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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서면교회 50년사
I. 배경사
1. 부산지방의 기독교 전래
1876년 개항이래 조선의 대표적인 항구도시인 부산은 나라의 관문이자 해상교통의 요충지라는 지리적인 조건 때문에 이른 시기부터 기독교와 접촉할 수 있었다.
언더우드(H.G. Underwood)와 아펜젤러(H.G.Appenzeller)선교사가 1885년 복음을 들고 입국하기 전에 한국에 이미 부분적이긴 하지만 번역된 성경과 한국인 세례교인 그리고 한국인에 의해 설립된 교회가 있던
특이한 양상이 나타났듯이 부산지방도 선교사의 활동이 있기 전에 복음과 접촉한 일이 있었다. 스코틀란드
성서공회가 성경반포사업으로 1883년 일본인 권서인 나가사까를 통해 성경반포사업을 실시하면서 3년 동안 약
2천 권의 복음서를 배포했는데 이것이 부산이 기독교와 만난 최초의 사건이었다.
부산의 초기 선교사로서는 1985년에 입항한 영국교회 선교회 소속 월푸(A.J.R. Wolfe), 1889년 카나다 YMCA에서 파송받은 게일(J.S. Gale)과 1890년 의료선교사 하디(R.A. Hardie)를 들수 있으나 선교의 결실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고, 실제로 부산지방의 선교의 도화선 역할을 한 인물은 1889년 호주 장로교가 한국에 첫 선교사로 파송한 데이비스(J.H. Davies) 선교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가 직접 부산지방의 선교활동에 기여한 것은 없다. 그는 20일 간의 무리한 답사 도보여행으로 1890년 4월 4일 부산에 도착한 그 다음날 폐렴과 천연두에 감염되어 죽었다. 그러나 그의 값진 희생은 호주 장로교가 부산 지방 선교를 주도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듬해 북장로교회가 부산 선교를 시작하면서 윌리엄 베어드(W.M. Baird)부부를 파송했다. 그는 개척정신을
지닌 유능한 선교사로서 초량지역인 영선현에 정착하여 개인전도와 지역순례와 학교설립을 통해 복음을 전했는데, 이러한 그의 사역이 초량교회 태동의 모체가 된다. 베어드가 1984년 4월 22일 심상현과 두 여인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그들이 부산 최초의 수세자가 되었다.
데이비스 선교사가 죽은 후 1891년 10월 호주 장로교회는 멕카이(J.H. Mackay) 등 5명의 선교사를 파송해서 부산선교를 담당하도록 했다. 그들은 부산진 지역을 거점으로 삼고 부산진 교회를 설립했다. 그들의 활동은 다른 선교부와 마찬가지로 전도, 교육, 구제, 의료 분야에 역점을 두었다.
선교초기 부산지역은 이렇게 북장로교와 호주 장로교 선교부가 공동으로 관할했으나 호주 장로교의 영역이 넓었다. 그러나 1913년에 북장로교가 부산, 경남지방을 완전히 철수하기로 결정함으로써 북장로교는 23년 동안
부산에서 21명의 선교사가 이룩한 사역을 마감하고, 1914년부터 부산은 호주 선교부의 선교지가 되었다.
부산에는 선교사들의 주도로 1892년 부산진 교회, 1893년 초량교회가 설립되고, 호주 선교사를 통해서 기독교로 개종하게된 김치몽이 1896년 자기 집에서 예배를 드림으로써 부산 지역 최초로 한국인이 설립한 교회인 영도교회(현재 제일영도교회)의 토대를 마련했다. 부산, 경남지역의 교회성장 속도는 타지역에 비해서 둔한 편이지만 수안교회(1903), 항서교회(1905),구포교회(1906), 명지교회(1906) 등의 설립이 이어져서 1907년과 1912년 사이의 경상대리회 산하 교회 수가 186개처로 보고되었다.
부산지방의 교회는 경남지방과 함께 1907년 9월 17일 한국교회 최초의 장로교인 독로회가 조직됨으로써
1912년까지 경상대리회(현재 시찰에 해당함) 관할에 있었다. 그후 1912년에서 1916년까지는 경상노회로,
1916년부터 해방 당시까지 경남노회 관할하에 있었다.
2. 일제시대의 부산지방 교회
민주시민의식, 계몽운동과 사회개혁의 산실이자 독립운동의 중심인 기독교는 일본 식민정치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다. 일제의 가장 구체적인 종교탄압은 신사참배 강요였다. 1935년부터 강요하기 시작한 신사참배는 처음부터 기독교회의 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그렇지만 그렇게 철저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천주교도 반대하다가 곧 굴복하고, 감리교도 허용했다. 성결교는 끝까지 반대하다가 교단이 해체되었고, 마지막까지 남은 교단은 장로교뿐이었다. 당시 부산 지역의 호주 장로교 선교부도 절대다수가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부산의 일신여학교도 폐교되었다.
그러나 심한 탄압과 강요에 못 이겨서 장로교도 굴복하기 시작했다. 1939년 9월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 할 때만 하더라도 당시 23개 노회 중 17개 노회가 이미 굴복한 상태였다. 신사참배 가결의 불법성에 대해서 한부선(B.F. Hunt)같은 선교사들이 항의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신사참배가 장로교 총회에서 공식적으로 가결된 후 신사참배 불참자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는 상황속에서도 신앙과 교회의 순결을 지키려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특별히 부산, 경남지역에서는 손명복, 이인재,
이현속, 주남선, 조수옥, 최덕지, 최상림, 한상동 등이 주도적 인물로 활동했는데, 한상동과 주남선이 중심이 되었다. 초량교회에서 시무하던 한상동 목사는 1938년 9월 24일 현 정부는 정의 및 신의(神意)에 위반한 우상인 신사참배를 강요하니 오등은 굴하지 말고 이것에 절대로 참배해서는 안된다고 설교했다. 한상동 목사와 주남선 목사는 1940년 7월에 체포되어 해방이 되기까지 구금되어 있었다.
3. 고신교회의 태동
해방이후 한국교회는 신사참배 문제로 심각한 대립과 혼란을 겪었다. 출옥한 지도자들은 배교한 교회를 새롭게 재건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하고 회개운동을 전개했으나 그것마저도 당시 교권을 장악하고 있던 친일세력에 의해 좌절되었다. 권징과 통회자복을 통한 한국교회재건을 위한 노력은 신사참배를 수락한
지도자들의 저항과 공산정권의 출현으로 무산되었다.
1946년 6월에 조직된 대한예수교 장로회 남부총회는 친일적 성향을 가진 인사들이 주도한 것으로 배교의 죄를 청산하지 않았기 때문에 참교회라고 말할 수 없다. 진정한 의미의 한국교회 재건은 부산, 경남지역에서 이루어졌다. 이 일에 주남선, 한상동 목사가 중심이 되어 회개를 위한 자숙 안을 제시하고 참된 교회재건을 위해 노력했으나 김길창(남성재단 설립자)과 같은 친일적 교권주의자의 반대에 부딪혔다. 이런 친일파가 같은 해 경남노회 노회장으로 선출되는 것을 보면 당시 지도자들의 친일적인 성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듬해 경남노회에서 67개 교회가 교권주의자를 반대하고 교회 재건운동에 참여했다.
교권주의자들은 수적으로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교회 재건운동에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고려신학교를 통하여
그 운동이 계승되고 고신교단 교회에 그 정신이 수용되었다.
한국동란 당시 150여 교회가 부산에 설립되고, 1951년도에만 90여개의 교회가 설립되었다. 서면교회는 단순히 이 많은 교회 중 하나로 설립된 것이 아니라 고신의 교회로서 사도들의 고백 위에 세워진, 참되고 거룩한 공동체의 반열에 굳게 서 있는 정통성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점에서 그 설립 의의가 크다 하겠다.
II. 부산서면교회 역사
1. 초창기의 모습
1) 민족역사의 격변기에 태동한 교회
1950년 우리 민족 역사상 가장 처참한 사건인 6.25동란이 발발하자 부산이 임시 수도가 되어 8월 18일 정부청사가 이동하고 수많은 피난민이 부산으로 몰려와 사회는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사람들은 전시라고 하는 자포자기의 심리로 죄의식이 마비되어 각종 범죄가 증폭되는 등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고, 부산은 민간생활을 영위할 수 없을 정도로 도시의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서면교회는 이런 역사의 격변기 속에서 태동하게 되었다. 그 시기는 북한군의 남진이 낙동강 전선에 멈추어 섰을 시기인 9월 초순이었다.
부산시 부산진구 부전동 516번지 정모 집사의 사가에서 김상수 전도사의 인도로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서면교회의 첫 출발이다. 첫 출석 성도로는 당시 부산진교회에 출석하던 이점순 집사(41세, 우영자 권사의 이모), 성진교회(현재 북부산교회)에 다니던 이소순 집사(우영자 권사의 이모), 최순자(20세), 우영자(17세), 이순이(우영자 권사의 모친), 황기옥(20세), 노모 집사(약 65세, 아들은 상업은행 대리로 황씨였음), 정모 집사(약 43세) 그리고 정집사 집에 세들어 살던 40대 여집사 등 10여명이었다.
김상수 전도사는 사모와 함께 북한에서 부산으로 피난왔는데 30대 후반의 나이로 자녀는 없었다. 당시 김전도사 내외는 정모 집사 집에 거주하면서 고려신학교에 재학한 부부 신학생이었다.
초창기 예배 처소의 위치는 현재 부산진구 부전2동 롯데백화점 후문 쪽 어린이 놀이터 옆에 있는 서면 뚝배기집 앞 골목에서 10m 정도 안에 위치한 진주 보신탕집이었다. 그런데 그 집은 내부를 제외하고는 아직도 50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 예배처소와 같은 번지의 맞은 편 집에 박반석(서금재 권사의 남편)씨 가족이 1956년부터 10년간 거주했다.
가정집에서 출발한 이 신생교회는 주일 오전예배, 저녁예배, 수요예배를 드리며 모이기에 힘썼다. 특히 첫 번째 맞이하는 성탄절에는 예배후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떡을 나누면서 기쁨을 나누었다. 부전동 정모 집사 사저에서 여성도들을 중심으로 모였던 교회는 1년간 지속되었다. 교회명도 없이 모였던 이 작은 교회는 지금의 기도소와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 교회로서 손색이 없는 신앙 공동체였다. 교회의 역사를 언제부터 보아야 할지는 토론의 여지가 있지만 이것이 서면교회 최초의 모습이었다.
2) 그 이름 서면교회
김상수 전도사의 노력과 함일돈(F.E. Hamilton) 선교사의 도움으로 부산시 부산진구 부전동 503번지 스웨덴 병원 정문(현재 롯데 백화점 동쪽 도로) 옆 도로상에 약 20평 대지에 천막을 치고 바닥에는 가마니를 깔고 예배를 함으로써 새로운 천막교회당 시대가 도래하였다. 이 천막은 함일돈 선교사가 구해준 것이었다.
스웨덴 병원이 있던 자리는 본래 부산상업고등학교였으나 한국동란 중 발생한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해서 스웨덴 정부가 의료 지원차 1950년 9월 23일 그 자리에 병원을 설립하게 되었다(현재 롯데 백화점 동쪽 끝에 기념비가 있음). 병원 철조망 울타리를 따라 도로의 일부를 점유한 천막교회당은 그 정문 양쪽 기둥 위를 아치형으로 연결하여 대한 예수교 장로회 서면교회라는 교회의 이름을 내걸고 1951년 9월 초순부터 이곳으로 이전하여 회집을 했다. 서면교회는 부산에 있는 특별한 교회가 아니라 성경의 에베소, 빌립보, 데살로니가 등의 교회와 꼭 같은 그리스도의 교회였다. 교회 이름은 당연하게 교회의 위치가 서면 지역이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그렇지만 서면은 부전동, 범천동과 전포동 일대를 포함하는 지역인데 그 이름은 이 지역을 복음으로 정복하려는 비전을 담고있는 이름으로 보인다.
3) 함일돈 선교사
함일돈 선교사는 교회를 위해 천막을 구해주었다는데, 그가 서면교회 설립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김상수 전도사와 개인적인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함일돈 선교사는 원래 미국 북장로교 소속이었지만 프린스턴 신학교가 자유화되면서 정통장로교로 옮겼다. 해방 후 그는 고려신학교 설립초기(1946-1950) 교수로서 성경과, 변증학을 가르쳤다. 그는 성경의 절대무오성과 기독교 핵심교리를 옹호한, 한국교회 보수신학의 버팀목 역할을 감당했던 신학자였다(이상규, 함일돈, 기독교 사상 제3호, 1996, pp. 105-113). 그의 회고록에서 그가 한동안 출국했다가 돌아와서 신학교에서 다시 강의하는 것을 좋게 여기고 다시 한국말로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 스스로 감탄한 것을 보면 한국교회에 대한 애착이 있고 자신의 사역에 보람을 느꼈다는 것을 알 수 있다(Missionary Memories, p. 201). 그는 당시 부산 지역의 여러 교회의 설립에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서면교회도 그 중에 하나였다. 서면교회의 설립이 칼빈주의 신학자인 함일돈 선교사와 관계가 있다는 것은 이 교회가 출발부터 건전한 신학적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4) 천막교회의 형편
비록 천막이긴 하지만 교회당 모양새를 갖춘 상태에서 첫 예배를 보았을 때 성도들의 기쁨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바로 그 주일에 성진교회에 출석하던 황소연 권사(당시 집사)가 오전예배를 마치고 귀가하던 중서면교회란 간판을 보고 그날 저녁부터 본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그 후 3주가 지나서 황권사는 아들 정택화, 자부 변봉생씨와 딸 정숙희씨, 정석지(정택화씨 동생) 등 온 가족을 서면교회로 인도했다. 이때부터 성도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성장하는 천막교회 성도들에게 난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초창기 성도 중 상당수가 잘못된 은사집회에 참여하여 전도관에 빠지는 아픔도 겪었다.
교인 수가 늘어가고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하였으나 환경은 열악하고 이들을 수용할 교회 시설은 보잘것없었다. 강대상은 사과 궤짝을 쌓아서 만들었고, 전기시설이 없어서 석유등을 켰다. 성도들은 토요일이면 주일을 준비하느라 시커멓게 그을린 석유등을 씻고 바닥 청소를 해야 했다. 예배처소가 도로 위에 길쭉하게 친 천막이기 때문에 예배는 매번 시끄러운 자동차 경적 소리에 방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5) 최초의 결혼식
천막교회당을 시작한 이듬해 봄, 교회에 경사스런 일이 있었다. 그것은 천막교회에서 최초로 거행한 황기옥씨의 결혼식이었다. 농막교회에서 시무하던 당회장 정해동 목사의 주례로 결혼식은 진행되었고, 악기가 없어서
청년중 우영자씨와 그 친구 다섯 명이 김상수 전도사 사모에게서 배운 찬송 행복의 문 열려라를 무반주로
불러서 웨딩마치를 대신했다. 교회설립 이후 최초로 믿음의 가정이 탄생한 것을 온 교회가 기쁨으로 축하했다.
