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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나훔2장1~13절
제목 : 내가 네 대적이 되어
나훔서 2장은 강대국 앗수르와 난공불락의 요새 니느웨성이 어떻게 멸망할 것인지를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무자비한 초강국 앗수르를 흩어버릴 더 강한 '침략자'가 그들에게 임하고 있습니다.
침략군은 바벨론과 매대 연합군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예언자 나훔은 마치 니느웨를 공격하는 바벨론 연합군을 현장에서 보도하는 종군 기자처럼 전황을 자세히 기술합니다.
예언자 나훔은 성령의 감동으로 말미암아 국제정세를 미리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계를 통치하는 강국으로 군림했던 앗수르의 멸망을 외치며,
그들에게 억압당하고 있던 유다 백성에게 위로와 소망을 갖도록 호소합니다.
마치 일제식민지 하에서 신음하던 조선 민족에게 하나님께서 일본을 곧 망하게 하고 조선을 해방시킬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외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기에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난세를 살아야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백성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굳은 믿음을 가져야하는 것입니다.
니느웨를 치러 올라오는 침략군의 위용과 엄청난 전력, 그리고 그들이 펼치는 맹렬한 공격 가운데 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셔서 심판을 유보하시기도 하지만,
악은 기필코 심판하시는 분이시며,
동시에 자기 백성을 회복시키는 위로의 하나님!
그분을 경외하고 의지해야할 것입니다.
1.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의 멸망(1-2절)
1)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지어다(1절).
“[1]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 너는 산성을 지키며 길을 파수하며 네 허리를 견고히 묶고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지어다”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왔나니. - '파괴하는 자'('메피츠')는 승리의 왕을 상징하는 것(시 68:1; 사 24:1; 렘 52:8)으로 문자적으로는 '흩는자'라는 의미입니다.
이 예언은 바벧론의 나보폴리살과 메대의 카카레스가 거느린 연합군이 니느웨를 침입함으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패역한 니느웨를 멸망시키기 위해 예비하신 심판의 도구들이었던 것입니다(렘 51:20).
*렘51:2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의 철퇴 곧 무기라 나는 네가 나라들을 분쇄하며 네가 국가들을 멸하며”
2)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 같게하십니다(2절).
“[2]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 같게 하시나니 이는 약탈자들이 약탈하였고 또 그들의 포도나무 가지를 없이 하였음이라”
본 구절은 1:15과 연결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용상 1절이 니느웨에 대한 전쟁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으로
3절로 곧바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 같게 하시나니. '회복하시되'('솨브')는 '슈브'의 과거 단순 분사형이지만, 임박한 미래의 행동을 나타내는 예언적 과거형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지금 곧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려고 하신다'로 번역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번역본들이 이를 따라 미래형으로 번역하였습니다.
또한, 야곱과 이스라엘은 동의어로 전체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는 것입니다(사 9:1-8, 10-16).
2. 멸망당한 니느웨의 참상 (3~7절)
1) 바벨론과 메대 군사들의 모습을 상징합니다(3,4절).
“[3] 그의 용사들의 방패는 붉고 그의 무사들의 옷도 붉으며 그 항오를 벌이는 날에 병거의 쇠가 번쩍이고 노송나무 창이 요동하는도다[4] 그 병거는 미친 듯이 거리를 달리며 대로에서 이리저리 빨리 달리니 그 모양이 횃불 같고 빠르기가 번개 같도다”
붉은색 군복을 입고, 번쩍이는 창을 들고, 병거를 타고 침입하는 바벧론과 메대 군사들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나훔은 마치 그 군인들이 이미 유다의 성읍 거리와 광장에 와 있는 듯이 표현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심판의 필연성을 나타내며(슥 6:2; 계 6:4),
병거의 달리는 모습이 매우 찬란하게 묘사되는 것은 그들의 무기와 전술이 뛰어난 사실을 의미 한 다기 보다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니느웨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강한 힘을 침입자들에게 주시리나는 암시이다.
게다가 적들의 공격은 광야의 전투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던 병거로 이루어집니다(수 17:16,18; 삿 1:19).
2) 그들이 엎드러질 듯이 달려서 급히 성에 이르러 막을 것을 준비하도다(5절).
