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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식 관련 사진 및 언론보도》
▲ 취임식장 모습(1948.7.24, 중앙청광장)
▲ 중앙청광장은 물론 세종로 거리까지 군중들이 운집해 있다.<사진/대통령기록관>
▲취임식장인 중앙청 광장에 모인 축하객들. 아침 일찍부터 빗방울이 떨어져 우산을 받쳐 들고 있다. <사진/(사)월드피스자유연합>
▲ 특유의 개량 한복을 입고 취임선서를 하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사진/위키백과>
▲대통령 취임선서를 한 뒤 선서문에 서명하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사진/조선일보>
▲취임사를 하고 있는 이시영 부통령<사진/국사편찬위원회>
▲ 초대 대통령 취임 보도기사<사진/동아일보>
《취임 기념우표 발행》
《이승만 대통령 프로필》
이승만(李承晩)은 1875년 3월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난 개화파, 언론인, 정치인으로 한학(漢學)과 영어에 능통했다.
대한민국의 초대 및 2.3대 대통령을 역임하며 강력한 반공정책으로 대한민국을 공산화로부터 지켜내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나라의 기틀을 세운 건국대통령이다.
젊은 시절 서당에서 한학과 배재학당에서 서양학문을 공부하고 독립신문 주필, 독립협회 활동 등을 하면서,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 도모했다는 죄목으로 투옥되었다가 사면된 후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조지 워싱턴대 학사, 하버드대 석사, 프린스턴대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국내와 미국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1919년 9월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역임한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등을 지내며 주로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벌였다.
1945년 해방 후 귀국해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반공과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 추진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제헌 국회의장에 이어 초대 및 2․3대 대통령을 역임하며 건국의 산파역을 하였고, 1950년에 북한 김일성의 기습남침에 엄청난 인명 피해와 국토의 피폐화로 나라가 적화 위기에 처했으나 미국과 UN군의 도움을 받아 자유민주체제를 지켜내고, UN의 승인, 이승만라인(평화선) 선포,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 등을 통해 대한민국 주권을 지키는데 노력하였다.
당시 국민으로부터 국부(國父)로 추앙을 받아 4선에도 성공했으나 1960년 3.15 부정선거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하야한 후 미국 하와이로 망명했다가 그곳에서 향년 9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국내로 유해가 운구된 후 장례를 ‘가족장’으로 치르고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이승만 대통령 주요 학력》
1879. 서울 낙동서당, 도동서당에서 한학(漢學) 공부
1895. 서울 배재학당 입학
1907. 미국 조지 워싱턴 대학교 컬럼비아학부 졸업(학사)
1910. 2. 미국 하버드 대학교(석사)
1910. 7.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외교학과 국제법 전공)<철학박사학위 취득>
— 대한민국이 배출한 최초의 국제정치학 박사
1949. 서울대학교 명예법학박사
1954. 조지워싱턴대학교 명예법학박사
컬럼비아대학교 명예법학박사
1958. 사이공대학교 명예정치학박사
《주요 경력》
1879. 한학(漢學) 공부
1895. 배재학당 졸업(서양학문 공부)
1896. 협성회․독립협회 간부
1898. 독립협회 사건 당시 정부타도획책 혐의로 종신형 선고받고 5년 7개월 투옥
1904. 석방, 미국으로 건너감
1907. 미국 조지워싱턴대에서 수학
1910. 하버드대 석사, 프린스턴대 국제정치학 박사과정을 4년반 만에 마침
1912. 세계감리교대회 한국대표
1914. 하와이에서 주보 <태평양> 발간
1917. 호놀룰루에 기독교 학원 독립군관 학교 설립