2. 성장하는 판자집 교회
1) 제2대 교역자 노봉래 전도사부임
1952년 4월경 초대 교역자 김상수 전도사가 1년 6개월 간의 사역을 정리하고 사임했다. 2대 교역자로 황해도 출생인 노봉래 전도사가 1952년 4월에 부임했다. 그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부임 당시 50대 후반이었으며 가족으로는 사모와 장남 노광희, 차남, 그리고 3명의 딸이 있었다. 차남은 교단의 전도사급 교역자를 군목수급을 위해서 기용했던 촉탁 군목으로 활동했다. 노봉래 전도사는 부임후 천막교회당을 50여평으로 확장하여 판자집 교회당으로 개조했다. 지붕은 함석으로 덮고, 마루바닥을 깔고 전기시설도 갖추었다. 철제 종탑을 세워 매일 새벽과 주일 낮, 저녁과 수요일 저녁에 종소리를 울려서 예배시간을 알리므로 서면 일대에 교회의 존재를 확인시켰다. 노전도사는 예배당 울타리 안에 방 두 칸 짜리 판자집 사택을 건축해서 생활했다.
노봉래 전도사 부임이후 교회는 놀랍게 성장했다. 이북말투인 그의 설교는 별로 다듬어진 설교는 아니었으나 복음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영성을 갖춘 설교로 대단한 호소력을 지녔다. 깊은 기도생활이 그런 영적 감화력을 뒷받침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성경 묵상을 많이 했기 때문에 설교할 때 인용하는 성경구절은 전부 암송할 정도였다. 성도들은 예배시 늘 부흥회에 참석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평양 신학교 출신답게 바른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든든히 세우고, 정통 보수 신앙으로 성도를 교육하여 교회 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
2) 부교역자들
그 당시 주일학교는 광복동에 있는 고려신학교 예과에 다니던 홍관표 전도사(당시 24세, 현재 호주 시드니중앙장로교회 담임)가 담당했다. 그는 다재다능한 사역자로서 모두가 탐내는 일꾼이었다. 그는 교육전도사 수준에서 모든 성도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적응력, 조직력, 표현력, 지도력 등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당시 홍전도사의 돋보이는 지도력과 교사들(사진 No. 1 참조)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주일학생 수가 200명에 이를 정도로 성장했다. 당시 교회당은 아이들이 뛰면 마룻바닥이 울렁거렸고, 창문이 작고 그 수가 적어서 낮에도 백열등을 켜 놓아야 할 정도로 침침했지만 교사들은 즐거움으로 헌신했다.
홍전도사는 교회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전도사로 인정하여 교인들이 그를 특별히 아꼈다. 서울 수복이후 가족은 서울로 가고 혼자 지내던 홍전도사는 고구마를 좋아해서 그의 책상머리에는 고구마가 떨어질 날이 없었고 심방 때에도 가는 곳마다 고구마 대접을 받았다. 어느 할머니는 떡이 식을까봐 허리춤에 싸서 홍전도사에게 전달한 적도 있었다. 홍전도사는 군복무 문제로 부득불 일반대학으로 옮기기 위해 서울로 떠나야 했다. 그때 여러 집사들이 그의 학자금 상당금액을 모아주고 송별을 아쉬워했으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이별의 눈물을 흘릴 만큼 많이 사랑했다.
노봉래 전도사의 목회를 도와서 심방과 전도, 양육을 담당하던 교역자는 최정옥 전도사(고려신학교 12회, 현재 미국 뉴저지 거주)였다. 당시 고려신학교를 다니며 복스럽게 생긴 초등학생 아들 하나(현재 동부삼일교회 박성도 담임목사)를 두었던 최전도사는 주일이면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었는데 항상 단정하고 청순한 이미지를 주었다. 최전도사는 자신의 외모만큼이나 깔끔하고 차분한 성격을 가졌다.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는 밝고 조용한 성품에 잘 나서지 않으면서도 교인들의 영적인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해 준, 여성이지만 신사적인 전도사였다. 최전도사는 변변한 성경공부 프로그램 하나 없던 그 시절에 1955년 10월부터 주일 오후에 청년회(SFC) 성경공부를 인도하면서 로마서를 가르쳤다. 이 성경공부는 성경과 기독교 교리를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어하던 조상희(현재 부곡중앙교회 담임목사)씨의 요청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녀의 로마서 강의는 말씀의 진리를 갈망하던 학생, 청년들의 영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1956년 말 최전도사는 서면교회를 떠나 안양신일교회에서 10년간 사역하고, 사회복지 시설인 진해 웅천 신애원에서 10년 이상 사역한 뒤 미국 허드슨 교회에서 전도사로 은퇴했다.
3) 노봉래 전도사의 사역
노봉래 강도사는 1956년 9월까지 4년 6개월 동안 시무했는데 부임 당시 20명 정도였던 교회가 임기동안 주일예배시 50평의 교회당이 가득 찰 정도로 성장했다. 성장의 요인은 우선 외적으로 피난민과 농촌인구의 도시이주와 같은 인구 도시집중 현상도 들 수 있겠다. 1951년 당시 부산 인구는 889000명으로 집계되었는데 그 중에 피난민이 40-50만이었다. 1953년에는 827570명이었다. 1949-1955년의 인구증가는 서울의 11.1배에 달할 정도로 급속하게 증가하여, 1955년부터 부산의 인구는 백만을 넘어섰다(부산시사, 제3권, pp.1325-8). 이것은 서울 수복이후 많은 피난민이 본래 거주지로 복귀했어도 부산으로 이주하는 이주민이 꾸준히 증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화교를 포함해서 서면 일대에 모여든 주민들이 교회를 찾아옴으로써 교회성장을 이룬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서면교회의 성장은 오히려 그런 자연증가보다도 복음에 대한 노전도사의 뜨거운 열정과 그를 중심으로 한 교인들의 새벽기도 운동과 헌신적인 교회 봉사가 중요한 성장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주의 일에 헌신된 많은 청년들이 교사와 찬양대 대원으로 봉사했다. 그 중에 조상희(현재 부곡중앙교회 담임목사)씨는 문현동 소재 통신 기지창에 군복무를 하면서도 주말이면 매번 외출을 나와서 청년회 회원으로, 주교교사와 찬양대 대원으로 주일 늦게까지 봉사하고 귀대할 정도로 헌신적인 봉사를 아끼지 않았다. 청년들의 열심은 헌신예배 빈도 수에서도 나타난다. 청년회는 한 달에 한번씩 헌신예배를 드렸다.
재미있는 것은 예배시간에 출석을 불렀는데 서기(임호)가 회원을 호명하면 회원은 자기가 좋아하는 성경을 한
구절씩 암송함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사진 No. 1은 청년들의 헌신적인 봉사를 증거하는 것으로 1956년 8월
20일 무더운 여름에 성경학교를 마치고 교사들이 간담회를 가지던 장면이다. 그때 참석한 교사가 노승원, 노광희, 조상희, 박창선, 박정규, 황석현, 이문웅, 신정순, 이희순, 최정옥 전도사 등이다.
중고등부 모임인 학생신앙운동(SFC)이 조직되어 학생들이 주일 오후에 별도로 모여 신앙활동을 했다. 1955년부터 1957년까지 노봉래 전도사의 장남인 노광희씨가 위원장을 맡았는데 그 활동이 얼마나 활발했던지 회지 어린양을 1955년 한 해에 세 번이나 발간할 정도였다(1958-1959년 사이 제4호에서 제7호까지 발간, 위원장: 박정규). 매주 정기 집회에서 최정옥 권사(전도사)가 성경공부를 인도했다. 부산지방 SFC는 1955년 10월 31일(월)부터 11월 6일(토)까지 부산남교회에서 박윤선 목사와 한부선(H. Bruce) 선교사, 전성도 목사, 김진홍 목사를 강사로 특별신앙강좌를 개최하여 학생신앙운동의 성장을 기했다. 시기를 보아서 이 강좌는 SFC가 종교개혁을 기념해서 정규적으로 마련한 것 같다.
특별히 1955년 4월 11일(월)부터 16일(토)까지 백영희 전도사를 강사로 춘계 심령 대 부흥회를 개최했다. 매일 새벽, 오전, 저녁 세 차례 집회를 가졌는데 성도들이 얼마나 은혜를 받았던지 박정규(현재 항도교회 장로)씨가 설교 내용을 기록하고, 노광희씨가 필경, 등사해서 50쪽에 달하는 책으로 엮을 정도였다. 그 부흥 설교집의 내용은 주로 믿음과 회개, 예수님의 사랑과 최후승리 그리고 말세를 당한 성도들의 삶에 관한 것으로서 죄에 대한 전투적인 신앙을 강조했다.
교회가 양적으로 부흥하자 교인들은 성장한 교회에 어울리는 지도력을 가진 유능한 목회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교인들은 당시 노봉래 전도사는 나이가 많고 지도력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교인들의 요구가 증폭되자 당회장 전성도 목사(농막교회)는 공동의회에서 신임투표를 실시했다. 그 결과 부표가 과반수가 되어서 당시 노강도사는 교회를 사면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노강도사는 강원도 합동측 교회로 이동했다. 교회성장에 대한 열망은 과거에도 지대했던 것이다.
3. 성숙을 향해 가는 교회
1) 제3대 교역자 강용한 목사부임
노봉래 전도사는 4년 6개월간 시무하고 1956년 9월에 사임했다. 그리고 당회장 김갑석 목사(범천교회)가 제직회를 소집하여 경남 함안군 가야면 함안역전교회에 시무하던 강용한 목사(고려신학교 4회)를 후임 교역자로 청빙하기로 결의하였다. 사실 강목사의 청빙은 요즈음과 같이 설교로 선을 보고 난 뒤에 이루어졌다. 강목사는
그해 10월부터 임시목사로 시무하게 되었다. 교회는 당시 회계를 담당하던 정택화 집사를 대표로 선정하여 함안으로 보내어 10월 13일 이삿짐과 함께 강목사를 모셔왔다. 공동의회에서 투표한 결과 찬성 39표, 반대 3표가 나왔다. 서면교회 제3대 교역자로 부임한 강용한 목사는 사모님과 슬하에 장남 강규태 선생, 차남 강규찬 선생(현재 만민교회 담임목사) 등 6남 4녀를 두었다.
2) 강용한 목사의 사역
강용한 목사는 당시 지도자로서 행정력이 있고, 강력한 리더십이 있는 교역자로 인정을 받았다. 그의 설교는 영적 감화력이 있었고, 특별히 고려파 교회의 초창기 설교의 특징인 죄에 대한 책망과 회개를 촉구하는 강력한 메시지였다. 강목사는 항상 온화한 성품을 지녔지만 성도들의 해이해진 생활 태도에 대해서 질타하는 엄격한 면도 있었다. 당시 고려파 교회의 여성도들은 화장을 짙게 한다든지, 굽이 높은 구두를 신는다든지, 파마를 해도 교회에서 혼이 나는 분위기였다. 교인들은 새로 부임한 목사에 대해 많은 호감을 갖고 강목사의 지도를 따랐기에 교회는 새로운 힘을 얻어 날로 성장해 갔다.
(1) 유년 주일학교 활동
1956년 강목사 부임후 처음으로 맞이한 성탄절은 이전보다 더욱 다채로운 행사로 맞이했다. 성탄전야에 축하예배를 하고 난 후 유년 주일학교 어린이 중심으로 2부 순서를 가졌다. 프로그램으로는 성경암송, 무용, 독창, 합창 등의 순서로 이어졌고, 강규찬 선생이 산타 할아버지 역을 맡아서 성도들을 즐겁게했다. 이때 봉사한 교사와 찬양대원의 수로 그때 헌신적인 교회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교사로 조상희, 박정규, 강규태, 강규찬, 황석현, 유종열, 김정애, 신정순, 우영자, 이옥수, 이희순, 차무순, 한정희 등(사진 No. 2 참조)이 봉사했고, 찬양대원으로는 노승원, 조상희, 박창선, 박정규, 강규찬, 황석현, 유종열, 우영자, 이옥수, 이희순, 차무순, 한정희, 유모씨 등이 섬겼다(사진 No. 3 참조).
교회의 성장은 이듬해 유년 주일학교 졸업생 수를 보아서도 알 수 있다. 1957년 12월 29일 성탄 장식이 그대로 남아있는 판자집 교회당에서 제4회 유년 주일학교 졸업식이 있었다. 당시에는 중학교 1학년까지 유년주교에 속해 있었으므로 졸업생은 중학교 1학년 학생이었다. 졸업생은 남학생이 강규섭, 한정의 등 6명이었고, 여학생이 홍명희 등 11명으로 총 17명이었다(사진 No. 4 참조). 당시 부장은 노승원 집사였고, 우종건, 김영상, 강규동, 김정애, 신정순, 오영희, 차무순, 김경주씨와 같은 새로운 교사가 더 추가되었다. 유년 주일학교 교사들은 자기들이 맡은 반을 활성화하는데 노력할 뿐만 아니라 성경읽기 운동을 전개하여 개인적 신앙성장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였다. 매월 교사회에서 서기는 교사들이 읽은 성경의 분량을 기록함으로써 경쟁적으로 성경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기록을 보면 많이 읽은 교사는 구약 4독(차무순), 신약 20독(박정규)을 했다.
활기찬 교회의 행사는 1958년 7월 29일 여름 성경학교를 마치고 강목사 부부와 학생회 회원, 성도 30명, 어린이 50명이 송정 해수욕장을 다녀온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사진 No. 5 참조).
(2) 학생신앙운동 활동
1958년 초 한동안 활동이 미진했던 학생신앙운동(SFC)이 새 봄을 맞아 기지개를 켜고 다시 일어섰다. 3월 30일 회원 40명이 모여 정기총회를 갖고 새 임원을 선출했다(회장: 박정규, 부위원장: 문태열, 박성옥(6월에 김경주로 교체됨), 총무: 박창선(6월에 강규동으로 교체됨)). SFC는 어린양 4호를 발간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어린양은 10쪽 남짓하게 출발한 것이 이제 24면에 달하는 책으로 엮어졌다. 당시 이 일을 위해서 엄영환 장로(백중 한의원), 정택화 집사(신광 철물점), 엄문섭 집사(최고급 철물상), 박인근 선생(벗양재점), 박창선 선생(고급 시계수리), 박반석씨(금성 지물점)와 주교교사, 청년 면려회가 많은 도움을 준 것을 보면 이런 학생운동의 활동은 온 교회의 관심속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어린양 제5호는 50면에 달하는 것으로 그해 6월 22일에 발간되었다. 어린양은 그해 세 차례나 나왔다. SFC는 매월 둘째 주와 넷째 주 토요일 오후에 정기집회를 갖고, 재정은 회원들의 월정헌금으로 충당했다. 학생들의 행사로는 성경장절 찾기, 성경암송 토론대회같은 주로 지적인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졌다.
