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조 45권, 22년(1644 갑신/명숭정(崇禎)17년) 8월 23일(무인) 2번째기사
대신과 비국당상 및 문학 이래를 인견하여 정사를 논의하다
상이 대신과 비국 당상 및 문학 이래(李䅘)를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몸이 아파서 오랫동안 대신을 만나보지 못하여 매우 우울했었다”하니, 영의정 김류, 좌의정 홍서봉이 대답하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일이 점점 어렵고 걱정스러워져서, 신들이 밤낮으로 생각해 보아도 한갓 우려만 더할 뿐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현재 감당하기 어려운 일은 마부와 말이 부족한 폐단에 불과할 뿐이다.
용도를 절제한다면 폐단을 덜 수가 있을 것인데, 한갓 우려만 하고 절약해서 쓰는 방도를 몰라서야 되겠는가? 비록 세자의 삭선(朔膳)으로 말하더라도, 전번에 20바리를 보내고 지금 40바리를 더 보내는 것은 자못 타당하지못한 일이다.
옛말에 ‘용도를 절약하여 백성을 사랑한다’하였으니, 나라를 다스리는 큰 요점이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안면과 인정에 얽매여 이와 같이 낭비를 하니, 내가 경들의 뜻을 알 수 없다. 또 향교 유생으로 강서를 면한 사람이 5백명에 이른다면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니겠는가?”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이 일은 과연 구차하게 되었습니다마는, 형편이 이러하여 이 계책을 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하고,
서봉이 아뢰기를,
“일찍이 만력 계미년1825)에도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나랏일을 매우 걱정하여, 처음으로 서얼로 하여금 북도에 양식을 운반해주게 하고 벼슬길을 터주기로 허락하였는데, 국가가 그것 때문에 힘을 얻게 되었으니, 지금 향교 유생들의 말바치는 이것을 꼭 어렵게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때에도 향교 유생이 강서를 면한 일이 있었는가?”하니,
서봉이 아뢰기를,
“그때에 비록 강서를 면하는 규정은 없었으나, 또한 말을 바치고 강서를 면한 일은 있었습니다”하였다.
예조판서 이식이 아뢰기를,
“모시고 호위하는 사람은 결코 늙은 사람으로 차송하기가 어렵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강태공(姜太公)과 범증(范增)은 나이 80이 되어서도 종군(從軍)했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져서, 임광(任絖)은 노쇠한 지경에 이르지않았는데도 북경에 가는 것을 모면하였고, 한형길(韓亨吉)은 아직 기력이 강장한 나이인데도 병을 핑계하여 뒤로 빠졌다.
인심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한심스럽다”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승지는 으레 먼동이 틀 무렵에 대루원(待漏院)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지금은 조신(朝臣)이 약방(藥房)에서 문안드릴 일로 대궐 아래에 나와 보니, 아침이 밝아진 뒤에야 승지가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게으른 태도를 여기에 근거해서 알 수 있습니다”하니,
승지 조석윤(趙錫胤)이 아뢰기를,
“신의 집이 문 밖에 있어 아문에 오는 것이 가장 늦으니, 황공함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의 승지들은 모두 연소한 사람들인데, 감히 이렇게 한단 말인가?”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도승지 이행원(李行遠)을 추고하여, 승지들을 검속하고 신칙하지못한 잘못을 책망하소서”하니, 상이 따랐다.
김류가 아뢰기를,
“사사로운 인정이 크게 행해지고 기강이 쇠퇴하여 문란하기가 오늘날보다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시험삼아 비국의 일로 말하자면, 당상은 비록 연소한 사람일지라도 병을 핑계하여, 와서 참여하려 하지 않는데, 이식같은 사람도 근무에 충실하지 않습니다”하니,
이식이 아뢰기를,
“신은 본디부터 위중한 병이 있고 또 재능도 없는데, 외람되이 헛된 명성을 훔쳐서 분에 넘치게 문형(文衡)의 자리를 맡고 또 비국의 직임까지 겸하였습니다. 그런데 실록을 찬수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신이 홀로 감당하고 있고, 모든 당상이나 낭청이 한 사람도 와서 참여하지 않으니, 이 때문에 신이 실록 찬수하는 곳에만 계속 매달려 있고 비국에는 출사할 겨를이 없게 된 것입니다”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신이 이곳 총재(摠裁)의 직임을 외람되이 맡고 있지만, 종전 실록을 찬수할 때에는 으레 도청과 낭청이 있어 날마다 교대해서 나오므로, 그들에게 베껴 쓰는 일로써 과정(課程)을 주어 독책하였기 때문에 일의 단서를 이루기가 쉬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최명길(崔鳴吉)이 옛날 한퇴지(韓退之)1826)가 《순종실록(順宗實錄)》을 혼자서 찬수했던 고사를 끌어대어 이식으로 하여금 찬수의 일을 오로지 감당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퇴지의 경우는 당시의 사관(史官)이었으니, 오히려 혼자 할 수가 있었지만, 이식은 결코 혼자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겠는가?”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지금은 의당 사관이 될 만한 재능이 있는 사람을 잘 골라 뽑아서 그들에게 각기 일을 분담시켜 주어, 그 맡은 과정을 일시에 완료하도록 독책한다면 일을 완성하기가 쉬울 것입니다”하고,
이식이 아뢰기를,
“신이 이미 10년간의 사실을 베껴 놓았는데, 그것은 사관이 30년동안 기록한 것보다 오히려 낫습니다”하고,
김류가 아뢰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나라는 망하더라도 역사는 망하지 않는다’하였으니, 역사를 찬수하는 일은 진실로 한 사람이 혼자 할 것이 아닙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런 난세를 당하여 어떤 시기를 기다릴 수 없으니, 우선 찬수하게 하여 둘 다 보존시켜서 후일의 공론을 기다리는 것이 옳다. 대제학에게는 비국의 직임으로 책망할 수 없으니, 앞으로는 그에게 실록 찬수하는 일을 모조리 위임시켜서 독려하여 이루기를 책임 지우는 것이 타당하다”하였다.
김류가 아뢰기를,
“이명한(李明漢)·이경석(李景奭)에게는 아주 높은 직임은 비록 맡길 수 없지만, 춘추관 당상의 직임은 의당 할 만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이 두 사람은 또한 사관의 일을 맡길 만하다”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이조와 병조에서 인재를 주의(注擬)할 때에 각 인명(人名)아래 그의 공로를 모두 기록하는데, 혹은 한 사람이 상을 거듭받는 경우가 있고 혹은 한 번도 은전을 입지 못한 사람도 있으니, 매우 고르지 못하다”하였다.
석윤이 아뢰기를,
“병자년의 난리때 신은 외방에 있었으므로 당시의 일을 몰랐습니다.
그 후 정원에 와서 병자·정축년의 일기(日記)를 상고해보니, 오달제(吳達濟)등을 북으로 보낼 때에 성상의 교지에서 진정으로 그를 측은하게 여기시어 심지어는 ‘너희들의 처자를 잘 보살펴 주겠다’는 말씀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윤집(尹集)의 조모는 나이 90에 가깝고, 달제의 어미는 나이 70이 넘었는데, 모두 집이 빈한하고 자질(子姪)들이 고단하여 봉양을 하지못한다고 하니, 참으로 불쌍합니다.
만일 지난날 하교하신 뜻에 따라 먹을 것을 넉넉히 주고, 또 그들의 제질(弟姪)들을 벼슬자리에 채용한다면, 죽은 사람이나 산 사람이 모두 매우 감격할 것이요, 또한 국가에서 충신을 포상하여 장려하는 도리에도 합당할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찍이 매월 봉록을 주라고 명하였는데, 지금은 그것을 물리치고 시행하지 않는가, 물어서 처리하라.
벼슬자리에 채용하는 조항에 대해서는 조금 천천히 처리하도록 하라”하였다. 석윤이 아뢰기를,
“홍익한(洪翼漢)의 노모가 살았는지의 여부를 비록 알 수 없으나, 의당 또한 오달제·윤집과 똑같은 예로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당초에 그에 대해서도 하교가 있었다”하고,
상이 문학 이래에게 묻기를,
“세자가 어떻게 지탱하여 보존하는가?”하니,
대답하기를,
“세자가 지난번 북경에서 돌아왔을 때는 감기가 심하게 들었었는데, 지금은 쾌차되었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상국(上國)이 어찌하여 유적(流賊)을 방비하지 못하고 끝내 패망하기에 이르렀는가?”하니,
대답하기를,
“중원은 환관이 권력을 마음대로 부리고 사졸들이 반심(叛心)을 품음으로써 드디어 적의 돌격을 받아 끝내 멸망되었다고 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이 북경 가까운 곳에 있었는가?”하니,
대답하기를,
“유적이 산서(山西) 태원부(太原府)와 하남(河南)·하북(河北) 지방에 머물러 진을 치고 있는데, 지세가 또한 모두 험준해서 명령이 천하에 통하지않은 지가 벌써 여러 해가 되었다고 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순절한 사람은 얼마나 된다던가?”하니,
대답하기를,
“비록 순절한 사람이 있다하더라도 우리쪽 사람은 한쪽 구석에 머물러 있으니, 어떻게 알겠습니까?”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병부 상서(兵部尙書)가 내통했다는 말이 사실인가?”하니,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재상도 와서 항복한 자가 있었는가?”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역관(譯官)의 말을 들으니, 병부와 예부의 관원가운데 혹 아문에 명함을 바치고 와서 뵌 사람이 있었다고 하나, 또한 사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대략 듣건대, 식견있는 사대부들은 이미 먼저 멀리 피해버렸다고 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환관은 얼마나 되던가?”하니,
대답하기를,
“대궐 안에 있는 자가 1만여명이고, 각기 직사를 나누어 맡은 자가 8천명이며, 민간에 있으면서 대궐에 출입하는 자는 몇 만명인지도 모른다고 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불탄 궁실(宮室)은 얼마나 되던가?”하니,
대답하기를,
“황극(皇極)·문연(文淵) 두 전각은 모두 불타버렸고, 무영전(武英殿) 하나만이 우뚝하게 남아 있으므로, 구왕(九王)이 방금 무영전에 있으면서 군졸들을 죽 늘어세워서 군문(軍門)으로 삼았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만수산(萬壽山)은 높이가 얼마나 되고, 이궁(離宮)과 별관(別館)도 남아 있는 것이 없는가?”하니,
대답하기를,
“만수산은 대궐 뒷동산 쪽에 있는데, 그리 높지않고, 산 앞에 있는 별관 5∼6군데는 다행히 불이 번지지않아 타지않았으며, 관청 건물은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많았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산해관에서 맞아 싸웠던 적은 그 수가 얼마나 되었는가?”하니,
대답하기를,
“평야에 진을 친 것이 수십 리를 뻗쳤는데, 북경에 가서 들어보니, 맞아 싸웠던 적의 숫자가 기병(騎兵)이 10만, 보졸(步卒)이 20만이었다고 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병과 호병(胡兵) 중에 어느 쪽이 더 많았는가?”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보기에는 호병이 유적보다 갑절이나 된 듯하였는데, 청나라 사람도 ‘전후에 걸쳐 군대를 일으킨 것이 오늘날처럼 대규모인 적은 없었다’고 하였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청나라 사람이 병부상서를 사로잡았다고 하는데 누구였는가?”하니,
대답하기를,
“병부상서 상시필(尙時弼)등 12명을 사로잡아서, 군대를 주둔시킨 지 한나절 만에 군문 앞에서 그를 효수하였는데, 그가 바로 명나라 조정의 상서로서 유적과 내통했던 자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산해관에 들어간 후 구왕(九王)의 일처리하는 것이 큰일을 성취할 만하던가?”하니,
대답하기를,
“신의 얕은 소견으로 어떻게 알겠습니까? 과연 사리에 합당한지는 비록 모르겠으나, 대체로 결단하는 일이 많았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을 비록 결단한다 하더라도 만일 사리에 합당치않다면 무엇을 취할 것이 있겠는가?”하니,
대답하기를,
“산해관에 막 들어갔을 적에는 살상과 약탈을 엄금하였기 때문에 중원의 인사들이 모두 기뻐하며 복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 머리를 깎게하는 조치가 있자, 백성들이 모두 분노하여 혹 우리 쪽 사람을 만나면 울면서 말하기를 ‘우리가 무슨 죄가 있기에 유독 이렇게 머리를 깎아야 하는가?’하였으니, 이런 일은 비록 결단한 듯하기는 하나, 인심을 수습하는 방도가 아니었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너희들이 나올 때에 성중(城中)의 인심이 이미 진정되었던가?”하니,
대답하기를,
“병란과 화재를 연이어 겪은데다 또 큰 가뭄을 만나, 원근에 있는 전답이 모조리 병마(兵馬)에 짓밟혀서 성밑의 수백리 들판에 푸른 풀포기 하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중 사람들이 서로 모여 도둑질을 하며, 사람을 죽이고 물품을 약탈하는 우환도 많이 있다고 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창고의 저축은 얼마나 되던가?”하니,
대답하기를,
“명나라 조정에서 축적해놓은 것이 매우 많았으나, 유적들이 모조리 다 가져가 버렸고, 남아있는 것은 모두 여러 해 된 케케묵은 쌀뿐이었는데, 청나라 사람들은 그것을 말에게 먹이기도 하고, 혹은 자신들이 먹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호(胡)의 풍속은 고기와 우유로 주린 배를 채우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겨우 두어 숟가락만 먹으면 며칠씩 복통을 앓곤 했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팔왕(八王)은 북경에 머무르려 하지않는다고 하는데, 참으로 그런가?”하니, 이래가 아뢰기를,
“팔왕이 구왕에게 말하기를 ‘맨 처음 요동(遼東)을 얻었을 때 사람들을 살륙하지않았기 때문에, 청나라 사람이 요동 백성들에게 많이 살해되었으니, 지금은 의당 이 군대의 위세를 타서 크게 살륙을 자행한 다음, 제왕(諸王)들을 유치시켜서 연도(燕都)를 진정시키고, 대군(大軍)은 심양을 다시 가서 지키기도 하고, 혹 물러가서 산해관을 보호하기도 해야만이 후환을 없앨 수 있다’ 하니,
구왕이 말하기를 ‘선 황제(先皇帝)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만일 북경을 얻으면 즉시 도읍을 옮겨서 적극적으로 나아가 취하기를 도모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더구나 지금은 인심이 안정되지 못했으니, 여기를 버리고 동으로 돌아가서는 안된다’하여, 두 왕의 논의가 서로 맞지않아서 이로 인해 틈이 생겼다고 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북경으로 이사한 청나라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하니,
이래가 아뢰기를,
“가속을 거느리고 이사하는 자가 계속되고 있는데, 봉황성(鳳凰城)의 호인(胡人)과 함께 옮기고는 있으나, 사람들이 모두 고향떠나기를 싫어하고,
또 심양에 곡식들이 여물었으므로, 원망하고 괴로워하는 자가 많이 있다고 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청나라 군대가 연경에 들어간 후로 어찌하여 적의 우두머리를 쫓아가 잡지 않았는가,”하니,
이래가 아뢰기를,
“북경에서 보정부(保定府)까지의 거리는 모두 7일이 걸리는 노정인데, 팔왕(八王)이 매우 급히 달려 3일만에 겨우 보정부에 당도하긴 하였으나, 사람과 말이 모두 피곤하여 더 멀리 쫓아가지 못했다고 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원 사람들은 대명(大明)이 멸망한 것을 원통하게 여기는가?”하니,
대답하기를,
“영락황제(永樂皇帝)1827)의 후손으로 태원군왕(太原郡王)에 세습된 자가 있었는데, 그가 청나라 군대에게 붙잡혀 도성으로 들어가자, 부로(父老)들이 그를 붙들고 눈물을 흘리며 우는 자가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3백년을 지켜온 종묘사직이 일조에 빈터가 되어 버렸으니, 의당 순절한 신하들이 있었어야할 터인데, 지금까지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못했으니, 참으로 탄식할 일이다”하니,
석윤이 아뢰기를,
“만일 절개를 지키고 의리에 죽은 사람이 있었다면, 비록 어리석은 남녀라도 반드시 모두 그들을 칭송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적막한 것은 반드시 황제가 임금답지 못하여 환관들이 정권을 쥐게 되고, 예의가 쓸어버린 듯이 흔적도 없고, 염치가 무너져 버림으로써 지조와 절개있는 사대부들이 이미 먼저 자리를 떠나가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하였다.
이래가 아뢰기를,
“신이 심양에서 나올 때에 역관 정명수가 세자를 찾아뵙고, 전일에 보낸 쌀이 많지않다는 것을 또 말했습니다.
그러자 세자가 이르기를 ‘그렇다면 쌀의 분량을 세공(歲貢)의 숫자와 같이 해야 한단 말인가?’하니, 명수가 말하기를 ‘어찌 꼭 그와 같이 많이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하였습니다.
명수가 나가자, 세자가 신에게 이르기를 ‘겨울이 되기 전에 먼저 5천석을 보내고, 봄에 또 5천석을 보내서 반드시 1만석의 숫자를 채워야만 그의 욕심을 채울 수 있을 것이니, 모름지기 이 뜻으로 본국 조정에 아뢰어 알려드려라’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이 평안도 지역을 지나오면서 농작의 상황을 살펴보건대, 북경에서의 응접(應接)하는 모든 일에 소요되는 것을 다 충당하자면, 지탱할 도리가 만무하여, 백성들이 모두 흩어질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니, 반드시 별도의 조치가 있어야만이 국사가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걱정을 면할 것입니다”하니, 상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註1825]계미년:1583 선조16년 註1826]한퇴지(韓退之):퇴지는 당(唐)나라 한유(韓愈)의 자 註1827]영락황제(永樂皇帝):명성조(明成祖)를 가리킴. 영락은 그의 연호.
○上引見大臣、備局堂上及文學李䅘。 上曰: “予有疾, 久不見大臣, 深用鬱鬱耳。” 領議政金瑬、左議政洪瑞鳳對曰: “國家不幸, 事漸艱虞, 臣等晝夜思量, 徒益憂慮耳。” 上曰: “目今難堪之事, 不過夫、馬之弊而已。 用之有節, 則可以省弊, 而徒費憂慮, 不知節用之方可乎, 雖以世子朔膳言之, 前送二十駄, 今加四十駄, 殊未妥當。 古語云: ‘節用而愛民。’ 治國之大要, 不外於此, 而拘於顔情, 濫費如此, 予未曉諸卿之意也。 且免講校生, 至於五百, 則無乃濫觴乎,” 瑬曰: “此擧果涉苟且, 而事勢如此, 不得不出此計也。” 瑞鳳曰: “曾在萬曆癸未, 先正臣李珥深以國事爲憂, 始令庶孽運糧北道, 許通仕路, 國家賴鎰力。 今此校生之納馬, 不必持難也。” 上曰: “其時亦有校生免講之事乎,” 瑞鳳曰: “其時雖無免講之規, 而亦有納馬免講之擧矣。” 禮曹判書李植曰: “陪衛之人, 決難以年老者差送矣。” 上曰: “太公、范增, 年八十而亦從軍矣。 今日則國綱解弛, 任絖不至衰老, 而謀免北行; 韓亨吉年紀尙强, 而託疾落後。 人心至此, 良可寒心。” 瑬曰: 承旨例於昧爽, 進詣待漏院, 而今朝臣以藥房問安, 來詣闕下, 則天明之後承旨始至。 怠慢之習, 據此可知矣。” 承旨趙錫胤曰: “臣家在門外, 故趨衙最後, 不勝惶恐。” 上曰: “今日承旨, 皆年少之人, 而乃敢如是耶,” 瑬曰: “請都承旨李行遠推考, 以責其不能檢飭之失。” 從之。 瑬曰: “私情之大行, 紀綱之頹廢, 未有甚於今日。 試以備局之事言之, 堂上雖年少之人, 稱病不肯來參, 至如李植, 亦不勤仕矣。” 植曰: “臣素抱重病, 又無才能, 而叨竊虛名, 濫典文衡, 又兼備局之任。 至於纂修之事, 臣獨當之, 而諸堂上、郞廳, 一不來參, 此所以臣之長在纂修之所, 而未遑於備局之仕也。” 瑬曰: “臣參此摠裁之任, 而從前修史之時, 例有都廳、郞廳, 逐日分進, 程督繕寫, 故事易就緖。 今者崔鳴吉援引韓退之獨修《順宗實錄》之故事, 使植專任纂修。 退之則當時史官, 猶可獨爲也, 植則決不可獨任也。” 上曰: “然則何以爲之乎,” 瑬曰: “今宜妙選史才分房, 各授一時程督, 事可易完。” 植曰: “臣已草十年事實, 而猶勝於史官三十年所錄矣。” 瑬曰: “古語云: ‘國亡, 史不可亡。’ 史事固非一人所可獨爲也。” 上曰: 當此亂世, 不可待時, 姑令纂修而兩存之, 以待後日公論可也。 大提學則不可責以備局之任, 自今以後, 悉委纂修之事, 程督責成宜矣。” 瑬曰: “李明漢、李景奭, 雖不得任以顯秩, 至於春秋館堂上, 則宜可爲也。” 上曰: “卿言是也。 此兩人, 亦可任以史事也。” 上又曰: “兩銓注擬之際, 各人名下, 皆錄其功勞, 而或有以一人, 而疊受其賞者, 或有一未霑恩者, 其不均甚矣。” 錫胤曰: “丙子之亂, 臣在外方, 未知當時之事, 而及到政院, 考見丙子、丁丑《日記》, 則吳達濟等北送時, 聖旨懇惻, 至有爾等妻子護恤之敎。 今者尹集之祖母, 年近九十; 達濟之母, 年過七十, 而家業貧寒, 子姪零丁, 不能奉養云, 誠可矜也。 若循前日下敎之意, 優給食物, 且錄用其弟姪, 則感極幽明, 而亦合於國家褒奬之道矣。” 上曰: “曾已命給月俸矣。 今則閣而不行耶, 問而處之。 錄用一款則姑徐。” 錫胤曰: “洪翼漢老母之存沒, 雖未知之, 宜亦一體施行。” 上曰: “當初亦有下敎矣。” 上問文學李䅘曰: “世子何以支保耶,” 對曰: “世子頃自北京還, 重感風寒, 今則快差矣。” 上曰: “上國何以不備流賊, 終至敗亡耶,” 對曰: “中原宦寺弄權, 士卒離心, 遂致伊賊隳突, 終乃滅亡云。” 上曰: “賊在近畿耶,” 對曰: “流賊留屯山西太原府、河南、河北, 亦皆阻絶, 命令之不通於天下, 已累歲云。” 上曰: “死節者幾何云耶,” 對曰: “雖有死節者, 而我人留屯於一隅, 何鎰知之,” 上曰: “兵部尙書內應之說信否,” 對曰: “然矣。” 上曰: “卿相亦有來降者耶,” 對曰: “臣聞譯官之言, 有兵部、禮部之官, 或授刺於衙門而來謁云, 亦未知其眞的。 旣聞有識士大夫, 先已遠避云。” 上曰: “宦官幾何,” 對曰: “在闕內者萬餘人, 分掌職事者八千人, 而其在於街巷之間, 出入闕內者, 不知其幾萬人云。” 上曰: “宮室之燒燼者幾何,” 對曰: “皇極、文淵兩殿, 竝皆灰燼, 唯武英一殿, 巋然獨存, 故九王方在武英, 列立軍卒, 作爲軍門矣。” 上曰: “萬壽山其高幾許, 而離宮、別館, 亦無餘存耶,” 對曰: “山在後苑, 而不甚高大, 山前別館五六處, 幸免延燒, 如公廨則尙多餘存者矣。” 上曰: “山海關迎戰之賊, 其數幾何,” 對曰: “結陣於平野, 連亘數十里, 及到北京聞之, 則迎戰之賊, 騎兵十萬, 步卒二十萬云。” 上曰: “賊兵與胡兵孰多,” 對曰: “以臣所見,胡兵似倍於流賊, 淸人亦言: ‘前後興師, 未有如今日之大擧。’ 云。” 上曰: “淸人擒兵部尙書云, 何許人耶,” 對曰: “擒兵部尙書尙時弼等十二人, 駐軍半日, 梟首軍前, 此乃明朝之尙書, 而爲流賊內應者也。” 上曰: “入關之後, 九王措劃, 可以成大事耶,” 對曰: “以臣淺見, 何以知之, 雖未知其果合於事理, 而蓋多夬斷之事矣。” 上曰: “事雖夬斷, 若不合理, 則何足取也,” 對曰: “入關之初, 嚴禁殺掠, 故中原人士無不悅服。 及有剃頭之擧, 民皆憤怒, 或見我人, 泣而言曰: ‘我以何罪, 獨爲此剃頭乎,’ 如此等事, 雖似夬斷, 非收拾人心之道也。” 上曰: “爾等出來之時, 城中人心, 其已鎭定耶,” 對曰: “連經兵火, 又値大旱, 遠近田疇, 盡爲兵馬所蹂躪, 城底數百里, 野無靑草。 城中之人, 相聚爲盜, 多有殺越奪掠之患云。” 上曰: “倉儲幾何,” 對曰: “明朝畜積甚富, 而盡爲流賊所取, 餘存者皆積年陳腐之米而已, 淸人或飼其馬, 或自食之。 而胡俗多以肉、酪充飢, 我國之人則纔喫數匙, 輒腹痛數三日矣。” 上曰: “八王則不欲留北京云, 然耶,” 䅘曰: “八王言於九王曰: ‘初得遼東, 不行殺戮, 故淸人多爲遼民所殺, 今宜乘此兵威, 大肆屠戮, 留置諸王, 以鎭燕都, 而大兵則或還守瀋陽, 或退保山海, 可無後患。’ 九王以爲: ‘先皇帝嘗言: 「若得北京, 當卽徙都, 以圖進取。」 況今人心未定, 不可棄而東還。’ 兩王論議不合, 因有嫌隙云。” 上曰: “淸人之搬移北京者幾何耶,” 䅘曰: “率其家屬搬移者相續, 而竝與鳳凰城胡人而遷之, 人皆安土重遷, 且瀋中禾稼頗登, 故多有怨苦者云。” 上曰: “淸兵入燕之後, 何不追擒賊酋云耶,” 䅘曰: “自北京至保定府, 凡七日程, 八王疾馳三日, 纔及於保定, 馬困人疲, 不能遠逐云。” 上曰: “中原之人, 以大明之亡爲痛耶,” 對曰: “永樂皇帝之後裔, 有世襲太原郡王者, 被執入都, 父老多有携持而涕泣者云。” 上曰: “三百年宗社, 一朝丘墟, 宜有死節之臣, 而至今無聞, 良可歎也。” 錫胤曰: “如有伏節死義之人, 則雖愚夫愚婦, 必皆稱道, 而寥寥如此, 必是皇帝不辟, 宦寺執政, 禮義掃地, 廉恥頹廢, 士夫之有志節者, 先已去位而然也。” 䅘曰: “臣自瀋出來之時, 鄭譯謁於世子, 且言前日所送之米不多。 世子曰: ‘然則當如歲貢之數耶,’ 命壽言: ‘何必如是之多乎,’ 命壽出, 世子言於臣曰: ‘冬前先送五千石, 春來又送五千石, 必充萬石之數, 可充其慾。 須以此意, 啓知于大朝。’ 云。 臣行過關西, 審其形勢, 則北京接應之役, 萬無支吾之理, 人民皆有渙散之心, 必有別樣區劃, 可免土崩之患矣。” 上默然。
효종 9권, 3년(1652 임진/청순치(順治) 9년) 10월 22일(경신) 3번째기사
예조참의 윤선도가 올린 하늘을 두려워하고 마음을 다스리라는 등의 8조목의 상소
예조참의 윤선도(尹善道)가 상소하기를,
“첫째, 하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서경》에 이르기를 ‘내 일은 하늘이 시킨 것으로 내 몸에 큰일을 내리고 어려운 일을 맡겼다’하였습니다.
역(役)은《맹자(孟子)》에 이른바 인역(人役)의 역과 같습니다.
임금은 곧 하늘이 부리는 사람이니, 어찌 감히 조금이라도 하늘에 순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늘은 곧 이(理)이니, 이에 순응하면 하늘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임금이 하늘을 섬기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를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효도는 부모의 얼굴빛을 살펴 그에 잘 따르는 것인데, 하늘에 무슨 살필 만한 기색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홍범(洪範)에 이르기를 ‘엄숙하면 시기에 맞게 비가 따르고, 조리가 맞으면 시기에 맞게 햇볕이 따르고, 지혜로우면 시기에 맞게 따뜻함이 따르고, 지모가 있으면 때맞추어 추위가 따르고, 성스러우면 때맞추어 바람이 따르며, 경망하면 계속 비가 따르고, 어그러지면 계속 햇볕이 따르고, 게으르면 항상 따듯함이 따르고, 조급하면 항상 추위가 따르고, 몽매하면 항상 바람이 따른다’하였습니다.
비내리고 볕나고 따듯하고 춥고 바람부는 것이 다 시기에 알맞으면 내가 능히 하늘에 순응하여 하늘이 기뻐하는 기색으로 응답하였다는 것을 점칠 수 있고, 비내리고 볕나고 따듯하고 춥고 바람부는 것이 다 시기를 잃고 계속되면 내가 하늘에 순응하지못하여 하늘이 나무라는 기색으로 응답하였다는 것을 점칠 수 있는 것입니다.
올해는 가을·겨울의 날씨가 지나치게 따듯합니다. 이것은 곧 항상 따듯하다는 것인데 겨울 안개와 겨울 장마와 겨울 천둥은 다 따듯한 탓에 발생하는 현상이니, 성조(聖朝)에 예(豫)의 흠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채침(蔡沈)의 주석에 예를 풀이하여 게으른 것이라 하였습니다마는, 예라는 것은 게으른 것을 뜻할 뿐 아니라 구차하게 당장의 편안함을 찾아 우유부단함이 다 예이고, 곽공(郭公)이 선한 자를 선하게 여기되 쓰지못하고 악한 자를 악하게 여기되 물리치지못한 것도 모두 예입니다.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이를 생각하소서.
둘째, 마음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요(堯)가 순(舜)을 명할 때에 이르기를 ‘하늘의 역수(曆數)가 네 몸에 달려 있다. 진실로 중도를 지키라. 사해(四海)가 곤궁하면 천록(天祿)이 영원히 끝나리라’하였고, 순이 우(禹)를 명할 때에 이르기를 ‘인심(人心)은 위태하고 도심(道心)은 희미하니 정수(精粹)하고 전일(專一)해야 진실로 중도를 지키리라’하였으니, 그 말이 지극합니다.
임금이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말하면 이것을 버려두고 어디서 찾겠습니까? 그러나 요가 순을 명할 때에 ‘역수가 네 몸에 달려 있다’하고 나서 곧 ‘천록이 영원히 끝나리라’한 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대개 또한 천명은 믿기 어렵고 일정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임금이 중도를 지키지 못하고서 국가를 보유할 수 있겠습니까?
순이 우를 명할 때에 다시 세 마디 말을 더한 것이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정수하지 않으면 형기(形氣)의 사사로운 것을 살필 수 없고 전일하지 않으면 본심의 바른 것을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임금이 정수하고 전일하지 못하고서 진실로 중도를 지킬 수 있겠습니까?
아, 요임금이 사방을 비추고 하늘과 백성을 감동하게 하며 진실로 모든 벼슬아치들을 다스려 뭇 공적이 다 확충된 것과 순이 구관(九官)643)을 임명하고 사흉(四凶)644)을 죄주며 거듭 빛나서 요임금에 부합하고 사해가 공덕을 추대한 것은 모두가 정수하고 전일했던 효과입니다.
후세의 임금은 정치에 있어서는 어질다가 어리석다가 하고 사정(邪正)에 대해서는 밝았다가 어둡다가하여 쇠미(衰微)가 잇따르고 난망(亂亡)이 계속되는 것은 모두가 정수하고 전일하지 못한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정수하고 전일한 학문을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이를 생각하소서.
셋째, 인재를 가리는 것입니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정치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하고 《서경》에 이르기를 ‘임금이 어진이를 얻지않으면 다스리지 못한다’하였습니다.
고금천하에 어찌 인재를 얻지못하고서 치도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람을 알아보면 밝은 것인데 요임금도 이것을 어렵게 여겼습니다. 어진이를 간사하게 여기고 간사한 자를 어질게 여기고 지혜로운 이를 어리석게 여기고, 어리석은 자를 지혜롭게 여기는 것이야말로 국가를 다스리는 자의 공통적인 병통입니다.
그러니 임금으로서 어찌 인재를 가리는 것을 급선무로 삼지않을 수 있겠습니까? 경의(經義)에 통달하여 도(道)를 알고 간언을 아뢰어 임금의 잘못을 바루는 자는 경악(經幄)에 둘 만하고, 출납을 오직 미덥게 하고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고 부족한 점을 보완하는 자는 상서(尙書)를 맡길 만하고, 사람을 알아보고 지극히 공정한 자는 전형(銓衡)을 맡길 만하고, 글을 잘하고 지극히 공정한 자는 시험을 맡길 만하고, 학문에 밝고 덕이 높아서 잘 가르치는 자는 교화를 펴게할 만하고, 많이 듣고 지식이 넓어서 사리에 통달한 자는 예를 맡길 만하고, 임금의 혜정(惠政)을 받들어 펴고 출척(黜陟)을 밝게 하는 자는 방백(方伯)을 맡길 만하고, 요역(徭役)을 고르게 하고 부세를 가볍게 하여 백성을 잘 어루만지는 자는 목민(牧民)을 맡길 만하고, 의용(義勇)·기정(奇正)645)을 갖추고 일에 임하여 조심하고 계책을 잘 써서 성공하는 자는 병사(兵事)를 맡길 만하고, 관반내화(官反內貨)646)를 금단하고 밝게 살피고 공경하고 조심하며 아울러 천위(天威)를 엄하게 하는 자는 형정(刑政)을 맡길 만하고, 속이지 않는 충직함이 있고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자는 대각(臺閣)에 있을 만하고, 부세(賦稅)를 고르게 하는 도리를 알고 함부로 거두어들이지않는 자는 재용(財用)을 다스릴 만합니다.
