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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절색 미녀들을 위한 시
남진원
1. 조선의 여인 황진이 - 임제의 仰天大笑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느냐 누웠느냐
홍안(紅顔)은 어디 가고 백골(白骨)만 묻혔느냐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서러워 하노라.
임제 -
조선의 대 선비,임제가 왕의 부름으로 벼슬을 받아 평안도로 올라가는 길이다. 가는 길에 황진이의 무덤 옆을 지나게 된다. 그는 절세미색 황진이의 무덤 앞에 잔을 올린다.
'푸른 풀이 이리 우거진곳에 그대, 황진이여 자느냐 누워있느냐. 그 젊을 때의 미색은 어디 두고 이제 백골만 묻혀있는가. 잔을 들어도 권할 사람이 없구려, 그를 내 서러워하노라. ' 이런 내용이다.
이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발칵 뒤집혀진다. 어찌하여 고위 관리가 일개 죽은 기생의 무덤에 가서 잔을 올리는가 하며 야단들이었다. 하는 수 없이 임제는 파직을 당한다. 그 소식을 듣고 임제는 크게 한 번 웃고 (앙천대소) 돌아서 내려왔다.
대 선비, 임제는 조선의 천하절색 황진이를 위해 멋진 시조 한 수를 남겼다.
남녀 간의 정사를 중국에서는 가끔 꿈속 몽정의 형태로 기록되어 나타난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대담하게 현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유명한 임제가 28살 때 한양에서 술에 취해 내려가다가 수원에 들렀다. 주막에서 술파는 아낙과 눈이 맞아 그 짓을 하다가 기둥서방에게 들켜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 그때 임제는 제발 시 한수만 쓰고 죽겠다고 빌었더니 허락해 주었더랬다. 그가 쓴 시가 바로 아래의 작품이다.
昨夜長安醉酒來(작야장안취주래) 지난 밤 한양에서 술에 취해 내려왔는데
桃花一枝爛漫開(도화일지난만개) 복사꽃 한 가지가 화려하게 피어있네
君何種樹繁華地(군하종수번화지) 그대는 어찌하여 이 번화한 곳에 심었는가
種者非也折者非(종자비야절자비) 심은 자가 잘못인가, 꺾은 자가 잘못인가
그 기둥서방은 이 시를 읽고 나서야 임제가 천하 호걸임을 알고 해치지 않았다고 한다.
39살로 인생을 마감하였지만 조선 제일의 풍류객 임제이고 기개있는 조선의 대 선비이다.
옛날엔 ‘절세미인’과 ‘풍류객’이란 호칭을 얻으려면 일찍 죽고 아름답고 기개가 있어야 할 것 같다. 나처럼 머리 허옇고 이빨 다 빠진 남자를 풍류객이라 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미인박명’이란 말도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옛날의 여인은 20대에서 30대에 가장 아름다운 미색을 띈다. 그리고 30대에 거의 목숨을 잃었다. 미인도 쭈글쭈글하고 이가 다 빠진 여인을 절세의 미인이라고는 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요즘의 미인들은 아마 40대 50대 더 나아가 60대, 70대에도 미모를 잃지 않는다.
2. 왕소군 - 春來不似春
중국의 황제들에게는 수많은 여인이 있었다. 이름하여 궁녀들이다. 한나라 원제에게도 수많은 궁녀들이 있었다. 원제는 그 많은 궁녀들 중에 누가 예쁜지 일일이 확인해 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에게 궁녀들의 얼굴을 그려 올리라는 명을 내렸다. 모연수라는 화가는 날마다 원제가 잠자리에 들 여러 명의 궁녀의 모습을 그려 바쳤다. 원제는 그 그림 중에 마음에 드는 여인을 간택하여 침소에 들었다. 궁녀들은 황제의 마음에 들기 위해 궁중 화가인 모연수에게 뇌물을 주고 자신의 모습을 아름답게 그려달라고 부탁하였다. 궁녀 중에 왕소군은 뇌물을 주지 않았기에 늘 왕소군의 얼굴은 추하게 그려 올렸다. 당연히 왕소군은 원제를 만날 기회가 없었다.
어느 날 흉노의 왕이 한나라의 미녀를 부인으로 맞이하겠다고 하며 미녀를 바칠 것을 원하였다. 원제는 제일 못생긴 왕소군을 흉노의 왕에게 보내기로 하였는데 막상 왕소군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궁녀 중에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어찌된 일인가?”