1919. 상해임시정부 대통령 취임
1925. 3. 상해임시정부 탄핵으로 사임, 미국에서 독자적 독립운동 전개
1945.10.16. 귀국,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총재, 민주의원 의장 피선
1948. 5.10. 제헌국회의원 당선(동대문甲구에서 출마, 무투표 당선)
1948. 5.31. 제헌국회 개원, 국회의장에 피선
1948. 7.20.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피선(제헌국회에서 선출)
1948. 7.24.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취임
1948. 8.15. 대한민국정부 수립 선포식
1950. 3. 농지개혁 실시
1950. 6.25. 북한군 전면 남침으로 6.25사변 발발
1951.12. 자유당 창당, 총재 취임
1953. 6.18. 반공포로 무조건 석방 용단
1953. 7.27. 휴전협정 체결
1952. 8.15. 제2대 대통령 취임
1956. 8.15. 제3대 대통령 취임
1960. 3.15. 3.15부정선거에서 제4대 대통령 당선
1960. 4.27. 대통령직 사임서를 국회에 제출
1960. 4.28. 하야, 이화장으로 귀환
1960. 5.29. 하와이 망명
1965. 7.19. 하와이 ‘마우날라니’ 병원에서 서거(향년 90세)
1965. 7.23. 유해 귀환(김포공항)
1965. 7.27. 서울 정동교회에서 ‘가족장’으로 영결식, 국립서울현충원 안장
《주요 상훈》
1949.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955. 미국 금영자유훈장(Medal of Freedom)
* 1945년 미국 투르만 대통령이 만들어, 2차대전 후 자유수호를 위해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수여한 훈장
《기타 인적사항》
◇ 성명 : 리승만(李承晩) Rhee syng-man * 아명은 승룡(承龍)
* 본관 : 전주(全州), 아호 : 우남(雩南)
—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 15대손으로 몰락한 양반가문 출신인 부친 이경선(李敬善)과 서당 훈장인 김창은(金昌殷)의 외동딸인 모친 김해 김씨 사이에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으나 위의 두 형이 그의 출생 전에 사망해 사실상 6대독자가 되었다.
— 젊은 나이에 동양고전(漢學)을 통달하고 과격한 정치개혁을 추구하다 5년7개월의 옥고를 치렀으며, 그 뒤 미국의 일류대학에서 박사학위(국제정치학)를 딴 최초의 한국인으로서 동서양의 학문을 두루 섭렵하였다. 거기에다 미국의 대통령과 국무장관을 상대로 특사자격으로 외교활동을 한 경험까지 겸비한 지도자였다.
◇ 생몰년월일 : 1875. 3.26.~1965. 7.19.(향년 90세)
◇ 출생지 : 황해도 평산군 미산면 능내동
◇ 장지 : 동작동 국립현충원
◇ 가족사항
— 전 부인 : 동갑내기 박승선(朴承善)과 1890년 결혼
*박승선은 남편의 옥중 뒷바라지 등을 하였으며, 1912년 이혼한 후 독신으로 지내다 6.25 전쟁 중 1.4후퇴를 전후해 인민군에 의해 납북되었다. 남편 이승만과의 사이에 외아들 봉수를 두었으나, 1906년 2월 미국에 건너가 머물던 중 9세 때 사망하였다고 한다.
— 영부인 : 프란체스카(Francesca Donner Rhee, 오스트리아 빈 출신, 1900.6.15.~ 1992.3.19.)
▲프란체스카 여사는 후에 “나는 이 동양신사에게 사람을 끄는 어떤 신비한 힘이 있는 것을 느꼈다.”고 회고했는데, 이때 이승만은 58세, 프란체스카는 33세로 두 사람 간에는 25년의 차이가 있었다. 이 두 사람은 곧 사랑에 빠져,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1934년 10월 미국 뉴욕에서 이승만과 결혼한다.<사진/Ohmynews>
▲ 휴식을 취하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내외<사진/대통령기록관>
*1933년 2월 프란체스카가 어머니와 스위스 여행 중에, 일본의 만주침략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국제연맹 총회 참석 차 스위스에 온 25세 연상의 이승만을 제네바의 한 호텔에서 우연히 만나, 그 이듬해인 1934년 10월에 뉴욕에서 이승만(당시 59세)과 결혼했다. 이후 프란체스카는 미국에서 충실한 비서이자 타이피스트로서 남편의 독립운동을 도왔다.
귀국 후 이 부부는 외국인을 백안시하는 주변의 시각에도 불구하고 관계가 원만했지만, 아이를 낳지 못했다. 전주이씨 양녕대군파 혈통을 중시한 이승만은 후사를 잇는데 크게 집착해, 처음에는 이강석(이기붕 국회의장의 아들)을 양자로 들였으나 3.15 부정선거 와중에 가족과 함께 동반 자살하였다. 이후 하와이 망명 중 문중의 추천으로 이인수 씨를 양자로 들였다.
