먹을까, 재밌어할까, 지루해하진 않을까. 이런 질문에 관한 독자의 대답을 상상하며 쓴다. 그런 필자는 리액션이 좋은 사람을 앞에 두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공감력이 부족한 필자는 벽에 대고 말하거나 무표정한 사람을 앞에 두고 말하는 것과 같다. 글감도 생각나지 않을뿐더러 좋은 글을 쓰기도 어렵다.”
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888652.html
그런데 교감을 잘하자면 어떤 태도가 필요할까? 마음이 한없이 열려 있어야 한다. 내 생각만 정답이라고 우기는 태도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그래도 사실의 영역에서야 정답이 있으니까 문제가 없지만, 그걸 해석하고 평가하는 데서까지 정답을 강조하다 보면 다른 의견을 무시하고 억누르기 쉽다. 내 방식만 옳다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이익과 관련되면 더 그악스러워지는데 요즘에 흔히 듣는 정치인의 막말이 좋은 예다. 유발 하라리가 일신교와 다신교를 비교하면서 한 얘기는 이 ‘정답’과, ‘다른 생각’에 그대로 적용해도 좋을 것 같다.
“로마인들이 오랫동안 관용을 거부했던 유일한 신은 일신교적이고 개종을 요구하는 기독교의 신이었다. (중략) 3세기에 걸진 모든 박해의 희생자를 다 합친다 해도, 다신교를 믿는 로마인들이 살해한 기독교인은 몇천 명을 넘지 않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후 1,500년간 기독교인은 사랑과 관용의 종교에 대한 조금 다른 해석을 지키기 위해서 다른 기독교인 수백만 명을 학살했다.”(유발 하라리, 조현욱 옮김, <<사피엔스>>, 김영사, 2015, 306-7쪽.)
다신교는 여러 신을 믿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다른 종교를 관용하는 데 비해서 일신교는 오직 하나의 신만을 떠받들기 때문에 교리에서는 심지어 사랑과 관용을 강조하면서도 같은 종교 안에서조차 파가 다르면 배타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내 주장만 옳다고 우기면 다른 생각들은 그냥 틀린 답일 뿐이다. 이런 세계에서 다양성은 살아남지 못한다.
우리 인간은 유한하다. 완벽하지 못하다. 당연히 이 세상은 물론이고 나 자신조차도 다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내 의견만 옳다고 고집을 부려서는 안 된다. 과학마저도 이 세상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점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는 점을 상기하자. “우리는 알 수 없을 뿐이다(We simply do not know).” 경제학의 틀을 바꿨다고 평가받는 케인스가 미래를 두고 한 말이다. 정답이 있고 그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면 의문과 질문이 없어진다. 아는 것은 모른다는 것을 의식한 결과다.
하나 마나 한 얘기를 읽으면 상투적이라고 평가한다. 이 상투성은 닫힌 마음이 만들어 낸다. 기계적인 반응이라고도 하는데 기계는 정해진 대로 질서(order) 있게 움직인다. 그걸 벗어나면 고장 난(out of order) 거다. 그런데 마음이 열리면 상황에 걸맞게 유연하게 대처하므로 상투적인 표현도 덜 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글쓰기는 자기 객관화의 능력을 키워 준다. 요즘 여기저기서 상담을 많이 한다.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 같은 모임도 인기를 끈다. 그만큼 마음이 아픈 사람이 많다. 삶이 고통의 바다(苦海)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런데 이런 자리에서 내놓는 조언이나 지혜로운 말씀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너 자신을 알라’다. 이 격언을 실천하면 쓸데없는 자기 비하나 자아도취에서 벗어나 마음이 튼튼해진다. 자기 객관화가 바로 이것이다.
글을 왜 쓸까? 자신을 잘 알려고 쓴다. 자기 밖의 세계를 다룰 때도 궁극적으로는 자신으로 되돌아온다. 누구를 비판하면서도 과연 나에게도 그런 문제가 없는지를 물어야 좋은 글이 된다. 이런 과정에서 나를 남 보듯 하는 능력을 키운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 사람은 이렇게 자기중심주의에 사로잡혀 산다. 누구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데 글은 이런 걸 조금씩이나마 줄여 주는 데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
글을 쓰다 보면 내 머리에서 나온 것인데도 문장이 주인이 되어 스스로 제 길을 찾아가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런 놀라운 현상도 자기 객관화와 깊은 관계가 있다. 뛰어난 소설가는 자신이 창조한 인물을 인형처럼 마음대로 조종하지 않고 그의 자유를 존중한다. 심지어는 처음 의도에서 벗어나고 자신의 가치관과 어긋나더라도 기꺼이 그렇게 한다.
앞에서 글쓰기를 씨앗과 나무, 열매에 비유했다. 글이 마음먹은 대로 안 되는 이유는 씨앗이나 나무처럼 사람으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근성이 있기 때문이다. 날마다 애를 써도 식물의 성질을 무시하면 잘 자라지 않는다. 글에도 이런 게 있다. 아무리 멋진 내용이라고 해도 문법에 어긋나면 알아들을 수가 없다. 이치에 맞지 않는 내용을 늘어놓으면 아예 읽지 않는다. 그러므로 글도 내 분신이 아니라 나와는 다른 존재로 대접해야 한다. 이러면서 차츰차츰 나를 객관적으로 보게 된다.
