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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1박2일(2)
김 선 구
대마도 여행 이틀째. 지난밤에 묵은 ○○○호텔이 하룻밤 지내는 데는 손색이 없었지만 로비도 휴게실도 없어 호텔이라 하기에는 좀 빈약해 보였다. 아침식사 때는 식당이 비좁고 식탁이 모자라서 자리가 비는 데로 식사를 마치기에 바빴다. 일행과 함께 식사하며 환담도 하고 좀 여유가 있어야 좋은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식사라야 밥 한 공기에 된장국 한 그릇. 반찬으로는 김 몇 장, 닥 구앙 몇 조각 그리고 발효 콩 한 스푼정도가 전부였다. 농경지가 없는 땅에 살면서 항상 식량이 부족했던 대마도 사람들에게 젖어 있는 절약정신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나의 식습관으로는 적당해 보였지만 일반 관광객들에게는 다소 불만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에는 구경하고 체험하는 재미가 중요하지만 그 외에 잠자리도 편하고 식사가 풍요로워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통례이다. 뷔페식으로 양껏 즐기는 우리나라 호텔식사법하고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일본인들은 죽지 않을 만큼만 먹는 반면, 한국인들은 죽을 정도로 즐겨 먹는다는 얘기가 있다. 그만큼 우리에게는 풍족한 식사를 중요시 하는 문화에 젖어 있는 것이 아닐까.
어쨌거나 다시 여행이 진행되었다. 이즈하라를 출발하여 상대마 쪽으로 향하였다.
1. 만관교(만제키바시)에서
처음 행선지는 미즈시마마찌에 있는 만관교(万關橋)라는 다리였다. 푸른 숲을 배경으로 곧게 뻗은 길 위에 아치형 구조물이 빨간색으로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다리가 상대마와 하대마를 연결하는 다리였다.
잠시 대마도 지도에서 만관교의 위치를 살펴보았다. 만관교 좌편으로 거대한 호수를 감싼 것처럼 해안이 펼쳐져있다. 이곳이 얕은 물굽이이라는 뜻의 아소만이고, 만관교 우측으로는 좁고 작은 미우라만(三浦灣)이 보였다. 그 쪽으로 계속 나아가면 일본의 본토 규슈 쪽으로 가게 된다. 원래 두 개의 만 사이는 좁은 육지가 형성되어 양쪽 바다를 가르고 있었다. 여기에 다리를 놓게 된 것은 러일전쟁 당시 군사작전상 필요에 의해서 인공적으로 운하를 설치한 결과였다.
러일전쟁은 대한제국에 대한 주도권을 쟁취하기 위하여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벌린 전쟁이었다. 전쟁 초기에 일본이 선제공격으로 중국 뤼순 항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 함대가 큰 타격을 입었다. 이에 러시아에서는 발틱 해 함대를 전쟁에 투입시키기 위하여 동진할 것을 명한다.
한편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러시아에서 파견된 발틱 해 함대가 한반도 해협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할 것을 예견하고, 아소만과 미우라만 사이에 막힌 바닷길을 터서 함선들을 빨리 이동시킬 작전계획을 세웠다. 이에 따라 수중폭파를 감행하여 육지를 절단하고 운하를 만들어서, 일본 본토에서 출발한 함선들이 바로 아소만을 통과하여 대한해협으로 이동 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러시아의 발틱해 함대는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태평양으로 이동하느라 수개월이나 걸렸고, 대한해협을 거쳐 대마도에 이르렀을 때 러시아병사들은 지칠 데로 지쳐 있었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일본 함대가 공략하자 러시아 함대는 지리멸열 패퇴 하였다. 러시아 함선 35척이 침몰하였고, 병사 4800명이 전사하고, 6,000명은 포로로 잡혔다. 일본이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쓰시마 해전의 결과였다.
이 때 도고제독이 쓴 전술은 이순신 장군에게서 배운 전법이라 한다. 그는 매일 아침 영정에 참배를 드릴 만큼 이순신장군을 존경하였고, 임진왜란 때 왜군을 상대로 펼쳤던 장군의 해전전략을 연구했다고 한다. 비록 얼룩진 남의 나라 얘기지만 이순신장군의 넋이 대마도 앞 바다까지 휘젓고 있었음을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했다.
