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선 여자
2025. 1. 26(주일오전예배) 요한복음 8:9
5캐럿 다이아몬드와 5L의 물 중에 하나를 준다고 하면 여러분은 어느 것을 선택하겠는가? 지금 이 자리에서 다이아몬드와 물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모두 다이아몬드를 선택할 것이다. 그런데 사막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때 다이아몬드와 물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모두 물을 선택할 것이다.
왜 선택이 달라지겠는가? 경제학적으로 가치는 사용가치(value in use)와 교환가치(value ai exchange)가 있다. 물은 없어서는 안될만큼 중요한 사용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흔하여서 교환가치가 없다. 이에 비하여 다이아몬드는 물과 비교할 때 사용가치는 높지 않지만, 희귀하여서 교환가치가 높은 것이다. 그래서 일상에서는 교환가치가 높은 다이아몬드가 더 가치있어 보이지만, 위기상황이 되면 사용가치가 높은 물이 더 높은 가치를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 진짜로 다이아몬드는 희소성이 높은가? 100년 전에는 다이아몬드가 희소성이 높은 보석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런데 1930년대 후반 경제공황으로 세계 경제가 침체에 빠졌을 때 그 가치가 높아졌다. 경제공황으로 모든 기업이 힘들 때 아프리카 공화국에 다이아몬드 광산을 가지고 있었던 드비어스 광산 회사도 힘든 상황이 되었다. 그때 드비어스는 뉴욕에 본사를 둔 광고대행사를 고용하여 다이아몬드는 로맨스라는 감정마케팅을 한 것이다. 그래서 나온 전설과 같은 슬로건이 탄생한다.
다이아몬드는 영원하다. -De Beers-
이 광고 이후 미국에서는 다이아몬드 판매량이 50% 증가하였고, 미국인 4명중 3명이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예식장에 들어갈 만큼 다이아몬드는 프로포즈의 표준이 되었다.
무슨 말인가? 다이아몬드가 최고의 가치가 된 것은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만들어진 가치를 사람들은 최고인 줄 알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삶의 진짜 최고의 가치는 무엇이겠는가? 마태복음 17장은 변화산 사건이 기록되어져 있다.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갔을 때 얼굴에서 광채가 나고, 옷이 희어진다. 그리고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말씀을 나누었는데, 베드로가 그것이 얼마나 좋았던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짓겠다고 공언한다.
그런데 베드로가 초막을 짓겠다고 공언할 때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고 있는지 마태복음 17장 5절을 읽기 바란다.
(마 17: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마태복음 3장을 보면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다. 그래서 물에서 올라 올 때에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리고, 또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다. 하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공언하여 주신 것이다.
그런데 마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이 변화산에 오르셨을 때 하나님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선포하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한마디를 더 덫붙였는데, 그 말씀이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지금 너희 앞에 있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그의 말을 들으라는 것이었다. 그때 제자들은 심히 두려워한다.
왜 제자들은 심히 두려워 했겠는가? 바이올린 연주자인 박지혜 씨는 독일에서 태어나고, 자라났기에 이방인으로서의 소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박지혜 씨도 하고 싶은 일이 있었는데, 이방인으로서 그 꿈을 향하여 나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때 하나님이 기도하는 어머니를 통하여 주신 말씀이 찬양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박지혜 씨는 바이올린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다가 그 찬양곡을 CD로 만들어 전도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전도를 위한 CD를 만들어 박지혜 씨를 위하여 기도하는 한국의 목사님을 찾아뵈었다. 그리고 목사님께 기도해 달라고 했는데, 기도한 목사님은 일곱교회를 소개해 줄테니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연주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지방에 있는 교회를 순회하며 한곡, 두곡 연주를 했는데, 그때 성령께서 역사하여서 많은 사람이 은혜받는 것을 보았다. 박지혜 씨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은혜를 받아 감사하며 연주하였다. 그런데 연주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면 새벽 3-4시가 되었는데, 박지혜 씨는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아침까지 동네를 걸으면서 두려워 떨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박지혜씨의 마음에 네가 뭔데?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왜 박지혜 씨가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두려워 떨며 동네를 걸었겠는가? 박지혜씨 마음에 네가 뭔데?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크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나같은 사람이 감히 어떻게 찬양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제자들의 모습이었다. 제자들은 내가 감히 어떻게? 라는 생각으로 엎드린 것이다.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가오셔서 손을 대시며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제자들이 고개를 들었을 때 제자들의 눈 앞에는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마 17:8)고 성경은 기록한다.