“[5] 그가 그의 존귀한 자들을 생각해 내니 그들이 엎드러질 듯이 달려서 급히 성에 이르러 막을 것을 준비하도다”
본절이 묘사하는 것이 누구인지 해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혹자는 침략자를 묘사한다고 하고, 혹자는 그와 반대로 방어자를 묘사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처럼 모호하게 해석되는 이유는 '그들이 엎드러질듯이'('이카쉘루')때문입니다. 이 단어는 뭔가에 걸려서 넘어지는 모습을 묘사하는 것으로
급히 방어에 나선 앗수르 군대가 당황하는 모습을 그리는 것일 수도 있고, 무거운 무기를 짊어지고 쳐들어오는 바벧론의 군대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막을 것'('하소케크')를 방어용 무기로 본다면 앗수르 군대가 방어 시설로 버티려고 애쓰는 동안 침입자는 이미 성벽 밖에 와 있는 모습을 그리는 것이고, 공격용 무기로 본다면 성벽을 점령하려고 달려드는 침략군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반되는 두 견해 가운데 문맥에 비추어 본다면 후자의 것이 더욱 타당한 듯합니다.
3) 강들의 수문이 열리고 왕궁이 소멸됩니다(6절)
“[6] 강들의 수문이 열리고 왕궁이 소멸되며”
다섯 개의 히브리어 단어로 구성된 짤막한 본절은 주요 방어선이 붕괴되고 성의 중심부가 함락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니느웨 성이 난공불락의 견고한 성이었지만,
성벽은 홍수로 인해 무너져 내리고,
그 사이에 바벧론의 공격군에게 함락될 것을 보여줍니다.
4) 니느웨의 참상입니다(7절).
“[7] 정한 대로 왕후가 벌거벗은 몸으로 끌려가니 그 모든 시녀들이 가슴을 치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우는도다”
정한 대로('후차브')에 대해, 혹자는 고유명사로 보고 당시의 왕후 아니면 여신의 이름으로 추정되는 훗자브로 번역하기도 하고, 혹은 문법적인 의미를 따라 '확정되었다'는 의미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앞뒤 문맥에 비추어본다면, 이 가운데 후자의 해석이 더욱 바람직합니다.
왕후가 벌거벗은 몸으로 끌려가니 그 모든 시녀들이 가슴을 치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우는도다. - 개역 성경에서 번역된 '왕후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원문에 없고 의역입니다.
다만, '벌거벗은 몸으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굴레타'가 여성 3인칭으로
'그녀가 벌거벗겨졌다'라는 의미이므로 이런 유추적인 해석이 나온 듯합니다. 여기서 여성 3인칭 주어는 니느웨의 여왕이나 여신(사랑과 전쟁의 여신인 이쉬타르)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또는 니느웨의 성읍(the city) 자체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NIV).
어쨌든 이런 표현은 앗수르 백성이 처절하게 끌려가는 모습을 충분히 연상시켜 줍니다.
이런 표현은 앞에서(6절) 기록된 결정적인 타격으로 인해 발생된 앗수르의 상황을 약술하는 것으로 고대 근동 문학에서 자주 사용되는 기법입니다.
3. 니느웨의 어제와 종국(8~13절)
1) 물이 모인 못 같더니 이제는 모두 도망하였습니다(8절)
“[8] 니느웨는 예로부터 물이 모인 못 같더니 이제 모두 도망하니 서라 서라 하나 돌아보는 자가 없도다”
저자는 물의 이미지를 살려서 생생하게 니느웨의 운명을 풍자합니다.
니느웨는 그들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였을 것이고,
그들이 가진 막강한 힘을 굳게 믿고 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성 주위를 둘러싼 물로 인해 어떠한 외세의 침입에도 끄덕없이 유지되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한 '못에 모인 물'은 니느웨의 인구를 상징하는 것으로 많은 인구는 고대 사회에서 힘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본절은 앗수르의 상황이 어렵게 되자, 썰물 때 물이 재빨리 빠져 나가듯이 니느웨 군사들은 자신의 수비 지역을 사수하라는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아나버릴 모습을 묘사합니다.
2) 앗수르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가면서 많은 재물을 빼앗기는 모습입니다(9절).
“[9] 은을 노략하라 금을 노략하라 그 저축한 것이 무한하고 아름다운 기구가 풍부함이니라”
은을 노략하라 금을 늑탈하라.