이때 만들어진 인공운하로 인하여 대마도는 두 동강이 났고, 운하 위에 다리를 만듦으로써 둘로 나누어진 대마도를 이어주는 교통요지가 되었다. 만관교는 세 번에 걸쳐 새로 고쳐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 만관교는 길이 210m, 폭 10m, 높이가 30m의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다리위에 서면 서쪽으로 아소만으로 이어지는 바다를 관망해 볼 수 있었고, 동쪽으로 미우라만을 낀 해변마을이 그림처럼 조용히 서 있었다. 그 너머로 푸른 바다가 펼쳐졌다. 임진왜란 때 왜적을 향하여 펼쳤던 이순신장군의 학익진행대가 잠시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2. 에보시타케 전망대의 전경과 와타즈미신사
다음에 찾아 간 곳은 토요타마(豊玉)마찌에 있는 에보시타게(鳥帽子岳) 전망대였다. 해발 176m 밖에 안 되는 낮은 언덕에 세워졌지만 주변에 그보다 높은 산이 없기 때문에 360도로 주변경관을 다 감상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아소만의 아름다운 전경이 시원하게 내다 볼 수 있도록 마련된 유일한 장소였다.
아소만을 라이스식 해안이라 불렀다. 대륙의 빙하가 녹은 뒤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육지 일부가 바다 속으로 침수되어서 만들어진 해안이다. 작은 섬과 울퉁불퉁한 형태의 땅들을 많이 볼 수 있는 해안을 의미한다. 전망대에 올라서 보니 바다위에 떠 있는 작은 섬들과 겹겹으로 이루어진 산들이 어울려 자연이 펼치는 심원한 파노라마를 연상케 했다. 특히 일출시에 방문하면 황금빛으로 물든 섬들이 교향곡을 연주하듯 황홀한 풍경을 그린다고 했다. 수많은 무인도와 잔잔한 수면에 비친 섬들의 모습
은 자연이 주는 최고의 절경으로 손색이 없을 듯 했다. 그래서 이곳을 베트남의 하롱베이와 비견된다고 소개했다. 석양과 일출이 아름다워 연말연시에 많은 관광객이 찾아온다고 한다.
지도를 펴고 다시 한 번 아소만 해안을 들여다보았다. 내륙 깊숙이 바다가 침범하여 실질적으로 대마도를 상대마와 하대마로 나누어 놓고 있는 형국이다. 해안가는 200~300m의 산으로 절벽을 이루고 있고 해안선은 꾸불꾸불하게 이어져서 해안선이 무척 길다. 대마도 전체 해안선길이가 915km나 된다고 하니 제주도의 해안선 길이 253km인 것에 비교해 보면 짐작이 갈만했다. 이와 같은 지형적 조건 때문에 아소만은 해적들의 소굴이었다. 자체에서 식량조달이 어렵고 보니 해적질 하여 살아가는 그들에게 배가 필수품이었을 것이고, 배를 안전하게 댈 수 있는 곳이 바로이곳 해안이었다. 이와 같은 지형적 이점을 이용하여 해적들이 집단 거주하였을 것으로 보였다.
역사적으로 보면 대마도의 해적들은 한반도에 골칫거리였다. 시시때때로 삼남 해안에 출몰하여 민가에 피해를 주었다. 그래서 고려시대에도 조선시대에도 여러 번 대마도 정벌에 나섰다. 고려 말 박위 장군이 1만 군사와 군선 100척을 동원 왜선 300척을 소각했고, 조선의 세종 때는 이종무를 도제철사로 삼아 군대를 파견하여 왜선109척을 소각, 20여척을 나포하였고, 2천 여 호 마을들을 불태우는 등 큰 타격을 주고 대마도를 봉쇄한 일이 있었다. 대마도주의 간곡한 요청으로 봉쇄를 풀어주었다. 요새 독도문제로 일본과의 정치적 관계가 심각 해 지면서 이 때의 처사에 아쉬움을 피력하는 경우가 많다. 그 때 잘 대처 했으면 대마도를 우리 땅으로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다. 과거의 적이었던 나라가 우방이 되고, 이웃을 위하여 베푼 선행이 어리석음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핍박과 설움으로 점철됐던 왜정시대를 돼 돌아보며 오늘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이제 당당하게 대마도 땅을 밟고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며 계단을 내려왔다. 주차장에 이르니 커피, 크로켓, 단팥빵을 파는 푸드 트럭이 손님을 맞이했다. 관광객들 모두가 한국인들뿐이었다. 이래서 한국인이 대마도를 먹여 살린다 하는 것일까! 우리도 단팥빵을 사들고 시식을 즐겼다. 청명한 봄 날씨가 대마도 하늘을 수놓았다.