‘자유는 필연성의 인식’이라는 멋진 말이 있다. 하늘을 자유롭게 날려면 자연의 질서(법칙)인 중력을 잘 활용해야 한다. 글쓰기에도 이런 진리가 어김없이 해당된다. 잘 쓰자면 문법을 포함한 말은 물론이고 내가 다룰 대상의 성질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이런 걸 갖추는 것이 자기 객관화로 나아가는 길이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고 한다. 전쟁이란 말이 들어가서 섬뜩하지만 이 지피지기야말로 사람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경지인 것은 분명하다.
이 자기 객관화가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하는 자연과학자의 말을 결론 삼아 들어 보기로 하자.
자신을 별먼지와 잔가지라고 인식하는 것은 자기 객관화에도 도움이 됩니다. 자기 평가를 냉철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외부의 시선으로 자신을 볼 수 있어서 균형감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자신의 장단점을 인정하고 개선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이러한 인식은 자신을 지나치게 과대 평가하거나 과소 평가하는 것을 방지하게 해 줍니다. 메타인지 능력이 상승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자기 객관화는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으로 이어지지요. 자연스럽게 공감과 이해가 높아집니다. 자신이 별먼지면 다른 사람도 소중한 별먼지일 것입니다. 자신이 잔가지면 다른 사람도 고귀한 잔가지일 것입니다. 모두 비슷한 존재입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다른 사람도 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도 벌어질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만 특별한 일이 생길 확률은 아주 낮을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될 것입니다. 보편성에 대한 인식을 가지게 되는 것이지요.
이명현, <사례 연구, 이명현>, 이명현, 장대익, <<별먼지와 잔가지의 과학 인생 학교>>, 2023, 사이언스북스, 115쪽.)
그런데 안타깝게도 나를 완전히 객관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누가 나를 비판하면 여전히 아프다. 상대방에게 화를 내기도 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렇게 흥분할 일이 아닌데도 그렇다. 글은 이 지나친 반응을 조절하는 능력을 키워 준다. 그러므로 글쓰기는 끊임없는 수양일 수밖에 없다. 이제 앞에서 한 얘기로 다시 돌아왔다. 사람답게 되자면 글을 써야 한다.
물론 글은 실생활에서도 필요하다. 합리화되고, 민주적인 사회가 될수록 취직이나 승진 등에서 글솜씨가 필수적인 기준이 된다. 글쓰기에서 이런 실용적인 기능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강조한 글쓰기의 궁극적인 효과, 즉 나와 이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주체적인 인간으로 키워 주는 힘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가끔씩이라도 되새겨 봐야 한다.
2. 좋은 글은?
어떤 글을 좋다고 할까? 여러 가지로 대답이 가능하지만 필자의 의도를 성공적으로 드러내야 한다는 점에는 누구나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물론 그 의도가 뻔한 것이어서는 안 되고 깊이와 보편성을 갖춘 내용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평생에 걸쳐서 끊임없이 배우고 읽고 쓰고 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글 못 쓴다고 가만히 앉아서 한탄할 것이 아니라 부지런하게 읽고 생각하고 써 보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읽을 만한 글을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성의와 노력이다.
내용의 깊이나 독창성, 보편성을 갖추는 일은 위에서 말한 대로 평생에 걸쳐서 해야 하니까 여러분의 노력에 맡기기로 하고 여기서는 그 내용을 전달하는 방식에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몇 가지 점을 얘기하고자 한다.
먼저, 구체성이다. 여기 내 앞에 꽃이 있다. 내가 아무리 아름답다고 얘기해도 독자는 무슨 말인지 모른다. 눈으로 직접 보고 코로 냄새를 맡고 손으로 만져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독자의 공감을 얻으려면 꽃의 모양이나 향기를 마치 눈앞에서 보고 냄새 맡듯이 보여 줘야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다루는 대상을 오감으로 느낄 수 있게끔 감각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이것이 구체성이다. 문학적인 성격을 지닌 글이 이미지를 애용하는 것은 이 구체성을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글의 교훈적인 성격은 주로 이 구체성에서 나온다는 점을 명심하자. 예를 들어, 소풍을 갔다 와서 수필 한 편을 쓴다고 해 보자. 교훈을 내세운답시고 “오늘 소풍 참 재밌었다. 다음에도 꼭 가야겠다.”고만 하면 참여하지 못한 독자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글쓴이를 따라서 ‘이번에는 못 갔지만 다음에는 나도 꼭 가야겠다’고 할까? 사람은 그리 쉽게 감동하지 않는다. 습관이나 성격을 바꾸는 것은 더 어렵다. 그래서 어린이에게도 교훈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을 되도록 피하고 구체적인 얘기를 들려주어 스스로 느끼게 한다. 소풍이 재미있었다는 말 대신에 즐겁게 놀았던 장면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면 독자는 ‘아! 이러니 나도 다음에는 꼭 가야겠다’는 마음을 먹는다. 여기서 좋은 글은 내 주관적인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이나 감정을 누르고 대상을 존중하며 꼼꼼하게 관찰하는 데서 나온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둘째로 복잡성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복잡성은 대상을 이루는 측면이 많다는 뜻이다. 단순하게 하나의 성질만 있다고 본다든지 긍정적인 요소만 일방적으로 부각시킨다든지 하는 것은 이 복잡성을 존중하는 정신에 정면으로 어긋난다. 특히 주장을 내세우는 글에서는 늘 이런 측면을 조심해야 한다. 내 주장이 옳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그에 반대되는 측면을 무시하거나 아예 없는 것처럼 굴기가 쉽기 때문이다.
