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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덕자德者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이 일삼는 바를 얻었던) 덕스러움(德; 仁·義)은 (비유컨대 몸의) 안쪽(內; 性·命·道·德·自然·無爲)에서 생겨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세상 사람들이 일삼는 바를) 얻는 바(得; 仁·義·德)는 (몸) 바깥(外; 有爲)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따라서 노자는 일컬었다) “아주 먼 옛날의 (사람들이 일삼는 바를 얻었던 무위無爲의 수준이 높은) 덕스러움德은 (지금의 세상 사람들이 일삼는 바를 얻는 유위有爲의 수준이 높은) 덕스러움德이 아니다.” 이른바,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이 일삼는 바를 얻었던 덕스러움德) 그것은 (무위無爲가) 신령스러운 바로서, (몸의) 바깥에 대해 어지럽지 않았다. (이른바,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이 일삼는 바를 얻었던 덕스러움德은 무위無爲가) 신령스러운 바로서, (몸의) 바깥에 대해 어지럽지 않았는데, 따라서 (그들의) 몸은 (성性·명命대로 오래 사는 바가) 오롯했다. (이른바, 아주 먼 옛날 사람들의) 몸은 (성性·명命대로 오래 사는 바가) 오롯했는데, (그들의 몸이 그렇게 되었던 까닭) 그것은 이른바 (그들이 일삼는 바를 얻었던) 덕스러움德(이 무위無爲가 신령스러운 바였기 때문)이었다. (이른바,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이 일삼는 바를 얻었던 무위無爲가 신령스러운) 덕스러움德은 (그들에게 성性·명命대로 오래 사는 바가 오롯한) 몸을 얻게 했다. 〔따라서 노자는 일컬었다. “따라서 (유위有爲가 신령스러운 덕스러움德을 일삼는 바를 얻는 지금의 세상 사람들은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이 얻었던 무위無爲가 신령스러운) 덕스러움德을 얻어야 한다是以有德.”〕
德者, 內也. 得者, 外也. 上德, 不德. 言其, 神, 不淫於外也. 神, 不淫於外, 則身全. 身全, 之, 謂德. 德者, 得身也.
이른바, (아주 먼 옛날의 사람들이 일삼는 바를 얻었던) 덕스러움德은 무위無爲했는데, 따라서 (그들은 저절로 그러하게 성性·명命대로 오래 사는 바로) 모여들었고, 일부러 일삼고자 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었는데, 따라서 (그들은 저절로 그러하게 성性·명命대로 오래 사는 바가) 이루어졌으며, (일부러 일삼아) 헤아리지 않았는데, 따라서 (그들은 그러하게 성性·명命대로 오래 사는 바가) 안정되었고, 일부러 일삼지 않았는데, 따라서 (그들은 저절로 그러하게 성性·명命대로 오래 사는 바가) 굳세어졌다. (그러나 지금의 세상 사람들이 일삼는 바를 얻는 덕스러움德은 유위有爲) 그것을 일삼고, 그것을 일삼고자 한다. 따라서 (지금의 세상 사람들이 일삼는 바를 얻는) 덕스러움德은 (유위有爲를) 내버리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다. (이른바, 지금의 세상 사람들이 일삼는 바를 얻는) 덕스러움德은 (유위有爲를) 내버리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데, 따라서 (그들은 저절로 그러하게 성性·명命대로 오래 사는 바가) 오롯하지 못하다. (이른바, 지금의 세상 사람들이 일삼는 바를 얻는 덕스러움德은 유위有爲) 그것을 일삼고, 그것을 헤아리는데, 따라서 (그들은 저절로 그러하게 성性·명命대로 오래 사는 바가) 굳세지 못하다. (이른바, 지금의 세상 사람들은 저절로 그러하게 성性·명命대로 오래 사는 바가) 굳세지 못한데, 따라서 (그들은 저절로 그러하게 성性·명命대로 오래 사는) 공능(功能; 功)을 가지는 바가 없다. (따라서 지금의 세상 사람들이 저절로 그러하게 성性·명命대로 오래 사는) 공능(功能; 功)을 가지는 바가 없는 바는 이른바 (유위有爲를 일삼고, 일삼고자 하며, 유위有爲를 일삼고, 헤아리는, 이른바 그들이 바를 얻는) 덕스러움德에서 생겨난다. (지금의) 덕스러움德은 이른바 (아주 먼 옛날의 무위無爲의 수준이 높았던) 덕스러움德을 가지는 바가 없다. (따라서 지금의 덕스러움德은 아주 먼 옛날의) 덕스러움德이 아니다. 따라서 (지금의 덕스러움德은 아주 먼 옛날의) 덕스러움德을 가지는 바가 있는 바에 자리해야 한다. 따라서 (노자는 일컬었다) “아주 먼 옛날의 덕스러움上德은 (지금의) 덕스러움德이 아니다. 따라서 (지금의 덕스러움德은 아주 먼 옛날의) 덕스러움德을 가지는 바가 있어야 한다.”
