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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과목科目
변 영 희
지희文池喜는 신호등 앞에 서 있다. 그녀가 서 있는 앞과 뒤에도 대여섯 명의 행인들이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우두커니 서 있다. 우두커니가 아니라 추운 날씨 탓에 초조해 보이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아예 오른발을 보도 가까이 내놓고 신호가 바뀌기만 하면 냉큼 달려 나갈 태세를 취하고 있다.
하루걸러 또는 이틀 걸러 눈이 내리더니 비교적 맑고 파란하늘을 보이고 있다. 겨울 날씨가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을 적당히 거느릴 정도면 차를 몰고 온천여행을 다녀와도 무리하지 않을 듯하다. 겨울은 역시 온천이 최적이다. 더구나 야외 온천이면 운치가 더할 것이다. 눈 내리는 날의 야외온천. 생각만 해도 가슴이 따스해지지 않는가. 따끈한 물속에 몸을 담그고 고개를 들어 풀풀 날리는 눈발을 바라보는 일이야말로 겨울철 서정으로는 으뜸이 아닐까. 그러나 현재의 그녀에겐 그림속의 떡이다.
그녀는 건너편의 주상복합 건물을 올려다본다. 건물 벽면에 각종 간판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어느 간판이 어느 층에 속하는지 헤아리기가 쉽지 않다. 아무튼 주상복합 건물 2층에 하나은행이 있고, 지하에는 수영장이 있다. 그리고 4층에서 6층까지는 내과 치과 안과 한의원 약국 등 병의원이 자리 잡았고, 7층부터는 주거용 아파트라는 것을 이 동네에 주민등록을 이전하고서야 대강 알게 되었다.
지희가 생각에 잠겨 동서 좌우를 살피는 동안 신호등은 파란색으로 바뀌었고 좀 전에 그녀의 앞뒤에 멈춰 서 있던 다른 사람들은 이미 길을 건너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간 후였다. 그녀는 추호도 동요함이 없이 천천히 점퍼 주머니에서 가죽장갑을 꺼내 손에 끼었다.
다시 파란불이 켜졌다. 그녀는 앞을 똑바로 보고 발걸음을 떼어놓았다. 등에 짊어지고 있는 검정색 배낭이 그녀의 걸음걸이 속도에 따라 이쪽 어깨에서 저쪽 어깨로 왔다 갔다 하면서 잠시 뒤뚱거렸다. 배낭에 든 물건들은 무게가 꽤 나가는 것으로 보였다.
두터운 점퍼 칼라가 거의 목선에 치켜 올라가 있었지만 지퍼를 조금 느슨하게 밑으로 내릴 생각은 하지 않는다. 털모자가 달린 점퍼에 머플러, 가죽장갑 등으로 무장했으나 전체적으로 그녀의 차림새는 어딘가 어설퍼 보였다.
그녀가 점퍼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다. 무엇에 자극을 받은 듯 지하철역 구내로 들어서자 그녀의 행동거지는 갑자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곧장 개찰구로 달려가더니 잰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그녀의 발소리에는 일정한 음률이 실려 있어 그 음률은 그녀 자신의 건강을 재는 척도로도 인정할 수 있을 정도였다. 산뜻하고 날렵한 걸음걸이였다. 메스꺼움 증상이 심하지 않을 경우에 한해서 그녀의 동작들은 다른 이들과 비교하여 별반 차이가 나지 않았다.
지하철이 전역을 출발했다는 자막이 뜨고 1, 2분 경과했을 때 노란선 안으로 한 발 더 비켜 서 있으라는 안내 방송이 나오고 3호선 대화행 지하철은 정차했다. 승객들이 내리자 지희는 서슴없이 지하철 안으로 성큼 발을 들여 놓았다.
창밖에는 빈 들판이 나른하게 펼쳐지고 여러 동의 비닐하우스가 빈 들판 한가운데를 점령하여 겨울 채소를 키우는 중이었다. 대규모의 비닐하우스는 출입문이 닫혀있거나 혹 열려 있다고 해도 비닐하우스 안에 어떤 작물이 자라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투명한 비닐장막을 통하여 푸른 색깔이 언뜻 비치는 것 같기는 했다. 상추, 쑥갓, 치커리, 케일 등의 쌈 채소이거나 철 이른 딸기 꽃이 하얗게 피어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곡역 구간은 지하가 아닌 지상을 달려 지루하거나 답답하지 않은 면이 있었다. 지희는 이곳을 지날 때면 일부러라도 감고 있던 눈을 뜨고 기꺼이 창밖을 두리번거리면서 살펴보곤 했다. 멀리 산 밑에 지은 지 오래된 단독주택들이 있고, 주변엔 크고 작은 무덤들도 더러 보인다. 산과 나무와 집과 어울려 그 무덤들은 햇볕 잘 드는 양지에서 살아있는 자들과 동거 동락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반대편의 거리 풍경은 별다른 감흥을 일으키지 않았으나 여름에 다녀본 기억으로 회화나무 가로수가 연녹색 꽃잎을 휘날리며 길 양 편에 죽 열 지어 서있던 것을 볼 수 있었다. 회화나무는 벚꽃나무나 은행나무와는 또 다른 색감과 멋스러움으로 다가와 큰 골짜기란 뜻의 대곡역을 지날 때 무료함을 덜어 주는 역할을 했던 것 같다. 늦은 봄 아카시아 비슷하게 생긴 꽃이 만개하여 승객들은 눈으로 회화나무 꽃향기를 맡는 셈이었다.