사실 앗수르 사람들은 다른 나라를 침략하여 빼앗은 물질로 적지 않은 풍요를 누렸습니다.
앗수르는 초대 왕 디글랏 빌레셀의 치세 때(B.C.1115-1076)부터 전쟁에서 빼앗은 전리품을 자랑했고, 앗수르에 복속되었던 나라들은 조공 제도로 그들의 자원을 상당히 수탈당했습니다.
그러나 본절은 그러한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어 앗수르는 그동안 모아두었던 모든 재물을 노략당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이 같은 예언은 바벨론 연대기에 기록된 대로 다음과 같이 성취되었습니다. "그들은 성과 신전 지역에서 많은 물건들을 가져갔다".
3) 니느웨가 공허하였고 황폐하였고 모든 낯이 빛을 잃도다(10절).
“[10] 니느웨가 공허하였고 황폐하였도다 주민이 낙담하여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히며 모든 허리가 아프게 되며 모든 낯이 빛을 잃도다”
(1) 니느웨가 공허하였고 황무하였도다.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부카 우메부타 우메불라카'는 히브리적인 리듬과 두운을 잘 활용하여 독자로 하여금 깊은 인상을 받게 합니다.
이것을 직역하면 '텅비고, 또 공허하고 황폐하였다'고 할 수 있고,
세 히브리어 모두 비슷한 말로 앗수르의 황량한 상태를 매우 강조합니다.
(2) 주민이 낙담하여 모든 낯이 빛을 잃도다.
“주민이 낙담하여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히며 모든 허리가 아프게 되며 모든 낯이 빛을 잃도다” '거민이 낙담하여'('레브 나메스')는 직역하면
'마음이 녹아내린다'는 의미로 개역 성경에서 번역된 '주민'은 의역입니다.
이와 같이 육체가 변화하는 모습을 통해 심리상태를 표현하는 것은 히브리 시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일반적이고도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3) 니느웨의 멸망모습을 풍성한 은유적으로 소개합니다(11절)
“[11] 이제 사자의 굴이 어디냐 젊은 사자가 먹을 곳이 어디냐 전에는 수사자 암사자가 그 새끼 사자와 함께 거기서 다니되 그것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었으며”
이제 사자의 굴이 어디냐. - 조롱하는 듯한 수사 의문문은 앞에서 전개된 니느웨의 멸망모습을 보다 풍성한 은유적 표현으로 소개됩니다.
니느웨의 위용을 비유하는 '사자'는 멸망을 가져다주는 세력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표현으로 앗수르가 유다를 향해 여호와의 심판을 실행하는 중개자로 언급될 때 사용되기고 하였습니다(사5:29,30; 렘50:17).
그렇지만, 본절에서는 앗수르가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이 예언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사자와 같은 잔혹성 때문이었습니다(사 10:5-19).
이런 의도는 다음 절에 적나라하게 나타납니다.
4) 앗수르인들이 가지고 있던 잔인성을 사자의 생태에 빗대어 묘사합니다(12절).
“[12] 수사자가 그 새끼를 위하여 먹이를 충분히 찢고 그의 암사자들을 위하여 움켜 사냥한 것으로 그 굴을 채웠고 찢은 것으로 그 구멍을 채웠었도다”
'찢고'('토레프')는 분사형으로, 이런 표현은 악한 짐승의 속성을 나타내거나(창 37:33;44:28), 분노가운데 찢는 모습을 묘사하기 위해(욥 18:4) 사용되었습니다.
본절은 앗수르가 자기들의 잔인함을 따라 심각한 보응을 받으리라는 사실을 강하게 시사합니다.
5)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선포입니다(13절).
“[13]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어 네 병거들을 불살라 연기가 되게 하고 네 젊은 사자들을 칼로 멸할 것이며 내가 또 네 노략한 것을 땅에서 끊으리니 네 파견자의 목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브리어 원문에는 '나를 보라'로 변역할 수 있는 '히네니'가 있어서, 본절이 주위를 환기시키는 표현으로 시작됨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미 앞에서 언급했던 내용을 반복하여 정리해주는 형태를 취하면서, 본절의 내용이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선포라고 소개합니다.
(1) 하나님이 간섭하심을 나타냅니다.