凡德者, 以無為集, 以無欲成, 以不思安, 以不用固. 為之欲之. 則德, 無舍. 德, 無舍, 則不全. 用之思之, 則不固. 不固, 則無功. 無功, 則生於德. 德, 則無德. 不德. 則在有德. 故曰: 上德, 不德. 是以有德.
해 설
위 두 문단에서 한비자韓非子는 첫째 『노자』의 도道, 덕스러움德, 자연自然, 무위無爲, 성性, 명命을 분별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한비자韓非子에게 있어서, 『노자』의 도道=덕스러움德=자연自然=무위無爲=성性=명命이다. 둘째, 한비자韓非子는 “상덕上德”의 상上 자를 ‘아주 먼 옛날’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셋째, 한비자韓非子는 인仁·의義를 성性·명命에 근거하는 것과 규범·제도에 근거하는 것으로 분별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한비자韓非子에게 있어서, 인仁·의義는 무위無爲한 자연의 질서와 유위有爲한 당위의 질서로 양분된다.
신神은 무위無爲가 신령스럽다는 말로서, 무위無爲의 정도가 크다, 많다, 넓다, 깊다, 아득하다, 그윽하다, 무위無爲의 수준이 높다는 뜻이자, 유위有爲에서 떨어져 있다, 멀어져 있다, 유위有爲가 어렴풋하다, 어슴푸레하다는 뜻이다.
이른바, 무위(無爲;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와 무사(無思; 일부러 일삼아 헤아리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를 귀하게 여기는 바로써, (유위有爲를) 텅 비웠던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은 이른바 그 마음(意; 心)이 (무위無爲를 텅 비우는 바를) 베어내거나 잘라내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었다. 이른바, (그 마음이 유위有爲를 일부러 일삼는) 꾀(術; 欲)를 가지는 바가 없었던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은 따라서 무위無爲와 무사無思로써, (그 마음의 유위有爲를) 텅 비웠다. 이른바, 따라서 무위無爲와 무사無思로써 (그 마음의 유위有爲를) 텅 비웠던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은 그 마음이 늘 그러하게 (유위有爲를) 텅 비우는 바를 잊어버리지 않았는데, 따라서 (그 마음이 늘 그러하게 무위無爲를) 텅 비우는 바를 일삼는 바를 베어내거나 잘라냈다. (유위有爲를) 텅 비웠던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은 이른바 그 마음이 (무위無爲를 텅 비우는 바를) 베어내거나 잘라내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세상 사람들)은 (그 마음이 유위有爲를) 텅 비우는 바를 일삼는 바를 베어내거나 잘라내는데, 따라서 (그 마음이 유위有爲를) 텅 비우지 못한다.
所以貴無為無思為虛者, 謂其意, 無所制也. 夫無術者, 故以無為無思為虛也. 夫故以無為無思為虛者, 其意, 常不忘虛, 是制於為虛也. 虛者, 謂其意, 無所制也. 今, 制於為虛, 是不虛也.
(이른바,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은 그 마음이 유위有爲를) 텅 비우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무위無爲했다. (따라서 그들은 무위無爲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無; 有爲)로써 일삼지 않았다. (이른바, 그들은 일삼음에 있어서, 무위無爲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가 늘 그러한 바가 되는 바를 일삼았다. (이른바, 그들은 일삼음에 있어서, 무위無爲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로써 일삼지 않은 채, (무위無爲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가 늘 그러한 바가 되는 바를 일삼았는데, 따라서 (그들은 일삼음에 있어서, 유위有爲가) 텅 비었다. (이른바, 그들은 일삼음에 있어서, 유위有爲가) 텅 비었는데, 따라서 (그들은 일삼음에 있어서) 덕스러움(德; 無爲)이 가득 찼다. 덕스러움(德; 無爲)이 가득 찬 바, 그것이 이른바 아주 먼 옛날의 덕스러움上德이었다. 따라서 (노자는) 일컬었다. “아주 먼 옛날의 덕스러움上德은 무위無爲했다.” 따라서 (아주 먼 옛날의 덕스러움上德은) 일삼지 못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었다.
