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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의 문학사
- 내 문학의 동력, 아름다운 苦行! -
남 진 원
[목차]
문학을 접하다 / 3
태백시인 ‘황지’와의 인연 / 7
아름다운 문학의 스승, 나의 고향 골지리 / 15
성찰의 시간 / 20
동화속 같던 어린 날 / 19
때 아닌 잔칫집 분위기 / 22
아버지의 걱정과 결심 / 23
우울했던 나의 중학교 생활 / 24
문학청년이던 고등학교 학창 시절 / 25
아버님, 존경하는 나의 아버님 / 26
방학이면 찾아간 고향 마을 / 28
문학 인생에서 잊지 못할 분 / 29
다시 읽어보는 명시 / 30
1975년의 문학 작품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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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접하다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황지읍 화전 국민 학교, 1975년 5학년 담임을 맡은 나는 즐거움에 들떴다. 우선 말이 통하는 아이들이어서 좋았다. 22살의 총각 선생님이었다. 만 나이로는 21살이었다. 아이들이 좋아서, 가르치는 것보다는 아이들과는 놀이처럼 학습하였다.
1974년에는 5학년 아이들을 맡으면서 1년 동안 쓴 글을 모아 학급문집을 만들었다. 「나룻배」라는 문집이었다.
한용운의 시, [나룻배와 행인]에서 떠올린 문집 이름이었다. 나는 한용운의 이 시를 매우 좋아하였다. 불교 정신이 충일하고 봉사와 희생, 기다림이 작품에 녹아있었다. 한용운의 대표작이라 하는 ‘님의 침묵’ 보다는 이 시가 훨씬 대표작 같았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얕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늙어 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한용운의 ‘나룻배와 행인’>
이 시는 내가 일생을 살아가는 지침이 되는 그런 시였다. 나룻배처럼 살지는 못하더라도 그렇게 노력하며 살아가려고 했다. 그래서 학급 문집의 제목도 ‘나룻배’라고 하였던 것이다.
교육대학을 졸업한 후 1973년 10월 13일자로 삼척군 황지읍 화전 국민 학교로 초임 발령을 받았다. 발령을 받은 10월에는 2학년 담임이었다. 사표를 내고 간 선생님이 2학년을 맡은 분이었기에 내가 그 반을 맡은 것이었다. 그러나 1974년과 1975년에는 아이들과 교감을 이룰 수 있는 5학년을 맡았다.
1975년에는 황지읍의 학교에서 전근 오신 선생님이 계셨다. 교육 경력 10년이 넘은 최도규 선생님이셨다. 교장 선생님은, 6학년 담임은 경력이 있는 교사가 맡아야 된다는 생각을 하신 모양이었다. 내가 맡은 학급 바로 옆 교실이 6학년 학급이었고 담임은 최도규 선생님이셨다. .
최도규 선생님은 이미 전부터 국민학교에 근무하면서 문학 활동을 하셨다. 교사들이 구독하는 교육 전문 잡지인 『교육자료』와 『새교실』의 문학 추천과정에서 추천을 받는 과정에 있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그런 최도규 선생님이었기에, 많은 문학 지식을 갖고 계셨고 좋은 작품에 대한 지식을 선생님으로부터 들을 수도 있었다. 그런 부분들이 내게는 큰 행운이었던 것을 후일, 알게 되었다.
최도규 선생님은 이곳에 와서 교실 한 구석에 굴러다니는 학급 문집 [나룻배]를 보신 모양이었다. 그걸 보고 내게도 글을 써 보라고 재촉한 분이 바로 최도규 선생님이였다. 나는 <학급 문집> 하나 낸 걸로 마치 시인의 길로 들어섰다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최도규 선생님은 꾸준히 격려와 응원을 보내셨다.
‘칭찬을 받으면 돌고래도 웃는다’ 라고 한다. 나 역시 글에 대한 칭찬의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았다. 정말로 내가 글을 잘 쓰는 줄 착각하기도 했다. 자꾸 글 쓰는 일이 좋아졌다. 시간이 나면 끄적거리며 글을 써 보기도 했다. 다 쓴 글은 최도규 선생님께 보여드렸다. 그걸 보신 선생님은 볼 때마다 칭찬과 놀라움을 보이셨다. “멀지 않았어. 남선생!” 하며 격려를 해 주셨던 것이다.
어느 날 저녁, 한 편의 시를 쓴 후에 교무실로 갔다. 당시 선생님들은 교무실에서 숙직을 하며 그곳에서 잤다. 그날은 최도규 선생님이 숙직이셨다. 작품을 보신 선생님은 좋다고 하시며 끝부분을 고쳐 주셨다. 끝부분 일부를 고쳤는데 작품이 완전히 달라져 보였다.
그때 내가 쓴 글은 ‘호수’였다.
호 수
남진원
쑤욱 쑥 나무들
누구 키가 더 크나
들여다보고
불긋불긋 나무들
누가 더 예쁜가
들여다 보고
볼 때마다
커지는
나무들의 꿈
클 때마다
보고싶은
나무들 마음
그때마다
빙그르
바람 따라 웃고
그때마다
방글
해님따라 웃는
나무들의
꿈이 크는
호수.
이 작품의 끝부분은 최도규 선생님께서 다듬어 주신 부분이었다. 이 작품이 내가 글을 쓰며 두번 째 발표한 작품이었다.
태백시인 ‘황지’와의 인연
강원도 태백시는 나와는 인연이 깊다. 교육대학을 졸업한 뒤 첫 발령을 받은 곳이 태백시 화전동의 화전 국민 학교였다. 당시는 황지읍 화전리였다. 대학원을 졸업하자마자, 대학에 첫 강의를 나간 곳 역시, 1996년 3월의 태백시 <태성전문대학>이었다.
태백시는 내 문학과 학문의 출발점인 곳이었다. 그곳에서 결혼도 하였으니, 태백은 또 다른 문학의 고향인 셈이다. 문단 생활의 시작도 태백시 화전이었으니 말이다.
발령을 받은 이듬해인 1974년엔 5학년 담임을 맡았다. 그리고 그해 겨울 아이들의 글을 모아 [나룻배]라는 학급 문집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배부하였다. 이 작품집은 이사를 자주 다니는 통에 유실되고 말았다.
1975년 을묘년은 문학의 출발점인 해이지만 너무도 힘든 습작의 시기였다.
화전 꾹민 학교 교무실에서 동시 ’호수‘를 최도규 선생님께 보여드린 일은 앞서와 같다. 『강원아동문학』 3집에 발표된 시는 끝부분을 수정하여 다듬은 시였다.
작품 [호수]는『강원아동문학』 3집에 발표되었다. 최도규 선생님의 배려였다. 나는 이 작품으로 <강원아동문학회>에 가입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1975년 8월 15일, 문학지에는 처음으로 발표한 작품이기도 하다.
