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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의 소명
2011년 11월 26일 다우리 교회 토요학교 강연(오후 3시~4시 30분)
(* 특강을 받아 적어 다시 편집해 보았습니다)
총명한 아이
연출은 1955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났다. 양반들이 많이 살았던 창녕. 아버지는 막내 아들 연출이가 4살이 되자 서당엘 보내셨다. 아이의 총명함을 보셨던 것이다. 4살의 어린 연출이가 2달 만에 천자문을 다 외운 것이다. 신동이었다. ‘하늘 천, 따지, 검은 현, 누를 황......’ 이렇게 천 개의 한자를 다 외우다니! 비상한 머리를 타고 났던 것이다. 이 때부터 한문으로 쓰인 책만 있으면 읽는 것이 취미였다. 한 참 그림책을 읽을 아이가 한문책을 읽었으니 보통 아이가 아니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지 전에 대학, 중용, 논어 같은 책들을 읽었으니 그 총명함이 대단했다.
그런데 초등학교에 들어갔는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렇게 총명한 아이가 한글을 배우지 않고 학교에 들어갔고 거기서도 한글을 깨치지 못했던 것. 글을 깨치지 못했으니 시험을 보면 빵점이다. 한글을 읽고 쓰지 못하니 시험을 잘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시험 성적이 좋지 않았다고 벌로 매일 청소를 하고 십리 길을 다른 아이들보다 늦게 집에 돌아오곤 했다. 부모님도 아무도 그런 사정을 알지 못했고 연출도 그게 문제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도 연출은 재미있게 학교를 다녔었다. 중학교 1학년 누나가 어느 날 통지표를 달라고 해서 줬다. 누나의 얼굴빛이 달라졌다. 동생이 이렇게 성적표가 좋지 않은 줄 몰랐던 것이다. 누나는 당장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 알렸다. 그날 아버지는 화를 많이 내셨고 아들에게 매를 드셨다. 바로 그날 아버지는 아들에게 한글을 가르치셨다. 아버지가 책을 들고 한 페이지를 따라 읽으라고 하셨다. 그리고 다음 페이지를 읽으시는 데 연출이는 ‘아빠 잠시만요. 제가 읽을 수 있겠어요’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참 신기한 일이었다. 이렇게 쉬운 것을...... 그는 그렇게 한글을 깨우쳤다.
수학도 늘 빵점을 받아왔다. 한글도 모르고 아라비아 숫자도 몰랐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큰 형이 수학을 가르쳐주었다. 연출이는 1-9까지 숫자를 이해할 수 있었지만 ‘10’이 ‘10’이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형은 동생의 머리 구조를 이해할 수 없었던지 머리를 한 대 때리고는 수학 몇 문제를 내고 다음 날 까지 풀라하고 휙 가 버렸다. 연출이는 그 날 저녁에 수학을 다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 3학년이 되어 읽기와 수학을 다 할 수 있게 되었다. 2학년 때까지만 해도 성적이 형편없었던 터라, 3학년 진급이 되고 난 후 담임선생님이 시험 성적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그 후 연출은 한 번도 1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
교회에 가
불신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초등학교 4학년 때 참 신기한 계기로 교회에 발을 디뎌놓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교회를 매우 싫어하셨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교회에서 아이들에게 보낸 여름성경학교 초청 편지를 들고 오셨다. ‘연출아! 교회에서 여름성경학교를 한단다. 한 번 가 볼래?’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그 일은 아버지에게는 두고두고 후회하실 일이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 이후 연출은 절대로 교회를 빠져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교회에 나가는 아들이 못마땅해 하셨다. 반대와 핍박을 많이 하셨다. 그렇지만 연출은 교회가 재미있었다. 대구에서 부임해 오신 목사님 따님이 예뻤던 것도 교회에 가는 재미였다. 예배 시간에 예배에는 관심이 없고 예쁜 아이의 얼굴만 크게 보였다. 하지만 말씀을 들으면서 콩나물이 매일 주는 물을 조금씩 먹으며 자라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장로님의 가슴에 새겨지기 시작했다. 예쁜 아이의 얼굴은 점점 작아지고 예수님의 얼굴이 크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 성경 박사가 되다