虛者. 之, 無為也. 不以無為. 為有常. 不以無為, 為有常, 則虛. 虛, 則德盛, 德盛, 之, 謂上德, 故曰: 上德, 無為. 而無不為也.
인仁은 이른바 그 마음(心; 性·命)의 가운데 자리하는 바로서, 다른 사람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아끼는 바이다. (따라서) 그 다른 사람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아끼는) 사람은 복福을 (받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게 되고,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을 아끼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화禍를 (당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게 된다. (그런데 아주 먼 옛날의 인仁은 다른 사람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아끼는) 마음과 (더불어) 살았고, (따라서) 이른바 (다른 사람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아끼는 바를) 멈출 수가 없었지만, 그(에 따른) 보답을 구하지 않았다. 따라서 (노자는) 일컬었다. “아주 먼 옛날의 인仁은 (무위無爲로써 세상 사람들) 그들을 일삼았다. 이른바, (아주 먼 옛날의 인仁은 유위有爲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로써 (세상 사람들을) 일삼았다.”
仁者, 謂其中心, 欣然愛人也. 其喜人之, 有福, 而惡人之, 有禍也. 生心, 之, 所不能已也, 非求其報也. 故曰: 上仁, 為之. 而無以為也.
의義는 임금이 신하로부터, 위가 아래로부터 섬겨지게 하는 바이다. 부모와 자식,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이 (섬겨지는 사람과 섬기는 사람, 받들어지는 사람과 받드는 사람으로) 갈라지게 하는 바이다. 아는 사람과 사귀는 사람, 벗과 벗이 어우러지게 하는 바이다. 친한 사람과 멀어진 사람이 안으로 들여지거나 밖으로 밀쳐지게 되는 바가 나누어지게 하는 바이다. (이른바)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은 마땅하다. 아래가 위를 높이는 것은 마땅하다.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 것은 마땅하다. 천한 사람이 귀한 사람을 받드는 것은 마땅하다. 아는 사람과 사귀는 사람, 벗과 벗이 서로 돕는 것은 마땅하다. 친한 사람이 안으로 들여지고, 멀어진 사람이 밖으로 밀쳐지는 것은 마땅하다. 의義는 이른바 그 (마음의 가운데 자리하는 바로서, 그러한 바를) 마땅하게 여기는 바이다. (이른바, 무위無爲는) 마땅한 바이다. 따라서 (무위無爲) 그것을 일삼아야 한다. 따라서 (노자는) 일컬었다. “아주 먼 옛날의 의義는 (무위無爲로써 세상 사람들) 그들을 일삼았다. 이른바, (아주 먼 옛날의 의義는 무위無爲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로써 (세상 사람들을) 일삼았다.”
義者, 君臣上下之, 事. 父子貴賤之, 差也. 知交朋友之, 接也. 親疏, 內外之, 分也. 臣事君, 宜. 下懷上, 宜. 子事父, 宜. 賤敬貴, 宜. 知交友朋之相助也, 宜. 親者內, 而疏者外, 宜. 義者, 謂其宜也. 宜. 而為之. 故曰: 上義, 為之. 而有以為也.
예禮, 이른바 따라서 (마땅하게 여기는) 마음(情; 義)을 모양으로 드러내게 된다. 모든 의義가 (이른바 따라서) 겉무늬(文; 貌)로 드러나게 된다. 임금과 신하, 부모와 지식이 (이른바 따라서 더불어) 어우러지게 된다.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 똑똑한 사람과 똑똑한 사람을 닮지 못한 사람이 이른바 따라서 (더불어) 나뉘게 된다. (예컨대, 아래의) 마음이 (위를) 높이는 바(懷; 義)의 가운데 자리하더라도, (위는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따라서 (아래는) 재빨리 달려가 (위에게) 엎드리고 절해야 하는데, 따라서 (위가) 그것에 대해 밝아지게 된다. (자신의) 마음이 (상대를) 사랑하는 바를 (가운데) 가득 채우더라도, (상대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따라서 좋아한다는 말을 자주 건네야 하는데, 따라서 (상대가) 그것을 믿게 된다. (요컨대) 예禮는 (의義) 그것을 밖으로 마디(節; 文) 지우는 바이고, 이른바 따라서 (그) 안(內; 義)이 (밖으로) 깨우쳐지(고 알아차려지)게 된다. 따라서 (노자는) 일컬었다. “예禮는 이른바 (마땅하게 여기는) 마음(情; 義)을 모양으로 드러내는 바이다.”