이 복잡성은 대상의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와의 연관성도 포함하고 있다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 개별적으로 독립하여 존재하는 사실은 없다. 예를 들어, 가난한 사람이 있다면 그 책임을 그 개인에게만 돌릴 수는 없다. 그렇게 만든 여러 요인을 고려해야 그 가난의 양상을 잘 파악할뿐더러 제대로 된 해결책도 마련할 수 있다. 그 개인의 궁핍상을 구체적으로 잘 묘사한다고 하더라도 구조적인 연관성을 놓치면 그 의미를 객관적이고 전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이 복잡성을 존중하려면 무엇보다도 사실을 존중하는 겸허한 태도를 길러야 한다. 물론 이런 일은 쉽지 않다. 인간은 자기중심적이며 자존심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요하면 자존심을 버릴 수 있을 정도로 무한히 열려 있어야만 가능하다.
여기에서 ‘불신의 자발적인 중단(willing suspension of disbelief)’이라는 개념을 소개하고 싶다. 내 생각과 맞지 않는 주장이라고 하더라도 일단 반대하는 태도를 의식적으로 유보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다. 흔히 경험하는 일인데, 나와 생각이 다르면 주의를 기울여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다르다’와 ‘틀리다’를 구별하지 않은 채 일률적으로 ‘틀리다’라고 해 버리는 우리는 특히 그렇다. 첨예하게 의견이 맞서면 상대방에게 귀기울이지 않고 내 생각만 일방적으로 주장하기 일쑤다. 내게 편견이 있거나, 남에게도 합리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을 무시하고 나만 옳다고 내세우는 것이다. 요즘 들어 더 심해진 진영 논리나 확증 편향도 이래서 나온다. 대화는 없고 감정이 섞인 말싸움만 벌어진다. 이와 반대로, 상대방의 말을 의심하지 않고 경청하면 많은 걸 얻을 수 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의논을 하거나 조정할 필요가 있을 때 저는 우선 상대방의 말을 경청합니다. 다른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을 때는 상대방의 말을 거의 무조건 있는 그대로 듣습니다. 경청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어린 시절부터의 습관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 경청의 핵심은 상대방이 하는 말이 거슬리거나 맘에 들지 않는 경우에도 우선은 판단을 유보하고 전적으로 집중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말을 의심하지 않고 경청을 하면 여러 가지 이점이 있습니다. 상대방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놓치지 않고 파악할 수 있습니다. 편견과 감정이 개입되거나 상대방에 대해서 미리 판단을 내린 상태로 이야기를 들으면 잘해야 듣고 싶은 것만 들을 뿐입니다. 상대방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고 놓치면 결국 자신의 손해입니다. 알면서도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주어진 시간 동안 가능한 한 감정을 개입시키지 말고 경청을 하면 상대방으로부터 정보를 최대한 얻을 수 있습니다. 즉각적인 동의나 부정을 하지 않고 유보하는 것도 중요합니다.(이명현, <행복 엔지니어링>, 이명현, 장대익, <별먼지와 잔가지의 과학 인생 학교>>, 사이언스북스, 2024, 182-3쪽.)
물론 무조건적인 경청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중요한 내용이라면 시간을 들여 상대방의 생각이 합리적인지 따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답이나 결론을 바로 제시하는 것보다 그것에 이르는 논의의 과정을 꼼꼼하게 드러내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정답보다는 과정이 제대로 되어 있느냐 하는 것에 더 많은 점수를 주는 것은 수학 문제 풀이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쓰는 과정에서 내 설명이나 주장을 입증해 줄 자료나 근거를 풍부하게 제시해야 한다. 앞에서 강조했듯이 내 주장과 반대되는 내용은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물론 이런 자료를 나열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자칫 글이 산만해지거나 논리적인 모순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논리의 일관성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복잡성이 유기적 통일성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모든 글은 그 종류에 관계없이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이 논리로 독자와 이야기를 나눠야 좋은 글이 된다.
이런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는 것은 어렵다.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런 경지에 쉽게 이르는 길도 나 있지 않다. 앞에서 말한 대로 쉬지 않고 읽고 생각하고 쓰는 게 겨우 그 길의 입구에 들어설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도 위에서 말한 몇 가지 조건을, 읽고 생각하고 쓸 때마다 의식적으로 고려하는 습관을 들인다면 읽을 만한 글을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참고 자료
어떤 중학생의 자기소개서
한국과학영재학교는 일반적인 학교들과는 달리 폭 넓고 자유로우며 깊이 있는 공부가 가능한 학교라고 들었습니다. 우리나라 전체에서 대단히 뛰어난 학생들이 응시한다고도 들었습니다. 현재 저의 실력은 그런 학생들에 비하면 많이 부족할 것입니다(성적을 소개해야 함). 그러나 제가 학교에 합격하기만 한다면 누구보다도 즐겁게, 열심히 공부할 자신이 있습니다(평소에 어떻게 즐겁게 공부하고 있는지를 소개해야 함). 수학과 과학을 정말 제대로 배우고 익혀서 그 방면에서 최고의 학자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공부하고 연구한 것들을 우리나라와 인류를 위하여 베풀고 싶습니다.
저는 머리가 특별히 좋은 아이는 아닙니다. 지금 대단한 능력을 갖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한번 마음먹으면 절대로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끝내 이루어내는 끈기는 있습니다(어떤 일을 그렇게 했나요?) 저는 부족한 것을 빨리 파악하고 보완하기 위하여 항상 노력합니다.(이렇게 주장만 하지 말고 구체적인 예를 들 것) 과학과 수학을 제대로 공부하려면 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이것도 막연하게 영어 공부라고만 하지 말고 어떤 내용과 과정을 공부하고 있는지 제시할 것) 공부만 하면 정서가 메마른다는 엄마의 말씀에 따라, 성악과 플루트 연주를 배우고 있습니다. 친구들과의 우정도 중요하게 여기려 하고 있습니다.
