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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최고층 문헌에 나타난 수행론
2. 독립된 수행체계로서의 싸띠(sati)
싸띠(sati)는 한역으로는 念으로 번역되는 말로, 우리말로는 ‘새김’(전재성, 2004), ‘알아차림’(인경스님, 2001), ‘수동적 주의집중’(조준호, 2001), ‘마음지킴’(임승택, 2001) 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번역은 번역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대부분 초기불교 문헌에 나타난 위빠싸나 행법을 중심으로 고찰한 싸띠의 용법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본 항목에서 필자는 싸띠가 위빠싸나 수행법의 용례가 아닌 독자적 수행법의 용례에 주목하여, 싸띠가 갖고 있는 또 다른 성격의 해명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43)
그럼 Suttanipāta 제4장과 제5장에 나타난 싸띠의 구체적 용례를 먼저 제시하고, 그 용례를 통해 최고층 문헌속에 나타난 싸띠의 수행론적 특징을 고찰해 보도록 하자.
모든 욕망의 대상을 피하는 사람은 발로 뱀의 머리를 밟지 않으려 [하듯이], 그는 이 세상에서 바르게 자각하고 이 애착을 넘어선다.(Sn. 768)44)
그래서 사람은 항상 바르게 자각하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피하고, 그것들을 버리고, 배에 스며든 물을 퍼내 피안에 도달하듯, 거센 물결을 건너야 한다.(Sn. 771)45)
평정하여 언제나 바르게 자각하고,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과] 동등하다, 뛰어나다, 열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번뇌의] 특성이 존재하지 않는다.(Sn. 855)46)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나는 생각하고 있다’고 하는 망상의 사유의 뿌리를 모두 파괴하십시오. 안으로 어떠한 갈애도 그것들의 제어를 위해서, 항상 바르게 자각하고 배우십시오.(Sn. 916)47)
이러한 가르침을 잘 이해하고 나서, 비구는 깊이 숙고하고, 항상 바르게 자각하고 배우십시오. [모든 번뇌의] 소멸이 적정이라고 잘 알아서, 고따마의 가르침에 대해서 방일해서는 안 됩니다.(Sn. 933)48)
또한 게다가 이 세상에 다섯 가지 티끌이 [있으니], 바르게 자각함을 갖추고 그것들의 제어를 위해서 배워야 한다. 형체, 소리, 또한 맛, 냄새, 감촉에 대한 탐욕을 이겨내어야 한다.(Sn. 974)49)
“바르게 자각함을 갖추고 잘 해탈된 마음을 지닌 비구는 이 현상들에 대한 욕망을 제어해야 한다. 그는 적당한 때에 바르게 가르침을 깊이 생각하고, 마음을 통일하여 암흑을 제거해야 한다.”고 세존께서 [말씀하셨다].(Sn. 975)50)
진리에 대한 사색을 선행으로 하는 평정과 바른 자각에 의한 청정이 해탈적 지혜에 의한 해탈이며, 무명의 파괴라고 나는 설합니다.(Sn.1107)51)
안으로도 밖으로도 [즐거움과 괴로움의] 감수를 즐거워하지 않는 사람, 이렇게 바르게 자각하고 행하는 사람에게는 의식작용은 소멸합니다.(Sn. 1111)52)
모가라자여, 공의 입장에서 세상을 관찰하시오. 항상 바르게 자각하고, 자아에 대한 견해를 버리고 관찰하십시오. 이렇게 [하면] 죽음을 건널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세계를 관찰하면, 죽음의 왕은 보지 못합니다.(Sn. 1119)53)
이상이 Sn.의 제4장과 제5장에 나타난 싸띠의 주요한 용례들이다. 이들 용례에서 싸띠의 단어 형태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먼저 sati라는 명사형이 아닌, sarati(√smṛ)의 과거분사형인 sata가 주로 사용되고 있음이 눈에 띈다. 그리고 형용사인 satimā(satimant의 단수 주격형)의 용례가 있다. 그러나 sati라는 명사형으로 쓰인 용례는 1107게송 밖에 없는 점이 두드러진다.