禮者, 所以貌情也. 群義之文章也. 君臣父子之交也. 貴賤賢不肖之所以別也. 中心懷, 而不諭. 故疾趨卑拜, 而明之. 實心愛, 而不知. 故好言繁辭, 以信之. 禮者, 外節之, 所以諭內也. 故曰: 禮, 以貌情也.
이른바, (지금의) 세상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마땅하게 여긴 채) 일삼는 바(動; 禮·有爲)를 (쫓아서) 일삼는다. (이른바, 지금의)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마땅하게 여기는 바인 의義가 모양으로 드러나는 바인) 예(禮; 無爲)를 일삼아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이른바, 이것이 지금의) 세상 사람들이 일삼는 예禮이다. 이른바, (지금의 세상 사람들이 일삼는 예禮는) 다른 사람들이 일삼는 예禮를 높이는 예禮이다. 따라서 (지금의 세상에서) 점점 (유위有爲가 신령스러운 예禮가) 많아지게 되었으며, (지금의 세상에서) 점점 (무위無爲가 신령스러운 예禮가) 사라지게 되었다. (이른바)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이 일삼는 바를 얻었던) 예禮는 (무위無爲가) 신령스러웠다. 이른바,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은 (무위無爲가 신령스러운 예禮를) 마음에 품었다. 따라서 (유위有爲가 신령스러운 예禮가 그들과) 더불어 어우러질 수 없었다. (이른바, 유위有爲가 신령스러운 예禮가 그들과) 더불어 어우러질 수 없었는데, 따라서 (노자는) 일컬었다. “아주 먼 옛날의 예禮는 (무위無爲가 신령스러운 바로써, 세상 사람들) 그들을 일삼았다. 따라서 (유위有爲가 신령스러운 예禮) 그것이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어우러지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의) 세상 사람들은 이른바 (유위有爲가 신령스러운 예禮를) 마음에 품는다. 따라서 (지금의) 성인은 (무위無爲를) 섬기고 받들며, (무위無爲를 일삼는 바를 끝점까지) 다하고, (무위無爲를 일삼는 바를 얻는 데) 손을 쓰고 발을 썼던 (아주 먼 옛날의 무위無爲가 신령스러웠던) 예禮를 돌이킨다. (따라서 지금의 세상에서 무위無爲가 신령스러웠던 아주 먼 옛날의 예禮가) 사라지지 않게 한다. 따라서 (노자는) 일컬었다. “(따라서 지금의 성인은) 팔을 걷어붙인 채, 세상 사람들을 (무위無爲가 신령스러웠던 아주 먼 옛날의 예禮로) 끌어당긴다.”
凡人之, 為外物動也. 不知其, 為身之禮也. 眾人之, 為禮也. 以尊他人也. 故時勸, 時衰. 君子之為禮. 以為其身, 以為其身. 故神之, 為上禮. 上禮, 神. 而眾人, 貳. 故不能相應. 不能相應, 故曰: 上禮, 為之. 而莫之應. 眾人, 雖貳. 聖人之, 復恭敬盡手足之禮也. 不衰. 故曰: 攘臂, 而仍之.