3. 생각하는 방법이 있다
1) 늘 질문하자―고정 관념, 상식, 권위, 관습을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 참고 자료 1
‘왜?’는 이치를 따짐이다. 곧 합리성의 추구이다. 힘의 논리를 궁극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은 합리성이다. ‘왜?’의 발생은 토론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첫걸음이기도 하다.
내가 들은 풍월에 의하면, 프랑스의 어린이들이 ‘엄마’ 다음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왜?’로서 ‘아빠’보다 더 자주 사용한다고 한다. 실제 어린이들은 세상과 만나면서 끊임없는 물음과 만나게 된다. 손가락은 왜 다섯 개이며 입은 하나인데 귀는 왜 두 개인가? 호기심에 가득 찬 순진무구한 어린이들이 말을 배우면서부터 끊임없이 ‘왜?’라는 물음을 던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점에는 한국의 어린이들과 프랑스의 어린이들 사이에 차이가 없다. 차이는 엄마에게서 비롯된다. 프랑스의 엄마들―아빠도 마찬가지인데―은 때로는 순진하고 때로는 엉뚱하기 짝이 없는 아이의 물음에 성실하게 답해 준다. 순진한 물음에는 순진하게 엉뚱한 물음에는 엉뚱하게, 끊임없이 이어지는 물음에 참을성 있게 끝까지 답해 준다. 나는 단 한 번도 “그런 건 몰라도 돼”라든가 “귀찮게 왜 자꾸 그러니”나 “크면 다 알아”와 같은 대꾸를 들어본 적이 없다. 왜? 시간 여유가 충분해서? 그런 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아이를 가족의 한 성원으로 보고 대화의 상대로 인정해 준다는 점이 더 크다고 본다. 습속이 그런 것이다.
이와 같은 프랑스 엄마들에 비해 한국의 엄마들은 어떤가? 또 아빠들은 어떤가? 아이를 끔찍이 생각한다는 점에서는 한국의 부모들이 더 열성이다. 아이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사줄 용의도 있다. 그러나 끝없이 이어지는 ‘왜?’에 성의 있게 대답하는 엄마와 아빠는 아주 드물다. 왜? 시간 여유가 없어서? 그렇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아이를 대화의 상대로 보기보다는 ‘내 것’ 즉, 소유물로 보는 타성과 그 자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습속 등 사회습속이 더 많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넌 그런 거 몰라도 돼”나 “귀찮게 왜 그러니”나 “크면 다 알아”를 몇 차례 들은 아이는 ‘왜?’라는 물음을 스스로 접게 된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엄마에게서 거부된 ‘왜?’라는 질문을 던질 곳은 더 이상 없다. ‘왜?’라는 질문이 일찍부터 실종되는 것이다.
한국과 프랑스의 이 습속의 차이는 대단한 중요한 사회적 결과를 가져온다. 아이들의 사회에서부터 대화가 통하지 않고 ‘힘의 논리’가 관철되는 것이다. (중략) 나는 이 글을 읽는 부모에게, 또 장래의 부모에게 아이들의 ‘왜?’라는 물음에 성실하게 대답해 주라고 간곡하게 당부하고자 한다.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질문에는 간단하게, 황당한 질문에는 더욱 황당하게 답변하시라. 아이는 꿈과 상상의 날개를 마냥 펼쳐 나갈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졸라대는’ 아이를 보기 어렵다. 간혹 졸라대는 아이가 있긴 하지만 엄마가 설득하면 금방 그친다. 그동안 대화를 해왔기 때문에 대화로 해결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 한국의 아이가 조르는 행위는 자신을 금쪽같이 아껴주는 부모에 대한 반사적 행위로서 ‘힘의 시위’로 나타난다. 대화로 풀리지 않고 목적이 달성되거나 아니면 엄마의 ‘힘에 의한’ 묵살로 끝나게 된다.
이와 같은 ‘힘의 논리’의 관철은 그 아이가 사회에 진출할 때까지, 아니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과연 그 아이는 아주 어렸을 때 포기했던 ‘왜?’라는 물음을 언제, 어디서, 어떤 계기로 되찾을 수 있는가? 학교에서? 군대에서? 직장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엄마에게서 거부되었는데? 사회 곳곳에서 힘의 논리, 서열의 논리가 관철되고 있는데? 그 아이가 커서 힘을 논리, 서열의 논리가 관철되고 있는데? 그 아이가 커서 힘을 무조건 따르고 권위에 경배하는 것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는가? 대중은 이미 ‘힘의 논리’에 무감각하기까지 하다.
그 위에 오늘도 각종 정보를 쏟아내는 대중매체의 작용이 보태진다. 현대인들은 앎과 정보를 혼동하여 받아들이고 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고 스스로 믿고 있다. 알고 있다고 믿고 있으므로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 ‘왜?’라는 물음을 되찾지 못한 채 스스로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힘의 논리는 계속 관철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우리는 여기서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속담을 되뇌어야 할 것이다. 어렴풋이 아는 것이 아예 모르니만 못하기 때문이다. (홍세화,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한겨레신문사, 2002, 48-51쪽.)