에보시타케 전망대를 출발하여 잠시 내려오니 와타즈미신사라는 곳에 이르렀다. 이 곳은 일본의 건국신화를 간직한 곳으로 일본인 참배객도 많은 곳이라 했다. 전설에 의하면 하늘의 신 히코호호테미노가 낚시를 하다가 낚시 바늘 하나를 떨어뜨렸다. 그것을 찾으러 지상에 내려 왔다가 용왕 의 딸 토요타마히메의 공주를 만나 결혼. 그들 사이에 태어 난 후손이 일본 초대천황인 진무천황이 되었다는 얘기이다. 그래서 이 신사에는 천신인 히코호호테미노와 해신인 토요타마히메의 신주를 모시고 있단다.
이 신사에는 신사의 입구를 안내하는 기둥문 도라이가 5개나 있었다. 기둥문 5개가 바다를 향하여 질서있게 세워져 있는 모습이 이채로웠고, 그 중에 2개는 바다물 속에 잠겨 있었다. 밀물과 썰물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여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고 한다. 천신과 해신을 동시에 섬기는 의미인 것 같았다.
그런데 이 신사에는 한국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어서 버스에서 내려 둘러 볼 수가 없었다. 차창을 통하여 밖을 쳐다보기만 해야 했다. 이유인 즉 신사관리인이 철저한
군국주의추종자라는 것이다. 신사 옆에는 제국주의 상징인 욱일청천기가 높이 걸려있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한국관광객들 중 일부가 술 마시고 기둥을 발로 차는 등 추태를 부리는 바람에 관리인의 비위를 건드렸던 모양이다. 더구나 이 신사는 사유지여서 관리인의 행태를 행정적으로 통제 할 수도 없단다. 그렇다면 굳이 이 곳을 관장코스에 포함 시킨 이유가 무엇일까? 지나가는 길에 있으니 한 번 눈여겨 보라는 의미일까. 관리인의 처사도 그렇지만 용감한 대한의 애국자(?)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는 생각에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이러한 경우도 여행의 묘미로 받아들여야 할지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도리가 없었다.
3. 슈시강, 노도자키 공원과 미우다 해수욕장
상대마의 북쪽인 가미쓰시마(上對馬)마찌에 이르렀다. 숲 깊숙한 지점에 있는 슈시강은 강이라고 하기 보다는 시내물이 흐르는 계곡에 가까웠다. 7km이어지는 계곡을 따라 단풍이 아름다운 곳이라 했다. 단풍나무가 무성하게 자라서 형형색색으로 물든 모습이
유명하단다. 11월 상순경이면 단풍축제가 열리고, 찾아오는 사람들로 붐빈다고 했다. 우리는 계곡 입구에 서 있는 울창한 삼나무와 편백나무 숲을 거닐며 나무들이 뿜어내는 피톤치드의 효과를 즐기는 것으로 대신했다. 산책하기 좋은 곳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슈시강 관광을 끝내고 드디어 항구도시 히타카츠에 도착했다. 여기 식당에서 간편한 일식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가까운 곳에 위치 한 노도자키공원으로 갔다. 원래 여행계획에는 한국전망대를 방문하는 것이었으나 현재 공사 중이므로 일정을 바꾸었다. 대마도 최북단 와니우라 마을에 자리한 한국전망대는 여행자들의 필수코스라 했다. 그곳에서 부산까지 거리는 대략 49km. 날씨가 좋으면 부산이 보인다고 했다. 일찍이 대마도에 살던 조선인들이 고향이 그리우면 그곳을 방문하여 망향의 설움을 달래지 않았을까. 전망대의 설계를 위하여 한국건축 전문가들이 참여했고, 건축 재료도 한국에서 공수, 한국의 건축양식으로 지었다한다. 가서 동포들의 남겨놓은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쉽지만 한국전망대 방문은 다음 기회를 기약하는 수밖에.
