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문학동네
'작별하지 않는다'는 죽은 사람을 놓지 못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잊는 편이 훨씬 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내 기억하기를 선택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나-경하
대학 졸업 때 만난 친구-인선
인선의 엄마-강정심
인선의 아빠-학영
딸-어떻게 기족을 잃었는지는 안나옴
책을 쓰기 위해 자료 수집, 악몽 꾸기 시작-2012년 겨울
책을 낸 때-2014년 5월
처음 검은 나무들의 꿈을 꾼 때-2014년 여름
나무를 심고 검은 먹을 입히는 짧은 기록영화 만들자고 약속함-2014년 가을
프로젝트 이름-작별하지 않는다
인선 어머니 장례식-2014년 늦가을
작별이란 제목의 소설을 씀-2017년 여름
진짜 작별
유서를 다시 쓰던 고장난 에어컨 집 새벽-2018년 여름
인선 손 다침-2018년 12월
인선의 영화-삼면화
1편 베트남의 밀림 속 마음들을 헤매 다니며 한국군 성폭력 생존자들을 인터뷰한 기록
2편 1940년대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했던 할머니의 치매에 걸린 일상을 다룬 것, 열여섯 살에 닷새 동안 혼자 만주 벌판을 가로질러 독랍군 캠프로 복귀했다던 노인의 이야기
3편 인선 자신을 인터뷰한 기록+1948년 제주의 흑백 영상 기록
인터뷰이는 아버지와 함께 동굴에 숨었던 여자아이, 아홉살 되던 겨울에 간 것이 마지막->인선
1948년에 인선의 엄마는 열세살
인선이 아홉살 때 아버지 돌아가심
p.20-21
모르는 여자들과 함께. 그녀들의 아이들과 손을 나눠 잡고 서로 도우며 우물 안쪽 벽을 타고 내려갔다. 아래쪽은 안전할 줄 알았는데, 예고 없이 수십 발의 총탄이 우물 입구에서 쏟아져 내렸다. 여자들이 아이들을 힘껏 안아 품속에 숨겼다. 바싹 마른 줄 알았던 우물 바닥에서 고물을 녹인 듯 끈끈한 풀물이 차올랐다. 우리들의 피와 비명을 삼키기 위해.
p.32
회전문을 통과해 마감재가 낡고 어두침침한 로비에 들어서자, 손가락과 발가락이 한 개씩 잘려 나간 손과 발의 사진이 벽에 붙어 있는 게 보였다. 눈을 피하고 싶은 것을 참으며 잠시 들여다봤다. 오히려 실제보다 무섭게 기억할 수도 있으니 제대로 보려는 거였다. 하지만 내 생각이 틀렸다. 그건 제대로 볼수록 고통스러운 사진이었다. 더듬더듬 그 사진의 오른편으로 눈을 돌리자 같은 손과 발에 손가락과 발가락이 봉합된 사진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또렷한 수술자국을 경계로 피부의 색깔과 질감이 달랐다.
p.44
입술을 다문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인선의 옆 얼굴을 나는 보았다. 특별한 미인이 아니지만 이상하게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녀가 그랬다. 총기 있는 눈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성격 때문일 거라고 나는 생각해 왔다. 어떤 말도 허투루 뱉지 않는, 잠시라도 무기력과 혼란에 빠져 삶을 낭비하지 않을 것 같은 태도 때문일 거라고. 인선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 혼돈과 희미한 것, 불분명한 것들의 영역이 줄어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우리의 모든 행위들은 목적을 가진다고, 애써 노력하는 모든 일들이 낱낱이 실패한다 해도 의미만은 남을 거라고 믿게 하는 침착한 힘이 그녀의 말씨와 몸짓에 배어 있었다.
p.87
그 후로 엄만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는데, 이야기는 커녕 내색조차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눈이 내리면 생각나. 내가 직접 본 것도 아닌데, 그 학교 운동장을 저녁까지 헤매 다녔다는 여자아이 애가. 열일곱 살 먹은 언니가 어른인 줄 알고 그 소매자락에, 눈을 뜨지도 감지도 못하고 그 팔에 매달려 걸었다는 열세 살 아이가.
p.105
접시에 김치를 덜어 식탁에 올려놓는 인선의 얼굴이 서울에서보다 평온해져 있다고 나는 그때 생각했다. 인내와 체념, 슬픔과 불완전한 화해, 강인함과 쓸쓸함은 때로 비슷해 보인다. 어떤 사람의 얼굴과 몸짓에서 그 감정들을 구별하는 건 어렵다고, 어쩌면 당사자도 그것들을 정확히 분리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겨울에 엄마는 그 이야기를 자주 했어. 한동안은 거의 식사 때마다 말했던 것 같아. 이 가시내, 죽 먹젠 그날 밤에 어멍한테 왔주. 죽 한 그릇 얻어먹엉 살아나젠 허멍.
p.134
무엇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나.