원제가 까닭을 알아보니 뇌물을 안주어 일부러 궁중화가가 추하게 그린 것을 알았다. 원제는 크게 노하여 노연수를 참형에 처하였다.
왕소군은 흉노왕의 후궁이 되어 북쪽 땅에 가서 살게 되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쓸쓸히 여생을 마감하였다. 그녀가 죽어 무덤을 썼는데 겨울이 되어도 풀이 시들지 않고 푸르렀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녀의 무덤을 청총(靑塚)이라 불렀다.
그 후 당나라 시대에 오자, 왕소군의 아픔을 그려 본 시인 동방규는 왕소군에 대한 시를 짓는다.
王昭君1(왕소군1)-東方虬(동방규)
漢道初全盛(한도초전성) 한나라 초에는 전성기였으니
朝廷足武臣(조정족무신) 조정에는 무인들도 많았다지
何須薄命妾(하수박명첩) 그런데 어느새 여인을 바치고
辛苦遠和親(신고원화친) 괴로움 속에 멀리 화친을 해야 하는가
미인은 시인의 붓에서 다시 살아나고, 시인은 미인을 노래함으로 미인의 웃음과 슬픔을 다시 볼 수 있으니 시인과 미인은 꽤 괜찮은 관계이다.
동방규가 왕소군의 아름다움에 반해 시를 지었으니 그 애련의 상흔이 잘 전해진다. 동방규는 왕소군으로 시인의 명성을 얻었고 왕소군은 동방규에 의해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으니 그 시대의 애환을 잘 읽을 수가 있다.
이 시는 왕소군이 이국으로 끌려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도 있지만 한나라의 허약함을 왕소군을 통해 비판하고도 있다. 여인을 바치면서까지 화친을 해야만 했던 한나라를 탓한다.
왕소군2(王昭君2)-東方虯(동방규)
昭君拂玉鞍(소군불옥안) 왕소군이 옥 안장을 털고
上馬啼紅頰(상마제홍협) 말에 오르니 붉은 빰에 눈물이 흐른다
今日漢宮人(금일한궁인) 지금은 한나라의 여인이지만
明朝胡地妾(명조호지첩) 내일이면 오랑캐의 첩이 되는구나
오늘은 한나라의 미인이지만 내일은 오랑캐의 첩이 되어가는 왕소군에 대한 안타까움이 그려져 있다.
왕소군3(王昭君3)-東方虬(동방규)
掩涕辭丹鳳(엄체사단봉)
말과 눈물을 애써 감추며 단봉을 떠난다
銜悲向白龍(함비향백룡)
이윽고 슬픔을 머금으며 백룡대로 향하는구나
單于浪驚喜(선우랑경희)
선우는 놀라고 기뻐 어쩔줄 모르지만
無復舊時容(무부구시용)
왕소군의 옛 용태는 그곳에 없었네.
오랑캐의 첩이 되니 선우는 크게 기뻐하지만 왕소군은 슬픔에 잠겨 옛날의 밝은 얼굴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왕소군4(王昭君4)-동방규(東方虯)
萬里邊城遠(만리변성원)
만리길, 변방 성채는 아득히 멀고
千山行路難(천산행로난)
천산을 넘는 행로는 험난하기만 하다.
擧頭惟見日(거두유견일)
머리 들고 봐도 해만 보일 뿐
何處是長安(하처시장안) :
어느 곳이, 내가 떠나 온 장안이었나.
억지로 따라가던 왕소군이 돌아보니 무한대로 펼쳐진 들판에 해만 보일 뿐 고향은 점점 멀어지고 있다. 어느 쪽 방향이 장안을 떠나온 쪽인지도 모르겠다. 암담한 마음이 그려져 있다.
왕소군5(王昭君5)-동방규(東方虯)
胡地無花草(호지무화초) 오랑캐 땅엔 장안의 꽃과 풀 같은 게 없으니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봄이 와도 봄이 온 것 같지 않구나
自然衣帶緩(자연의대완) 옷에 맨 허리끈도 느슨해지니
非是爲腰身(비시위요신) 이는 허리를 일부러 예쁘게 하였음이 아니라오.