1975년은 솔직히, 글쓰기로 힘든 해였다. 단지, 최도규 선생님의 격려로 힘겹게 글을 써 나가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어느 정도 읽히는 작품도 썼다. 1976년에 발표된 동시 [점심 시간]과 1976년 교육자료 초회 추천 작품인 [여름밤]이었다.
점심시간
남진원
종소리에
와!
지르는 함성들
여기 저기
점심밥 풀어헤친다
미순이는 계란
은정이는 멸치 볶음
구수한
풋 고추장 내음
자꾸 자꾸
침이 ……
그만
창밖을 본다
먼 산
나무들이
점점 흐려진다.
( 「점심시간」, 1976. 2. 10. 『경포』4호. )
1975년 작품 쓰기에 전진하여 12월에 얻은 작품이 [점심시간]이었다. 이 작품을 당시 <강릉교육대학>의 학회지인『경포』4호 에 투고하였다. 이듬해인 1975년 2월 10일 『경포』4호에 소개되었다.
이 작품은 글을 쓸 소재를 막연히 생각하다가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아이들의 아픔이 떠 올랐다. 그 모습을 소재를 쓴 글이었다. 당시에는 생활이 어려워서 점심을 굶는 아이들이 많았다.
내 작품이랍시고 쓴 글이 책에 인쇄되어 나온 작품은 이 시가 가장 처음이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내 글이 인쇄가 되어 이처럼 책에 나오다니 …‘ 나는 책에 인쇄되어 나오는 글은 모두 유명한 사람들이래야 나오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내 글이 나오다니, 너무 너무 감격적이었다. 그날 나는 그 책을 품에 안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작품을 쓸 때에는 별로 좋은 작품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 시가 인쇄가 되어 나와 다시 읽어 보니 엄청 좋은 작품으로 보였다.
작품 [점심시간]이 2월에 발표되고 1975년 8월엔 동시 [호수]가 『강원아동문학』 3집에 수록되는 영광을 안았다.
<강원아동문학회>가 發芽된 일은 1972년부터라 할 수 있다. 1972년 1월 춘천에서 몇 몇 사람들이 모였다. 발족 당시에는 12명의 회원이었으나 1973년 『강원아동문학』 창간호(1973. 5. 5.)를 발행할 당시에는 27명의 회원으로 늘어났다. 이 중에 『강원아동문학』 창간호에 글을 발표한 회원은 25명이었다.
초대 회장은 동화 작가 임교순이 맡았다. 『강원아동문학』 창간호에 작품을 발표한 회원은 심우천, 최돈선, 정호승, 박유석, 김종영, 방원조, 이연승, 김학선, 박의장, 김정자, 윤기정, 안상명, 고유환, 이흥우, 이장근, 이호성, 전태규, 엄순영, 최도규, 함종억, 최복현, 김만태, 임교순, 전세준, 최종남 등이다. 이흥우 선생님은 아직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벌이고 계신다. 동시 뿐만 아니라 시조에서도 두각을 나태내신다.
『강원아동문학』 창간호에는 회원 거개가 동시를 발표하였고 동화는 임교순이「인형이 사는 동네」,전세준이「하얀 십자가」, 최종남이 「연을 날리는 아이」를 발표하는 등 세 분이었다.
초기 회원중에 고상순, 박유석, 이연승, 최도규, 함종억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
<강원아동문학회> 회원 중에서 최돈선은 시인으로 활동을 하였다. 방원조는 경기도로 직장을 옮긴 후 아름다운 서정 동시를 발표하여 동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전태규 역시 시조와 시를 쓰는 시인으로 많은 활동을 하였다. 정호승의 경우는 서울로 올라가 시인으로 더욱 명성을 떨치고 있다. 회원들의 분포를 보면 김종영, 이호성, 최도규, 전세준 등 영동의 중후한 문학가가 참여하여 영동과 영서를 아우르는 강원도의 지역성을 갖추어 명실공히 지역적으로도 강원도의 대표성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초대 회장을 맡은 임교순은 회원들이 고향 의식으로 아동문학의 씨를 뿌린 것에 커다란 의미를 두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심우천은 꿈과 희망에 찬 <강원아동문학회>의 태동이 한국아동문학에 기여할 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기쁨을 드러내었다.
박유석은 회원들의 목소리가 메아리 되어 퍼지는 것에 대한 즐거움을 표하였다. 1971년 임교순의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화 당선, 심우천의 제8회 <월간문학 신인상> 당선과 1972년 최돈선의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1973년 김종영의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박유석의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으로 활기를 찾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유성윤과 김영기가 앞부분에 축사의 글을 발표하였다.
1970년대 초, 나는 박유석 시인 등의 문인과 춘천의 근교에 계시는 유성윤 씨댁을 방문하였던 기억이 있다. 그때 유성윤씨는 얼굴에 흰 수염이 많이 덮였는데 ‘이런 모습이 정말, 예술가의 모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방방이 책이 많아서 현관에까지 책들이 빼곡하게 쌓여있었던 모습이었다.
『강원아동문학』창간호에는 <회원 가입 안내> 소개의 글도 있다. 순수한 아동문학가 배출을 위한 모체 역할을 하겠다고 그 목적을 밝히고 있다.
이 숙원사업은 40여 년이 지난 이후에 실현되었다. 2015년 남진원 회장이 <강원아동문학회>를 맡으면서 현실화되었던 것이다. 『강원아동문학』 40집에 [제1회 강원아동문학 신인작가상] 공모를 하여 신인 작가를 문단에 등단시킨 것이다. 이후 <강원아동문학 신인 작가상> 공모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유능한 신인 작가를 지속적으로 배출하고 있다.
강원일보사는 1970년대 초반 이후, 일반인들과 학생들의 문예 작품을 많이 소개하였다. 강원일보사가 지역 문화 창달에 기여하는 이미지가 뚜렷한 부분이었다. 한 달에 한 번 토요일 字 전면에 문예 작품을 실었다. 여기엔 글을 애호하는 사람들의 작품부터 어린이 작품까지 망라하였다.
1975년 6학년 교실 뒷벽 상단에는 작은 액자들이 전시되기 시작했다. 강원일보사에 뽑힌 아이들의 작품을 오려 붙이고 최도규 선생님이 글씨를 써서 시화 작품으로 만든 액자를 게시하였다. 하나 둘 걸리더니 그 숫자도 점점 많아졌다. 나는 그 교실에 갈 때마다 그 액자들이 부러웠다. 그걸 본 나도 열심히 아이들의 작품을 신문사에 투고하였다. 그래서 우리 교실 뒤에도 몇 개의 작품이 게시되었다.
그리고 『교육자료』와 『새교실』 誌에서는 연신 최도규 선생님의 작품이 추천작으로 뽑혔다. 그럴 때마다 내가 뽑힌 것처럼이나 기뻤다. 학교 근무가 파한 그 날엔 학교 뒤쪽의 구멍가게에 우리가 있었다. 추천의 축하주를 마시기 위해서였다. 글 이야기를 하며 술을 나누는 그때는 정말 가장 즐거운 시간들이었다.