백석역이다. 겨울철이었으므로 대지 위를 달리는 동안에 달리 더 볼 것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고작 잠시잠깐이지만 창밖 풍경은 그녀의 고단한 나들이를 약간은 덜 고단하게 감해준다거나, 얼마 후면 닥치게 될 고통과 두려움에서 자유로울 수 있도록 무마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왜 하필이면 마을 이름을 마두, 즉 말의 머리라고 했을까. 언젠가 이곳을 승용차로 지나며 그 말뜻의 유래를 읽었던 것 같은데 지금 그걸 유추해낼 수는 없다. 어쨌든 마두역을 지나면 그녀가 내려야 하는 역이 한 역으로 줄어든다는 사실만이 반가울 따름이다.
마두역에서 꽤 많은 사람들이 내렸다. 지하철 안은 한결 넓어진 듯 했다. 어깨를 비비며 두툼한 털 코트가 끼이도록 잔뜩 붙어 앉아있던 사람들이 너른 자리로 옮겨 앉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투박한 운동화를 벗고 두 다리를 의자 위에 올려 무릎을 펴주었다.
시골집 대청마루에 앉아 있기라도 한 듯 몸 전체가 편안했다. 윤이 나게 잘 닦여 진 대청마루는 온 가족들이 모여앉아 대화를 나누고 따뜻한 음식을 먹는 화목한 자리였다. 부엌과 통하는 문으로 음식 그릇들이 대청마루의 교자상으로 연속 날라지면, 어머니의 정성을 맛보는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대청마루의 큰 기둥에 유리구슬처럼 매달리던 소중한 장소가 아니던가. 그녀는 툭 트인 앞마당에서 대청마루를 지나 뒤란으로 달려가던 상쾌한 바람을 끌어안듯 윗몸을 앞으로 숙였다 뒤로 젖히며 그 동작을 반복한다.
정발산역이다. 정발산鼎鉢山이라는 역 이름이 흥미를 끌었다. 높지도 험하지도 않은 산, 큼직한 무쇠 솥단지를 엎어놓은 듯한 산기슭에 위치한 동네인 듯했다.
내려놓았던 배낭을 짊어졌다. 새삼 무게가 느껴지는 것이 지난 가을 소설가들의 섬진강 세미나에서 돌아온 후에 배낭 안에 든 책과 쓸데없는 잡동사니를 꺼내지 않은 것을 떠올렸다.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건 순전히 불건강으로 인한 일종의 직무유기이고 게으름에 해당한다.
그녀의 몸 형편은 한겨울 눈보라 앞에 선 나목처럼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처럼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한 마디로 뭉뚱그려 진술할 수 없을 만큼 무기력 내지 무의욕의 증후로 쫓기는 나날이었다. 신체 어느 부위 어느 기관에 고장이 발생했는지 그 원인은 어디서부터 유래했는지, 현재 나타나고 있는 그런 모든 예후들은 어디로 진전을 도모하고 있는지, 그녀의 몸과 마음은 그런 실상을 이해하지도 제대로 숙지하지도 못한 채 애매모호한 지점에 봉착하고 있었다.
여름에서 가을을 넘겨 겨울에 이르도록 컴퓨터 앞에서 낮밤을 보낸 그 후유증으로만 쉽게 해석을 해본다. 그렇다면 아침 출근해서 종일토록 아니지, 일 년 내내, 더하여 평생을 컴퓨터와 생활해야하는 직장인들은 어쩔 것인가. 유독 그녀에게만 그와 같은 못 견디는 이상 증세들이 날개 돋친 듯 기승을 부려 그녀의 건강을 몽땅 흩으려 놓은 것은 아닐 터였다.
양쪽 옆구리와 갈비뼈가 아픈 것 같기도 하고, 명치끝이 답답하고 등허리 쪽이 결리는 원인을 밝히기 위하여 그녀는 지금 병원으로 가고 있다. 또 있다. 머리에 열이 펄펄 치올라서 동지섣달에도 땀이 후끈 쏟아지는 것, 그녀가 현재 느끼고 있는 제 증상들을 열거하기에는 사뭇 부족한 감이 들었다.