* 아들(양자) : 고 이인수 교수(李仁秀, 전 명지대 법대 학장, 정치학자)
며느리 : 조혜자
◇ 종교 : 기독교
◇ 취미 : 붓글씨, 낚시
▲1957년 새해 휘호 ‘國富兵强 永世自由’(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군사력을 강화해서 영구히 자유를 누리자)<사진/화진포 이승만대통령기념관>
◇ 좌우명 : 敬天愛人(경천애인 : 하늘을 숭배하고 사람을 사랑하라)
《명 어록》
- “이젠 천하 근본이 농사가 아니라 상업이다.”(1901.4.19., 제국신문 논설 中)
- “자유를 존중하는 것은 나라를 세우는 근본이다.”(1904년, 옥중에서 쓴 '독립정신'에서)
- “공산주의는 실패한다.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이유 때문이다.”
1. 재산을 나누면 근로의욕이 꺾인다.
2. 기업가를 없애면 혁신이 이루어지지 못한다.
3. 지식인을 없애면 모든 사람이 우매해진다.
4. 종교를 없애면 도덕이 타락한다.
5. 소련을 조국으로 믿으면 배반당한다.
(1923년, 태평양잡지 '공산당의 당부당' 기고문에서)
- “우리 독립의 서광이 비치나니 일심합력으로 왜적을 파하고 우리 자유를 우리 손으로 회복합시다. 나의 사랑하는 동포여! 이 말을 잊지 말고 전파하며 준행하시오.
일후에 또 다시 말할 기회가 있으려니와 우리의 자유를 회복할 것이 이때의 우리의 손에 달렸으니 분투하라! 싸워라! 우리가 피를 흘려야 자손만대의 자유 기초를 회복할 것이다. 싸워라! 나의 사랑하는 2천 3백만 동포여!”(1942.6.13, VOA 단파방송연설 中)
- “공산주의자들은 호열자(콜레라)와 같다. 인간은 호열자와 함께 살 수 없다. (중략) 이 큰 문제를 우리 손으로 해결치 못하면 종시(終是)는 다른 해방국들과 같이 나라가 두 절분(切分)으로 나뉘어져 동족상쟁의 화(禍)를 면치 못하고, 따라서 우리가 결국은 다시 남의 노예 노릇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경향 각처에 모든 애국 애족하는 동포의 합심 합력으로 단순한 민주정체(民主政體)하에서 국가를 건설하여 만년 무궁한 자유 복락의 기초를 세우기로 결심하자.”(1945.12.19., 서울중앙방송<KBS> 연설 中)
- “내 집을 내가 사랑하고 보호하지 않으면 필경은 남이 주인 노릇을 하게 됩니다.”(1948.7.24., 초대 대통령 취임사 中)
- “민주정체의 요소는 개인의 근본적 자유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국민이나 정부는 항상 주의해서 개인의 언론과 집회와 종교와 사상 등 자유를 극력 보호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인민의 자유권리와 참정권을 다 허락하되 불량분자들이 민권 자유라는 구실을 이용하여 정부를 전복하려는 것을 허락하는 나라는 없습니다.”(1948.8.15, 대한민국정부수립 선포식 대통령 기념사 中)
- “모든 장애를 극복하여 이 정부가 ‘민주주의의 모범적 정부’임을 세계에 표명(表明)되도록 매진합시다.”(1948.8.15., 대한민국정부수립 선포식 대통령 기념사 中)
-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1950.10.27., 6.25 전쟁의 평양탈환 시민환영대회 연설 中)
- “조금만 더 견디면 전쟁이 끝난다. 전쟁이 끝나면 우리는 나라를 새로 건설해야 한다. 전후 복구와 나라를 발전시키려면 고급 교육을 받은 인재가 필요하다. 그때를 위해 대학 재학생들을 보존시켜야 한다. 아무리 욕을 먹더라도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다.
나는 정전이라는 것이 결코 싸움을 적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게 하며 고난과 파괴를 더하고 전쟁과 파괴적 행동으로 공산 측이 더욱 전진하여 오게 되는 서곡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에 정전의 조인을 반대하여 왔던 것이다.
당분간 공산 압제하에서 계속 고생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우리들의 동포들에게 우리는 다음과 같이 외친다. 동포여 희망을 버리지 마시오, 우리는 여러분을 잊지 않을 것이며, 모른 체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한국 민족의 기본목표는 계속 남아 있으며 결국 성수 되고야 말 것입니다.”