최도규 선생님의 추천 작품들은 나를 놀라움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1975년, 최도규 선생님은 『교육자료』와 『새교실』에 꾸준히 좋은 작품이 추천되었다. 그럴 때마다 내가 담임한 아이, 이정화 어머니가 운영하는 구멍가게에 가서 축하주를 마셨다. 나는 아무리 열심히 글을 써도 심사자의 평에도 오르지 못하였다. 최도규 선생님은 그럴수록 더욱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결국 나는 이 해에는 아무 곳에서도 추천을 받지 못한 채 한 해가 무위로 지났다.
결실이라면 <강원아동문학회>에 가입하고 『강원아동문학』3집에 최도규 선생님이 동시 ’호수‘를 발표시켜 준 일이었다. 추천은 받지 못했지만 가장 힘들고 아프게 문학 수업을 한, 일 년이었다.
특히 글을 쓸 때 고향 집의 아름다움을 생각하고 그 모습을 형상화하는 데 힘썼다. 아름다운 고향은 내 문학의 동력이었다.
함종억 산생은 강언아동문학회 사무국장일을 맡아 하셨다. 그리고 더욱 나를 놀라게 한 일은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동시가 당선한 일이었다. 그 제목이 「새벽」이었는데 내용이 너무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내가 강원일보 신춘문예 동시 작품 중에 가장 맘에 드는 작품이었다. 그 작품은 바다의 일출을 형상화하였다. 나는 아름다운 강릉의 바다에 살고 그 선생님은 바다에 살지 않고 홍천에 기거하고 계셨다. 그런데 작품 내용은 일출의 광경이 너무나 새롭고 아름다웠다. 강릉에사는 나는 부끄러웠자. 그리고 함종억 선생님이 존경스러웠다. 역시 저력이 잇는 분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또 한 번 놀랐다. 그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비보였다. 정말 얼마나 놀랐는지 몰랐다. 한창 좋은 글을 쓰기 시작하셨는데 돌아가시다니 …. 제일 안타깝고 슬펐다.
선생님을 생각할 때마다 그 작품 ’새벽‘이 떠오른다.
새 벽
송영희( 본명: 함종억)
검푸른 수평선
하늘 끝 닿은 곳에
석류속 보다 진한
물빛이 섰다
청청히 고운 물에
밤새도록 몸을 씻고
불끈 솟는
빨간 해
나무는 잠을 털며
산을 깨우는데
새들 깃에
묻어오는 새벽
쏴아 -
밀려오는 파도 소리에
쩡 - 하고
깨어나는 마음
하늘은 바다를 열고
알몸인 해를
파란 보자기로 받는다.
어린이들이 읽기에는 조금 어려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굉장히 아름답고 좋은 작품이다. ’동시‘라고 하여 독자가 어린이 만은 아니다. 동심이 깃든 모든 어른들도 독자가 된다.
바다의 새벽이 붉어지는 모습이 섬세하고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석류속 보다 진한 / 물빛이 섰다‘ 라는 데에서는 미감을 느낀다.
해가 솟는 모습도 박진감이 있고 보는 이의 마음속에서도 즐거움이 일렁인다.
‘청청히 고운 문레 / 밤새도록 몸을 씻고 / 불끈 솟는 / 빨간 해’
사람들은 바다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며 새로운 하루를 준비한다. 이 작품은 바다에서 떠오르는 해의 장엄한 모습을 그렸다. 영상미로서도 손색이 없다. 하늘은 기다렸다는 듯 파란 보자기로 해를 받는다는 데에 오면 숭고함마저 든다.
새로운 생명에 대한 탄생을 해에 은유하여 신비감과 위대한 모습을 증폭시켰다. 존재의 경이로움마저 느껴진다.
나는 바닷가에 살지만 해뜨는 모습을 생각하면 바다에 가지 않고 이 작품을 읽는다. 아름답고 힘찬 생명감을 노래한 함종억 작가님이 유명을 달리하였기에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위대한 작가 한 분을 잃은 슬픔이 크다.
아름다운 문학의 스승, 나의 고향 骨只里
돌아보니, 문학에 몸을 담은 지, 50년이 넘었다. 반 백년의 시간이다. 언제 이리 세월이 간지 모르겠다. 오늘의 작품들을 읽고 써 나가다가 알게 되었다. 나의 문학 스승이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스승 없이 어찌 공부를 할 수 있었으랴. 그 첫째 스승이 바로 풍요로운 상상력의 보고인 나의 고향 골지리였다.
나는 1953년 10월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의 한 마을인 골지리(骨只里) 양지 마을에사 태아났다.
후일 마을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마을 이름이 좋지 못하다고 하여 법원의 판결을 받아 ‘문래리(文來里)’로 개명하였다.
우선,‘골지’라는 지명에 대한 내 사견을 제시하려고 한다.
우리 마을 옛 어른들과 주위 사람들은 골지리를 ‘골개’ 또는 ‘골계’라고 불렀다. 이는 내가 어렸을 때 어른들로부터 들었던 마을의 이름이다. 나는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우리 마을의 아름다움을 생각하곤 하였다.
‘ 골개’는 한자어로는 ‘骨皆’이다. 산의 형체가 동물이나 사람의 뼈같은 모습에서 불려졌을 것으로 보인다. 금강산 일만이천 봉우리 역시, 겨울이면 하얀 뼈 같은 모습으로 특유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기에 ‘개골산(皆骨山)’이라 불렀다. 마을 앞쪽을 보면 산의 일부가 깎아지른 절벽(뼝대)이 길게 가로지른 것을 볼 수 있다. 또 신작로를 따라 하장면 쪽인 토산리로 가다 보면 호랑바위 부근 역시 뼝대로 길게 뻗어있다. 마을의 대부분이 바위의 위용을 자랑하는 뼝대 또는 뼝창이 많아서 이름도 ‘骨皆’라고 불려지던 것이 ‘골지’로 변환된 것 같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골계(谷溪)’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골계는 ‘아름다운 물이 흘러가는 계곡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골지리는 마을 앞의 문래산 아래로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골지천이 자리하고 있다. 이런 걸 생각해 보면 골지리는 아름다운 마을이라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마을 건너편 커다란 문래산(文來山)은 해발 1081.5m로 그 이름처럼 걸출한 학자나 문인, 문사를 배출하는 산이라는 뜻이다.
내 고향 골지리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금수강산이라는 말의 30%는 그대로 옮겨 놓아도 무방한 마을이었다. 동서로 길게 뻗은 마을은 석둔 앞쪽의 내에 큰 보가 있었다. 이 보는 마을의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만든 저수지였다. 마을 앞 쪽 넓은 벌판은 모두 논과 밭으로 대부분 논이 중심이었다. 논에 물을 대기 위하여 석둔 보에서 흘러나오는 도랑물은 마을 앞쪽으로 흘렀다. 마을 사람들은 빨랫감을 가지고 나와 그곳에서 빨래도 하고 아이들은 여름이면 멱도 감고 고기를 잡기도 하였다.
