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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 22일 주일예배 설교내용 – 아름다운 항구라는 곳에... / 「良い港」と呼ばれる所に…。
본문; 사도행전 27:1-9
행 27:1 우리가 배로 이탈리아에 가야 하는 것이 결정되었을 때에, 그들은 바울과 몇몇 다른 죄수를 황제 부대의 백부장 율리오라는 사람에게 넘겨주었다. 2 우리는 아드라뭇데노 호를 타고 출항하였다. 이 배는 아시아 연안의 여러 곳으로 항해하는 배였다. 데살로니가 출신인 마케도니아 사람 아리스다고도 우리와 함께 하였다. 3 이튿날 우리는 시돈에 배를 대었다. 율리오는 바울에게 친절을 베풀어, 친구들에게로 가서 보살핌을 받는 것을 허락하였다. 4 우리는 시돈을 떠나 뱃길을 갈 때에, 맞바람 때문에 키프로스 섬을 바람막이로 삼아서 항해하였다. 5 우리는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앞 바다를 가로질러 항해하여, 루기아에 있는 무라에 이르렀다. 6 거기서 백부장은 이탈리아로 가는 알렉산드리아 배를 만나서, 우리를 그 배에 태웠다. 7 우리는 여러 날 동안 천천히 항해하여, 겨우 니도 앞바다에 이르렀다. 그런데 우리는 맞바람 때문에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어서, 크레타 섬을 바람막이로 삼아 살모네 앞바다를 항해하여 지나갔다. 8 그리고 우리는 크레타 남쪽 해안을 따라 겨우겨우 항해하여, 라새아 성에서 가까운 도시인 '아름다운 항구'라는 곳에 닿았다."
1. わたしたちがイタリアへ向かって船出することに決まったとき、パウロと他の数名の囚人は、皇帝直属部隊の百人隊長ユリウスという者に引き渡された。2. わたしたちは、アジア州沿岸の各地に寄港することになっている、アドラミティオン港の船に乗って出港した。テサロニケ出身のマケドニア人アリスタルコも一緒であった。3. 翌日シドンに着いたが、ユリウスはパウロを親切に扱い、友人たちのところへ行ってもてなしを受けることを許してくれた。4. そこから船出したが、向かい風のためキプロス島の陰を航行し、5. キリキア州とパンフィリア州の沖を過ぎて、リキア州のミラに着いた。6. ここで百人隊長は、イタリアに行くアレクサンドリアの船を見つけて、わたしたちをそれに乗り込ませた。7. 幾日もの間、船足ははかどらず、ようやくクニドス港に近づいた。ところが、風に行く手を阻まれたので、サルモネ岬を回ってクレタ島の陰を航行し、8. ようやく島の岸に沿って進み、ラサヤの町に近い「良い港」と呼ばれる所に着いた。9. かなりの時がたって、既に断食日も過ぎていたので、航海はもう危険であった。それで、パウロは人々に忠告した。
지난 주일 말씀을 통해 바울은 상식적으로 무죄인 것이 명백하였지만, 하나님의 섭리하심과 인도하심에 따라 보다 각별한 사명의 자리에 머물게 되었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결백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보다, 주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것에 더 감사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바울의 본을 받아 자신의 현실적 상황과 여건보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소명에 순종하여 주님과 동행하며, 그 인도하심에 감사와 찬양으로 응답하는 아름답고도 멋지고 놀라운 일상을 살 수 있음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일상의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기 전에 먼저 주님과 함께 기뻐하고, 주님과 함께 감동하며 하루에 하루만큼 영적으로 자라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바울은 드디어 로마에 가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첫 문장이 “우리가”라고 시작을 하는 것으로 보아서 바울과 함께 다른 제자들도 로마에 가는 길에 동행하였던 것을 추측할 수 있는데요. 제자들만이 아니라 다른 죄수들도 함께 황제의 부대에게 맡겨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황제의 부대란 로마 황제의 명령을 따라 움직이는 직할 부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군인보다 좀 더 특수한 훈련을 받고, 특별한 위상을 가진 부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황제에게 상소를 하여 재판을 받으러 가는 로마시민을 호송하는데 걸맞은 위상을 가진 군인들이라고 할 것입니다.