3) 주차수 집사 소원건
강목사의 열정적인 사역으로 재임 1년 동안 교회는 성장 가도를 달렸다. 그렇지만 호사다마라고 교회성장의 길은 결코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1958년 9월 9일자로 작성된 부산노회록에 의하면 서면교회는 주차수 집사 외 18명이 강용한 목사를 상대로하여 소원장을 제출하였음으로 본 시찰은 두 번 회를 열고 조사 할 세 번째는 서면교회 가서 제직들을 뫃으고 심사했다고 한다. 사건의 발단은 강목사의 위촉을 받아 엄영환 장로(칠원교회 시무장로)가 제직회를 소집한 일에 대하여 주차수 집사(가축병원 수의사)가 불만을 품고 부덕한 언동을 하자 당회장 강목사가 6개월간 근신시킨 것과 명독실 권사가 자신의 부덕한 언행에 대하여 권책을 받고 사면한데서 비롯되었다. 배후에 불평하는 교인들이 야당적인 기질이 있는 주차수 집사와 규합하여 예배를 방해하면서까지 당회장에 대해서 반항을 했다. 주집사는 정택화 집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강목사의 등단을 무력으로 저지하는 등 난동을 부렸다. 시찰회에서는 3차에 걸쳐서 조사후 권면하니 명권사는 회개하고 순종하겠다고 했고, 다른 집사들도 시찰회의 지도에 따르겠다고 해서 선처하여 예배를 방해한 주집사와 김광엽 집사를 책벌한 것으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그후 다시 두 집사는 불복항의하여 노회에 소원장을 제출했는데, 노회는 해당 북부시찰회에 전권을 일임하여 사태를 수습케 하고 권징조례 제 76조에 의하여 소원장을 기각했다. 이 일로 주집사는 교회를 옮겨 부민교회로 가고 명권사도 서면교회를 떠났다.
이런 시련이 있은 후 교회는 흩어진 교인들의 영적인 분위기를 수습하고 새로운 영적인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 황철도 목사를 모시고 1958년 11월 11일부터 한주간 동안 부흥사경회를 개최했다.
4) 교회당 이전 신축
1957년 강목사와 교인들은 교회가 성장하자 길가에 있는 초라하고, 노후된 건물이 수용 한계가 있다고 느껴 건축에 대한 열망을 가졌다. 그해 교회는 부전동 502번지 중 당시 우집사, 문집사외 한 가정집이 들어서 있던 61평되는 국유지를 비교적 싼값에 매입했다. 1958년 시련의 바람 속에서 이탈하는 소수의 교인도 있었지만 교회는 흔들리지 않고 새 예배당 건축을 시작하여 지붕을 올릴 수 있었다.
건축위원장은 김영환 집사였는데, 그 당시는 모든 교인들이 인력부대가 되어 기쁨으로 교회당 건축에 가담했다. 특히 강규찬, 강규동 선생 형제는 벽돌 제작틀을 구입해서 직접 벽돌을 찍었고, 강경숙 집사는 교회 마룻바닥을 깔았다. 모든 성도들이 우리 교회라는 자세로 동원되어 건축에 참여해서 벽돌과 모래 등 건축자재를 운반하는 순수한 열심을 보였다. 교회당은 단층집으로 아담했고, 6개월 정도의 기간이 소요되어 1959년 초반에 준공을 보았다.
5) 새로운 각오
1958년 12월에는 강목사의 서재에 도둑이 들어 성경주석과 신학서적 등 60여권과 성찬기를 도난당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강목사는 이 일에 대해서 오히려 감사한다고 하면서 교인들을 안심시켰다. 새해가 되어서 지난 해 교회에 약간의 파문이 있었던 것을 상기시키며 강용한 목사는 심기일전하여 1959년 새해 목회방침을 여섯 가지로 확정발표했다. 첫째, 새 예배당 입당 예배는 전날 밤에 온 교회가 철야기도를 통해서 지난 해의 모든 과오를 철저히 회개하고 새 마음으로 참석한다. 둘째, 새 예배당이 준공되고 헌당식 할 때까지 어려운 시험이 없도록 기도에 힘쓴다. 셋째, 신실하고 노력하는 인재를 양성한다. 넷째, 배가운동으로 새 예배당을 가득 채운다. 다섯째, 신입 교인을 잘 영접하고 양육을 철저히 한다. 여섯째 성경읽기 운동으로 성경적 신앙을 가지도록 한다는 것이다.
강목사는 신년 목회계획서를 따라 교회의 체계를 잡고 안정된 목회활동을 위한 일차적인 조치로 장로 2인을
노회(1959년 3월 3일)에 청원하여 허락을 받았다. 교회의 영적 쇄신을 위한 일환으로 상반기에 두 차례의 부흥집회가 있었다. 4월 6일부터 한 주간 동안 박상순 목사를 강사로 6월 22일부터 24일까지 한부선 선교사를 강사로 모시고 은혜를 받았다.
교회의 은혜로운 분위기 속에서 학생신앙운동 회원들은 9월 5일 어린양 제7호를 총 56면으로 발간했다.
유년주교 부장에는 강규태 선생, 교사로 박창선, 조창희, 유종열, 강규동, 김정애, 신정순, 우영자, 이희순, 김연숙 등과 같은 청년들이 봉사했다.
4. 1960년대 서면교회의 모습
1) 확고한 이정표
고려파 교회는 1960년 12월 승동측과 합동한 지 불과 2년 만에 결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때 많은 교회들은 어느 교단에 소속될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다. 서면교회가 1963년 8월 4일 강용한 목사의 사회로 진행된 제직회에서 김영환 집사의 동의와 김필순 집사의 재청으로 투표한 결과 만장일치로 고려파 교회에 남을 것을 가결했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합동전 부산노회(고려측)로 환원됨을 우리 서면교회는 환영하고 우리 서면교회는 고려측 부산노회에 속하기로 가결하다라고 되어있다. 이로써 서면교회는 신앙의 순결과 순교정신을 계승한 고려파 교회로서 다시 한번 그 정체성을 확인하게 되었다.
2) 초대 장로장립 및 권사취임
승동측과 합동하는 문제 때문에 교회가 노회에 요청한 장로 장립 허락이 있은 후 상당한 기간이 지나서 장로피택이 가능했다. 1963년 5월26일 공동의회에서 강경숙 집사가 회원수 3분의 2이상의 지지를 받고 장로로 피택되었다. 이듬해 1월 23일 서면교회 초대장로로 취임하는 경사가 있었다. 강장로는 북부산교회에서 집사로 봉사하다가 1957년 서면교회로 이명했다. 당시 그는 공무원으로 경남도청에 근무했다. 강장로는 부인 박신소 집사 사이에 아들강동길(현재 복음병원근무)과 딸 강은주(현재 명장교회 집사)를 두었다. 강경숙 장로의 장립으로 말미암아 서면교회는 자체 당회를 구성할 수 있게 되었고 명실상부한 장로교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또한 초창기 개척멤버에 속하는 황소연집사를 권사로 세워서 함께 교회를 섬기도록 했다.
3) 교역자 이동
강용한 목사가 6년 6월간 서면교회에서 임시목사로 시무한 후 사역지를 옮기지 않으면 안되었다. 한동안 교회 내에서 강목사의 강력한 지도력에 싫증을 느끼고 강한 메시지에 반감을 느끼는 성도들이 늘어가자 교회는 미묘한 분열로 또 다른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사태는 악화되어 강목사의 퇴진을 요구하는 청년들의 시위도 이어졌다. 교회의 내분이 지속되는 동안에 교회는 침체되고 이웃의 부전교회로 이동하는 교인들도 있었다. 부산노회는 교회문제를 수습하는 차원에서 강목사와 자성대 교회를 시무하던 장정실 목사를 상호교체하도록 했다. 당시 강목사와 교회 간의 심각한 갈등은 교회형편상 퇴직금을 지불할 수 없다는 제직회의 결의(1964년 5월 3일)와 시찰회 입회 하에 미지급 분을 지불하도록 한 결의(1964년 6월 14일)와 교역자 이동시 제직회 회록이 훼손된 것을 보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교역자 이동시 강목사를 지지하던 서면교회 성도들이 강목사를 따라 자성대 교회로 이동함으로써 수적인 감소가 있었다.
4) 제4대 교역자 장정실 목사 부임
고려신학교 6회 졸업생으로 자성대교회에서 시무하던 장정실 목사가 1964년 4월 1일자로 서면교회에 부임했다. 장목사는 당시 30대 초반의 연령으로 1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그는 약간의 신경쇠약과 같은 건강문제로 가끔 수양을 하기도 하며 목회에 불편을 겪었지만 문학적 소양이 많은 목사로 시적 감각이 뛰어났다. 문학적 기지가 담겨있는 그의 기도와 설교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 설교의 감화력 때문에 장목사는 종종 여러 교회의 초청을 받아 지방으로 다니며 부흥집회를 인도했다.
5) 제2대 장로장립
장목사 부임 직후 교회는 교회의 균형있는 발전을 위해서 장로 1인을 피택할 필요성을 느끼고 제직회 가결(1964년 7월 5일)과 노회허락을 거쳐 이정섭 집사를 장로로 선출했다. 이정섭 집사는 1966년 3월 3일 서면교회
제2대 장로로 장립을 받았다. 이장로는 공무원으로 근무하다가 당시에는 개인 사업가로 사포공장을 경영했다.
6) 시련의 날들
장정실 목사 임기동안 교회는 큰 어려움에 봉착했다. 교회 내에 용문산 나운몽파, 권신찬구원파, 문선명의 통일교와 같은 이단이 들어와서 교인들을 미혹했는데, 많은 성도들이 분별력이 없어서 그들의 집회에 참석했다. 한동안 그들은 교회와 분리하여 예배도 따로 드렸다. 당회장 장목사는 이단의 활동을 저지하고 교회의 분열을 막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이 일을 수습하기 위하여 노회에서 수습위원이 파견되고, 노회 차원에서 당회장 및 당회원 시무정지 및 제직을 개편하는 일이 있었다. 노회는 근 2년 동안 1차 수습위원(위원장: 이경석 목사)과 2차 전권위원(위원장: 한상동 목사)을 파견하여 수십 차례 조사하고 권면한 결과, 장정실 목사가 교회분규사건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고 위임목사직을 해임할 것을 결정했다. 노회의 결정에 따라 장목사가 1967년 10월 5일 서면교회를 사면함으로써 분리직전까지 가는 극한 상황을 막고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는 평안을 되찾을 수 있었다.
교회는 많은 시련을 겪는 중에도 연합집회나 체육대회에 참여하여 교회연합운동에 힘을 썼으며, 신망애 양로원교회, 개금교회, 벌교중앙교회, 신평교회, 노회 산하에 있는 교회개척을 지원하는 일과 질병으로 고통 당하는 교우들을 돕는데도 등한히 하지 않았다.
7) 제5대 교역자 이경석 목사
일제시대 신사참배거부로 옥고를 치르던 성도의 집을 트럭을 타고 찾아다니며 담장 너머로 쌀자루를 던져주면서 식량을 공급하던 일본 무도관 소속 유도 4단의 한 청년이 있었다. 그 의리의 사나이가 바로 이경석 목사였다. 고려신학교 6회 졸업생인 이경석 목사는 1968년 4월 19일에 조눌교회를 사면하고 서면교회로 옮겨, 5월 첫 주일부터 부임하여 위임목사로 시무했다. 이목사는 설교가 체계적이지 못하고, 받은 은혜를 나누는 식의 간증조로 설교를 했다. 그는 자신의 목회적 역량보다는 과거의 공적으로 인하여 성도들과 교계인사들에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노회청원을 통해 그 동안 시무정지 상태에 있던 장로직을 회복시키고, 교인들의 화합을
위해서 애썼다.
부산서면교회 50년사 - 1970년대
1. 서론
1970년대 우리 교회의 역사를 서술함에 있어서 염두에 두어야 할 원칙은 그 시대에 있었던 주요사건을 중심으로 해서 전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시기를 객관적으로 알 수 있는 기록물들이 제한이 되어있고, 아울러 존재하는 기록물들도 중요사건에 대해서만 구체적으로 기록이 되어져 있기 때문이며 또한 이 시기 대부분이 제5대 담임목사인 이경석 목사의 목회기간(1968. 5 .2 - 1978. 6 .22)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1970년대 역사서술은 주요사건들 - 제3차 예배당 건축, 장립식, 담임교역자 이동, 시무장로의 이명, 권징사례, 성레식 거행횟수, 집회등 -과 객관적인 교회성장의 내용을 중심으로해서 서술하고자한다.
2. 본론
1) 제 3차 예배당 건축
이 시기에는 예배당건축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시기였다. 교회는 1959년도에 건축한 50평의 콘크리이트 기존 예배당이 낡고 협소하며 시대에 맞지 않은 구식이라 1970년 7월 26일 제직회에서 예배당건축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거론하였다. 그 후 1975년 8월 5일 제3차 예배당 헌당식까지 오랜 기간동안 예배당 건축에 대한 일들을 진행하였으며, 아울러 계속해서 제4차 예배당 건축을 위하여 예배당 이전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였다. 이를 위하여 교회는 1977년 4월 제직회에서 예배당 이전에 대한 논의를 하였으며 1979년 2월 18일 당회는 가시적인 성전건축을 위하여 사업연구위원 3인(강경숙, 김천석, 김학준 장로)을 선정하였으며. 결국 제4차 예배당은 교회의 미래를 생각하여 현재의 위치에서 이전하여 건축하기로 결정하였다. 후에 드러난 사실이지만 제4차 예배당이 현재의 위치(부산진구 당감 2동 95-1번지 5통 2반)로 이전하여 세워짐으로 우리교회는 동네교회의 모습에서 나아가 교단과 부산 교계의 교회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렇게 1970년도는 교회의 예배당건축에 대한 노력이 돋보인다.
