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선교사 열전(83) 헬렌 펄 맥켄지 의사(1913.10.6)
08/25Updated: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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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준 교수의 호주선교사 열전(83)
헬렌 펄 맥켄지 의사(1913. 10. 6)
한국명: 매혜란 원장, 부산 1952-76
헬렌 맥켄지는 노블 맥켄지 목사와 메리 맥켄지의 장녀로서 부산에서 태어났다. 평양의 학교와 멜번의 장로교여학교에서 공부한 후에 헬렌은 멜번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1938년 말에 졸업했다. 1940년 선교사로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그녀의 계획은 전쟁으로 인해 방해를 받았다.
그녀와 여동생 캐스는 중국그리스도교회의 초청으로 1946년에 중국 남서부의 운남성에 파송되는 네 명의 선교사 팀의 일원이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오래된 도교 사원 안에 작은 병원을 설립하였다. 그들은 1950년에 중국을 빠져나와 호주로 돌아왔고 짧은 휴식을 취한 후 한국에 지원했다. 한국의 입국허가는 절차가 매우 오래 걸렸고 1951년 7월 말경에서야 이루어졌다. 선교부는 그들이 곧 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일본으로 보내 언어공부를 하도록 결정했다.
그들은 최종적으로 1952년 2월에 한국에 들어가도록 허락되었다. 주로 단순하고 힘든 일과 굳은 결심을 통해서 헬렌과 여동생 캐서린은 일신병원을 설립하고, 발전시키고, 지도했다. 그들은 가장 중요한 과제가 교육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간호사들을 조산사로 훈련시키고, 의사들을 전문 산부인과 의사로 훈련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들은 특히 한국전쟁과 그 이후 피난민 여성들과 어린이들의 고통, 그 이후 가난한 여성과 어린이들의 고통을 덜어주기를 원했다.
헬렌에게 주어진 특별임무는 그 병원의 원장이었으나 그녀는 항상 한국인에게 그 책임을 위임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1972년 일신병원 20주년을 기념하던 해에 김영선 의사가 병원장으로 임명됨으로써 그 일은 이루어졌다. 헬렌이 원장으로 있던 시대에 병원은 무에서 매일 평균 133명의 입원환자와 300명의 외래환자를 맞는 큰 병원으로 자랐다. 그녀가 한국을 떠나던 해에는 병원에서 6000명 이상의 아이들이 분만되었다. 또한 그 해에는 계속해서 교육병원으로 인정을 받기 위해서 다른 부서들이 첨가되었다. 기존의 산부인과 소아과에 내과, 외과, 마취과가 더 늘어났다.
헬렌과 캐스는 병원의 자원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환자들이 최선의 치료를 받도록 보장하는 것, 의사와 간호사들이 잘 훈련되도록 하는 것, 그리고 가장 어려운 것이지만 진정한 기독교 병원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자신들의 역할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여성과 어린아이들이 존엄성과 존경을 받고 치료받는 받는 병원, 치료비 지급능력에 관계없이, 기독교인이든 타 종교인이든 무종교인이든 상관없이, 최고의 치료와 장비를 사람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병원이 되기를 원했다. 그들은 그 병원이 모든 사람이 예수의 치료의 손길을 받을 수 있고, 그들을 붙잡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장소가 되기를 원했다. 이런 관점에서 아이러니 중에 아이러니는 선교병원을 가족들이 무료 혹은 저가로 치료와 수술을 받을 수 있는 장소로 생각했던 교회의 목사들과 헬렌이 충돌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선교회가 그 병원을 산부인과, 소아과 병원이기 보다 일반병원으로 전환하기를 원했다.
병원을 경영하는 책임 외에도, 헬렌은 산부인과의 많은 일과 의사들을 교육하는 많은 일을 직접 수행했다. 그녀는 지도자였고 아마도 그녀의 분야에서는 한국에서 가장 경험이 많은 의사였을 것이다. 헬렌은 또한 기독교 의사회, 연세대학교와 대구병원 이사회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그녀의 사역은 한국정부로부터 여러 차례의 표창, 1962년 여왕으로부터의 영국제국메달, 2002년 호주ㆍ뉴질랜드 산부인과 대학의 명예회원을 얻도록 했다.
헬렌은 마지막 연간보고서에서 감사를 표현했다.
보잘 것 없는 의료사역을 할 수 있었던 기회에 대해 [감사한다]. 나는 점점 더 작은 것에 관해 더욱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어서 정말 즐거웠다. 수 없이 많은 환자들의 감사에 대해 그리고 또한 감사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살 필 수 있었던 은총에 대해 [감사한다]. 내가 알게 된 사람들 그리고 일신병원의 증언을 통해 그리스도를 알게 되어 부유하게 사는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 [감사한다].
헬렌은 그녀가 의존하면 살아왔던 기독교 복음에 대해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옹호자였다. 그는 대학시절 학생기독운동(SCM)의 회원이었고, 1951년 선교대회에서 선교소명에 대해 연설했다. 그녀는 은퇴할 시점에 멜번신학교(Melbourne College of Divinity)에서 신학학사(BD)를 마쳤고 그녀의 아버지에 대한 전기 ‘선교의 사람-맥켄지’를 썼다.1)
1) Helen Mackenzie, Man of Mission: A Biography of James Noble Mackenzie (Melbourne: Hyland House, 1995) 한국판은 김영동 역,「호주 선교사 맥켄지의 발자취」(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6).
정병준 교수
(서울장신대학교 교회사 교수 / 멜번신학대학원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