“[13a]내가 네 대적이 되어 네 병거들을 불살라 연기가 되게 하고”
이런 표현은 니느웨의 멸망이 단지 외세의 침략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간섭이 있어서 그들의 죄악을 증거로 삼아 심판을 시행하신다는 의미를 잘 나타냅니다.
(2) 니느웨의 최후를 보여 줍니다.
“[13b]네 젊은 사자들을 칼로 멸할 것이며 내가 또 네 노략한 것을 땅에서 끊으리니”
'젊은 사자들'은 11절에서 표현된 것을 함축적으로 반복하고,
'노략한 것'('타레페크')는 이와 동일한 어근을 가진 12절의 '찢은 것'의 히브리어 '테레프'를 반복합니다.
이것은 앞서 니느웨의 최후에 대해 비유한 내용을 최종적으로 정리해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절의 표현들은 여호와를 대항하여 음모를 꾸몄던 앗수르의 산헤립의 모습을 상기시키는 것으로(1:11; 사 37:9,24),
*1:11 “여호와께 악을 꾀하는 한 사람이 너희 중에서 나와서 사악한 것을 권하는도다”
*사37: 9,24 “[9]그 때에 앗수르 왕이 구스 왕 디르하가의 일에 대하여 들은즉 사람들이 이르기를 그가 나와서 왕과 싸우려 한다 하는지라 이 말을 듣고 사자들을 히스기야에게 보내며 이르되[24]네가 네 종을 통해서 주를 훼방하여 이르기를 내가 나의 허다한 병거를 거느리고 산들의 꼭대기에 올라가며 레바논의 깊은 곳에 이르렀으니 높은 백향목과 아름다운 향나무를 베고 또 그 제일 높은 곳에 들어가 살진 땅의 수풀에 이를 것이며”
나훔서의 주요 작의(作意=작가가 예술 작품을 통해서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와 용어들입니다.
나훔은 본문에서 하나님이 니느웨의 대적이 되셔서 앗수르 왕족들에게 갖은 모욕과 포수를 당하게 하시고 모든 재물이 약탈당하는 것은 물론 완전히 소멸되어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렵게 될 것을 예언했는데 이는 역사적으로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19세기에 이르러서야 겨우 발견된 니느웨의 흔적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철저히 파괴되었는지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병거와 용사들을 다 멸하시고 그들이 노략한 것을 다 끊어버리고 다시는 전령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쉽게 말해 다른 나라를 침략할 수 없도록 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니느웨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이유가 그들의 이기적 탐욕에서 비롯된 다른 나라의 침략과 그 강포함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연히 다른 나라나 백성들을 괴롭히는 자들을 결코 용서치 않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서로 돕고 사랑하며 살도록 지으셨습니다.
하지만 아담이 타락한 이후 자기 죄를 하와에게 떠넘기고,
아담의 죄성을 물려받은 가인이 시기심으로 동생 아벨을 살해한 이래 줄곧 사람들은 이기적인 탐욕과 악한 생각을 따라 타인에게 해를 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기 이(利)만 탐하는 자들을 심판하십니다.
그 옛날 앗수르 제국의 위용은 실로 엄청나고 대단했습니다.
성경적 역사적,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여실히 입증됩니다.
앗수르가 전성기를 구가할 당시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영원한 강자가 없듯이 앗수르도 결코 영원하지 못했습니다.
바벨론이란 신흥 강대국이 일어나 앗수르의 수도이자 철옹성 같은 니느웨를 무너뜨림으로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주목할 점은 앗수르를 무너뜨린 바벨론이 앗수르보다 엄청나거나 대단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진짜 이유는 '만군의 하나님이 치시겠다.'고 마음 먹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앗수르의 대적이 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앗수르가 그처럼 철저히 멸절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대적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어리석은 자, 무지한 자, 지극히 제한적이고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육신의 힘만 믿고 사는 자들은 하나님이 대적이 되신다 말해줘도 무심하게 생각하며 심지어 하나님을 대적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런 자들은 앗수르를 비롯한 하나님이 대적하신 나라들,
스스로 강하다고 자부하는 모든 교만한 자들이 맞이한 참담한 결말을 자초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의 편에 서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부질없는 것인지를 깨닫고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편에 서야할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의 참된 안녕을 경험하며 사는 유일한 방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재물과 영광과 생명의 복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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