* 참고 자료 2
질문의 힘 / 이훈
먼저, 질문부터 해 보자. 프랑스 아이들이 ‘엄마’ 다음으로 많이 하는 말은 무엇일까? ‘왜?’라고 한다. 하기야 사람은 원래 호기심 덩어리로 태어나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삶은 주체가 세상과 관계를 맺는 것이므로 제대로 살자면 세상을 잘 알아야 하는데 그러자면 물어야 한다. 그러므로 모르는 것을 알게 되면 큰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아이라고 다르지 않다. 끊임없이 묻는다. 그런데 우리 부모는 어떻게 반응할까? 개별적으로 보면 같은 나라 안에서도 차이가 많아 일률적으로 말하는 것이 어렵겠으나, 우리가 프랑스 부모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이의 왕성한 호기심을 귀찮아한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다. 어떤 부모는 심지어 그런 거 알 필요 없다고 윽박지르기조차 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차츰차츰 질문을 거둔다. 교육열에서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우리 부모는 겉보기와는 정반대로 반교육적인 태도를 실천하며 산다.
프랑스 부모들은 언뜻 보기에 엉뚱한 질문에도 꼭 대답한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쓸데없는 질문은 없다. 허구를 특징으로 삼는 문학은 이런 유형의 질문에 기대지 않고는 아예 나올 수가 없다. 문학의 중요한 요소의 하나인, 현실 너머를 꿈꾸는 상상력을 그 예로 들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어디 문학뿐이랴! 감성을 중시하는 문학과는 달리 냉철한 이성의 작용을 바탕으로 삼는 과학의 발전에도 엉뚱한 발상이 꼭 필요하다. 기존의 답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늘 의심의 눈으로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의 학교 교육도 사실은 우리 부모의 태도와 그리 다르지 않다. 질문해서 스스로 답을 찾기보다는 선생의 말이나 책의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도록 길들인다. 우리 학생들이 질문을 꺼리는 것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보다는 정답을 찾는 것을 위주로 하는 공부 방식 탓이다. 이른바 객관식 문제가 정답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도록 세뇌시킨다. 내 생각은 필요 없다. 답을 외우기만 하면 된다. 정답만 필요하므로 학생 스스로도 질문하는 동료에게 시간 뺏는다고 눈을 흘기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암기가 필요한 것일까? 이제 웬만한 정보는 우리가 손에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에 들어 있다. 그런 걸 학교에서 외우고 시험까지 봐야 할까? 기계가 다 해결해 주는 세상에서 이런 일에 힘과 시간을 바치는 것은 괜한 낭비가 아닐 수 없다. 암기가 강조될수록 정답이 중요해지고 개인의 자유로운 생각은 존중받지 못한다. 그래서 비판적으로 따지는 능력을 잃어 간다.
한국 유학생들에게 세 가지 특징이 있다는 말을 읽고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다. 질문이 없다, 자기 생각이 없다, 토론할 줄 모른다는 것이 그것이다. 외국어와 환경에 익숙하지 않으니까 저럴 수도 있다고 하겠으나 학생들을 가르친 경험으로 보건대 터무니없는 악담은 아닌 것 같다. 수업하면서 질문하라고 수없이 요구하지만 반응은 시원치 않다.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정보를 많이 모아 놓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무지를 의식하는 것이다. 모르는 것이 있으니까 알려고 묻게 된다. 읽을수록 모르는 게 많아지는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일이다. 책이 책을 부른다고 할 만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책으로 이루어진 길을 따라가다 보면 생각지도 않은 곳에 이르게 되기도 한다. 모른다고 의식한 덕분에 받은 뜻밖의 선물이다!
그런데 반대로 책을 읽지 않으면 무엇을 모르는지조차 모르니까 다 아는 것처럼 굴게 된다. 그래서 책도 질문도 필요 없다. 모르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뭐 하러 눈과 머리 아프게 책을 읽겠는가! 이런 사람들은 질문하지도 않거니와 남이 묻는 것도 싫어한다.
제대로 알려면 물어야 한다. 정답을 아는 것은 쉽다. 정보를 모아 놓은 책을 기계적으로 외우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질문은 의식적으로 훈련하지 않으면 잘 나오지 않는다. 문제를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봐야 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기존 답의 권위에 도전하는 용기도 있어야 한다. 억압적인 사회에서일수록 정답은 힘이 센 사람들이 정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문제 제기를 달가워하지 않거나 심지어는 아예 금지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이 아니더라도 창조적인 질문은 쉽지 않다. 해 오던 대로 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습관의 힘은 무섭다. 그래서 상투적인 대답과 삶이 나온다. 일상의 늪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이러면서 사람이 아니라 기계가 된다. 이렇게 금지와 습관에 길들여진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의 능력과 소질을 묻지도 않은 채 그냥 점수에 맞춰 대학에도 가고 전공도 정한다. 결국 고정 관념과 관습, 유행을 아무 생각 없이 따르는 사람이 된다. 여기에 나라는 존재는 없다.
질문하지 않으면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 자꾸 물어야 개인적인 성숙도 도모하고 더 나아가 좋은 사회를 만드는 데도 이바지할 수 있다.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아낸 것만 참다운 지식이 된다. 질문 없이 그냥 얻은 답은 시험 보고 나면 다 잊힌다. 아마 다들 공감할 것이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 다 이유가 있어 생긴 것이다. 그 이유를 알려면 물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을 좋은 쪽으로 바꿀 수 있다. 자신에게는 물론이고 이 세상에 호기심을 품고 열심히 물으면 저절로 공부가 즐거워진다. 공부가 지겹게 된 것은 질문하지 않도록 학생들을 몰아가는 우리 교육 현실과 깊은 관계가 있다.