이러한 인재를 얻어서 맡긴다면, 전하께서는 옷을 드리우고 가만히 계셔도 다스릴 수 있고 높이 팔짱끼고 계셔도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아, 인재가 모자란다는 한탄은 쇠퇴한 세상에서는 늘상 하는 이야기인데 전하께서도 세상에 마땅한 인재가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옛 임금은 목마르듯이 어진이를 찾아서 얻지못한 적이 없었으니, 이는 전하께서 찾으시는 것이 정성스럽지 않아서이지 어찌 어진이가 모자라는 세상이 있겠습니까?
다만 인재는 참으로 알기가 어려운데, 공자가 말하기를 ‘사람을 취할 때는 그 몸으로 하고 그 몸을 수양하는 것은 도로 한다’하였으니, 전하께서 도로써 자신을 수양함이 과연 지극하다면 다른 사람에게 도가 있는지를 알기가 어찌 어렵겠습니까? 도끼자루를 잡고 도끼자루 감을 베는데 어찌 그 규격이 다르겠습니까? 바라건대, 성명께서 이를 생각하소서.
넷째, 상벌을 밝히는 것입니다.
대저 상벌이라는 것은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하는 방법이니, 어진이를 천거한 자를 상주어야 하고, 어진이를 엄폐한 자를 벌주어야 하고, 선을 행한 자를 상주어야 하고, 악을 행한 자를 벌주어야 하고, 임금에게 충성한 자를 상주어야 하고, 나라를 저버린 자를 벌주어야 하고, 곧은 자를 상주어야 하고, 속인 자를 벌주어야 하고, 공변된 자를 상주어야 하고, 사사로운 자를 벌주어야 하고, 직분을 다한 자를 상주어야 하고, 직분을 버려둔 자를 벌주어야 하고, 나라를 이롭게 한 자를 상주어야 하고, 자기를 이롭게 한 자를 벌주어야 하고, 백성을 아끼는 자를 상주어야 하고, 백성을 괴롭히는 자를 벌주어야 하고, 함께 삼가고 서로 공경하는 자를 상주어야 하고, 제 붕당은 감싸고 자기와 뜻이 다른 자는 공격하는 자를 벌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상주고 벌주는 것이 공정해야 하고 균등해야하므로 상은 반드시 삼가고 벌은 반드시 행해져야 합니다.
따라서 상주고 벌주는 권한은 위에 있어야 하고 아래에 있어서는 안됩니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이를 생각하소서.
다섯째, 기강(紀綱)을 떨치는 것입니다.
인재가 가려지고 상벌이 밝아지고 나면 기강의 진작은 조치하는 가운데에 있을 뿐이어서 다시 힘을 쓰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훌륭한 법의 아름다운 뜻이 문서에 널려 있고 금과옥조가 법전에 분명히 실려 있습니다.
바라건대, 성명께서 느슨해진 것을 긴장시키고, 떨어진 것을 들어올리고, 무너진 것을 세우고, 희미해진 것을 밝혀서 늘 천하를 경륜하는 큰 법을 힘쓰소서. 또 임금의 권세가 느슨하여 정권이 아래에 있으면 나라를 다스릴 수 없고 또한 위태할 것입니다.
영(令)이 행해지지않아서 금지할 것이 금지되지않으면 기강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떨쳐지겠습니까?
홍범(洪範)에 이르기를 ‘임금이라야 복록(福祿)을 주고 위형(威刑)을 준다’하였으니, 의미있는 말입니다.
천심(天心)은 만물 사랑하기를 주로 하나 때때로 다시 바람과 천둥으로 진작시키고 서리와 눈으로 엄숙히 하니, 임금이 하늘의 도리를 체득하여 인의(仁義)가 아울러 행해진다면, 어찌 다만 수수방관할 뿐이겠습니까?
내가 한 일이 과연 사사로운 희로(喜怒)에서 나왔다면 자기를 극복하고 욕심을 막아서 물 흐르듯이 간언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내가 한 일이 과연 정대한 의리에서 나왔다면 어찌 경박한 의논에 흔들리고 선동하는 말에 굽힐 수 있겠습니까?
임금의 양강(陽剛)한 도리가 이러하여서는 안됩니다.
중장통(仲長統)이 탁군(涿郡)의 최식(崔湜)이 지은 글을 보고 말하기를 ‘임금이 한 통을 베껴써서 좌우에 두어야 한다’하였는데, 전하께서 어찌 일찍이 이 의논을 보지 않으셨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정수하고 전일하여 진실로 중도를 지켜서 강기를 숙정(肅整)하소서.
여섯째, 붕당을 깨는 것입니다.
생명을 해치는 방도가 하나뿐은 아니나 주색을 좋아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고, 망국하는 방도가 하나뿐은 아니나 붕당이 있는 나라는 반드시 멸망합니다.
우리나라의 붕당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거니와,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날로 심하고 달로 성해 갑니다.
둘에서 서넛이 되고 서넛에서 대여섯이 되었는데 자기에게 붙는 자는 흠을 숨기고 자기와 뜻을 달리하는 자는 흠을 들춥니다.
좁은 나라에 인재가 모자라는데 오륙분의 일만을 쓴다면 어느 겨를에 가려서 벼슬에 맞는 인물을 얻겠습니까?
붕당으로 말하면 피차에 본디 선악의 구별이 없으나 사람으로 보면 피차에 다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섞여 있습니다.
착한 사람이 없는 붕당이 없고 어리석은 사람이 없는 붕당이 없는데 이른바 착한 사람은 잠시 습속을 따르더라도 내심으로는 실로 기뻐하지 않습니다. 국가에서 능히 현량(賢良)을 임용하여 공도(公道)를 넓히고, 과장(科場)에서는 오직 글 잘하는 사람을 뽑고, 벼슬길에는 오직 재능있는 사람을 가리는 한편 죄가 있으면 신구(伸救)하는 자가 많더라도 반드시 죄주고, 착하면 배격하는 자가 많더라도 반드시 등용하여 세월을 두고 지속한다면 붕당에 이로운 것이 없어질 것이고, 이로운 것이 없어지고 나면 누가 그것을 즐겨 하려 하겠습니까?
선비들은 오직 학문에 힘쓰고 벼슬하는 사람은 오직 스스로 닦기를 힘써서 사람마다 크게 변하여 모두가 전에 한 일을 부끄러워할 것이니 상을 준다 해도 붕당을 하지않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이를 생각하소서.
일곱째, 나라를 강하게 하는데에는 도가 있습니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무비(武備)의 날카로움을 가지고 천하에 위세를 떨치지 않는다’하고, 또 ‘인자(仁者)에게는 대적할 자가 없다’하고, 또 ‘임금이 백성에게 인정을 베풀어 형벌을 줄이고 부렴(賦斂)을 가볍게 하면, 깊이 밭갈고 잘 김매, 장자는 틈나는 날에 효제(孝悌)·충신(忠信)을 닦아 집에서는 부형을 섬기고 나가서는 장상(長上)을 섬겨서, 막대기를 가지고 진(秦)나라나 초(楚)나라의 견고한 갑옷과 날카로운 병기(兵器)를 쳐부술 수 있을 것이다’하였으니, 의미있는 말입니다.
예전부터 나라를 강하게 하는 도리를 논한 것으로 이보다 나은 것이 있겠습니까?《역경(易經)》사(師)괘에 이르기를 ‘사(師)는 정(貞)하니 장인(丈人)이면 길(吉)하다’하였습니다.
장인이란 재덕(才德)이 겸전(兼全)한 사람을 말합니다.
대개 군사를 거느리는 자는 반드시 장인이라야 길하다는 것입니다.
대저 군사라는 것은 평소에 나라를 지키고 변란에 임하여 적을 막으므로 참으로 없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傳)에 이르기를 ‘군사는 불과 같으니 그치지않으면 스스로 불타게 된다’하였고, 두목(杜牧)이 말하기를 ‘군사가 밖에 있으면 반역하고 안에 있으면 찬탈한다’하였는데, 이것은 다 지극히 이치에 맞는 말이니, 매우 두렵게 여겨야 하고 매우 삼가야 합니다.
가을 능행(陵幸)때에 신이 보건대 호가(扈駕)한 백료(百僚)와 각종 군병(軍兵)이 매우 정제(整齊)되지 못하였으니, 사마(司馬)647)의 기율이 엄숙하지 못한 것을 알 만합니다.
많을수록 더욱 잘 처리하는 사람을 얻어서 거느리게 하지못한다면, 경중(京中)의 상비군은 오히려 많은 것이 걱정이지 적은 것이 걱정이 아닙니다.
또 농부 1백명이 한 명의 군사의 늠료(廩料)를 대지못하니, 군사가 많고 보면 국력이 먼저 소모될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군사 늘리기를 힘쓰지말고 장인 얻기를 힘쓰소서.
또 기보(畿輔)에서 군사를 거느리는 사람은 신중히 가려야하고 서방·남북·북방의 방어도 장인에게 맡기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혹 변이라도 있게되면 그 의지할 바가 어떠하겠습니까?
《서경》에 이르기를 ‘네 융복(戎服)과 병기(兵器)를 잘 닦으라’하였으니,
융복과 병기도 본디 닦지않을 수 없으나, 이것은 또한 말단의 일인데 어찌 일삼을 것이야 있겠습니까? 갑옷 만드는 일을 도로 멈추고 병거(兵車)를 수리하는 일을 곧 그만둔 것은 모두 잘하였거니와, 마지막에 기교를 부려 버티는 것은 처음에 서투르나마 계책을 세우는 것만 못합니다.
신은 당초에 이것을 주장한 자가 혹 삼시충(三尸蟲)648)의 꾐을 받았을 듯한데, 삼시가 몰래 참소하였다면 그 삼시가 아무 의도없이 한 것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 시(尸)가 혹 아직 있다면 경계하지않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대개 상비(常備)하는 물건은 본디 닦아야 하겠으나, 해당 벼슬에 적격자를 얻는다면 직분 안의 일이므로 절로 잘 할 것입니다.
맹자가 말하기를 ‘큰 나라로 작은 나라를 섬기는 자는 천리(天理)를 즐기는 자이며, 작은 나라로 큰 나라를 섬기는 자는 천리를 두려워하는 자이다.
천리를 즐기는 자는 천하를 보전하고 천리를 두려워하는 자는 나라를 보전한다’하였습니다.
이것도 나라를 강하게 하는 지극한 계책인데, 탕왕(湯王)과 문왕(文王)이 끝까지 행한 것에서 또한 볼 수 있습니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이를 생각하소서.
여덟째, 학문에 들어가는데에는 요령이 있습니다.
옛사람이 학문하는 것은 대개 다 자신에게 절실하게 하였으니, 자기에게 절실하게 하는 것이 곧 학문하는 요령입니다.
자신에게 절실하지않으면 성경(聖經)·현전(賢傳)이 한 마당 이야기가 되고 말 것입니다.
전하의 뛰어난 자질로 학문하는 것이 부지런하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마는, 임어하신 지 4년이 되어도 아직 정치하는 요령을 얻지못하셨으니, 전하께서 학문하실 때에 혹 자신에게 절실히 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신에게 절실하게 살펴보면 수신(修身)하는 대법(大法)은 《소학(小學)》한 책에 거의 다 있고, 나라를 다스리는 대도(大道)는《중용(中庸)》·《대학(大學)》두 책이면 족합니다.
《중용》안에서 구경장(九經章)이 가장 절실한데 구경장 안에서도 ‘정치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는 한 가지가 더욱이 절실하고, 《대학》안에서 혈구장(絜矩章)이 가장 절실한데 혈구장 안에서도 진서(秦誓) 이하의 세 글이 더욱 절실합니다.
여기에서 얻는 것이 있다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과 같이 쉬울 것입니다.
한광무제(漢光武帝)는《상서(尙書)》를 배워 대의(大義)를 통하고서 옛것을 다시 회복하고 자신이 태평을 이루었습니다.
대개 등우(鄧禹)가 ‘영웅을 맞아들이고 민심을 기쁘게 하기를 힘쓰라’는 말을 하자 문득 첫째가는 사람이라 생각하여 늘 머물러 두고 함께 계획하였으니, 이는《상서》에 있는 ‘스스로 스승을 얻는 자는 임금노릇 할 수 있다’는 뜻을 쓴 것입니다.
경감(耿弇)·풍이(馮異)를 얻어 장수로 삼아서 천하를 평정하였으니, 이는《상서》에 있는 ‘여상(呂尙)을 시켜 목야(牧野)에서 무용을 떨치게 하였다’는 뜻을 쓴 것입니다.
그 밖에 《서경》에 부합하는 일을 어찌 죄다 거론할 수 있겠습니까?
광무제가 58편(篇)의 뜻에 정숙(精熟)하지 못하더라도 자신에게 절실한 것을 살펴서 그 가장 중요한 것을 뽑아 자신에게 적용하였으므로 그 효험이 이러하였습니다.
전하께서 바야흐로《서경》을 읽으시므로 신이 광무제의 일을 말하여 전하께서 본뜨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아, 예전에 태갑(太甲)이 이윤(伊尹)의 가르침을 받아 능히 윤덕(允德)을 끝내 지켰고, 고종(高宗)이 감반(甘盤)·부열(傅說)의 가르침을 받아 은(殷)나라의 사업을 중흥하였으니, 학문은 사람을 가까이하는 것보다 편리한 것이 없다는 것이 어찌 거짓말이겠습니까?
사람을 가까이할 줄 아는 것이 또한 학문하는 요령입니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끝내 늘 학문에 힘쓰시되 학문하는 요령이 자신에게 절실히 함과 사람을 가까이하는 데에 있다는 것을 잘 생각하소서.
신이 아뢴 것은 대개 임금의 양강(陽剛)한 덕과 국사를 도모하기에 앞서 스스로 다스리는 도리를 전편의 대지(大旨)로 삼았으니, 지금 백성을 안정시키고 하늘과 덕을 짝하며 덕을 닦고 허물을 살펴 재앙을 그치게 하는 도리에 이보다 더할 것이 다시 있겠습니까?”하니,
답하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대경(大經)·대법(大法)이 모두 여기에 있는데 말마다 절실하고 글자마다 간절하니 두세 번 읽어도 그칠 줄 모르겠다.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이 말에 넘치니 매우 감탄한다.
내가 불민하기는 하나 가슴에 간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였다.
이때 이변이 거듭 나타나서 인심이 어수선하고 상도 의구하였는데, 윤선도가 상의 뜻에 영합하여 예삐보이려 하였으나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마침 직언을 구하는 분부에 음이 성하고 양이 희미하여 아래에서 위를 엄폐한다는 하교가 있자 즉시 상소하여 시무(時務)라 칭하면서 실은 상의 뜻을 몰래 흔들고 상의 귀를 어지럽히려 하였다.
그 임금의 마음을 헤아려 흉악하고 교활한 계략을 성취하려는 것이 너무도 분명하였으나 상만이 이를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도타운 비답을 내려 장려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다 개탄하였다.
註643]구관(九官):국정을 맡은 아홉 벼슬. 곧 사공(司空)·후직(后稷)·사도(司徒)·사(士)·공공(共工)·우(虞)·질종(秩宗)·전악(典樂)·납언(納言).註644]사흉(四凶):순(舜)임금 때에 처벌된 네 악인. 곧 공공(共工)·환두(驩兜)·삼묘(三苗)·곤(鯀).《서경(書經)》순전(舜典).註645]기정(奇正):기병(奇兵)·정병(正兵), 혹은 기습(奇襲)·정공(正攻).註646]관반내화(官反內貨):관은 관의 위세로 죄를 가감하는 것, 반은 은혜·원수의 사사로운 정때문에 죄를 가감하여 갚는 것, 내는 내알(內謁)로 곧 궁녀가 임금의 총애를 믿고 청탁하는 것, 화는 재화로 뇌물을 써서 청탁하는 것.《서경(書經)》여형(呂刑).註647]사마(司馬):병조(兵曹).註648]삼시충(三尸蟲):도가(道家)에서 말하는 사람 뱃속에 있다는 세 마리 벌레.
○禮曹參議尹善道上疏:
其一曰畏天。 《書》曰: “予造天役, 遺大投, 艱于朕身。” 役猶孟子所謂, 人役之役也。 人君卽是天之役, 則其敢一毫不順於天乎, 天卽理也, 順於理, 則順於天矣。 且人君事天, 如子之事父, 而惟孝色難天有何色可察, 《洪範》言曰: “肅, 時雨若; 曰乂, 時暘若, 曰哲, 時燠若; 曰謀, 時寒若; 曰聖, 時風若; 曰狂, 恒雨若; 曰僭, 恒暘若; 曰豫, 恒燠若; 曰急, 恒寒若; 曰蒙, 恒風若。” 雨暘燠寒風皆時, 則可以占我之能順乎天, 而天以休色應之也; 雨暘燠寒風皆恒, 則可以占我之不能順乎天, 而天以咎色應之也。 今歲秋冬, 日候過暖, 此卽所謂恒燠, 而冬霧、冬霖、冬雷, 皆燠之致也。 無乃聖朝有豫之疵歟, 《蔡傳》解豫曰怠, 而所謂豫者, 非徒怠之謂也, 姑息偸安, 優游不斷, 皆豫也, 而郭公之善善而不能用, 惡惡而不能去, 無非豫也。 伏願聖明, 念之哉。 其二曰治心。 堯之命舜曰: “天之曆數在爾躬, 允執厥中。 四海困窮, 天祿永終。” 舜之命禹曰: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至哉言乎! 帝王治心之法, 舍是何求, 然堯之命舜, 纔曰曆數在爾躬, 而旋曰天祿永終, 何也, 蓋亦天難諶命, 靡常之意也。 然則人君不能執中, 而可以保有國家乎, 舜之命禹, 復益之以三言者, 何也, 蓋不精則無以察形氣之私, 不一則無以守本心之正。 然則人君不能精一, 而可以允執厥中乎, 嗚呼! 堯之光四表, 格上下, 允釐百工, 庶績咸熙; 舜之命九官, 罪四凶, 重華協帝, 四海戴功, 無非精一之效也。 後世人主, 於政治則乍賢乍庸, 於邪正則乍明乍暗, 衰微接迹, 亂亡相尋者, 無非不能精一之故也。 然則精一之學, 其可忽乎, 伏願聖明, 念之哉。 其三曰辨人材。 孔子曰: “爲政在人。” 《書》曰: “惟后非賢, 罔乂。” 古今天下, 安有不得人, 而致治者也, 然知人則哲, 惟帝其難。 以賢爲邪, 以邪爲賢; 以智爲愚, 以愚爲智, 此乃有國家者之通患也。 然則爲人君者, 其可不以辨人材爲急先務乎, 通經知道, 納誨格非者, 可置經幄; 出納惟允, 補闕拾遺者, 可領尙書; 知人而至公者, 可使掌銓; 能文而至公者, 可使掌試; 學明德尊而善誨者, 可使敷敎; 多聞博識而達理者, 可使典禮; 承宣惠政而明黜陟者, 可使方面; 平徭薄賦而善撫字者, 可任牧民; 備義勇、奇正而臨事而懼, 好謀而成者, 可使主兵; 絶官反內貨而明愼敬忌, 具嚴天威者, 可使主刑; 有勿欺之直, 而能糾謬者, 可居臺閣; 知均賦之道, 而不聚斂者, 可理財用。 如此等人材, 得而任之, 則殿下可以垂衣而治, 高拱無憂矣。 嗚呼! 乏材之歎, 衰世常談, 殿下亦以爲, 世無其人歟, 然古之人君, 未嘗有求賢如渴, 而不得賢者矣。 自是殿下求之不誠, 豈有乏賢之世也, 第眞知其人誠難, 而孔子曰: “取人以身, 修身爾。” 殿下之修身爾, 果已至矣, 則人之有道, 何難察識, 執柯伐柯, 其則異乎, 伏願聖明, 念之哉。 其四曰明賞罰。 夫賞罰者, 所以勸善懲惡, 薦賢者賞之可也, 蔽賢者罰之可也; 爲善者賞之可也, 爲惡者罰之可也。 忠君者賞之可也, 負國者罰之可也; 直者賞之可也; 詐者罰之可也, 公者賞之可也, 私者罰之可也, 盡職者賞之可也; 曠職者罰之可也; 利國者賞之可也, 封己者罰之可也; 愛物者賞之可也, 厲民者罰之可也; 同寅協恭者賞之可也, 護黨代異者罰之可也。 然賞之罰之, 宜公宜均, 賞則須愼, 罰則必行, 而賞罰之權, 宜在於上, 不宜在於下。 伏願聖明,念之哉。 其五曰振綱紀。 人材旣辨, 賞罰旣明, 則綱紀之振, 在於措置中, 而不復費力矣。 良法美意, 布在方冊; 金科玉條, 昭揭令甲。 伏願聖明, 弛者張之, 墜者擧之; 頹者植之, 微者明之, 常以經綸天下之大經爲務也。 且乾綱紀紐, 政權在下, 則無以爲國, 亦曰殆哉。 令不行而禁不止, 則綱紀何由而振乎, 《洪範》曰: “惟辟作福作威。” 厥惟旨哉。 天心主於仁愛萬物, 而時復振之以風雷, 肅之以霜雪, 人君體天之道, 仁義竝行, 則豈但袖手傍觀而已乎, 我之所爲, 果出於喜怒之私, 則克己窒慾, 從諫如流可也; 我之所爲, 果出於義理之正, 則豈可撓於浮議, 屈於胥動也, 人主陽剛之道, 不當如是也。 仲長統見涿郡崔湜所著書曰: “人主宜寫一通, 置之座隅。” 殿下豈不曾見此議論也, 伏願殿下, 惟精惟一, 允執厥中, 而振肅綱紀也。 其六曰破朋黨。 傷生之道非一, 而好酒色之人必死; 亡國之道非一, 而有朋黨之國必滅。 我朝朋黨, 其來久矣, 而至于今日, 日甚月盛。 自二而爲三四, 自三四而爲五六, 附己者掩瑕匿疵, 異己者吹毛洗瘢。 偏小之邦, 人才不敷, 而只以五六分之一爲用, 則何暇揀選, 而官得其人乎, 以黨而論, 則彼此固無善惡之殊, 而以人而觀, 則彼此皆有賢愚之雜。 無黨不有善人, 無黨不有愚人, 所謂善人, 雖姑隨俗, 而於其心, 固已不悅矣。 國家若能任用賢良, 恢張公道, 而場屋惟文是取, 官途惟材是擇, 有罪則伸救者雖衆而必科, 有善則排擊者雖多而必用, 持之以歲月, 則朋黨無所利也, 旣無所利, 則誰肯爲之, 士子惟務力學, 官人惟務自修, 人人丕變, 莫不羞前之爲, 雖賞之, 而不爲朋黨矣。 伏願聖明, 念之哉。 其七曰强國有道。 孟子曰: “威天下, 不以兵革之利。” 又曰: “仁者無敵。” 又曰: “王如施仁政於民, 省刑罰, 薄賦斂, 深耕易耨, 壯者以暇日修其孝悌忠信, 入以事其父兄, 出以事其長上, 可使制梃以撻秦、楚之堅甲利兵矣。” 旨哉言乎! 自古論强國之道, 有過於此者乎, 《易》師卦曰: “師, 貞, 丈人, 吉。” 丈人, 才德兼全之稱也。 蓋帥師者, 必丈人然後, 乃爲吉也。 夫兵者, 居常而衛國, 臨亂而禦敵, 誠不可無者也。 然《傳》曰: “兵猶火也, 不戢, 將自焚。” 杜牧曰: “兵在外則叛, 在內則簒。” 此皆至理之言, 深可畏也, 極可愼也。 秋間陵幸時, 臣觀, 扈駕百僚及諸色軍兵, 不甚整齊, 司馬紀律之不肅可知也。 如不得多多益辦之人而帥之, 則京中常在之兵, 猶患其多, 而不患其少。 且農夫百不能養一兵廩, 軍旣多, 則國力先耗。 願殿下, 勿務益兵, 務得丈人。 且畿輔將兵之人, 不可不愼揀, 西、南、北鎖鑰, 亦不可不付於丈人。 脫有緩急, 其所倚仗何如也。 《書》曰: “克詰爾戎兵。” 戎服兵器, 固不可不治, 而是亦末務, 何足爲事, 犀革之役還停, 俴收之制卽寢, 俱是得矣, 而巧持於末, 不若拙計於初。 臣恐當初主張是者, 或被三尸之誘, 而尸之陰訴, 則必不言無心之發也。 其尸若或尙在, 則不可不戒也。 大槪常備之物, 固在應修, 而官得其人, 則職分內事, 自能爲之矣。 孟子曰: “以大事小者, 樂天者也; 以小事大者, 畏天者也。 樂天者, 保天下; 畏天者, 保其國。” 此亦强國之至計也, 而湯、文終始, 又可觀矣。 伏願聖明, 念之哉。 其八曰典學有要。 古人爲學, 蓋皆切己, 切己乃爲學之要也。 如不切己, 是將聖經、賢傳爲一場說話而已也。 以殿下卓越之資, 學問之非不勤矣, 而臨御四年, 尙未得爲政之要, 無乃殿下之爲學, 或不切己歟, 看得切己, 則修身大法, 《小學》一部儘多, 爲國大道, 《庸》、《學》二書足矣。 《中庸》之內, 九經章最切, 而九經之內, 爲政在人一款尤切; 《大學》之內, 絜矩章最切, 而絜矩之內, 《秦誓》以下三文尤切。 有得乎此, 則治國如反掌矣。 漢光武受《尙書》, 通大義, 而重恢舊物, 身致太平。 蓋聞鄧禹延攬英雄, 務悅民心之語, 而便以爲第一人, 常令止宿計劃, 是用《書》: “能自得師者王。” 之意也。 得耿弇、馮異爲將, 而平定天下, 是用《書》 “使呂尙鷹揚牧野。” 之意也。 其他合於《書經》者, 何可盡數, 光武雖不精熟於五十八篇之旨, 而看得切己, 撮其宗要, 而致用於身, 故其效如此。 殿下方讀《書經》, 故臣爲言光武之事, 而願殿下效之也。 嗚呼! 昔者太甲受伊尹之訓, 而克終允德; 高宗受甘盤、傅說之訓, 而中興殷業, 學莫便於近人, 豈虛語也哉, 是知近人, 亦爲學之要也。 伏願聖明, 終始典于學, 而克念爲學之要, 在於切己與近人也。 臣之所陳, 蓋以爲, 君主陽剛之德、謀國先自治之道, 爲一篇大旨, 則卽今安民配天、修省弭災之道, 更有加於此乎,
答曰: “爲國之大經大法, 具在於此, 言言切實, 字字懃懇, 再三讀之, 而不知止也。 憂愛之誠, 溢於辭表, 深用感歎。 予雖不敏, 可不服膺,” 時, 變異疊見, 人心洶洶, 上亦疑懼, 善道欲於此時, 迎合上意, 以求媚而未得間也。 適會求言之旨, 有陰盛陽微, 爲下蔽上之敎, 乃卽陳疏, 稱以時務, 而實欲潛撓上志, 欲眩亂天聽。 其所以揣摩君上, 濟以兇狡之計者, 灼然明甚, 而獨上未之覺也, 反賜優批以奬之, 人皆慨歎。
효종 16권, 7년(1656 병신/청순치(順治)13년) 3월 15일(갑오) 2번째기사
수찬 홍위가 재앙을 막기 위한 방책으로 민심을 진정시키는 일등을 아뢰다
수찬 홍위(洪葳)가 상소하기를,
“아, 하늘이 우리나라의 운명을 끊으려는 것입니까? 어쩌면 그리도 혹독하게 변고를 보이십니까? 또 우리 전하를 경동(警動)시키려는 것입니까? 어쩌면 그리도 부지런히 훈계하며 꾸짖으십니까?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고 달을 관통하는 것은 매우 참혹한 변고입니다.
지난 시대의 일은 요원하니 언급할 겨를이 없고 우선 눈과 귀로 직접 보고 들은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징조가 어긋나지 않음은 마치 그림자나 메아리와 같으니, 이에 한 가지라도 있으면 나라를 위태롭게 하거나 망하게 할 수 있는데 더구나 두 가지가 겸해서 나타난 것이겠으며 몇 개월 안에 거듭 발생한 경우이겠습니까?
저 도성의 어리석은 백성들이 무슨 지식이 있겠습니까마는, 또한 모두 놀라 얼굴빛이 달라지고 기운을 잃어 모두들 큰 혼란이 박두했다고 말하니,
천변(天變)이 두려운 것을 여기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신의 생각으로는 우리 임금과 우리 정승도 또한 반드시 크게 경동하고 크게 진작하여 천재(天災)를 그치게 하고 화란을 막을 수 있는 대책을 구해야 할 것이라 여겨지는데, 오늘 내일 날마다 귀를 기울여도 들리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요즘 훌륭한 사람을 맞아 면대하여 매번 해가 저물 때까지 이르니, 반드시 자문하고 계획한 바가 있었을 것인데, 연석(筵席)의 말이 비밀스러워서 신이 듣지 못한 것입니까. 꾀하는 것은 안에 있고 베푸는 것은 밖에 있으니 밖에 드러나는 것을 말미암아 안을 점쳐 보면, 크게 경동하고 크게 진작함이 없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나라의 형세로 오늘날과 같은 비상한 변고를 만났으니 위태로운 화가 조석간에 박두해 있습니다.
비록 다시 군신 상하가 머리털을 손질할 틈도 없이 소매를 걷어붙이고서 마치 불에 타는 자를 구원하고 물에 빠진 자를 건져주는 것처럼 급급히 하여도 오히려 구제하지 못할까 두려운데, 지금은 낮은 목소리와 느린 걸음으로 태만스레 세월만 보내어 평상시 일이 없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으니, 하루아침에 갑자기 큰 변고가 뜻밖에 생기면 3백년의 종사(宗社)가 장차 어떤 지경에 이르게 되겠습니까?
말과 생각이 이에 이르르니 통곡하고 싶을 뿐인데 또 감히 못합니다.
전하께서는 오늘날의 시세가 비록 다시 위급해지더라도 오히려 이끌어 개선하여 지탱할 수 있다고 여겨 구차히 세월만 보내시는 것입니까?
시대가 망극하고 도(道)가 궁해지는 것은 기수(氣數)에 관계된 것이니 장차 어찌할 수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까? 아니면 병들지않은 곳이 없고 일마다 폐단이 있어 동쪽을 지탱하면 서쪽이 기울고 옷깃을 잡아당기면 팔뚝이 보여 망연히 좋은 계책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까?
아, 하늘의 노여움이 지극하고 백성들의 마음이 이미 떠났는데도 오히려 무사 안일하게 지내면 고금 천하에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었습니다.
기수(氣數)는 하늘에 있고 인사(人事)는 나에게 달려 있는데 나에게 있는 것을 닦지 않고 하늘에 있는 기수에 핑계를 대는 것이 될 일이겠습니까?
잘할 수 없는 시기란 없고 구원할 수 없는 폐단이란 없는 것인데, 만약 오늘날 구원할 수 있는 계책이 없다고 한다면 신 또한 가슴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말하는 자들이 모두 ‘성상께서 재변을 만난 이래로 두려워하고 수성(修省)함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으니, 이는 하늘의 뜻에 순응하여 재변을 소멸할 수 있는 것이다’고 합니다.
이 말이 참으로 옳긴 하지만 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만약 임금이 안으로 주색(酒色)에 빠지고 밖으로 말을 달리며 사냥하는 데 빠져 정사에 태만하고 행동이 나빠져 허물이 드러나면 하늘이 진노하여 변괴를 보이고, 이에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몸을 살피고 행실을 고치면 하늘이 기뻐하여 재앙이 그치기 때문입니다.
지금 전하에게는 이와 같은 몇 가지 어그러진 행동이 없을 것이니, 오늘날의 변괴가 모두 꼭 전하의 한 몸에서 말미암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 만든 까닭이 있을 것인데, 이에 관하여 생각하지 않고 살피지 않으면서 깊숙한 궁궐에 팔짱을 끼고 단정히 앉아 한갓 경계하고 단속하기를 마치 재계(齋戒)하고 기도하는 자처럼 하여 속수무책으로 앉아있기만 한다면 또한 오늘날의 재앙을 구제하는 도가 아닐 것입니다.
신은 진실로 어리석고 어두우니 어찌 감히 무엇이 재앙을 일으켰고 구제할 수 있는 계책이 무엇인지 알겠습니까? 다만 시험삼아 한 가지 터득한 것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날 재앙을 불러 일으킨 것은 민심의 원망임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니, 재앙을 구제하는 계책도 민심을 위로하고 기쁘게 해주는 데 있을 뿐입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견고해야 나라가 편안하다’고 하였고, 또 ‘하늘이 보고 듣는 것은 우리 백성이 보고 듣는 것으로부터 한다’고 하였으며, 또 ‘백성들이 하고자 하는 바는 하늘이 반드시 따른다’고 하였으니, 이와 같은 유로서 서책에 나타나 있는 것을 낱낱이 다 열거하기 어렵습니다.
또 역대(歷代)를 상고해 보건대 민심을 얻고서 망한 자와 민심을 잃고서 흥한 자는 없으니, 이는 실로 나라를 다스리는 큰 근본이고 선치(善治)를 말하는 자의 상법(常法)입니다. 오늘날의 일로 말하면 이것이 더욱 급선무가 되니 진실로 이를 버리고 다른 것을 말할 수 없습니다.