게송의 번역에서, 필자는 싸띠(sata)를 ‘바르게 자각(自覺)하다(sato)’로 번역했다.54) 이렇듯, 동사적 의미를 살려서 번역한 이유는 싸띠가 명사가 아닌 sata라고 하는 분사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분사로 쓰였다는 것은 전문적 술어로 정착하기 이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는 최고층 문헌에서는 싸띠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지만, 아직 확고하게 개념이 정립된 단계는 아니라는 것을 추측케 한다.
또한 최고층 문헌의 싸띠는 집착 내지 갈애와 같은 번뇌를 제어, 혹은 소멸하는 힘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쓰임새를 보면 싸띠는 대부분 욕망의 대상(kāma, 768, 771),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마음(771), 갈애(916), 다섯 가지 티끌(974), 욕망의 제어(975) 등과 같이 쓰이고 있다. 또한 선정의 요소로서도 사용되고 있음을 본다. 즉 4선정과 관련해서는 1107게송, 무소유정과 관련해서는 1111게송 등이 관련된다.55)
따라서 최고층 문헌에서 싸띠는 크게 두 가지의 용법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제 번뇌와 관련해서, 번뇌들을 제어, 통제, 소멸하는 기능으로서의 용법이며,56) 둘째는 선정의 구성 요소로서 해탈과 관련한, 혹은 해탈지와 관련한 용법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특히 첫 번째 용법은 싸띠가 독자적인 수행방법으로서 설해지고 있음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싸띠의 성격에 대해서 언급하기로 한다. 싸띠를 ‘바르게 자각하다’ 혹은 ‘바르게 알아차리다’의 의미로 파악하고 있음은 이미 언급했다. 여기에서 ‘바르게’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이것에 대한 논의는 싸띠의 성격을 밝히는데 매우 중요하다. 우선 학자들의 싸띠의 성격에 대한 논의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1) 조준호 : 일상적인 사유와 감정의 흐름이 완전히 쉬었을 때 드러나는 의식 상태 또는 마음의 상태57)
(2) 임승택 : 특정한 대상을 지속적으로 관찰하거나(anupassī) 따라가는 것(anugacchanā)으로서 마음의 방황을 멈추게 하는 것58)
(3) 인경스님 : sati의 성격은 ‘알아챔’과 ‘대상에의 주목’이라는 두 성격으로 설명된다. 대상에 대한 주목은 그것을 기억하여 붙잡는 의지적인 행위의 측면이라면, 알아챔은 그것의 변화에 주목하여 관찰하는 인지적인 측면이다.59)
(4) 전재성 : 새김을 실천하는 것은 마음이 활동을 일으키지 않고 평정하게 하는 것이다. 모든 의도나 사유는 직접적인 체험을 방해하는 장애로서 작용한다. 이러한 것이 소멸됨으로써 새김 속에서 대상은 있는 그대로 나타난다. 그렇다고 해서 새김은 그냥 수동적인 관찰로 머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새김은 강력한 기능을 발휘한다.60)
(5) 후지모토 아끼라 : sati는 판단 없이 있는 그대로 어떤 것을 지각하는 것을 의미한다.61)
이상에서 대상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지각을 강조한 견해로는 (4), (5)를 들 수 있고, 관찰의 측면을 강조하는 것으로는 (2), (3)을 들 수 있다. (1)의 경우는 (4), (5)와 더 유사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상의 내용을 바탕으로 Sn.의 게송에서 sati의 성격을 고찰해 보도록 하자. 우선 게송 1111의 경우 ‘안으로도, 밖으로도 즐거움과 고통의 느낌을 즐기지 않는 자, 이렇게 바르게 자각하고 행하는 사람에게는 의식작용은 소멸한다.’고 하여, 싸띠란 안으로든 밖으로든 즐거움과 고통과 같은 느낌에 흔들림 없이, 바르게 있는 그대로 자각하고, 관찰하는 것임을 설하고 있다. 또한 ‘의식 작용은 소멸한다.’라고 하는 것을 통해 싸띠에는 분별작용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제 번뇌와 관련된 게송은 번뇌들의 속성을 있는 그대로 자각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Sn.의 게송을 통해서 지지될 수 있는 싸띠의 성격은 위의 다섯 견해 가운데 (4), (5)의 정의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정리하자면, 싸띠는 비판단적 작용이지만, 대상에 대한 왜곡없는 있는 그대로의 자각을 통해 심리상태의 평정을 가능케 하고 대상에 대한 바른 앎을 제공하는 성격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 각주
42) 여기에서 sati를 어떻게 번역하면 좋을지 생각해 보기로 한다. PTSD(s.v., sati)에서는 sati의 어근을 √smṛ라고 밝히고 있다. 즉, ‘기억하다’란 의미가 기본적인 의미로서 제공되고 있다. 이 기본적인 의미에서 ‘recognition, consciouness, intentness of mind, wakefulness of mind, mindfulness’ 등의 의미가 파생된다. 이 가운데에서 영역에서는 일반적으로 ‘mindfulness(주의깊음, 유의)’가 쓰이고 있다. 中村元(2002, 174면)과 田中教照(1993, 15면)은 모두 ‘잘 주의해서’로 번역하고, 荒牧典俊(1986, 274면)은 ‘있는 그대로 지금 여기의 존재를 자각하면서’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並川孝儀(2005, 87면)는 ‘바른 자각’을 제안하고 있다.
