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촌(民村) 이기영(1895∼1984)은 충남 아산에서 태어나 천안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몰락해 가는 빈궁한 가정환경, 갑자기 세상을 떠난 어머니로 인한 침울한 아동기를 고전소설과 신소설을 탐독하며 보냈다. 1906년 아버지 이민창과 안기선 등이 세운 천안 사립영진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배웠다. 1908년에는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조혼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이기영의 작품 속에서 조혼의 폐습을 비판하고 자유연애를 지향하는 내용이 빈번한 이유가 되었다.
소학교 졸업 후에 한동안 방랑과 방황의 시기를 보내다가 1918년 귀향하여 논산 영화여 학교에 근무했다. 3·1운동을 계기로 현대 문학예술을 지향하게 되었으며,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에서 고학하였고, 유학생 모임에서 포석 조명희를 만났다.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한 후, 1924년 [개벽] 현상모집에 단편 [오빠의 비밀편지]가 3등으로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1925년에 조명희의 주선으로 [조선지광]의 편집기자가 되었고, 같은 해 8월 최서해, 이상화, 송영, 한설야 등과 함께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KAPF)을 창건했다. 그 무렵 신여성 홍을순과 새 가정을 꾸렸으며, 이후 계속 함께했다.
본격적인 문학 활동과 카프 가맹이 거의 동시에 이뤄짐으로써 이기영의 작품은 창작 방법과 세계관에 있어서 계급주의를 표방하였다. [농부 정도룡], [조희 ?는 사람들], [홍수] 등의 단편소설과 이후 발표되는 중·장편 소설들을 통해 관념편향적인 계급주의 지도이론을 구체적이고 실체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이기영은 명실공히 카프 최고의 작가라는 칭호를 얻었다.
이기영은 카프 중앙위원 및 출판부 책임자를 지내던 중 1931년 카프 제1차 검거로 구속되었다가 2개월 만에 풀려났다. 이때 구상한 중편소설 [서화](1933)로 호평을 받았으며, [고향]을 집필하여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고향]은 충남 천안의 원터마을을 무대로 일제강점기 식민지적 근대화에 따라 붕괴되고 재편되는 농촌의 모습을 고도의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그려내 한국 근대소설사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된다.
1934년 카프 제2차 검거로 다시 구속되어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36년 소시민 지식인의 과대망상증을 통해 당대 사회제도의 불합리성을 폭로하는 장편 풍자소설 [인간수업]을 발표했고, 10월에는 [고향]을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일제 말기에는 조선총독부의 시국인식간담회에 참석하거나 조선문인보국회에서 일하기도 했으나, 창씨개명과 일어 집필, 강연 요구를 거부하다가 1944년, 강원도 내금강으로 소개(疏開)하여 농사를 지으며 은거했다.
해방을 맞이해 상경한 후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연맹을 주도했으며, 1946년 2월에 월북했다. 노년기까지 조소친선협회 중앙위원회 위원장,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 등 북한에서 문학예술 분야의 고위직을 두루 거쳤으며 장편소설 [땅](1948∼1949), [두만강](1954∼1961) 등을 집필했다. 1984년에 사망하여 평양 신미동 애국열사릉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