노도자키공원에는 “일ㆍ러 우호평화 언덕”이라는 표시와 함께 여러 개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러일전쟁이 남긴 상처를 치유하려는 시도로 보였다. 노도자키는 쓰시마 해전에서 살아남은 러시아 군인들이 처음 상륙한 곳이었다. 전쟁당시 이곳 주민들은 러시아 군인들을 치료 보호해주었고, 일본정부에서도 포로들을 전부 본국으로 송환해 주었다한다. 그리고 2005년 쓰시마 해전 100주년을 기념하여 그곳에 조각상들을 건립하였다. 그 당시 죽은 러시아 병사 4800명 모두의 이름을 하나하나 새겨 놓은 위령비가 눈길을 끌었다. 이웃 나라의 일이지만 방문객들에게 좋은 인상을 줄 것으로 보였다.
다음에 찾아 간 곳은 가까운 거리에 있는 미우다 해수욕장이었다. 미우다 해수욕장은 일본의 아름다운 해안 100선에 선정될 만큼 주변 경계가 참하고 바닷물도 맑고 깨끗하였다. 영롱한 에메랄드 빛 바다와 고운 입자의 천연 모래가 널려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고, 사진 찍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작지만 아담하고 물이 깊지 않아 가족들 물놀이로 적당하단다. 우리 일행은 모래 위를 걸으며 분위기를 즐기고, 사진도 찍으며 여행의 대미를 장식했다.
4. 여행을 마치며
조선 세종 때 이종무가 대마도원정을 끝낸 후 대마도는 조선과의 모든 교류가 끊겨 경제적으로 최악의 상태를 맞이했다. 이에 대마도주는 “조선을 주군으로 모시고 주명을 지정 받고자 합니다.” 하는 항복문서를 조선에 보내었다. 이에 조선의 조정에서는 이를 가납하여 대마도를 경상도에 예속시켰다. 그러나 일본 무로마치막부의 반발로 계속하여 대마도를 조선 령으로 둘 수 없었다. 대마도가 한국 땅이 될 절호의 기회를 놓진 셈이다.
대신 대마도 사람들에게 조선의 벼슬을 내리고 교역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이들을 수직왜인(受職倭人)이라 했고, 그 대표적인 존재가 오자키의 해적왕 소다가문이다. 그는 조선으로 보내는 세견선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았다.
조선에서는 부산포(동래), 염포(울산), 내이포(진해)를 개항하여 대마도 교역 선들이 드나들 수 있게 하였다. 자급지족이 어려웠던 대마도인들에게 조선은 삶의 터전이었다. 조선에서는 때때로 쌀을 보내어 위무하기도 하였고, 왜적이 창궐하면 소탕하기도 하였다. 오랜 세월 고운 정 미운 정을 함께 한 관계가 이어져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대마도인들도 땅은 일본에 예속되어 있지만 마음은 한국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닐는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버스가 가까운 곳 히타카츠 항으로 이동하였다. 이윽고 부산 행 여객선에 승선함으로서 대마도 여행 1박2일 일정을 끝맺었다.
첫댓글 대마도 여행기를 자세히 쓰시어 실감이 납니다.
대마도 여행기에 관심을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현지를 답사해 보고 나서 느끼는 기분이 달라짐을 느낍니다. 그것이 여행의 묘미인가 봅니다.
왜적하면 나쁘게만 여겨왔는데 왜적질도 처한 환경에 적응하여 살아가기 위한 방편이었음을 알게되었습니다.
대마도는 지리적으로 보나 역사적으로 보나 일본 보다 우리에게 더 가까운 곳.
좀 더 관찰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속속들이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제의 옻골 강의도 정말 고마웠습니다.
해설사로 활동을 하시면 최고의 찬사를 받으시겠습니다
종종 좋은 글 많이 올려 주셔서 가르침을 주시면 더욱 고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