도道는 (저절로 그러하게 자리하고 일삼는 공능이) 쌓인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이고, 덕스러움德은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이 자리하고 일삼는) 공능을 (쌓인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이다. (따라서 도道는 자연自然한 공능이고, 덕스러움德은 무위無爲한 공능이다. 그런데 자연自然한 공능은 무위無爲한 공능을 뜻하고, 무위無爲한 공능은 자연自然한 공능을 뜻한다. 따라서 도道는 덕스러움德의 공능이 되고) 덕스러움德은 도道의 공능이 된다. (따라서 자연自然한) 공능(이 빛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道)은 (무위無爲한 공능이) 가득 찬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德가 되고, (자연自然한 공능이) 가득 찬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道는 (무위無爲한 공능이) 빛나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德가 된다. (이른바) 인仁은 덕스러움(德; 無爲)이 빛나는 바이다. (이른바, 덕스러움德·無爲이) 빛나는 바仁는 (무위無爲에게) 젖어 드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게 되고, (무위無爲에게) 젖어 드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게 되면, (무위無爲로써)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게 된다. (이른바) 의義는 (인仁이 마음이 다른 사람을 기쁘게 여기고, 아끼는 바를 무위無爲로써)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이다. (이른바, 인仁이 마음이 다른 사람을 기쁘게 여기고, 아끼는 바를 무위無爲로써)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義는 (마음이 마땅하게 여기는 바를 무위無爲로써 일삼는 겉무늬인) 예禮를 가지는 바가 있게 되고, 예禮는 (마음이 마땅하게 여기는 바를 무위無爲로써 일삼는 의義의) 겉무늬를 가지는 바가 있게 된다. (이른바) 예禮는 (마음이 마땅하게 여기는 바를 무위無爲로써 일삼는) 의義의 겉무늬이다. 따라서 (노자는) 일컬었다. “도道를 잃어버리게 되면, 따라서 뒤이어 덕스러움德을 잃어버리게 된다. 덕스러움德을 잃어버리게 되면, 따라서 뒤이어 인仁을 잃어버리게 된다. 인仁을 잃어버리게 되면, 따라서 뒤이어 의義를 잃어버리게 된다. 의義를 잃어버리게 되면, 따라서 뒤이어 예禮를 잃어버리게 된다.”
道, 有積, 而德, 有功. 德者, 道之功. 功, 有實, 而實, 有光. 仁者, 德之光. 光, 有澤, 而澤, 有事. 義者, 仁之事也. 事, 有禮, 而禮, 有文. 禮者, 義之文也. 故曰: 失道, 而後失德. 失德, 而後失仁. 失仁, 而後失義. 失義, 而後失禮.
해 설
이 문단의 요지는 자연自然=무위無爲=도道=덕스러움德=성性=명命=인仁=의義=예禮이기 때문에, 도道를 잃어버리게 되면, 덕스러움德을 잃어버리게 되고 … 예禮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예(禮; 文)는 (마땅하게 여기는) 속마음(情; 義)이 (저절로 그러하게) 겉모습으로 드러나는 바를 일삼는 바이다. 겉무늬(文; 禮)는 (저절로 그러한) 속바탕이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이) 겉모양으로 나타나는 바를 일삼는 바이다. 따라서 군자는 (저절로 그러한) 속마음을 취하고, (일부러 일삼아) 드러낸 겉모습을 버린다. (저절로 그러한) 속바탕을 좋아하고, (일부러 일삼아) 나타나는 겉무늬를 싫어한다. 따라서 (일부러 일삼아) 나타낸 겉모양을 기댄 채, 속마음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그 속마음이 더러워진 사람이다. (일부러 일삼아) 나타낸 겉모양을 기댄 채, 속바탕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그 속바탕이 어그러진 사람이다. (나는) 무엇을 근거로 그것을 이야기하는가? (예컨대, 춘추春秋시대, 초楚나라 여왕厲王에게 바쳤던) 화和씨의 옥돌은 (옥을 쪼아내지 않아) 다섯 가지 색깔로 (빛나는) 겉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바였고, (약을 발라 준 뱀이 물어다 주었던) 수隋나라 제후의 진주는 은이나 금으로 (감싸지 않아 다섯 가지 색깔로 빛나는) 겉모양을 나타내지 못한 바였지만, 그 속바탕은 지극하게 아름다운 바였(기 때문이)다. (이른바) 사물은 (저절로 그러한 대로의 겉모습이나 겉모양을) 충족하지 못하게 된다. 그것을 (일부러 일삼아 겉모습이나 겉모양을 드러내거나) 나타내게 되면. 이른바, 사물이 (일부러 일삼아) 겉모습을 드러내는 바를 기댄 채, 따라서 뒤이어 (일부러 일삼아) 겉모양을 나타내는 바를 일삼게 되면, 그 속바탕이 (저절로 그러한 바대로) 아름답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예컨대) 부모와 자식이 (일부러 일삼아 서로의) 사이를 벌리게 되면, 그 예禮가 (유위有爲로써 자애로움과 효성스러움을 일삼는 바에 대해) 투박해지게 된다. 이른바, (그 예禮가 무위無爲로써 자애로움과 효성스러움을 일삼는 바에 대해) 밝아지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노자는) 일컬었다. “예禮가 (무위無爲로써 마음이 마땅하게 여기는 바를 일삼는 겉무늬가) 얇아지게 된다.”