가장 견디기 힘든 것으로는 메스꺼움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메스꺼운 건 또 무슨 까닭이란 말인가. 메스꺼움의 정체는 해석하기 곤란한 점이 있다. 임신부의 그것은 음식 냄새를 혐오하거나, 그 냄새에 왈칵 구토가 치미는 것인데 반하여 그녀가 수개월을 두고 굳센 의지로 견뎌내고 있는 메스꺼움의 양태는 몸의 기운을 저 바닥 아래로 다운시킨다. 한 보시기의 호박죽마저 숫제 거들떠 볼 수도 없게 식욕을 깡그리 소멸시키는 것이다. 그 몹쓸 놈의 메스꺼움이 정점에 이르면 늘 하던 대로 책을 읽을 수도, 사람들의 말소리를 알아들을 수도 없게 되어 메스꺼움은 그녀의 일상에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악랄한 메스꺼움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어디 한 번 해보자’
그녀는 이른바 메스꺼움과의 전쟁을 선포했고 이를 악물고 나박김치 국물을 숟가락으로 떠 마시며 호박죽 한 보시기를 목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렇게 몇 달을 버텨온 것이다. 그 호박죽 한 보시기마저 위내시경 검사를 위해 거른 그녀는 그간의 생활방식에 혁신을 꾀해야 하는 때임을 자각하기에 이르렀으며, 호박죽을 더 먹어서도 안 먹어서도 안 되는 까닭을 규명하기 위해 힘겹게 집을 나선 것이다.
그녀는 지하철에서 내려 출찰구를 빠져 나왔다. 출찰구를 빠져나오기는 하였으나 밖으로 나가는 계단이 까맣게 높았다. 엘리베이터도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마른 침을 꿀컥 삼켰다. 돌 지난 아기가 걸음마를 연습하듯, 손잡이에 의지하여 한 계단 한 계단 조심스럽게 올라 밖으로 나왔다. 겨울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다. 그녀는 가죽장갑을 벗어 점퍼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빈 택시가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D대학병원으로 가주세요!”
택시가 어느 골목으로 어떻게 달리든 그녀는 눈을 떠 살펴보고 싶지도 않다.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않았다. 잠시나마 쉬고 싶다는 그 한 생각이 어질어질한 뇌리를 여지없이 채우고 있었다.
“손님! D대학병원에 다 왔습니다.”
택시에서 내린 그녀의 머릿속은 커다란 공동처럼 휑하니 비어 있고 몹시 어지러웠다. D대학병원의 자동문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안내 데스크를 지나 2층으로 가기 위해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1층과는 달리 이곳 검사실은 부지런한 환자들이 가족들과 함께 대기 중이었다. 환자 숫자보다 가족들의 숫자가 단연 많아 보였다.
“문지희 씨. 오늘 위내시경 검사가 있네요. 금식하고 오셨죠?”
간호사가 지희가 내민 용지를 보며 말했다.
“네!”
“호명할 때까지 2번 방 앞에서 기다리세요.”
그녀는 간호사를 향해 머리를 끄덕 숙이고는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〇〇 씨! 보호자 분 안 계세요?”
보호자를 찾는 간호사 음성이 가파르게 들렸다. 우르르 검사실로 달려가는 가족들의 발걸음 소리가 이어진다. 얼마 안 있어 들것에 실려 나오는 환자를 발견했다. 그녀가 2층으로 올라왔을 때 의자에 앉아있던 할머니였다. 실신 상태인 할머니 이마에 하얀 머리칼이 뒤엉켜 있었다. 들것에 실려 할머니가 긴 복도를 지나가고 그 뒤를 가족들이 따라갔다.
“문지희님! 2번방으로 들어가세요!”
이름이 불리어지자 그녀는 왈칵 싫은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올 것이 왔구나’하는 자포자기 심정에 이어서‘지금이라도 도망가 버릴까?’그녀의 내면에서 극심한 갈등이 교차했다.
들것에 실려 검사실 밖으로 나온 할머니와 그 가족들이 저만치 멀어져 간다. 들것에 실려 나온 사람은 그 할머니 말고도 두 세 사람 정도 더 있었다. 검사실에 자기발로 걸어 들어간 환자들이 위내시경 검사를 마치고는 너나없이 들것 신세를 지고 있었다. 들것에 실리는 순간 간호사는 들것에 실린 환자의 이름을 불렀고, 그 가족들을 찾는 것을 그녀는 똑똑히 보았다.
겁이 나고 불안했다. 위장내시경 검사는 전에도 받은 바 있어 그게 치과와 산부인과 다음으로 얼마나 견뎌내기 힘든 고역인가에 대해서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2번방으로 들어갔다. 2번방에는 먼저 온 환자가 두 명이나 간이의자에 대기 중이었다.
“문지희 씨죠? 이거 드시고 이쪽으로 오세요”
간호사가 작은 컵에 든 점액질 같은 무슨 약제를 주었다. 그녀는 희부연 액체가 담긴 조그만 유리컵을 받아 홀짝 목안으로 넘겼다. 새큼하면서 뜹뜰하고 질리는 맛이었다. 두 번째로 그만한 크기의 잔에 든 물질을 또 받아 삼켰다. 이것 또한 혀에 닿는 감촉이 혐오를 넘어 불쾌의 극치였다.
“인후마취제입니다. 이걸 마시면 목에 고통이 덜하거든요.”
간호사가 설명했다. 그 요상한 맛을 가진 액체가 목안을 통과하기가 무섭게 목안이 얼얼해지면서 굳어갔다. 그녀의 안색은 털이 숭숭 돋아난 송충이를 씹은 형상으로 변화되었다.
“엎드리세요!”