(1953.7월, 6.25 전쟁 정전협정 직후 발표한 이승만 대통령의 성명)
- “우리는 앞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이 조약으로 인해 많은 혜택을 받게 될 것이며, 이 조약은 앞으로 우리를 번영케 할 것입니다.”(1953.8.8, 한미상호방위조약 최종안이 서울에서 가조인된 후)
- “언제까지 미국이 사다 주는 비료에 의존하고 살아야 하는가. 당장 허리띠를 졸라매더라도 미국이 제공하는 원조자금으로 공장을 건설하고 기술자를 양성해서 필요한 물자를 국내에서 생산해야 우리 민족이 살아날 수 있다. 내각은 무슨 일이 있어도 미국 측과 상의하여 반드시 비료 공장을 지어라.”
(1955년, 미국에 요청한 비료 공장 건설을 거부당한 후)
- “내가 산에 올라가 나무 한 토막이라도 베는 사람은 엄벌에 처한다고 공포했지만 소용이 없어요. 다른 땔감을 만들어주고 산에 올라가지 말라고 해야 국가의 영이 제대로 서는 것이지, 지금 우리가 석탄 열심히 캐서 연료를 공급해야 사람들이 나무를 베지 않을 것이오. 내가 어떻게 하든 식량은 미국에서 끌어다 댈 테니 당신은 땔감 문제를 책임지시오. 우리 힘을 합쳐 나라를 살려봅시다.”
(1957.9.5, 정인욱 강원탄광 사장을 대한석탄공사 제6대 총재로 임명하면서)
-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지. 이 젊은 학생들은 참으로 장하다.”
(4.19 시위 소식을 듣고 병원을 방문해 다친 학생들을 보며 한 말)
-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1960.4.26., 대통령직 하야 성명 中)
- “잃었던 나라의 독립을 다시 찾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는지 우리 국민은 알아야 하며, 불행했던 과거사를 거울삼아 다시는 어떤 종류의 것이든 노예의 멍에를 메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내가 우리 민족에게 주는 유언이다.”(1965.7.19. 서거 이전에 남긴 유언)
《첫 내각 명단》
직 책 | 성 명 | 경 력 | 비 고 |
대통령 | 이승만(李承晩) | 상해임시정부 대통령, 제헌국회의장 | |
부통령 | 이시영(李始榮) | 임시정부 법무/재무총장 | 초대 내각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의 사위 |
국무총리 | 이범석(李範奭) | 광복군 참모장 | |
외무부장관 | 장택상(張澤相) | 미군정 수도경찰청장 | |
내무부장관 | 윤치영(尹致暎) | 이승만 비서실장, 민주의원 사무총장 | |
재무부장관 | 김도연(金度演) | 2․8 독립선언 투옥 | |
법무부장관 | 이인(李仁) | 항일(抗日) 변호사,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투옥 | |
국방부장관 | 이범석(李範奭) | (국무총리 겸임) | |
문교부장관 | 안호상(安浩相) | 서울대 철학과 교수 | |
농림부장관 | 조봉암(曺奉岩) | 전 조선공산당 중앙간부, 사회주의 항일운동 | |
상공부장관 | 임영신(任永信) | 독립운동가, 교육가 | |
사회부장관 | 전진한(錢鎭漢) | 항일(抗日) 노동운동가 | |
교통부장관 | 민희식(閔熙植) | 철도교통 전문가 | |
체신부장관 | 윤석구(尹錫龜) | 교육 사회운동가 | |
무임소장관 | 이청천(李靑天) | 광복군 총사령관 | |
무임소장관 | 이윤영(李允榮) | 항일(抗日) 기독교 목사 | |
총무처장 | 김병연(金炳淵) | 안창호․조만식 보좌, 항일독립운동가 | |
기획처장 | 이순탁(李順鐸) | 연희전문학교 교수, 경제학자 | 6.25전쟁 때 납북 |
법제처장 | 유진오(兪鎭午) | 보성전문학교 교수, 헌법학자 | |
공보처장 | 김동성(金東成) | 언론인, 합동통신사 사장 |
※ 경무대 비서실장 이기붕(李起鵬, 미국 유학 및 독립운동 참여)