禮, 為情貌者也. 文, 為質飾者也. 夫君子, 取情, 而去貌. 好質, 而惡飾. 夫恃貌而論情者, 其情, 惡也. 須飾而論質者, 其質, 衰也. 何以論之. 和氏之璧, 不飾以五采. 隋侯之珠, 不飾以銀黃, 其質, 至美. 物, 不足, 以飾之. 夫物之, 待飾, 而後行者, 其質, 不美也. 是以父子之, 間, 其禮, 樸, 而不明. 故曰: 禮, 薄也.
이른바, (세상 사람들이 일부러 일삼는 바를) 많아지게 하는 바를 더불어 하지 않았던 물건, (아주 먼 옛날의) 음陰과 양陽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일부러 일삼는 바를) 빼앗는 바와 (저절로 그러하게 일삼는 바를) 건네는 바를 더불어 했던 이치, (아주 먼 옛날의 제후와 임금의) 위세와 덕스러움德이었다. (유위有爲가) 참된 바와 두터운 바가 얇았던 모습, (아주 먼 옛날의) 부모와 자식의 예禮(의 모습)이었다. 이것을 말미암아 그것을 살피건대, (세상 사람들이 일부러 일삼는 바를) 많아지게 하는 예禮는 (세상 사람들의 무위無爲가) 참된 마음(心; 義)을 (일부러 일삼아) 어그러뜨리는 바이다. 따라서 이른바 (아주 먼 옛날의) 예禮를 일삼았던 제후와 임금은 세상 사람들의 (무위無爲가) 투박한 마음(心; 義)과 (더불어) 어우러지는 바를 섬겼다. (따라서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은 (무위無爲로써 마음이 마땅하게 여기는 바를 일삼는 겉모습貌·겉무늬文·겉모양飾인) 예禮를 일삼았다. (따라서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은 (제후와 임금이 일삼는 예禮를 일삼는 바와 더불어) 어우러졌고, 따라서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은 제후와 임금이 일삼는 예禮를 일삼는 바와 더불어 어우러지는 바를) 가볍게 여겼으며, 즐겁게 여겼다. (따라서 아주 먼 옛날의 세상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제후와 임금이 일삼는 예禮를 일삼는 바와 더불어) 어우러지지 못하면, (그들을) 질책하고 원망했다. (그러나) 지금의 예禮를 일삼는 제후와 임금은 세상 사람들의 (무위無爲가) 투박한 마음과 (더불어) 어우러지는 바를 섬기지만, 그것을 재화로 삼는데, (그것은) 이른바 (자신들이 일삼는 예禮를 일삼는 바와 더불어 어우러지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을 일부러 일삼아) 질책하고, 분별하는 바와 더불어 하는 바이다. (따라서 어찌 지금의 세상 사람들이 제후와 임금이 일삼는 예禮를 일삼는 바와 더불어 어우러지는 바를 일부러 일삼아) 다투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을 수 있겠는가? (이른바, 지금의 세상 사람들은 제후와 임금이 일삼는 예禮를 일삼는 바와 더불어 어우러지는 바를 일부러 일삼아) 다투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데, 따라서 (지금의 세상은 일부러 일삼아) 어지럽다. 따라서 (노자는) 일컬었다. “(지금의 제후와 임금이 일삼는) 예禮는 (세상 사람들의 무위無爲가 투박한 마음을) 오롯하게 믿는 바가 얇아진 바이다. 따라서 (이른바 지금의 세상 사람들이 일삼는 바와 더불어 하는 바를 일부러 일삼게 하는 예禮, 이것이 지금의 세상을 일부러 일삼아) 어지러워지게 하는 시작점이다.”
凡物, 不並盛. 陰陽是也. 理, 相奪予. 威德是也. 實厚者, 貌薄. 父子之禮是也. 由是觀之, 禮繁者, 實心, 衰也. 然則為禮者, 事通人之樸心者也. 眾人之, 為禮也. 人應, 則輕歡. 不應, 則責怨. 今為禮者, 事通人之樸心, 而資之, 以相責之分. 能毋爭乎? 有爭, 則亂. 故曰: 禮者, 忠信之薄也. 而亂之首乎.