벼를 심은 논이 많기에 가을에 벼를 다 털고 나면 볏짚이 많았다. 마을 사람들은 지붕을 이 볏짚으로 엮었다. 논에는 벼를 심었지만 밭에는 삼(麻)을 키웠다. 그 삼의 잎이 나중에 대마초인 줄을 알았다.
삼은 자라면서 긴 줄기로 꼿꼿이 치솟으며 컸다. 나중에 다 자란 삼은 모두 베어 삼을 쪘다. 그럴 때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삼 구덩이를 만들고 삼을 넣어 불을 지폈다. 삼의 껍질이 다 익을 무렵엔 진물을 부었다. 둥근 삼 가마의 부분 부분에 구멍을 뚫고 물을 붓는 것이었다. 그러면 삼대의 줄기에 있는 삼 껍질은 모두 익었다. 아이들은 진물을 붓기 전에 삼의 흙구덩이에 감자를 묻어놓곤 하였다. 진물을 붓고 나면 감자도 맛있게 익었다. 우리는 그 감자를 냇가에 모여 앉아 먹곤 하였다.
삼을 찌는 일이 끝나면 삼대를 모두 꺼내 개울에 담가 뜨거움을 식힌다. 그러고나면 삼대의 삼 겁질을 모두 벗기고 벗겨진 삼대는 한곳에 모아 세워서 말린다. 삼을 벗긴 삼대를 저릅대이라고 하였다.
초가지붕에 짚을 올리기 전에 이 삼을 벗긴 저릅대를 촘촘이 깔아놓고 그 위에 짚을 덮는다.
참새들은 초가지붕의 저릅대 속을 파고 들어 그 안에 집을 짓고 겨울을 나기도 하였다. 그래서 마을 아이들은 오래된 초가집의 지붕에서 참새알을 꺼내기도 하고 잠이 든 참새를 붙잡기도 하였다.
초가집은 오래될수록 멋이 있다. 초가집의 깊은 맛과 멋이 오래된 볏짚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오래된 초가집 위로 눈이 쌓이고 쌓인 후, 봄이 가까이 오면 낙숫물이 떨어진다. 그 낙숫물 소리가 조용한 음악이며 장관이었다.
낙숫물 소리
남진원
초가집 낙숫물 소리를 듣고 있으면
어디선가, 봄이 오는 낭랑한 음악 같아서
꿈꾸듯 마냥 행복해지는 마음
꺼칠한 세상살이에서
따뜻이 만나는
오래도록 사귄 친구의 목소리 같은
늦은 겨울 듣던,
눈 녹는 초가집의
낙숫물 소리
아름다운 낙숫물 소리
잠들었던 작은 반가움을 깨우는 낙숫물 소리
어느새 이 시대는
우주의 땅으로 떠나버린
친구의 적막한 소식처럼
아득한 전설이 되었지만
오래된 녹음기를 찾아 다시 틀 듯이
고독한 산업화 시대의 한쪽을 열고
추억의 물방울 노래인 너를 찾아내어
고요히
고요히 마음의 귀를 기울인다
어릴 때 우리 집은 초가집이었다. 우리집 뿐만 아니라 마을의 모든 집들이 초가집이었다. 지붕을 이을 때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지붕위에 있던 썩은 볏짚을 벗겨내고 새 짚으로 덮었다. 한 2년 쯤 되면 저릅대가 꺼멓게 썩고 짚도 낡았다. 봄으로 가는 늦은 겨울 지붕에서 낙숫물이 떨어질 때면 짚이 썩는 냄새가 났다. 그 냄새가 무척이나 특이하여 고향을 떠올릴 때이면 그 썩으새 냄새를 생각하곤 했다.
어릴 때의 고향을 잊지 못하는 것은 초가집과 함께 아름다운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국민학교 시절 봄이면 뒷동산을 돌아다니며 바위틈에 솟아나는 달래를 캐러 다녔다. 한동안 헤매다가 뽀송한 황토 흙과 돌 사이로 실하게 자란 달래를 만나면 기쁨이 말할 수 없었다.
여름이면 어슴프레한 새벽을 여는 것은 싱싱한 매미 울음소리다. 한낮 더위를 식히기 위해 산제골 소로 찾아가면 누가 먼저 와서 텀벙거렸다. 그 소리를 들으면 괜히 기분이 좋았다. 잰 걸음으로 달려가 옷을 벗어 제치고 물속에 텀벙 텀벙 뛰어들었다. 한참을 그렇게 놀다보면 하나 둘 몰려드는 아이들로 산제골 소는 북새통을 이루었다.
제일 먼저 산제골 소에 가는 날이면 좀 무서웠다. 시퍼런 물굽이를 헤치며 물속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아이들이 나타나면 구원병을 만난 것처럼 기뻤다.
가을이 되면 앞 논벌은 황금벌판이 되었다. 콩잎을 젖히며 논길로 지나가면 메뚜기들이 후두둑 후두둑 놀라 달아났다. 알밤이 익을 무렵엔 석둔 계곡으로 놀러갔다. 알밤이 물 속에 툭툭 떨어져 있기도 하고 잎새 뒤에 숨기도 하였다. 주머니가 볼록하도록 밤을 주워왔다.
결국 아름다운 고향이 있었기에, ’여름밤‘이라는 작품이 그 이듬해인 1976년 『교육자료』 3월호에 추천 1회로 발표되는 성과를 이루었던 것이다. 또한 1975년의 창작 고통이 없었으면 생각할 수 없는 결실이었다.
성찰의 시간
젊음이 어젠 듯한데, 어느새? 인생 후반기가 되었다. 중국의 진나라 때 환거기는 검소하게 사는 것을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하루는 환거기가 목욕을 하고 나오자, 부인은 새 옷을 가져다 주었다. 늘 헌 옷 만을 입고 다니는 모습이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환거기는 크게 역정을 내며 다시 가져가라고 하였다. 부인은 다시 헌 옷을 가져다주며 말했다. “사람들이 전하는 말에, 옷이 새것을 거치지 않고 어떻게 낡았겠는가? 하고 말했답니다.” 환거기는 부인의 지혜로움에 크게 웃으며 새 옷을 입었다고 한다.
내 몸 역시 젊음이 없이 어찌 이리 늙었겠는가. 헌 옷을 입고서도 새 옷이었을 때를 돌아보듯이 함이 중요하다. 이제는 앞으로 나아가는 걸음보다는 뒤돌아보며 살아야겠다. 어찌 보면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축복이다.
내 어찌 오늘이 있기까지 내 힘으로 이룩한 것들이라 할 수 있겠는가? 주위의 많은 분들이 도와주고 아껴주신 덕분이란 걸 늘그막에야 알게 되었다. 주위의 고마운 분들 중에는 이미 타계하신 분들도 많다. 그 분들께는 삼가 명복을 빌면서 많은 고마운 분들의 큰 힘을 여기에 새겨놓는다.