오랑캐 땅에 가서 살고 있으니 그곳의 화초는 장안에서 보던 화초가 아니다. 그러니 마음속은 북쪽의 차가운 땅처럼 얼어있다. 봄이 와도 봄이 온갖 같지 않다는 말이다. 몸은 고국을 그리니 초췌하고 말라간다. 그러니 아름다움을 뽐내기 위해 허리를 가늘게 한 것이 아니라 먹지 못해 몸이 야위어 허리가 가늘어진 것이다.
남송 때의 미녀 시인 당완은 육유를 그리워하다가 시어머니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당완은 육유에게 쓴 시 중에 ‘病魂常似秋千索(병혼상사추천삭)’이란 구절이 있다. 병든 영혼은 늘 흔들리는 그넷줄 같다는 뜻이다. 그녀의 영혼은 그리움에 병이 들어 이별의 상처만을 안고 살다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왕소군 역시 이역만리 타국에 가서 고향을 그리다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갔던 것이다.
3. 중국 월나라의 미녀 서시 - 사시빈목(西施嚬目)
월나라 왕 구천(勾踐)은 회계산에서 부차에게 패하여 치욕을 당하였다. 그 치욕을 씻기 위해 절치부심(切齒腐心).
그 방법의 하나가 미인계(美人計). 월나라 미인들을 모두 수색하여 찾아낸다. 그리고 철저히 적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들을 가르친다. 월나라 책임자 범려는 미인 중 최고의 미인 서시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어쩌랴, 서시를 보내야만 나라를 구할 수 있는데… .
저라산 자락의 나무꾼 딸 서시가 얼마나 예뻤는지, 시내의 군중들이 서시를 보기 위해 거리는 북새통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래서 서시가 궁궐로 들어가는데 3일이나 걸렸다고 한다.
오나라로 간 서시, 오왕 부차는 입이 찢어질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서시를 위해 화려한 궁궐을 새로 짓고 춘소궁(春宵宮)이라 하였다. 주위에는 호화로운 연못을 파놓고 음주 가무를 즐겼다. 결국 부차는 서시의 미색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였고 패망의 길을 걸었다. 범려는 서시를 찾은 후 영화로운 벼슬길도 마다하고 그녀와 함께 태호를 찾아가 일엽편주를 타고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서시는 어려서부터 심장이 좋지 않아 가끔 눈을 찡그렸다. 그런데 그 찡그리는 모습이 더욱 매력적이었다. 동네 총각들이 그런 서시를 보고 줄줄 따라 다녔다. 이 모습을 본 마을의 못 생긴 처녀들도 흉내를 내어 일부러 얼굴을 찡그리고 다녔다. 그러자 동네 총각들이 기겁을 하고 죄 도망을 갔다고 한다. 서시가 몸이 아파 얼굴을 찡그릴수록 더욱 아름답다고 하여 서시빈목(西施嚬目)이라는 말이 생겼다.
어느 날 개울에 빨래를 하러 갔는데 고기들이 미색에 놀라 모두 물 밑으로 가라앉았다고 하여 ‘침어(沈漁)’라는 말도 생겨났다.
성당의 시인 왕유(王維, 699~ 761)는 서시의 아련한 미모에 반해 '서시영(西施詠)'이란 시를 지었다.
西施詠(서시영)
艶色天下重(염색천하중) 미색을 천하제일로 여기니
西施寧久微(서시영구미) 서시가 어찌 오래도록 미천하게 지내랴
朝爲越溪女(조위월계녀) 아침에 월나라에 시냇가에서 빨래하던 여인이
暮作吳宮妃(모작오궁비) 저녁에 오나라 궁전의 왕비가 되었구나
賤日豈殊衆(천일개수중) 가난할 때 뛰어난 미모를 알 수 없었는데
貴來方悟稀(귀래방오희) 귀하게 되니 비로서 드문 미색임을 알겠구나
邀人傅脂粉(요인부지분) 사람을 시켜 분단장을 하게 하고
不自著羅衣(부자착라의) 비단 옷도 직접 입을 필요없었네
君寵益嬌態(군총익교태) 임금이 총애에 교태는 더하고
君憐無是非(군련무시비) 임금이 아끼니 잘잘못도 없네
當時浣紗伴(당시완사반) 지난날 같이 빨래해던 동무들
莫得同車歸(막득동거귀) 누구도 같이 수레타고 가지 못했네
持謝隣家子(지사인가자) 이웃 여인들에게 전해 주는 바,
效嚬安可希(효빈안가희) 찡그리는 흉내로 무얼 바라겠는가
서시의 미모를 찬양하고, 옛날에 빨래하던 친구들이 찡그리는 얼굴을 흉내 내 봐야 얻을 게 없다는 시를 남겼다.