아, 백성의 쇠잔함이 오늘날에 이르러 극심해졌습니다.
비록 생기(生氣)를 머금었으나 실은 마르고 썩은 나무와 같으니, 나라가 다만 그 형체를 묶어놓았으나 그 마음은 이미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오직 그 괴롭고 궁핍한 상황이 임금의 면류(冕旒)에 들어가지 않고 근심과 탄식하는 소리가 임금의 주광(黈纊)을 뚫지못하니, 깊숙한 구중궁궐에서 어떻게 알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반드시 나는 일찍이 백성을 괴롭히지 않았는데 백성들은 어찌하여 괴로우며, 일찍이 백성을 침탈하지 않았는데 백성들은 어찌하여 곤궁한가라고 여기시고는, 또한 반드시 말하는 자를 의심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래된 폐단과 여러 병폐가 마치 고질이 몸을 두르고 있는 듯한데, 하나의 선정(善政)을 발휘하여 하나의 폐단을 고쳤다는 소리는 듣지못하였으며 간혹 시행하는 것은 대부분 백성들의 마음에 거슬리니, 어떻게 곤궁하고 또 괴롭지 않겠습니까?
어찌하여 나라에서 나라의 근본을 도외시하고 일찍이 구원하지 않습니까?
추쇄(推刷)의 조처는 그만둘 수 없는 것이지만 폐단을 구제할 적당한 때를 놓치게 될까 애석합니다. 그 이른바 근심스러워하고 탄식한다는 것은 흩어진 무리가 정돈을 괴롭게 여기는 것에 불과하니, 그 정상도 또한 얄밉습니다. 그러나 편안하려 하고 노고를 싫어하는 것은 백성의 심정이니, 덕으로 교화시킬 수는 있어도 힘으로 복종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왕(先王)들이 백성을 다스릴 때에 그 마음을 따라 잘 다스린 자는 있어도 그 마음을 거스리고 일을 잘한 자가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더구나 이른바 누락되었다는 자도 또한 형적(形跡)을 숨겨 교화 밖의 사람이 된 경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양역(良役)에 투입된 경우는 활을 차고 창을 잡으며 혹은 항오(行伍)에 편성되었고, 사천(私賤)이 된 경우도 또한 오히려 곡식과 옷감을 내어 그 윗사람을 섬기니, 명목은 비록 다르지만 똑같이 우리 백성입니다.
초(楚)나라 사람의 활을 찾게 되든 잃어버리든 어찌 물을 필요가 있겠습니까?934) 비록 그 몸을 얻었으나 실로 그 마음을 잃었으니, 뒷날 질시하는 백성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미 이루어진 일이라 말하지 않아야 하니 지금 운운할 필요는 없으나,
이후로는 잘 처리하여 조금이라도 그 마음을 위로해야 할 것입니다.
노비(奴婢)의 공포(貢布)는 비록 2필(匹)이라고 하나 후목(後木)·인정(人情)·노가(路價)등 조목은 그 숫자가 또 원공(元貢)보다 갑절이나 되니, 이 무리들이 감내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지금은 부자 형제가 모두 수괄(搜括)을 당하고 사람이 있으면 공포(貢布)가 있어 한 집에서 바치는 바가 지난날에 비해 장차 몇 배에 이를 것이니, 원망하는 마음으로 감내하기 어려운 부역을 당한다면 오늘날 쇄출한 사람들이 다시 지난 날처럼 도망가 흩어질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미 추쇄하였는데 다시 흩어지면 도리어 추쇄하지 않은 것만도 못합니다. 지금 만약 원공(元貢)에서 특별히 절반을 삭감하여 항식(恒式)으로 삼는다면 그 마음을 위로하여 그 힘을 펴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말하는 자가 혹은 ‘쇄출하여 공포(貢布)를 징수하는 것은 나라의 수요에 공급하기 위한 것인데 만약 절반을 삭감하면 쇄출하는 본뜻이 어디에 있겠는가? 비록 삭감하게 하더라도 여러 도의 추쇄가 아직까지 끝나지 않은 경우가 있는데 결말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공포를 삭감해주면 일의 체모를 손상시킴이 있을 것이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신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쇄출한 자가 안정되고 원망하던 자가 변하여 기쁜 마음을 갖게 된다면 나라의 소득이 많을 것입니다. 별것 아닌 공포가 어찌 왕도 정치를 돕거나 상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팔도(八道)에서 새로 쇄출한 숫자는 옛날의 액수에 비해 반드시 몇 갑절이 될 것이니, 비록 절반을 삭감하더라도 반드시 옛날보다 많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한결 같이 가혹하게 거두어들여 다시 몰아 흩어지게 한다면 그때에 잃는 바가 어찌 절반이 준 것 정도일 뿐이겠습니까?
불행하게도 혹 흩어지고 무너지는 변고가 있으면 많든 적든 장차 어느 곳에 독촉하겠습니까? 삭감하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만 삭감한다면 어찌 결말이 나기를 기다리겠습니까? 나라의 맥은 민심에 매여 있으니, 하루를 원망하면 10분의 1의 국맥을 손상하는 것이고 이틀을 원망하면 10분의 2의 국맥을 손상시키는 것입니다. 만약 세월이 경과한 후의 결말을 기다린다면 다시 몇 분의 국맥을 손상시킬 것이니, 반드시 백성의 원망이 점점 깊어지고 국맥이 거듭 손상됨을 기다린 뒤에 삭감할 수 있다는 것은 통달한 의논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포보(砲保)의 역(役)이 가장 괴롭고 무거우니, 양민(良民)이 흩어지고 이웃과 친족이 피해를 받는 것은 모두 이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전후로 시무(時務)를 논하는 자 가운데 이를 말하지 않는 이가 없는데, 지금 변통하지 못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유(先儒)가 이르기를 ‘크게 변혁하면 크게 이롭고 작게 변혁하면 작게 이롭다’고 하였으니, 크게 변혁하여 크게 이롭게 하는 것에 대해서는 비록 경솔히 논할 수 없다하더라도 어찌 작게 변혁하여 우선 눈앞의 위급함을 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1년에 납부하는 바는 베가 3필이니, 그 1필을 삭감하면 그 수가 3백동(同)쯤 된다고 합니다.
지금 만약 먼저 내탕(內帑)에 저장한 것을 꺼내고 다음으로는 각 아문에 저축한 것을 꺼내어 삭감한 숫자를 채워, 1년을 지탱할 만하면 1년을 삭감하고 2년을 지탱할 만하면 2년을 삭감하며 혹 3년이든 혹 4년이든 그 재력을 보아 그 햇수를 가감한다면, 삭감하는 바는 비록 적지만 민심이 크게 기뻐할 것이고 나라가 잃는 바는 재물이지만 얻는 바는 백성이니, 그 이익되는 바가 어찌 적겠습니까?
지금 말하는 자가 혹은 ‘변변치 못한 조그마한 은혜는 민심을 크게 위로하지 못하여 다만 임시방편으로서 계속하기 어려운 방법이 될 것이며, 각 아문에 저축한 바도 또한 뜻밖의 수요에 대비한 것인데 어찌 하루아침에 다 없앨 수 있겠는가?’라고 하는데, 어리석은 신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여깁니다.
빌어먹는 사람이 도로에 쓰러져서 배가 고파도 먹지 못하고 목이 말라도 마시지 못하고 있을 때에 한 그릇의 밥과 한 사발의 국을 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반드시 기뻐하고 마음으로 감동하여 죽을 때까지 잊지못할 것입니다. 한 그릇의 밥과 한 그릇의 국이 큰 은혜가 아닌데도 이와 같은 것은 바라는 바가 큰 것에 있지 않았고 베풀어준 은혜가 그 위급함을 구제해 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백성들의 피곤함과 고달픔은 빌어먹는 사람의 굶주림이나 갈증보다 더 심하니, 조그마한 은혜가 백성들을 크게 위로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 큰 은혜를 이미 베풀지 못하고 조그마한 은혜를 또 임시방편이라고 한다면 장차 백성들이 죽어가는 것을 앉아서 보고만 있고 구제하지않으려는 것입니까?
한문제(漢文帝) 시대에 천하가 태평하여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여 상하가 서로 도와줌을 기다리지 않았는데도 원년(元年)에 전조(田租)의 반을 삭감해 주고 또 12년에 조세의 반을 삭감해 주었으며 또 13년에 전조를 삭감하여 주었는데, 후세에 임시방편이라고 기롱하는 자가 있었다는 소리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23년 사이에 세금을 삭감해 준 것이 세 번이니, 어찌 반드시 해마다 삭감해 준 뒤에야 계속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비가 병든 자식을 간호할 때에 만약 먹고 싶어하는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울부짖으며 달려가 이웃에서 빌려 자식에게 주니, 어느 겨를에 임시방편이라거나 계속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을 하겠습니까?
임금이 백성에 대한 관계는 부모가 자식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구제할 만한 길이 있는데, 임시방편이다 계속하기 어렵다 핑계하여 끊어지려는 목숨을 구제하지 않는다면 백성의 부모가 된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또한 이른바 각 아문의 뜻밖의 수요라는 것도 오늘날 같은 때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장차 어느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까? 옆에서 얻어 들으니 태복시(太僕寺)에 저축한 은자(銀子)가 5만냥에 이르고 기타 훈련 도감·병조·상평청 등에 남은 숫자도 또한 적지않다고 합니다. 창고에 가득 채우고 쓸데없는 곳에 쌓아두어 태반이나 벌레와 쥐가 훼손하고 간사한 무리들이 훔쳐가는데, 이러한 때에 위급한 백성들을 구제하지 않고 반드시 병자년935)처럼 버리고 가 도적에게 싸다준 꼴이 된 뒤에야 뜻밖의 수요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백성이 잘 살고 나라가 편안하면 재물이 없는 것은 걱정할 것이 없고, 백성이 흩어지고 나라가 쓰러지면 비록 재물이 있다하더라도 어디에 쓰겠습니까? 신의 말도 또한 저축한 재물을 다 쓰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 문서를 상고하고 그 많고 적음을 헤아려 다만 3백동(同)의 숫자에 준하여 중지하자는 것입니다.
올해에 이와 같이 하고 내년에도 이와 같이 하며 그 내년에도 이와 같이 하면 그 출연(出捐)은 적지만 백성들이 혜택을 입는 것은 클 것입니다.
지금 폐단을 말하는 자는 반드시 영장(營將)을 거론하는데, 사전에 대비하지 않으면 갑작스런 사태에 대응하기 어렵고 군사를 훈련시키지 않으면 군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영장을 설치한 것이 어찌 폐단을 끼치고자 하여 그런 것이겠습니까? 오직 조정의 명령은 너무 엄하고도 급한데 받들어 행하는 신하 중에는 부적격자가 많아 오로지 독촉만을 일삼고 어루만질 줄은 모르기 때문에 군읍(郡邑)이 떠들썩하여 편안하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의 군사는 바로 농민일 뿐이고 농민의 일은 항상 바쁜 것이라고 합니다. 가을과 겨울 사이는 비록 농한기라고 하지만 낮에는 띠를 베고 밤에는 새끼를 꼬는 등 일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행장을 꾸리고 식량을 싸가지고서 도로에서 지치고 돌아왔다 다시 가느라 괴로워도 쉴 틈이 없습니다.
게다가 무기가 조금이라도 날카롭지 않고 군복이 조금이라도 선명하지 않으면 큰 곤장으로 벌을 주어 고칠 것을 독촉하니, 이에 혹은 소나 말을 전당잡히고 혹은 전답을 팔아 무기를 장만하고 군복을 만들고 있습니다.
항오(行伍)의 대열을 본다면 잘 단련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그 집들을 살펴보면 일정한 생업이 없고, 그 마음을 물어보면 윗사람들을 원망합니다.
무기는 그래도 괜찮지만 군복이 선명한 뒤에야 부릴 수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군사를 귀히 여기는 까닭은 위급할 때 그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평상시인데 크게 그 마음을 잃었으니 혹시라도 변란이 있으면 창을 거꾸로 들이대지 않는 것만도 다행일 텐데 어찌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싸움터에 나아가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치는 것을 바라겠습니까?
아, 연습은 참으로 폐할 수 없으나 또한 먼저 그 마음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그 마음을 얻을 수 있으면 기술이 비록 정밀하지 않더라도 오히려 내가 쓸 수 있지만 이미 그 마음을 잃었으면 기술이 정밀할수록 더욱 염려스러운 것이니 이해(利害)의 차이가 큽니다.
사람들이 모두 전하께서 생각을 기울여 행하려고 하시는 바에 대해서 비록 말해봐도 소용이 없다고 여겨 전하를 위하여 한 마디도 하려 하지 않습니다. 아, 오늘날 조정에 과연 자신을 위해 도모하듯 나라를 위해 도모하는 자가 있습니까?
의논하는 자들이 혹 ‘영장(營將)은 유해무익하다. 다만 이미 설치하였다가 곧바로 없애면 아이들 장난과 같아진다’고 하니, 어쩌면 그리도 말이 비루합니까? 다만 이해를 깊이 알지못하기 때문인 듯하니 진실로 혹 안다면 아이들 장난과 같아지는 것에 대해 무슨 걱정할 것이 있겠습니까?
한고조(漢高祖)가 6국(六國)의 후사를 세운 것은 당초 광생(狂生)936)의 말로 인하여 시행하게 된 것인데 곧바로 모신(謀臣)937)의 말로 인하여 파하였습니다. 6국의 후사를 세우는 것은 이 얼마만한 계책이며 얼마만한 큰일입니까? 그런데 인신(印信)을 새기고 인신을 없애는 데에 잠시도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이들 장난처럼 하였다고 8년간의 제업(帝業)을 허물하는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지금을 위하는 계책으로는, 영장을 혁파하고 군읍(郡邑)을 신칙하여 연습을 전담하게 하고 감사와 병사로 하여금 때때로 순시하여 그 잘잘못을 검열하고 그 공과 죄를 조사하게 한다면 오히려 성숙됨을 잃지않을 것이고 침해하는 피해가 없어질 것이니 이것이 상책입니다.
또 영장을 잘 선택하고 다시 절목(節目)을 정하여 한갓 연습시키는 것만을 일삼게 하지말고 무휼(撫恤)도 전담하게 하여, 만약 지난날처럼 독촉하고 침해하는 자가 있으면 관찰사가 즉시 사계(査啓)하여 죄를 논하고 정신차리도록 꾸짖는 기반을 삼는 것이 또한 차선책입니다.
신이 두 가지의 계책을 설정하여 말하는 것은 또한 구차스러운 듯합니다만, 군국(軍國)의 큰일은 백면서생(白面書生)이 경솔하게 논할 바가 아니니 또한 어찌 감히 천견(淺見)을 자신하고 전하께 억지로 권하는 것이겠습니까?
사사로운 걱정과 지나친 염려를 끝내 스스로 억누르지 못하고 전하께서 헤아려 행하시기를 기다리려는 것일 뿐입니다. 더구나 옛 사람 가운데에도 상중하(上中下) 세 가지 계책을 올린 자가 있었습니다. 이미 상책을 말했으면 중하책(中下策)이 없어야 당연하지만 오히려 이와 같이 한 것은 어찌 시세와 힘을 헤아려 부득이한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진실로 한가한 여가에 성상께서 깊이 유념하신다면 반드시 깨닫는 곳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 궁가의 입안(立案)에 따른 폐단으로 말하면 오늘날 원망을 쌓이게 한 하나의 큰 단서이니, 앞뒤로 이에 대해 말한 자를 이루 셀 수 없습니다.
지금 듣건대 호조에서 조사하여 혁파하려는 거조가 있다고 하니, 나쁜 습관을 개혁하고 폐단을 제거하는 것도 또한 시기가 있습니까?
어리석은 신의 생각으로는, 조정의 정령(政令)이 으레 착실하지 못하여 조사한다거나 혁파한다는 등의 일이 해마다 있지만 일이 지난 후에 사방을 돌아보면 거의 지난날과 같으니 차라리 거론하지 않을지언정 참으로 매번 유명 무실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라 여겨집니다.
명확히 조사하는 것은 유사(有司)에게 달려있고 결단하는 것은 전하께 달려 있으니, 이 또한 오늘날 상하가 염려해야 할 부분입니다.
또 세금을 면제하는 법으로 말하면 국법에 이미 정한 제도가 있고 또 등급이 있으니, 조종(祖宗)의 가법(家法)이 어찌 우애하고 사랑하며 돈독하고 질서있게 하는 도에 박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진실로 나라의 체제가 이와 같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전원(田園)이 나라안에 분포되어 빽빽하기가 주판알과 같은데 대부분 모두 세금이 없으니 일의 체모로 헤아려 보건대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일이 없는 태평시대에도 오히려 정한 제도가 있었는데 나라가 가난하고 백성이 궁핍한 지금에 이르러 조종조에도 없었던 법을 굳게 지키시겠습니까? 어리석은 신의 뜻으로는 여러 궁가의 세금 면제도 또한 모두 등급을 보아 규정을 만들고 한결같이 국법을 따라 공정하고 균일한 정치를 해야 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각 아문의 둔전(屯田)으로 말하면 당초부터 계하(啓下)가 없는 경우와 백성의 전답을 약탈한 경우를 조사해내어 바로잡자는 뜻을 일찍이 갑오년938) 겨울에 호조의 신하가 탑전에서 면대하여 진달하였고, 신도 그때에 또한 덧붙여 말하였습니다. 이미 성상의 분부를 받들어 조사하여 바로잡도록 하였는데, 지금까지 덮어두고 거행하지 않았습니다.
각 아문의 둔전은 실로 한 사람의 사적인 물건이 아닌데도 오히려 아깝게 여겨 지연시키면서 내리신 분부를 시행하려 하지않으니, 아, 오늘날의 조정에 진실로 집안을 걱정하듯이 나라를 걱정하는 자가 있습니까?
이런 말을 하게 되니 사람으로 하여금 한심스럽게 합니다. 또 이른바 궁가와 아문의 둔전(屯田)은 나라 안에 하나의 연못과 숲 같은 소굴이 되어 양민(良民)으로서 부역을 피하는 자들이 모두 모여 있는데 세금의 독촉이 미치지 않고 정역(丁役)의 점검이 이르지않아 한 해가 다하도록 편안히 앉아 있으니, 부역에 응하고 항오에 편입된 백성에 비해 보면 수고로움과 편안함의 차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땅에서 나는 곡식을 먹고 사는 자치고 누가 임금의 백성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혹은 수고롭고 혹은 편안하여 고르지 못함이 이와 같으니, 인심은 복종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고 나라도 또한 정책이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신의 뜻으로는 마땅히 주현(州縣)으로 하여금 세초(歲抄)할 때마다 점차로 찾아 검속하여 그 지방에 정착한 자를 우선으로 하여 군오(軍伍)에 보충하게 한다면 나라에는 떠도는 백성이 없을 것이고 군사의 숫자도 채울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조정이 한 번 재변을 만나면 반드시 심리(審理)를 시행하니, 심리하는 것은 원통함을 품고 있는 자를 위해서입니다. 원통한 자가 그것을 풀 수 있게 하는 것도 재변을 그치게 하는 하나의 방도인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조정 신하가 파산(罷散)된 것은 재변을 부른 것에 상관이 없고 또한 실형(失刑)한 장리(贓吏)도 이배(移配)되었으니 심리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입니다.
그 밖에 너그러이 놓아준 자들이 어떤 등속의 죄인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리석은 신은 원통함을 품은 자가 끝내 다 풀지 못할까 염려스럽습니다.
내수사에 진고(陳告)하는 길이 한번 열리자 주인을 배반하고 내수사로 투속한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는데, 그 주인으로서 쟁변(爭辯)하는 경우에 신원된 자는 적고 죄를 얻은 자는 많습니다. 이는 완전히 죄가 없는 자입니다. 그 사이에 비록 범법한 자가 있더라도, 또한 반드시 양처(良妻) 소생인 줄 알아 여러 해 동안 부리다가 하루아침에 잃어버리자 일어나 송사하여 끝내 압량(壓良)의 죄에 빠진 것이니, 이는 어리석은 백성으로서 용서할 만한 자입니다. 인정은 그다지 서로 틀리지 않은데 어찌 내수사의 노비를 훔쳐 자기 물건으로 점유하려는 자가 있겠습니까?
초야의 한미한 사람은 혹 권세 있는 집안에게 빼앗기더라도 오히려 감히 손을 쓰지 못하는데 더구나 감히 자기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내수사와 다투겠습니까? 대략 논한다면 죄를 얻어 원통함을 품은 경우가 10에 8, 9나 됩니다. 그 부모와 기약없이 이별하고서 그 처자를 데리고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딩굴며 굶주리고 고달파 스스로 보존하지 못하니, 그 원통함을 품고 울부짖는 것은 보고 듣기에도 비참합니다.
저 소민(小民)들은 무식하여 자신이 비록 죄가 있어도 이러한 지경에 이르면 또한 스스로 해명하지 못하여 근심과 한탄을 면치 못하는데, 더구나 죄가 없는 자이겠습니까? 지금 유죄와 무죄를 조사하고 경중(輕重)을 심리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문권을 가지고 변증(辨證)을 갖추어 맨 처음 송사할 때처럼 한 뒤에야 가능한데, 형세상 그렇게 할 수 없는 자가 있습니다.
어리석은 신의 뜻으로는 죄의 경중을 논하지말고 모두 깨끗이 씻어준다면 살리기 좋아하시는 전하의 덕이 아래에 흡족하고 원망하는 소리가 원근에 들리지 않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의논하는 자는 반드시, 신의 말이 도를 어기면서 명예를 구하는 것이어서 간사한 자를 좌절시키고 악한 자를 처단하는 정치에 크게 어긋난다고 할 것이나, 또한 그렇지 않은 바가 있습니다.
그 근원을 따져보면 죄가 없는 자는 많고 죄가 있는 자는 적어 경중(輕重)의 분별을 지금까지 밝히기 어려우니, 많은 자를 인하여 적은 자에게 미쳐야지 적은 자를 탈잡아 많은 자를 금고(禁錮)해서야 되겠습니까?
죄가 없는 자가 방면되더라도 또한 감동하여 기뻐할 것인데, 더구나 죄가 있는 자가 은혜를 입으면 기뻐하고 춤을 추며 죽어서도 은혜를 갚으려고 생각하는 것이 다시 어떠하겠습니까? 따스한 봄이 싹을 틔워주고 우로(雨露)가 적셔줌에 어찌 구구하게 좋은 나무와 나쁜 풀을 가리겠습니까?
더구나 죄없는 자를 죽이기보다는 차라리 상도(常道)에 어긋나는 잘못을 한다고 한 것이 성인의 가르침이 아닙니까? 신의 이 말은 다른 죄에는 적용할 수 없으나 이 무리에게는 적용할 수 있으며, 평소에는 행할 필요가 없으나 오늘날에는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깊이 살펴 시원스레 시행하소서.
아, 오늘날 폐단이 이 몇 가지에 그치겠습니까?
지금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나라 형세의 위태로움이 이미 막다른 지경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능통한 재주와 통달한 식견을 가진 선비가 나와서 경륜(經綸)하지않으면 구제하기 어려운데 오늘날의 인재로 오히려 무엇을 하겠는가?’하니 이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정치하는 것은 인재에 달려 있으니, 인재를 얻지 못하고서 잘 다스릴 수 있는 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재는 참으로 알기가 쉽지않고 인재를 쓰는 것도 또한 쉽지않습니다.
비록 뛰어난 재주와 특이한 능력이 있더라도 초야에 숨어 있으니 무엇을 통하여 알겠습니까? 또 비록 안다하더라도 반드시 시험을 거친 뒤에 승진시키니, 나라의 법과 오늘날의 세도(世道)로서는 반드시 성(城) 쌓던 사람을 기용하여 정승을 삼지못할 것이고 낚시질하던 사람을 얻어 스승을 삼지도 못할 것입니다939).
그렇다면 오늘 어진이를 구하고 내일 어진이를 부르며 올해에 인재를 얻고 내년에 그 재능을 시험하여 그가 어질고 또 재능이 있는 것을 잘 안 뒤에야 직책을 제수하고 정사를 맡긴다면 그 사이에 몇 년의 세월이 지나버릴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또한 팔짱을 끼고 앉아 있고 이마에 손을 얹고 바라보면서 다만 그 인재가 등용되기만을 기다리겠습니까. 나라의 형세가 다행히 지탱하여 그 인재의 손에 이른다면 반드시 전환시켜 널리 구제할 수 있겠지만 불행히도 그 사이에 전복된다면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만약 사람이 큰 병을 얻어 죽게 되어 뱃속의 기운이 치밀어 오르고 가래가 끓어오르는데 보통 의원은 고치지 못한다고 하여 반드시 진(秦)나라의 편작(扁鵲)을 기다리겠습니까?
중류(中流)에서 풍파를 만나면 배안에 있는 사람들이 또한 미친듯이 울부짖으며 노를 잡고 만번 죽을 위험속에서도 구제되기를 구할 것인데, 반드시 먼 오(吳)나라와 초(楚)나라의 뱃사공을 바라겠습니까?
신의 말은 어진 인재를 꼭 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어진 인재는 하루아침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오늘날 인재가 없다고 하여 나랏일을 위급한 지경에 버려둔다면 비록 어진 인재를 얻는다하더라도 다시 어디에 그의 능력을 쓰겠습니까?
더구나 소하(蕭何)가 한고조(漢高祖)에게 고하기를 ‘백성을 잘 길러 어진 인재를 오게 하소서’하였는데, 그 말을 해석하는 자가 이르기를 ‘임금이 신하를 구하는 것은 백성을 보호하는 정치를 시행하기 위한 것이다. 세상의 임금에게 백성을 잘 기르려는 마음이 없으면 천하의 현인군자가 그에게 등용되려 하지 않을 것이다’하였습니다.
또 연소왕(燕昭王)은 나라가 패망한 뒤를 이어받아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으려는 것으로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악의(樂毅)와 극신(劇辛)의 무리가 그 소문을 듣고 이르른 것입니다. 만일 소왕이 연나라에는 인재가 없다고 하여 무사 안일하게 지냈다면 저 몇 사람이 무엇이 괴로워 천리를 멀다하지않고 찾아왔겠습니까?
지금 전하께서 분발하고 진작하여 사공(事功)을 일으키려 하지않으신다면, 비록 어진 인재가 있다하더라도 누가 전하를 위해 거취(去就)를 가벼이 하겠습니까? 신들처럼 단지 지위와 먹을 것을 도적질하는 자만 얻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진실로 먼저 큰뜻을 분발하여 반드시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태평시대를 이루려는 것으로 사업을 삼아 이 뜻으로 어진 인재를 초빙하고 이 일로 어진 인재에게 요구하며 성의와 예를 다하여 이르를 때까지 계속하신다면 초야의 어진 인재가 또한 반드시 전하를 향하여 올 것입니다.
어리석은 신은 어진 인재가 이르지 않을까에 대해서는 걱정되지 않고 다만 전하의 뜻이 확립되지 않을까가 염려됩니다.
아, 준례에 따라 경연(經筵)을 열어 다만 몇 줄의 문자만을 강론하고 신하들이 진달하는 바에도 혹 한가하고 느긋한 말이 많으니, 이러한 기상으로 어떻게 한 걸음을 나아가고 한 가지의 일이라도 실행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묘당(廟堂)에 있는 자가 어찌 모두 용렬하여 쓸데없는 사람이겠습니까? 그 지혜와 학식이 또한 충분히 일을 처리할 수 있는데, 걱정되는 바는 다만 담당하려 하지 않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등대(登對)하고 내일 회좌(會坐)하면서도 주견이 없이 떼를 지어 나아가고 떼를 지어 물러가, 정사를 도모하여 잘 이루어내는 바가 없고 한 해가 다하도록 일삼는 것은 다만 장소(章疏)와 회계(回啓)뿐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초초(草草)한 문자로 조목에 따라 아뢰면서 책임만 메꾸어 첫째도 ‘유념하십시오’라 하고 둘째도 ‘유념하십시오’라하여, 끝내 의견을 내어 이해를 논하지도 않으며 한 마디 말을 채용하지도 않고 한 가지 일을 시행하지도 않으니, 묘당을 설치한 것이 어찌 그렇게 하려고 한 것이겠습니까?
아, 지금 세상에 급선무를 잘 아는 자가 없어서 그 진달하는 바가 비록 모두 가장 긴요한 곳을 지적하지는 못합니다만, 그들이 진달한 바의 폐단은 빈말이 아닙니다. 모름지기 이것을 인하여 저것을 깨닫고 작은 것으로 말미암아 큰 것에 미루어가며, 막힌 자는 변화시켜 통하게 하고 미치지 못하는 자는 이끌어 펴게 하며, 주선하고 연마하여 합당한 것을 얻도록 힘써 기필코 반드시 시행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범연히 보아 넘기고 서로 가리고 숨겨주며 오직 방계(防啓)로 능사를 삼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세상에서 상소하는 자를 보면 반드시 ‘비변사의 휴지가 되어버릴 것이다’고 하니, 신은 이에 대하여 개탄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최근에 홍문관이 아뢴바 ‘일을 아뢰는 신하가 임금 앞에서 곧바로 아뢰기를 조종조(祖宗朝)의 옛일처럼 하자’고 청한 것은 매우 아름다운 뜻이고 좋은 일인데, 전하께서는 무엇을 꺼려 하지않으십니까?
어리석은 신의 소견으로는, 비록 내아(內衙)에 계실 때라도 승정원의 주사(奏事)와 양사(兩司)의 진계(陳啓)의 경우는 모두 임금 앞에서 곧바로 진달하도록 허락하신다면 임금과 신하가 막히지 않고 뜻이 서로 통하여 일의 가부와 말의 시비가 또한 눈앞에 명백히 드러나 의심치않고 막히지않아 마치 소리가 서로 응하듯이 될 것이니 어찌 유익함이 없겠습니까?
또한 공경(公卿)으로 하여금 옛일을 대략 모방하여 날마다 조정에 앉아서 폐단을 고치고 이익을 일으킬 만한 모든 것을 빠짐없이 힘써 강구하고 겸하여 여러 사람의 의논을 모아 잘 헤아리고 절충한 뒤에 안에 들어가 고하며 성상의 뜻을 받들어 행할 만한 것은 즉시 행하고 고칠 만한 것은 즉시 고쳐서 지난 날처럼 태만하게 세월만 보내지않도록 하고, 이어 백관들을 경계하여 각각 자기의 일을 충실히 하도록 하며, 만약 태만하게 직분을 다하지않고 교활한 관리의 농간에 일임하는 자가 있으면 그 경중에 따라 벌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조정의 풍속이 크게 변하여 마음과 힘이 하나가 될 것이니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습니까?
다만 팔도(八道)의 민폐는 조정에서 상세히 알 수 없기 때문에 혹은 관찰사로 하여금 열읍(列邑)을 순찰하여 계문(啓聞)하게 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산만하게 조리가 없고 일의 체제에 어두운 것들이어서 끝내 다시 방치하고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정성스럽지 못하고 신실하지 못함이 매양 이와 같으니 개탄스러움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귀로 듣는 것이 눈으로 보는 것만 못하고 멀리서 헤아리는 것이 직접 체험하는 것만 못하니, 지금 마땅히 따로 어사를 보내어 여러 도를 두루 다니면서 백성의 고통을 직접 물어보고 이어 그 지역을 지키는 관리들과 함께 구제할 만한 계책을 의논하고서 돌아와 조정에 보고하도록 하여 채택 실시하는 기반을 만든다면 일이 매우 착실해질 것이고 또한 실정을 잘 몰라 막히는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말할 만한 것이 또한 매우 많습니다만, 진실로 나라의 근본이 이미 흔들리고 나라의 형세가 급급하여 호흡할 사이에 전복될 수도 있으니, 걱정이 극심하여 다른 것에 미칠 겨를이 없었습니다.
오직 전하께서는 깊이 유념하시어 소홀히 하지 마소서”하니,
답하기를,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충성이 말 밖에 넘쳐흘러 나도 모르게 감탄하였다. 상소의 말은 현재를 구원하는 급선무가 아닌 것이 없고, 이른바 ‘나라를 위해 걱정하기를 집안일처럼 하는 자가 없다’고 한 것은 실로 오늘날의 고질이다. 사람마다 모두 그대의 성심과 같다면 나랏일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진달한 일은 마땅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토록 하겠다”하였다.
註934]초(楚)나라 사람의 활을 찾게 되든 잃어버리든 어찌 물을 필요가 있겠습니까?:비록 득실(得失)이 있더라도 밖으로는 흘러가지않는다는 뜻. 초 공왕(楚共王)이 사냥을 나갔다가 활을 잃어버렸는데, 좌우의 신하가 찾아내자고 청하니, 왕이 “그만두어라. 초나라의 임금이 활을 잃어버렸으니 초나라 사람이 주웠을 것이다. 무얼 찾겠는가?”라고 한 고사를 인용한 말이다. 《공자가어(孔子家語)》호생(好生).註935]병자년:1636 인조14년 註936]광생(狂生):역이기(酈食其)를 말함.註937]모신(謀臣):장량(張良)을 말함.註938]갑오년 :1654 효종5년 註939]성(城)쌓던 사람을 기용하여 정승을 삼지못할 것이고 낚시질하던 사람을 얻어 스승을 삼지도 못할 것입니다:은 고종(殷高宗)은 성을 쌓던 부열(傅說)을 상대해보고 정승을 삼아 은나라를 잘 다스렸고 《맹자(孟子)》고자 하(告子下), 주문왕(周文王)은 사냥을 하다가 낚시질하던 태공망(太公望)을 위수(渭水) 남쪽에서 만나 말을 해보고는 태우고 돌아와 스승을 삼았는데《사기(史記)》권32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 오늘날은 그렇지 못할 것임을 말한 것이다.