어느 겨울 농한기에 동네 옆 교회에서 부흥회 사경회가 있었다. 당시 고려신학대학원에서 오신 유명한 홍반식 교수님의 말씀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았다. 그 후 연출은 그야말로 예수쟁이가 되었다. 연출은 사경회 내내 집에 가지 않고 말씀을 들으며 밤낮 가리지 않고 찬송하며 기도했다. 사경회 기간 중에 홍반식 교수님은 ‘자넨 신학을 해야 겠네’라는 말씀을 하셨을 정도로 강한 인상을 남겼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난 후 성경을 읽고 싶은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났다. 교회 장로님께서 보는 성경을 빌려 읽었지만 어려웠다. 그래서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는 형에게 성경을 하나 사 달라고 부탁을 했지만, 잊어버리고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결국 교회 장로님께 부탁을 드렸더니 기드온 협회에서 제작한 신약과 시편이 함께 있는 성경을 하나 구해주셨다. 마침 겨울 방학이라 밥 먹는 시간을 빼고 하루 종일 성경만 읽었다. 결국 방학 기간 동안 60번을 정독했단다. 그 집념과 열정이 대단했다. 그랬더니 성경이 머리 속에 다 들어왔다고 한다. 성경박사가 된 것이다. 노회 성경퀴즈대회에 나가면 고등학교 3학년 형님누나들과 경쟁을 해도 1등을 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연출은 초등학교 졸업 할 때 즈음 부산고등학교를 가고 싶어했다. 공부를 제대로 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부산에 있는 경남중학교에 유학을 가려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반대를 했다. 아버지는 예수 믿는 막내를 무척이나 싫어했다. 사랑스런 아들을 예수에게 뺐겼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들을 지극히 사랑했지만 아버지를 거역하고 예수님을 더 좋아하고 따르는 것이 괘심했던 아버지다. 더구나 집안에서 드리는 제사를 반대하고 드리려 하지 않자 아버지는 내 놓은 자식처럼 생각했다. 아버지의 사랑은 강한 질투와 미움으로 돌아왔다. 예수 믿는 아이를 공부시키지 않고 농사일만 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이 후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지 않았다. 학교 갖다 오면 꼴 베기, 밭일하기, 소 여물 끊이기 등등 끝도 없는 집안일을 시켰다. 공부할 시간이 별로 없었다.
어느 날 육군사관학교에 다니는 큰 형이 창녕중학교 원서를 사 온 것이다. 창녕중학교에 들어갈 것 같으면 입시 준비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그날부터 학교에 가질 않았다. 집에서는 학교에 간다고 나갔지만 다른 곳에서 놀고 학교에 가지 않았던 거다. 초등학교 담임교사가 어떻게 된 영문인지 가정방문을 했다. 선생님은 연출에게 왜 학교에 오지 않느냐고 물어 선생님에게 솔직하게 다 말씀을 드렸더니 이런 충고를 해 주시는 거였다. 중학교가 안 되면 고등학교를 부산으로 가면 되지 않느냐고 제안하셨다. 창녕중학교에서 1등을 하면 아버지가 경남고등학교 가는 것을 허락해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연출은 그 말에 설득되었다. 그날부터 연출은 그 담임 선생님 집에서 공짜로 하숙을 하면서 공부를 했다. 지금도 그 선생님의 은혜를 잊지 못한다.
중학교에 들어간 후 열심히 공부할 뿐만 아니라, 집안일도 부지런히 했다. 동시에 이런 저런 방법으로 돈을 모아 저축했다. 고등학교를 혼자 힘으로 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신앙훈련도 철저하게 받았다. 당시 교회 장로님 가운데 한 분이 훈련을 잘 시켜 주셨다. 정말 훌륭한 분이셨는데 이사야서를 66장 모두 외우도록 하셨다. 정말 대단했다. 지금도 이사야서의 내용이 익숙한 것은 그 때 외운 덕분일 것이다. 또 찬송가 가사를 다 외웠다. 혹시 교회 친구들과 이동을 할 때면 장로님이 찬송을 큰 소리로 부르도록 하셨다. 만약 가사가 틀리면 혼이 났다. 친구들과 함께 큰 소리로 찬송을 불렀던 기억은 잊을 수 없다. 바로 이 장로님이 성경책을 구해 주신 분인데, 이 분의 말이면 무조건 순종했다. 그렇게 된 한 사건이 있었다.
어느 여름 날 교회 아이들과 어디를 가다가 포도밭 옆을 지나다가 포도밭의 포도를 주인 몰래 따 먹다가 그만 들키고 말았다. 주인은 9명의 아이들을 몽땅 데리고 학교로 온 것이었다. 그런데 그곳에 마침 교회의 장로님이 계셨던 것이다. 장로님은 초등학교 교감 선생님인데 무슨 일로 그곳에 와 계셨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장로님이 야단을 치시는 선생님 앞으로 오시더니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제가 잘못 가르친 탓입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야단을 치던 선생님도 당황했다. 그 후 아이들은 풀려나게 되었고 장로님의 말씀이라면 끽 소리 않고 순종하는 양 같은 아이들로 변했다고 한다. 지금도 9명의 아이들은 교회를 떠나지 않고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단다.