서울특별시장 김형민(金炯敏, 미국 유학 및 광복 후 경기도 한성부윤)
▲ 1948년 8월 5일, 첫 국무회의를 마친 대한민국 초대 내각의 얼굴들.<사진/연세대 이승만연구원>
《재임기간 중 주요 사건일지(1948.7.~1952.8.)》
<1948년>
5.10. 제헌국회의원 선거(1년 후 실시된 선거에서 당선된 제주도 2명 포함)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55, 한국민주당 29, 대동청년단 12, 조선민족청년단 6, 기타 13, 무소속 85명
5.31. 제헌국회 개원 및 의장단 선출
— 국회의장 이승만(李承晩), 부의장 신익희․김동원
7. 1. 제헌국회, 「대한민국」 국호 결정
7.17. 제헌헌법 및 「정부조직법」(12부4처) 공포
7.20. 초대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李始榮) 선출(제헌국회)
7.24.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및 부통령 취임식(중앙청광장)
8. 2. 초대 국무총리 이범석 임명동의안 가결(국회)
8. 3. 초대 내각 명단 1차 발표(국방장관 이범석, 재무장관 김도연 등 8명)
8. 4. 신익희 부의장을 이승만 후임으로 국회의장에 선출(국회)
초대 내각 명단 2차 발표(외무장관 장택상, 상공장관 임영신 등 6명)
8. 5. 초대 대법원장에 김병로(金炳魯) 인준(국회)
8.15. 「대한민국」수립선포, 한글맞춤법 통일
8.16. 「남조선과도정부인수에 관한 대통령령 제1호」공포
8.19. 국회, 정부 내 친일파 숙청 긴급동의
8.24. 서울시 자동차 4,706대 등록
8.26.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
서울시 초등학교 총 학급수 2,206학급, 학생수 158,950명
9. 5. 육군․해군 창설
9. 7. 「반(反)민족행위처벌법」제정
9. 8. 최고인민회의, 북한 헌법 채택(평양)
9. 9.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수립선포(평양)
9.11. 한-미 행정권 이양협정 조인
9.14. 양곡 공출제 폐지
9.15. 주한미군 철수 시작
9.25. 단기(檀紀) 연호 시행
10. 1. 한-미 환율 1달러에 450원
10. 2. 제주도 군경비대 반란
10. 8. 이승만 대통령, 미군철수 연기 요구, 「한글전용법」 공포
10.11. 중고교 분리 6-4-2-4 학제 가결
10.13. 중고교 남녀공학제 폐지
10.14. 「지방행정조직법」제정
10.19. 이승만 대통령, 맥아더 연합군총사령관 초청으로 일본 방문
여수-순천 반란사건
10.20. 제29회 전국체육대회 개막, 첫 국산 총천연색영화 <여성일기> 상영
10.30. 대한민국항공 서울~부산 첫 취항, 전화국-전파국 신설
11. 3. 김구 선생, 미-소군 철수 후 통일정부 수립 희망 담화
11.19. 전남 구례에 무장공비 침투
11.20. 「국가보안법」제정
11.24. 「반(反)민족행위처벌법」개정
12. 1. 38선에서 국군과 북한군 간 교전
12.10. <한-미 경제원조협정> 조인
12.12. 파리 제3차 UN총회, 대한민국 정부를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48:6)
12.15. 대한민국 UN승인 경축식
12.26. 소련군, 북한 철수 발표
12.29. 미 제7사단 한국철수 발표
<1949년>
1. 1. 미국, 대한민국 정식 승인 후 무초(John R. Muccio)를 대사로 임명
ECA(경제원조처, 마셜 플랜을 위한 미 대통령 직속기관) 원조 도입
1. 4. 한-미 석유협정 조인
아침방송 개시신호 차임벨에서 닭 울음으로 변경
1. 8. 반(反)민족행위특별위원회 발족
— 최남선, 이광수, 최린, 노덕술, 최연, 이종형, 박흥식 등 구속
1.18. 영국, 대한민국 정식 승인
의무교육 6개년계획 수립
1.30. UN한국위원단 내한