그녀가 송충이 씹은 얼굴을 미쳐 수습할 사이도 없이 간호사는 반쯤 얼이 나간 채 엉거주춤 서 있는 그녀를 간이침대가 있는 구석으로 떠밀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엉덩이에 주사바늘을 찔렀다. 어떤 용도로 주사를 놓는지 설명은 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아니면 설명한들 환자가 뭘 알겠으며, 또 알면 어쩔 건데 하는 듯이. 그런 의도들이 간호사의 무감동한 손길에 충분히 숨어 있을 법했다. 위내시경 검사에 국한한 것이 아니라 병원에 오면 그와 같은 일들은 환자들 누구나가 이의 없이 감수해야 하는 관행이나 불문율 같은 것이다.
‘아니야. 나 이거 안 해, 못해! 진짜 안 되겠어!’
그녀는 인후마취제를 삼킨 탓에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머리를 좌우로 돌리면서 강렬하게 노오! 안 돼! 하고 외쳤다. 그녀의 손이 의자에 놓아둔 점퍼와 가방을 움켜쥐었다.
검사실에서는 짐승의 울부짖는 소리 같은 것이 처절하게 터져 나왔다. 그 소리는 적어도 병색이 짙어진 남자, 연세가 제법 높아 보이는 사람이 내는 소리였다. 고통을 호소하는 소리에도 건강의 기준은 있을 것이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기괴한 소리를 내지 않고서도 까짓 위내시경 검사 따위는 수월하게 끝낼 수 있을 게 아니냐.
“몇 분 동안이죠?”
그녀가 핸드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하면서 간호사에게 검사실 내부에서 들려오는 저 단말마의 비명이 몇 분이면 끝나는가 라고 질문했다. 그 순간까지만 해도 그녀는 처절한 울부짖음을 감수하고라도 의사선생님의 검사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순진한 논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5분에서 10분? 그 정도죠.”
손에 환자들 이름이 가득 적힌 용지를 들고 있던 간호사가 지희 얼굴을 힐긋 쳐다보며 대답했다. 그때 그녀 앞에 대기하던 두 환자 중에서 한 명이 검사실 커튼을 열고 검사실 안의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곧 숨 막히게 울려오는 신음소리. 예의 울부짖는 소리가 또 났다.
5분에서 10분이 한 시간보다, 아니 하루 한낮보다 길고 끔찍했다. 기다란 플라스틱 관이 위장 구석구석을 휘젓기라도 하는 듯, 깊은 겨울 눈 쌓인 산골짝에서 울려오는 산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비명소리가 복도에서 기다리는 다른 환자들에게 막대한 공포심을 심어주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겨울 눈밭에서 늑대가 컹! 컹! 짖어대는 소리는 약과였다. 깊은 겨울에 먹이를 구하는 산짐승의 절규에는 최소한 소름 돋는 공포심 같은 건 없을 터였다.
“어으아 으아 으으어....”
육척장신의 사내가 긁은 몽둥이를 쳐들어 죄인의 맨몸뚱이를 마구 두들겨 팬다고 해도 저런 살벌하고 참람한 소리가 터져 나올까. 생명 자체가 깡그리 무너져 내리는 그 소리에 그녀는 진저리를 쳤다. 앞의 환자가 냈던 비명소리보다 이번에는 그 강도가 더 센 것으로 여겨져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었다.
“으어어! 으으 으으”
지금 위내시경검사를 받고 있는 환자는‘아’라는 발음조차도 버거워진 게 틀림없다. 횡경막 저 아래에서 치밀어 오르는 실낱같은 기력 한 끄트머리라도 남았을 때 입을 크게 벌릴 수 있고‘아' 소리를 내볼 수가 있는 것이지 이제는 ’아‘도’‘어’도 아닌 해괴망측한 울림으로 낙착된 감이 없지 않다. 혹 입원해 있는 중환자인가.
그때였다. 검사를 위해 대기하던 그녀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 얼굴이 엄숙하다 못해 비장해 보인다.
‘아니야. 나, 환자 못해, 안 해!’
그렇게 부르짖는 것과 동시에 잽싸게 검사실 밖으로 몸을 날렸다. 병원 오기 전부터 어지러워, 메스꺼워 하던 타령 대신 그녀의 몸 어느 부위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속도감과 활력이 솟아났다. 엘리베이터도 사양하고 한달음에 계단을 허겁지겁 내려갔다.
“문지희 씨! 검사실로 들어오세요. 문지희 씨!”
간호사가 큰 소리로 문지희 씨를 외치고 있었다.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몇 번이나 미끄러질 뻔 곤욕을 치루며 계단을 내려온 그녀는 쏜살같이 원무과 접수실과 수납 창구를 돌아서 D대학병원 정문을 통과했다.
팔과 다리가 제멋대로 휘청거렸다. 바닥에 퍽! 하고 쓰러지지 않은 건 전적으로 하나님의 보우하심, 그리고 부처님의 가피와 조상님의 음덕이었다고 평할 만하였다. 수개월에 걸쳐 보약처럼 먹어온 호박죽의 기적인지도.