결국 부산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것도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창녕군에서는 경사 났다고 난리가 아니었다. 소위 일류고등학교에 들어갔다고 모든 사람들이 좋아했다. 그런데 정작 아버지는 무덤덤하셨다. 그 학교가 어떤 학교인지도 모르고 계셨던 것이다. 그 때가 1971년이었다. 당시에는 기부입학이라는 제도가 있었는데 돈 많은 사람이 자녀를 입학시키기 위해 1500만원을 내야 시험 없이 입학시킬 수 있었다. 부산에서 방문한 친척이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 말씀드리자 그 때서야 비로소 막내 아들이 큰일을 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좋아하셨다. 그 때부터 아버지는 아들이 서울대학교 법대나 상대에 들어가 돈을 만이 벌 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셨다.
서울대학교에서 농촌 지도자로
열심히 공부해 대학 입시를 쳤다. 당시 본고사라는 것이 있었다. 예비고사를 치고 본고사를 보는 데 이 시험이 가장 중요했다. 그런데 그 시험에서 수학을 망쳐 그만 서울대학교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수학 문제가 1번부터 다 연결된 것이었는데 제일 쉬운 1번을 틀리면서 2-7번 문제를 다 틀린 것이었다. 연출에게는 충격이었다. 인생에 대한 회의마저 들었다. ‘공부는 믿을 것이 못되는구나’라고 생각한 그는 그만 시골로 내려와 농사를 짓겠다고 결심 했다.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농촌지도자가 되기 위해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고향 농사 상황을 살펴보았다. 지혜로운 그는 양파를 심으면 농가 수입이 좋아지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많은 반대가 있었지만 당장 실천했다. 그렇게 시작한 양파 농사는 대 성공이었다. 보리를 10년 심어 벌어들이는 소득보다 양파 1년 번 것이 더 많았다고 하니 굉장한 성과였다. 친구에게도 소개 해 주어 지금은 부자가 되었다. 이렇게 좋은 결과를 내자 너도나도 양파 농사를 짓게 되어 지금은 우리나라 전국 양파 공급의 70%를 공급할 정도로 유명하게 되었단다. 창녕에는 양파대학도 들어섰다고 한다.
소명
3년 동안 농사를 지었는데 계속할 수 없었다. 남자로 태어나 병역의 의무를 다해야 했다. 연출은 군 생활 후반기 어느 날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하게 되었다.
“하나님! 농촌에 있는 청소년들을 위해 일을 해 보고 싶습니다.”
왜 그런 기도를 했는지 모르지만, 그런 서원 같은 기도를 드렸다. 이 서원이 어떻게 열매를 맺을지 당시 몰랐다. 그리고는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다.
대학과 직장
군 제대 후 대학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6년을 쉬다가 공부를 하려니 쉽지 않았다. 서울로 올라와 본격적으로 4-5개월 준비해 시험을 쳤다. 늦은 나이에 모험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서울대학교는 포기하고 안정권으로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교에 입학했다. 정치보다는 외교 쪽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느지막하게 공부한 외무고시는 쉽지 않았다. 1차에 합격했지만 2차에서 떨어지는 것이었다. 대학을 졸업 한 후 취직을 해야 했다. 취직도 쉽지 않았다. 문제는 나이였다. 늦은 나에게 아예 원서를 제출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연출은 그 장벽을 뛰어 넘기로 결심을 했다. 당시 대한조선공사라는 회사가 있다. 당시 아주 잘 나가는 공기업이었다. 직접 사장을 찾아갔다. 비서실을 통과하니 비서들이 붙잡았다. 그들을 뿌리치고 사장실가지 들어가 사장과 단판을 벌였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원서도 받아주지 않는 것은 부당하다고 항의하고 정중하게 원서를 받아 줄 것을 요청 드렸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쳐다보던 사장은 그러면 원서를 보자고 했다. 회사 지원서를 보던 사장의 얼굴표정이 달라졌다. 성적이 너무 좋고 훌륭한 인재라고 생각했는지 사장은 그 자리에서 인사책임자를 불러 지원서를 받도록 지시했다. 공채 수석으로 당당하게 입사했다. 열심히 일했다. 업무능력을 인정받아 빠른 승진을 했다. 인사과에 배정되어 의욕적으로 일했다. 그런데 회사가 그만 부도가 나고 말았다. 스웨덴에서 큰 배 7척을 주문해 배를 지었는데 세계 경기가 나빠지면서 돈을 주지 않고 배를 가져가지 않아 그만 조선 공사는 부도 처리되고 한진중공업으로 팔려가게 되었다. 큰 시련이었다.