동화속 같던 어린 날
나는 평생을 불만족스럽게 살지는 않았다. 살다 보면 뜻하지 않은 일도 많았지만 그건 누구에게나 오는 인생사의 한 대목, 대목일 것이다. 이런 면에서 나는 상당히 마음에 새길 수 있눈 지난날을 보냈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많은 시간은 글을 쓰는 데 보낸 시간이었다.
내 고향은 정선군 임계면 문래리, 당시는 골지리라 불렀다. 그곳에서 나의 유년기를 지냈다.
고향 집은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 사는 초가집이었지만 고향 집에서 보낸 날들은 어디에서도 겪기 힘든 아름다운 날들이었다. 할머니의 사랑 속에서 내 어린 시절은 그야말로 동심의 봄날이었다.
때 아닌 잔칫집 분위기
나는 시골에서 국민 학교를 졸업 후, 강릉의 경포중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당시는 입학시험이 있었다. 내 수험 번호는 242번이었다. 강릉이란 곳을 그때 처음 아버지와 함께 갔다. 시험을 친 뒤 얼마 후 발표가 라디오 방송으로 나왔다. 학교 선생님들이 방송을 들었다. 합격자 발표 때 내 수험번호인 242번을 들었다고 했다. 곧바로 선생님들이 모두 우리 집에 오셨다. 그날 우리 집은 때아닌 잔칫집 분위기였다.
강릉은 교육도시로 알려져 있다. 내가 국민학교를 졸업할 당시 교장 선생님 아들과 나, 토산에 사는 친구인 안홍문이가 강릉에 있는 중학교에 시험을 보고 들어갔다. 교장 선생님 댁 자제인 안창욱이는 명륜중학교, 안홍문이는 강릉중학교, 나는 경포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65년 3월, 문래 국민 학교가 생긴 이래 강릉의 중학교에 세 명의 어린이가 입학한 것은 처음 있는 아주 경사스런 일이었다. 학교됴 우리 집도 온통 잔칫집 분위기였다.
아버님의 걱정과 결심
아버님은 중학교에 입학한 나를 친척 집에 맡겨놓고 올라가셨다. 일명, 하숙을 시킨 셈이었다. 그러나 마음을 놓지 못하셨다. 그 집엔 얼굴이 시커먼 아이가 살았다. 아들이 없어서 양자로 들인 아이였다.
어느 날 아버님이 내려오셔서 영어 콘사이스 사전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나는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잉크 냄새가 마르지 않은 새 책들이었다. 당시 콘사이스는 헌책방에서 사들였다. 많은 아이들이 영어 콘사이스를 가져다 팔아서 용돈을 하였다. 내 콘사이스 사전도 하숙집 그 시커먼 얼굴의 주인공이 한 짓이 분명하였다.
그 아이는 어느 날 자신의 콘사이스를 팔아 챙겼다고 내게 자랑을 하였던 적이 있었다. 아버님은 무척 걱정이 되셨던 것 같았다.. 강릉에 큰마음 먹고 친척집에 아이를 맡기긴 했지만 친척집 아이의 꾐에 빠져 오히려 나쁜 길로 빠져들까 염려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버님은 콘사이스 사건 이후, 강릉으로 이사할 결심을 하셨다. 그리고 곧 실행에 옮기셨다. 삼척군 하장면 갈전리에 있는 다른 분의 고택 기와집을 매압하여 강릉에다 옮겨 지었다.
나는 하숙집에서 나와 강릉의 새집에서 학교를 다녔다. 내가 다니는 경포중학교는 새로 지은 집의 앞쪽에 있었다. 걸어서는 10여분 거리 밖에 되지 않았다. 강릉시 홍제동 179- 11번지. 이 집에서 강릉교육대학을 졸업하고 발령을 받을 때까지 기거하였다.
우울했던 나의 중학교 생활
나는 모든 환경이 낯설어서 학교생활은 물론이고 강릉에서 지내는 일이 달갑지 않았다. .반 아이들은 내가 시골에서 내려온 것을 알고 놀려 먹기가 일쑤였다. 아이들이 조금만 시비를 걸어도 눈에 눈물부터 났다. 나는 아이들과의 생활에서 ‘울벵이’라는 명예롭지 못한 이름 하나를 더 얻었다.
그간 아버님의 엄격함과 무서움 때문에 내 기운이 푹 꺾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런 영향으로 나는 친구들의 그릇된 행동에 대해 저항 할 수가 없었다. 대신, 눈물로 그런 마음을 표시했을 뿐이었다. 아이들이 내게는 멋대로 놀리고 장난치는 건 예사였다. 나는 이런 아이들과 학교가 싫었다. 공부를 하다가도 고향 하늘 쪽을 바라보곤 하였다. 나의 중학교 학창 시절은 이처럼 엉망이었다. 중학교 생활 중에서도 유일하게 방학은 나의 숨구멍을 트여주었다. 방학을 하면 고향마을로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여름 철, 노란 교복과 모자를 쓰고 고향 마을로 가면 아이들이 놀라워하기도 하고 반가워도 하였다. 고등학교 때에는 끝내는 자전거를 타고 150리길 고향 마을을 달려가곤 하였던 것이다.
문학 청년이던 고등학교 학창 시절
어찌 어찌 공부를 하여 겨우 강릉고등학교 시험에 붙었다. 240명 모집에 아마 235등 정도로 들어갔을 것 같았다. 학교 생활 내내 시험을 보아 그 점수에 순위를 매겨 교무실 복도 위에 붙여놓았다. 나는 교무실 부근을 다닐 땐 다른 아이들처럼 고개를 쳐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내 이름이 맨 꼬래비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국어 시간만은 즐거웠고 열심히 배웠다. 양주동 선생의 ‘가시리 평설’은 재미에 재미를 더하였다. 특히 서정주 선생의 시 ‘국화 옆에서’는 그 아름다운 서정성에 압도되었다. 김소월의 시는 너무 좋아서 표지가 빨간 시집 『진달래꽃』을 사서 옆구리에 끼고 다닐 정도였다. 교과서에 실린 조병화 시인의 ‘의자’ 역시 좋아했다. 또한 중국 시인들도 좋았다. 이백의 시 ‘망여산폭포’에 나오는 ‘飛流直下三千尺’ 역시 놀라울 뿐이었다. 평이하면서도 호방함을 잃지 않던 당나라때 시인 두목의 시에도 매료되었다.