특별히 이 시기에 완성되었던 제3차 예배당 건축을 위한 일련의 진행들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ㄱ) 조직
교회는 1970년 7월 26일 제직회에서 세 번째 예배당 건축을 계획하고 이를 위해서 현 예배당 매매교섭을 당회에 일임하기로 하였다. 그 후 1971년 2월 7일, 제직회는 교회당 건축을 위해서 기성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하고 이를 당회에 일임하였다. 그리고 동년 2월 21일 당회에서 초안한 건축기성회 조직을 3월 7일 제직회에서 추인하였다. 그 때 조직된 제3차 예배당 건축을 위한 건축기성회 조직은 회장 서상태 장로, 부회장 이정섭 장로, 황소연 권사, 서기 박인서 집사, 회계 김학준 집사, 기획이사 강경숙 장로, 최종옥 집사, 도성호 집사, 주입중 집사, 김양희 집사, 한덕악 집사 그리고 이사 남녀 서리집사 전원으로 구성하였다.
ㄴ) 구체적 활동
건축기성회를 조직한 이후 예배당 건축을 위한 활발한 활동이 이뤄졌는데 이를 위한 구체적 활동을 보면 그 해 5월 2일 제직회에서 예배당건축을 위한 5개년 계획으로 월정금을 작정하였으며 아울러 동년 7월 4일 제직회는 경상비에서 매달 오만원을 건축기성회로 이월하기로 하고, 또한 매월 80-100만원정도 적금하기로 하고 이를 재정부에 일임하였다. 그리고 동년 7월 18일 제직회는 예배당을 인근 천주교회당으로 이전을 하느냐를 놓고 표결을 한 결과, 가 16표, 부 11표로 찬성안이 3분의 2가 되지 않아 인근의 천주교회당으로 이전하자는 안이 부결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73년 1월 21일 제직회는 예배당 이전에 관한 가부문제는 당회와 예배당 신축기성회의 임원에게 일임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아울러 동년도 2월 4일 제직회에서 기성회장이 예배당 이전에 관한 위임받은 안건에 대한 경과를 보고하였다. 그리고 동년도 5월 6일 제직회에서 예배당을 옮겨가느냐, 현재대로 있느냐의 가부간 표결을 한 결과 가 22표, 부 14표가 나와 이전하기로 결정을 하였으며, 아울러 이전하는 조건에 216평을 하느냐 135평을 하느냐에 표결을 붙이니 216평 12표, 135평이 24표이므로, 교회는 135평을 매수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예배당 이전에 관한 사항은 기성회 임원에게 일임하기로 하고 사택구입 건은 관리부에 일임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동년도 5월 13일 제직회에서 그 전주일 제직회에서 통과된 예배당을 이전 신축하자는 결의를 무효화하고, 예배당 신축에 관한 자금염출, 기타 신축여부 일체는 당회와 기성회 임원회에서 결의하여 제직회에 보고 하여 동의를 얻도록 하였다. 특히 부지매입경비부족으로 예배당을 이전하여 신축하자는 결의가 무산되어서 그 당시에는 안타까웠지만 현재의 교회당으로 이전토록 계획하신 하나님의 섭리였다.
이 일후에 교회는 계속하여 예배당 건축을 추진하였는데 그 해 5월 20일 제직회에서 예배당 건축을 즉시하느냐, 연기해서 시작하느냐에 가부를 물어 바로 건축하자는 의견이 가결되었다. 그 때 표결결과는 지금 시작하자는 표가 21표, 연기해서 시작하자는 표가 21표, 무효 1표로 바로 예배당 건축에 대한 제직들의 반응은 반반으로 나뉘어졌다. 하지만 제직회장인 이경석목사가 지금 시작하자는데 찬성함으로써, 한 표 차이로 예배당 건축을 곧 바로 시작하게 되었다. 힘들고, 비용이 드는 일에 성도들이 선뜻 나서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도자가 믿음을 가지고 앞장서서 추진할 때 하나님의 일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제3차 예배당에서 확인되었다. 그 후 교회는 예배당 건축을 하기로 결정한 이후에 확정된 예배당 건축의 가속을 위해서 동년도 7월 1일에 기성회 임원중 기획위원 1명을 보선하기로 하고 기성회 회장에게 임명권을 부여하기로 결의하였으며, 기성회 회장 이정섭장로는 김천석 집사를 임명하였다. 이렇게 1973년이후부터 제3차 예배당 건축을 위한 일들이 구체화되었다.
ㄷ) 헌금
교회는 1974년 2월 24일 제직회에서 예배당 건축을 위하여 제1차 특별헌금을 하기로 결의하고 건축헌금을 작정하였다. 그 때 작정한 금액은 5,355,000원이었다. 이후 교회는 예배당 건축후 동년도 9월 22일 제직회에서 건축부채청산을 위해서 제2차 특별헌금을 작정하였다. 이 때 작정된 금액은 1,408,500원이었다.
ㄹ) 건축
이상과 같은 노력의 결과 제3차 예배당은 1974년 3월 31(주일) 기공식 예배를 드리고 난 이후 약 4개월만에 1974년 7월 28(주일)에 새 예배당에서 감격의 첫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이후 1975년 8월 3일 제직회에서 제3차 예배당 신축기성회 결산보고를 하였으며 1975년도 8월 5일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헌당예배를 드림으로써 건축 기성회를 조직한 이후 만 4년 6개월 만에 제3차 예배당 건축절차가 완료되었다. 실로 감개 무량한 일이었다. 다만 제3차 예배당 건축시 아쉬운 것은 재정적인 사고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예배당신축용 자재대금 일부를 받지 못한 일인데 이 일을 처리하기 위해 근 1년동안 교회가 시끄러웠다. 결국 이 일에 관련된 안수집사 한 사람이 면직되고 다른 교회로 옮겨가게 되었으며 교회는 옮겨간 집사의 신상문제를 그 교회 당회장앞으로 통보함으로써 이 일은 일단락되었다.
2) 장립식
1970년대에는 두 번의 집사장립식(제 2대 : 6명, 제 3대 : 7명)과 한 번의 장로장립식(제 4대 : 5명)이 있었다. 제 2대 집사장립식은 1973년 12월 23일에 있었는데 이 때 장립을 받은 자는 도성호, 김천석, 김학준, 김두환, 오성재, 박인서 제씨 6명이다. 그리고 제 3대 집사장립식은 1975년 8월 5일에 있었는데 김종호, 이기준, 여완동, 주입중, 도성곤, 김진호, 신주복 제씨 7명이다. 특별히 제3대 집사장립식은 제3차 예배당 헌당식과 함께 거행되었는데 예배당 헌당을 위해서 수고한 일군들을 세우는 은혜스러운 장립식이었다. 아울러 이 시기에 제4대 장로장립식이 1975년 10월 14일에 있었다. 이 때 장립을 받은 자는 도성호, 김천석, 김학준, 김두환, 오성재 제씨 5명이다. 교회는 이들을 장립함으로써 규모가 커지고 체계와 질서가 잡혀서 은혜가운데 계속하여 성장하였다.
3) 점진적인 교회성장
1970년대의 부산서면교회는 은혜중에 점진적으로 성장하였다. 비록 큰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서서히 성장함으로 1980년대의 질적, 양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ㄱ) 교인수
1970년대의 전체 교인수에 대한 기록이 없어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신년 첫주일 출석인원을 부분적으로 비교하고 제직수와 그동안 학습, 세례받은 자의 수를 확인하면 교회가 점진적으로 성장하였음을 알 수있다. 먼저 주일오전 출석인원에 대한 기록을 보면 1970년도 일지에 기록된 신년주일 오전예배시 출석인원은 남 52명, 여 89명, 총 141명이었으며 1974년 일지(1975년도이후 1981년까지의 교회일지는 없음)에 기록된 신년주일 오전예배 출석인원은 남 54명, 여 134명, 총 188명이다. 남자성도의 수는 별차이가 없지만 여성도는 50%이상 증가되었다. 아울러 1970년대의 서리집사수와 1979년대의 서리집사수를 비교할 때 1970년대는 남 17인, 여 18인으로 총 35명이었지만 1979년도에는 남 12인, 여 27 인으로 총 39명이었다. 여기에 그 기간동안 장립받은 자 12명을 포함하면 그 수는 총 51명으로 교회의 직분자수가 30%가 늘어났다. 또한 이 기간동안 학습을 받은 자는 157명, 유아 세례를 받은 자는 42명, 세례를 받은 자는 90명, 입교문답을 받은 자는 11명이었다. 이와같이 교회는 양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ㄴ) 교회조직
이 기간동안 교회 조직은 세분화되었다. 1970년도 제직회부서는 재정부, 관리부, 봉사부 3개부서로 구성되었으나 1979년도에는 재정부, 관리부, 선교부, 교육부, 섭외부, 봉사부 6개부서로 확대되었으며 특별히 1976년부터 기획실을 별도로 두어 교회전체 운영에 대한 기획을 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기획실이라는 말이 교회나 사회에는 생소한 용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전기관의 대표가 참석하는 기획실을 만들고 교회의 미래를 기획하고 당회에 심사를 받아 진행코자 한 것은 우리교회로 볼 때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 때 초대실장인 강경숙 장로는 “교회의 미래를 생각할 때 기획실을 두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교회를 운영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로 운영하지만 우리 성도들도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 기획실을 두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며 지금도 잘한 일이라 생각하고 있다”라고 그 취지를 술회했다.
아울러 주일학교도 1970년도까지는 학생회와 유년주일학교밖에 없었으나 1975년부터는 유년주일학교, 중등부, 고등부, 대학부로 나뉘어졌다. 특별히 주일학교 교육에 대한 관심을 두어 1976년부터 교육을 전담하는 전임교역자(전도사)를 두었다. 그 때 전임교역자는 이성주 전도사(현재 구포제일교회 담임목사)였다. 이성주 전도사는 1975년 6월 11일에 본 교회에 부임하여 강도사를 거쳐 1977년 10월 31일에 목사취임을 하였으며 그 해 12월 31에 사임하였다. 그리고 교회는 학생신앙운동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하여 1978년부터 담임제도를 시작하였는데 이 때 담임으로 수고한 자는 조양래 집사, 이병희 집사, 신주복 집사, 이기준 집사, 남성진 선생, 박영숙 선생, 김남행 선생, 김두환 장로였다.
또한 구역조직은 1970년도에는 5개 구역이었으나 1979년도에는 9개 구역으로 늘어났으며 그 중에 한 개 구역은 전도개발지역으로 두어 지역 전도에 대한 비전을 구현하였다. 특별히 1977년부터는 구역을 지역별로 나누어 조직하였는데 그당시 우리 교회가 담당하는 지역을 보면 부전1동, 부전일부, 전포동, 범천동, 가야(시장), 개금, 당감동, 부암동, 연지, 초읍, 동래, 연산지역이었다. 이렇듯 우리 교회가 관할하는 전도 지역이 광범위했다. 이 넓은 지역의 구역활동과 전도의 활성화를 위해서 1977년 7월부터 교회 통근버스를 운행하기 시작했다. 또한 성가대도 1970년도에는 장년성가대, 학생성가대가 있었으나 1976년부터는 제1성가대(장년부), 제2성가대(학신회), 제3성가대(여전도회)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1979년 12월 첫주부터 주일예배를 1부(오전 10-11시), 2부(11시 10-12시 10)로 나누어 드리게 되었다.
그외 교회조직의 발전모습으로 1973년 1월 제직회에서 제직회회칙을 만들기로 하고 서기부에 일임하기로 결의하였으며, 1977년 9월 제직회에서 서면 교회연혁출판을 위해 기획실 위원으로 위원회를 구성하고 교회사진 및 연혁자료를 취합하도록 하였다. 이는 교회가 설립된지 만 26년째 되던 해에 교회가 교회역사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는 증거다. 이와같이 1970년대는 교회조직의 점진적인 발전이 있었다.
ㄷ) 재정
이 기간중에 수입 예산(경상비)규모를 보면 1974년도에는 4,322,200원이었으나 1979년도에는 수입 44,795,345원이었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1980년도 수입예산을 배가 증가시켜 1억원으로 한 것이다. 이는 그만큼 교회가 숫적으로도, 재정적으로도 성장하고 있었다. 특별히 1979년도에서 1980년도를 넘어가는 기간에 교회가 숫적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4) 이정섭 장로의 가야성안교회로 이명
본교회 제2대 장로로서 1966년 3월 3일에 장립을 받고 많은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이정섭 장로의 개인사정으로 인해 인근의 가야성안교회로 출석하게 되었는데 당회는 1979년 1월 14일 이정섭 장로의 이명을 정식으로 결의하였다. 이정섭 장로의 이명은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이 있었겠지만 본 교회에서 장립을 받고 여러모로 수고를 아끼지 아니한 이정섭 장로가 끝까지 봉사하지 못하고 타 교회로 이명하였다는 사실은 우리교회로 볼 때 안타까운 일이었다.
5) 기타
ㄱ) 참 교회의 표지인 권징의 시행사례
1970년대에 본교회에서 당회적으로 크고 작은 권징을 시행하였다. 하나님의 교회의 거룩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실시한 권징의 사유를 보면 주로 예배출석 소홀, 음주사건, 불신혼인, 제7계명을 범함, 재정사고로 인한 것등이다. 그당시 권징의 대략적인 기준은 불신혼인시 직분을 면직하였으며, 제 7계명을 범한 자는 무기한 수찬정지를 시켰으며,음주사건에 대해서는 일정기간 근신하도록 하였다. 그 때는 당회에 통지없이 몇개월간 예배출석을 소홀히 하는 집사를 당회에서 면직하고 공포한 것과 권징을 받은 자중에 어떤 이는 자진하여 자신의 범죄사실을 고하고 권징을 받기도 했다.
ㄴ) 참교회의 표지인 성례식 거행
1970년대에 본 교회는 총 18번의 성찬식을 거행하였다. 이는 평균적으로 연 2회의 성찬식을 거행한 것이다. 특별히 교회는 학습, 세례식을 성찬식 당일에 함께 시행하였다. 이것은 오늘날 학습, 세례식을 성찬식거행 한주전에 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ㄷ) 집회
특별히 이 시기에 예배당 건축으로 인하여 영적으로 지친 성도들의 회복을 위해 성결교단의 목사 강달희 목사를 초청하여 1976년 11월 23(화) - 27(토)까지 부흥사경회를 개최하였다. 이 부흥회를 통하여 성도들은 큰 은헤를 받고 다시금 힘을 얻었다. 우리교회가 강단교류가 금지된 시기에 성결교단의 목사를 강사로 초빙한 이유는 그당시 같은 시찰내에 있는 개금교회(김종삼 목사)에서 그를 부흥강사로 초청하여 큰 은혜를 받고 교회의 빚을 정리하였고 김해중앙교회에서도 그를 초청하였기 때문에 당회는 그를 강사로 초청하기로 결의하였다. 그가 강사로 선정되었을 때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그 우려는 집회기간중에 쉬 사라지고 말았다. 그 당시 부흥사경회의 주제는 ‘성경대로’였는데 이 기간중에 말씀이 힘있게 역사하여 은혜가 충만하고 눈물이 풍성한 부흥회가 되었다. 특별히 주제를 성경대로라고 한 것은 그 당시 강사에게 강단교류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강사로 초청한 것은 교회적으로 우려가 될 수 있는 상황이기에 몇가지를 다짐하는 과정에서 강달희 목사가 “그럼 성경대로 하지요”라고 이야기 한 것이 부흥사경회의 주제가 되었다. 그 때 다짐을 받은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강론중에 양복 상의를 벗지 말 것, 자기 자랑을 하지말 것, 농담하지 말 것, 성경대로만 할 것등이다. 아무튼 이 부흥회를 통하여 교회는 많은 은혜를 받았다. 그 결과로써 제3차 예배당 건축을 위하여 지친 영혼이 힘을 얻고 그 동안 예배당 건축을 위하여 진 빚도 다 갚게 되었다.