분명 육신적인 눈으로 볼 때 바울은 죄인 취급을 받고 있었지만, 믿음의 눈으로 볼 때는 주님의 특별한 보호하심 안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의 군인들이 그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물론 그가 중요한 인물이라서 경호하는 임무를 맡은 것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당대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로마군대 중에서도 황제를 위해 특별히 선발된 특수군인들이 그와 함께 있었다는 것은 현실적인 위협과 위험에서 언제든 보호받고 안전이 보장되는 여행길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을 따르며 동행하는 우리의 삶도 분명 그러합니다. 현실적으로 볼 때에는 손해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오히려 불리한 것 같은 여건이 오히려 나에게 가장 유익하고 유리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지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간증의 공통점은 자신의 힘으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형편에 처했을 때 주님의 도우심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맞닥뜨린 그 어려움이 자신에게 가장 유익한 고난의 환경이었다고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한동대에서 상담심리사회복지학 교수로 계시는 이지선 교수님의 최근 신간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구구절절 모두 자신의 한계와 고난의 터널이 곧 주님과의 진한 사랑을 진하게 체험하는 과정이었다고 말하고 있지요. 그 가운데 교수님의 막내 조카 이야기가 있는데요. 피부에 선천적인 홍반을 갖고 태어난 이 아이는 자신의 신체가 남다르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엄마에게 이렇게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엄마, 나는 왜 이런 점이 있게 태어난 거야? 하나님은 왜 이렇게 나를 태어나게 하셨어?”
그 질문을 받은 아이의 엄마는 마음이 아팠다고 합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후에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을 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 학교에서 매우 신이 난 표정으로 귀가한 아이가 엄마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엄마, 나에게 왜 점이 있는지 알았어. 친구들에게 인기가 있게 하시려는 거였어!”
물론 우리가 이런 간증이나 예화의 주인공처럼 항상 반응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의 고난과 고통은 오히려 우리에게 더욱 넓은 지평과 아름다운 삶을 선물하시는 지름길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고후 7:10)
이 말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초점은 근심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 우리가 머물고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성실하고 착하게, 그리고 모범적으로 살면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잘 풀릴 것이라고 여깁니다. 이런 생각에서 신앙인들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저 교회생활과 신앙생활을 열심히, 그리고 성실하게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언제나 모든 일들을 순조롭게 하시고, 만사가 형통하게 잘 풀릴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결코 그렇게 순박하지도, 단순하지도 않습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지만, 이 세상은 이미 부조리함과 불의함으로 점철되어 있는 탓에 인과응보의 원리도 작동하지만, 동시에 그 반대의 법칙도 존재하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눅 13:4)
당시 실로암 연못 근처에 있던 성벽의 망대가 갑자기 무너져서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습니다. 그 때의 사건을 말씀하시며 꼭 인과응보의 원리가 진리가 아님을 말씀하신 것이지요.
앞서 말씀드린 이지선 교수님도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권유합니다.
“우리는 ‘나쁜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으며, 나에게도 일어났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회복을 향한 걸음을 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쁜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반드시 벌을 받는 것은 아니다’라는 사실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당신은 죄인이 아닙니다. 지금 일어난 일은 나쁜 일이지만 이것이 벌은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바울에게는 굉장히 나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 나쁜 일에 대해서 그 어떤 악한 평가나 반응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 여건과 형편에 대해서 수용하고 그 형편 안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존경하는 어느 목사님의 동행일기에서 이렇게 고백하시는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전에는 설교를 잘 하기 위해서 애를 썼다면 지금은 주님의 마음을 잘 담기 위해서 애를 쓴다. ”
저도 이 글을 읽고 공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문득 그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설교는 내 목소리로 전달하지만, 이 미천한 소리 안에 주님께서 당신의 마음을 담아 주시면 좋겠다...’
그래서 지금도 그렇게 역사해 주시길 기도하며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저와 같은 마음으로 주님께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이 실제로는 영적이지 않고 경건하지 않을 때가 훨씬 많을 것입니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고 선택하며 말하기가 더 쉬울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를 돌이켜 주님과 동행한 일기를 써 보자고 권해 드리면 그래서 더 단 한 줄도 쓰기가 힘드실 수 있을 것입니다. 솔직히 저도 그럴 때가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포기하고 싶은 때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유혹은 육신적인 생각에서 오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가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놀라운 존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 (요 15:16a)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시편 82:6)
이 말씀을 근거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요 10:34-35)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삶이 어떠하든 현실적으로 좋고 나쁨으로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착한 사람에게만 좋은 일이 일어나고, 악한 자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인생이란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고 판단하고 진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사람답게, 그리고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기로 결정하고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성경적이고 바람직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를 향해 뱃길여행을 시작하면서 로마군대의 경호 아닌 경호를 받으며 출발하는 여정을 읽으며 저는 우리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바울이 죄수들과 함께 이 여행을 하게 된 것처럼, 우리의 인생에도 우리가 껄끄러워하는 이들, 혹은 잘 맞지 않는 이들과 함께 있어야 할 때가 많습니다. 심지어 인생이 동반자가 그러한 경우도 많지요. 어느 강연자가 이런 농담을 하였습니다.