한편, 한역으로서는 일반적으로 ‘念’이란 역어가 사용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大念處経(Mahāsatipaṭṭhāna Suttanta)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또한 paṭṭhāna가 sati와 함께 복합어로서 사용될 경우에는, ‘확립(setting up)’의 의미가 된다. 즉 ‘sati의 확립’이란 의미가 된다.(중앙승가대학, 2006, 11면) 이외의 한역어로서는 憶念·持念·守意·意止등의 역어가 사용되고 있다.(임승택, 2001, 14면) 또한, Akira Hujimoto(2006, 1172면)는 “sati에는 언제나 명확한 자각(sampajāna)이 뒤따른다. 대상의 순간을 지각하고, 주의를 기울일 때에는, 언제나 있는 그대로 지각하는 것이 가능하며, 또한 지각하는 그 행위에 대해 완전하게 자각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는 인경스님(2001, 95면)의 이해방식과 일치한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Gethin(1992, 32)은 “나는 sati가 의미하는 것이 마음에 ‘가까이 서는’ 혹은 ‘봉사하는’ 마음의 특질로서 이해한다. 이것은 마음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이다.”라고 말하여, 사띠가 마음을 받쳐주는 역할을 하면서도, 언제나 감시하는 것으로서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국내의 학자들은 번역어를 보면, 먼저 김열권은 ‘관찰’, ‘마음집중’, ‘알아차림’ 등으로 번역하였으며, 정원스님은 ‘마음 챙김’으로, 송위지는 ‘주의깊음’으로, 조준호(2000·2001)는 ‘수동적 주의집중’, 임승택(2001, 21ff)은 ‘마음지킴’으로 번역할 것을 제안하고 있으며, 인경스님(2001, 95면)은 ‘알아챔’과 ‘대상에의 주목’이란 두 측면에서 사띠를 설명하고 있다. 전재성(2004, 104면 각주282)은 ‘올바른 새김’으로 번역하고 있다. 또한 그는 “새김을 실천하는 것은 마음이 활동을 일으키지 않고 평정하게 하는 것이다. 모든 의도나 사유는 직접적인 체험을 방해하는 장애로서 작용한다. 이러한 것이 소멸됨으로써 새김속에서 대상은 있는 그대로 나타난다. 그렇다고 해서 새김은 그냥 수동적인 관찰로 머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새김은 강력한 기능을 발휘한다. … 이처럼 강한 새김을 수반하는 마음은 대상의 겉모습 속에서 떠돌지 않고 대상에 머물러 대상의 속성 속으로 깊이 침투해서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통찰하는 기반을 제공한다.”고 새김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조준호의 견해와 상반되는 것이며, 임승택과 인경스님의 견해와 가까운 것으로 평가된다. 한편 김준호(2008)는 그의 박사 논문에서 ‘운문경전에 나타나는 사띠의 다의성’이란 말로 어떤 하나의 측면에서 sati를 해석/이해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그는 크게 4가지 측면에서 sati의 의미를 파악한다. (1)명심과 마음 가다듬기 (2)止와 觀의 토대로서의 사띠 (3)주의집중 (4)사띠와 그 밖의 수행도. 따라서 그는 sati를 해석하지 않고 우리말로 ‘사띠’라고 음사하고 있다. 뜻을 취해 번역하게 되면 다의성이 담보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43) 이 부분은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2007)에서 언급한 적이 있으며, 아울러 「아라한 개념과 발전」(2008)에서도 간단히 다룬 적이 있다. 또한 김준호(2008)의 박사학위 논문에서도 독립적인 수행법이란 측면의 고찰이 행해졌다.