2) 자기중심주의(지역주의, 국가주의)에서 벗어나기―사실 앞에 겸허하라, 차이를 인정하라, ‘틀리다’고 하지 말고 ‘다르다’고 말하자
* 참고 자료 1
호메로스는 그레시아인이었으나 그레시아군 지도자들의 치기 어린 다툼을 감추지 않았고 또한 적군의 대장 헥톨의 영웅됨을 아낌없이 칭찬하였다. 공정을 기하기 위해, 민족적 감정을 애써 억누른 흔적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는 사실 앞에 겸허했던 것 같다. 그는 또한 한 떼의 그레시아군이 불의의 습격을 당해 많은 동료를 잃고 도망하다가 안전한 곳에 이르러 우선 먹을 것을 실컷 먹고 쉬고 난 다음에야 죽은 동료들을 기억하고 울었다고 덤덤히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에는 문학적 선택주의의 전형인 감상주의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감상벽이 있는 아류는 아마도 “먹을 것도 있고 오래 굶주리기도 하였지만 죽은 동료들 생각에 울음만 나올 뿐 입맛이 통 없었다”고 썼을 것이다. 그러나 물론 이것은 사실과는 거리가 먼 <감상적 허위>이다. 호메로스의 이런 대목들을 읽을 때, 우리는 우리의 가식적 통념―스스로 세련된 교양이라고 자부하고 있는―을 파괴하는 준열을 느끼는 것이다. 그런 일을 해대면서도 호메로스는 무척이나 덤덤하다.」(이상섭, 「사실의 준열함과 문학」, <<말의 힘>>, 민음사, 1976, 20-1쪽.)
* 참고 자료 2
꿈의 해석의 결론이 여러분에게 기분 나쁜 아주 부도덕적인 것으로 생각된다고 하여 그것이 어떻다는 것입니까. 나는 젊었을 때 나의 은사 샤르코 선생이 이와 같은 경우에 ‘사실이 그런 것을 어떻게 할 수 있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즉, 이 세상을 현실에 있는 그대로 알려고 한다면, 겸허한 태도로 자기의 동정심이나 반감을 철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프로이트, 김성태 역, <<정신분석 입문>>, 삼성출판사, 1990, 157-8쪽.)
3) 복잡성을 존중하기―세상은 복잡하다, 일면적으로 보지 말자
공평하게 그리고 꼼꼼히 들여다보면 인간의 삶은 아주 복잡하다. 그래서 어떤 현상을 두고 전적으로 옳거나 그르다고 평가할 수가 없게 된다. 하나의 요소가 아니라 서로 다르거나 심지어 반대되는 요소로 이뤄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 참고 자료
내 방 벽에는 일본의
악귀(惡鬼) 탈이 걸려 있다.
노랑칠을 한 것이다.
고약하다는 것이 얼마나 힘드는 것인가를 보여주는
이마에 삐져나온 힘줄을
나는 알 듯한 기분으로 바라다본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악의 탈」
4) 열정이야말로 으뜸가는 사고력이다
위에서 생각하는 첫째 방법으로서 “늘 질문하자”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묻자면 뭐가 있어야 할까? 그 답은 열정이거나 이 낱말과 연관된 삶의 태도가 아닐까 한다. 열정을 지니면 세상은 온통 의문투성이가 된다. 그러니 호기심과 관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 열정이야말로 으뜸가는 사고력이라고 해야 한다.
* 참고 자료
‘사고력’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사고력을 단지 사고의 기능, 생각의 도구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해 때문에 사고력 관련 책들을 보면, ‘관찰, 추론, 분류, 비교, 사실과 의견 구분하기, 공통점 찾기 등’을 훈련시키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고력’을 단지 ‘논리적 사고력’ 또는 ‘이성적 사고력’으로만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희망하는 것을 성취하고자 하는 뜨거운 열정, 이 세계에 대한 진지한 호기심과 관심, 사람들과 관계에 대한 애정과 친절함, 지속적인 변화와 창조에 대한 갈망 등은 과연 어떻게 얻어지는 것일까요? 과연 이러한 삶의 요소들은 사고력과는 전혀 무관한 것일까요?
모든 사고력을 인도하고 이끄는 것은 관심, 호기심, 신기함, 궁금함입니다. 이것은 ‘당당한 시선’ 즉 이 세계에 대한 응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입니다. 세계와 만날 수 있는 사고 능력인 것입니다. 호기심과 세계에 대한 궁금함이 부족한 아이들은 동기가 형성되지 않으며 무기력합니다.
행복함과 성취감을 맛본 사람은 ‘감사함’을 느낍니다. 성취할 때마다 자신이 성장함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성취는 자신감, 자신에 대한 긍정심, 자아 존중감을 넓혀줍니다. ‘감사’와 ‘성취’는 항상 비례합니다. 그러므로 성취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감사’라는 사고의 능력을 느끼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감사의 행위 또한 제대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희망의 원리>>를 쓴 에른스트 볼로흐는 ‘사유는 초월하는 행위이다’라고 말합니다.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에너지 중의 하나는 아마도 ‘희망’일 것입니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 바라는 것,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 모두 희망입니다. 나 혼자만의 희망, 친구와 함께 이루고자 하는 희망, 지역사회의 희망, 자연과 함께 이루고자 하는 희망, 세계의 희망, 그리고 우주의 희망이 있습니다. 희망은 이토록 다양한 겹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고력은 희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희망하는 것 또한 사고의 능력입니다. 희망은 꿈꾸게 하고 상상하게 합니다. 모든 희망은 변화에 대한 지향입니다. 새로운 실현에 대한 설렘입니다. 희망하는 능력에 비례해서 동기가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희망은 행위를 지도합니다. 희망의 크기만큼 적극적이며 주도적인 실천이 이루어집니다.