그녀는 몸을 돌려 팔에 걸치고 있던 점퍼를 꿰어 입은 후, 배낭을 가슴에서 등허리로 옮겨 맸다. 쓰러질 듯 아슬아슬한 고비를 겨우 넘기고 버스정류장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차가운 냉기가 사방에서 달려와 그녀의 몸을 에워쌌다. 안개 낀 겨울 하늘이 저 멀리 보였다.
‘죽으면 죽었지 절대로 환자는 싫어, 환자 안할 거야!’
그녀의 말을 귀담아 듣는 사람은 주변에 아무도 없다. 악을 쓰듯 복창했다. 악을 쓴 것 같았으나 그건 생각뿐이었다. 악을 쓰기는커녕 그녀의 체력은 진즉에 동이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호박죽의 기적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목이 탄다. 목이 타들어가면서 인후 마취가 서서히 풀리는 조짐이었지만 뻑뻑한 느낌은 여전했다. 그 뻑뻑해진 목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로 악을 쓰고 있는 그녀는 누가보아도 평범하게 보이지 않는다. 환자노릇에 대한 심한 자괴감, 그리고 오래 전부터 뇌리에 각인된‘환자는 죄인’이라는 인식이 그녀로 하여금 큰소리치게 한 간접 배경인지도 모른다.
배낭을 열어 물병을 꺼냈다. 가까운 곳을 가더라도 작은 물병 하나는 꼭 챙기는 습관은 이런 경우 아주 요긴했다. 그녀는 한 병의 물을 쿨럭쿨럭 단숨에 마셨다. 찬 물줄기가 기도를 지나 위장으로 내려 갈수록 몸 안에 서서히 생기가 살아나는 듯했다. 그러나 인후마취제가 머물렀던 부위를 500ml의 물로 씻어주기에는 태부족이었다. 특이한 약물 냄새가 입 안 가득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환자노릇은 땡이다!’
7278 버스가 다가온다. 그녀는 무작정 올라탔다. 자리에 앉자마자 굳게 다짐하였다. 그리고 결심을 공고하게 해두기 위해 두 주먹을 꼭 쥐었다 폈다. 그렇게 몇 번 되풀이했다. 경기도 서북에서 출발하여 신촌으로 가는 7278 버스는 국방대학원을 옆에 하고 힘차게 달려갔다.
슬슬 줄음 끼가 몰려왔다. 점점 포근한 수면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무엇에도 비길 수 없는 행복한 휴식이었다. 병원에서 도망쳐 나온 일 같은 건 어디에도 끼어들 수가 없다. 여기서 도망이란 단어는 어딘지 신경을 거스르게 한다. 그녀는 병원의 검사 거부가 갖는 의미에 대해서 길게 이어나갈 뜻이 없다. 금쪽같은 시간 소비하고 병원에나 다니며 죄인 노릇은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엄정한 선택과 강한 의지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발병의 원인이 그녀에게 있다고 한다면 치유의 방법도 그녀 자신에게서 도출해 볼 수 있다고 믿고 싶었다.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환자는 온전한 인격체가 아닌 부득불 누군가의 보호를 받아야하는 약자 입장이었다. 도움을 베푸는 주체가 아니라 도움을 받아야하는 약자로서의 환자 입장을 단연코 탈퇴한다는 데에 대해서 누구도 반론을 제기할 수 없는 일이다. 애초 환자로 등록할 때 누구의 조언이나 부축을 받지 않은 것처럼, 환자노릇을 마감하는데 있어서도 그녀는 자신의 의사를 십이분 존중했다고 볼 수 있었다.
모래내 시장을 지나면서 차가 밀리고 시간이 제법 지체되고 있다. 그녀는 매우 안온해 보였다. 비록 불편한 버스 좌석이지만 잠자고 있는 그녀의 얼굴엔 승리의 미소마저 감돌았다. 연세대학교의 새로 지은 건물을 뒤로하고 차량행렬이 신촌 오거리까지 길게 이어졌다. 버스가 자주 급정거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가 앉아있는 앞자리는 심하게 요동쳤다. 그녀가 부스스 눈을 떴다. 메스꺼움의 집요한 공세를 깜빡 잊고 경기도에서 서울로 진입한 것은 행운이었다. 비록 4, 50분에 불과했지만.
그녀가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소위 그 끈질긴 메스꺼움이 재연되었다. 메스꺼움뿐이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왈칵 토할 것 같은 기미도 나타났다. 아랫배가 뒤틀리게 꼬집어 뜯는 것은 빈 위장에 냉수를 들이켠 게 화근이었다. 7278버스의 종착역은 아직도 세 정거장이나 남아 있었다.
남들이라고 다 견뎌내는 것을 공연히 유난떨다가 혹 더 큰 곤경에 처하는 것이 아닌가. 어떡하지? 하는 절박한 후회의 감정이 살며시 그녀의 내부에서 머리를 쳐들었다. 검사를 받고 결과에 따라서 약도 먹고 치료를 받아야지 어쩌자고 어린애도 아닌데 병원을 뛰쳐나와? 그녀는 신음소리를 흘리며 안절부절 한다.