사물 앞으로 나아가 (앎을) 일삼는 바, 이치 앞으로 나아가 (실제를) 일삼는 바, (객관적 관찰과 실천적 검증을 통해 지혜를 획득하는 방법) 그것이 이른바 전식前識이다. (따라서) 전식前識은 (대상을 벗어나는 바와 더불어) 어우러지는 바를 가지는 바나 (실제를) 어긋나는 (바와 더불어 어우러지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앎을 얻)는 바이다. (나는) 무엇을 근거로 그것을 이야기하는가? (예컨대, 춘추春秋시대, 초楚나라 사람) 첨하詹何가 (자리에) 앉아있었고, 제자가 (옆에) 서 있었는데, 문밖에서 소가 우는 소리가 들리는 바가 있었다. 제자가 말했다. “저것은 검은 소입니다. 그런데 흰 뿔입니다.” 첨하가 말했다. “아니다. 저것은 검은 소이다. 그리고 그 뿔에 흰 것이 자리하고 있다.” 사람을 시켜 그것을 살핀 결과, (그것은) 검은 소였고, 흰 삼베가 그 뿔을 감싸고 있었다. 이른바, 첨하가 (소에 대해 앎을) 일삼은 (소 앞으로 나아가 살피는) 방법은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나 생각)과 (더불어) 어우러지는 바로서, (참다운 앎의) 꽃을 피우는 바이다. (그러나 제자가 일삼은 소 앞으로 나아가 살피지 않는 방법은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나 생각과 더불어 어우러지지 못하는 바로서, 참다운 앎의 꽃을 피우는 바를) 해치는 바이다. 따라서 (노자는) 일컬었다. “(전식前識은 세상 사람들이 저절로 그러한) 도道(에 대해 참다운 앎)의 꽃을 피우게 하는 바이다.” 이른바, (제자가) 첨하가 일삼은 (소 앞으로 나아가) 살피는 바를 풀어내거나 풀어헤쳤다면, 이른바 열 살배기 어리석은 아이를 시켜 그것을 살폈다면, 그것이 검은 소이고, 흰 삼베로 그 뿔을 감싸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른바 첨하가 일삼은 (소 앞으로 나아가) 살피는 바는 (제자와 같이 앎을 얻는 어른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생각(神; 意)을 이지러지게 하지만, 뒤이어 열 살배기 어리석은 아이(와 같이 앎을 얻는 바)를 더불어 하게 하고, (그러한 참다운 앎의) 공능(功; 知)을 더불어 하게 한다. 따라서 (노자는) 일컬었다. “(전식前識은 세상 사람들이 저절로 그러한 바性대로) 어리석어지게 하는 시작점이다.” 따라서 (노자는) 일컬었다. “전식前識은 (세상 사람들이 저절로 그러한) 도道(에 대해 참다운 앎)의 꽃을 피우게 하는 바이며, (세상 사람들을 저절로 그러한 바命대로) 어리석어지게 하는 시작점이다.”
先物行, 先理動, 之, 謂前識. 前識者, 無緣而忘意度也. 何以論之? 詹何坐, 弟子侍, 有牛, 鳴於門外. 弟子曰: 是, 黑牛也. 而白題. 詹何曰: 然, 是, 黑牛也. 而白, 在其角. 使人視之, 果, 黑牛, 而以布裹其角. 以詹子之術, 嬰眾人之心, 華焉. 殆矣. 故曰: 道之華也. 嘗試釋詹子之察, 而使五尺之愚童子, 視之, 亦知其, 黑牛, 而以布裹其角也. 故以詹子之察, 苦心傷神, 而後與五尺之愚童子, 同功. 是以曰: 愚之首也. 故曰: 前識者, 道之華也, 而愚之首也.
해 설
한비자韓非子가 이해한 전식前識은 눈이 모양을 보고, 귀가 소리를 듣고, 코가 냄새를 맡고, 입이 맛을 보고, 손이 잡은 바대로 사물과 사안을 생각하고 느끼고 알아차리는 일이다.