끊임없이 움직이며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아이들의 본능입니다. 아이들의 눈은 항상 새로운 것, 신기한 것에 열려 있습니다. 아이들은 스스로가 희망이며 새로운 시대, 열정적 성취의 주도자들입니다. 사고력 교육이 추구하는 것, 그것은 바로 열정적 성취의 능력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차오름, 「열정ㆍ호기심ㆍ희망은 사고력의 또 다른 이름」, 한겨레, 2006. 8. 20.
http://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150455.html
열정과 호기심은 물론이고 현실을 넘어서고자(초월ㆍ부정하고자) 하는 비판 정신으로 무장하여 끊임없이 묻자!
사족 하나. 위에서 밑줄을 그은 문장은 거슬린다.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에너지 중의 하나는 아마도 ‘희망’일 것입니다.” 글쓰기 지도를 하다 보면 “삶을 살면서”라는 투의 문장을 흔하게 만난다. 이런 상투적인 어구는 아예 빼거나 꼭 있어야 한다면 간단히 ‘살면서’나 ‘삶에서’라고 하면 된다. “하는 데 있어”도 아주 어색하다. “하는 데(서)”라고 바꾸면 자연스럽다. 따라서 위의 문장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에너지는 아마도 ‘희망’일 것입니다.”라거나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에너지는 아마도 ‘희망’일 것입니다.”라고 하면 아주 자연스럽다.
한비야의 글쓰기 비결 / 이훈
한비야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을 없을 것이다. 혹시 그런 분이 있다면, 그의 최근 산문집인 <<그건 사랑이었네>>(푸른숲, 2009.)의 구절을 빌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도전, 무모하리만치 크고 높은 꿈 그리고 거기에 온몸을 던져 불사르는 뜨거운 열정”(152쪽)의 사람이라고 설명해 드리겠다.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인지 호기심이 생긴다면 그의 책을 직접 읽어 보기를 권한다. 감동과 재미를 동시에 느끼는 아주 소중하고 즐거운 독서 시간이 될 것이다.
그의 책은 많이 읽힌다. 인기의 비결은 무엇보다도 먼저 꿈과 열정을 가득 담고 있는 내용이 주는 감동에 있다. 잘 읽히는 문체의 힘도 한몫한다. 책을 들면 한꺼번에 다 읽지 않으면 안 되도록 만드는 흡인력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술술 잘 넘어가니까 글도 쉽게 쓸 것이라고 짐작하기 쉬운데 그의 말을 따르면 밤새워 가며 몸부림친 결과이다. 좋은 것치고 그냥 나오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심지어 우연도 성의를 편드는 법이다.
마침 이 책에 「내 글쓰기의 비밀」이라는 글이 있어 그 내용을 소개할까 한다. 좋은 글은 다른 일과 마찬가지로 꾸준한 노력의 산물이라는 점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자, 한비야가 어떻게 글을 쓰는지 들어 보기로 하자.
우선 좋은 글을 향한 기본적인 몸부림은 다들 알고 있는 다독, 다작, 다상량이다. 이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 (중략) 이 ‘삼다’와 더불어 나는 다록(多錄)을 추가하고 싶다. 직접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잘 기록해놓는 일 말이다. 나는 또렷한 기억보다 희미한 연필 자국이 낫다고 확신하는 사람이다. (중략) 기억은 지나고 나면 사건의 골자, 즉 뼈대만 남기지만 기록은 감정까지 고스란히 남는다.(111쪽)
많이 읽고 쓰고 생각하는 ‘삼다’야 글쓴이가 말한 대로 기본 중의 기본이어서 더 강조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만 기록해 두는 일의 중요성은 의외로 소홀히 여기기 쉽다. 요즘에는 사진기가 일반화되어서 더 그렇다. 그런데 기억을 도와주는 도구가 많고 발전할수록 잘 잊기 쉽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손전화에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으니까 이제는 가족의 번호도 확인해야 알게끔 되어 버렸다. 기억 자체가 망각이다. 기억하고 싶은 것만 남겨 놓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과거를 멋대로 바꾸어 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기록해 놓아야 한다. 몇 해 전의 여행을 떠올려 보자. 그냥 놓아 두면 어느 나라에 간 것만 어렴풋이 생각날 뿐이고 구체적인 대목은 다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을 알게 된다. 기억을 믿지 않는 데서 글쓰기는 시작된다.
두 번째 몸부림은 몰두다. 내 글이 술술 읽히니까 쓸 때도 일필휘지로 쓰는 줄 안다. 아니다. (중략) 날밤을 새우고 또 새운다. 밤을 새워서 좋은 글이 나온다면 한 달이라도 새우겠다. 밤을 새울 때마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도대체 이렇게밖에 못하면서 무슨 글을 쓴다고 나섰느냐며 자학까지 한다. (중략)
그러니 백 퍼센트 몰두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소위 총동원령이다. 글을 쓰는 동안만큼은 내가 가진 경험과 에너지와 시간을 글에만 몰아주어야 한다. 힘도 없는 주제에 어찌 감히 있는 힘과 시간을 아낀단 말인가? 그래서 원고 마감 전날에는 어김없이 밤을 새운다. (중략) 소파에서 토끼잠을 자다가 주기적으로 벌떡 일어나 써놓은 글을 다시 읽어보고는 고치고 또 고친다. 신문이든 잡지든 어딘가에서 내 글을 보았다면 아, 이 사람, 이 글 쓰느라 전날 밤 밤 새웠겠군, 생각하면 ‘백 프로’다.(113-4쪽)
글쓰기에는 이력이 났다고 해도 좋을 만큼 전문가인데도 이렇게 글마다 전심전력을 기울인다! 우리는 어떤가? 글 못 쓴다고 엄살 피우기 전에 원고지를 붙들고 밤새워 본 적이 있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세상에 저절로 되는 일은 없다.