버스가 정차했다. 구르듯 버스에서 내렸다. 막상 버스에서 내렸으나 갈 곳이 마땅치 않음을 깨달았다. 무작정 H백화점 후문을 향해 걸었다. 어디든지 가서 일단 앉고 보자는 속셈이었다. 후문을 밀치고 들어서니 마침 빈 의자가 있었다. 쇼핑을 하기 위해 H백화점에 오면 언제나 그 자리에서 친구를 기대리던 곳이다. 정문 쪽에 비해서 사람들이 덜 붐비는 장점이 있었다.
그녀는 위급할 때 흔히 하던 버릇대로 가슴을 펴고 복식호흡을 했다. 깊게 천천히 하는 호흡은 아무리 심한 고통도 잠시 멈추는 효험이 있다.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출입문을 열고 닫았다. 그녀는 아랑곳 하지 않는다. 심호흡으로 얼마간 안정을 잡아갈 무렵 어디선가 큰 외침이 들려왔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그녀는 외침의 향방을 탐색했다.
“야아! 너 문지희? 여기서 뭐해?”
외침의 주인공은 오순자吳順慈였다. 양손에 쇼핑백을 들고 막 후문으로 나가려는 순간 눈을 감고 있는 지희를 발견한 것이다. 오순자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오순자 옆에 다른 여인이 두 사람을 번갈아보며 고개를 갸웃둥했다. 그녀 역시 무거워 보이는 가방을 들고 있었다.
“어머!”
지희는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두 사람은 곧잘 H백화점 후문에서 만나 쇼핑을 하거나 식사를 했으니 오늘의 만남도 결코 우연은 아닌 셈이다.
“우리는 지리산 산막에 가는 길이야. 먹을 거랑 좀 사느라고 백화점에 들렀어. 마침 잘됐다. 지희야 너도 같이 가자!”
순간 겨울 바닷가에 선 것처럼 상쾌한 바람이 그녀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메스꺼움을 비롯한 기이한 증상들은 어디론가 증발했다. 지희는 운동화 끈을 고쳐 맸다. 그들을 따라 밖으로 나오니 H백화점 정문 앞에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승용차 문이 열렸다. 지희는 운전석에 앉은 오순자의 남편에게 가볍게 목례하고 차에 올랐다.
“여름에 가고 안 갔잖아 오래 비워 놓으니 세를 달라는 사람도 있고, 좋은 사람 만나면 인계해줄 수도 있을 것 같아.”
오순자가 생수 병을 지희에게 건네주었다.
“너 괜찮은 거지? 피곤해 보이는데 시원하게 생수 좀 마셔둬”
오순자 후배가 초콜릿을 주었다. 지희는 초콜릿을 받아 입안에 넣었다. 달고 고소한 성분이 입안에서 사르르 녹았다.
“어쩜 산막에 가는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몰라.”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관리에 어려움이 있고, 무엇보다도 오순자의 자녀들이 미국에 살고 있어 여름 휴가철에 오는 일도 뜸해, 지리산 산막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싶다는 얘기를 지희도 전에 들은 일이 있었다.
“지희! 참 잘 만났어. 너 거기 가서 소설도 마무리하고 쉬고 싶어 했잖니. 글쎄 관리인 아저씨가 고구마를 세 가마니나 캤다는 거야. 거긴 워낙 깊은 산 속이라 오고가는 사람도 없고 고구마를 먹어줄 사람이 있어야지. 지리산 정기를 먹고 자란 고구마를 가져다 이웃에게 나누어 주고 싶어. 고구마뿐이겠니. 밤이며 곶감 그리고 산나물 말린 것도 지천이란다. 겨울에도 봄동이랑 파, 시금치가 밭에 그냥 새파랗게 살아있대.”
지리산의 겨울나기는 그래서 별 어려움이 없다는 걸 암시하는 말인가.
“선배님! 그럼 우리가 고구마만 먹다가 오는 거유?”
오순자의 후배가 말했다.
“그러니까 아까 백화점에서 이것저것 장만한 거지. 우리가 화전민이냐 고구마만 먹게?”
지희는 조용히 잠이 들었다. 생수 한 병과 초콜릿이 그녀를 나른한 잠 속으로 유인한 것일까. 두 사람의 대화가 자장가가 되어 준 것일까. 그녀는 기실 집을 나설 때부터 지쳐있기는 했다. 그만큼이라도 움직인 데에는 호박죽이 아니라 그녀의 성격이 작용했다. 쉽게 말하자면 미련한 인내심이었다.
차는 남산 지하터널을 빠져나오자 속력을 내어 달려갔다. 남쪽으로 갈수록 하늘엔 구름이 더 많고 창밖은 부옇게 흐려있었다.
"쟤 좀 봐! 잠을 못잔 모양이네. 근데 내가 지리산 가는 건 어떻게 알았지?”
오순자가 목에 들렀던 스카프를 풀어 지희 어깨에 얹어주었다.
“이 친구가 발동이 걸린 날은 끼니도 놓치고 컴퓨터 앞에서 밤을 홀딱 지새운다니까. 글쟁이들 심리를 내가 잘 알아“
오순자는 지희의 일상을 꿰뚫은 것처럼 말했다. 깊은 잠에 떨어진 지희의 귀에는 시종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납치해 가도 모르겠네.”