2. 2. 주미대사에 장면(張勉) 임명
2. 3. UN가입 정식 요청
2. 5. 프랑스, 대한민국 정식 승인
2.19. UN한국위원단 38선 시찰
2.21. 반(反)민족행위특별위원회, 반민자(反民者) 전면 검거
3. 4. 해군 창설
3. 8. 학도호국단 결성
3.18. 장면(張勉) 주미 대사, 미국에 국군 10만 명 증강 요청
3.25. 주미대사관 개설
4. 5. 독직사건으로 임영신(任永信) 상공부장관 사임
4. 8. UN, 한국 가입안 부결
4.17. 5개년경제계획수립발표
4.29. 국정교과서 편찬규정 공포
5. 5. 해병대 창설
5.20. 국회 남로당 프락치 사건
미국 국무성, 미군철수 발표
6. 1949년 중학졸업생 24,445명 배출
6. 6. 경찰, 반(反)민족행위특별위원회 습격
6.21. 「농지개혁법」공포
6.23. 국회프락치 사건으로 국회의원 15명 구속
6.26. 김구(金九)선생, 안두희에게 피살당함
6.29. 군사고문단 제외한 주한미군 철수 완료
6.30. 조선노동당 결성(평양)
7. 1. 주한미군사고문단 발족
7. 5. 「지방자치법」공포
8. 6. 모병제(募兵制)에서 징병제로 병역법 개정
8. 8. 이승만 대통령-장개석(蔣介石) 자유중국 총통 정상회담(진해)
8.30. 최초의 국비유학생 6명 출발
9. 서울시 초등학교 입학생 33,500명
9. 5. 조선어학회, 한글학회로 개칭
10. 1.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10. 9. 왜색간판 일소운동 전개
11. 1. 재외국민 등록
12. 6. 첫 징병검사 실시
12.16. 국호(대한민국. 대한. 한국)와 지도색 녹색으로 결정
12.17. 한-일 통상협정 비준
12.31. 「교육법」공포
12. 서울시 자동차 14,557대 등록
<1950년>
1.12. 애치슨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라인> 선언
1.15. 한-일 간 무선전화 개통
1.26. 한-미 상호방위원조협정 조인
1.28. 최초의 한-일 간 무역선 조선환(朝鮮丸) 부산 입항
2.10. 한-일 간 유선전화 개통, 6-4-3-4 신학제 결정
2.13. 학기 초를 4월초로 변경
2.14. 이승만 대통령, 맥아더 연합군총사령관 초청으로 일본 방문
3. 1. 3.1절 행사 금지(평양)
3. 4. 경제안정 15원칙 발표
3.10. 농지개혁개정법 공포
3.13. 국회 1차 개헌안(내각책임제) 부결
3.27. 남로당 총책 김삼룡(金三龍), 이주하(李舟河) 검거
4. 1. 경부선 야간열차 운행
4. 6. 농지개혁 실시
4.12. 보스턴 마라톤대회 석권(1위 함기용, 2위 송길윤, 3위 최윤칠 선수)
4.24. 제1회 국전 개최
4.30. 중앙국립극장 개관
4. 1950년도 대학졸업생 3,250명
5.25. UNESCO 가입
5.30.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총 204명)
— 민주국민당 27, 대한국민당 17, 국민회 13, 대한청년단 10, 기타 13,무소속 124명
6. 1. 6년제 의무교육 실시
6.12. 한국은행 설립
6.16. 여간첩 김수임(金壽任) 사형선고
6.18. 김일성, 전군 전투태세 완료, 비밀명령 완료(평양)
6.25. 북한의기습남침으로6.25전쟁발발
6.27. UN안보리, 북한 군사제재 결의
6.28. 한강 인도교 폭파
6.29. 북한군 서울 점령
6.30. UN안보리 32개국 대한무력원조 결의
7. 1. UN군 지상부대 부산 상륙
7. 7. 국군, UN군에 편입
7. 8. 전국에 비상계엄령 선포, 대한학도의용대 결성
7.12. 국군통수권, 미군 이양
7.17. 정부, 부산으로 이전
8. 1. 낙동강 방어선 구축, 북한군과 대치
8.15. 국난극복 총궐기 대회
9.15. 인천상륙작전 성공,한국은행권 발행
9.26. 해병대, 옛 중앙청에 태극기 게양
9.28. 서울 수복
10. 1. 국군, 38선 돌파
10. 4. 동사무소에 피란민증 발급