이른바, (노자가 일컬은) “대장부大丈夫”(에서 대大)라는 말은 “그 (전식前識을 통해 획득한) 지혜가 크다”라는 (뜻이고, 장부丈夫라는 말은 “어른”이라는) 뜻이다. 이른바, (노자가 일컬은) “처기후處其厚, 불처기박不處其薄”이라는 말은 “(대장부는 자신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무위無爲가) 참된 마음(情; 義)에게 나아가고, (유위有爲의) 모습을 드러낸 예禮에서 떠나간다”(라는 뜻)이다. 이른바, (노자가 일컬은) “처기실處其實, 불처기화不處其華”라는 말은 “(비유컨대, 대장부는 자신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반드시 (무위無爲가 평평한 바와 더불어) 어우러지는 바(緣; 仁·性·道·自然)와 (무위無爲가) 이치로운 바(理; 義·命·德)가 울퉁불퉁해지거나 끊어지지 않게 한다”라는 뜻이다. 이른바, (노자가 일컬은) “거피취차去彼取此”라는 말은 “(대장부는 천하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유위有爲의) 모습을 드러낸 바(로서, 지금의 제후와 임금이 일삼는 예禮·德), (무위無爲가) 울퉁불퉁한 (바와 더불어 어우러진) 바(로서, 지금의 제후와 임금이 일삼는 의義·德), (무위無爲가 이치로운 바가) 끊어진 바(로서, 지금의 제후와 임금이 일삼는 인仁·德)를 버리고, (무위無爲가 평평한 바와 더불어) 어우러지는 바(로서, 아주 먼 옛날의 제후와 임금이 일삼은 예禮·德), (무위無爲가) 이치로운 바(로서, 아주 먼 옛날의 제후와 임금이 일삼은 의義·德), (무위無爲가) 참된 마음(情; 仁)을 좋아하는 바(로서, 아주 먼 옛날의 제후와 임금이 일삼은 인仁·德)를 얻는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노자는 일컬었다. “(대장부는 천하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지금의 제후와 임금이 일삼는 덕스러움德·有爲) 저것을 버리고, (아주 먼 옛날의 제후와 임금이 일삼은 덕스러움德·無爲) 이것을 얻는다.”
所謂大丈夫者, 謂其智之, 大也. 所謂處其厚, 不處其薄者, 行情實, 而去禮貌也. 所謂處其實, 不處其華者, 必緣理, 不徑絕也. 所謂去彼取此者, 去貌徑絕, 而取緣理好情實也. 故曰: 去彼取此.
해 설
이 문단의 요지로 판단할 때, 한비자韓非子는 이 장을 제후와 임금의 수신修身과 치인治人의 방법을 설명한 장으로 이해한 듯하다.
백서본 『노자』 제1장
上德. 不德. 是以有德. 下德. 不失德. 是以無德. 上德. 無爲. 而無以爲也. 上仁. 爲之. 而無以爲也. 上義. 爲之. 而有以爲也. 上禮. 爲之. 而莫之應也, 則攘臂, 而扔之. 故失道, 而后德, 失德, 而后仁, 失仁, 而后義, 失義, 而后禮. 夫禮者, 忠信之薄, 而亂之首也. 前識者, 道之華, 而愚之首也. 是以大丈夫, 居其厚, 而不居其薄. 居其實, 而不居其華. 故去彼取此.

첫댓글 백서본 노자에 기준했을 때, 제1장을 해석한 것으로 볼 수 있는 해노 부분에 대해 우리말 풀이를 한 것입니다.
옮긴이의 해설을 최소화했는데, 그만큼 원문의 풀이를 충실하게 하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제목의 1. 덕자에서 1은 백서본 노자 1장을 뜻하고, 덕자는 한비자 해석의 첫 두 글자입니다. 이 부분을 계속 지키려고 합니다.
원문을 진하게 표시했습니다.
옮긴이의 생각은 소괄호, 대괄호에 담았습니다.
도, 덕, 무위, 자연, 성, 명 등에는 한자를 병기했습니다.
무위는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는 바,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로 풀이했습니다.
자연은 저절로 그러한 바로 풀이했습니다.
우리말 풀이 맨 끝에 백서본 노자의 해당 장을 소개했습니다.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모두 저의 부족함 탓입니다.
한비자가 저본으로 삼은 노자가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제가 백서본 노자를 언급한 것은 전체 맥락을 짚는 데, 효과적일 것 같아서입니다.
백서본 노자가 고본이고, 완정한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한비자의 해석에서 보이는 내용과 백서본 노자의 원문이 차이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참조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