가슴에 활활 일어나는 불이 없다면.
기어이 돌아가 껴안을 내가 없다면.
p.218
집담과 밭담들. 돌로 된 집들의 벽체들만 남기고 모든 것이 불타고 있었어. 아버지가 집에 들어서자 마당 가득 붉은 게 흩어져 있어서 놀랐는데, 달아오른 고추장 장독이 터진 거였어. 집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총소리가 들렸던 팽나무 아래로 달려가 보니 일곱 명이 죽어 있었대. 그중 한 사람이 할아버지였어. 가호마다 주민 명부를 대조한 군인들이 집에 없는 남자는 무장대에 들어간 걸로 간주하고 남은 가족을 대살한 거야.
집까지 시신을 업고 가서 마당 가운데 뉘어 놓고, 아버지는 닥치는 대로 댓잎 한 아름을 끊어왔대. 헝겊 대신 그걸로 얼굴과 몸을 덮고, 아직 잔불이 타고 있는 창고 자리에서 자루가 타 버린 삽을 끌어냈대. 달궈진 쇠가 식기를 기다려 댓잎 위로 흙을 덮었대.
p.241
두 발이 돌이 되어 놀라는 여자의 모습이 그 순간 눈앞에 떠올랐다. 그때라도 다시 몸을 돌리고 산을 오르면 되었다. 아직 발이 굳었을 뿐이니까. 돌이 된 발을 끌고 몇 걸음 더 오르던 여자가 그러나 다시 돌아본다. 이번엔 종아리까지 돌이 된다. 무거운 두 다리를 끌며 여자가 더 비탈을 오른다. 고개를 넘어가면 살아남을 수 있다. 거기서 돌아보지만 않으면. 하지만 기어이 얼굴을 돌린다. 무릎 위까지 돌이 되자 더는 방법이 없다. 모든 집과 나무들 위로 차오른 물이 빠질 때까지 거기 서 있다. 골반과 심장과 어깨가 돌이 될 때까지. 벌어진 눈도 바위의 일부가 되어 더 이상 핏발이 서지 않을 때까지. 날과 달이 수천 번 수만 번 지나가는 동안 눈비를 맞고 있다. 무엇을 보았기에? 무엇이 거기 있기에 계속 돌아보았나.
p.251
통금 때문에 병원에 가지도, 의원을 부르지도 못하고 캄캄한 문간방에서 하룻밤을 보냈대. 당숙 내에서 내준 옷으로 갈아입힌 동생이 앓는 소리 없이 숨만 쉬고 있는데 바로 곁에 누워서 엄마는 자기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냈대. 피를 많이 흘렸으니까 그걸 마셔야 동생이 살 거란 생각에. 얼마 전 앞니가 빠지고 새 이가 조금 돋은 자리에 꼭 맞게 집게 손가락이 들어갔대. 그 속으로 피가 흘러 들어가는 게 좋았대. 한순간 동생이 아기처럼 손가락을 빨았는데, 숨을 못 쉴 만큼 행복했대.
p.256
엎드려 고개를 숙이기 전에 나는 자신에게 묻는다. 이것을 보고 싶은가. 병원 로비에 붙어 있던 사진들처럼. 정확히 보지 않는 편이 좋은 종류의 것 아닐까.
p.297-298
수건이 덮인 아버지 얼굴에 그 사람이 끝없이 물을 부었다고 했어. 젖은 가슴을 야전 전화선으로 묶고 전기를 흘려 넣었다고 했어. 산사람과 내통한 친구들의 이름을 대라고 그 사람이 속삭일 때마다 아버지는 대답했다고 했어. 모루쿠다. 죄 어수다. 나 죄 어수다.
그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엄마는 맥락 없이 자책했어.
그때 내가 무사 오빠신디 머리가 이상하다고 해실카? 무사 그런 말밖에 못해실카?
기억나는 건 그렇게 물을 때면 엄마가 내 손을 놓았던 거야. 너무 세게 잡아 아플 정도였던 악력이 거품처럼 꺼졌어. 누군가가 퓨즈를 끄는 것 같이. 듣고 있는 내가 누군지 잊은 것처럼. 찰나라도 사람의 몸이 닿길 원치 않는 듯이.
p.311
여기쯤 멈춰서서 엄마는 저 건너를 봤어. 기슭 바로 아래까지 차오른 물이 폭포 같은 소리를 내면서 흘러갔어. 저렇게 가만히 있는 게 물 구경인가, 생각하며 엄마를 따라잡았던 기억이 나. 엄마가 쪼그려앉길래 나도 옆에 따라 앉았어. 내 기척에 엄마가 돌아보고는 가만히 웃으며 내 뺨을 손바닥으로 쓸었어. 뒷머리도, 어깨도, 등도 이어서 쓰다듬었어.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