강릉고등학교 건물 바로 뒤쪽엔 아담한 연못이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한가한 시간이면 조용히 연못가에 앉아 맑은 물과 연꽃을 바라보는 즐거움이 꽤나 컸다. 그런 고요함의 시간이 정신을 집중시키는 힘도 되었다. 연못 바로 옆에는 미술실이 있었다. 장일섭 미술 선생님은 늘 그곳에서 근무하며 우리는 수업도 그곳에서 받았다. 고등학교 다니면서 재미있는 일이 없었는데 미술 시간 만은 정말 신났다. 장일섭 선생님의 현실 비판에 대한 강연이 얼마나 우리의 의식을 일깨었는지 모른다. 고등학교에서 존경하는 선생님이 없었다. 그런데 딱 두분은 존경의 대상이었다. 바로 장일섭 선생님과 상업을 가르치시던 장택기 선생님이었다. 장택기 선생님은 관동대학교를 나왔다고 학력이 시골대학 졸업이라고 은근히 깔보았다. 그러나 나는 그 선생님이야말로 존경의 대상이었다. 학습지도를 제일 열심히 하셔서 우리들에게 제일 이해하기 쉽게 가르쳐 주셨기 때문이다. 좋은 대학을 나왔다고 허명에 휩쌓인 여러 선생님이 계셨지만 그리 존경의 대상이 못되었다. 가르침은 이해가 어려웠고 보기 싫은 자존심만 센 분들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정치가의 꿈을 가졌지만 아버지의 만류로 강릉교육대학을 들어가 교원이 되었다. ‘울뱅이’의 별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강릉의 비술관 도장을 찾아가 무술을 익혔다. 그리고. 무술 사범이 되어 강릉의 군부대 군인들에게 무술을 전수하기도 했고 병산리에 가서 내 또래의 청년들에게 무술을 가르치기도 했다. 황지읍 화전 국민 학교에 발령이 났을 때에는 황지에서 미리 도장을 하던 김강산 형을 도와 황지 도장에서 무술을 지도해 주기도 하였다. 내 안에 숨어 있던 삶의 기백을 스스로 무술을 하며 모두 찾았던 것 같았다. .
아버님, 존경하는 나의 아버님!
아버지의 엄격한 교육 신념, ‘배워야 산다!’ 는 신념 덕분에 경포중학교와 강릉고등학교를 졸업 후 강릉교육대학까지 졸업하였다. 1973년 10월 13일자 교사 발령을 받고 초등학교에 근무하였다.
그 후 어느 날 국민 학교 동창생들을 만났다. 서류에 살던 창록이는 “넌 아버지 잘 만나 좋은 직장을 가졌구나!” 하며 부러운 듯 말하였다. 나는 당시 아버지를 잘 만났다는 말에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무서운 아버지를 ‘만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더 강했다. 그런데 창록이가 그런 말을 하니, 괜한 말이라고 여겼다.
어느 날 돌이켜 생각하니 친구들의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내 친구들은 학교를 다니지 못하여 거개가 탄광을 전전하였다. 그게 얼마나 고단한 삶인 줄을 나는 황지읍에 살면서 알았던 것이다. 아버지 덕분에 친구들도 부러워하는 직업을, 내가 갖은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아버님이 살아생전에 내가 이런 생각을 하였어야 했다., 나는 그때 이처럼 철딱서니가 없었다.
그리운 아버님
남진원
아버님 살아 계실 때엔
몰랐습니다
태산보다 큰 어른인 줄을
몰랐습니다.
어버이 살아실 제 섬기길 다하여라 라는
정철 선생의 시구도 귓등으로 들었습니다.
제 한 몸 죽을 때가 다 되어서야
아버님의 높은 뜻 알고
부끄러워
고개 들지 못합니다.
스스로 제 잘난 줄로만 알았던
무지와 어리석음의 못난 자식을
용서하지 마옵소서
어릴 때나 늙어서나
늘 아버님의 철부지 자식입니다.
모자란 자식입니다.
아버님,
그리운 아버님
부끄러워 아버님 앞에 고개 숙입니다.
죄스러워 아버님 앞에 엎드려 절합니다..
( 2025. 8. 25 )
방학이면 찾아간 고향 마을
중학교 1학년 때부터 3학년까지 한 분의 선생님이 담임을 하셨다. 3년 내내 급훈은 ‘남에게 뒤떨어진 점은 없는가’였다.
늘 급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경쟁심을 유발시키는 의도는 자칫 친구 간에 우정을 다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좀 뒤떨어지면 어떻고 뒤처지면 어떤가? 넉넉한 마음으로 주체적 공부를 하면서 살면 되는 일을 꼭 저렇게 경쟁적으로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강하게 들었다.
친구 관계도, 선생님도 못마땅한 학교생활이었다. 공부라는 게 원리는 없고 주입식 교육이었다. 그러나 방학만큼은 신났다. 방학은 이 모든 것에서 나를 탈출시키는 유일한 도구였기 때문이다. 방학을 하면 무조건 국민 학교를 다니던 고향으로 달려갔다. 그곳엔 반가운 친구들이 있었고 다정한 마을 어른들이 계셨다. 언제나 즐겁던 여름방학의 고향길이었다.
고등학교 때였다. 집에서 용돈을 주지 않기에 나는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150리 고향길을 가기도 했다. 삽당령을 넘을 때면 자전거를 끌고 령을 넘었다. .고향에 도착해서 친구들을 마나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지금 걷기도 힘든 나이에 생각하면 꿈만 같은 일이었다.
‘무작정 당신이 좋아요’라는 노래도 있지만 무작정 고향은 좋았다. 무슨 행동을 하여도 신나는 일이었다.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하는 것도 대단한 서커스를 구경하는 것만큼이나 재미있었다. 고향은 길옆의 돌멩이조차 친근하였던 것이다.
문학 인생에서 잊지 못할 분
1973년, 21살에 교육대학을 졸업(초등학교 2급 정교사 자격증 .제37647호. 문교부장관)하였다. 그 해 10월 13일자 발령을 받아 삼척군 황지읍 화전 국민 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다. 1974년 3월 초에 5학년 담임을 맡았다.. 아이들을 만나는 일이 그렇게 기쁘고 좋은 일인 줄을 몰랐다. 학년이 끝날 무렵에 아이들 작품을 모아 가리방으로 긁어, 학급 문집인 [나룻배]를 발간하였다. 이 문집은 실전되어 지금 전해지지 않는다.
1975년 3월 1일자로 황지 국민 학교에 근무하던 최도규 선생이 우리 학교로 전근을 오셨다. 내가 만든 문집을 본 모양이었다. 술 좌석에서 여러 선생님들께 내가 만든 문집 이야기를 하셨다. 그리고 내가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다는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의례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얼굴과 말에 진심이 배여 있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무슨 글을 써?’ 하며 실없는 이야기로 치부하였다. 그런데 그후 선생님들이 앉는 술자리마다 내 글 이야기를 꺼내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어쩔 수 없이 추천 응모작을 써서 『교육자료』와 『새교실』에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년내내 추천은커녕 선후평에도 내 이름은 오르지 못했다. 추천작은 못 되어도 아쉽다던가 앞으로의 작품을 기대한다든가 하는 이런 심사위원의 말씀을 기대했는데 말이다. 큰 실망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글재주가 없는 놈이야!’ 이런 자탄에 빠졌다.