10. 7. UN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 설치
10.19. 국제전기통신협약 가입
10.20. 국군, 평양 탈환
10.25. 중공군 참전
10.26. UN군, 압록강까지 진격
11. 9. UN참전국, 중공군 철수 요구
12. 2. UN군 평양 철수
12.24. 서울시민에 피난령
<1951년>
1. 1 서울시민 30만 명 피란, 42만 명 잔류
1. 2 간행물 사전검열제 실시
1. 3 UN한국재건단(UNKRA) 설치
1. 4 정부, 1.4후퇴로 부산으로 재 이전
1. 5 중공군, 서울 진입
1.26 해병대, 인천 상륙
2.11. 서울재수복,거창 양민학살사건
2.18. 부산 전시 연합대학 개강
3. 5. 120만 소작인에 농지 분배 발표
3.14. 국군, 중앙청에 태극기 게양
3.27 .6-3-3-4 신학제 실시
3.29. 국민방위군 사건
3.31 .국군, 38선 돌파
4. 4. 국군, 개성 진입
4.11. 미국 트루먼 대통령, 맥아더 UN총사령관 해임
4.12. 중공군 18만 명, 한국전선에 재투입
4.17. 거제도 반공포로, 강제송환에 반대 탄원
4.28. 휴전회담
5. 3. 항공우편 업무 개시
5. 9. 이시영(李始榮) 부통령 사임
5.15. 새 부통령에 김성수(金性洙) 선출
5.26. 정부, 휴전협정 반대 성명
6. 6. 서울-부산 간 전보 취급 개시, 청량리-춘천 간 철도 개통
6.10. 한강철교 준공
7. 5. 휴전반대 국토통일 국민 총궐기대회
7.10. 휴전협정 개시, 서울중앙전화국 전화교환업무 개시
7.15. 서울-부산 간 직통 여객열차 운행
8. 5. 제1회 공군사관학교 졸업식
8.16. 서울-부산 간 전화 개통
8.23. 휴전회담 결렬
9. 3. 이승만 대통령, 일본재무장 반대
9. 6. 여군 창설
9.20. 이승만 대통령, 휴전수락 4대원칙 발표
9.24. 「재정법」공포
10. 3. 한국조폐공사 설립
10.25. 휴전회담 재개
11. 6. 새 국무총리 서리(署理)에 허정(許政) 임명
11.19. 자유당 창당
11.27. 휴전회담, 전(全) 전선에 30일간 공격 정지
12.23. 자유당, 원내-원외로 분열 발족
12.25. 금발의 세계적 배우 마릴린 먼로 내한, UN군 위문공연
12.29. 지리산 공비 소탕작전 개시
<1952년>
1.18. 이승만 라인(평화선) 선포, 제2차 개헌안 대통령직선제 부결
2. 3. 중앙선 개통
2.15. 제1차 한-일 회담
2.18. 거제도 포로수용소 좌익계 폭동
2.26. 첫 외국무역선 자유중국(대만) 무역선 입항
3.27. 국내 최초 달러위조지폐 발견
4.10. 허정(許政) 국무총리 서리 사임
4.17. 국회, 제3차 개헌안 내각책임제 제출
4.21. 개헌반대 데모
4.25. 전국 시-읍-면장 선거
4.26. 국내 최초로 박사학위 6명 수여
5. 1. 경부선 복선운행 실시
5. 6. 새 국무총리에 장택상(張澤相) 인준
5. 7. 거제도 포로수용소 폭동, 미군 돗드 준장 납치
5.10. 제1차 도의원 선거
5.14. 정부, 제4차 개헌안(대통령직선+양원제) 공고
5.15. 공인기자제 철폐
5.23. 부산정치파동
5.25. 한국 사진작가협회 창설
6.25. 이승만 대통령 암살미수사건
7. 4. 제1차 개헌(소위발췌개헌)
7.19. 한강철교 복구 개통
7.22. 「문화재보호법」 제정
7.24.아시아경기연맹(AGF) 가입
8.5. 제2대 대통령 및 제3대 부통령 선거
— 대통령에 자유당 이승만, 부통령에 무소속 함태영 당선
8.15. 제2대 이승만 대통령,제3대 함태영 부통령 취임식(중앙청광장). 끝
☞ 출처 :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사(史), 2022년 발행, 현대의전연구소 발간
문의 및 연락처 : 현대의전연구소장 정현규(010-8534-4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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