당나라 시선(詩仙) 이백(701-762)도 서시에 대한 시를 남겼다.
烏棲曲(오루곡: 까마귀 깃드는 노래),
姑蘇臺上烏棲時(고소대상오서시) 소주(蘇州)의 고소대 위에 까마귀 깃드는 무렵
吳王宮裏醉西施(오왕궁리취서시) 오나라 왕궁에는 서시 취해 있구나
吳歌楚舞歡未畢(오가초무환미필) 오나라 노래 초나라 춤, 환락은 끝나지 않았는데
靑山欲銜半邊日(청산욕함반변일) 청산은 해의 반쪽을 입에 물고 있네
하지장(賀知章,659~744)은 이 시를 보고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이 지은 것이라 극찬하였다. 그래서 적선(謫仙, 하늘에서 귀양나온 신선)이란 말이 생겼다.
4. 당나라 미녀 양귀비 - 수화(羞花)
양귀비의 아름다움에 꽃도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이다!
양귀비가 입궁하여 우울하게 보내던 날이었다. 화원에서 꽃을 보다가 잘못하여 함수화를 건드렸다. 그러자, 함수화는 꽃을 말아올렸다. 꽃마저 부끄러워하는 걸 본 당명황은 그녀를 ‘절대가인(絶對佳人)’ 이라고 칭했다.
양귀비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양씨 성을 가진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미색이 뛰어나 현종의 이들인 수왕(壽王)의 비(妃)가 된다.
그러나 당 현종의 눈에 띄인 양귀비를 보고 그 미색에 빠진다. 아들의 부인을 데려와 귀비로 책봉하였다.
그 후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안록산의 난이 일어난다. 현종은 양귀비를 데리고 피난을 가던 중 양귀비는 36세에 죽음을 맞는다.
그러난 중국의 대 시인들은 양귀비의 미모를 시로 전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백은 활짝 핀 모란에 비유하며 극찬하였고 백거이는 장한가(長恨歌)를 지어 현종과의 애련한 사랑을 노래하였다.
다음의 시는 이백의 청평조사(淸平調詞)이다. 현종의 부름을 받고 즉석에서 지은 시라고 한다.
淸平調詞(一)
雲想衣裳花想容(운상의상화상용) 의상은 구름의 모습이요, 얼굴은 모란꽃이네
春風拂檻露華濃(춘풍불함로화농) 봄바람이 불어오니 이슬 젖은 꽃은 더 농염하구나
若非群玉山*頭見(약비군옥산두견) 만일 군옥산 위에서 본 서왕모가 아니라면
會向瑤臺月下逢(회향요대월하봉) 필시 달아래 요대에서 만난 선녀임에 틀림없다
[*군옥산(群玉山) : 신선인 서왕모(西王母)가 사는 곳]
淸平調詞(二)
一枝濃艶露凝香(일지농염로응향) 한 가지에 이슬맺힌 농염한 꽃 향기 머금으니
雲雨巫山*枉斷腸(운우무산왕단장) 무산의 운우인가 애간장을 태우네
借問漢宮誰得似(차문한궁수득사) 묻노니, 한나라 궁안에 누가 이와 견주리
可憐飛燕*依新粧(가련비연의신장) 가련한 조비연이 새로 단장하고 나온다면 모르리
*무산의 구름과 비(雲雨巫山) : 초나라 회왕이 무산을 지날 때였다. 그곳에서 꿈을 꿀 때마다 한 미인과 정사를 나누었다. 회왕이 누구냐고 물었다. 미인은 대답했다. 무산에서 아침에는 구름으로 떠 있고 저녁에는 비로 변하여 내리는 신녀(神女)라고 하였다.
그래서 남녀 간의 정사를 운우의 정이라 불려진다.