이런 내 심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최도규 선생은 또 여러 사람 앞에서 ‘남선생은 멀지 않았어!’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자포자기에 빠졌다가도 그 말에 억지로 ‘쓰는 흉내는 내 봐야겠다’는 마음을 갖었다.
내 문학 인생에서 가장 잊지 못할 분이 최도규 선생님이다.
최도규 선생님은 1974년 「교육자료」에 동시가 추천되면서부터 작고하기 전까지 약 18년 동안 문단에서 주옥 같은 작품을 발표하며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셨다.
1979년 첫 동시집 『교실 꽉 찬 나비』를 낸 이후 많은 시집과 동요집을 내셨다.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최도규 선생님의 시 작품을 읽고 나서야, 평화로움과 감동의 맛을 느꼈다. 시어 하나하나가 모두 마음을 잔잔하게 흔드는 음악 같았다.
- 시, <목동>은 『교육자료』추천 작품이다.
다시 읽어 보는 명시
목동
최도규
목동의 팔베개에
졸음이 와 앉아
산에 걸린 하늘을
눈 속에 가둔다.
싸리순 칡넝쿨
한입 가득 돌리며
황소가
산허리를 먹어 없애면
겁먹은 갈잎
바르르 떨고
산을 타던 개미들도
방향이 없다.
도룽 도룽
익어가는 숨소리
바람이 몰고 가고
딸랑 딸랑
소방울
땀방울로 맺혀
목동의 이마엔
반짝이는
여름들.
우선 시의 소재 선택에서부터 남다르다. 목동, 싸리순, 칡넝쿨, 소 방울 등 소박하고 친근한 이름들이다. 산에서 황소를 돌보는 목동의 모습을 그렸다. 평화로운 풍경이 아름답게 묘사되어, 읽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나는 마음이 심란할 때엔 이 작품을 읽으며 평화로움을 얻었다.
실제로 어렸을 때 마을에는 내 또래의 아이들이 아침이면 소를 몰고 산으로 향했다. 소들이 풀을 마음껏 뜯어 먹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소를 산에다 풀어놓고 그늘 밑에 누웠다가 잠든 모습이 상상되었다.
목동의 눈에 졸음이 올 때 쯤이면 황소는 칡넝쿨을 먹으며 산허리를 돌아간다. 갈잎이 흔들리고 개미들이 움직이는 모습조차 시인의 눈은 놓치지 않는다. 목동의 잠자는 숨결을 도룽도룽이란 의성어를 사용하여 신선한 느낌이 든다. 한낮에 소들이 산을 돌아가며 풀을 뜯고 목동이 낮잠을 자는 평화로운 모습은 아름다운 한 폭의 풍경화이다. 최도규 시인의 작품처럼, 이렇게 자연주의 문학으로 마음을 평화롭게 흔드는 작품은 드믈다.
동시 <옹달샘>도 이런 유형의 작품에 속한다. 이 작품은 1977년 5월 제6회 기독교아동문학상 당선작이다.
옹 달 샘
최도규
산만큼 깊은 골에
조심스레 자릴 트고
퐁 퐁 동그라미
걸러 올린 옹달샘
하늘은 작아도
하루는 하루
산새 소리 흥겨워
물살이 일고
산나리 웃어 주어
더 맑아지면
눈빛 맑은 산짐승의
거울이 되고
크고 작은 나무들의
사진이 되고
산 푸른 이야기
종일 모아 담다가
산그늘이 무거워
촐랑 넘으면
조약돌 매만지며
숲속에 숨어
졸졸졸 산소리
풀어내는 산시내.
옹달샘의 아름다운 모습을 이토록 잘 그려낸 작품은 여즉 보지 못했다.
누가 읽어도 잘 전달되는 쉬운 작품이며 재미를 준다. 옹달샘은 산속의 동식물에게 거울이 되어주고 조약돌 매만지며 숲속에 숨어 산의 숨결을 풀어낸다고 하였다. 억지를 가하지 않은 무위의 자연에 대해 사랑의 시선으로 보았다. 그리고 자신만의 언어로 독특하게 작품을 그려 내었다. 최도규 시인께서 그리는 자연은 평화롭고 순수하다.
동시 <샘물터>는 1976년 5월 교육자료 동시 추천완료 작품이다.
샘물터
최도규
밤새
송
송
솟아 고인 샘물에
싸릿문 열치고
달려오는 엄마들
돌이도 고걸 먹어 크고
식이도 고걸 먹고 컸는데
돌이자랑 식이자랑
저마다 달라
동그마니 모여 앉아
꽃피는 샘물터
몰래 내려온
샛별을 퍼담고
일그러진 그믐달도
퍼담고 보면
왁자한 얘기들도
동이가득 넘쳐
촐랑
촐랑
만조가 된다.
샘물터 이야기와 물을 푸는 어머니들의 모습이 순박하고 박진감있게 그려졌다. 그리고 옛날 시골 어머니들의 생활 모습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어서 역사성이 있는 작품이다.
최도규 시인의 시 특징이라 할까, 매력이라 할까? 그것은 글의 흐름이 자연의 묘사로 이어가는 것 같았는데 그 끝을 보면 인간의 진한 정이 배어있는 점이다. 그래서 그 이상으로 감동을 전해 받는 것이다.
강변
최도규
해 저문 강변에
빨간 노을이 내리네
꽃노을 넘실넘실
강물에 실려 떠가네
누구를 기다리나
머리 긴 소녀는
아련한 물새 소리
강바람에 흔들리고
달맞이꽃 노랗게 핀
내 고향 그 강변
이 동요를 읽으면 절로 마음은 서정의 물빛으로 젖어든다. 해 저문 강변에 노을이 흘러내리고 그 꽃노을은 강물에 넘실넘실 떠가고 있다. 그곳에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머리 긴 소녀가 있고 물새소리 강바람에 흔들린다. 달맞이꽃은 노랗게 피어 강변을 물들이고 있으니 그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갈대밭
최도규
바람이 숨어 사는
갈대밭에서
누군가 만날 듯해
걸어보면은
훈훈한 흙내음이
먼저 달려와
덥썩 안겨주는
잊었던 고향
방아깨비 까딱까딱
가을을 찧어
맴돌던 잠자리만
붉어지누나
동시 <갈대밭>은 외로움과 쓸쓸함이 묻어나는 동시이다. 훈훈한 흙내음, 가을을 찧는 방아깨비의 모습, 붉은 잠자리 등에서 가을 서정의 깊은 맛을 느낀다.
선생님의 아름다운 작품들은 내일도 사람들의 마음 밭에 심어져 감동의 꽃잎으로 피어나리라고 본다.
1975년 6월 『새교실』 동시 1회 추천작품 ‘아가’ (추천:문덕수)
아 가
최도규
태양은
목이 말라
옹달샘 깊숙이
내려앉은 한낮에
잠은
아가를 데리고
맴을 돕니다.
고
작은 손
쫘악 펴
만세 부르다
내릴 생각 잊은 채
그냥 그렇게 돕니다.