○修撰洪葳上疏曰:
嗚呼! 皇天, 其欲勦絶我邦命耶, 何示變之酷也, 其欲警動我殿下耶, 何譴告之勤耶, 陰虹之貫日貫月, 乃變異之孔慘者也。 前代之事, 遠矣不暇及, 姑以耳目之所覩記言之。 其符驗之弗僭, 若影響然, 有一於此, 足以危亡, 況兼之者乎, 況疊出於數月之內者乎, 彼都下愚民, 有何知識, 而亦皆失色而喪氣, 咸謂大難迫至, 天變之可畏, 於此亦可見矣。 臣愚竊意, 吾君吾相, 亦必大警動、大振作, 求所以弭天災、防禍難, 今日明日, 側耳而未聞者何哉。 近者延英賜對, 每到日昃, 必有詢咨區畫, 而筵席語秘, 臣不得聞耶, 謀猷在內, 施設在外, 由外占內, 則其無大警動、大振作, 可知矣。 以今日國勢, 遇今日非常之變, 危亡之禍, 迫在朝夕。 雖復君臣上下, 被髮揎手, 汲汲然若救焚拯溺者, 猶懼不克有濟, 今乃低聲緩步, 泄泄度日, 與平居無事時, 不甚相遠, 一朝猝有大變, 生於不虞, 則三百年宗社, 將稅駕於何地耶, 言念及此, 直欲痛哭, 而且不敢也。 殿下其以爲今日之時勢, 雖復危惙, 猶可牽補支撑, 苟度時月耶, 時極道窮, 氣數所關, 將無可奈何耶, 抑以爲無處不病, 無事不弊, 撑東而西傾, 捉衿而肘見, 茫然不得其善策耶, 噫! 天怒已極, 民心已離, 而尙且無事, 則古今天下, 無危亡之國矣。 氣數在天, 人事在我, 不修在我, 而諉之於在天可乎, 無不可爲之時, 無不可救之弊, 若謂今日無策可救, 則臣亦痛焉。 今之言者, 咸謂: “聖上自遇災以來, 恐懼修省, 靡所不至, 此可以若天而消災也。” 此言誠是也, 臣猶以爲未也。 何者, 若使人君, 內淫于酒色, 外荒于馳聘弋獵, 怠棄政事, 行虧過彰, 則天乃震怒, 示以變異, 於是惕然警懼, 省躬改行, 則天爲之喜, 災以之息。 今殿下無是數者之行矣, 今日之變異, 未必皆由於殿下之一身。 其必有所以致之者矣, 於此不思焉, 不察焉, 深拱端坐, 徒自畏戢, 有若齋戒而祈禱者, 束手無策, 則亦非今日救災之道也。 臣誠愚闇, 何敢知何者致災, 何策可救, 而試以一得者言之。 今日之致災, 不過曰民心愁怨, 則救災之策, 亦在乎慰悅民心而已。 古人曰: “民惟邦本, 本固邦寧。” 又曰: “天視聽, 自我民視聽。” 又曰: “民之所欲, 天必從之。” 若此之類, 著在方策者, 難以枚擧。 且考歷代, 未有得民而亡, 失民而興者, 此固爲國之大本, 言治者之常法, 就今日言之, 則尤爲急務, 誠不可舍此, 而言他也。 嗚呼! 民生之凋瘵, 至今日而極矣。 雖含生氣, 實同枯朽, 國家只得羈縻其形, 其心已四散矣。 惟其困頓之狀, 不入於冕旒; 愁嘆之聲, 未徹於黈纊。 九重之深, 何鎰知之, 殿下必以爲我未嘗厲民, 民何愁苦, 我未嘗奪民, 民何困窮, 亦必疑於言者矣。 只是宿弊群瘼, 有若痼疾之纏身, 而未聞有發一政、革一弊, 間有施措, 率皆拂於其心, 安得不困窮且愁苦也, 何國家置邦本於度外, 曾莫之恤乎, 推刷之擧, 不可已者, 惜乎所失者時也。 其所謂愁嘆者, 不過游散之徒, 苦其整頓, 其情亦可惡也。 然而欲安樂, 而惡勞苦者, 民情也, 可以德化, 不可以力服。 是以, 先王之御民也, 順其心, 而爲治者有之矣, 未聞拂其心, 而作事者也。 況所謂落漏者, 亦非潛形匿跡, 便作化外之人也。 投良役者, 帶弓箭執戈殳, 或編於行伍, 爲私賤者, 猶且出粟米麻絲, 以事其上, 則名目雖殊, 均是吾赤子。 楚人之弓, 何問得失, 雖得其身, 實失其心, 安知他日, 不爲疾視之民乎, 成事不說, 今不必云云, 此後不可不善處, 少慰其心也。 奴婢貢布, 雖曰二匹, 至如後木、人情、路減件, 其數又倍於元貢, 此輩之所以難堪者此也。 今則父子兄弟, 盡被搜括, 有身則有布, 一家所納, 比前日將至幾何, 以愁怨之心, 當難堪之役, 則安知今日之刷出, 復爲前日之逃散乎, 旣刷而復散, 反不如不刷之爲愈也。 今若就其元貢, 特減其半, 以爲恒式, 則庶可慰其心, 而紓其力矣。 今之言者, 或云刷出, 而收布爲需國也, 若減其半, 則惡在其刷出。 縱使減之, 諸道推刷, 尙有未竟者, 不待結末, 先自減貢, 有損事體。 臣愚竊以爲不然。 若使刷出者, 得以安頓, 愁怨者, 變爲歡欣, 則國家之所獲多矣。 區區貢布, 豈足增損於王者之政乎, 況八路新刷之數, 較諸舊額, 想必倍蓰, 則雖減其半, 必增其舊者乎。 不然而一向讐斂, 復驅而逃散, 則伊時所失, 豈但減半而已。 不幸而脫有土崩瓦解之變, 則若多若少, 將責於何地耶, 不減則已, 減則何待結末, 國脈繫於民心, 一日愁怨, 則傷一分國脈, 二日愁怨, 則傷二分國脈。 若待結末於經時閱月之後, 則復傷幾分國脈, 而必待民怨漸深, 國脈重傷, 而後可減者, 非達論也。 我國砲保之役, 最爲苦重, 良民之流散, 隣族之受害, 皆由於此。 前後論時務者, 莫不以此爲言, 而今不得變通者, 無善策故也。 先儒曰: “大變則大益, 小變則小益。” 大變而大益, 雖不得輕議, 豈可不小變, 而姑紓目前之急乎, 一年所納, 其布三匹, 減其一匹, 則其數至於三百同許云。
今若先發內帑所藏, 次發各衙門所儲, 以足所減之數, 可支一年, 則減一年, 可支二年, 則減二年, 或三年或四年, 視其財力, 而進退其年數, 則所減雖少, 而民心大悅, 國家之所失者財, 而所得者民, 其所利益, 豈淺淺哉, 今之言者, 或云區區小惠, 不足大慰民心, 適爲姑息之歸, 難繼之道, 各衙門所儲, 亦爲不時之需, 豈可散盡於一朝哉, 臣愚竊以爲不然。 丐乞之人, 顚頓於道路, 飢不得食, 渴不得飮, 人有與之簟食豆羹, 則其人必色喜而心感, 終其身不能忘。 簟食豆羹, 非惠之大, 尙且如此者, 所望不在乎大, 所惠能濟其急故也。 今民之困悴, 不啻乞人之飢渴, 則其可謂小惠, 不足大慰乎, 噫! 大惠旣未得施焉, 小惠又謂之姑息, 則其將坐視其死, 而不之救乎, 漢文之世, 天下昇平, 家給人足, 上下無待乎相周, 猶且元年。 賜田租之半, 又十二年, 賜半租, 又十三年, 除田之租稅, 後世未聞以姑息譏之。 二十三年之間, 賜租者三, 豈必歲歲而除之, 然後方可謂可繼者乎, 慈父之救病子, 如有所須之味, 則必且號呼奔走, 乞隣而與之, 奚暇念其姑息與難繼哉, 君之於民, 猶父母之於子也。 有可救之路, 而諉以姑息難繼, 不恤其垂絶之命, 則惡在其爲民父母也。 所謂各衙門不時之需者, 不在今日, 而將待何時, 側聞太僕所儲銀子, 將至五萬兩, 其他訓局、騎省、常平等廳羡餘之數, 亦爲不貲云。 充棟溢宇, 積於無用之地, 太半爲蠧鼠之所壞, 姦胥之所竊, 而不於此時, 救生民燃眉之急, 必若丙子之日, 委去而齎盜。 然後方可謂不時之需乎, 民活而國安, 則不患無財, 民散而國顚, 則雖有財, (吾)〔烏〕得以用諸。 臣言亦非罄竭其儲而用之。 按其簿書, 量其多少, 只准三百同之數而止。 今年如是, 明年如是, 又明年如是, 則其出也少, 而民之蒙惠則大矣。 今之言弊者, 必曰營將, 而陰雨不備, 則難以應卒, 士卒不鍊, 則與無兵同, 營將之設, 豈欲貽弊而然哉, 惟其朝家之令, 失於嚴急, 奉行之臣, 多不得人, 專事督迫, 不知撫摩, 故郡邑騷然, 爲之不寧矣。 今之兵者, 卽農民耳, 農民之務, 號爲長勤。 秋冬之間, 雖曰農隙, 而晝茅宵綯, 無非事者。 今乃束裝裹糧, 疲於道路, 返而復往, 苦無休佚之時。 加以兵器少不精利, 戎衣少不鮮明, 則罰以大杖, 督之修改, 於是或典其牛馬, 或賣其田畝, 以之爲器械焉, 爲衣服焉。 列伍而見之, 則可謂精鍊, 視其家則無恒産矣, 問其心則怨長上矣。 器械猶之可也, 未聞衣服鮮明, 然後方可有用也。 所貴乎兵者, 爲其緩急得力也。 今則平日, 大失其心, 脫有變亂, 則其不爲反戈者幸矣, 尙何望冒矢石、赴湯火, 爲國而致死哉, 噫! 鍊習誠不可廢, 亦不可先失其心。 能得其心, 則技藝雖未精, 猶可以爲吾用, 旣失其心, 則技藝愈精而愈可懼, 利害之相去遠矣。 人皆以爲: “殿下之所銳意行之者, 縱言之無益, 不肯爲殿下一言。” 嗚呼! 今日朝廷, 果有謀國如身者乎, 議者或以爲: “營將有害而無益, 但旣設而旋罷, 則有同兒戲。” 何其言之陋也, 只怕利害之不能深知, 苟或知之, 何患乎兒戲, 漢高之立六國後也, 初以狂生之言而行之, 旋以謀臣之言而罷之。 立六國後, 是何許機關, 是何許大事, 刻印銷印, 曾不淹時, 未聞以兒戲, 咎八年帝業者也。 爲今之計者, 革罷營將, 申飭郡邑, 專掌鍊習, 使監司兵使, 時時巡視, 閱其能否, 考其功罪, 則猶不失其成熟, 而侵擾之害去矣, 此其上也。 極擇營將, 更定節目, 不徒以鍊習爲事, 專責以撫恤, 如有督迫侵擾如前日者, 按道之臣, 劃卽査啓, 以爲論罪警責之地者, 抑其次也。 臣之設二端以言者, 亦涉苟且, 只是軍國大事, 非白面書生所可輕議, 亦何敢自信淺見, 强迫於殿下哉, 私憂過慮, 終不敢自抑, 欲俟殿下裁擇而行之耳。 況古人, 亦有獻上中下三策者。 旣言其上策, 則宜無中下, 而猶有如此者, 豈非度時量力, 不得不已者乎, 苟於淸燕之暇, 深留聖念, 則必有覺悟處矣。 至於諸宮家立案之弊, 爲今日聚怨之一大端, 前後言之者, 不可勝數。 今聞地部, 方有査革之擧云, 革陋祛弊, 亦有時耶, 臣愚但念, 朝家政令, 例不着實, 曰査曰革, 無歲無之, 事過之後, 回顧四方, 則宛然如前日矣, 寧不擧論, 固不可每做虛空。 明査在有司, 夬斷在殿下, 此亦今日上下惕念處也。 且以免稅之法言之, 國典旣有定制焉, 又有等級焉, 祖宗家法, 豈薄於友慈惇敍之道而然也, 誠以國體不可不如此也。 今則田園布於國中, 密如算子, 而率皆無稅焉, 揆以事體, 豈容如是, 在昇平無事時, 尙有定制, 則到今國貧民窮之日, 膠守祖宗朝所無之法乎, 臣愚以爲: “諸宮家免稅, 亦皆視等級而爲定制, 一遵國典, 以昭公正均一之政可也。” 至如各衙門屯田, 初無啓下者, 侵奪民田者, 査出釐正之意, 曾於甲午冬, 度支之臣, 面陳於榻前, 臣於其時, 亦且贅說焉。 旣承聖敎, 使之査正, 而掩置至今, 尙不擧行。 各衙門屯田, 實非一人之私物, 而猶且愛惜遷延, 不肯奉行成敎, 嗚呼! 今日朝廷, 誠有憂國如家者乎, 言之使人寒心。 且所謂宮家衙門屯田, 作一淵藪於國中, 良民之避役者咸萃焉, 而催科不及焉, 點丁不到焉, 終歲安坐, 其視應役編伍之民, 勞佚不啻百倍。
食土之毛者, 孰非王民, 而或勞或佚, 不均如此, 則人心宜乎不服, 而國家亦可謂無政矣。 臣愚以爲: ‘宜令州縣, 每於歲抄, 漸次搜括, 先其土着, 補於軍伍, 則國無遊民, 而軍額可塡矣。 朝家一遇災異, 必行審理, 審理爲抱冤者也。 冤者得伸, 則亦弭災之一道也, 今則不然。 朝臣罷散, 無與於召災, 失刑贓吏, 亦得移配, 則不爲審理, 其亦可矣。 其他疏放, 未知何等罪人, 而臣愚竊恐抱冤者, 終未盡釋也。 內司陳告之路一開, 而叛主投屬者, 不可勝計, 其主之爭辨者, 得伸少, 而獲罪多, 此則全無罪者也。 其間雖有所犯者, 亦必認爲良妻所産, 積年使喚, 一朝見失, 起而就訟, 終陷壓良之罪, 此則愚氓之可恕者也。 人情不甚相遠, 豈有欲攘內司奴婢, 占作己物者乎, 草野孤寒之人, 或爲權貴家所奪, 猶不敢下手, 況敢與內司, 爭其非分乎, 大都論之, 則獲罪而抱冤者, 十居八九矣。 訣別其父母, 抱持其妻子, 離鄕去土, 顚頓於異境, 飢寒困厄, 不能自存, 其含冤呼痛, 慘於見聞。 彼小民無知, 身雖有罪, 到此地頭, 亦不能自解, 未免愁歎, 況無罪者乎, 今欲査其有罪無罪, 審其輕重, 則必也持文券具辨證, 若聚訟之初, 然後可也, 其勢有不可爲者。 臣愚以爲: ‘毋論罪之輕重, 率皆蕩滌, 則好生之德, 洽於下, 而愁怨之聲, 不聞於遠近也。 議者必以臣言, 爲違道干譽, 大乖於折姦癉惡之政矣。 又有所不然者。 究其本原, 則無罪者衆, 而有罪者寡, 輕重之分, 到今難覈, 則因其衆, 而及其寡可也, 執其寡, 而錮其衆可乎, 無罪而得免, 亦且感悅, 況有罪而蒙恩, 則其歡欣皷舞, 思所以殞結者, 當復如何。 陽春之發生, 雨露之濡澤, 豈區區擇其嘉木與惡草哉, 況寧失不 經, 非聖人之訓乎, 臣之此言, 不可施於他罪, 而可施於此輩, 不必行於平日, 而可行於今日也。 惟殿下深察, 而快施焉。 嗚呼! 今日之弊, 止於此數端乎, 今之議者, 皆曰: “國勢之扤捏, 已到十分地頭, 苟非通才達識之士, 出而經綸, 則難以拯濟, 以今日人才, 尙且何爲”, 有是哉言乎。 爲政在人, 不得其人, 而能有爲者, 未之有也。 然而人固未易知, 用人亦未易, 雖有奇才異能, 隱於草野, 何從而知之, 縱使知之, 必歷試而後升之, 以國家規模, 以今日世道, 必不能起版築而作相, 得漁釣而爲師矣。 然則今日求賢, 明日招賢, 今年得其才, 明年試其才, 深知其賢且才, 然後授之位、任之政, 則未知其間, 過了幾許時月, 而亦將拱手而坐, 加額而望, 只待其人之登庸乎, 國勢幸而支撑, 到於其人之手, 則必能旋轉, 而弘濟矣, 不幸而顚仆於其間, 則將若之何。 如人得大病將死, 氣逆而痰升, 謂庸醫不能治, 必待扁鵲於秦乎, 中流而遇風波, 則舟中之人, 亦將狂呼而操楫, 求濟於萬死之中, 必望長年三老於吳、楚之遠乎, 臣言非敢謂賢才不必求也。 只以賢才, 非一朝可得, 謂今日無人, 付國事於危亡之域, 則縱得賢才, 更施於何地也。 況蕭何之告漢高曰: “養民以致賢才。” 釋之者曰: “君之求臣, 以行保民之政也。 世主無養民之心, 則天下賢人君子, 不爲之用。” 燕昭王承國破之後, 以復讎雪恥爲心, 故樂毅、劇辛之徒, 聞風而至焉。 假使昭王, 以爲燕國無才, 恬然無事, 則彼數子者, 何苦而不遠千里哉, 今殿下, 不肯奮發振作, 以興事功, 則縱有賢才, 孰肯爲殿下輕其去就, 只得竊位偸食, 如臣等爲乎。 殿下苟能先奮大志, 必以安民生, 致太平爲事業, 以此志招賢才, 以此事責賢才, 致誠盡禮, 不至不已, 則草野之賢才, 亦必于于而來矣。 臣愚不患賢才之不至, 只恐 殿下之志不立也。 噫! 循例開筵, 只講數行文字, 臣隣所陳, 或多閑漫說話, 以此氣象, 其能進一步、做一事乎, 今之居廟堂者, 豈皆碌碌無用底人, 其智慮才識, 亦足以辦事, 所患者只是不肯擔當耳。 是以今日登對, 明日會坐, 而旅進旅退, 無所建明, 終年事業, 只是章疏回啓。 而乃以草草文字, 逐條而塞責, 一則曰體念, 二則曰體念, 終不出意見、論利害, 用一言而行一事, 廟堂之設, 豈端使然哉, 嗚呼! 今世無識務者, 其所疏陳, 雖未必皆中肯綮, 而然其所陳之弊, 則非虛語也。 必須因此而悟彼, 由小而推大, 窒礙者神而通之, 不及者引而伸之, 周旋磨戞, 務得其宜, 期於必行可也。 今則不然, 泛然看過, 互爲遮藏, 惟以防啓爲能事。
故世之見上疏者, 則必曰: “備邊司休紙”, 臣於此, 不勝慨然也。 近者玉堂所陳, 奏事之臣, 直陳於前席, 請依祖宗朝故事者, 甚是美意好事, 殿下何憚而不爲耶, 臣愚以爲: “雖御內衙之時, 如銀臺之奏事, 兩司之陳啓, 皆許直陳於前, 則堂陛不隔, 情意相通, 事之可否, 言之是非, 亦且了然於目前, 不疑不滯, 如響相應, 則豈不益哉,” 亦令公卿, 稍倣故事, 日坐於朝堂, 凡所以革弊興利者, 靡不着力講求, 兼採群議, 稱量而折衷之, 然後入告于內, 取奉聖旨, 可行者卽行焉。 可革者卽革焉, 毋得如前日之恬憘玩愒, 仍飭百僚, 各事其事, 如有怠官不職, 一任猾吏之簸弄者, 隨其輕重, 而罪罰焉, 則朝廷之上, 風采丕變, 齊心一力, 何事不做, 但八路民瘼, 朝廷不能得其詳, 或令道臣, 詢諸列邑, 而啓聞者。 亦非一再, 而漫無條理, 眩於從違, 終復倚閣, 而不施焉。 不誠不信, 每每如此, 可勝嘆哉。 耳聞不如目見, 遙度不如躬莅, 今宜別遣御史, 周行諸道, 訪問民間疾苦, 仍與守土之官, 議其可救之策, 歸報廟堂, 以爲採施之地, 則事甚着實, 亦無疑滯之患矣。 今之可言者, 亦已多矣, 誠以邦本已搖, 國勢岌岌, 呼吸之頃, 顚踣可待, 憂懣之極, 不暇及他。 惟殿下深留聖意而毋忽焉。
答曰: “愛君憂國之忠, 溢於言外, 不覺嗟歎也。 疏辭無非救時之急務, 而所謂憂國不如家云者, 實是今日之膏盲。 使人人皆如爾之誠心, 則國事豈至於此乎, 所陳之事, 當令廟堂議處焉。”
현종 5권, 3년(1662 임인/청강희(康熙)1년) 6월 12일(계축) 1번째기사
승지 유창과 옥당 김우형·안후열이 입시하여 《대학연의》를 강하다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소대(召對)하였는데 승지 유창(兪瑒)과 옥당 김우형(金宇亨)·안후열(安後說)이 입시하였다.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태공망(太公望)은 어떤 사람에게 비유할 수 있는가?”하니,
우형이 아뢰기를,
“풍후(風后)326)와 역목(力牧)327)과 같은 인물이라 할 것입니다”하고,
후열은 아뢰기를,
“이윤(伊尹)이나 부열(傅說)보다 못한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하자,
상이 이르기를,
“‘조심하는 마음이 게으른 마음을 이기면 길하다[敬勝怠則吉]’는 단서(丹書)의 말을 보건대, 그도 학문을 모르는 사람은 아니었다”하였다.
강을 마치고 한(漢)나라와 초(楚)나라의 흥망에 관한 일이 언급되자,
상이 이르기를,
“항우(項羽)가 아무리 강했어도 자영(子嬰)을 죽이고 의제(義帝)를 시해하였으니 이런 식으로 행동하고서 어떻게 천하를 얻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고제(高帝)가 정공(丁公)을 죽이고 항백(項伯)을 봉해 준 것도 균등하게 벌을 내리지 못한 것이라고 하겠다328)”하였다.
이때 오래도록 경연을 폐지하였다가 갑자기 소대(召對)하였는데, 상이 고금의 역사를 관통하며 명확하게 변론해 설명하였으므로 입시한 신하 모두가 기뻐해 마지않았다. 물러갈 즈음에 우형이 나아가 아뢰기를,
“미곡을 납부한 사노(寺奴)를 면천(免賤)시키도록 한 명을 도로 취소하는 것은 신임을 잃는 결과를 면치 못할 것이니, 국가의 체면상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후일 등대(登對)할 때 품처(稟處)토록 하라”하였다.
註326]풍후(風后):황제(黃帝)의 삼공(三公).註327]역목(力牧):황제(黃帝)의 상(相).註28]고제(高帝)가 정공(丁公)을 죽이고 항백(項伯)을 봉해 준 것도 균등하게 벌을 내리지 못한 것이라고 하겠다:두 사람 모두 항우(項羽)의 신하로서 한고조가 위급했을 때 구해 주었는데, 그에 따른 상벌이 각각 달랐음을 지적한 것임. 정공은 계포(季布)의 동생으로서 초나라 장수였는데 팽성(彭城) 서쪽에서 단병(短兵) 접전을 벌이며 고조를 일촉즉발의 상황에 몰아넣었다가 고조가 정공을 돌아보며 구원을 청하는 말로 애걸하자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그런데 고조는 천하를 얻은 뒤에 “남의 신하로서 자기 임금에게 불충(不忠)한 짓을 했다”면서 참형(斬刑)에 처했다.《사기(史記)》권200 계포열전(季布列傳). 항백은 항우의 계부(季父)로서 홍문(鴻門)의 연회에서 범증(范增)이 패공(沛公) 즉 한고조를 죽이려하자 그 전날 장량(張良)에게 이 사실을 고해주고 당일에는 자신이 검무(劍舞)를 추며 몸으로 감싸주었는데, 뒤에 한 고조로부터 사양후(射陽侯)에 봉해지고 유씨(柳氏)를 성(姓)으로 하사받았다.《사기(史記)》권7 항우본기(項羽本紀)·《한서(漢書)》 권31 항적전(項籍傳).
○癸丑/上御熙政堂召對, 承旨兪瑒、玉堂金宇亨ㆍ安後說入侍, 講《大學衍義》。 上曰: “太公望可比於何人耶,” 宇亨曰: “風后、力牧之類也。” 後說曰: “安知不如伊、傅也。” 上曰: “以《丹書》敬勝怠之語觀之, 亦非不知學問之人也。” 講畢, 言及漢、楚興亡事, 上曰: “項羽雖强, 殺子嬰、弑義帝, 所爲如此, 安得有天下。 高帝殺丁公, 而封項伯, 用罰可謂不均也。” 時久廢經筵, 忽有召對, 而自上出入古今, 辯說明暢, 侍臣無不欣悅者。 將退, 宇亨進曰: “納米寺奴, 還寢免賤, 未免失信之歸, 國體不宜如是。” 上曰:“後日登對時,稟處可也。”
현개 9권, 4년(1663 계묘/청강희(康熙) 2년) 8월 5일(경자) 3번째기사
전부사 허목이 세자의 책봉례를 거행하도록 상소하다
전부사 허목이 상소하기를,
“신은 삼가 생각건대, 지금 국가가 큰 일을 빼먹고 거행하지않고 있는 것이 있어 신으로서는 의혹스럽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후 총사(冡嗣)가 없었으나 하늘이 성상을 도우셔서 원자(元子)를 낳으셨으니 이는 하늘이 성자(聖子)를 주신 것입니다.
예(禮)에 태자(太子)가 탄생하면 성인(成人)의 예를 거행하고, 태어난 지 3개월이 되면 사(士)로 하여금 업게 하고 유사(有司)가 단면(端冕)332) 차림으로 남교(南郊)에 나아가 뵈며, 제후(諸侯)의 세자(世子)는 천자(天子)에게 맹세를 하고 그 이름을 오사(五祀)333)와 산천(山川)에 두루 고하는데, 그 이유는 계통을 엄히 하고 후계자를 중히 여겨 백성들로 하여금 다른 생각을 품을 수 없게 하는 것으로서 까닭이 있어서 한 일이었습니다.
지금 성상의 사자가 탄생한 지 이미 3년이 되었으나 성인의 예를 거행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저위(儲位)를 그렇게 오래 비워두고 계시니 어리석은 신은 모르겠습니다만 전하의 춘추가 젊으셔서 저위를 세우기가 너무 이르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아직 나이가 어려서 몇 해 더 늦추려는 것입니까?
저위를 세우는 큰일은 예를 상고해 보더라도 엄하기가 이와 같고 하늘이 주신 것이므로 사람들 마음이 매여 있으니 나이 어린 것때문에 구애될 일은 아닙니다.
보부편(保傅篇)에도 이르기를 ‘성왕(成王)이 태자였을 때 어려 강보에 싸여 있었지만 소공(召公)을 태보(太保), 주공(周公)을 태부(太傅), 태공(太公)을 태사(太師)로 하여 효(孝)·인(仁)·예(禮)·의(義)를 밝혀서 교도하였기 때문에 성왕은 아주 어릴 때부터 교육이 이미 행해졌다’하였습니다.
태자의 예는 그러한 것으로 옛날 했던 것에 비하면 이미 늦었다고 하겠습니다. 모름지기 어린 시절 지각이 생길 때부터 사부(師傅)에게 교도(敎導)와 보양(保養)을 위임하여 거처와 출입 그리고 말하는 것 동작하는 것, 모두를 가르치고 경계하여 귀와 눈에 익숙해지고 마음에도 편안하게 느껴지도록 하여 교화의 목적이 달성되고 덕이 성취되어야만 국가가 오래오래 치안을 유지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의(賈誼)도 이르기를 ‘한 나라 운명은 태자에게 매여있고 태자의 선(善)은 일찍부터 가르치고 좌우(左右)를 잘 선발해 주는 데에 달려있다’한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물며 저사(儲嗣)는 나라의 뿌리로서 나라의 뿌리가 정해지지 않으면 이것이 곧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길이니 삼가 전하께서는 일찍 저사를 정하시어 하늘의 마음을 따르시고 사부를 두어 교양의 일을 맡기어, 사방 백성들의 바람을 따르소서. 그러면 종묘사직이 이보다 더 다행일 수 없겠습니다”하니, 상이 해조에 내렸다. 예조가 회계하기를,
“원자가 탄생하신 것은 참으로 종묘사직에 있어 만세를 두고 끝이 없을 경사입니다. 처음 탄생했을 때 간원(諫院)이 차자를 올려 고례(古禮)를 거행할 것을 청하였는데,《실록(實錄)》을 상고해본 결과 조종조에서 일찍이 고례를 그대로 행한 사실은 없었고 다만 원자가 탄생하여 6세가 되면 책봉(冊封)하는 일만 있습니다.
이에 3개월이 되었을 때 산천에다 두루 고하는 예는 비록 거행을 못하였으나, 사람들 마음이 매여 있는 바여서 나라의 뿌리는 저절로 내려졌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미처 거행을 못한 일이 책봉 의식일 뿐인데 허목의 상소내용에, 성상의 사자가 탄생한 지 이미 3년이 되었으나 성인의 예를 거행했다고 들은 바 없다고 한 그 말은 그것이 옛 예를 행하고 싶은 뜻에서 한 말이겠으나 ‘저위가 오래 비어있어 나라 뿌리가 내려지지 못하고 있다’한 그 말에 있어서는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대체로 태자가 어린 시절 지각이 생길 때부터 삼공(三公)·삼소(三少)334)가 효·인·예·의를 밝혀 교도하고 익히게 했던 것은 바로 성주(成周)의 예입니다. 지금 원자가 비록 나이 어리지만 서둘러 책봉의 전례를 거행하고 보양을 제때 하는 것이 교육을 일찍부터 해야 하는 원리에 꼭 맞는 일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예도이니 대신들과 의논하소서”하니, 상이 따랐다.
대신 영중추부사 이경석,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원두표가 주장하기를,
“원자가 탄생한 그 날이 바로 나라의 뿌리가 저절로 내려진 날로서 종묘에 고하였고 모든 관료가 하례를 올렸으며 팔로(八路)가 다같이 경사로 여기고 과거를 실시하여 인재를 뽑는 등 나라 전체가 똑같은 마음으로 기뻐 추대하였으니, 허목이 상소에서 ‘나라 뿌리가 내려지지 못하고 있다’한 그 말은 사실 알 수 없는 말입니다. 그가 인용한 ‘성왕은 적자 시절부터 교육이 이미 행해지고 있었다’한 그 말은 참으로 더할 수 없이 훌륭한 말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책봉의 예를 어린 시절에 거행한 일이 명조(明朝)에서는 비록 그렇게 했던 전례가 있지만 아조(我朝)에서는 들은 바가 없습니다. 성조(聖祖)가 행했던 것을 법으로 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책봉례는 우선 천천히 거행하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당시 윤선도등이 의례(議禮)를 틀리게 했다는 것을 공박하면서 모두 종통(宗統)과 적자(嫡子)를 언질로 삼았는데 그들 뜻은 은연중 마치 대통(大統)이 다른 곳으로 귀속이라도 될 염려가 있는 것처럼 하여 공동(恐動)을 하고 모함을 했으며, 나라의 뿌리가 내려지지 않았다는 허목의 이 말도 그 뒤를 이어 나온 말이었다. 이보다 앞서 유언비어가 이미 나돌고 있었는데, 송시열을 헐뜯는 자들이, 시열이 원자 탄생 소식을 듣고는 좋아하지 않았으며 밖에 있으면서 소장을 올릴 때도 하례를 하지 않았다는 말을 만들어내어 중외에 퍼뜨림으로써 헐뜯고 이간질을 하였고, 허목의 상소내용 또한 이러하여 머리와 꼬리가 서로 호응하여 후일 화가 자리잡을 발판을 만들었던 것이다.
흉악한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와 생각하는 것들이야말로 참으로 참혹하다하겠다.
註332]단면(端冕):현단복과 면류관.註333]오사(五祀):다섯 가지의 제사. 사명(司命)·중류(中霤)·국문(國門)·국행(國行)·공려(公厲).註334]삼소(三少):소사(少師)·소부(少傅)·소보(少保).