우리 남편은 나에게 로또와 같은 존재야. 너~~무 안 맞아~. 하나도 한 맞아....
우스갯소리이지만, 우리는 삶에서 나와 잘 맞는 사람보다 오히려 나와 너무 맞지 않는 사람들 무리 한 가운데 이리저리 떠밀려 가듯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바울 일행은 처음에는 “아드라뭇데노”호를 타고 가다가 중간에 “알렉산드리아” 배로 갈아탑니다. 아드라뭇데노도 지명이고 알렉산드리아도 지명인데요. 예를 들면 신주쿠에서 우리교회가 있는 하치오지로 中央線 전철을 타고 온다고 할 때, 때때로 중간에 のりかえ를 해야 할 때가 있지요. 처음에는 우선 青梅행을 타고 오다가 중간에 高尾행이나 八王子행으로 갈아타야 하지요. 삶의 목적지를 향해 가다 종종 자신이 목표하던 것과는 다른 행선지의 전철을 갈아타듯이 삶의 형편이 바뀔 때가 있습니다.
그 와중에 바울은 백부장 율리오라는 사람의 친절한 배려를 받기도 하고, 함께 믿음의 친구들에게 도움을 받기도 하지요. 그렇다고 항상 모든 것이 신속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예상보다 긴 시간을 여행해야 하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때로 역풍을 만나서 겨우 자신의 목표를 간신히 이루게 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러다 결국에는 “아름다운 항구”라고 이름하는 장소에 닻을 내리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에 “아름다운 항구”라는 표현이 제 마음에 포근하게 와 닿습니다. 성경학자들은 그 장소가 정확하게 어디인지 확증할 수 없는 장소라고 하는데요. 여기서 ‘아름다운’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가 “칼로스”라는 단어입니다. 영어로는 두 가지 뜻으로 번역이 되는데요. 바로 ‘beautiful’과 ‘good’입니다. 아름답다. 좋다. 훌륭하다. 가치가 있다로 번역됩니다.
1차적으로는 외적인 풍경이 아름다워서 그런 이름이 붙었을 수 있구요. 오랜 여행에 지친 이들이 마침내 만난 항구라서 반가운 마음에 그렇게 표현했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그 항구 자체가 매우 훌륭한 지정학적 여건을 갖추고 있어서 그렇게 불렀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묵상하던 저에게는 우리의 인생이라는 항로에도 곳곳에 이런 “아름다운 항구” 혹은 “훌륭하고 가치가 있는 경유지”가 예비되어 있다는 것을 고백하게 하시는 것을 느낍니다.
인생이란 언제나 효능과 효과, 그리고 능률과 실력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아름다움과 가치를 경유하며 주님과 동행하도록 각자에게 맡기신 사명이라는 마음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정말 원하시는 것은 살아계신 주님을 늘 인식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나태하게 가만히 멈추어 있으라는 것이 아니지요. 무엇을 하든지 사람의 시선보다 먼저 주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말하고 행동하는 것... 이것이 가장 아름답고 가치가 있고, 복된 삶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우리를 통하여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 12:2-3)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은 군인들에게 붙들려 경호 같지 않은 경호를 받으며 죄수들과 함께 죄인 취급을 받으며 로마로 호송을 당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소아시아 쪽으로 가는 배를 타고 가다가 중간에 유럽으로 가는 배로 갈아타야 했습니다. 물론 백부장의 친절과 배려를 받아서 믿음의 동역자들과 친구들의 호의를 누릴 수도 있었습니다. 역풍이 부는 탓에 섬을 방패로 삼아 항로를 우회하여 통과해야 했고 예정보다 늦은 일정으로 배가 연착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일행은 로마로 향하는 항로의 경유지인 “아름다운 항구”라고 불리는 곳에 도착하였습니다. 우리도 바울과 같은 인생을 삽니다. 나의 잘잘못과 상관없이 주어지는 일상의 결과들이 우리의 내면을 흔들고 미혹할 때가 허다합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현실적인 실력과 능률과 효과가 아니면 생존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우리와 동행하시며 가치가 있고, 아름다운 장소로 이끌어 가십니다. 바라기는 우리도 주님의 가르침에 순종하여 아름답고 천국의 가치가 있는 존재로 살아가는 복을 누리길 원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님과 행복한 동행의 보화를 풍성하게 누리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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