7) 담임 교역자 이동
1978년 5월 29일 동부산 임시노회에서 개인적 사정으로 인한 이경석 목사의 사임이 수리되고 교회는 동년도 6월 7일 북부시찰장 김종삼 목사에 의하여 이경석 목사 사면수리통고를 받았다. 그 후 동년 6월 22일에 은퇴식을 하고 교회는 은퇴금으로 600만원을 일시불로 지불하였다. 그당시 교회 재정이 없었으므로 교회는 제직원들에게 그 금액을 차용하여 은퇴금으로 지불하였다. 이경석 목사의 사임후 박창환 목사(사상교회 원로목사)가 임시당회장으로 선임이 되어, 후임 담임교역자가 오기까지 근 4개월동안 수고하였다. 특별히 본 교회 제6대 담임목사 청빙을 위해서 교회가 합심하여 기도하는 중에 그 때 임시당회장인 박창환 목사의 소개로 원종록 목사가 내정되었으며 공동의회에서 단지 2명의 부표만 나옴으로 거의 만장일치로 청빙하기로 결정했다. 특별히 본교회 제6대 담임목사로 1978년 10월 12일(토요일)에 부임한 원종록 목사는 10월 13일 (주일)에 첫 주일예배를 인도하고 동년도 11월 7일 위임을 받았다.
제6대 원종록목사는 1931년 10월 13일 경남 진주에서 출생하여 1953년도에 경상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964년 고려신학교를 졸업하고(19회) 1967년 11월 27일 부산노회에서 목사임직을 받았다. 본 교회로 부임하기전에 원종록 목사는 주암교회, 하동대야교회, 함양 수동교회, 김해 강동제일교회, 밀양수산교회, 송도제일교회를 봉사하였는데 특히 송도제일교회를 담임할 시(1975년) 고려신학교 사감 및 강사로서도 신학교를 섬겼다.
8) 제6대 담임교역자 원종록 목사
서면교회에 부임한 원종록 목사는 앞으로 서면이 부산의 중심지로서 부산과 한국, 그리고 동남아와 세계선교의 중심기지가 될 것을 내다보고 서면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하였다. 특별히 그 때 사역의 목표에 대한 인터뷰에서 원종록 목사는 ‘바울이 로마에서 외친 복음이 세계로 뻗어나갔는데 이와같이 서면교회가 복음의 중심센터가 되기를 원하였다’라고 말하였다. 이런 비전에 따라 부임한 지 얼마되지 않아 예배당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기로 결정을 하였으며, 아울러 선교와 전도의 열정을 가지고 목회사역을 감당하였다. 특별히 부임 다음날, 첫 주일 설교의 내용을 보면 이 사실을 더 잘 알 수 있다. 원목사는 여호수아 10장 1절에서 14절까지의 본문을 가지고 ‘태양아 너는 머무르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강론하였다. 이 설교는 온 교우들에게 큰 은혜를 끼쳤는데 이 설교의 요지를 잠시 기록해보면 아래와 같다.
여호수아 대장의 외침은 첫째 우주정복의 신앙을 말해준 것이며, 둘째 신자의 기도의 위력이 얼마나 큰가를 증거해주며, 셋째 자기의 사명완수를 위한 열망이 얼마나 뜨거웠던 가를 말씀한다. 우리도 살같이 빠른 광음을 아껴서 여호수아 대장처럼 기도로 능력을 받아, 이 세대를 정복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이처럼 서면교회의 제6대 담임교역자인 원종록 목사는 복음의 세계확장의 원대한 비전을 가지고 사역하였으며, 이러한 비전에 따라 교회는 전도와 선교중심으로 세워졌다.
3. 결론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1970년대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큰 어려움이 없이 점진적으로 성장하였으며, 1980, 90년대의 교회성장의 초석을 다지는 시기였다.
5. 1980년대 부산서면교회의 모습
1) 교회당 이전
원종록 목사의 가장 큰 치적 중 하나를 꼽는다면 교회당을 당감동 95-1번지로 이전한 것을 들 수 있다. 제3차 예배당이 1975년에 완공된 이후 계속해서 제4차 예배당 건축과 교회이전 건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는데 이 의견은 강경숙 장로가 제의한 것으로 서면지역에서는 더 이상 발전하기 어렵다는 현실인식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원목사는 이 제의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1977년도에 본격화된 예배당이전에 대한 논의는 1979년에는 실제적인 추진작업으로 들어가서 후보지를 물색했다. 처음에는 현재 서면성당이 있는 지역을 생각했으나 결국 1980년 11월 7일 이전 현재 당감2동으로 이동했다. 당시의 결정은 서면이 상가와 금융가로 변신하여 부산의 상업중심지가 될 것이기 때문에 교회가 그 범위를 벗어나서 주택가에 자리잡아야 안정된 성장을 기할 수 있다는 선견지명에 근거한 것이다.
당감 2동 지역은 인구는 많으나 구획정리가 되지 않은 거리에 불규칙하게 빼곡히 들어선 주택으로 채워졌는데 한 마디로 민도가 낮은 서민 중심의 주거지라고 할 수 있다. 교회가 들어선 지역은 옛날부터 천일극장과 장무체육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우범지대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그 때 교회당을 이전하는 과정에서 주민들과 적지 않은 마찰이 있었다.
교회당 이전 당시 교회주변에 사는 사람은 송시종 집사와 이말선 집사 밖에 없고 나머지 교인들은 모두 멀리서 와야 했다. 원목사 부임이후 한대의 봉고 차량을 운행했는데 82년 8월에는 원목사의 승용차를 처분하고 25인승 차량을 구입해서 최호열 집사가 관리하도록 했다. 차가 귀했던 80년대 초반에 서면교회의 이름을 새긴 버스가 부산 전역을 누비며 교회를 알리며 교인들의 편의를 제공하는 것은 신나는 일이었다.
제 4차 예배당이 현재의 위치로 이전한 것은 교회주변 뿐만 아니라 부산 전역으로 교구를 넓힐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2) 가건물 신축
새로 이사한 당감 2동 95-1번지의 800평의 광활한대지에 처음부터 제대로 된 예배당을 신축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건축기성회(1980년 6월 22일 창립, 1981년 5월 10일 해산)는 임시 예배당을 신축하기로 결의하고 1981년 3월 23일 가건물 교회당 1차 준공식을 마쳤다. 당시 건물규모는 약 400평의 부지에 ᄀ자 모양의 슬레이트 지붕으로 된 단층건물이었다. 동쪽에 예배실이 한 편을 차지하고 동서쪽으로 길게 늘어선 나머지 부분은 1, 2, 3 교육관과 부목사 사택과 관리집사 사택과 담임목사의 사택으로 이루어졌다. 교육관은 차례대로 대학부, 고등부, 중등부가 사용했다. 제3교육관은 주방이 딸린 곳으로 식당을 겸했는데 중등부 학생들은 주방에서 나는 구수한 된장국 냄새를 맡으면서 예배하고, 교육을 받아야 했다. 제2, 3 교육관 사이는 방음벽으로 막혀있어서 유사시에는 헐어서 하나의 공간으로 만들 수 있도록 했다. 교회당이 단층이어서 바깥에서 보면 건물이 쉽게 눈에 띄지 않은 점을 고려해서 삼십 미터짜리의 높은 철제 종탑을 세운 것이 인상적이었다. 신축된 가건물은 성도들이 회집해서 예배하고 교육하는 데는 별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그 공간을 이용해서 사택과 같은 가정집으로 활용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많았다. 바깥의 소음이 많이 들렸고,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웠다. 남은 부지는 포장이 안된 마당으로서 화단, 주차공간과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고 가운데 원형화단이 있어서 로터리 역할을 했다.
이전의 환경에 비해서 10배나 확대된 규모의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을 원목사와 온 성도들이
기뻐하며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기대하는 부푼 가슴을 안고 1980년대를 출발했다.
그 후 1983년 6월 7일 교육관 40평을 신축해서 사무실과 유치부 교실로 사용했고, 뒷켠에는 관리집사 사택을 마련했다. 이 건물은 단층으로 지어졌지만 1986년 3월 3일 이층을 증축해서 대학부와 고등부 교육관으로 활용했다.
1983년 8월 28일에는 협소하고 초라해 보이는 본당 강단을 뒷편으로 확장해서 성도들의 자석과 강단간의 여유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3) 부목사의 협력사역
1980년 6월 8일 부목사로 취임하여 청년부를 섬기던 이환봉 목사가 고신대학교 전임교원으로 임명됨에 따라 교회를 부목사직을 사임하고 뚜렷한 직함이 없는 협력사역자로 대학부를 섬기게 되었다(1993년 협동목사 임명). 후임으로 1982년 2월 9일 김제형 목사(1985년 7월 14일 사임, 현재 반여동교회 담임목사)가 부임했는데 그는 고려신학교 34회 졸업생으로 진주중부교회에서 이동했다. 김목사는 자녀로 아들 둘과 딸 둘을 두었는데 당시에는 산아제한이 붐을 이루던 시대라서 동네에서 아이 많은 집이라고 하면 통할 정도였다. 김목사의 사역은 주로 청년회와 직장 신우회 사역 그리고 총동원전도에 치중했다.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원목사는 더 많은 협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삼일교회에서 부목사로 시무하던 김윤하 목사(1986년 9월 14일 사임, 현재 참빛교회 담임목사)를 부목사로 청빙했다. 그는 고려신학교 35회 졸업생으로 1983년 7월 1일 부임해서 그해 12월 21일에 성대한 취임식을 가졌다. 그것은 김목사에 대한 교회의 환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는 기획과 행정 및 교육에 탁월한 은사가 있었다. 그래서 그의 사역은 주로 기획과 성경공부 등에 초점을 둔 것이었다. 두 부목사는 주일오후에 교대로 설교를 맡아서 담임목사의 목회를
도왔다.
그 후 신대원 목사(고려신학대학원 38회 졸업)가 부목사로 부임해서 1여년 사역하다가 시에라리온 선교사로 떠나게 되자 서상기 목사(고려신학대학원 38회 졸업, 1991년 4월 14일 사임)가 부목사로 부임했다. 그는 대학시절에 한국기독학생회(IVF)에서 훈련을 받은 자로 주로 청년회 사역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부임후 2년동안 그전에는 사업과 프로그램 중심의 모임이었던 청년회를 제자훈련을 위한 성경공부 체제로 틀을 다져놓았다. 나머지 1년은 대학부를 맡아서 제자훈련을 실시했다. 같은 해 김광주 목사(고려신학교 39회 졸업, 1990년 12월 9일 사임)가 부목사로 부임하여 서목사와 함께 원목사의 목회를 도왔다. 김목사는 서목사와는 반대로 2년 동안 대학부를, 1년 동안 청년회를 섬겼다.
4) 총동원전도를 통한 성장
1980년대 한국교회에 두드러진 현상은 총동원 전도주일을 통해서 교회성장을 기하는 것이었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당시 총력안보와 같은 국가의 시책에 길들여진 시민들의 체질에도 잘 맞는 면이 있었다. 이 총력전도 행사는 수동적으로 교회생활을 하던 성도들이 불신자를 교회로 인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프로그램이었다.
80년대 초반에는 매년 총동원전도주일을 가졌는데 당시 전도위원장이었던 김제형 목사가 총동원전도주일을 위한 준비 과정으로 전도교육과 초청장과 같은 팜플렛 제작 일체를 담당했다. 해마다 총동원전도주일에는 넓은 교회당이 미어질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몰려왔다. 전교인들이 사람들을 인도하는 일에 열심을 내었다. 당시 한주에 백명 이상을 인도한 전도왕이라고 할 수 있는 성도들은 강창민 집사, 윤성환 집사, 오성재 장로
등이었다. 인상적인 것은 총동원 전도 주일 오후에는 특별 인사를 모셔서 간증을 하도록 했는데, 그 중에는 가수 이용복씨와 지옥을 갔다왔다고 하는 이도 있었다.
총동원 전도를 통한 성장으로 인하여 처음 교회를 이전할 당시 400명 회집 목표였던 것을 다시 700명으로 그 목표를 수정해야 할 정도로 이 프로그램이 성과가 있었다.
후반부의 통계를 보면 1987년 10월 18일 총동원 전도주일의 총출석은 2567명, 결신자는 564명(예배출석: 3467명)이었고, 1989년 11월 5일 전교인 전도주일은 총출석 1084명에, 전도 101명이었다.
5) 직장신우회 활동
1970년대의 선교이슈 중의 하나는 도시산업선교였다. 이 선교활동은 복음과 함께 착취, 유린당하는 근로자들의
인권과 권익을 보장하라는 일종의 교회의 사회 참여적 성격이 있었다. 그 중심에는 민중신학과 같은 이념이 자리잡고 있다고 하겠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서면교회도 도시 근로자들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서면교회의 선교활동은 도시산업선교와는 성격이 크게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직장 신우회를 통한 복음사역이었다. 청년회를 담당하던 김제형 목사는 청년들의 직장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다. 김목사는 허만규 집사가 회장으로 있던 흥아타이어 주식회사의 신우회에 정기적으로 예배를 인도했는데 매번 3, 40명 정도 모였다. 지금 현대 아파트가 들어선 곳에 당시 태화 신발 공장이 있었는데 그곳의 신우회활동도 활발했다. 그러나 거기서는 김목사가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없었다. 대부분 여성근로자로 이루어져서 출입이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의 여청년들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그 결과를 보고받았다. 청년회는 그 외에도 삼화, 경동, 동방 등 직장신우회 활동을 위해서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6) 교회의 조직 재정비
김윤하 목사 부임이후 크게 달라진 것은 업무 효율화를 위해서 기존의 모든 조직을 특별위원회인 기획위원회,
교육위원회, 전도위원회 아래 둔 것이다. 교회가 성장함에 따라 조직이 세분화될 수 밖에 없었다. 청년회가 제1청년회(30세-40세)와 제2청년회(20세-29세)로, 여전도회가 제1여전도회(40세 이상)와 제2여전도회(39세 이하 기혼자)로 분립되었다. 찬양대는 학생찬양대, 여성찬양대, 본 찬양대로 재편성되었다. 20대 청년들로 이루어진 반석회는 100명을 넘어서 대학생 중심의 반석회와 직장인 중심의 갈렙회로 나누어졌다. 1984년부터 반석회라는 이름은 없어지고 중등부, 고등부와 같이 그냥 대학부라는 이름만 썼다. 물론 대학생과 대학생 연령층을 포함하는 기관이었다. 구역은 7개 교구로 나누어서 관리할 만큼 교회가 성장했다.