저런 말을 들으면 글은 사람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저절로 하게 된다. 글에 이렇게 정성을 기울이는데 다른 일에도 그렇지 않겠는가. 이렇게 글은 사람의 됨됨이와 직접 연결되는 것이다. 글이 사람을 만든다. 옛날에 글을 쓰게 하여 관리를 뽑은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세 번째 몸부림은 글 쓰기 전에 먼저 말로 해보기다. (중략)
일단 글을 쓴 후에는 전문을 큰 소리로 읽고 또 읽는다. 글이란 결국 운율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 문장 안에 고저와 장단이 있어야 자연스럽고 전달이 잘 된다. 소리 내서 읽으면 이런 점이 잘 드러나서 껄끄럽거나 어색한 부분을 다듬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문장뿐 아니라 내용 점검도 말로 풀어서 하면 훨씬 쉽다.
혼자 읽으며 다듬는 것이 어느 정도 됐다고 생각되면 그 다음 순서는 시도 때도 없이 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다 쓴 글을 읽어준다. 읽은 후 “어때?”라고 물을 때 바로 “좋은데”라고 하면 난리가 난다.(114-5쪽)
글을 잘 그리고 쉽게 쓰자면 친구에게 말하듯이 하면 된다. 상대방이 나를 다 아니까 괜히 허세 부릴 필요 없이 솔직히 내 생각을 드러낼 수 있다. 쓰고 나서도 소리 내어 읽으면 번역 투의 어색한 문장을 다듬는 데도 도움이 된다. 친구에게 내 글을 들려주고 독후감을 듣는 과정에서 내 생각을 객관화할 수 있다. 내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야 좋은 글이 된다. 그래서 글이 되든 안 되든 쓰고 나면 발표해야 한다. 채 완성이 안 된 글도 좋다. 시작이 반이라고 손을 대면 끝은 나게 되어 있다.
네 번째 몸부림은 마감 시간 딱 맞추기와 퇴고다. 나는 마감 시간 직전까지 글을 쓰거나 고친다. (중략)
단행본을 낼 때는 더욱 그렇다. 초교지, 재교지는 물론 인쇄 직전의 오케이 교정지에도 붉은 펜으로 수없이 고쳐서 딸기밭을 만들어 놓는다. (중략) 그것도 모자라 인쇄기가 돌아가기 직전 인쇄소에 가서 고친 적이 있고, 이미 나온 책을 20쇄가 넘도록 고치다가 편집자에게 사실이 틀렸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손대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쓴 적이 있다.(115-6쪽)
퇴고를 놓고서는 글쓴이가 하지 않은 말을 좀 보태자. 완성된 글을 시간이 날 때마다 손을 보는 것은 기본―끝없이 다듬고 다듬어야 한다―이고 시간이 흘러서 내 글을 남의 글 보듯 할 수 있을 때 고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이다. 그래서 글도, 자기 체험이나 생각을 얘기하는 것이니까 글쓴이에게는 잘 들어오지만 내 글을 읽는 사람은 오로지 글에만 의지해야 하므로 무슨 말인지 모를 수가 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내 글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거리가 생겨 내 글의 문제점이 눈에 들어오게 된다. 마음의 상처가 아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상처를 입으면 처음에는 오로지 내 것만 보여서 다른 사람도 아파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지 못한다. 그래서 세상의 고통을 혼자 짐진 것처럼 아픔을 과장하게 된다. 이 자기중심주의의 가장 강력한 치료약은 시간이다. 시간이 흐르면 내 잘못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이 자기반성이 내 고통을 객관적으로 보게 만들어 주는데 이 과정에서 어느덧 내 상처는 아물게 된다.
이제 결론에 이르렀다. 마지막으로 한비야가 생각하는 글쓰기가 무엇인지 들어 보자.
나는 글쓰기는 철공을 갈아서 바늘로 만드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지칠 정도로 너무나 더디지만 애를 쓰는 만큼 반드시 좋아진다는 거다. 내 첫 책 ‘바람의 딸’ 시리즈와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를 비교해보라. 내가 보아도 글이 좋아졌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난다. 이것이 바로 그동안 좋은 글을 쓰기 위해 그토록 몸부림치고, 가족과 친구들을 괴롭히고 기자와 편집자들에게 비굴했던 지난 10년간의 결과다. 앞으로 10년 후면 지금의 철공이 훨씬 더 바늘에 가까운 모습이 될 것을 굳게 믿으며 오늘도 미련하게, 그러나 기꺼이 철공을 갈고 있다.(116쪽)
글은 철공을 갈아서 바늘을 만드는 일이다. 이 무시무시한 진리에다 무슨 말을 덧붙이랴. 연습이 완벽하게 만든다. 바보가 산을 옮긴다. 사는 것과 글쓰기는 같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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