오순자의 후배가 잠든 지희를 그윽이 돌아보는 눈치더니 그도 역시 살포시 눈을 감았다. 운전석에서 오순자의 남편이 백미러를 통해‘안전운전은 나에게 맡기고 당신도 눈 좀 붙여’하고 오순자에게 사인을 보냈다.
“이거 침대칸이 따로 없군. 그런데 당신 말야. 저 친구 만나기로 약속했던 거야?”
오순자 남편은 그 점이 몹시 궁금한 것이다. 시장 보아 온다고 백화점에 가더니 난데없이 지희를 데리고 나타난 아내에게 벌써부터 묻고 싶은 말이었다.
“그건 아니야 여보, 내가 살 것 다 사고 막 후문으로 나오다가 거기서 만난 거야. 눈을 감고 누굴 기다리고 있더라고, 그게 나지 누구겠어.”
오순자는 신이 나서 혼자 부르고 썼다.
“참 희한하지. 쟤하고는 어릴 때부터 그랬어. 내가 가면 쟤가 오고 어디서건 잘 마주쳤다고요. 호호호.”
“자아! 사모님들 그만 일어나시죠.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오순자가 손뼉을 짝,짝, 쳤다. 단 잠에 들었던 두 여인이 눈을 떠 주변을 돌아보았다. 싸늘한 겨울바람이 모과나무를 스치고 지나갔다. 땅바닥에 떨어진 모과를 보고서 지희는 그 나무의 이름을 알아냈다.
다리 하나만 건너면 지리산 〇〇골로 가는 길 위에서 승용차는 멈춰 섰다. 거기서부터는 각자 짐을 들고 200미터 정도를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겨울 가뭄에 골짜기 물은 줄어 있고, 살얼음이 잡혀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그 얼음조각은 바스러질 것 같았다. 지희는 물살에 살얼음이 조금씩 깎여 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무슨 잠을 그리 잘 자노? 지희야! 이제 정신이 좀 드나?“
맑고 훤해진 지희의 안색을 보고 오순자가 말했다. 지희의 메스꺼움이 겨울 지리산에 다다라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 같았다.
오순자가 H백화점에서 들고 온 쇼핑백을 양 손에 들고 앞장서고 그 뒤를 오순자의 후배가, 그리고 지희, 가장 부피가 큰 짐을 걸머진 오순자의 남편은 맨 뒤에서 걸었다.
지난 번 내린 눈이 녹지 않아 바위길이 미끄러웠다. 낙엽이 쌓인 인도도 미끄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의 기척을 알아차린 듯 산새가 푸드득 날아갔다. 상수리나무는 누렇게 말라버린 이파리들을 겨우내 매달고 있었다. 누런 떡잎 같은 것이긴 해도 햇볕에 반사되어 나목들 틈새에서 나름대로 겨울 산의 매력을 받쳐주고 있었다.
얼마를 걸어가자 절간으로 말하자면 일주문 같은 것, 두 개의 커다란 바위가 양쪽으로 버티어 서 있고 그 바위에는 수월선원水月禪院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바야흐로 지리산 중턱에 자리한 수월선원에 당도한 것이다. 좀 더 걸어 들어가니 소나무 숲에 제법 커 보이는 종을 매달아 놓았다. 이따금 맑은 종소리로 숲을 깨우고 근처를 지나는 등산객을 불러들이기도 하는가. 그곳은 지리산의 오묘한 기운으로 가득 찬 오순자 가족의 산막 즉 고요동산, 명상나라였다.
“어서들 오시지요.!”
관리인 내외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출현하여 오순자와 남편의 짐을 받아들고 안채 건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가는 곳 그 너머로 성긴 대나무 숲이 울울하다. 미끈하게 잘 자란 소나무와 낙엽송이 하늘을 찌를 듯 수월선원의 아담한 건물을 삥 둘러 외호하고 있다. 계곡물 흘러가는 소리도 돌돌돌 들려온다. 바람결에 향긋한 수향이 날아와 코끝을 자극한다.
오순자의 남편이 20대 한창 나이에 지인의 소개로 이곳에 머물며 오직 공부에 매진하여 사시에 합격, 그 인연이 소중해 아예 이 땅을 사들였다고 했다. 여름철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온 가족이 피서를 즐기던 곳이지만, 오순자는 자식들의 초청으로 미국 이민을 신청해 놓은 상태라고 말했다.
그들 일행은 선방에 들어가 편안하게 명상에 들어갔다. 굳이 단전호흡이니 명상이니 할 것 없이 조용히 앉아서 휴식을 취하는 동작이었다. 지희는 가부좌로 자신의 몸 상태를 관찰하면서 선정에 들었다.
밖으로 나오자 너른 주방에 식사가 마련돼 있었다. 관리인 부인이 표고버섯을 넣고 끓인 우거지 된장국이며 가지볶음, 산더덕 구이, 깻잎장아찌, 오이지무침 등은 정갈하면서 순한 맛 일색이었다.
“이곳에 남을 사람은 남아도 좋아요!”