당시 세종로 교보빌딩 9층을 조선공사 사무실로 쓰고 있었는데 같은 빌딩에 조그마한 공간에 사무실을 차리고 사업을 하고 있던 선배 회사인 ‘모닝글로리’라는 회사가 있었다. 그 선배가 같이 한 번 일해 볼 마음이 없냐고 물었다. 처음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 그 회사에 들어갔다. 당시만 하더라도 ‘모닝글로리’라는 회사는 30명 직원의 이름도 없고 규모도 작았다. 종이를 파는 그런 제지회사였다. 거기서도 열심히 일했다. 회사의 상황을 파악한 후 그는 사장님에게 공책을 만들어 팔 것을 제안했다. 사장은 겨우 허락을 했다. 일을 시작하고 청소년들이 많이 듣는 라디오 프로그램 ‘별이 빛나는 밤에’ 광고를 했다. 공책을 만들지도 않았으면서...... 반응이 어떤지 보기로 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문방구에서 모닝글로리 공책을 사기 위해 갔다. 그러나 공책은 없었다. 관심은 대단했다. 문방구의 주문을 받고 선불을 받은 상태에서 공책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주문을 받아 보니 40만 권이었다. 대 성공이었다. 공책 100만권을 찍어내면서 사업은 커지지 시작했다. 이 회사에서 오래 있지 못했다. 사장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신의를 저버리는 사람과는 함께 일할 수 없었다. 그 회사를 나오고 말았다. 회사를 그만 두고 고생을 많이 했다. 그 후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거두절미한다.
농촌과 농촌 젊은이를 위한 소명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남부 경기도 지방에 1300여개 농가에 농기계를 공급하고 있다. 정치외교학과 출신 영재가 왜 이 일을 하고 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군대 있을 때 하나님 앞에 기도했던 그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농촌에서 일하면 돈을 많이 벌지는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밥을 굶게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소명은 지금 이루어지고 있다. 일단 농촌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것이 기쁨이고 즐거움이다. 동시에 약 2년 전부터 농촌의 청소년들을 위해 야학을 하고 있다. 방과 후 저녁 시간에 교회의 한 공간을 빌려 아이들에게 국어, 영어, 수학을 가르치고 있다. 이 아이들은 가정이 안정되지 못한 경우가 많다. 편부모 가정도 있고, 조부모 밑에서 자라는 아이들도 있다. 이들에게는 사랑과 관심을 줄 수 있는 교사가 필요하다. 김연출 장로님은 지금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 살아가고 계시다.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농촌에서 농민들의 필요와 청소년들을 가르치며 행복한 삶을 살고 계시다.
만약 김 장로님이 서울대 수석으로 합격했다면 지금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섭리하시는 분이시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7문의 답에 보면 “섭리란 하나님의 전능하고 언제 어디나 미치는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마치 자신의 손으로 하듯이, 하늘과 땅과 모든 피조물을 여전히 보존하고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잎새와 풀, 비와 가뭄, 풍년과 흉년, 먹을 것과 마실 것, 건강과 질병, 부와 가난, 참으로 이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니라, 아버지와 같은 그의 손길로 우리에게 임합니다.”라고 고백한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드실 때 기계의 톱니바퀴와 같이 만드셨다. 작은 톱니바퀴가 무슨 큰 역할을 하나,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의 톱니가 부서지면 세상이 움직이지 않는다. 각자의 톱니바퀴가 자기의 자리에서 그 역할을 다 해 줄 때 세상이 돌아가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진다.
하나님께만 영광과 찬송이 있기를......(Soli Deo Gloria!)
첫댓글 이것이 집에 놓고오셨다던 그 원본인가보네요
하하하!
그렇게 보이겠네요.
제가 강의를 요약해 다시 구성한 것입니다.
혹시 왜곡이 있었다면 말씀해 주세요.
내용중에 경남고가 아니ㅏ 부산고등학교이며, 당시 장로님으 초등학교 교감선생님이셨습니다.
그렇군요.
역시 오류가~~ ㅋ
죄송해요, 장로님!!!!
고치겠습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