○前府使許穆上疏曰:
臣竊惟當今國家大事, 有闕而未擧者, 臣竊惑焉。 殿下卽阼, 未有冢嗣, 皇天陰祐聖躬, 誕生元子, 此天所以授聖子也。 禮太子生, 擧以成人禮, 三月使士負之, 有司端冕, 見之南郊, 諸侯之世子, 誓於天子, 以名徧告五祀、山川, 所以嚴統重緖, 令民無異望有以也。 方今聖嗣誕生已三年, 而未聞擧以成人禮。 而儲位久空, 臣愚不知殿下春秋鼎盛, 以建儲大計, 謂之太早乎, 抑以幼穉未長, 將遲之以數年乎, 建儲大事, 稽之於禮, 其嚴如此, 天之所與, 人必繫焉, 固不可以年穉拘之也。 《保傅篇》曰: “成王爲太子, 幼在襁褓, 召公爲太保, 周公爲太傅, 太公爲太師, 明孝、仁、禮、義, 以導習之, 成王自爲赤子, 而敎已行矣。” 太子之禮如此, 比之古事, 則雖已遲矣。 須及孩提, 有識委任師傅, 以敎導保養, 居處出入, 言爲動作, 皆有訓飭, 令習於耳目, 安於心術, 敎達而德成, 然後國家長久治安也。 故賈誼又曰: “一國之命, 繫於太子, 太子之善, 在於早敎, 與選左右。” 是也。 況儲嗣國本, 國本未定, 危國之道也, 伏願殿下, 早定儲嗣, 以順天心, 立師傅, 責以敎養之事, 以從四方臣民之望。 宗社幸甚。
上, 下該曹。 禮曹回啓曰: “元子誕生, 實是宗社萬世無彊之休。 誕降之初, 諫院陳箚, 請行古禮, 考出實錄, 則祖宗朝, 曾無古禮遵行之事, 只有元子生六歲冊封之擧。 故三月徧告山川之禮, 雖不得行之, 人心所繫, 國本自定。 所未及擧行者, 只是封典, 許穆疏辭, 以聖嗣誕生已三年, 未聞擧以成人禮爲言, 此則欲行古禮之意, 而至於儲位久空, 國本未定之說, 意慮之所不到者。 大槪太子提孩, 有識三公、三少, 明孝、仁、禮、義以導習之, 乃成周之禮也。 卽今元子, 雖在提孩之年, 亟擧封典, 及時輔養, 實合於早諭敎之誼。 而此是大禮, 請議于大臣。” 上從之。 大臣領中樞府事李景奭、領議政鄭太和、左議政元斗杓以爲: “元子誕生, 便是國本自定之日, 告于宗廟, 百僚進賀, 八路同慶, 設科取士, 擧國人心, 莫不欣戴, 許穆疏中, 國本未定之說, 實未曉也。 其所引成王, 自爲赤子, 敎已行矣之言, 誠是至論。 而冊封之禮, 行之於孩提之事, 雖有明朝舊例, 至於我朝, 未之聞焉。 似當以聖祖之攸行者爲法。” 上曰: “冊封之禮, 姑徐可也。” 時尹善道等, 攻斥議禮之非者, 皆以宗、嫡爲言, 其所造意, 隱然若大統之屬於他地者然, 以爲恐動誣陷之計, 穆之國本未定之言, 繼此而發。 先是, 已有飛語, 謗宋時烈者, 造時烈聞元子生不喜, 在外陳章, 亦不賀之說, 流布中外, 以惎間之, 而穆之疏辭, 又如此, 首尾相應, 以爲後日基禍之端。 凶人之措心積慮, 吁亦慘矣。
현개 13권, 6년(1665 을사/청강희(康熙)4년) 6월 12일(정묘) 4번째기사
원자를 보양하는 문제를 논한 좌참찬 송준길의 차자
좌참찬 송준길이 원자를 보양하는 문제로 논하여 차자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이 우연히 선정신 조광조가 경연에서 진달한 말과 이언적이 8개조항으로 진규한 것을 보았는데 그 중 몇 가지는 바로 오늘날 일과 서로 부합되었으며 그 논설에는 간절한 충성과 심원한 우려가 토론할 즈음이나 주고받는 사이에도 깃들어 있어 백세후에 봐도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되니 만세토록 규범이 된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인하여 생각건대, 우리 조종조의 규범의 아름다움과 제도의 세밀함은 삼대 성왕의 법규에 비하여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데 반해 오늘날 보양하는 제도만은 허술하기 짝이 없으니 삼대에 부끄러울 뿐만이 아니라 우리 조종이 이루어 놓은 훌륭한 법과 아름다운 뜻마저도 따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이 이 시점에서 일어나는 한탄과 우려에 견딜 수 없어 이에 감히 외람됨을 무릅쓰고 두 현신이 진계했던 것을 등서해서 진달하여 상께서 보시도록 합니다. 신은 원하건대 성명께서 대신에게 물어본 다음 참작해서 가장 이상적인 것을 채택하여 쓰도록 하소서.
거듭 생각건대, 전하께서 수년동안 건강문제로 경연을 정지한 지가 이미 오래 되다보니 신하들은 생기가 없고 기상도 화통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신명의 도움으로 성상의 건강이 회복되었으니 이제는 분발 진작하여 행여라도 미치지 못한 것이 있는 듯이 혹시라도 잃을까 염려하는 듯이 하며 날마다 새로운 사업을 하시고 수시로 새로운 공을 쌓아서 하늘이 보살펴준 복을 계승하고 백성들의 큰 바램을 위로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 매사를 지연시키고 법규를 무시한 채 그전 병환중에 하던 전철을 답습한다면 중외의 실망이 훨씬 더할 것입니다.
인심의 향배 문제가 바로 여기에 달려있으니 신은 실로 두렵습니다.
지금은 무더운 계절인데다 다습한 장마가 지치게 하니 몸조리하시는 여가에 비록 법연에 자주 나아가 과로하지는 않는다하더라도 수시로 공기가 상쾌한 아침과 더위가 가신 저녁에 유신을 소대하여 경사(經史)를 강론하되 매일처럼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덕에 나아가고 사업을 하는데에 크게 유익할 뿐만이 아니라 답답함을 풀고 건강을 유지하는 도리에도 도움되는 바가 작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전하께서는 조종이 이미 시행하셨던 두 현인의 논설로 우리 원자를 가르치시고 또 이것을 가지고 스스로 경계하신다면 종묘사직의 다행일 것이며, 백성들의 다행일 것입니다.
선정신 조광조가 경연에서 논설을 진달한 것은 우리 중종조의 일인데 광조는 당시에 부제학이었습니다.
그가 아뢰기를 ‘원자가 봄이 되면 5세입니다. 보통 아이의 예로 말한다면 겨우 말할 줄을 알 때입니다마는 원자는 기질이 특출하니 장차 대성인이 될 자질입니다. 대신이 비록 나아가 보기는 하지만 예경(禮敬)만을 위주로 하고 가르치는 실상은 다하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하고, 승지 김정국(金正國)이 아뢰기를 ‘세종이 홍문관학사로 하여금 가서 세자를 모시게 하였으니 이는 매우 훌륭한 법이며 아름다운 뜻입니다. 오늘날 국가의 기본이 조금 장구해졌으나 신하로서 정의를 아는 자가 적으니 어찌 우려할 일이 아니겠습니까’하였습니다.
광조가 또 아뢰기를 ‘원자를 가르치는 것은 그 일이 매우 어렵습니다. 재상 중에서 훌륭한 덕이 있는 자를 뽑아서 그로 하여금 가까이서 훈도하여 덕성을 이루게 해야 합니다. 상께서도 착한 일을 친히 가르치시고 군자와 소인이 진퇴하는 양상과 길흉과 안위가 소장(消長)하는 이치와 의리와 선악이 나뉘는 기미에 있어서도 반복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신다면, 비록 다 이해하지는 못한다하더라도 보고 듣는데 익숙해져서 자연적으로 지혜도 함께 성장하여 은연중에 이익되는 바가 매우 클 것입니다.
그리고 경연에서 자리 곁에 있게 하여 조정의 옳고 그른 것과 백성들의 애환을 직접 들어보게 하고 어려서부터 조정의 신하들을 친히 만나보게 해야 합니다’하였습니다.
광조가 또 아뢰기를 ‘원자의 나이가 점점 들어 알아차리는 것이 평소와 같지 않은데 근래에 강학을 어떻게 하는지 듣지 못했으니 우려하는 마음이 실로 깊습니다. 보양관이 사신으로 가기도 하고 병이 나기도 하여 계속적으로 나아가서 보지않는 듯하니 오늘날 국가의 크게 우려할 일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날 미리 후일 계승할 기반을 다져놓지않으면 대대로 장구하게 쌓아온 왕업도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입니다. 비록 동궁의 위상이 정립될 때까지 기다린다 하더라도 요속(僚屬)은 설치해야 합니다.
다만 훌륭한 재상을 뽑아 보양관으로 더 책정하고서 혹 승지이거나 사관이거나 홍문관의 연소한 관원으로 하여금 수시로 나아가서 노는 것을 보고 교도(敎導)하게 해야 합니다. 정자(程子)가 청하기를「사대부의 어린 자식으로 태자를 모시게 한 것은 일찍부터 훌륭한 선비들과 친하게 지내도록 하려는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마는 그렇다고 급하게 서두를 것은 없습니다」하였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자의 학문을 어찌 잠시라도 폐기했겠는가? 그의 성품이 본래 오락을 좋아하지않고 단지 글읽는 것만을 좋아하니 이는 기쁜 일이다. 현재 읽고있는 책은 《소학》이다. 전일 대신이 이해하기 쉬운 곳을 골라 가르쳐 주었는데 지금은 처음부터 끝까지 빠뜨리지 않고 읽어낸다. 보양 대신은 이미 결정하였다. 수시로 승지등으로 하여금 가서 보게 한다면 과연 점점 친근한 마음이 들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광조가 아뢰기를 ‘옛사람이 정직한 사람으로 하여금 태자와 함께 거처하게 하려 했던 것은 태자에게 훌륭한 선비를 친애하는 마음을 길러 주고자 해서였습니다. 삼대 이후로는 태자를 제대로 보양하지 못했기 때문에 난리만이 서로 잇따르고 훌륭한 정치는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주역》에 이르기를 「어릴 때 정직함을 양성하는 것이 성인이 되는 공부이다」하였는데 더구나 이미 지각이 있는 시기이겠습니까? 대체로 자질이 특이한 것은 믿을 것이 못됩니다. 재주가 남다른 자는 선(善)을 행하기도 쉽지만 악(惡)을 행하기도 어렵지 않는 법이니, 염려하지 않아서는 안됩니다’하였습니다.
광조가 또 아뢰기를 ‘지금 듣건대 원자의 음성이 매우 인후(仁厚)하다고 하니 신은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태자는 인후를 위주로 해야 한다」하였으니 어찌 기쁜 일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원자의 교양 문제는 지나치게 서둘러서는 안 되고 조용하게 훈시해서 점차적으로 성취되도록 해야 하며, 때로는 후원에 나가 놀도록 하여 기력을 기르게 해야 합니다’하였습니다.
이언적이 적어 올린 진수팔규(進修八規)의 일부입니다 ‘옛날에 태임(太任)은 문왕을 임신했을 때 태교한 법이 있었으므로 문왕이 태어나자 현명하고 성인다웠던 것입니다.
옛 성인은 자식을 가르치는 법을 처음 임신했을 때부터 실시하였는데 더구나 이미 태어나서 어릴지라도 지각이 있는 경우이겠습니까?
신은 삼가 생각건대, 원자가 지금 비록 강보에 있기는 하지만 남다르게 영리하고 숙성하여 반드시 평범한 사람보다 다른 점이 있을 것입니다.
교양하고 보익하는 도를 미리 대비해 두지 않으면 안됩니다.
신이 삼가《예경(禮經)》을 살펴보니, 대체로 삼왕이 세자를 가르칠 때 반드시 예와 음악으로 하였는데, 태부(太傅)와 소부(少傅)를 세워 보양하게 하고 태부는 앞에 있고 소부는 뒤에 있게 하여 들어오면 보(保)가 있고 나가면 사(師)가 있었던 까닭에 가르치기만 하면 덕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보부편(保傅篇)에 이르기를 「옛날의 제왕은 태자가 태어나면 예를 거행하여 유사가 재계한 다음 예복을 갖추고서 남쪽들에서 뵙게하는데 이것은 하늘에 알리는 것이며, 대궐을 지날 때는 수레에서 내리고 종묘앞을 지날 때는 총총걸음으로 지나가게 하는 것을 효자의 도리이다.
그러므로 아주 어렸을 때부터 교육은 이미 시행되는 것이다.
주성왕(周成王)이 어려서 강보에 있을 때 소공(召公)은 태보였고 주공(周公)은 태부였으며 태공(太公)은 태사였다. 보(保)는 신체를 보호하고 부(傅)는 덕의로 돌보아 주고 사(師)는 교훈으로 인도하는데 이것이 삼공의 직책이었다. 이 때에 소부와 소사를 두는데 이는 태자와 즐겁게 지내는 자이다.
그러므로 어려서 지각이 있게 되면 삼공(三公)과 삼소(三少)가 효(孝)·인(仁)·예(禮)·의(義)만을 발명하여 읽히게 하고 간사한 사람은 내쫓아 태자로 하여금 나쁜 행동을 보지 못하게 한다.
이 때에 천하에 아는 것이 많고 학식이 있는 훌륭한 선비를 뽑아서 돕게 해서 태자와 거처 출입을 함께 하게한다. 그러므로 태자가 태어나서 바른 일만 보고 바른 말만 듣고 바른 도리만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전후좌우에 모두 정직한 사람만이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정직한 사람과 거처하면서 익숙해지면 정직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마치 제(齊)나라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이 제나라 말을 안할 수 없는 것과 같고, 부정한 사람과 거처하면서 익숙해지면 부정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마치 초(楚)나라에 태어나 자란 사람이 초나라 말을 하지않을 수 없는 것과 같다」하였습니다.
공자가 이르기를「소성(小成)은 천성(天性)과 같고 습관은 자연과 같다」하였는데 삼대가 장구할 수 있었던 것은 태자를 보익하는 데에 있어서 이러한 것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은 삼대 성왕이 제도를 모두 후세에 복구해야 한다고 봅니다.
더구나 이 태자를 보익하는 법은 더욱 종묘 사직과 백성의 안녕에 관계되는 데이겠습니까? 성명께서 위에 계시면서 이것을 행하기만 하신다면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진(秦)·한(漢) 이래로 태자를 가르치는 일을 매우 등한시하여 도리가 아닌 것을 가르치고 법이 아닌 것을 가르쳐서 패망을 초래한 자가 많았으니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옛날 문왕이 태공으로 하여금 태자를 돌보게 하였는데, 태자가 포어(鮑魚)를 즐겨먹자 태공이 주지 않고서 말하기를「예에 포어를 밥상에 올리지 않는다 하였는데 어찌 예가 아닌 것으로 태자를 양육할 수 있겠습니까?」하였으니, 옛사람이 태자를 가르치는 데에 있어서 엄격하기가 이와 같았습니다.
예가 아닌 음식으로 태자를 양육하지 않았다면 정직하지 않은 사람과 정직하지 않은 소리도 보거나 듣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태자의 선행 여부는 조기 교육과 좌우에 있는 사람을 잘 가려 가르치는 데에 달려 있으니 좌우에 있는 사람이 정직하면 태자도 정직하게 됩니다.
이것이 어린 자를 정직으로 양육하는 도리인 것입니다.
신이 어리석은 것도 헤아리지 않고 감히 선왕의 법을 취해다가 오늘날에 시사하는 것은 조정을 위하여 올리는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성명께서는 유의하셔서 다시 전편을 취하여 참고하신 다음 시행하소서. 그리고 보양하고 교육하는 방법은 삼대의 법대로 하되 시강원을 설치할 때까지 기다리지말고 일찍이 사(師)·보(保)·부(傅)를 정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하고 또 빈객(賓客)을 정해서 서로 교대로 입시하여 교육하는 직책을 다하도록 하소서.
남쪽들에서 뵙는 것은 대개 옛날 천자가 행하던 예이므로 지금 거행할 수 없다하더라도 대궐을 지나갈 때 수레에서 내리고 종묘앞을 지나갈 때 종종걸음으로 하는 예는 신하된 도리를 보이는 것이니 오늘날 행할 수 있는 일입니다.
보모(保母) 및 부봉(傅奉)하는 사람의 경우는 온화하고 검소하고 너그럽고 인자하며 덕행이 있는 사람을 가려서 맡기고, 음흉하여 정직하지못한 사람은 내쫓고 가까이 두지말 것이며, 생활 용품과 의복과 노리개들도 모두 질박한 것으로 하고 사치스러운 물건은 보지못하게 하고 천박한 말은 듣지못하게 한다면, 교화가 마음과 함께 이루어져서 법도에 맞는 것이 마치 천성적으로 된 듯하고 성인의 자질이 이미 어릴 때부터 갖추어질 것입니다.
어느 정도 성장한 후에 좋은 말과 훌륭한 논설을 삼가 진달해서 순수한 자질을 양성하고 총명한 성품을 개발시킨다면, 습성과 지혜가 함께 성장하여 하나로 인하여 백 가지를 알게 되어 문왕같은 성인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니, 종묘사직과 신민의 복이 바로 여기에서 출발하게 됩니다.
신의 마음은 간절합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현재 종묘사직과 백성의 앞날을 위한 계책은 오직 성학(聖學)을 보도하는데 있습니다.
그 중에서 태자를 교양하는 것보다 더 큰 일은 없으니 성덕이 이미 이루어졌으므로 경계의 도움이 필요없다고 여기지 마시고 현재 어리다고 하여 보익하는 도리를 소홀히 하지말으소서.
대체로 성인으로는 순(舜)만큼 훌륭한 성인이 없는데 우(禹)·고요(皋陶)가 일찍이 경계하기를 잊지 않았습니다.
소공이 또 말하기를 「어린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자신의 철명(哲命)을 스스로 결정짓지 않는 경우가 없는 것과 같다」하였는데, 대개 이 말은 자식이 처음 태어났을 때 교양을 제대로 하지못하면 어리석은 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보통 사람도 삼가지않으면 안되는데 더구나 태자같이 중대한 분이겠습니까?’ ”
○左參贊宋浚吉論輔養元子箚曰:
臣偶閱先正臣趙光祖經筵陳說及李彦迪八條進規, 其中數款, 正與今日事相符, 而其所論說, 忠誠懇惻, 憂慮深遠, 都兪之際, 受施之間, 百載之下, 感涕自零, 而亦可爲萬世法程無疑也。 仍念我祖宗朝, 規模之美, 條制之密, 誠無愧於三代聖王之法, 而卽今所以輔養之具, 不翅鹵莾而滅裂, 非唯有愧於三代, 我祖宗良法美意, 亦不能遵承焉。 臣於是不勝慨然而嘆, 惄焉而憂, 玆敢不揆僭猥, 謄進兩賢臣所陳啓者, 以備睿覽。 臣願聖明, 詢問大臣, 參酌而用其中。 重念殿下, 累歲違豫, 停筵已久, 群情鬱塞, 氣象昏閉。 今幸神祇協祐, 聖體蘇安, 正宜奮勵振作, 如不及, 如恐失, 日有新業, 時有新功, 以承皇天眷祐之休, 以慰臣民顒望之意。 倘或遲延等待, 寬緩縱弛, 依舊病時塗轍, 則中外之缺望, 於是尤至。 而人心之向背, 實係於斯, 臣實懼焉。 卽今天時正熱, 潦濕方苦, 玉候調攝之餘, 雖不能頻御法筵, 或致勞傷, 而時於氣爽之朝, 暑退之夕, 召對儒臣, 講論經史, 日以爲常, 毌或少懈, 則不惟於進德修業之功, 大有裨益, 其於開釋湮鬱, 節宣氣體之道, 所補亦不細矣。 惟殿下, 旣以兩賢之說, 祖宗之所已行者, 敎養我元子, 又以是自警省焉, 宗社幸甚, 臣民幸甚。 先正臣趙光祖經筵陳說, 乃是我中廟朝也, 光祖時爲副提學。 啓曰: “元子, 開春則五歲也。 以常兒例言之, 則僅解言語之時, 而氣質卓異, 乃將爲大聖之資乎。 大臣雖或進見, 恐其徒爲禮敬, 而未盡敎誨之實也。” 承旨金正國曰: “世宗令弘文館學士, 往侍世子, 此甚良法美意也。 今者國本稍長, 而臣子識正者少, 豈不可憂乎,” 光祖又曰: “敎養元子, 其事甚難。 須擇宰相中賢德者, 使之親近薰炙, 以成德性可也。 自上亦須親敎善事, 至於君子、小人之進退, 吉匈安危之消長, 義利善惡之幾微, 反覆詳說, 則雖不能盡解, 聞見習熟, 自然與智俱長, 隱然之中, 所益甚大。 且於經筵, 使在座側, 與聞朝廷是非, 生民休戚, 使自少親接朝臣可也。” 光祖又曰: “元子年歲稍長, 知識異常, 近來未聞講學之何如, 憂慮實深。 輔養官或赴京或有病, 似不源源進見, 今國家之大可慮者, 正在於此。 不於今日, 預爲後日繼承之基, 則累世積久之業, 喪敗不難矣。 雖待正位東宮, 乃設僚屬。 但擇賢宰相, 加定輔養官, 而或令承旨或史官或弘文館年少之官, 時時進見, 觀其遊戲而敎導之可也。 程子請以士大夫之幼子, 侍太子, 當使早歲, 有親賢士大夫之心也, 但不可急迫也, 上曰: “元子學問, 豈嘗須臾廢哉, 其性素不〔喜〕雜戲, 但〔喜〕讀書, 此可喜也。 所讀之書, 《小學》也。 前日大臣, 撮其易解處敎之, 今則自首至尾, 無遺讀之矣。 輔養大臣則已定矣。 若時使承旨等往見, 則果漸有親近之心矣。” 光祖曰: “古人欲使正人, 與太子處者, 欲長太子親愛賢士之心也。 三代以下, 不能輔養太子, 故亂亡相繼, 善治無見焉。 《易》曰: ‘蒙以養正, 聖功也。’ 古人尙有胎敎, 況已有知覺之時乎, 夫異質不可恃也。 才氣過人者, 爲善固易矣, 爲惡亦不難, 不可不慮也。” 光祖又曰: “今聞元子聲音, 甚仁厚, 臣不勝喜悅之至。 古人云: ‘太子須以仁厚爲主。’ 豈不可喜乎, 今之敎養, 不可過於急迫, 當從容訓誨, 使之浸漸成就可也, 時或使遊於後庭, 以養其氣可也。” 李彦迪進修八規。 昔者太任, 娠文王, 有胎敎之法, 故文王生而明聖。 古之聖人敎子之法, 始於在胎之時, 而況旣生, 孩提有識乎, 臣竊思元子, 今雖在於襁褓, 生稟異質, 岐嶷夙成, 必有異於凡人者。 敎養輔益之道, 不可不預爲之備。 臣謹稽禮經, 凡三王敎世子, 必以禮樂, 立太傅、少傅以養之, 太傅在前, 少傅在後, 入則有保, 出則有師, 是以敎諭而德成也。 保傅篇曰: “古之王者, 太子乃生, 固擧以禮, 有司齋肅端冕, 見之南郊, 見于天也, 過闕則下, 過廟則趨, 孝子之道也。 故自爲赤子而敎固已行矣。 周成王幼在襁褓之中, 召公爲太保, 周公爲太傅, 太公爲太師。 保, 保其身體, 傅, 傅之德義, 師, 導之敎訓, 此三公之職也。 於是, 爲置少傅、少師, 是與太子宴者也。 故孩提有識, 三公、三少, 固明孝、仁、禮, 義以導習之, 逐去邪人, 不使見惡行。 於是皆選天下之端士博聞有道術者以衛翊之, 使與太子居處出入。 故太子廼生而見正事聞正言行正道, 左右前後, 皆正人也。 夫習與正人居之, 不能無正, 猶生長於齊, 不能不齊言也, 習與不正人居之, 不能無不正, 猶生長於楚, 不能不楚言也。” 孔子曰: “小成若天性, 習慣如自然。” 三代之所以長久者, 以其輔翼太子, 有此具也。 臣謂三代聖王之制, 皆可復於後世。 況此輔翼太子之法, 尤有關於宗社、生靈之休戚, 聖明在上, 擧而行之, 有何難焉, 秦、漢以來, 敎養國儲, 甚爲苟簡, 諭之非道, 敎之無法, 自致禍敗者多矣, 不可不戒。 昔文王使太公傅太子, 及嗜鮑魚而太公不與曰: “禮, 鮑魚不登於俎, 豈可以非禮而養太子,” 古人之敎太子, 其嚴如是。 非禮之味, 不可以養太子, 則不正之人, 不正之聲, 亦不可接於耳目矣。 故曰, 太子善在於早諭敎, 與選左右敎得, 而左右正則太子正矣。 此乃蒙以養正之道也。 臣不揆愚陋, 乃敢取先王之法, 可以施於今日者, 爲朝廷獻焉。 伏惟聖明留意, 更取全篇, 參考而施行。 凡輔養敎諭之方, 一如三代之法, 不待侍講院之設, 早立師、傅、保, 以領其調護之職, 又立賓客, 更相入侍, 以盡其敎養之職。 見之南郊, 蓋古天子之禮, 今雖不可擧行, 過闕則下, 過廟則趨之禮, 乃所以示臣子之道, 今亦可以行之。 至於保母及凡傅奉之人, 竝選溫良恭儉寬裕慈惠有德行之人, 以備之, 如有陰邪不正之人, 則斥去不近, 器用服玩, 皆須質朴, 侈靡之物, 不接於目, 淺俗之言, 不入於耳, 則化與心成, 中道若性, 聖質已具於孩提時矣。 及其少長, 嘉言格論, 謹陳於前, 有以養成純粹之質, 開發聰明之性, 則習與智長, 以一知百, 無異於文王之聖, 而宗社、臣民之福, 實源於此矣。 臣不勝惓惓。 臣竊惟方今爲宗社、生靈萬世之計, 惟在於輔導聖學。 而尤莫大於敎養儲宮, 不可以聖德已成, 而無規戒之益, 不可以方在襁褓而忽其輔翼之道也。 夫聖莫聖於舜, 而禹、皐陶未嘗忘規戒。 召公又曰: “若生子罔不在厥初生, 自貽哲命。” 蓋言子之初生, 敎養之待其道, 則哲, 失其道, 則愚。 凡人皆不可不謹, 而況儲貳之重乎.
현개 25권, 13년(1672 임자/청강희(康熙)11년) 5월 11일(병진) 3번째기사
집의 이상이 소를 올려 천재가 발생하는 것에 대해 극언하다
집의 이상(李翔)이 소를 올려 천재가 자꾸 발생하는 것이 걱정스럽다고 극언하기를,
“《시경(詩經)》을 살피건대, 4월에 서리가 빈번하게 내리는 현상은 사람을 쓰는 일에 잘못이 있기때문이라고 하였고, 한(漢)나라 사가(史家)의 말에, 삼공(三公)이 적임자가 아니면 삼광(三光)727)이 밝지않다고 하였으며, 방교(房喬)728)의 글에, 뭇 간인(奸人)들이 뜻을 뭉치면 그에 따른 이변으로 바람이 분다고 하였고, 채옹(蔡邕)729)의 말에, 권력이 임금에게 있지 않으면 우박이 농작물을 상한다고 하였습니다.
여러가지 책을 폭넓게 살펴볼 것같으면 이러한 기록들이 한둘이 아니니만큼, 재이의 발생은 위임한 사람이 적임자가 아닌데서 말미암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재앙의 토대가 벌써 형성되었는데도 전하께서는 깨닫지못하고 계시니, 어찌 깊이 우려스럽지 않겠습니까?
신이 지난해의 상소 내에다 사정(邪正)을 변별해야 된다는 한 가지 문제점을 대략 언급하면서 제딴에는 경방(京房)이 원제(元帝)를 대하던 뜻730)을 되살림으로써 성상께서 느껴 깨달으시기를 기대하였으나, 채택해주지 아니하고서 안에 두고 내리지않은 채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이번에 들으니, 송준길이 상소내에서 영의정 허적을 공척하였다고 하는데, 신이 비록 그 소본(疏本)을 아직 보지는 못했으나 그 큰 줄거리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준길이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은 신하로서,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을 누를 수 없어 구언(求言)하는 교서에 따라 간신을 변별하는 글을 용감히 올린 것이니, 신은 상께서 뜨끔히 깨닫고 일찌감치 어떤 처분을 하실 것으로 알았으나, 들리는 얘기로는 전하께서 죄를 주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은혜와 대우를 더욱 융숭하게 내리고 만류하는 예우가 갈수록 간절해지며, 도리어 유신의 정론을 그르다하여 미안한 하교를 내리시기까지 하였다는데, 비록 정말인지는 아직 알지 못하지만 만약 전연 허무맹랑한 얘기만은 아닐 경우,
전하께서는 간신에게 가리워 지내심이 어쩌면 그리도 심하단 말입니까?
혹시 유신의 상소 내에서 그의 간사한 정상을 남김없이 말하지 아니한 까닭에, 신임을 하다보니 그래도 아직은 깨닫지 못하셔서 그런 것은 아닙니까?
음양이 소장(消張)하고 사정(邪正)이 승부(勝負)하는 무렵에 세도(世道)의 승강(升降)과 국세(國勢)의 안위(安危)가 달려 있는 법입니다. 그러니 신이 어찌 화가 무섭다고 극언을 아니하여 우리 전하를 저버리겠습니까?
신이 평소부터 허적의 위인을 알고 있는데 그저 비루한 작자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 경박하게 촐랑대는 꼴이 애당초 길사(吉士)가 아니었고 약삭빠르게 요리조리 둘러대는 짓이 원래부터 간사한 사람이었습니다.
허적의 또래들에게 그를 평하여 보라고 해도 감히 괴상하고 엉뚱하다고 아니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일반 관직에 그를 제수하면 취할 만한 장점이 한 가지라도 없지는 않을 것이나, 그에게 정승 자리를 내주게 되면 어찌 재해가 한꺼번에 닥치는 일이 없겠습니까? 이미 허적을 재상에 앉혀 놓고 또 송준길을 조정에 같이 있게 하려 하다니, 이것은 향초·잡초와 얼음·재를 한그릇 속에다 섞어 놓은 것이나 뭐가 다르겠습니까? 그러니 그것들이 광결(光潔)하고 더러워지지 않기를 바라기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신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전하께서 허적에게 푹빠져 지내심이 유난히 심한 것은, 어찌 ‘허적이 능히 국사(國事)를 스스로 맡고 나선다’고 여겨서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가 스스로 맡고 나서는 것은, 사욕을 이루기 위해서이고 패거리를 심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그가 스스로 나서는 것은 도리어 잠자코 입다물고 지내면서 녹이나 받아먹는 자가 외려 해로운 바는 없는 것만도 못한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허적은 안으로 척리(戚里)·환시(宦侍)와 결탁하고 밖으로 조정 사대부와 결탁하고 아래로 시정 잡배들과 결탁하고 위로 임금에게 아첨을 하므로, 헛된 칭찬이 좍 깔려 ‘허충신(許忠臣)’이라는 설까지 안팎에 두루 찼습니다. 전하께서는 단지 그가 옳다는 얘기만 듣고 그가 그르다는 얘기는 듣지 못하고, 단지 그가 어질다는 얘기만 듣고 그가 나쁘다는 얘기는 듣지 못하시니, 훈김에 물씬 젖어든 나머지 그를 의지하고 후대하는 정도가 마치 이윤(伊尹)·여상(呂尙)·주공(周公)·소공(召公)과 같게 된 것이 진실로 이 때문입니다.
아, 지난 선조 때에 송준길등이 악을 배척하고 선을 선양하는 의론을 도맡아 주장하였는데, 그때에는 김적(金賊)731)의 악이 아직 표면화되지않은 상태였고 정사공신(靖社功臣)이라는 지위 또한 허적이 견줄 만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효종대왕께서는 공의(公議)를 좇고 ‘자기와 다른 자를 배척한다’는 의심을 갖지않으셨으며, 일찍이 경연 석상에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준길을 접견하면 마치 지란(芝蘭)732)을 마주한 듯하다’고 하셨으니, 보살피고 후대하신 뜻을 상상할 수가 있습니다.
전하께서 그를 예우하심이 성대한 점에 있어서도 시종 변함이 없어 사림에 모범이 되고 역사에 길이 빛나기에 충분하였는데, 무엇 때문에 일개 간사한 신하를 논척한 이번 일로 인해 또 ‘자기와 다른 자를 배척한다’는 의심을 가지시는 것입니까? 신은 아마 전하께서 평소에 유신을 대우하신 것이 애당초 성의에서 나온 일이 아닌 것으로 여깁니다.
신이 비록 송준길의 학문이 높은지 낮은지에 대한 등급은 모르지만, 이치를 따져 밝히고 마음가짐을 성실하고 올바르게 지니는 것이야말로 그가 일생동안 공부해 온 과정으로서, 그의 밝은 안목은 허적의 간사함을 꿰뚫어보기에 충분하고 그가 하는 말은 당세에 믿음을 받기에 충분합니다.
그런데 지금 머리가 허옇게 센 나이에 이르러 외려 편당(偏黨)을 하는 과실을 저지르기야 하겠습니까?
아, 당론이 일어난 이후로 간사하고 참소하는 못된 무리들이 등에 업은 세력이 있어 그 악을 스스로 엄폐하면서 시비를 현란시키니, 아무리 명군(明君)·성주(聖主)라 할지라도 그들의 술수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한(漢)·당(唐)의 일은 오늘날도 그것을 얘기하자면 오히려 뜻있는 사람들의 탄식을 한층 더 자아내게 하니, 어찌 통탄스러울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주자(朱子)의 말에 ‘진실로 군자라면 오히려 그 당인이 적을까 걱정스럽다’ 하였고, 선조대왕께서도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당에 들어가고 싶다’고 하셨었을만큼, 전하께서 마땅히 힘써 흠모하여 따라가기를 도모하셔야 될 일이 이에 있지 아니하겠습니까?
신이 초야의 미천한 신하로서 일신의 이해를 돌아보지 않고 감히 일대의 권간(權奸)을 말하여 이미 기울어진 표준을 붙들어 세우려고 하니, 그야말로 어리석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항시 또렷이 잊지 않고 있는 충성심에, 임금이 계신 점만 알고 있을 뿐 다른 것에 대해선 아랑곳하지 않다보니, 끝내 스스로 그만두지 못할 바가 있었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시원스레 용단을 내리시어 간사한 사람을 물리쳐 멀리하시고 임금을 훈계하는 훌륭한 노신(老臣)과 함께 나랏일을 꾸려나가신다면, 그야말로 종묘사직의 끝없는 복이 될 것입니다”하였는데, 상이 안에 두고 내리지 않았다.