44) Yo kāme parivajjeti sappasseva padā siro, so imaṃ visattikaṃ loke satosamativattati.
45) tasmā jantu sadā sato kāmāni parivajjaye te pahāya tare oghaṃ nāvaṃ sitvā vapāragu ti.
46) Upekkhako sadā sato na loke maññate samaṃ na visesī na vīcceyo tassa nosanti ussadā.
47) mūlaṃ papañcasaṅkhāyā ti Bhagavā mantā asmī ti sabbam uparundhe yā kācitaṇhā ajjhattaṃ tāsaṃ vinayā sadā sato sikkhe.
48) etañ dhammam aññāya vicinaṃ bhikkhu sadā sato sikkhe santī ti nibbutiṃñatvā sāsane Gotamassa nappamajjeyya.
49) athāparaṃ pañca rajāni loke yesaṃ satīmā vinayāya sikkhe rūpesu saddesuatho rasesu gandhesu phassesu sahetha rāgaṃ.
50) etesu dhammesu vineyya chandaṃ bhikkhu satīmā suvimuttacitto kālena sosamma dhammaṃ parivīmaṃsamāno ekodibhūto vihane tamaṃ so ti Bhagavāti. ekodibhūta는 4선정 중 제2선에 나오는 ekodibhāva란 용어와 단어의 구성에 있어서 동일하다. 이 두 단어는 eka-odhi-√bhū로 분해될 수 있다. odhi는(=avadhi)는 ‘putting down, fixing’(PTSD., s.v., odhi)이란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하나에 고정된 상태’란 의미가 된다. 또한 이 단어는 4선정에 나오는 ekaggatā의 의미와도 관련해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부분은 본 항목과는 상관없는 내용이기에 그에 대한 논의는 생략하기로 한다.
51) upekkhāsatisaṃsuddhaṃ dhammatakkapurejavaṃ aññāvimokhaṃ pabrūmiavijjāya pabhedanaṃ. upekkhāsatisaṃsuddhaṃ의 번역과 관련해서, T.Vetter(1988, xxvi, no.9)는 유익한 해석을 제공하고 있다. 이 내용은 졸고(2007, 각주29) 「아라한 개념의 발전과 전개」를 참조하라. 본 각주에서는 여러 학자들의 해석을 비교해 볼 수 있도록 소개하도록 한다.
中村元(2002, 234면)는 “평정한 마음의 상태와 생각(念い)의 청정함-그것들은 진리에 관한 사색에 근거해서 일어나는 것이지만”이라고 번역하고 있고, 荒牧典俊(1986, 365면)는 “근본의 무지를 타파해서 진리를 직접 아는 것에 의해서 해탈하여 자유롭게 되는 것은, 우선 먼저 여러 가지로 진리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것이 있고 …”고 번역하고 있다. 전재성(2004, 511면)은 “평정과 새김으로 청정해지고 가르침에 대한 탐구가 앞서가면…”으로 번역하고 있다. 나카무라와 아라마키는upekkhā-sati-saṃsuddha는 진리에 관한 사색 이후에 일어나는 상태로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나, 전재성의 경우는 ab구의 관계가 동등관계로서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즉 a구를 b구의 결과로서 보고 있지 않은 듯하다. 조준호(2001, 62면)는 “완전한 평정심에 이르러 sati가 맑고 깨끗해지는 완성에 도달한다.”로 복합어의 의미를 파악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는 복합어에 대한 정확한 번역을 제시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김준호(2008, 97면)는 ‘捨와 念으로 청정해지고, 법에 대한 사색을 기반으로 하여 지혜에 의한 해탈이요, 무명을 부수는 것이라고 나는 말하리’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말대로 제4선의 원형적인 모습을 잘 드러내주는 게송이다. 그렇기에 ‘사와 염으로 청정해지고, 법에 대한 사색을 기반으로 하여’란 번역은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제4선의 특징은 이미 사색을 초월한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본 게송에서 말하는 지혜는 결코 법에 대한 사색을 기반(혹은 원인)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捨와 念으로 청정해진 상태에서 발현되는 지혜로 보아야 한다.