1989년에는 여전도회가 연령을 다섯 살 간격으로 구분하여 여섯 개의 여전도회로 확장되었고,교구도 12개의 교구로 늘어났다.
7) 성경공부 활성화
원목사는 교육위원장 김윤하 목사의 제안을 받아들여 전교인을 대상으로 체계적인 성경교육을 시킬 목적으로 주일 오후예배는 성경공부를 하는 것으로 예배를 대체했다. 물론 예배가 없는 것은 아니고 성경공부의 중심주제를 전체 예배시 간략하게 설교한 다음 기관별로 나누어서 그 기관의 수준과 특성에 맞게 교역자들이 성경공부를 인도했다. 처음 몇 주간은 기관별로 나누어졌으나 곧 전체 성경공부로 전환했다. 성경공부 주제로는 예수님의 사역, 그리스도인의 새생활, 복음전도의 이론과 실제, 이단종파, 성령론 등이었다.
주일 오후 예배시 성경공부를 하는 탓으로 헌신예배는 수요일로 돌렸다. 이 성경공부는 1984년 3월부터 8월까지 지속되었다.
그 후 오후예배 시간에는 원목사의 인도로 크로스웨이 성경공부가 실시되었다. 영상을 비추면서 성경에 나타난 구속역사의 흐름을 강의했기 때문에 성경의 본문을 문맥속에서 구체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1986년부터 시작한 이 공부는 처음에는 예배시간에 전교인을 대상으로 실시했으나 나중에는 지원자의 신청을 받아서 그룹별로 실시했다. 1989년에 제3기 수료식을 가지기까지 지속되었다.
8) 노인대학과 결혼상담소 운영
1981년 6월 12일에 개학한 노인대학은 사회봉사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인데 서면교회가 이전한지 얼마되지 않았지만 지역 주민들에 대한 관심을 이런 프로그램으로 표명했다. 노인대학은 교육기간 전, 후반기 각 3개월. 여교사 1인을 채용하되 사무직원으로 겸임하도록 했다. 책임자로 교장: 원종록 목사, 교무: 김천석 장로, 간사: 박종창 전도사, 자문위원: 당회원 및 동유지 약간 명을 두고 전도를 목적으로 운영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노인대학 운영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983년에 결혼상담소 설치가 논의된 이후 1986년도에 결혼상담소 및 청소년 상담소 설치 운영이 다시 거론되어 결혼상담소를 운영하기로 했다. 오성재 장로가 소장이 되어 미혼 남녀들의 혼인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이렇다할 만한 열매는 없었다.
9) 사회봉사와 사회운동
노인대학도 사회봉사의 영역에 들어가지만 좀 더 체계적인 봉사의 형태는 아무래도 검정고시 준비하는 학생들을 위한 야간학교 운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고등교육과정으로 이루어진 이 야간학교는 1988년 제2청년회에서 주관한 김진경 교수의 북한 및 공산권 선교 전략 강연회(김진경 교수)와 이보민 교수의 민중운동과 기독교인의 자세라는 특강에 도전을 받아서 개설하게 되었다. 먼저 기획위원회에 상정된 제2청년회가 주관하는 전도목적을 위한 야간학교 운영을 본 당회가 허락하기로 하고 교장에 서상기 목사를 위촉했다. 대입검정고시 준비과정 야학학생들을 모집하기로 하고 그 기간을 5월 15일˜31일 그리고 개강은 6월 1일로 정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교회가 학생들을 모집한 것은 아니고 부산대학교 소속의 야학교사가 지도하던 기존 야학학생들을 인수하는 형식으로 하여 약 20명의 학생들을 받아들였다. 이 야학은 청년회원 위정환(현재 윤외교회 담임목사)이 주축이 되어서 강성만, 이근길, 박은경 등 여러 청년들이 교사로 봉사했다.
저녁시간을 이용해서 제3교육관에서 중요과목 중심으로 실시해 오던 야학은 몇 달 안되어서 학생과 교회의 갈등으로 인해 문을 닫게 되었다. 교회는 전도를 야학의 설립목적으로 삼았지만 학생들은 고시학원의 성격을 띤 교육기관을 요구했기 때문에 서로 간에 갈등이 심화되었던 것이다. 전도와 사회봉사 차원에서 의욕적으로 시작했던 야학은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교회가 사회참여하는 일에 있어서 보수교회의 태도는 대단히 소극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회와 국가의 정책이 말씀의 진리를 벗어나 편파적으로 특정종교를 지지할 때 진정한 종교의 자유를 위해서 분연히 일어서곤 했다. 특별히 단군상 건립문제와 관련해서 그렇게 일어났던 것이다. 문제의 발단은 1985년 서울시가 남산에
단군사당을 세우려는 계획을 수립한데서 비롯되었다. 이 일로 인하여 그해 10월 13일 총회 결의를 따라 단군전건립 반대운동 주일을 정하고 이 날에 금식하고 금식한 만큼의 식량을 모아서 구제하기로 한 이후 교회, 교단적 반대운동이 더욱 확산되었다. 이근삼 교수의 단군전 건립과정과 제1계명 특강, 삼일교회당 단군전 건립반대 특별집회, 단군사당건립 반대서명 날인, 단군동상건립 반대기도회, 삼일교회당에서 3개노회 연합예배, 사상교회 목사, 장로 철야기도회를 가졌는데 서면교회 성도와 당회원들은 이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협력했다.
10) 제자훈련도입
1980년대 초반 제자훈련이 성장하는 한국교회에 새로운 기류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제자훈련은 1960년대 대학생 선교단체에서 주로 사용하던 신앙 훈련 프로그램인데 70년대 와서 우후죽순같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기성교회는 선교단체에 대한 안목이 확보되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교회는 성도의 삶에 변화를 줄 수 있는 대안으로서 제자훈련을 도입하게 되었다.
1984년 1월 신년 김해 무척산 기도원에서 가진 교역자 수양회에서 신득일 전도사는 대학생 선교단체의 최근
동향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후 신전도사는 교회의 후원으로 제자훈련 세미나에 참석해서 훈련을 받고 교회 대학부에 제자훈련을 적용시켰다. 처음 한해동안은 대학부 자체는 물론 다른 기관과 교회전체의 이해도 부족한 상태에서 리더들을 훈련시키느라 별 열매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2, 3년 지나면서 대학부 회원들의 만족도가 높아졌고, 열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후에는 제자훈련이 대학부에만 머물지 않고 청년회에까지 확산되었다.
11) 두 차례의 시련
1) 김학준, 김두한 장로 해임 사건
김학준 장로의 해임은 김천석 장로와 의견 충돌로 인하여 불거진 과격한 행동에서 사건이 확대된 것이다. 사건의 책임을 지는 의미에서 김천석 장로는 김학준 장로에게 자극적인 언동을 한 것을 사과하기로 결의하고, 김학준 장로는 교인들 앞에서 김천석 장로에게 난폭한 행동을 행한 것에 대해서 사과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김학준 장로가 수차의 권면을 계속 불순종함으로써 해임을 당했다.
2) 담임목사 시무지 이동사건
그리스도가 머리이신 교회에서 담임목사의 시무지 이동을 둘러싸고 발생한 교회 내의 의견대립은 성도들간의 연합은 물론 교회가 깨어질 뻔한 위기까지 다다르게 했던 사건이었다. 당시 원목사는 1. 박모권사가 어느 집사에게 전화로 강모, 김모 장로가 주동이 되어 원목사 배척운동을 하겠으니 협조하시오라고 말했다. 또 목사에 대한 경제봉쇄를 하며 요망사항을 거절한다. 2. 목사에게 순종하지 않는다. 3. 당회에서 사찰과 기사직을 분리토록 요청했으나, 장로들은 묵비권 행사로 협조하지 않았다. 4. 당회가 목사 순종하지 않는 방향으로 한 분만 빼고, 여섯 명이 똘똘 뭉쳤다. 5. 그룹을 형성하여 작당을 한다. 6. 화평을 깬다. 7. 겸손히 종노릇 하도록 권유하나 듣지 않고 어른 노릇만 하고 있다. 8. 목사를 전적으로 오해한다. 9. 목사 사모를 지나치게 오해하고 중상모략한다. 10. 배척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증거가 있다는 10가지 이유를 들어서 당시 당회원 장로들과 더 이상 손잡고 목회 할 수 없어서 떠나기로 결심하였다는 해명하였다.
김제형, 김윤하 두 부목사도 행보를 같이하여 사면서를 제출하고, 김천석 장로와 이규환 집사도 사면서를 낼
정도로 사태가 악화되었다. 김윤하 목사는 설교를 통해서 교회가 하나될 것을 호소했고, 김제형 목사도 사도행전 27장을 설교하면서 경험에 근거한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듣다가 광풍을 만났으나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바울의 말을 따를 때 평안을 얻을 수 있었던 것과 같이 목사의 지도를 따라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원목사의 입장을
지지했다.
전교인이 이 일을 위해서 기도하며, 가야성안교회로 원목사가 이동하는 것을 반대했다. 일부 성도들은 가야성안교회에 노회임원들이 모이는 현장에 가서 반대의사를 표명하기도 했다. 제직회에서는 김양희 집사가 원목사의 입장에 지지발언을 하면서 우리 목사님이 이런 상황에서 서면교회보다 작은 교회로 이동하도록 해서는 안된다고 강경하게 주장했다. 이것은 대다수의 교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교회는 많은 진통을 겪었다. 결국은 노회 전권위원회의 중재와 전교인 기도, 대립자 간의 화해로 이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교회는 원목사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여 목회에 협조하기로 하고 타결되었던 것이다.
교회는 마음속에 남은 앙금을 씻어버리고 전교인이 대동단결하는 의미로 대대적인 행사를 마련했다. 먼저 1984년 5월 8일 경주 반월성 공원에서 전교인 친선체육대회 및 관광행사를 가졌다. 300명이 넘는 교인이 관광버스 5대, 교회버스 2대에 나눠타고 경주로 갔다. 남녀노유를 막론하고 각종 경기에 참여하여 마음껏 기량을 발휘하며 성도의 교제를 나누었다. 오후에 피날레를 장식하는 전교인 줄달리기는 참으로 장관을 이루었다. 이 관경을 바라보던 원목사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교회기를 좌우로 크게 흔들며 양편을 응원했다. 이 행사는 교인들 간에 가로 놓인 담을 허물고 화합을 이루는데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해 하반기에는 교회설립 33주년 기념식과 추수감사절을 병행하여 서면교회 감사제라는 이름으로 교회축제를 가졌다. 10월28일 지역 기관장과 주민대표를 초청하는 전교인 출석주일을 계기로 하여 연속으로 축하행사를 가졌다. 각 기관 찬송경연대회, 성경암송대회, 합창단초청연주 등의 축하행사와 강경숙 장로, 황소연 은퇴권사에게 20년 이상 봉사한 공로를 인정하여 공로기념패를 정정하는 기념행사를 통해서 담임목사 시무지 이동사건으로 인한 상처가 아물었다.
12) 서면교회에서 부산서면교회로
원목사는 교회에 고유한 명칭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서면이란 이름은 지역적으로 상대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즉 동면의 반대개념으로 어느 지역에나 있는 명칭이기 때문에 이름 그 자체로는 우리 서면교회를 인식시키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산에 있는 서면교회라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교회명을 부산서면교회로 명칭을 변경하기로 했다. 이로써 부산의 지역교회로서의 이미지를 확실하게 부각시켰다.
13) 예배당 신축 계획
원목사의 1980년대 후반부 목회방침의 두드러진 특징은 예배당 건축이라고 할 수 있다. 대성전 헌당의 비전은 1985년부터 교회의 표어에 항상 반영되었다. 예배당 신축은 교회 이전할 당시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배가전도로 인하여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하는 추세에서 그리고 앞으로 감당해야 할 세계복음화의 전진기지로서 교회의 비전을 구현하려면 언제까지나 가건물 상태로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새예배당 건축은 1985년 기획위원회에서 제출한 성전건축기성회 회칙이 심의에서 통과되고 성전건축기성회 정기총회가 12월 29일에 시작된다. 건축기성회 임부장이 임명되고 예배당 건축에 대한 전교인의 인식을 고취시기 위해서 교회비전과 관련된 웅변대회를 개최했다. 교회의 지속적인 성장과 함께 1989년에 들어서는 예배당 신축에 대한 교회 전체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었다.
원목사는 이때를 기점으로 하여 1989년 목회방침의 표제 총력을 다하는 교회라고 정하고, 실천방안으로 경건생활의 총력, 성전건축준비의 총력을 제시하며 박차를 가했다. 그해에 성전건축발표회, 교회건축을 위한 타교회 탐방, 기성회 총회, 건축헌금 작정, 교회발전을 위한 토론회, 서인건설 설계사무소와 교회당 설계 계약, 성전건축 위한 폐품 수집, 임시제직회 때 가진 성전건축에 관한 토의, 제1청년회 주최 교회당 건축을 위한 구호, 포스터, 공개현상모집 시행계획 등 다각적인 행사와 활동을 통하여 교인들로 하여금 건축 계획에 대한 열망을 갖도록하고 그 계획을 현장감 있게 받아들이도록 했다.
그해 말 김덕신 목사의 부흥회 통해 건축헌금을 작정하고, 전교인이 건축저금통을 두고 교회당 건축에 참여했다. 그런 정성이 하나씩 모여서 결국 1990년 12월 성전건축허가로 열매를 맺었다.
14) 선교사업과 미자립교회 지원
대부분 교회가 성장하면 성장에 걸맞는 교회의 채비로 자체적으로도 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에 한동안 다른 교회를 돌아볼 여유가 없는게 현실이다. 그럼도 불구하고 부산서면교회는 외부로부터 오는 도움의 손길을 외면하지 않았다. 오히려 적극적인 자세로 미자립교회를 정기적으로 지원하고 선교사를 후원했다.