오직 예수만 보고 있는 제자들의 얼굴은 어떠했겠는가? 사랑이란 주제로 적은 시를 읽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어디선가 또 비를 맞고 있을 그녀가 생각나
저도 비를 맞으며 걷곤 합니다.
사랑이란
그 사람이 비를 맞을 때 우산을 받쳐 주는 게 아니라,
함께 비를 맞아주는 것일테니까요
이 시를 읽으면 비오는 날 비맞고 걷는 여인을 생각하며 나 홀로 비를 맞는 한 남자를 볼 수 있다. 그리고 비 맞고 걷는 여인을 생각하며 비를 맞고 걷는 것이 사랑이다는 것이다.
왜 남자는 비를 맞으면서 혼자 걷고 있는가? 헤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너스도 이와 유사한 말을 한다.
나는 너를 위하여 울어줄 수 있고,
공감할 수 있어
그러나 나는 너를 안아줄 수 없어<루브르사진>
비너스는 울어줄 수 있고, 또 공감도 할 수 있지만, 안아줄 수는 없다. 왜냐하면 비너스는 팔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처받고 아파하는 누군가를 안아주고 싶지만, 안아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다르다. 우리 예수님은 함께 울어줄 수 있고, 공감할 수도 있고, 그리고 안아줄 수도 있다. 아니 우리 예수님은 때로는 우산을 씌워주기도 하고, 함께 우산을 쓰기도 하고, 비를 그치게도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오직 예수만 남았다는 말의 의미이다. 예수님은 공감하시고, 나를 안으며 위로만 하는 분이 아니라, 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인 것이다. 그 예수님이 두려워 떠는 나에게 다가와 손을 내미시며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실 때 나의 모든 염려는 사라지고, 평안만이 가득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의 삶에는 구원의 예수 그리스도만 남아 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 오늘 본문 요한복음 8장의 시작은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 사건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하여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잡아왔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에는 이러한 여자는 돌로 치라고 명하였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5절)하고 묻는다. 이때 예수님이 돌로 치라고 하면 예수님은 용서와 사랑을 말하면서 돌로 치라고 하는가?하고 책망할 것이다. 반대로 용서와 사랑을 말하면 모세의 율법을 어긴다고 정죄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어떤 대답을 해도 바리새인들의 고발을 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정말 안타깝지 않는가?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여 율법을 주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 율법을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여 올무에 빠뜨리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은 자신의 죄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고, 또 나로 인하여 예수님이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는 더 큰 고통을 가지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이유가 과연 이것이겠는가? 곤경에 빠진 예수님은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 글을 쓰신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끊임없이 질문하자 예수님은 일어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고 말씀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글을 쓰신다. 그렇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사람들은 양심에 가책을 받아 다 떠나가 버리고 예수님과 여인만 남게 되었다. 그때 예수님은 일어나서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하고 묻는다. 여기서 여자여(γυναι) 라는 말은 예수님이 가나 혼인잔치(요 2장)에서 어머니 마리아를 부를 때 사용한 용어이다. 그만큼 귀한 여인을 부를 때 사용하는 단어가 여자여 인데, 예수님은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귀한 여인으로 받아주었다. 그러한 예수님을 향하여 여인은 주여 없나이다 라고 대답한다. 여인은 예수님을 나의 주인, 나의 구원자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광경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이제 오늘 본문을 다시 읽기 바란다.
(요 8:9)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여인을 정죄하던 사람들은 다 떠나가고 이제 여인은 예수님과 단 둘이 남았다. 이렇게 예수님과 단둘이 남아서 주님만을 바라볼 때 여인은 위로와 회복의 참된 평안의 자리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 여인에게 최고의 가치는 무엇이었겠는가?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최고의 가치가 예수 그리스도인 것처럼 저와 여러분의 최고의 가치도 예수 그리스도가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예수님을 볼 때 위로와 감격이 넘치는 평안을 회복되어서 주여 라고 부를 수 있는 복된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