오순자가 먼저 후배를 돌아보며 농담처럼 말했다. 오순자의 선량한 남편이 그 말에 빙그레 웃음을 보였다. 20대 시절 주말이면 오순자가 밑반찬을싸들고 이 산막을 찾아오곤 했던 일들이 떠오른 것일까. 그의 얼굴은 풍성한 추억거리로 행복에 겨운 모습이다.
“지희야! 너 컴퓨터 앞에서 후딱 하면 밤새고 그러지 말고 여기 수월선원에서 명상센터 반장님 해 보렴? 지리산이 고향이다, 어머니다, 생각하고 편히 좀 쉬어!” 오순자의 말을 받아
“<자연으로 돌아가자 - 테크노스트레스에서> S대 교수가 쓴 의학칼럼 읽어보셨나요? 저도 위장병 심장병 여기 와서 다 고쳤어요.”
오순자 남편이 말을 이었다.
‘자연의 품속에서 건강하게 지음 받은 우리의 몸이 컴퓨터, 휴대폰, 텔레비전 등 감정이 없는 기계와 함께 하는 환경에 둘러있어 인체의 유전자가 적응하기 벅차다는 이야기. 장시간 모니터를 대하므로 눈에 피로를 느끼고, 컴퓨터를 작동하면서 조바심 불안감을 느끼며, 컴퓨터를 작동하기 위해 많은 지식을 필요로 하게 되어 심리적인 부담감까지 가중되는 것이 ‘테크노스트레스’라는 것이다. 숲이나 산, 강 등 자연을 찾는 것이 더할 나위 없는 치료법이라는 것. 자연의 몸으로 돌아가기 위해 매일 10분씩이라도 깊게 천천히 호흡함으로써 부교감신경을 자극하여 긴장을 늦추고 감정을 다스리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라고 그 칼럼은 친절하게 소개하고 있었다.
그 칼럼뿐 아니라 오순자 남편의 경험담도 지희는 익히 알고 있었다. 고시 공부 그건 목숨 내놓고 매달려도 패스하기는 하늘에 별 따기 아니던가. 그 별 따기 공부로 망가진 몸 기관부위를 오순자 남편은 이곳에 머물러 지내는 동안 감쪽같이 치유 받았다고 했다. 훌륭한 의사는 자연이라는 말을 부연했다.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 들으며 자연의 품속에서 지내는 사이 육신 곳곳을 침투한 병소들은 하나 둘 사라지게 되었다고 호언했다. 새삼스럽게 놀랄 뉴스도 아니었지만 지희로서는 귀가 번쩍 뜨였다.
"우리는 서울 가서 정리할 것도 있고 하산합시다. 두 분은 잘 계시다가 오시오.“
이틀 밤이 지나자 오순자 부부는 의례히 지희가 산막에 남게 될 것을 예측한 듯 관리인이 챙겨주는 지리산의 선물을 받아들고 서둘러 산을 내려갔다. 오순자의 후배가 산을 내려가는 그들 부부에게 아쉬운 듯 손을 흔들었다.
“친구야.!”
지희의 소리는 싸아한 산바람을 따라 앞산을 넘어 멀리 달아나는 형국이었다. 소리가 바람에 실려 간 것이 아니라 그녀의 입안에서 뱅뱅 돌다가 만 것일 수도 있었다. 그녀는 큰 바위에 올라앉아 멀어져가는 친구 부부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여보! 이상하지? 내가 백화점에서 나오는데 거기에 글쎄 문지희가 앉아 있는 거예요. 기도를 하는지 명상을 하는지 삼매지경인 것 같았어요.”
“그래서 기도를 하든 명상을 하든 그건 지리산 과목科目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거요?”
“지희는 지리산하고 친해져야 빛이 나요. 내가 안다고요"
그들의 대화는 승용차가 금강휴게소에 정차할 때까지 심심찮게 이어졌다.
“친구 하나는 똑 떨어지게 잘 두었군. 내 말이 틀렸소?”
“나말이유 아님 지희 말이유?”
“글쎄 누굴까. 당신이 한 번 알아 맞혀 보시죠. 허허허.”
“저런 능청. 호호호.”
겨울하늘은 함박눈이라도 퍼부을 듯 점점 흐려지는데 오순자의 웃음소리는 먼 허공으로 높이 날아갔다.
변영희 소설가. 수필가. 청주 출생. 동국대학교(석사)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박사).
한국소설가협회이사. 국제펜입회심의위원 한국문협전시문화진흥위원
등단 1984 소설《문예운동(동창회 소묘)》 수상 손소희소설문학상. 무궁화문학상소설대상. 한국수필문학상
작품 장편소설 3부작『마흔넷의 반란』『황홀한 외출』『오년 후』소설집『영혼 사진관』『매지리에서 꿈꾸다』 E-book 『이방지대』『사랑,파도를 넘다』『비오는 밤의 꽃다발』『애인 없으세요?』『문득 외로움이』『졸병의 고독』『엄마는 염려 마』『갈곳 있는 노년』『몰두의 단계』『뭐가 잘났다고』『나의 삶 나의 길』『거울 연못의 나무그림자』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