80년대 전반부에는 화명중앙교회, 고성숭의원교회, 명장삼일교회 등의 개척교회보조와 일본선교사 조병철 목사 선교비 지원을 하고, 고성한내교회를 개척해서 입당예배를 하기까지 도왔다. 후반부에는 김해시민교회, 대지교회, 봉곡교회, 사천제일교회, 새밭교회, 석무교회, 운무교회, 의암교회를 후원하고, 청주신봉교회, 대전에덴교회를 개척했으며, 사상교회와 공동으로 유영기 선교사를 필리핀으로 파송함으로써 외부 지원 사업을 확대했다. 그러나 예배당 건축이 본격화되면서 타 교회와 기관을 돕는 일이 다소 위축되었다.
15) 1980년대의 직분자 임직
교회의 전반적인 성장에 따라서 효율적인 목회를 위해서 교회는 더 많은 일꾼을 필요로 했다. 1980년대는 세 차례의 장로장립, 네 차례의 집사장립과 두 차례의 권사취임식이 있었다.
1981년 3월23일 제5대 장로로 김진호, 신주복, 도성곤집사가 장립을 받았다. 당시 김진호 장로는 어머니 손계선 권사와 함께 창신당 건재약방을 경영하면서 교계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는 부인 성영숙 집사 사이에 아들, 딸 두 자녀를 두고 있었다. 신주복 장로는 당시 성도 장의사를 운영하면서 김장로와 함께 교계활동에 참여했다. 그는 부인 우희연 집사 사이에 아들 하나, 두 딸을 두었다. 도성곤 장로는 슈퍼마켓을 경영했는데 부인 정성애 집사 사이에 일남이녀를 두었다. 같은 날 집사로 장립을 받은 서리집사는 김영호, 박인두, 이병희, 이규환, 김성태, 이강국, 이경철, 박광호, 김종호, 제씨였다. 서옥련 집사는 권사로 취임했다.
1985년 5월 4일 김병호 서리집사가 집사로 장립을 받고 강경숙 장로의 부인 박신소 집사가 권사로 취임했다.
1986년 6월 4일 제6대 장로로 이규환, 이병희 집사가 장로로 취임을 받았다. 당시 이규환 장로는 대우냉동사를
경영하였고, 부인 김은혜 집사 사이에 두 남매을 두고 있었다. 이병희 장로는 해운업인 성광통상을 경영하였고, 부인 하인례 집사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 같은 날 집사로 장립을 받은 서리집사는 최호열, 원대영, 김상조, 최용출 제씨였다.
1987년 3월 18일 제7대 장로로 원동상 협동장로가 취임을 했다. 원장로는 양정제일교회에서 이미 장로로 시무하다가 부산서면교회로 이동했다. 그는 중앙동의 복지빌딩을 경영했고, 부인은 노복자 집사였다.
1989년 9월 27일 김중룡, 이봉호, 김성하 집사가 장립을 받았다. 특이한 것은 교회근처에서 부전양행을 경영하던 김중룡 집사가 부산서면교회에서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여 집사로 장립을 받은 것이다. 같은 날 변봉생, 김양희 집사가 권사로 취임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장립집사 중 상당수가 여러 가지 이유로 부산서면교회를 떠났다. 김병호 집사는 농촌교회 전도인으로, 김상조 집사는 근무지 이동 때문에 서울로, 원대영, 최용출 집사는 가정문제로, 김영호, 이강국, 이경철, 김종호 집사는 개인사정으로 타교회로 이동했다.
16) 원종록 목사의 1980년대 목회와 교회성장
1980년대 부산서면교회는 역사상 유래없는 성장과 발전을 이룩했다. 원목사의 목회철학은 한마디로, 안으로 교회의 내실을 다지고 밖으로 힘차게 뻗어가는 비전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것은 1980년대 초반의 실상이 부요한 교회라는 표어와 후반부의 비전을 키워가는 교회라는 표어에 집약되어 있다. 특히 복음의 효과적인 확장을 위해서는 교회당 건축이 필수적인 요인이라고 인식했다. 이런 목회이념을 구현하기 위하여 원목사는 성경교육, 전도, 기도회, 부흥회, 총동원전도 주일 등 다양한 목회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성경교육은 전교인 성경공부 프로그램을 활용하기도 하고, 소그룹 단위의 크로스웨이 공부도 있었다. 특별히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에 역점을 두었다. 전도는 매년 실시한 총동원전도 주일에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평소에는 전교인이 전도할 것을 강조했고, 또 정기적인 전도대 육성을 통한 훈련을 통해서 실시하기도 했다. 이것은 1981년도 전도요원 육성대학을 운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신입교인은 새신자부 성경학교를 1981년 9월 13일부터 시작했다. 부흥사경회는 1982년 정문호 목사(말씀 중심의 사경회), 1984년 유환준 선교사(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1986년 나명주 목사(믿음으로 헌신하는 삶), 1987년 조돈제 목사, 1988년 오성환 목사, 1989년 김덕신 목사(교회당 건축을 위한 헌신 강조)를 강사로 개최했다.
기관과 구역의 균형있는 발전을 위해서 기관별 또는 구역별 찬양발표회나 성경퀴즈나 성경암송대회같은 행사도 정기적으로 가졌다. 교육기관은 초등부부터 대학부까지 전임 교역자들이 사역하도록 했고, 1987년부터는 한동안 활용하지 않았던 여전도사(김수자)를 기용해서 담임목사와 부목사의 심방을 돕도록 했다.
원목사는 또한 1980년에서 1989년까지 실시한 기독교방송국의 방송설교도 부산서면교회 성장에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1980년대 부산서면교회의 성장은 기독교방송국에서 주최하는 교회발전 및 목회에서 성공한 교회 방문 프로그램에 선정될 정도로 객관적으로도 부각되었다. 이렇게 1980년대는 예배당 신축을 위한 새로운 기틀을 마련한 역사적 의의가 있는 성장기간이었다.
부산서면교회 50년사 - 1990년대
1990년대는 부산서면교회의 “대역사”를 이룩하는 시기였다. 원종록 목사의 1990년도 신년 목회 백서에서 밝힌 바대로 “대역사를 이루는 교회”가 되기 위해 모든 성도들이 시대적인 사명감을 가지고서 성령의 권능과 전적인 봉헌으로, 그리고 일심단합으로 예배당 건축과 국내외 복음운동에 모든 헌신을 다하였다.
90년대 부산서면교회는 이러한 목회의 비전을 따라 온 교회가 하나되어 예배당 건축을 시작함과 더불어 국내 전도에 총력을 기울이고 한걸음 더 나아가 해외 선교의 도약을 기하였을 뿐 아니라 고신교단과 부산교계를 위해 열심히 봉사하는 중심적인 교회로서 그 모습을 나타내게 되었다.
1. 현재의 예배당 건축과 완공
1) 대역사를 이루기 위한 기도운동
1980년 11월 부산진구 당감2동 95-1번지로 이전하여 당감동 시대에 접어든지 10년이 되는 1990년 12월에 당국으로부터 예배당 건축 허가를 받게 됨으로 건축기성회 조직 후 5년 동안 준비해 오던 예배당 건축이 시작되었다. 1991년 1월 8일 신년주일 낮 예배 설교 제목이 “건축의 대역사를 이룩합시다”(대하 7:1-3)였고, 그 말씀대로 온 교회는 “감사함으로, 믿음으로, 일심으로, 전적 봉사로써” 예배당 건축에 온전한 헌신을 다하기로 다짐하였다. 바로 그 주일 낮예배 직후에 열린 정기 제직회에서 “교회에서 기도의 불을 당기기 위해 남자 제직 3명을 1개조로 편성하여 매일 자정부터 새벽기도회 이전까지 기도 당번을 두기로 결정”하고 기도대원 모집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1991년 2월부터 1992년 2월까지 1년 동안 밤 10시에서 새벽기도회 시간까지 각 대원들은 자신이 담당한 1시간 동안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제목을 가지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릴레이식 철야기도회를 실시하였다. 이 기도의 불길은 1992년도의 “120명 다락방 기도대 기도회”와 1993년도의 “기관별 저녁기도회”로 계속 연결되어 온 교회가 3년 동안 정말 “믿음으로, 일심으로”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였다. 실로 부산서면교회는 오직 기도로 90년대 대역사의 장을 모든 성도들이 함께 열어간 것이다.
2) 예배당 건축 방해와 완공
그러나 교회의 원수 사단은 예배당 건축을 저지하기 위해 밖으로부터 시험을 가해왔다. 건축을 시행하기 전에 교회는 동의 자문위원과 주민들과의 친교 모임을 통해 주민들의 이해를 구해왔지만, 일부 과격한 주민들이 건축을 방해하는 실력 행사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관계 기관에 공사 중지를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당회(1991년 5월 26일)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특별히 6월 2째 주에 “전교인 산상기도회”를 실시하기로 하고, 동시에 합법적인 예배당 공사를 방해하는 자들에 대한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내기로 하였다. 1991년 7월 7일 정기제직회에서 건축기성회장 강경숙 장로는 주민들이 교회의 건축공사를 방해할 수 없다는 법원 판결이 난 것과 계속 공사를 진행하여 8월 말 경에 지하를 완공할 예정이라는 상황 보고를 하였다. 그 후에 공사비 조달에는 어려움이 있었으나 성전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다. 사단은 교회가 안으로부터도 타격을 입도록 하기 위해 교회의 중직자들 중에 2명을 개인의 가정문제 등으로 올무에 걸려 넘어지게 함으로 장립집사 제명(1990년 1월)과 장로 무기정직(1992년 8월)의 가슴 아픈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교회의 계속적인 간절한 기도 가운데 예배당 건축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1992년 10월 4일 정기제직회에서 예배당 건축 면적이 처음보다 약 229평 정도가 추가되어 총 1748.16 평으로 증축되었다는 보고가 있었다. 역사적인 신축 예배당 입당을 앞두고 입당준비를 위한 특별새벽기도회(1992년 12월 7일-20일)를 실시하면서 새 예배당의 의자를 구입하기 위한 헌금을 작정하였고, 마침내 1993년 1월 1일 자정에 비로소 새 예배당에서 온 교회가 뜨거운 감격 속에 신년감사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 후에 1993년 11월 28일에 추수감사주일을 맞아 예배당 완공 감사예배를 드리고 연이어 고신대 패로스 합창단의 축하공연을 가지기도 하였다.
3) 건축 부채상환을 위한 헌신
예배당은 완공을 하였으나 상당한 작정 헌금이 미수되었고 또한 건축비용의 증대로 인하여 건축비를 완전히 해결할 수 없었다. 따라서 1994년 11월 27일 당회는 건축 부채상환을 위해서 “건축구좌 헌금”을 전 교회적으로 작정하기로 결정하고, 1995년부터 시작하여 98년까지 매년 1년 단위로 연초에 작정하여 연차적으로 부채를 갚아가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부채도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 당시에 교회는 최대한 교회의 예산과 물품을 절약해야 했기에 자연히 교회의 성장과 부흥을 위한 전도비와 교육비 등에 충분한 투자를 할 수 없게 되었고, 많은 경상비가 부채의 상당한 이자로써 지출되는 상황 속에서 교회는 전반적으로 피로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97년도 건축구좌헌금의 작정과 부흥회 개최를 앞두고 중직자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안타까운 교회의 현실을 전해들은 당시 제 2청년회(회장 박상수 집사)가 교회부흥을 위한 새로운 도약을 위해 부채의 신속한 해결이 급선무임을 인식하고 기도하기 시작하였고, 곧 제 1청년회(회장 고주석 집사)와 함께 교회의 부채문제 해결을 위해 정기적으로 함께 모여 기도하는 가운데 조속한 헌당을 위한 의욕적인 건의안을 당회에 제출하게 되었다. 이에 당회는 청년회의 건의안을 2월 16일 주일 오후 중직자 모임에서 논의하여 건축 부채 상환을 위한 전 교회적인 헌금을 부흥회를 마친 후 1997년 3월 9일에 실시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동안 기도해 오던 청년회에서 먼저 자체적으로 헌금하여 거의 1억원에 가까운 헌금을 작정하였다. 물론 그동안 교회적으로 예배당 건축을 위하여 집을 팔아서 바치는 헌금과 작정한 헌금을 바치기 위해 집을 팔고 전셋집을 얻는 일과 힘을 다하여 바치는 헌금과 정성어린 헌물 등의 눈물겨운 헌신들이 있어 왔다. 그러나 이제 힘이 겨워 모두가 지쳐있을 때 이제는 청년들이 디시 한번 더 일어나 긴축가계 운영뿐 아니라 새 옷을 구입하지 않는 운동, 그리고 자기 집 마련의 계획을 수년 더 연기하기로 하는 등 희생적인 봉헌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지쳐있는 교회에 새로운 헌신의 활력을 공급하는 계기가 되었다.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사람들이 일어나고, 하나님은 그들을 통하여 일하시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청년들의 기도와 작은 헌신이 불씨가 되어 3월 9일 주일 날 다시 한번 교회가 전력을 다해 헌금을 하여 부채 해결을 앞당길 수 있는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당회는 “헌당 추진운동 본부”를 결성하였고, 1998년 9월 20일에 교회는 공사비 잔액을 다 지불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일부의 부채가 남아있어 헌당식을 하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사실상 헌당을 할 수 있는 충분한 헌금 작정과 준비는 완료되었고 또다시 무리한 헌금시행으로 교회에 부담을 안기고 싶지 않은 목양의 뜻에 따라 헌당식은 자연스럽게 다음 기회로 넘겨지게 되었다.
한가지 기억해야할 것은 1980년부터 힘겨운 본 교회의 예배당 건축의 과제를 계속 수행해오면서도 우리 교회는 고성 한내교회(1983년), 천안교회(1985년), 청주 신봉교회(1986년), 대전 에덴교회(1988년), 제천 삼일교회(1990년), 울산 세계로교회(1997년)를 개척하였고 도움을 요청하는 많은 미자립교회들을 지원하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다. 건축 부채로 많은 이자를 지불해야만 했던 1995년도에도 18개 미자립교회와 3개 전도기관을 도왔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본 교회 예배당의 헌당식은 거행하지 못하였으나 세계선교의 사명을 늦출 수 없어 중국 홍기교회(1995년)와 필리핀 라굼 제1교회(1997년)의 예배당을 건축하여 하나님께 기쁨으로 헌당예배를 먼저 드렸다. 그리고 또다시 중국 하남촌교회의 대지(250평)를 구입하고 계속 지원을 하고 있다. 주는 자에게 복이 있을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실천한 것이다.