註727]삼광(三光):해·달·별.註728]방교(房喬):당(唐)나라때의 명신(名臣)인 방 현령(房玄齡).註729]채옹(蔡邕):후한(後漢)때의 명신(名臣)임.註730]경방(京房)이 원제(元帝)를 대하던 뜻:경방(京房)은 전한(前漢) 때의 사람으로 역학(易學)에 정통하였고, 원제(元帝)를 섬기면서 간신(奸臣) 석현(石顯)을 몰아내려고 애를 쓰다가 도리어 석현의 배척을 받아 지방에 좌천되었으며, 나중에는 하옥되어 사형을 당하였다.《전한서(前漢書)》권75.註731]김적(金賊):김자점(金自點)을 가리킨다. 註732]지란(芝蘭):향초(香草).
○執義李翔上疏, 極言天災層疊之爲可懼曰:
按《詩經》, 以四月繁霜, 爲用人之失。 漢史言, 三公非其人, 則三光不明。 房喬之書, 群奸同志, 厥異風。 蔡邕之言, 權不在上, 雹傷物。 博考群書, 此類非一則可知災異之作, 由於委任非人。 厲階已成, 而殿下莫之悟, 豈非可憂之深哉, 臣去年疏中, 略及辨邪正一款, 竊自附於京房對元帝之意, 以冀聖心之感悟, 而不蒙採納, 留中不下, 以到今日矣。 今聞宋浚吉疏中, 攻斥領議政許積云。 臣雖未見疏本, 而其大意則可以想矣。 浚吉以受國厚恩之臣, 不勝憂國之忱, 求言之下, 敢上辨奸之章, 意謂自上惕然覺悟, 早有所處。 而傳聞, 殿下不惟不罪, 恩遇愈隆, 禮挽愈懇, 反以儒臣正論爲非, 至下未安之敎。 雖未知果爾, 而若不至於全然孟浪, 則殿下蔽於奸臣, 何其甚哉, 無乃儒臣疏中, 不盡其奸狀, 故信任之餘, 猶未覺悟而然耶, 陰陽消長, 邪正勝負之際, 世道之升降, 國勢之安危係焉。 臣豈畏禍, 不爲極言, 負我殿下哉, 臣素知許積爲人, 不過斗筲之器耳。 其輕佻跳踉, 元非吉士, 機辯巧黠, 自是憸人。 使積之儕流論之, 不敢不以爲怪妄也。 授之以有司之任, 不無一長可取。 假之以廊廟之權, 豈無災害之竝至乎, 旣以積爲相, 又欲宋浚吉之同朝, 是何異於雜薰蕕、氷炭於一器之中, 欲其光潔而不汚也, 此必無之理也。 臣竊料殿下之於許積, 陷溺特甚者, 豈不以爲積能以國事自任乎, 夫其所以自任者, 爲營私也, 爲植黨也。 然其爲自任, 反不如泯默尸居者之猶無所害也。 且積內交戚里、宦寺, 外交朝士大夫, 下交市井, 上媚君上, 故虛譽隆洽, 以至許忠臣之說, 遍滿內外。 殿下只聞其是, 不聞其非; 只聞其賢, 不聞其惡, 薰深之深, 倚重如伊、呂、周、召者, 良以此也。 嗚呼! 昔在先朝, 宋浚吉等專主激濁揚淸之論。 當其時金賊之惡, 猶未表著, 靖社之勳, 亦非許積之可比, 而孝宗大王俯從公議, 未嘗有伐異之疑。 嘗言於筵中曰: “予見浚吉, 若對芝蘭。” 其眷重之意, 可以想矣。 及殿下禮遇之盛, 亦終始不替, 足以矜式士林, 輝映竹帛矣。 何故因此斥一侫臣之事, 又有伐異之疑耶, 臣恐殿下平日之待儒臣, 初非出於誠意也。 臣雖未知宋浚吉學問之高下等級, 然明理誠正, 乃其一生工程, 其明足以燭其奸; 其言足以取信於當時。 到今白首之年, 反有偏黨之失乎, 嗚呼! 自有黨論之後, 奸回讒賊之徒, 有所憑藉, 自掩其惡, 以眩亂是非, 雖以明君聖主, 亦不免墮其譎中矣。 漢、唐之事, 至今言之, 猶增志士之歎, 豈不痛哉, 朱子有言曰: “苟君子也, 則猶患其黨之不衆。” 宣祖大王亦曰: “願入珥、渾之黨。” 殿下之所當勉慕企及者, 其不在於斯耶, 臣以草茅之賤, 不顧一身之利害, 敢言一代之權奸, 欲扶已傾之紐軸, 可謂愚矣。 然耿耿丹忱, 知有君而不知有他, 終有所不能自已也。 伏乞殿下廓揮乾斷, 斥遠奸人, 訓哲俊髦, 與圖國事, 則實爲宗社無彊之休。上留中。
숙종 4권, 1년(1675 을묘/청강희(康熙)14년) 윤5월 26일(계축) 2번째기사
유학 이창우가 상소하여 간쟁을 받아들일 것, 유현을 존중할 것 등을 아뢰다
유학(幼學) 이창우(李昌雨)가 상소(上疏)하여 9개의 조목(條目)을 말하였다. 그 한 조목은 간쟁(諫爭)을 받아들이라는 것이었으니, ‘지금 한 신하가 있으니, 그 곧은 의리와 절조(節操)는 급암(汲黯)이나 위징(魏徵)과 같을 뿐이 아닙니다’하였고, 그 한 조목은 유현(儒賢)을 존중하여야 한다는 것이었으니, ‘강태공(姜太公)은 90세에 문왕(文王)을 도왔고 백리해(百里奚)는 80세에 목공(穆公)을 도왔습니다. 옛부터 패업(覇業)을 이룬 왕으로 기덕(耆德)과 대로(大老)에 자뢰(資賴)하지 아니한 이가 있지 아니합니다’하였고, 그 한 조목은 전조(銓曹)의 선용(選用)을 신중하게 하라는 것이었으니, ‘이부(吏部)774)의 장(長)은 진실로 공명(公明)하고 정직한 사람이 아니면 그 책임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하물며 혼미(昏迷)하고 그릇되고 노둔(駑鈍)하여 남의 업신여김과 꾸짖음을 받는 자이겠습니까? 마땅히 기덕(耆德)으로서 인망(人望)이 무거운 사람을 뽑아서 천관(天官)775)의 장(長)으로 임명해야 할 것입니다’하였고, 그 한 조목은 대의(大義)를 밝혀야 한다는 것이었으니, ‘측문(側聞)하건대, 유신(儒臣)이 전하를 대의(大義)로 인도한다 합니다. 전하의 명철(明哲)로 이미 그러한 사람을 얻으셨으니, 이를 다 쓰지않으시면 어찌 사람을 얻었다하겠습니까?’하였다.
이창우(李昌雨)는 허목(許穆)의 무리이다. 이른바 ‘하나의 신하’라 한 것은 이수경(李壽慶)을 가리킴이요, ‘혼미하고 그릇되고 노둔하다’한 것은 김휘(金徽)를 가리킴이요, ‘기덕(耆德)으로 중한 인망(人望)이 있다’한 것은 허목(許穆)을 가리킴이요, ‘대의(大義)로 인도한다’한 것은 윤휴(尹鑴)를 가리킴이었다. 그 뜻은 김휘를 제거하고 허목을 등용하게 하려는 것이며, 온 나라의 일을 윤휴의〈의견을〉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창우의 소(疏)가 들어온 지 열흘이 못되어 허목이 전조(銓曹)의 장(長)이 되었고, 윤휴와 홍우원(洪宇遠) 역시 모두 발탁되었으니, 그 효과가 이와 같았다.
註774]이부(吏部): 이조(吏曹) 註775]천관(天官):이조.
○幼學李昌雨上疏, 言九條。
其一條, 納諫爭曰: “今有一介臣, 抗義直節, 不啻若汲黯、魏徵。” 其一條, 尊儒賢曰: “太公九十佐文王; 百里奚八十佐穆公。 自古伯王, 未有不資於耆德大老者。” 其一條, 愼銓選曰: “吏部之長, 苟非公明正直之人, 不能當其任。 況昏謬駑蹇, 受人悔罵者乎, 宜擇耆德重望之人, 置之天官之長。” 其一條, 明大義曰: “側聞儒臣導殿下以大義, 以殿下之明哲, 旣得其人, 未盡其用, 則其可謂得其人乎,
昌雨者, 穆之徒也。 所謂一介臣, 指壽慶也。 昏謬駑蹇, 指金徽也。 耆德重望, 指穆也。 導大義, 指鑴也。 其意欲去徽而用穆, 擧國而聽鑴也。 昌雨疏入未一旬, 穆爲銓長, 鑴、宇遠亦皆擢除, 其效如此。
숙종 4권, 1년(1675 을묘/청강희(康熙) 14년) 7월 12일(무술) 1번째기사
판중추부사 김수항이 차자를 올려 박헌의 소 등을 비롯한 남인의 횡포를 논하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수항(金壽恒)이 차자(箚子)를 올려 말하기를,
“아! 이제 시론(時論)을 주장하는 자들이 걸핏하면 반드시 말하기를 ‘군신(君臣)·부자(父子)의 윤리(倫理)를 밝힌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이 보는 바로는 이른바 군신(君臣)·부자(父子)의 윤리는 밝지 못하고 어두워 가고 있음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으로써 말함인가하면, 옛적 한(漢)나라 성제(成帝)가 즉위(卽位)한 첫 해에 승상(丞相) 광형(匡衡)과 어사대부(御史大夫) 장담(張譚)등이 석현(石顯)의 죄악을 아뢰어서 옛 고을로 옮겨 돌아가 죽게 하였습니다. 이를 사예교위(司隷校尉) 왕존(王尊)이 탄핵하여 아뢰기를, ‘승상과 어사대부는 석현(石顯)등이 권세를 독단하여 위복(威福)을 크게 지어 해내(海內)의 우환과 해독이 될 것을 알았으면서도 때맞게 아뢰어서 벌을 행하게 하지아니하고는, 도리어 선제(先帝)가 경복(傾覆)할 무리들을 임용(任用)한 것을 드날려 나타내고 백관(百官)들이 그들을 두려워하기를 주상(主上)보다 더했다고 함부로 말하여, 임금을 낮추고 신하를 높인 것은 잘했다고 일컬을 수 없습니다’하니, 광형(匡衡)이 부끄럽고 두려워서 사죄(謝罪)하였습니다.
대저 홍공(弘恭)과 석현(石顯)의 방자한 독단은 한(漢)나라 원제(元帝)의 혼약(昏弱)함을 나타낸 것이어서 왕존의 말이 오히려 이와 같았던 것입니다. 어찌 방자한 죄가 비록 석현에게 있지 않았겠습니까마는 그를 임용한 과실은 원제로부터 연유함이니, 원제의 신자(臣子)가 된 자로서는 감히 그 과실을 폭양(暴揚)하여 마침내는 임금을 낮추고 신하를 높이는 데로 돌아가지 않게 하려 함이 아니겠습니까?
왕존같은 자는 가히 임금과 신하의 의리(義理)를 안다고 이를 만하며, 광형(匡衡)으로도 오히려 부끄럽고 두려움을 알았다는 것은 또한 한 조각의 천리(天理)가 민멸(泯滅)하지않고 있음을 보인 것입니다.
오늘날 조정(朝廷)의 신하들이 송시열(宋時烈)의 죄(罪)를 논할 적에 문득 나라의 명령을 쥐고 위복(威福)을 지은 것으로써 죄안(罪案)을 삼으면서 심지어는 ‘인주(人主)로서도 그 죄를 바로잡지 못하였다’고 말합니다.
아! 전하(殿下)께서는 어찌 명철한 임금이 위에 있는데도 그 밑에 나라의 명령을 쥐고 위복(威福)을 마음대로하는 신하가 있는 것을 일찍이 보셨습니까?
옛 일을 끌어다가 논(論)한다면, 노(魯)나라의 삼가(三家)와 한(漢)나라의 동탁(董卓)과 조조(曹操), 당(唐)나라의 이임보(李林甫)와 송(宋)나라의 한탁주(韓,胄)·가사도(賈似道)가 바로 그 사람들인데, 이는 그 때를 어떠한 때로 여기며 그 임금을 어떠한 군주(君主)로 여기는 것입니까?
한갓 송시열(宋時烈)을 죄주기에 급급하여 그 말이 군부(君父)를 침범(侵犯)하였음을 돌아보지않은 것이니, 어찌 왕존(王尊)의 죄인이 되지 않겠습니까? 전번에 ‘신하가 강하다’는 말이 북쪽 통역의 입에서 나왔을 적에 군신(君臣) 상하(上下)가 모두 분완(憤惋)하고 통박(痛迫)하여 장차 변무(辨誣)하려는 거조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신하를 위하여 그러하였겠습니까?
진실로 이미 ‘신하가 강하다’고 말하였으면, 임금이 약한 것은 스스로 그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인신(人臣)의 강함이 뉘라서 나라의 명령을 쥐고 위복(威福)을 독단하는 것과 같은 것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오늘날 마땅히 변무(辨誣)할 무망(誣罔)은 다른 나라에 있지않고 우리 조정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다른 나라에 있으면 변명하고 우리 조정에 있으면 그만둔다면 그 의리(義理)에 있어서 과연 어떻다 하겠습니까?
전하의 출천(出天)의 효성으로 무릇 자성(慈聖)의 마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라면 진실로 지극하게 하지 아니하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인심(人心)이 착하지 못하고 의리(義理)가 밝지못하여, 전하의 신자(臣子)로서 전하의 효성을 체득(體得)하지 못하고서 전후해서 전하께 진언(進言)한 자가 거의 다 윤리를 거슬리고 강상(綱常)을 어지럽게 하는 자가 많을 뿐 아니라, 전하께 자성(慈聖)의 동정(動靜)을 조관(照管)하시기를 권하는 자까지 있기에 이르렀습니까?
예로부터 오면서 아들로서 부모를 살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 어찌 이치에 거슬리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설사 자성(慈聖)께서 과연 실덕(失德)이 있었다하더라도 공족(公族)으로서 중죄[重辟]를 범한 자에게는 오히려 ‘친(親)을 위해서는 휘(諱)해야 한다’하여 기필코 덮어두려 하면서, 어찌하여 유독 자성(慈聖)에게만은《춘추(春秋)》의 존(尊)을 휘(諱)하는 의리를 생각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은 국가와 휴척(休戚)891)을 같이하는 의리가 다른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니온 즉, 그의 소가운데 아뢴 것은 다만 지성으로 근심하고 사랑하는데서 나온 것인지라, 전하께서 받으시고 스스로 돌이켜 보시면서 사색(辭色)은 보이지 않으셨더라도 또한 그 뜻에 다른 것이 없음을 살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김우명을 불러 들여서 조정에서 힐문하기를 청하기에 이르러서 마치 치대(置對)하여 구문(鉤問)하는 것과 같음이 있었으니, 이는 무슨 뜻입니까?
《주역(周易)》가인괘(家人卦)의 단(彖)에 말하기를 ‘여자는 안에서 그 위치를 바르게 하고 남자는 밖에서 위치를 바르게 한다’고 하였고, 그 하문(下文)에 말하기를 ‘가인(家人)은 엄군(嚴君)이었다’하였으니, 이는 부모를 이른 말입니다. 이를 주석(註釋)하는 자가 말하기를 ‘이미 남자와 여자의 정위(正位)를 말하고 또 엄한 부모에 그 근본을 추구(推求)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보면 남녀와 안팎의 위치는 어머니와 아들을 이른 것이 아님이 어찌 작연(灼然)하게 너무나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홍우원이〉이를 끌어다가 비유한 것은 본디 이치에 거슬리는 것입니다.
허물을 두 번 거듭하지 않는다[不貳過]는 말에 이르러서는 더욱 신자(臣子)로서 감히 입에서 낼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여항(閭巷)의 사람으로서 필적(匹敵)하는 사이에서도 오히려 아들을 대하여 감히 그 부모의 잘못을 배척하지 못하는 것인데, 자성(慈聖)의 허물을 전하의 앞에서 지적하며 배척하여 말하기를 ‘그 허물을 두 번 거듭하지 말게 하소서’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분의(分義)이며 이것이 무슨 도리입니까?
전하의 명철하신 예지(睿智)로도 오히려 큰 허물을 가대(假貸)하시어서 일찍이 엄중한 말씀으로 통렬하게 물리치지 않으셨으니, 박헌(朴瀗)의 호서(狐鼠)같은 무리들이 그 뒤를 이어 일어날 것은 본래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박헌의 소(疏)에서 말한 ‘안으로 자성(慈聖)의 마음을 경동(驚動)케 한다’함은 그 말이 크게 불경(不敬)하고 그 뜻은 극히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어떠한 사람이 어떠한 말로 자성(慈聖)을 경동케 하였다는 것인지 알지못하겠습니다. 그리고 자성(慈聖)께서 경동하신 것이 어떠한 일에 나타났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남의 지시와 사주를 받은 지의 여부(與否)는 논하지도 말고 엄하게 국문(鞫問)을 가하여 그 정상을 얻고 그 죄를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고 여깁니다. 하물며 자성(慈聖)께서 약방(藥房)에 내리신 하교는 신자(臣子)로서는 차마 들을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성(慈聖)의 하교가 박헌의 소에 연유하였음은 대신(大臣)이 이미 탑전(榻前)에서 하교를 받은 바 있습니다.
자성(慈聖)께서 숙환(宿患)이 침고(沈痼)되신 가운데 거듭 거창한 일을 당하셨으므로, 기력(氣力)의 쇠약하심은 진실로 늠름(懍懍)892)하심을 견디기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근심과 슬픔으로 초삭(焦爍)893)한 것은 약이(藥餌)로서 효험(効驗)을 바랄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이제 또 이로 인하여 더욱 손상하시어 옥체(玉體)에 불예(不豫)를 더하시게 되면, 전하께서는 마땅히 어떠한 심회를 지으시겠습니까?
옛 말에 이르기를 ‘효도란 어버이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오늘날 자성(慈聖)을 섬기시는 도리로는 그 마음을 위안(慰安)하여 드리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간사한 사람들의 무함하여 헐뜯은 죄를 다스리시와, 조금이라도 자성(慈聖)의 마음을 위안하심이 이 또한〈자성을〉보호해드리는 한 방법입니다. 이에 있어 혹시라도 다스림이 엄하지않으면 뒷날에 흉악하고 패역한 말이 반드시 이에서 그치지 아니하여, 성상(聖上)의 효성을 드러낼 수도 없거니와 중외(中外)의 의혹을 풀 수도 없을 것이니, 어찌 크게 두려워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박헌의 정상은 성상께서도 이미 통촉(洞燭)하시고 나포(拿捕)하여 국문(鞫問)하라는 명을 특별히 내리셨습니다. 그런데 조사기(趙嗣基)가 공공연하게 소를 올려서 ‘자성(慈聖)께 원망이 돌아간다’는 말로써 군상(君上)을 공동(恐動)하게 하려는 계책을 삼기에 이르러서는 너무도 기탄(忌憚)없는 행위라고 이를 만합니다.
조사기가 견책(譴責)을 입은 뒤에 박헌을 두둔하던 무리들이 조금은 그치는 데 이르렀습니다만, 그러나 온갖 계책으로 그를 구해내려 하여 합사(合辭)하여 석방(釋放)을 청합니다. 그들이 박헌을 위하는 데는 지극하였거니와 유독 자성(慈聖)은 위하지 않는 데이겠습니까?
이와 같이 하고도 군신과 부자간의 윤리를 밝힌다고 이른것은 신은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정(李楨)과 이연(李㮒) 등은 왕실의 지친(至親)으로서 두 조정의 망극(罔極)한 은혜를 입었는데도 전고(前古)에 없었던 죄를 범하였으니, 사람의 마음이 함께 통분하는 바이며, 나라의 헌장(憲章)이 용서할 수 없는 것인데도 전하께서 법을 굽히고 은혜를 펴서 다만 찬배(竄配)의 은전을 베푸셨으니, 이는 본시 성덕(盛德)의 일이었습니다.
겨우 반년(半年)만에 갑자기 완전한 석방을 명하셨으니, 이는 은혜에 치우쳐서 법을 멸시(蔑視)한데 가깝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거조는 처음부터 특별한 은혜에서 나온 것인즉 또한 친친(親親)의 인(仁)에 해가 되지는 아니하겠으나, 신하로부터 힘써 청하기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일찍 석방하여 돌아오지 못할까 두려워하기에 급급(汲汲)하였으니, 어찌 크게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또 들으니, 그들이 조목으로 올린 소(疏)의 말에 ‘〈정과 연은〉처음부터 중대한 죄가 아니라’말하고, 비유한다면 마치 인가(人家)의 자제들이 부형의 앞에서 비복(婢僕)을 가까이한 것과 같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이는 선왕(先王)께서 깊이 근심하시며 난처(難處)해하셨던 바이며, 자성(慈聖)께서 이미 신린(臣隣)에게 친히 유시(諭示)하신 일입니다.
만일 선왕께서 근심하신 것을 부당(不當)한 근심으로 여기고 자성(慈聖)의 하교를 반드시 믿을 것이 아니라고 하지 않는다면, 감히 방자하게 이런 말은 하지 못할 것입니다.
군신(君臣)·부자(父子)의 윤리를 밝힌다는 자도 또한 이와 같습니까? 무릇 신이 진달하는 바가 큰 윤리와 큰 기강(紀綱)에 관련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혼란[淆亂]되고 패퇴[斁敗]됨이 이에 이르렀으니, 반드시 돈독하게 펴고 소연(昭然)하게 높이 게양(揭揚)한 뒤에야 임금의 덕을 닦을 수 있고 조정을 다스릴 수 있으며 인심도 기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신은 아마도 날로 민민(泯泯)하고 분분(棼棼)한 곳으로 나아가서 구원할 수 없을까 두렵습니다. 말단의 업무와 미세한 폐단을 파하고 베푸는 일과 서옥(庶獄)의 경수(輕囚)를 소결(疏決)하여 석방하는 데 이르러서는 행하여도 좋고 행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이로써 하늘의 노여움을 감동시켜 돌리고 나라의 운명을 길이 연속하고자 한다면, 또한 그르지 않겠습니까?”하였다.
차자(箚子)가 들어갔을 적에는 임금이 마침 하직(下直)하는 수령(守令)들을 인견(引見)하고 있었기 때문에 입시(入侍)한 승지(承旨) 이하진(李夏鎭)으로 하여금 비답을 쓰게 하였다.
비답에 이르기를,
“경(卿)의 차사(箚辭)를 보고 몸이 떨리고 마음이 냉각해 옴을 깨닫지 못하겠다. 내가 들으니, ‘대신(大臣)의 책무는 당(黨)을 보호하는데 있지않고 나라를 위하여 성심을 다하는 데 있다’고 한다.
근일에 극심한 가뭄의 참혹상은 전고(前古)에 없었던 바이므로 특별히 소결(疏決)을 행하여 위로는 하늘의 노여움에 답(答)하고 아래로는 도현(倒懸)의 위급함을 풀어주려 한 것인데, 이제 경의 차자(箚子)를 보니 놀라고 분함을 이길 수 없다.
아! 효종[孝廟]께서 송시열(宋時烈)을 대우하시기를 마치〈은(殷)나라〉고종(高宗)이 부열(傅說)에게,〈주(周)나라〉문왕(文王)이 여상(呂尙)894)에게,
〈촉(蜀)나라〉소열(昭烈)895)이 공명(孔明)896)에게,〈당(唐)나라〉태종(太宗)이 위징(魏徵)에게 대하듯 하셨으니, 송시열로서는 마땅히 힘을 다하여 보답을 도모하는 데 겨를이 없어야 하는데, 그의 계획이 이러한 데서 나오지 아니하고 도리어 음험(陰險)한 계책을 내서 윤서(倫序)를 폄강(貶降)하고 예제(禮制)를 괴란(壞亂)하였다. 마땅히 일죄(一罪)897)로 논단하여야 할 것이로되, 효종께서 예우(禮遇)하셨기때문에 차율(次律)로 시행한 것이다.
경의 차자가운데에 말한 ‘한갓 송시열을 죄주기에 급하여서 그 말이 군부(君父)를 침범(侵犯)하였음을 알지 못하였다’고 이른 것은 더욱 경악할 일이다. 옛적에 대순(大舜)의 세상에서도 오히려 공공(共工)898)과 곤(鯀)899)을 유극(流殛)에 처한 법이 있었다.
하물며 송시열은 효종의 후은(厚恩)을 잊어버렸으며 효종의 종통(宗統)을 그르쳐 놓았으니, 이는 참으로 효종의 죄인인 것이다.
어찌 효종의 죄인을 석방하여 하늘의 노여움을 돌리고 재이(災異)를 그치게 할 이치가 있겠는가?
또 말하기를 ‘전하께 자성(慈聖)의 동정(動靜)을 조관(照管)하기를 권하였다’ 한 데 이르러서는 더욱 놀라고 분함을 견딜 수가 없다. 이는 장차 우리 모자(母子)를 이간하려는 것인가? 내가 자성(慈聖)을 받들기를 새벽과 저녁으로 문안하면서 옛날 문왕(文王)이 왕계(王季)900)에게 문안하던 일을 사모하여 동동촉촉(洞洞屬屬)901)하면서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장차 잃어버릴 것같이 하여 조금도 간단(間斷)함이 없는 것이 나의 밤낮으로 잊히지 않는 마음이다.
그런데 경은 대신(大臣)의 반열에 있으면서 이에 인자(人子)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을 언연(偃然)하게 글을 써서 중외(中外)의 청문(聽聞)을 놀라고 의혹하게 하였으니, 나는 곧장 땅을 뚫고 들어가서 보지않고 싶다.
아! 모자(母子)의 사이는 남이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하물며 이와 같이 결코 이치에 가깝지도 않은 말로써 군부(君父)를 후욕(詬辱)하였으니, 이를 차마 할 수 있는데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차사(箚辭)를 한 번 보고 하늘을 우러르며 가슴을 치니, 사는 것이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 또 정(楨)과 연(㮒) 등은 모두 골육(骨肉)의 지친(至親)으로 비록 죄를 범한 것이 있어 먼 땅에 오랫동안 귀양가있어도 아직도 관유(寬宥)의 은전(恩典)을 입지못하였던 것을 자성(慈聖)께서 인애(仁愛)하신 마음으로 특별히 석방하고 싶어 하시기에, 내가 자성(慈聖)의 지극한 뜻을 몸받아서 서울 집으로 돌아와서 문을 닫고 자책(自責)하게 하였으니, 이는 의친(議親)·의족(議族)의 의리가 분명하다. 그런데 경의 뜻은 크게 서로 같지 않으니, 내가 참으로 깨달아 알지 못하겠다.
정(楨)과 연(㮒)등이 범한 것은 몸가짐을 삼가지 못한데 지나지 않았을 뿐이고, 송시열(宋時烈)은 그 자신이 일죄(一罪)를 범하였는데도, 경은 도리어 그를 신구(伸救)하려 하고 나의 골육지친(骨肉至親)으로 하여금 불측(不測)한 곳에 빠뜨리려 하였다.
경이 아무리 호당(護黨)에 급하기로서니 방자하게 차마 들을 수 없는 패어(悖語)를 남발하였으니, 무슨 면목(面目)으로 지하(地下)에서 양조(兩朝)를 다시 뵙겠는가? 대개 경의 차자의 말은 교지(敎旨)에 응하여 폐단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송시열(宋時烈)이 죄를 입은 데에 노여움을 쌓아서 분분(忿忿)한 나머지 이로써 조정을 현혹하려는 계획이다.
대신의 하는 짓이 이러하고서야 어찌 재앙을 부른 데 한 도움이 되었다고 하지 않겠는가? 나는 실로 국가가 장차 망할 것을 통탄한다”하였다.
임금이 빨리 유시하기를 한 번에 하여 마치 글을 외우듯 하니, 사관(史官)이 붓을 날려서 써도 십분의 일도 미치지 못하였다.
이하진(李夏鎭)이 자기의 뜻을 보태쓰려 하니, 사관(史官) 조지겸(趙持謙)이 이를 못하게 하였다.
임금이 처음에 말한 것은 ‘하늘을 우러러도 부끄러워서 다만 스스로 분읍(憤泣)할 뿐이다’한 것을 이하진이 ‘다만 스스로 분읍한다[只自憤泣]’의 네 글자를 빠뜨리고 ‘부끄러워서 가슴을 친다[愧恧以叩胷]’는 다섯 자로 썼다.
조지겸이 말하기를 ‘「가슴을 친다[叩胷]」는 두 자는 주상의 처음 하교에는 「부끄럽다[愧恧]」뿐이었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가슴을 친다[叩胷]」그대로 쓰라’하였다.
윤휴(尹鑴)가 청하기는 ‘자성(慈聖)을 관속(管束)케 하라.’고 하였는데,
김수항(金壽恒)이 잘못 듣고 ‘조관(照管)’이라 하였다.
김수항(金壽恒)의 자(字)는 구지(久之)요, 호(號)는 문곡(文谷)이니,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의 손자이다. 풍의(風儀)가 단수(端粹)하고 문장이 정련(精鍊)하여 당시의 관면(冠冕)이 되었다.
이때는 여러 소인(小人)들이 그 흉악하고 패역(悖逆)함을 마음대로 자행하여 군신(君臣)과 부자(父子)의 대륜(大倫)이 거의 이멸(夷滅)해 버리니, 사람들의 마음이 분완(憤惋)하여 진언(進言)하는 자가 서로 있었지마는, 거의가 그 정절(情節)을 부석(剖析)하지 못하였는데, 유독 김수항만이 모두 열거해 가면서 통렬하게 가려내니, 명백(明白)하고 격절(激切)하여 사기(辭氣)가 늠연(凛然)하였다.
차자(箚子)가 한 번 나오매, 적신(賊臣) 윤휴(尹鑴) 등의 심간(心肝)이 육안(肉案) 위에 달려 있어 사람마다 볼 수 있었다.
몸은 비록 함패(陷敗)하였지만 장채(章蔡)의 꾀902)가 또한 이로 인하여 조금은 지식되었고, 동조(東朝)가 보존함을 얻어 무사(無事)하게 된 것은 실로 김수항의 한 차자의 힘이었다.
사람들은 그 윤이(倫彛)를 붙들어 세운 것은 참으로 김상헌(金尙憲)의 손자됨이 부끄럽지않다고 일렀으며, 사림(士林)에서 흡연(翕然)히 존앙(尊仰)하였다. 송시열이 시(詩)로써 그를 찬미하니, 그 시에 이르기를, ‘한 기둥 정정(亭亭)하게 홀로 서 있으니[一柱亭亭獨立時], 미친 물결 성나게 부딪쳐도 기울지않았네[狂瀾怒觸未曾欹]. 뉘라서 동쪽 노(魯)나라의 사문(斯文)이 죽었다 말하리오[誰言東魯斯文喪]. 천추(千秋)에 길이길이 힘입으리이다[驘得千秋永頼之]’하니, 한 때에 전송(傳誦)되었다.
註891]휴척(休戚):안락과 근심걱정.註892]늠름(懍懍):두려워하는 모양註893]초삭(焦爍):태워 녹임 註894]여상(呂尙):태공망(太公望).註895]소열(昭烈):소열황제 유비(劉備) 註896]공명(孔明): 제갈양(諸葛亮).註897]일죄(一罪):죄로서 가장 무거운 종류에 속하는 것으로, 십악(十惡)에 해당하는 죄임.註898]공공(共工):사흉(四兇)의 한사람.註899]곤(鯀):사흉(四兇)의 한사람.註900]왕계(王季):문왕 아버지.註901]동동촉촉(洞洞屬屬):성실하고 전일(專一)한 모양.註902]장채(章蔡)의 꾀:장채는 장돈(章惇)과 채경(蔡京). 이들은 모두 송(宋)나라때 정치가로서,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복구하고 원우(元祐)의 구신(舊臣)들을 배척하였음.