송 송
땀 방울
꿈 방울로
익을 때
얼굴 가득
행복한 웃음으로
피고
엄마의 일손도
아가 따라 돕니다.
「새교실」에서 첫 추천을 받은 작품이다. 여름 한낮에 평화롭게 잠이 든 아가의 모습을 중후한 표현으로 멋지게 나타내어 감동을 준다. 태양이 목 말라 옹달샘 깊숙이 내려앉았다는 표현, 아가가 평화롭게 잠든 모습을 ‘만세 부르다 내릴 생각 잊었다는 것, 송송 땀방울 꿈방울로 익어갈 때 행복에 겨운 엄마의 일손도 아가 따라 돈다는 표현은 누구나 함부로 흉내 낼 수 없는 참신하면서도 무게 있는 이미지이다. 엄마의 사랑을 은근하게 작품 속에 녹여놓았다.
최도규 선생님의 아름다운 작품들을 읽으며 내 감성은 점점 무르익어 창작에 대한 욕구도 커졌음은 물론이다.
1975년의 내 문학 작품들
1975년 문학을 해야겠다는 각오를 하고 임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에 대한 열기는 점점 고조 되었고 추천이 되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더 한층 창작에 대한 힘을 기울였던 일은 사실이다. 이런 가운데 다행스런 일은 『강원아동문학』 3집에 동시 ’호수‘가 발표된 점이었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몇 편의 작품들을 쓰게 된 것은 매우 흐뭇한 일이었다.
가을
남진원
파아란 하늘 속
방울방울
새들의 고운 노래
노래 따라
훨훨
나래펴는
마음은
마냥
높아만 가고
아
나뭇잎 잎마다
활활
불꽃 피우는 햇살
꽃내음 포옥 배여오는
들판을 달리다가
바람은 꽃잎이 되어 뒹굴고
가을은
아가의 얼굴 만큼이나
맑고 탐스런 열매들을 익혀놓았구나.
( 1975. 9. )
호 수
남진원
쑤욱 쑥 나무들
누구 키가 더 크나
들여다보고
불긋불긋 나무들
누가 더 예쁜가
들여다 보고
볼 때마다
커지는
나무들의 꿈
클 때마다
보고싶은
나무들 마음
그때마다
빙그르
바람 따라 웃고
그때마다
방글
해님따라 웃는
나무들의
꿈이 크는
호수.
겨울꽃
남진원
봄엔 봄의 꽃이 피고
여름엔 여름 꽃이 피고
가을엔 가을 꽃이,
저마다
고웁게
피어나지만
겨울엔 겨울대로
하얀 눈꽃이 핀다
진달래보다도 더 고운
백합보다도 더 흰
코스모스보다 더 청순한
눈꽃이
나무에 내려와
꽃나무 되고
꽃밭에 내려와
꽃잎이 되고
우리 마음속에서는
마음 꽃피는
겨울엔 겨울 대로
하얀 겨울꽃이 핀다.
썰매
남진원
야호
엎어진다
자빠진다
대굴대굴 구른다
웃음이 하얀 눈밭에
꽃처럼 핀다.
위 작품은 나중에 다음과 같이 고쳐졌다.
⟱
야호
엎어진다
자빠진다
웃음이 대굴대굴 구른다
아침교실
남진원
하늘 담긴
마알간 이슬 방울
톡톡 굴리며
풀잎에
몸 헹구던
아침 바람
때맞춰
유리창을
달칵달칵 열어젖히는
아이들 얼굴 부비며
마알갛게
젖은 몸 드러내고
초록빛 숨결
밀어넣는
건강한 아침
새들의 휘파람 소리가
초록 아침에 실려
유리창을 파도처럼 넘어오고
하얀 잇새로 흐르는
고운 눈매로 번지는
꿈이 크는 웃음소리가
빛 물결 속에
퍼들퍼들 튀어오르는
아침교실
아침마다 거울과
남진원
세수를 하고 나서
거울을 봅니다
머리도 곱게 빗어야지
옳지, 그렇게 가르마도 타고
자, 한 번 웃어볼까?
엄지 손가락을
쏙 들어올리며
‘생긋’
하얀 이가 곱도록 내보입니다.
가방을 들었다가
또 한번
거울을 봅니다.
호호호 안녕
거울 속 얼굴과
아침마다 인사합니다
( 1975. 3.)
산사(山寺)
남진원
태고적 님의 자태
고요 속에 심어두고
목탁에 옥 굴리며
몸 헹구는 독경소리
빈 세월
마음 바늘로
빛을 깁는 산사여
(1975년 작)
여름밤
남진원
길쭉한 산그림자가
개울을 지나고 감자밭을 지나
온통 마을에 드러누울 때
얼룩소가 외양간으로
저녁을 몰아 들어가고
마당 한가운데에선
여우와 토끼와 호랑이가
실꾸리처럼 풀려나오는
할머니 옛날 이야기
마당가 대추나무도
살래살래 엿듣고
반딧불 반짝반짝
호롱불 들고 찾아오면
꽃잎 같은 아이들의
귀가 별처럼 열리는 밤
눈이 별처럼 빛나는 밤
어둠은
달빛에 쫓겨
무성한
옥수수밭에서
귀를 세우고 있었다.
(1975. 6)
탄마을의 밤
남진원
땅속 깊숙이
광차에 실려
어둠을 굴리고 나오는
까만 빛 덩이들
채탄장 꼭대기에서
촤르르 철컥
촤르르 철컥
저탄장에 쌓인다.
아빠 기다리는
엄마의 숨소리가
호수처럼 고인
마을
탄광의 기계소리가
새때처럼
새벽을 쪼아댄다.
( 1975. 6.)
꽃씨
남진원
가만히
책상 위에
귀대어 보면
지난 가을
내 서럽 속에 받아둔
꽃시들의 소곤거림
빨간 꽃씨는 빨강 꿈
노란 꽃씨는 노랑 꿈
파란 꽃씨는 파랑 꿈
저마다
소곤대는
고운 꿈 자랑
가만히
책상 위에
귀대어 보면
꿈씨들의
소곤거림
간지럽다.
( 1975. 3.)
살펴보니, 1975년 이 무렵에 쓴 작품들이 많이 있다.
‘꽃씨’, ‘아침마다 거울과’, ‘겨울꽃’, ‘ 아침교실’, ‘탄마을의 밤’ ‘가을’, ‘썰매’, ‘호수’ , ‘산사’, ‘여름밤’ 등의 작품이었다. 이 작품들은 대부분 학급문집 ,『꽃밭』이나 『탄마을 아이들 』에 아이들 작품과 함께 게재한 작품들이다.
지금 돌아보니, 작품 쓰기가 즐거운 일이면서도 힘든 일은 사실이었다. 나와 내 이웃, 그리고 자연을 그려내는 문학! 기뻐하면서도 역시 내 문학의 동력은 아름다운 고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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