52) ajjhattañ ca bahiddhā ca vedanaṃ nābhinandato evaṃ satassa carato viññāṇaṃuparujjhatī ti.
53) suññato lokaṃ avekkhassu Mogharāja sadā sato attānudiṭṭhiṃ uhacca evaṃmaccutaro siyā evaṃ lokam avekkhantaṃ maccurājā na passatī ti.
54) ‘바르게 자각하다’는 ‘바르게 알아차리다’와 같다. 사실 ‘바르게 자각하다’란 번역은 荒牧典俊(1986)와 並川孝儀(2005)의 번역이다. 아라마끼는 ‘あるがままにいまここの存在を自覚する(있는 그대로 지금 여기에 있는 존재를 자각하다)’로 번역하고 있다. 나미까와 역시 아라마끼의 번역과 거의 같다. 이것은 싸띠의 성격을 논할 때 주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 내용은 본론에서 언급하기로 한다.
55) 4선정이란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지만, 표현상의 편의 때문에 4선정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그리고 무소유정과 관련된다고 보는 다른 게송(1070 등)에서도 역시 싸띠(satīmā)가 등장한다.
56) 田中教照(1993, 16면)는 “ ‘심층의 욕망’인 갈애조차도 ‘주의하는 것’(念sata)에 의해서 제어된다고 하는 교설이 설해지고 있는 것으로 부터, ‘심층의 욕망을 멸진시켜 윤회의 홍수로부터 참으로 해탈해서 자유롭게 되기 위한 석존 독자’의 수행이 ‘선정수행’이었다는 것은 단정할 수 없을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17면에서는 “이러한 점에서 보면, ‘선정수행(jhānānuyutta)’보다 ‘念’(sata)이 수행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荒牧典俊과 中村元、村上真完의 석존 당시부터 선정에 근거한 수행이 강조되었다(14-15면)고 하는 해석에 대한 반론이다. 그러나 그는 선정의 수행이 Sn.의 제4장과 제5장에서 적극적으로 설해지고 있음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선정 수행을 석존 독자의 수행으로서는 인정하고 있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1098게송의 nekkhamma와 같이 색계 사선을 연상시키는 것과, 1107게송의 upekkhāsatisaṃsuddhaṃ과 같이 제4정려를 나타내는듯한 표현을 보면, 붓다는 당시 유행하고 있던 선정수행과는 다른 독자의 정려(선정)수행을 가르쳤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분명히 Sn.의 제4장과 제5장에서는 사띠가 매우 중요시되고 있지만, 반면 정려(선정)수행의 체계속에서, 이미 정착해 있었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는 없을 듯하다.
57) 조준호(2000, 337면). 조준호의 논문은 이후 한국에서 싸띠논쟁의 촉발점이 되었다. 그는 싸띠를 ‘수동적 주의집중’이라고 번역하였다. 그리고 인용과 같이 싸띠를 정의한 것은 사선에서 언어적 작용이 완전히 지멸하는 제3선 이후에 싸띠가 등장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적어도 초기경전 내에서 싸띠는 제3선부터 등장하고 있음은 명확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주장에 필자 역시 동의하는 바이다. 다만 ‘수동적 주의집중’이라고 하는 번역에는 동의하기 힘들다.
58) 임승택(2001, 25면).
59) 인경(2001, 95면).
60) 전재성(2004, 104면 각주282).
61) Akira Hujimoto(2006, 1172면). 후지모또의 싸띠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기본적으로 Bhante Henepola Gunaratana, Mindfulness in Plain English(Boston : Wisdom Publishing, 2002)의 견해에 근거한다. 그는 싸띠의 가장 큰 특징으로 ‘비판단적 관찰’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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