2. 총력 전도와 교회 성장
새 예배당 건축을 위한 헌금 작정과 건축을 위한 구체적인 준비에 박차를 가하는 동시에 전도를 통한 교회성장에도 총력을 다하기 위해 1989년 12월 4일 당회는 총동원 전도주일을 년 1회 실시하고, 새신자들을 중심한 계속적인 신앙생활을 격려하기 위해 전교인 출석주일을 년 4회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1991년 2월에 전도특강을 실시하고 3월에는 전도대원을 모집하여 매주 정기적으로 모여 지속적인 전도활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1) 총동원 전도주일
체계적인 전도의 부흥을 위해 먼저 1992년 1월부터 시작된 120명 다락방 기도대의 전도부흥을 위한 기도 지원가운데 2월 21일에 전도학교를 개강하기로 하고 3월 3째 주일에는 전교인 전도세미나를 실시한 후에 전도대와 전도 후원자를 새롭게 모집하였다. 1992년 4월 5일 정기제직회의 전도부 보고에 의하면 당시에 50명의 전도대원, 83명의 전도를 위한 기도 후원자, 80명의 전도를 위한 헌금 작정자와 14명의 직간접 헌신지원자를 확보함으로써 보다 체계적인 전도운동의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1992년 5월 31일에는 가족총동원 전도주일로 지켜 가족 중에 믿지 않는 분들을 인도하기 위한 총력전도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체계적인 전도운동과 계속적인 총력전도의 놀라운 결실을 이듬해 1993년 6월 20일 “부산시민 초청 큰잔치”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먼저 6월 7일부터 2주간 동안 특별새벽기도회로 모이는 가운데 모든 성도들이 총력을 기우려 전도한 결과 7천명이 참석하여 함께 예배를 드렸다. 이것은 교회적으로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전도 대부흥의 가능성을 실제로 확인하고 계속 분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주었을 뿐 아니라 전교인들의 실제적인 전도훈련과 헌신을 새롭게 고취하는 큰 의미를 지니는 행사였다. 그 이후 1994년도의 총력전도주일은 “태신자 초청 주일”로, 1995년도는 “아홉 찾기 운동”으로, 1996년도에는 “전교인 한 생명 전도주일”로 새로운 형식으로 계속되었다.
2) 전도요원 훈련과 양육전도를 위한 노력
그러나 총동원 전도주일을 통한 전도의 온전한 결실을 위해 전도한 사람들의 계속적인 신앙지도와 추적육성을 위한 구체적인 노력이 더욱 절실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94년 4월에 “이슬비 전도학교”를 개설하고 각 구역에서 2명 이상의 요원들을 훈련하여 문서를 통한 육성에 중점을 두는 전도를 시행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94년 7월 31일 당회에서 양육을 포함한 전도운동을 새롭게 전개할 수 있는 전도요원 양성을 위해 “전도폭발훈련”을 도입하기로 결정을 하고, 담임목사와 부목사가 먼저 서울에서 직접 훈련을 받은 후에 9월 6일부터 12월 27일까지 총 16주간의 제1차 전도훈련학교를 운영하여 전도폭발요원과 기도후원자들의 훈련과 전도실습에 주력을 다하였다. 그리고 1994년 11월 29일부터 12월 1일까지는 “94‘ 부산복음화대회”를 우리 교회가 주도적으로 준비하고 진행하여 부산 복음화에 앞장 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기도 하였다.
3) 노숙자 전도와 사랑실천운동
1997년 11월 21일 정부가 IMF 구제금융을 요청한 이후에 나라가 국가적 경제파산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수많은 기업의 도산으로 인한 대량 실업사태가 발생하였다. 그로 인한 수많은 실업자들이 가정을 떠나 거리와 역전 등지에서 노숙하며 음식을 구걸하는 안타까운 사실을 접한 신주복 장로와 김진호 장로는 함께 부산역 등지에 있는 노숙자들에게 헌신적인 구제와 더불어 복음을 전하였고, 또한 그들을 주일날 교회로 인도하기 시작하여 그 숫자가 2~3백 여명으로 늘어났다. 교회는 자연스럽게 그 노숙자들을 위한 사랑의 구제와 전도에 함께 힘을 모으는 것이 시대적인 하나님의 뜻인 줄로 생각하고 1998년 4월 5일 당회는 노숙자들에 대한 “사랑실천운동”을 실시하기 위해 “사랑실천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전 교인들이 한 달간 아침금식운동을 통해 사랑의 성미와 빵을 수집하여 주일과 수요일에 제공하고 깨끗한 헌옷을 수집하여 전달하기로 하기로 하였다. 점점 늘어나는 노숙자들을 주일날 예배와 교회의 식사에 초청하기 위해 여전도회를 중심으로 부산역에 나가 빵을 나누며 전도하기도 하였다. 그 후 계속하여 식사와 교통비를 제공하고 샤워실에 전기 온수기를 시설하여 몸을 씻게 한 후에 원하는 사람들은 수집한 옷을 입고 주일 낮 예배에 참석토록 하였다. 교회 안에서 식사를 제공하고 안내하는 모든 일들을 주로 청년들이 기쁨으로 감당하였다. 이처럼 사랑으로 구제하면서 베푸는 전도운동은 현재까지 지속적인 사랑실천을 통한 전도운동으로 계속되어 오고 있다.
3. 세계선교를 위한 헌신
예배당 건축기공예배를 드린 그 다음 주일(1991년 4월 28일)에 당회는 세계선교를 위한 계획을 전도위원회가 맡아 연구하여 수립하기로 결정을 하였다. 이러한 결정은 예배당 건축이 미래의 세계선교를 위한 중심교회가 되기 위한 헌신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당면한 예배당 건축으로 인하여 해외선교계획을 수립하는 일이 신속하게 진행되지는 않았으나 1992년 3월 29일 당회는 전도위원회가 제출한 선교 계획안을 심의하여 선교사업을 전담하기 위한 특별기구로서 선교위원회를 신설하기로 결정하였고, 3월 마지막 주일에는 “선교 세미나”를 개최하여 교회적인 선교의 관심을 새롭게 하였다. 이러한 연구와 협의 과정을 거쳐 5월 31일 주일에 당회장이 교회의 장기적인 선교 비전을 교회 앞에 발표하였다.
1994년 1월에 전 교회적으로 선교를 위한 구좌헌금을 작정하였다. 선교지 선정을 위해 논의한 결과 가장 가까운 중국을 제1차 선교지로 결정하고서 김영수 선교사의 안내로 4월에 원종록 목사와 강경숙 장로(선교위원장)가 중국 선교 현지를 답사한 후에 5월 8일 당회에서 중국 흑룡강성에 위치한 홍기교회의 교회당 건축을 지원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단순히 교회당 건축을 지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1995년 7월 24일부터 10일 동안 흑룡강성의 하얼빈과 길림성의 서란에서 비밀리에 개최되었던 중국교회 지도자(목회자)들을 위한 신학강좌에 이환봉 협동목사(고신대 교수)를 파송하여 개혁주의 신학교육을 실시하였다. 당시의 신생 중국교회 설교자들을 위한 바른 신학교육은 시급한 과제였다. 그리고 그들은 신학교육을 정식으로 받을 기회도 없었기 때문에 중국 각처에서 30여명의 지도자들이 모여 뜨거운 열기 속에서 기독론과 구원론을 중심한 총 50시간의 강의와 8번의 설교를 통하여 매일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계속되는 강행군식의 신학수업을 시행하였다. 중국 홍기교회의 예배당 건축(건평 150평)은 계속 순조롭게 진행되어 1995년 12월 13일에 뜻깊은 헌당식을 거행하게 되었고 원종록 목사와 김영용 부목사가 참석하여 예배를 인도하고 축하하였다. 그리고 1999년 5월 30일 당회는 제3차 선교지로 중국 하남촌 교회를 건축(대지 250평)하기로 하고 7월 26일부터 1주일 동안 당회원 중에 지원을 받아 현지답사 겸 선교여행을 하도록 하였다.
1996년 5월 26일 당회는 제2차 선교지로서 김자선 선교사와 강정인 선교사가 섬기고 있는 필리핀 라굼 제1교회 예배당을 건축(건평 100평)하기로 결정하여, 1997년 3월 예배당 헌당식에 10여명의 지원자들이 선교 현지를 방문하였다. 그 후에 계속 김 선교사의 귀국 시에 교회 앞에서 선교현지에 대한 보고와 기도회가 있었고, 1999년 12월에는 김 선교사가 섬기는 또 다른 선교지 필리핀 뚜게가라오 교회의 헌당식에 참여하는 길에 단기선교훈련을 위한 지원자들을 모집하여 00명이 참석하였고, 그 여행으로 말미암아 선교지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와 사명감을 새롭게 하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00년부터는 역시 김자선 선교사가 봉사하는 필리핀 라굼 제3교회를 여전도회에서 계속 기도와 헌금으로 지원하고 있다.
1994년 12월부터 금요심야기도회의 헌금을 선교를 위해 사용하기로 결정하였고, 그 헌금으로 당시의 여러 선교사들을 후원하게 되었다. 현재 우리 교회가 후원하는 선교사는 이경건, 박은옥 선교사(필리핀), 김진호 선교사(파라과이), 윤장욱 선교사(시에라리온), 박민순, 전미숙 선교사(인도), 박현수 선교사(방글라데시), 김평화, 김한중, 신정만 선교사(중국), 이재찬 선교사(나이지리아), 김재수 선교사(중국)이다.
4. 부산 교계와 고신 교단을 위해 봉사하는 교회상
1992년 12월 새 예배당에 입당을 한 그 이듬해 1월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단 총회와 노회, 그리고 부산교계와 선교단체들의 수많은 집회와 수련회 및 각종 대회 등을 위하여 예배당을 때마다 제공할 수 있는 봉사하는 교회로서의 모습을 지켜왔다. 부산의 서면이라는 지역적 중심 위치와 비교적 넓은 주차장을 소유한 큰 예배당을 가진 교회로서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들을 위한 봉사에 기쁨으로 수종들 수 있는 특권을 가진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1993년 9월 20일부터 24일 까지 본 교회에서 회집하였던 제43회 대한예수교 장로회(고신) 정기총회를 위해서는 은혜로운 총회가 되도록 9월 6일부터 2주간을 특별새벽기도회를 가지는 가운데 준비하여 온 교회가 한 마음으로 섬겨 잘 감당할 수 있었고, 1998년 11월 24일 제29회 전국장로회(고신) 정기총회를 위해서도 섬길 수 있었던 것은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이다.
우리 교회는 교단의 발전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자연히 교단의 개혁과 성숙을 위해서도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왔다. 교단 총회를 앞두고 특별기도회를 가졌고 교단의 개혁을 위해 수고하는 담임 목사와 장로들을 위해 기도하며 적극 지원하였다. 특히 어려운 시기에 원종록 목사가 학교법인 교려학원(고신대학교)의 이사장으로 재임하였을 때에 기도를 쉬지 않았으며, 그 일의 여파로 1996년 제46회 총회를 앞두고 8월 25일 당회는 총회 현안문제 해결과 정화를 위한 관심과 지원을 결정하였으며, 부당한 교권의 횡포에 의하여 제46회 총회가 원목사의 상회권을 박탈한 잘못된 결정에 대해 본 교회가 소속한 동부산 노회의 교회들과 함께 그 시정과 교단의 개혁을 위해 당회원들을 중심으로 온 교회가 앞장서 기도와 선한 싸움에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1998년 제48총회는 제46총회의 잘못된 결정을 백지화되었고, 원종록 목사는 그 이듬해 1999년 제49회 총회에서 부총회장으로 영예롭게 선출되어 하나님의 공의가 교단과 교회에 함께 하시는 사실로 인하여 온 교회가 크게 기뻐하고 감사하였다. 마침내 원목사는 2000년 제50회 정기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의 기도 가운데 그 직무를 다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교단을 위한 각종 신앙운동과 기도운동에 적극 동참하였고, 총회회관 건축과 고신대학교 도서관과 생활관 건축, 그리고 신학대학원 건축과 운동장 확보 등을 위한 헌금에도 최선을 다하여 참여하였다.
1990년대의 교회의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활동은 1989년부터 제1청년회에서 시행해 오던 불우 이웃돕기 바자회를 매년마다 계속하였고, 제2청년회에서는 생필품 등을 준비하여 고아원을 방문하였으며, 제3청년회에서도 다사랑회 주관으로 불우 이웃돕기를 위한 바자회를 가졌다. 교회적으로는 전 성도들이 참여하는 사랑의 헌혈운동을 매년마다 시행하였고, 1992년 10월에는 한달 동안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성탄때마다 카드판매 등으로 장애인과 사회복지 시설에 연료비를 전달하거나 “사랑의 열매달기 운동”으로 불우 이웃을 위한 성금을 전달하였다. 1996년에는 5월과 12월에는 교회주변의 영새민을 돕기위한 사랑나눔을 위한 모금을 하기도 하였다. 때 따라 교회주변 동내에 대청소를 실시하였고, 2000년 3월에는 오명자 집사의 수고로 화요일 하루 종일 교회 주변 영세민들을 위한 이발봉사를 시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본 예배당에서 모였던 19993년 맹인을 돕는 모임이 주최한 안과무료진료를 제1청년회에서 협력하였고, 1999년과 2000년에 2회에 걸쳐 밀알선교회에서 주최한 심장병 어린이 돕기 사랑의 음악회를 도왔다. 무엇보다 앞서 서술한대로 IMF 이후 사랑실천위원회에서 노숙자들을 돕기 위한 식사제공, 교통비 지급, 샤위실 제공, 헌 옷 전달 등의 사랑실천운동을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시행해오고 있다.
5. 국제도덕협회 사당 건립 반대운동
1998년 7월경에 예배당 사무실 바로 옆에 국제도덕협회(일관도)로 알려진 사이비 종파에서 몰래 땅을 매입하고 미륵불 사당을 건립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일관도의 교주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일간신문에서 사이비 종파로 널리 알려진 바 있고, 기독교의 예배당에 바로 안접해 있는 위치에 타종교의 사당 걸립을 허락한 당국의 처사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다. 따라서 교회는 사당 건립을 저지하기로 하고 건립반대 운동에 교우들의 기도와 참여를 요청하였다. 건축을 허가한 진구청에 건축허가 취소를 요구하였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따라서 8월 24일(월) 진구청 앞에서 오전 10시에 모여 전교인 항의 집회를 가지고 대표자 면담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매일 아침에 그들의 공사 강행을 저지하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교인들이 자원하여 교대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예배당 바로 옆에서 분향 냄새와 불경을 외우는 소리 등으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예배를 침해받을 수 없었다. 결국 온 교회의 간절한 기도와 노력으로 12월에 그 부지를 교회에서 매입하여 빌라를 건축하였고 교인들을 중심으로 분양하여 은혜 중에 사당 건립 반대운동을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었다.
6. 직분 임직과 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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