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 (쇠 금/구리 동/더욱 미/굴레 륵/보살 보/보살 살/반 반/책상다리할 가/생각 사/생각 유/형상 상)
금동: 금박을 입힌 구리 미륵보살 : 도솔천에 살며, 석가가 입멸한 지 56억 7천만 년 후에 세상에 나타나 중생을 제도한다는 보살 반가: 반가부좌의 준말로서 '오른발은 왼쪽 허벅다리 위에 얹고, 왼발은 오른쪽 무릎 밑에 넣고 앉는 좌선법(坐禪法)의 한 가지' 사유상: '생각하는 상' 즉 '생각하는 사람의 모습'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라는 이름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금동은 재료의 이름을 가리키고, 미륵보살은 불교의 보살 이름이며, 반가사유상은 자세의 특징을 나타낸 말이다.
미륵보살이란 보살의 한 종류이다. 보살은 위로는 진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구제를 염원하는 이를 말하고, 보살 중에서도 미륵보살은 미래의 어느 시점에 모든 중생을 한 순간에 구제하기로 예정되어 있는 보살로서, 기독교의 메시아사상에 영향을 받아 생겼다고 한다.
반가사유상이란 의자에 앉아 오른발을 굽혀서 왼쪽 무릎 위로 걸치고, 오른 팔은 굽혀진 오른쪽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손가락을 펴서 검지와 중지가 살짝 오른 뺨을 받치도록 된 자세이다. 눈은 살며시 감고 고개와 등을 약간 숙여서 깊은 사유의 세계에 들어 있음을 느끼게 한다. 불상이 대개 평평한 바닥에 다리를 꼬아서 앉는 방식을 취하는데, 반가사유상은 의자에 않는다는 점이 매우 독특하다. '半跏(반가)'라는 것은 '半跏趺坐(반가부좌)'를 줄인 말로 다리를 완전히 꼬아서 두 발바닥이 다 무릎 위로 올라오도록 앉는 것을 結跏趺坐(결가부좌), 혹은 온가부좌라 하고, 한쪽 발바닥만 반대쪽 무릎 위로 올라오도록 앉는 것을 반가부좌라 한다. 그래서 반가사유상이란 '반가부좌의 자세로 생각에 잠긴 모습'이란 뜻이 된다.
일본인들이 아껴 마지 않는 국보 제1호가 바로 미륵반가사유상인데, 이것은 백제 사람이 만든 것이라 한다. 서울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에도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전시되어 있는데, 누구나 보기만 해도 신비하고 거룩한 사념의 세계로 깊이 빠져들면서 우리 선인들의 그 탁월한 정신적인 경지와 예술적인 기량에 경탄을 금할 수 없게 된다. 이렇게 되는 데는 굳이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하였으니..반가사유상이야말로 불교를 나타내주는 상징적인 조각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삼국시대에 가장 많이 만들어 졌고 빼어난 작품들이 남아 있는데..그 중 대표적인 것이 아래 두점이고, 일본 국보(금동은 아니고 목조)와 비교할 수 있도록 한점 더..서비스.
국보 78호와 83호에 대해 예전에는 신라의 작품이라고 했었으나 논란이 생기면서 백제의 작품이라는 설이 유력한 것으로 알고 있고, 일본의 목조 미륵보살사유상은 백제의 장인이 만든 것이라는 학설이 유력하다. 일본의 것은 나무의 재질이 적송(일본에는 없는 수종임, 춘양목?이라고 주장하는 분도 있음)이고 모양이 국보83호와 너무도 같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건너간 예술품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국보 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삼국시대)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삼국시대)
일본국보1호(교토 광륭사)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
일본의 국보 제1호 “미륵보살 반가사유상”
일본의 국보 제1호는 높이 123.5센티미터의 목조 신라 불상인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다. 이는 교토의 고류우지(광륭사, 廣隆寺)에 있다. 반가사유상은 원래 석가모니가 태자 시절에 인생무상을 느껴 고뇌하는 명상자세에서 기원하며, 출가 이전의 이러한 태자 모습은 중생 제도를 기다리는 미륵보살 모습과 비슷하므로 미륵보살상도 반가사유의 모습으로 조성되었다. 실존철학자의 한 사람인 독일의 야스퍼스(1883-1969)는 이 한국 불상을 찬찬히 살펴본 뒤에 크게 감동한 나머지 절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불상이야말로 고대 그리스나 고대 로마의 그 어떤 조각 예술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뛰어난, 감히 인간이 만들 수 없는 살아있는 예술미의 극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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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불상이 신라로부터 일본에 전해진 것은 7세기초이다. 서기 603년에 추고천황(推古天皇, 592-628)의 섭정이었던 쇼토쿠 태자(574-622)가 교토 땅의 신라인 지도자였던 진하승 공에게 전해주었고, 진하승 공은, 즉시 봉강사를 창건했다. 이 봉강사가 현재 교토의 우즈마사(太秦)에 위치한 고류우지(광륭사, 廣隆寺)의 옛 이름이다. 진 공은 이 신라 불상을 모시고 오늘의 고류우지의 전신인 봉강사를 신라인의 씨사(氏寺)로서 창건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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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사실은 일본의 고대 기록에 전해지는 동시에 현대의 일본 고대사학자들이나, 미술사가들이 한결같이 입증하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덧붙인다면, 일부 학자가 이 불상이 '신라'에서 온 것이 아니고, '백제'에서 온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울의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불상인 '금동미륵보살반가상(국보 제83호, 90Cm)'이 바로 고류우지의 목조 신라불상과 똑같은 형태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일본 학자들도 한결같이 증언하고 있다. 다만 한국의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신라의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가 백제의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현재는 삼국 시대의 것으로만 되어있다. |
일본 학자들은 광륭사의 이 신라 목조 불상이 일본 고대 다른 불상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이, 적송(赤松)으로 만든 불상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 적송은 일명 춘양목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경상북도 봉화에서만 나는 나무이다. 즉 적송으로 조각한 것은 한국의 목조 불상의 특징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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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류우지(광륭사)의 일본 국보 1호인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과 나란히 안치되어 있는 목조 불상이 바로 상투미륵상 또는 우는 미륵상인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다. 일본의 저명한 불교 사학자인 다무라 엔초 교수는 그의 저서 『쇼토쿠 태자』에서 고류우지의 두 국보 목조 불상이 신라에서 보내온 것임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히고 있다.
"쇼토쿠 태자는 신라에서 보내준 미륵상 1구를 진하승에게 주었다. 진하승은 이 불상을 모시고 절을 창건하였는데 이는 지금의 고류우지이다.(국보 제1호에 대한 이야기임) 또한 616년 7월에는 신라에서 사자를 파견하면서 불상을 보내주었다. 이 불상 1구도 고류우지에 지금 있는 소형의 미륵상(우는 상투 미륵)일 것이다."
고류우지에 있는 2구의 국보 불상 즉, 목조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과 상투미륵상이 신라 불상이라고 하는 것은 옛 문헌이나 다른 학자들에게서도 밝혀져 있으나, 고류우지에는 그런 확실한 설명이 없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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