○戊戌/判中樞府事金壽恒上箚曰:
嗚呼! 今之主時論者, 動必曰明君臣、父子之倫, 而以臣觀之, 所謂君臣、父子之倫, 未免有不明而晦者矣。 何以言之, 昔漢成帝卽位之初年, 丞相匡衡、御史大夫張譚等, 奏石顯罪惡, 徙歸故郡而死。 司隷校尉王尊劾奏丞相、御史, 知顯等顓權擅勢, 大作威福, 爲海內患害, 不以時白奏行罰, 反揚著先帝任用傾覆之徒, 妄言百官畏之, 甚於主上, 卑君尊臣, 非所宜稱, 衡慙懼謝罪。 夫以恭、顯之顓恣、漢元之昏弱, 王尊之言尙如此。 豈不以顓恣之罪, 雖在於顯, 而任用之失, 由於元帝, 爲元帝之臣子者, 所不敢暴揚其過, 終爲卑君尊臣之歸也。 若王尊者, 可謂知君臣之義, 而以匡衡而猶知慙懼, 則亦可見一段天理之不泯矣。 今日朝臣論宋時烈之罪, 輒以執國命, 作威福爲罪案, 至曰人主不敢正其罪。 噫! 殿下曷嘗見明君哲辟在上, 而下有執國命, 擅威福之臣乎, 援古而論之, 若魯之三家、漢之卓、操、唐之林甫、宋之侂冑、似道是已。 此其時爲何等時, 而其君爲何如主耶, 徒急於罪時烈, 而不顧其言之侵犯於君父, 豈不爲王尊之罪人乎, 向者臣强之說, 發於北譯之口, 君臣上下, 憤惋痛迫, 將有辨誣之擧, 此豈爲臣下而然哉, 誠以旣曰臣强, 則主弱自在其中故也。 人臣之强, 孰如執國命, 擅威福者哉, 然則今日當辨之誣, 不在於異國, 而在於朝廷之上。 在異國則辨之, 在朝廷則置之, 其於義理, 果何如也, 以殿下出天之孝, 凡所以慰悅慈聖之心者, 固無所不用其極。 而奈何人心不淑、義理不明, 爲殿下臣子者, 不能體殿下之孝思, 前後進言於殿下者, 率多悖倫而亂常, 至有勸殿下以照管慈聖之動靜者。 從古以來, 未聞以子而照管父母, 則斯豈非逆理之言也, 設令慈聖, 果有失德, 而於公族之犯重辟者, 猶曰爲親者諱, 而必欲覆蓋之, 則何獨於慈聖而不思《春秋》諱尊之義耶, 淸風府院君金佑明之於國家, 同休共戚之義, 非他人之比, 則疏中所陳, 只是至誠憂愛之發。 而殿下之受而自反, 不示辭色, 亦察其意無他也。 至請召致而廷詰, 有若置對鉤問者然, 此何意耶, 《易》《家人》之彖曰: “女正位于內, 男正位于外。” 其下文曰: “家人有嚴君焉, 父母之謂也。” 註之者曰: “旣言男女之正, 又推本於父母之嚴。” 觀此則男女內外之位, 非母與子之謂者, 豈非灼然甚明, 而以此援以爲喩, 固已悖矣。 至於不貳過之說, 尤非臣子之所敢出於口也。 今夫閭巷之人, 匹敵之間, 猶不敢對其子而斥其父母之過, 則指斥慈聖之過於殿下之前, 而曰無使貳其過, 是何分義, 是何道理, 以殿下之明睿, 猶且假借大過, 曾不嚴辭痛斥, 如朴瀗狐鼠之輩, 接跡而起, 固不足怪也。 瀗疏所謂內以驚動慈聖之心云者, 其言大不敬, 而其意極叵測。 未知何人以何說而驚動慈聖, 慈聖之所驚動者, 亦著於何事耶。 臣以爲毋論其受人指嗾與否, 不可不嚴加鞫問, 得其情而正其罪也。 況慈聖下藥房之敎, 有非臣子所忍聞者, 而慈敎之由於瀗疏, 大臣已承敎於榻前矣。 慈聖宿患沈痼之中, 荐罹巨創, 氣力之澌綴, 誠有不勝其懍懍者。 憂哀之所焦鑠, 有非藥餌之所可責效, 而今又因此衋傷, 以致玉體之增其不豫, 則殿下當作何如懷耶, 《語》曰: “孝莫大於寧親。” 殿下今日事慈聖之道, 莫大於慰安其心。 治奸人誣詆之罪, 少慰慈聖之心, 此亦保護之一道也。 於此而苟或治之不嚴, 則日後凶悖之言, 必不止此, 而無以彰聖上之孝, 解中外之惑矣, 豈不大可懼哉, 瀗之情狀, 聖上亦旣洞燭, 特下拿鞫之命。 而趙嗣基之公然投疏, 至以歸怨慈聖, 爲恐動君上之計, 可謂無忌憚之甚矣。 嗣基被譴之後, 右瀗之徒, 迄可少戢, 而百計營救, 合辭請釋, 其爲瀗地則至矣, 獨不爲慈聖地乎, 如此而謂之明君臣、父子之倫, 非臣之所敢知也。 楨、㮒等以王室至親, 荷兩朝罔極之恩, 犯前古所無之罪, 人心之所共憤, 邦憲之所不貸。 而殿下屈法伸恩, 只施竄配之典, 此固盛德事也。 纔及半年, 遽命全釋, 不幾於恩勝而蔑法乎, 然而此擧初出於特恩, 則亦不害爲親親之仁, 而至於自下力請, 汲汲然猶恐放還之不早, 豈非大可寒心者乎, 且聞其分疏之語, 至以爲初非重大之罪, 比如人家子弟之近婢僕於父兄之前, 是何言也, 先王之所深憂而難處者, 慈聖已親諭於臣隣矣。 如不以先王之憂爲不當憂, 而慈聖之敎爲未必信, 則必不敢肆然爲此言也。 明君臣、父子之倫者, 亦如此乎, 凡臣所陳, 無非關於大倫、大紀者。 而其淆亂斁敗, 乃至於此, 必使之敦敍、昭揭, 然後君德可修, 朝廷可理, 人心可悅。 不然, 臣恐其日就泯泯棼棼, 而莫之救也。 至若末務細瘼之罷施、庶獄輕囚之疏釋, 行之可也, 不行亦可也。 欲以此感回天怒, 迓續邦命, 不亦左乎,
箚入, 上適引見下直守令, 使入侍承旨李夏鎭書批, 批曰: “觀卿箚辭, 不覺體寒而心冷也。 予聞大臣之責, 不在於護黨, 而在於爲國盡誠。 近日亢旱之慘, 前古所無, 別爲疏決, 上以答天怒, 下以解倒懸之急。 今觀卿箚, 不勝駭憤。 噫! 孝廟之待時烈, 亦猶高宗之於傅說、文王之於呂尙、昭烈之於孔明、太宗之於魏徵, 則爲時烈者, 所當竭力圖報之不暇。 而計不出此, 反生陰險之計, 貶降倫序, 壞亂禮制, 所當論以一罪, 而以孝廟禮遇之故, 施以次律矣。 卿之箚中所謂徒急於罪時烈, 而不知其言之侵犯君父云者, 尤極驚愕。 昔大舜之世, 尙有共、鯀流殛之典。 況時烈忘孝廟之厚恩, 誤孝廟之宗統, 此實孝廟之罪人也。 豈有釋孝廟之罪人, 而回天怒, 弭災異之理乎,” 又曰: “至有勸殿下以照管慈聖之動靜云者, 尤不勝駭憤。 是將欲離間予母子耶, 予之奉慈聖, 晨夕問寢, 慕昔文王朝王季之事, 洞洞屬屬, 猶恐不及, 如將失之, 無少間斷。 乃予日夜耿耿之心, 而卿居大臣之列, 乃以人子所不忍聞之說, 偃然筆之於書, 以駭惑中外之聽, 予直欲鑽地以入而無覩也。 噫! 母子之間, 人所難言, 況以如是萬萬不近理之說, 詬辱君父,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一覽箚辭, 仰天扣胸, 生不如死。 且楨、㮒等, 俱以骨肉之親, 雖有罪犯, 久竄遠地, 尙未蒙寬宥之典。 以慈聖仁愛之心, 特欲放釋, 故予仰體慈聖之至意, 返之京第, 使之杜門自責。 其於議親、議族之義明矣。 卿意大相不同, 予實未曉也。 楨、㮒等所犯, 不過持身不謹而已。 時烈則身犯一罪, 而卿反伸救, 欲使我骨肉至親, 陷於不測之地。 卿雖急於護黨, 肆爲不忍聞之悖語, 何面目復謁兩朝於地下乎, 蓋卿之箚語, 非爲應旨救弊, 積怒於時烈之被罪, 忿忿之餘, 欲以此爲眩惑朝廷之計也。 大臣所爲如此, 此豈非召災之一助也哉, 予實痛國家之將亡也。” 上疾諭一遍如誦文, 史官飛書, 十不及一。 夏鎭欲以己意增書, 史官趙持謙止之。 上初曰: “仰天愧恧, 只自憤泣。” 而夏鎭落 “只自憤泣” 四字, 書愧恧以叩胸。 持謙曰: “叩胸二字, 自上初敎以愧恧。” 上曰: “仍以叩胸書之。” 鑴請管束慈聖, 而壽恒誤聞以爲照管。 壽恒字久之, 號文谷, 文正公尙憲之孫。 風儀端粹, 文章精鍊, 爲時冠冕。 是時, 群小肆其兇悖, 君臣父子之大倫, 幾乎夷滅無遺, 人心憤惋, 進言者相續, 而率未能剖柝其情節。 獨壽恒悉數而痛辨之, 明白激切, 辭氣澟然。 箚本一出, 賊鑴輩心肝懸在肉案上, 人人得以見之。 身雖陷敗, 而章蔡之謀, 亦因是少戢。 東朝得保無事, 實壽恒一箚之力也。 人謂其扶樹倫彝, 眞不愧爲尙憲之孫, 士林翕然尊仰之。 宋時烈以詩美之曰: “一柱亭亭獨立時, 狂瀾怒觸未曾欹。 誰言東魯斯文喪, 贏得千秋永賴之。” 一時傳誦。
숙종 4권, 1년(1675 을묘/청강희(康熙)14년) 8월 25일(경진) 1번째기사
이조판서 윤휴가 사직소를 올리므로 위유하다
이조판서 윤휴(尹鑴)가 이수경(李壽慶)을 논핵(論劾)한 대관(臺官)을 외방(外方)에 내쳐서 보임(補任)하려고 하자, 낭관(郞官) 유명현(柳命賢)이 듣지아니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틈이 생겨서 상소하여 사직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예전에 문왕(文王)은 상보(尙父)953)를 얻어서 나라가 다스려졌고, 제(齊)나라 환공(桓公)은 이오(夷吾)954)를 얻어서 패자(霸者)가 되었다.
과궁(寡躬)은 다행히 두 어진이를 초야(草野)에서 얻고 또 경학(經學)과 재지(才智)의 신하 몇 사람을 얻어서 간우(艱虞)함을 구제하게 하는데, 경은 어찌하여 사소한 말을 마음에 두고 이와 같이 돌아보지 아니하는가?
다시 허탄한 말에 마음을 움직이지말고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을 더욱 굳게하여 나의 지극히 바라는 바를 저버리지 말도록 하라”하고,
인하여 사관(史官)을 보내어 전유(傳諭)하였다.
이때 사헌부(司憲府)에서 또 임상원(任相元)이 잇달아 대직(臺職)에 제수된 것과 오시복(吳始復)이 바로 동벽(東壁)955)에 오른 것으로써 정조(政曹)를 허물하여 당랑(堂郞)956)을 추고(推考)할 것을 청하자, 윤휴가 크게 노하여 상소(上疏)하여 사직(辭職)하면서, ‘모계(謀計)를 경영하며 사사로이 붙좇아 억측해 맞히고[經營謀計 私附奇中], 황하 물가에 살면서 속임수를 많이 쓰며[居河之麋 爲猷將多], 힘도 용기도 없으나 어지러움만 일삼아 일으키네[無拳無勇 職爲亂階]’957)라는 등의 말까지 있었는데, 임금이 위유(慰諭)하였다.
註953]상보(尙父):주(周)나라 현신인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의 존호.註954]이오(夷吾):제(齊)나라 현신인 관중(管仲)의 자(字).註955]동벽(東壁):여기서는 홍문관부응교(弘文館副應敎)를 가리킨 것. 동쪽자리에 앉기때문에 동벽이라 하였음.註956]당랑(堂郞):당상관과 낭관.註957]힘도 용기도 없으나 어지러움만 일삼아 일으키네[無拳無勇 職爲亂階]:여기서 “居河之麋 無拳無勇 職爲亂階”라는 말은《시경(詩經)》소아편(小雅篇) 교언(巧言)에서 인용한 것으로서, 참언(讒言)으로 쫓겨난 자가 소인(小人)의 참언을 믿는 임금을 풍자하며 자신의 처지를 노래한 것이라 함.
○庚辰/吏曹判書尹鑴欲出補論劾李壽慶之臺官于外, 郞官柳命賢不聽。 因此生鬧, 上疏辭職, 上答曰: “昔文王得尙父而治; 齊桓得夷吾而覇。 寡躬幸得兩賢於草野, 又得經學才智之臣數人, 以濟艱虞。 卿何介懷纖芥之言, 邁邁若是, 勿復動念於虛誕之說, 益堅愛君憂國之誠, 無負至望。” 仍遣史官傳諭。 時, 憲府又以任相元之連除臺職、吳始復之徑陞東壁, 咎政曹, 請推考堂郞。 鑴大怒, 上疏辭職, 至有經營謀計, 私附奇中, 居河之麋, 爲猷將多, 無拳無勇, 職爲亂階等語, 上慰諭之。
숙종 4권, 1년(1675 을묘/청강희(康熙) 14년) 11월 8일(임진) 1번째기사
지패법을 시행토록 하고 윤휴등의 체부설치 요청으로 허적을 체찰사로 삼다
대신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를 인견(引見)하였다.
이때에 장차 지패법(紙牌法)을 행하려고 하였는데, 병조판서(兵曹判書) 김석주(金錫胄)가 마침 흉년을 당하였으므로, 시행할 수 없다고 하였으나, 윤휴(尹鑴)가 반드시 시행할 것을 힘써 청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물으니, 모두 시행하는 것이 옳다고 하고 홀로 이무(李袤)만 시행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임금이 여러 신하의 의논에 따라 그대로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윤휴와 이동규(李同揆)는 체부(體府)를 설치할 것을 힘써 청하고, 허목(許穆)은 이를 어렵게 여겼는데, 임금이 허적(許積)에게 묻자, 허적이 말하기를,
“신은 능히 결단하지 못하겠습니다”하였으니,
대개 그 뜻이 스스로 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임금이 마침내 허적을 명하여 체찰사(體察使)로 삼았는데, 허적이 거짓으로 사양하자, 이동규가 말하기를,
“방숙(方叔)1157)은 아주 늙었으나, 그 꾀가 뛰어나다고 하였으니, 장수를 어찌 다만 근력(筋力)만으로 취하겠습니까?”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상(領相)을 두고 그 누가 하겠는가?”하였다.
이무(李袤)가 잇달아 조지겸(趙持謙)의 일을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파직하라”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나가도록 명하고, 오직 허적·허목만 머물게하여 한 폭의 그림을 내어 보였는데, 바로 만경창파(萬頃滄波)에 조각배 한 척이 떠 있는 것이었다. 임금이 허적등에게 이르기를,
“배가 닻줄과 노가 없이 중류(中流)에서 바람을 만나면 반드시 전복할 근심이 있으니, 이는 군도(君道)에 미루어 생각할 만하다”하였다.
그림 위에 한 편(篇)의 글이 있는데, 바로 어제(御製)이었다.
그 글에 이르기를,
“대저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이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 학문을 좋아하는 것이고, 둘째 어진 사람을 쓰는 것이고, 셋째 충간(忠諫)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넷째 그 과실을 듣기를 좋아하는 것이고, 다섯째 보화(寶貨)를 천하게 여기고 어진이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무엇이 학문을 좋아하는 것이라고 이르는가?
인군(人君)은 먼저 옛 성현(聖賢)의 학문을 급무로 삼고 날마다 법연(法筵)에 나아가서 미묘한 말과 심오한 이치를 토론하면, 그 공효(功効)가 점차 날마다 성취되고 달마다 진보하는데 이르게 될 것이며, 그 성취한 것이 마침내 대성(大聖)의 경지에 이를 것이다.
《전(傳)》에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종일 먹지아니하고 밤새도록 잠자지 아니하며 생각하였으나, 배우는 것만 같지 못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아! 그 학문에 부지런히 힘쓰고 도덕에 쉬지 않고 힘쓴 것이 매우 명료하다.
아조(我朝)의 성묘(成廟)1158)께서는 당시 바야흐로 양암(諒闇)1159)중에 계시면서 경악(經幄)과 더불어 깊은 뜻을 강변(講辨)하고, 밤에는 야대(夜對)를 내려 고사(古史)의 치란(治亂)·흥망(興亡)·선악(善惡)·성패(成敗)의 자취를 확론(確論)하셨으니, 그 학문에 마음을 쓴 것이 이에 극진하였다.
옛적에 위무공(衛武公)1160)은 90의 늙은 나이에도 오히려 항상 부지런히 학문에 힘썼는데, 하물며 소장(少壯)한 자이겠는가? 이는 자르고 갈고 쪼고 닦은 듯한 학문과 묵직하고 위엄있고 훤하고 의젓한 덕(德)은 기오편(淇澳篇)1161)에서 보고 감탄한 것이니, 아름답지 않다 하겠는가?
무엇을 충간(忠諫)을 받아들인다고 이르는가?
《서경(書經)》 태갑(太甲)에 이르기를, ‘그대의 뜻을 따르는 말이 있으면 반드시 도(道)에 어긋나는지 알아보고, 그대의 뜻에 거슬리는 말이 있으면 반드시 도에 맞는지 알아보라’하였는데, 무릇 인군이 된 자는 충(忠)과 사(邪)를 분변하여 그 사람됨이 충후(忠厚)하고 독실(篤實)하면 올려서 쓰고, 그 사람됨이 교묘한 말로 간사하게 아첨하면 물리쳐서 멀리 하기를 거저(籧篨)116 2)를 버리는 것과 같이 할 뿐만이 아니니, 삼가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어진 사람을 임용한다는 것은 무엇을 이르는가?
옛사람이 말하기를, ‘임금은 적임자를 구하기에는 수고롭고 적임자를 얻으면 편하다’라고 하였으니, 옛날 문왕(文王) 때에 선비를 대우하는 예(禮)를 다하지 아니하였다면, 강태공(姜太公)은 마침내 위천(渭川)의 한 늙은이가 되었을 뿐이며, 소열(昭烈)1163)의 삼고(三顧)의 높은 정성이 아니면 와룡(臥龍)1164) 은 남양(南陽)의 한 농부가 되었을 뿐이다.
이로 미루어 살펴보건대, 어진 선비가 나오고 나오지 아니하는 것은 모두 임금의 수고로운 마음에 달려있을 뿐이다.
무엇을 그 허물듣기를 좋아한다고 이르는가?
옛 제왕(帝王)은 나라를 다스리면서 진선지정(進善之旌)1165)과 간고(諫鼓)116 6)와 비방지목(誹謗之木)을 두었었으니, 모두 구도(求道)하여 와서 간언(諫言)하게 하려는 까닭이었다.
이로 미루어 살펴보건대, 인군의 자리에 있는 자는 옳은 말을 듣기 좋아하되, 허물이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욱 힘써서 마침내 지극히 착하고 허물이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며, 이와 같이 그치지 아니하면 명철한 군주의 천하를 다스리는 일도 이에 벗어나지 아니할 것이다.
무엇이 보화를 천하게 여기고 어진이를 소중히 여긴다고 이르는가?
《전(傳)》에 이르기를, ‘재물을 천하게 여기고 덕을 귀하게 여기니, 어진이를 존경하는 까닭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러므로 군주가 보배로 삼는 것은 금옥(金玉)이 보배가 아니고, 어진 신하가 보배가 된다.
그래서 내가 다섯 가지에 항상 뜻을 두고 몸소 실행하는 것이다.
아아, 군신(君臣)의 의(義)를 창파(滄波)의 한 조각배에 비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배라는 것은 군주이고 물이란 것은 신하이니, 배가 닻줄과 노가 없이 중류(中流)에서 풍파를 만나면, 배는 반드시 전복될 것이므로, 이로 군주의 덕에 미루어 보면 또한 알 수 있을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인군의 정교(政敎)가 먼 곳과 가까운 곳에 융성하고 흡족하면, 사이(四夷)가 와서 공물(貢物)을 바치고, 백성이 그 덕에 감화될 것이니, 진실로 능히 이와 같으면 그 나라가 편안해질 것이다.
인군의 덕과 은혜가 아래에 미치지 못하고, 간사한 무리가 그 사이에 권세를 부리면 나라가 위태로와질 것이다. 내가 일찍이 이에 말이 미치자, 척연(惕然)히 놀라고 두려워하여 화공(畵工)에게 명하여 물과 배의 모양을 그려서 단장하고 채색하여 족축(簇軸)1167)을 만들어 항상 눈앞에 두고 비록 잠깐 사이라도 늘 생각하여 그치지아니하면 천감(天鑑)이 밝게 비추어 사령(四靈) 1168)이 스스로 이르고, 요얼(妖孼)1169)이 저절로 사라질 것이며, 국조(國祚)1170)가 항상 장구하여 우리 동방(東方)에 무궁한 아름다움이 이를 것이다. 을묘년[菁兎] 계미일(癸未日)에 기록한다”하였다.
註1157]방숙(方叔):주(周)나라 선종(宣宗)때의 현신(賢臣)으로 형만(荊蠻)을 평정하였음.註1158]성묘(成廟):성종(成宗).註1159]양암(諒闇):임금이 상중(喪中)에 있음.註1160]위무공(衛武公): 춘추시대 위(衛)나라 임금.註1161]기오편(淇澳篇):《시경(詩經)》의 편명(篇名) 註1162]거저(籧篨):아첨을 잘하는 비루한 사람.註1163]소열(昭烈):촉한(蜀漢)의 시조(始祖)인 유비(劉備).註1164]와룡(臥龍):제갈양(諸葛亮)의 별호 註1165]진선지정(進善之旌):요(堯)임금때 기(旗)를 네 거리에 세우고, 진언(進言)하고자하는 사람을 그 밑에 서게 하였다는 고사(故事).註1166]간고(諫鼓):옛날 임금에게 간언(諫言)이나 소원(訴願)하고자하는 사람에게 그 뜻을 통하게 하기 위하여 궁문(宮門)에 큰 북을 세워두고 이를 두드리게 하였다는 고사.註1167]족축(簇軸):족자(簇子).註1168]사령(四靈):기린·봉황·거북·용 등 네가지 신령한 동물.註1169]요얼(妖孼):재이(災異).註1170]국조(國祚):국운(國運).
○壬辰/引見大臣、備局諸臣。 時, 將行紙牌法, 兵曹判書金錫冑以爲, 適當凶歲, 不可行。 尹鑴力請必行。 上問于諸臣, 皆以爲可行, 獨李袤以爲不可行。 上從諸臣議, 命仍行。 尹鑴、李同揆力請設體府, 許穆難之。 上問許積, 積曰: “臣未能決。” 蓋其意, 欲自爲之故也。 上遂命積爲體察使, 積佯辭。 同揆曰: “方叔元老, 克壯其猷, 將帥豈可但取筋力,” 上曰: “捨領相其誰,” 袤連啓趙持謙事, 上曰: “罷職。” 上命諸臣出, 獨留積、穆, 出示一幅畫, 乃滄波萬頃, 泛扁舟一葉也。 上謂積等曰: “舟無維楫, 而中流遇風, 則必有顚覆之患。 此可推於君道矣。” 圖上有一篇文, 乃御製也。 其文曰:
夫治國之道有五焉, 一曰好學問也, 二曰用賢良也, 三曰納忠諫也, 四曰好聞其過也, 五曰賤寶貴賢也。 何謂好學問也, 人君先以古聖賢之學爲急務, 日御法筵, 討論微辭蘊奧, 則其功也, 漸抵乎日就月將; 其成也, 遂至於大聖之域。 《傳》曰: “吾嘗終日不食、終夜不寢以思, 不如學也。” 嗟乎! 其拳拳於學問, 孜孜乎道德, 章章明矣。 我朝成廟, 時方居諒闇之中, 晝則晝講, 與經幄講辨奧旨; 夜則賜對, 確論古史治亂興亡、善惡成敗之跡, 其加意於學問, 於斯乎盡之矣。 古者衛武公以九耋之年, 猶常勤勤服膺於學問, 況於少壯者乎, 此切磋琢磨之學, 瑟僴赫咺之德, 見嘆於《淇澳》之篇者, 可不美歟, 何謂納忠諫也, 《書》《太甲》曰: “有言遜于汝志, 必求諸非道; 有言逆于汝志, 必求諸道。” 夫爲人君者, 能辨忠邪, 其爲人也, 忠厚篤實, 進而用之; 其爲人也, 巧言孔任, 斥而遠之, 不啻若祛籧篨, 可不愼歟, 何謂任用賢良也, 古人有言曰: “人君勞於求人, 逸於得人。” 古昔文王之時, 不殫遇士之禮, 則太公終爲渭川之一老翁耳; 昭烈若非三顧之隆, 則臥龍終爲南陽之一農夫耳。 由此觀之, 賢士之出與不出, 皆在於人君勞心而已。 何謂好聞其過也, 古之帝王之治國也, 有進善之旌、敢諫之皷、誹謗之木, 皆所以求道而來諫也。 由是觀之, 其位在人君者, 樂聞其昌言, 有則改之, 無則加勉, 終至於至善無過之域。 若是不已, 則明王之治天下, 不外於此矣。 何謂賤寶貴賢也, 《傳》曰: “賤貨而貴德, 所以尊賢也。” 是以人君之爲寶, 金玉非寶, 良臣爲寶。 予於五者, 常加留神體行者。 嗟乎! 君臣之義, 比之於滄波之一葦。 何則, 夫舟者, 君也, 水者, 臣也。 船無維楫, 而中流遇風波, 則船必覆矣。 以此推之於君德, 亦可知矣。 何故, 人君之政敎, 隆洽乎遐邇, 則四夷來貢, 民感其德, 誠能若是, 其國安矣。 人君之德惠, 未及乎下, 孔壬之徒, 用事於其間, 則邦國危矣。 孤嘗興言于此, 惕然驚懼, 命畫工圖水舟之形, 粧繪簇軸, 常目在之, 雖造次斯須之間, 念念不已, 則天鑑孔昭, 四靈自臻, 妖孽自消, 國祚恒久, 以臻我東方無彊之休矣夫。 歲次靑兎癸未日識。
숙종 6권, 3년(1677 정사/청강희(康熙) 16년) 5월 27일(임인) 2번째기사
우참찬 윤휴로 하여금 선왕의 행장을 고치게 하다
우참찬(右參贊) 윤휴(尹鑴)가 차자를 올리기를,
“선왕조(先王朝) 신축년1680) 무렵에 조정이 인종(仁宗)과 명종(明宗)을 조천(祧遷)하는 일로 묘당(廟堂)에 물었을 때에, 송시열(宋時烈)이 유신(儒臣)으로서 헌의(獻議)하면서, 맨끝에 우리나라 종묘[太廟]의 제도에도 언급하여, 목조(穆祖)를 종묘의 태조(太祖) 자리에 앉히고, 태조 이하는 소목(昭穆)의 서열을 매기는데 마치 계승(繼承)해온 예처럼 하려고 해서, 송(宋)나라 선정(先正) 주문공(朱文公)1681)이 ‘송희조(宋僖祖)를 태조가 동향(東向)하고 있는 자리로 옮겨 바로잡아야 한다’고 논한 것을 인용하여 말을 했었는데, 식견있는 원로(元老)들이 근심하여 한탄하지않는 사람이 없으면서 ‘송시열이 단지 복제(服制)에 관한 일만 가지고 조정을 그르쳐놓은 것이 아니라, 장차는 또 이를 가지고 묘조(廟祧)1682)를 놀라게 하는 짓을 하여 조종(祖宗)들에게 죄를 얻게 되겠다’고 했었습니다.
대개 선왕(先王)1683)들의 제도는, 천자(天子)가 그 시조(始祖)를 체제(禘祭)할 적에 하늘에게 배향(配享)하여 종묘를 높이 세웠었으니, 주(周)나라가 이미 천하를 소유하고서는 후직(后稷)을 높여 태조로 삼고,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은 세실(世室)에 앉힌 것이 그것입니다.
제후(諸侯)들은 감히 높이기를 천자들처럼 하지않고 천명(天命)을 받아 건국(建國)했던 분으로 태조를 삼아, 대대로 그 분을 시조로 했었으니, 또한 천명 받게 된 것을 중히 여기고 국가의 종통(宗統)이 엄연해지게 한 것으로서, 노(魯)나라가 주공(周公)을 시조로 하고 제(齊)나라가 강태공(姜太公)을 시조로 한 일 같은 것이 그것입니다.
예경(禮經)의 가르침과 역대의 법전(法典)이 훤하게 되어있는데도, 자신의 어둡고 막혀있음을 헤아리지 않고서 무엄하게 예를 말하여, 지난날에 복제(服制)를 논한 것과 다름이 없는 짓을 했었는데, 다행히도 우리 현종대왕(顯宗大王)께서 그의 아뢴 말을 멈춰 두고 계하(啓下)하지 않으심으로써 세 분의 영혼1684)이 신위(神位)에 안정될 수 있게 되고 오묘(五廟)1685)가 안녕할 수 있었습니다.
송시열이 당초에 적자(嫡子)를 서자(庶子)로 만들고, 아들은 어머니를 신하삼지 못한다는 말을 함으로써, 스스로 임금을 폄강(貶降)하고 종통(宗統)을 두 가지로 한 죄를 저질렀었으니, 어찌 이처럼 예경에 어그러지고 법전을 어지럽힌 말들이 다시 뒷사람들을 오도(誤導)하여 대방(大坊)1686)을 무너뜨리지 않을는지 알 수 있습니까?
마땅히 법전에 나타내어 분명하게 후세에 보여줌으로서, 우리 성고(聖考)1687)의 깊고도 아름다운 학식을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신이 진실로 일찍부터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알고서 속으로 한탄해 왔었는데, 행장(行狀)을 지을 때에는 원래의 행장에 실려있지도 않고 미처 초록(抄錄)해놓지도 못한데다가, 노쇠(老衰)한 병으로 혼망(昏妄)해져 전혀 기억하지 못하여, 그만 이 일을 빠뜨리게 되어 버렸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 다시 본 행장을 신에게 내리시고, 또한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그 일을 고찰해 내어 행장내용에 편입(編入)하도록 하시고, 신(臣)에게는 정신을 가다듬고 행장을 보완하는 일에 마음과 생각을 다할 수 있도록 용납해 주시어, 우리 성고(聖考)의 행사가 온 나라 사람들의 귀와 눈에 훤히 나타나게 되도록 하소서”하니,
답하기를,
“차자에 말한 대로 시행하겠으니, 경(卿)은 마음을 안정하고 지어 올리라”하였다.
註1680]신축년:1661 현종2년 註1681]주문공(朱文公):주희의 시호.註1682]묘조(廟祧):종묘.註1683]선왕(先王):삼대(三代) 시절의 왕들.註1684]세 분의 영혼:태조(太祖)의 아버지 환조(桓祖)와 조부 도조(度祖)및 증조부 익조(翼祖).註1685]오묘(五廟):제후(諸侯) 나라의 종묘제도. 곧 5신위(神位)를 봉안함을 뜻한 것. 여기서는 태조(太祖)와 그 당시 임금의 부·조·증·고(父祖曾高)의 신위를 뜻함. 註1686]대방(大坊):예법을 가리킴.註1687]성고(聖考):현종.
○右參贊尹鑴上箚曰:
先朝辛丑年間, 朝廷以仁、明二廟祧遷事, 詢廟堂, 宋時烈以儒臣獻議。 而其末遂及我朝太廟之制, 欲令穆祖居太廟太祖之位, 而太祖以下序昭穆, 如繼承之例, 引宋先正朱文公論宋僖祖之宜正太祖東向之位者以爲言, 有識長老莫不憂歎以爲: “時烈不徒以服制事詿誤朝廷, 行且以此震驚廟祧, 得罪祖宗矣。” 蓋先王之制, 天子禘其祖以配天, 而尊立其廟, 如周之旣有天下而尊后稷爲太祖, 文、武爲世室是也。 諸侯則不敢上擬於天子, 以受命建國者爲太祖, 而世世祖是人也。 亦所以重受命而嚴國統, 如魯祖周公, 齊祖太公是也。 禮經之訓、歷代之典章章, 而其不揣蒙蔽, 無嚴言禮, 與向前論服制事無異也。 幸賴我顯宗大王寢其奏不下, 三靈得以奠位, 五廟得以安寧矣。 時烈始有以嫡爲庶子、不臣母之說, 以自取貶君、貳統之罪, 又安知此悖經, 亂法之說, 更不疑誤後人, 毁隳大坊也, 宜著之典冊, 明示後世, 以彰我聖考淵懿之識也。 臣固嘗知有此事, 而竊歎之, 及撰行狀時, 以其原狀之不載、抄錄之不及, 衰疾昏妄, 全不記憶, 遂致遺失此事。 望殿下, 更下本狀于臣, 且令史官, 考出其事, 使編入此事于狀中, 容臣收召魂魄, 得竭心思於補闕之役, 俾我聖考之行事, 昭著國人之耳目。
答曰: “當依箚辭施行, 卿其安心撰進。”
숙종 22권, 16년(1690 경오/청강희(康熙)29년) 10월 22일(기묘) 1번째기사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봉하다
희빈(禧嬪) 장씨(張氏)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지난해에 이 명이 있었으나, 장렬 왕후(莊烈王后)의 상제(祥祭)·담제(禫祭)를 지내지 않았으므로 책례(冊禮)를 치르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도감(都監)을 두어 거행하였다. 그 옥책문(玉冊文)에 이르기를,
“왕은 이르노라. 하늘과 땅의 덕이 모여서 만물이 힘입어 비로소 살듯이 부부의 윤리가 이루어지고, 낮과 밤이 나뉘어 해와 달이 번갈아 밝히듯이 안팎의 교화가 갖추어지므로, 임금의 다스림은 반드시 왕비의 어짊을 힘입어야 한다. 후궁에서 세자를 기르매 노경(魯經)7194)에는 귀하게 된 어머니의 표상을 전하였고, 왕실(王室)에 효순(孝順)하매 주아(周雅)7195)에는 잘 다스린 신하의 아름다움을 실었다.
이제 다행히 궁 안에서 덕이 있는 사람을 가리매 자나깨나 구하던 짝에 합당하니, 아름다운 위호(位號)를 바루고 절차를 갖춘 의례(儀禮)를 거행한다.
아! 너 장씨는 일찍부터 아름다운 자태를 타고나고 훌륭한 가르침을 베풀었다. 상서(祥瑞)가 몽일(夢日)7196)에서 조짐을 보이매 요옹(姚翁)은 천하(天下)의 귀인(貴人)이라 감탄하고, 사책(史冊)에 사록(沙麓)이 무너진 것이 적혀 있으매 건공(建公)은 원성(元城)의 성녀(聖女)를 점쳤다.7197)
오직 그 의도(儀度)가 법칙에 맞으므로 명성이 향기를 드날리니, 계명(鷄鳴)7198)에서 경계(儆戒)를 더욱 밝히면 이보다 덕(德)이 더 나타남이 없고, 인지(麟趾)7199)에서 풍악을 울리면 하늘에서 녹(祿)을 받을 것이다.