미인을 대우하는 게 중국은 매우 상격이다. 삼국지에 나오는 초선의 미모를 보고 달이 숨을 정도라고 한 폐월(閉月), 양귀비의 미모에 꽃잎이 오그라들었다는 수화(羞花)! 이 둘을 합쳐서 ‘폐월수화(閉月羞花)’라는 말을 만들었다. 또 빨래하러 나간 서시의 미모에 놀라 고기가 가라앉았다는 침어(沈魚), 기러기들이 날다가 왕소군의 모습에 놀라 떨어졌다는 낙안(落雁). 이 둘을 합쳐서 ‘침어낙안(沈魚落雁)’이란 말도 생겼다.
5. 중국 한나라 미녀 조비연 - 임풍양류(臨風楊柳)
한나라 성제(成帝)는 반첩여를 사랑하다가 나중에는 조비연의 품으로 돌아갔다. 반첩여는 임금의 사랑을 잃고 유명한 ‘원가행’이란 시를 썼다.
성제는 정치에 관심이 없었고 놀기를 좋아하였다. 우연히 양아공주의 집에 들렀는데, 양아공주가 가녀(歌女)를 불러 노래를 시켰는데 가는 허리에 춤 추는 자태가 가히 환상적인 여인이 있었다. 그 여인이 조비연이었다. 조비연은 세요설부(細腰雪膚)였다. 가는 허리에 백옥같은 얼굴.
조비연에게 총애를 잃게 된 반첩여는 목숨의 위태로움을 느끼고 태후를 모시고 장신궁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고독한 세월을 보내며 시를 쓰며 살았다. 첩여가 외로움 속에서 성제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나타나 있는 시 한수를 보자.
長信秋詞(장신추사:장신궁에서의 가을 시)
반첩여
眞成薄命久尋思 진성박명구심사
박명한 신세가 되어 그리움에 오래 헤매입니다.
夢見君王覺後疑 몽견군왕각후의
꿈에서나 임을 뵈었는데 깨고나니 허무합니다.
火照西宮知夜飮 화조서궁지야음
환한 불빛이 서궁을 비추니 밤에 향연이 있음을 알겠습니다.
分明複道奉恩時 분명복도봉은시
옛날 성은을 입을 때의 그 통로만이 빛나옵니다.
두목은 가는 허리의 주인공 조비연 같은 미인에 대한 시를 썼다.
遣懷(견회:후회를 하다)
杜牧(두목)
落魄江湖載酒行(락탁강호재주행) / 영락하여 강호를 술로 떠돌았고,
楚腰纖細掌中輕(초요섬세장중경) / 가는허리 미인들은 손바닥에 올려놓고 놀았다.
十年一覺揚州夢(십년일각양주몽) / 양주에서의 십년 꿈, 깨고 나니
贏得靑樓薄倖名(영득청루박행명) / 종내 술집에서조차 괄시받는 인사가 됐다네.
*두목(803~852): 晩唐시인. 자는 목지(牧之), 호는 번천(樊川) 지금의 陜西省 西安사람.
그의 조부는 한(漢)의 사마천(司馬遷) 이후 최고의 역사가로 이름을 얻은 두우(杜佑)이다.
시성(詩聖) 두보(杜甫)를 대두(大杜)라 부르고 두목을 소두(小杜)라 칭하고 있다.
강남의 아름다운 풍경과 향락적인 생활을 노래하였다. 또 염정적인 색채가 짙다. 그를 일러 중국 화류문학(花柳文學)의 신기원을 이루었다고도 말한다. 번천집(樊川集)이 있다.
* 楚腰纖細掌中輕(초요섬세장중경) : 초나라 왕은 미인을 좋아했는데 허리가 가는 미인을 좋아하였다. 그러자 궁녀들은 일부러 허리를 가늘게 하기 위해 밥을 굶었다. 그러다가 굶어죽는 일까지 일어나 ‘초요(楚腰)’라는 말이 생겼다. 조비연(趙飛燕)은 몸이 가벼워 손바닥위에서 춤을 출 정도였다고 하여 ‘장중경(掌中輕)의 고사’가 생겼다.
* 揚州(양주) : 지금의 강소성 양주시는 미인이 많은 당나라 최대의 환락가가 있었다. 날씨가 온화하여 놀기에 좋은 곳이다.
* 薄倖名(박행명): 박정한 이름을 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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