왕비의 자리가 겨우 비게 된 이때에 큰 명(命)이 허락됨을 보니, 귀장(龜章)7200)·적불(翟茀)7201)·상복(象服)7202)이 빛나고, 일진이 좋은 때에 대례(大禮)를 거행한다.
이에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 권대운(權大運)·행병조판서(行兵曹判書) 민암(閔黯)을 보내어 절(節)을 가지고 가서 예를 갖추어 왕비로 책명(冊命)한다.
아아, 자손이 백세(百世)에 번영하고 교화가 사방에 터잡으려면 교만하고 사치한 것을 염려하여야 하니, 늘 쉽게 발생하는 것을 경계하여야 한다.
절검(節儉)이 아니면 어찌 충만함을 유지하겠는가?
숭고(崇高)에 처할수록 겸외(謙畏)를 더하여 자신의 수양을 삼가고, 종묘(宗廟)를 받들어 제수(祭需)를 주관하여 내 효리(孝理)를 도와, 임금을 돕는 큰 길상(吉祥)을 힘써 보전하고, 동관(彤管)의 칭예(稱譽)를 길이 끼치라.
그러므로 교시(敎示)하니, 잘 알아야 한다”하였다.【대제학(大提學) 민암(閔黯)】
교명문(敎命文)에 이르기를,
“임금은 이르노라, 대궐에서 원자(元子)를 길러 세자를 책봉하는 전례(典禮)를 치르자, 중궁의 위호(位號)를 밝혀 왕비를 세우는 의례(儀禮)를 거행하니, 음공(陰功)을 도우려면 참으로 교화에 근본하여야 한다.
아! 너 장씨는 늘 내칙(內則)을 따라서 덕이 후궁 중에서 으뜸이니, 성품이 그윽하고 고요하여 주(周) 문왕(文王)의 후비(后妃)와 아름다움을 짝할 만하고, 몸소 문안하여 대비(大妃)를 섬기게 되더니, 어찌 다행히도 시중들던 끝에 과연 이처럼 단장을 마치는 경사가 있게 되었는가?
중대한 종사(宗社)를 부탁할 데가 있게 되는 것은 하늘이 나라를 돕는 것이고,《춘추(春秋)》의 의리에서 상고할 것은 어머니가 아들 때문에 귀하여지는 것인데, 마침 중궁 자리가 비었을 때에 존귀한 중전 자리에 합당하다.
생각하면 성종(成宗)때의 옛 일이 있어서 징험할 만하고, 상고종(商高宗)이 상제(喪制)가 끝나기를 기다린 일7203)에 비추어도 예(禮)에 있어서 당연하므로, 10월의 좋은 날을 가려서 중궁의 자리를 바룬다.
이에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 권대운(權大運)·행병조판서(行兵曹判書) 민암(閔黯)을 보내어 절(節)을 가지고 가서 예를 갖추어 왕비로 책명(冊命)하게 하니, 귀장(龜章)·적불(翟茀)은 전책(典冊)에 갖추어서 빛을 내고, 옥갑(玉匣)·주유(珠襦)는 물채(物采)를 융성히 하여 더욱 환하다.
아! 자리를 지키되 반드시 공경하고 반드시 경계하며, 다스림을 돕되 능히 검소하고 능히 부지런하라.
인지(麟趾)와 같이 자손을 번성하게 하면 나라의 형세가 반석처럼 튼튼할 것이고, 계명(鷄鳴)과 같이 경계를 아뢰면 궁에 들어갔을 때에 간언(諫言)은 듣게 될 것이니, 태임(太姙)·태사(太姒)의 아름다운 명성을 떨어뜨리지 말고 조종(祖宗)의 훌륭한 공열(功烈)을 길이 이어받으라.
그러므로 교시(敎示)하니, 잘 알아야 한다”하였다.
【홍문 제학(弘文提學) 유명천(柳命天)이 지어 바쳤다.】
대사(大赦)하고, 백관(百官)이 진하(陳賀)하였다.
팔방에 교서(敎書)를 반포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임금은 이르노라, 천도(天道)가 지극히 크나 땅이 아니면 만물을 생성하는 공이 없으며, 인륜이 터잡고서 집으로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교화를 가져오니, 이 성대한 의례를 마치매 온 백성과 함께 기쁨을 같이하여야 마땅하다. 돌이켜보면 내가 기업(基業)을 이어받은 이래로 중궁이 중간에 자리를 비우니, 성녀(聖女)를 구하여 얻어서 자나 깨나 찾는 생각에 응하지 못하면 어찌 공경히 제사를 받들어 종묘(宗廟)의 일을 주관하게 할 수 있으랴마는, 다행히 하늘의 돌봄을 힘입어 후궁에서 원자(元子)를 얻는 상서를 크게 열었다. 덕을 숭상하는 것은 태임·태사의 아름다운 명성을 이어받아 으레 법도를 따르고, 귀한 것으로는《춘추》의 대의(大義)에 맞아 원량(元良)을 길렀으니, 상복을 벗은 때에 맨 먼저 길일을 가려서 위호를 바룬다.
생각하건대, 예전에 내조(內助)의 보탬은 처음을 삼가서 마지막까지 꾀하려는 것이려니와, 그래서 임헌(臨軒)하는 옛 법을 강구하여 의물(儀物)을 갖춘 성대한 전례(典禮)를 거행하여 장씨를 왕비로 책봉하니, 완염(琬琰)7204)이 빛나고 적불(翟茀)이 빛났다.
경계는 계명(鷄鳴)에 두매 밤낮으로 삼가는 아름다움이요, 경사는 인지(麟趾)에 맞으매 참으로 종사(宗社)와 백성의 복이니, 큰 은혜가 두루 미치게 하는 뜻에 붙여 대명(大命)을 선포하여 사유(赦宥)한다.
이달 22일 매상(昧爽) 이전부터 사죄(死罪) 이하의 잡범(雜犯)을 모두 용서한다. 벼슬에 있는 자는 각각 한 자급(資級)을 올리되 자궁(資窮)인 자는 대가(代加)한다.
아아, 십란(十亂)7205)에 의지하여 후손을 길이 넉넉하게 하기를 바라거니와, 일월(日月)이 함께 밝으매 신인(神人)이 모두 기뻐함을 보았고, 뇌우(雷雨)가 일어나서 풀어 주니 백성이 다 새로와지기를 기대한다.
그러므로 교시(敎示)하니, 잘 알아야 한다”하였다.
【대제학(大提學) 민암(閔黯)이 지어 바쳤다】
註7194]노경(魯經):《춘추(春秋)》註7195]주아(周雅):《시경(詩經)》의 소아(小雅)와 대아(大雅).註7196]몽일(夢日):해가 가슴으로 들어오는 꿈.註7197]사책(史冊)에 사록(沙麓)이 무너진 것이 적혀있으매 건공(建公)은 원성(元城)의 성녀(聖女)를 점쳤다:한(漢)나라 무제(武帝)때 왕하(王賀)가 위군 원성(元城)으로 이사해 와서 살았는데, 한 늙은이가 말하기를, “춘추(春秋) 때 사록(沙麓:진(晋)나라에 있던 토산(土山)의 이름)이 무너졌는데, 일관(日官)이 점치기를, ‘음(陰)이 양웅(陽雄)이 되어 토(土)와 화(火)가 상승(相乘)하므로, 무너졌으니, 645년 뒤에 성녀(聖女)가 있어 흥(興)할 것이다’하였으니, 그것이 제(祭)나라의 전씨(田氏:왕하는 전씨의 후손임)일 것이다. 이제 왕옹유(王翁孺:옹유는 왕하의 자(字)임)가 바로 그 땅으로 이사해 왔고 햇수도 맞으니, 80년 뒤에 귀한 여인이 있어 천하를 흥하게 할 것이다”하였음. 이후 과연 왕하의 손녀가 18세에 궁궐에 들어가서 황후가 되고, 애제(哀帝)가 죽은 뒤에 섭정(攝政)하였는데, 그 해가 바로 사록이 무너진 지 645년에 해당되었다는 고사(故事) 註7198]계명(鷄鳴):《시경(詩經)》제풍(齊風)의 편명으로, 왕비(王妃)가 아침 닭 울음소리를 듣고 임금에게 정청(政廳)에 나아가 정사(政事)를 보도록 권고하는 내용으로 된 시(詩)임.註7199]인지(麟趾):《시경(詩經)》주남(周南)의 편명으로, 왕비가 임금의 자손을 번창하게 하는 것을 말함.註7200]귀장(龜章):거북 모양으로 만든 황금 패물.註7201]적불(翟茀):꿩의 깃털로 장식한 수레 포장.註7202]상복(象服):요적(褕翟). 꿩의 깃털을 수놓은 왕후의 옷.註7203]상고종(商高宗)이 상제(喪制)가 끝나기를 기다린 일:《서경(書經)》상서(商書) 열명(說明)상에 보면, “고종(高宗)이 거상(居喪)하여 3년동안 움막에서 지냈는데, 이미 상(喪)을 면하고도 아무 말이 없었다 [王宅憂 亮陰三祀 旣免喪 其惟弗言]”한 데에서 나온 말로, 장렬왕후(莊烈王后)의 부묘례(祔廟禮)때문에 왕비의 책봉(冊封)이 늦어진 것을 비유한 말임註 7205]십란(十亂):주(周)나라 무왕(武王)때 나라를 잘 다스린 신하 10인, 곧 주공단(周公旦)·소공석(召公奭)·태공망(太公望)·필공(畢公)·영공(榮公)·태전(太顚)·굉요(閎夭)·산의생(散宜生)·남궁괄(南宮适)·문모(文母:太任)임 註7204]완염(琬琰):아름다운 옥(玉).
○己卯/冊禧嬪張氏爲王妃, 前年有是命。 而因未經莊烈王后祥禫, 故未行冊禮。 至是始設都監而行之。 其玉冊文曰:
王若曰: ‘天地合而萬物資始, 夫婦之倫成。 宵晝分而二曜迭明, 內外之敎備。 玆故帝王之治, 必賴后妃之賢。 毓慶堯門, 魯經垂貴母之象。 思媚京室, 周雅著亂臣之休。 今幸選德於宮闈, 克叶求配於寤寐。 肆正顯號, 誕擧縟儀。 咨! 爾張氏, 夙稟令姿。 早擒芳訓, 祥徵夢日。 姚翁歎天下之貴人, 史記崩沙。 建公卜元城之聖女, 惟其儀度之中矩。 是以惠問之揚芬, 申儆戒於鷄鳴。 不顯惟德, 播聲詩於麟趾。 受祿于天, 値此壼位之纔虛。 聿見景命之允屬, 龜章翟茀。 象服斯煌, 日吉辰良。 大禮乃擧, 玆遣臣議政府領議政權大運、行兵曺判書閔黯, 持節備禮, 冊命爲王妃。 於戲! 衍本支於百世, 基風化於四方。 念驕侈常戒於易生, 非節儉則奚以持滿, 處崇高而愈謙畏, 愼厥身修。 承宗祧而主蘋蘩, 裨我孝理。 勉保黃裳之吉, 永貽彤管之譽。 故玆敎示, 想宜知悉。
【大提學閔黯製進。】
敎命文曰:
王若曰: ‘震宮毓祥, 纔行冊儲之典。 坤極宣號, 肆擧建妃之儀。 欲資陰功, 寔本風化。 咨! 爾張氏, 動遵內則。 德冠後宮, 性稟幽閑。 足儷美於南國, 躬候溫凊。 曾逮事於東朝, 何幸奉櫛之餘。 果有完釵之慶, 宗社之重有托。 天佑家邦, 春秋之義可稽。 母以子貴, 適當中饋之曠。 允叶內壼之尊, 念成廟故事之猶存。 有足徵者, 待商宗喪制之旣免。 在禮當然, 玆涓孟冬之辰。 爰正長秋之位, 玆遣臣議政府領議政權大運、行兵曺判書閔黯, 持節備禮, 冊命爲王妃。 龜章翟茀, 備典冊而生耀。 玉匣珠襦, 隆物采而增煥。 於戲! 守位而必敬必戒, 助治而克儉克勤。 麟趾播休, 國勢可固於磐石。 鷄鳴進警, 諫言佇聞於入宮。 毋替姙姒之徽音, 永膺祖宗之休烈。 故玆敎示, 想宜知悉。
【弘文提學柳命天製進。】
大赦。 百官陳賀, 頒敎八方, 其文曰:
王若曰: ‘乾道至大, 匪坤則乏成物之功。 人倫肇基, 自家而致御邦之化。 値此隆禮之告訖, 宜與率土而同歡。 顧寡昧丕承以來, 而壼職中曠厥位。 苟不能求得聖女, 用副寤寐之思。 則何以祗奉明禋, 俾主宗廟之事, 幸賴穹昊之眷, 光啓堯門之祥。 尙德則嗣姙姒之徽音, 動遵規度。 以責則合春秋之大義, 誕育元良。 當衣裳外除之辰, 首先涓吉而正號。 念古昔內助之益, 蓋將謹始而圖終。 用講臨軒之舊章, 聿擧備物之縟典。 冊封張氏爲王妃, 琬琰載耀。 翟茀斯煌, 戒存鷄鳴。 卽夙夜箴儆之美, 慶叶麟趾。 實宗社生靈之休, 屬景貺之潛周。 布大命而肆宥, 自本月二十二日昧爽以前, 雜犯死罪以下, 咸宥除之。 在官者各加一資, 資窮者代加。 於戲! 尙資十亂, 永裕後昆。 日月竝明, 巳覩神人之胥悅。 雷雨作解, 佇期品物之俱新。 故玆敎示, 想宜知悉。【大提學閔黯製進。】
숙종 23권, 17년(1691 신미/청강희(康熙)30년) 2월 26일(임오) 1번째기사
정릉에 전알, 작헌례를 거행하고 돌아오는 길에 무안왕의 사당에 들르다
임금이 정릉(貞陵)에 가서 전알(展謁)하고 나서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고, 돌아오다가 사하리(沙河里)에 이르러 단(壇)에 올라 열무(閱武)하고, 이어서 태복마(太僕馬) 세필을 끌어오도록 명하여 세대장(大將)에게 나누어 주었다.
임금이 송태조(宋太祖)가 무성왕(武成王)7269)의 사당에 들어 전알한 옛일을 따라 장차 돌아가는 길에 무안왕(武安王)7270)의 사당에서 대가(大駕)를 멈추고 들어가 유상(遺像)을 보려고 대신들을 시켜 절목(節目)을 강정(講定)하게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목내선(睦來善)은 주무왕(周武王)이 상용(商容)의 여문(閭門)에서 식례(式禮)를 거행한 것을 본떠서 거행해야 한다하고, 우의정(右議政) 민암(閔黯)은 배례(拜禮)하지말아야하고 식례를 거행하지도 말아야하며 손을 들어 읍례(揖禮)하여야 마땅하다고 하였는데, 임금이 민암의 의논을 따랐다.
삼사(三司)에서 청대(請對)하여 국조(國朝)의 전례가 없다하여 들르는 일을 멈추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말하기를,
“무안왕의 만고(萬古)의 충의(忠義)는 평소에 아름답게 여겨 감탄하는 바이다. 이미 그 문을 지나니 새롭게 느낌이 일어나는데, 들어가 본들 무엇이 해롭겠는가?”하고, 따르지 않았다.
註7269]무성왕(武成王):태공망(太公望) 봉호(封號).註7270]무안왕(武安王):관우(關羽) 봉호.
○壬午/上詣貞陵展謁後, 行酌獻禮, 還至沙河里, 登壇閱武。 仍命牽來太僕馬三匹, 分賜三大將。 上引宋太祖歷謁武成王故事, 將於回鑾之路, 駐駕武安王廟, 入瞻遺像, 令諸大臣講定節目。 左議政睦來善以爲: “宜倣周王式商容之閭, 行式禮。” 右議政閔黯則以爲: “不宜拜, 且不宜式, 當擧手楫。” 上從黯議。 三司請對, 以無國朝前例, 請停歷入之擧。 上曰: “武安王萬古忠義, 素所嘉歎。 旣過其門, 油然興感, 入瞻何妨,” 不從。
숙종 26권, 20년(1694 갑술/청강희(康熙)33년) 1월 17일(을묘) 1번째기사
주문공의《소학》에 대해 친히 지은 서문의 내용
임금이 친히 주문공(朱文公)의 《소학(小學)》에 대한 서문(序文)을 지어서 책머리에 쓰도록 하였다. 그 서문에 이르기를,
“《소학》은 무엇을 위하여 지었는가? 옛사람이 태어난 지 겨우 여덟살이면 반드시 이 책을 배웠으니, 바로 삼대(三代)때의 사람을 교육하던 방법이었다.
그런데 진시황(秦始皇)이 유생(儒生)을 구덩이에 파묻고 서적을 불사른 이후로 경적(經籍)이 모조리 없어져서 보존된 것이 거의 없다시피 되었다.
그래서 신안(新安) 주부자(朱夫子)가 세교(世敎)의 쇠퇴함을 개탄하여,
옛날에 들은 것들을 수집(蒐輯)하여, 후학을 깨우쳐주기위해 지은 것이다.
아! 이 책은 규모(規模)와 절차(節次)가 환하게 구비하여 안팎[內外]의 구분이 있고 본말(本末)의 차서가 있다.
입교(立敎)·명륜(明倫)·경신(敬身) 이 세 가지는 안이며, 본(本)이요, 다음에 계고(稽古)를 말한 것은 옛사람의 덕행(德行)을 채집하여 그것을 실증한 것이다. 그리고 가언(嘉言)·선행(善行) 이 두 가지는 밖이며 말(末)이다.
과연 능히 이 세 가지7881)에 대해 침잠(沈潛)·반복(反覆)하여 그것을 몸에 체험한다면, 두 가지7882)는 미루어 넓혀서 그것을 확충하는데 지나지않을 따름이다.
비유하면 마치 그물의 벼릿줄이 들리면 눈이 펼쳐지고, 나무의 뿌리가 배양되면 지엽이 번창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것은 바로 소자(小子)가 도(道)에 들어가는 첫길이며, 어린이를 교육하는 성스러운 공부인 것이다.
어찌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경신(敬身) 일편(一篇)은 참으로 더욱 긴절(緊切)하다는 것을 느낀다. 거기에 대한 논의를 전개한다면, 경(敬)이라는 것은 성학(聖學)의 시작과 끝이 여기서 이루어지고, 위와 아래에 관통되는 것으로서 공경하고 나태[敬怠]한 그 사이에 길(吉)하고 흉(凶)함이 곧 결판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왕(武王)이 즉위하던 시초에 사상보(師尙父)7883)가 정성스럽게 진계(陳戒)한 바도 여기에 지나지 않으니, 배우는 이가 진실로 이에 뜻을 두고서 동(動)할 때나 정(靜)할 때나 반드시 경(敬)을 하고 잠깐 동안이라도 반드시 경(敬)을 하여, 나의 드나드는 마음을 거두고 나의 정대(正大)한 근본을 세워서, 오늘 한 가지 공부를 하고 내일 한 가지 일을 한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태연해져서 겉과 속[表裏]이 환하게 통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대학(大學)의 이른바 수신제가(修身齊家)·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도(道)에 나아가는 것은 단지 일거(一擧)에 조치할 따름이니, 그것이 풍속 교화에 있어서 어찌 소소한 도움만 된다고 하겠는가?
갑술년 정월 16일에 서문을 쓴다”하고,
또 친히 시민당(時敏堂) 명(銘)과 아울러 서(序)를 지었는데, 이르기를,
“시민당(時敏堂)은 저승전(儲承殿)의 남쪽에 있으니, 바로 세자(世子)가 공부하는 정당(正堂)이다. 집의 명칭을 ‘시민’이라 한 것은 열명편(說命篇)7884)에서 ‘학문에 민첩하기를 힘써야 한다[務時敏]’는 의미를 취한 것이다.
참으로 원량(元良)7885)은 한 나라의 근본으로서 배우고 배우지않는데 따라, 치란(治亂)이 거기서 결정되는 것이다. 진실로 겸손하여 스스로 낮추어 학문을 부지런히 힘써서 미치지 못한 바 있는 것처럼 하지않는다면 어떻게 즙희(緝熙)7886)의 지역에 날로 진취될 수가 있겠는가? 따라서 이에 명(銘)을 지어서 반우(盤盂)7887)를 대신하는 바이다”하고,
명(銘)에 이르기를,
“저 궁문(宮門)을 바라보니, 찬란하고 높다란 집이다. 그 이름 시민(時敏)이니, 교훈의 뜻도 빛나도다. 온 백성의 장래가 걸린 한 나라의 원량(元良)이라. 학문을 힘쓰고 힘쓰지않는데 따라, 흥하고 망하는 것이 실로 결정된다. 지난날 우리 성조(聖祖)와, 그리고 우리 선왕(先王)께서는, 춘궁(春宮)에서 덕을 닦으며, 나태하거나 황폐함이 없으셨다. 밤낮으로 학문을 힘쓰시어 수라들 겨를도 없이 바쁘셨다. 성의가 애연(藹然)하시어, 서로가 계합되시었다. 지극하시고 극진하시어, 옛날 우왕(禹王)·탕왕(湯王)보다 뛰어나셨다.
아! 너는 이를 잘 본받아서, 과오를 저지르거나 망각하지 말라.
귀와 눈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하며, 환관(宦官)들을 가까이하지 말라. 방정한 선비를 좌우에 모시고, 강직한 인물을 앞뒤에 두어라.
날마다 부지런히 힘쓰고 힘써서, 쉬지말고 스스로 노력하여라.
그 덕이 날로 닦아지면, 하늘이 주신 복록이 날로 창성하리라.
이것은 나의 억설이 아니라, 분명한 성인의 말씀이니라.
옛 반명(盤銘)7888)을 대신하여, 심신을 수양하는 자료로 하는 바이다”하고,
임금이 또 친히 경계(儆戒)하는 10잠(箴)을 지어서 세자(世子)에게 하사했다.
그 법삼조잠(法三朝箴)7889)에 이르기를,
“아! 사람의 온갖 행실은 효도가 아니면 성립되지 못한다.
이는 바로 천경 지의(天經地義)7890)라서 만고에 영원히 바뀔 수 없다.
이 세상에 효도가 가장 중대하니 문왕(文王)을 표본으로 삼아라.
날마다 세 번 문안드리고7891) 조심스럽게 몸가짐을 갖도록 하라”하고,
그 친현사잠(親賢士箴)에 이르기를,
“어지럽고 소란스러워 이 마음을 지키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함양(涵養)을 함에는, 어진 선비의 도움이 필요하다.
궁료(宮僚)7892)를 앞뒤에 두고 빈객(賓客)·사부(師傅)를 좌우에 모셔라.
아침저녁으로 잘못을 바로잡아 법도에 어긋나면 하지 말아라”하고,
그 근강학잠(勤講學箴)에 이르기를,
“혼자있는 곳에서 방자하게 하면 그 마음이 방탕하기 쉽다. 아무도 모른다고 말하지 말라. 위에서 환하게 굽어보고 계신다. 능히 생각하고 능히 공경하여 반드시 공부를 확충시키도록 하라. 옥루(屋漏)7893)가 가까운데에 있으니,
부디 스승으로 삼도록 하라”하고,
그 계일예잠(戒逸豫箴)에 이르기를,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편안히 지내는 것은 몸의 큰 해독이다.
원성(元聖)7894)은 간절하게도, 그 발단(發端)을 일곱 번이나 바꾸었으니,
이것을 생각하여 마음에 두고서 편안하지 않는 데에 안정하여라.
감히 혹시 게으르지 말고서 삼가고 두려워하여라”하고,
그 납충언잠(納忠言箴)에 이르기를,
“약이 현기증이 나지 않으면 그 병이 어찌 낫겠는가?
마음에 거슬린다고 여기지 말고서 자기 몸을 돌아보고 반드시 구하여라.
구하기를 어떻게 할 것인가? 반드시 그 방법이 있을 것이다.
다만 태갑(太甲)7895)의 일을 가지고서 되풀이하면서 경계하여 알린다”하고, 그 즉참설잠(堲讒說箴)에 이르기를,
“참소하는 사람이 화(禍)를 만드는 것은 어느 곳에든지 그렇지않음이 있겠는가? 어진 임금과 어진 신하가 서로 만난다면 더욱 이를 근심해야 한다.
참인(讒人)을 미워하고 영인(侫人)을 멀리하는 것이 어찌 다른 길이 있겠는가? 처음부터 끝까지 성의(誠意)로서 신의(信義)로 사귐을 힘쓸지어다”하고,
그 신희로잠(愼喜怒箴)에 이르기를,
“칠정(七情)7896)중에서는 성내는 것과 기뻐하는 것이 있다.
이를 알맞게 하기는 어려우나 이를 발산(發散)하기는 쉬운 것이다.
이러한 병통이 제거되지 않는다면 다시 무슨 일을 할 수가 있겠는가?
알맞게 하려면 어찌 하겠는가? 반드시 사리(事理)를 연구해야 한다”하고,
그 숭검약잠(崇儉約箴)에 이르기를,
“나라를 멸망시키고 나라를 흥성시키는 것은 사치함과 검소함에 말미암게 된다. 전대(前代)의 사첩(史牒)을 상고한다면 서로 맞기가 부신(符信)과 같다. 그 마음을 크게 경계하여 그 덕을 힘쓸지어다.
나라를 위하여 복을 아끼고 백성을 위하여 모범을 만들지어다”하고,
그 명상벌잠(明賞罰箴)에 이르기를,
“착한 일을 권장하고 악한 일을 징계하는 것은 다만 상(賞)주고 벌(罰)주는 일뿐이다. 이 때문에 옛날 사람들은 공있는 사람에게 반드시 상주고 죄있는 사람에게 반드시 처벌하였다.
이 두 가지를 분명하게 하려면 마땅히 한쪽에 치우치는 것을 경계해야만 한다. 아주 공평한 마음으로 잘 처리해야만 백성의 마음을 복종시킬 수 있을 것이다”하였다.
註7881]세 가지:입교·명륜·경신을 말함 註7882]두 가지:가언·선행을 말함. 註7883]사상보(師尙父):주(周)나라 강태공(姜太公) 註7884]열명편(說命篇): 《서경(書經)》의 편명.註7885]원량(元良):세자(世子)를 가리킴.註7886]즙희(緝熙):인격이 계속하여 오래 빛남.註7887]반우(盤盂):황제(黃帝)의 사관(史官)인 공갑(孔甲)이 지었다고 하는 책이름. 26편을 써서 경계로 삼은 것 註7888]반명(盤銘):목욕하는 그릇에 새긴 경계하는 글. 옛날 은(殷)나라 탕왕(湯王)이 목욕하는 그릇에 ‘날마다 새롭게 한다’는 글을 새긴 것이 있었다 註7889]법삼조잠(法三朝箴):주(周)나라 문왕(文王)이 하루에 세 번 아버지 왕계(王季)에게 조현(朝見)한 일을 본받는다는 것.註7890]천경지의(天經地義):영원히 변하지않는 떳떳한 이치를 말함 註7891]날마다 세 번 문안드리고:주(周)나라 문왕(文王)이 효도가 지극하여 그 아버지 왕계(王季)에게 날마다 세 번 문안(問安)을 드린 일을 말함.註7892]궁료(宮僚):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관속(官屬).註7893]옥루(屋漏):방(房)의 서북우(西北隅)로, 집안에서 가장 깊숙하여 어두운 곳. 사람이 잘 보지않는 곳을 이른 말.註7894]원성(元聖): 주공(周公) 註7895]태갑(太甲):은왕(殷王) 태갑(太甲)이 즉위(卽位)하여 과오가 많으니 재상(宰相) 이윤(伊尹)이 되풀이하여 경계하고 타일렀음.註7896]칠정(七情):일곱가지 감정(感情). 유가(儒家)에서는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을, 불가(佛家)에서는 희(喜)·노(怒)·우(憂)·구(懼)·애(愛)·증(憎)·욕(欲)을 말함
○乙卯/上親製朱文公《小學序文》使之弁于篇首, 其文曰: “《小學》何爲而作也, 古之人, 生甫八歲, 必受是書, 卽三代敎人之法也。 自嬴秦坑焚以來, 經籍蕩殘, 存者幾希, 此新安朱夫子之所以慨然乎世敎之陵弛, 輯舊聞而牖來學者也。 嗚呼! 是書也, 規模節次, 粲然備具, 有內外之分, 有本末之序, 曰《立敎》, 曰《明倫》, 曰《敬身》, 玆三者, 內也本也。 次言《稽古》, 所以摭往行而證之也, 曰《嘉言》, 曰《善行》玆二者, 外也末也。 果能於斯三者, 沈潛反覆, 驗之于身, 則二者不過推廣而實之而已。 譬如綱擧則目張, 根培則支達, 此正小子入道之初程, 蒙養之聖功, 豈易言哉, 若夫《敬身》一篇, 儘覺緊切。 蓋嘗論之, 敬者, 聖學之所以成始成終徹上徹下, 而敬怠之間, 吉凶立判, 是以, 武王踐阼之初, 師尙父之所以惓惓陳戒者, 不越乎是, 學者誠有味于斯, 動靜必於敬, 造次必於敬, 收吾出入之心, 立吾正大之本, 今日下一功, 明日做一事, 於不知不覺之中, 靈臺泰然, 表裏洞徹, 則進乎《大學》所謂修身齊家治國平天下之道, 特一擧而措之矣。 其於風化, 烏可少補云爾, 歲在甲戌春正月哉生魄, 序。” 又親製《時敏堂銘幷序》曰: “時敏堂, 在儲承殿之南, 卽世子冑筵之正堂也。 堂以時敏名, 蓋取諸說命務時敏之義焉。 誠以元良一國之本, 而學與不學, 治亂自判, 苟不卑遜自下, 敏於學而如有所不及, 則其何以日進緝熙之域哉, 遂以作銘, 用替盤盂云爾。 銘曰: ‘眷彼銅闈, 煥焉高堂。 曰時曰敏, 訓義孔彰。 萬民攸繫, 一國元良。 學之勤否, 實判興亡。 粤惟聖祖, 曁我先王。 毓德春宮, 罔有怠荒。 晝筵夜對, 玉食未遑。 誠意藹然, 相得益彰。 至矣盡矣, 邁古禹ㆍ湯。 嗟汝體法, 不愆不忘, 不役耳目, 不邇貂璫。 左右正士, 前後剛方。 惟日孜孜, 無息自强。 厥德日修, 天祿日昌。 匪我臆說, 聖言煌煌。 替古盤銘, 以資檢防。’” 上又親製《儆戒十箴》, 以賜世子。 其法三朝箴曰: “於乎百行, 非孝不立, 天經地義, 萬古不易。 惟孝爲大, 文王是則。 日三問寢, 洞洞屬屬。” 其親賢士箴曰: “紛華波蕩, 此心難持。 是以涵養, 賢士必資。 前後宮僚, 左右賓師。 規達朝夕, 非法不爲。” 其勤講學箴曰: “幽獨得肆, 其心易放。 莫謂無知, 明明在上。 克念克敬, 必擴充之。 屋漏在邇, 須以爲師。” 其戒逸豫箴曰: “今來古往, 鴆毒宴安。 元聖懇懇, 七更其端。 念玆在玆, 所其無逸。 罔敢或懈, 兢兢業業。” 其納忠言箴曰: “藥不瞑眩, 厥疾奚瘳, 勿謂逆心, 而反必求。 求之如何, 必有其道。 惟將太甲, 反覆戒告。” 其堲讒說箴曰: “讒人爲禍, 何莫不然, 君臣際遇, 則尤恤焉。 堲讒遠侫, 詎有他途, 終始誠意, 務盡交孚。” 其愼喜怒箴曰: “七情之中, 曰怒曰喜。 中之則難, 散之則易。 此病未除, 更做甚事, 中之如何, 必也蘊理。” 其崇儉約箴曰: “覆邦興邦, 由奢由儉。 夷考前牒, 符契若驗。 大警厥心, 乃懋厥德。 爲國惜福, 爲民作式。” 其明賞罰箴曰: “以勸以懲, 惟賞惟罰。 用是昔人, 乃愼乃必。 欲明二者, 宜戒偏着。
大公照臨, 人心可服。”
숙보 30권, 22년(1696 병자/청강희(康熙)35년) 3월 20일(병자) 1번째기사
우참찬 윤증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주급의 명을 사양하다
우참찬(右參贊) 윤증(尹拯)이 상소(上疏)하여 사직하고 주급(周急)495)하라는 명을 사양하였는데, 임금이 우악한 비답(批答)을 내렸다.
사신(史臣)은 논한다.
“임금이 서둘러 어진이를 구하는 것은, 구차하게 선비를 예우하는 것을 아름다운 명예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대개 더불어 천위(天位)를 함께 하며 천직(天職)을 다스리려는 것이며, 어진 선비가 벼슬을 받고 사양하지않는 것은 구차하게 그 녹(祿)을 이롭게 여기고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대개 옳은 임금을 만나서 그 도(道)를 행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하지 않는 일이 있으나 구하면 얻기를 기필하고, 얻지 못하는 일이 있으나 얻으면 반드시 쓰고, 쓰지않는 일이 있으나 쓰면 반드시 맡기고 의심하지 않아야 한다.
그런 뒤에야 상하가 서로 맞아서 나라가 더불어 그 이익을 누려서 어진이의 공이 세상에 드러나니, 이를테면 이윤(伊尹)·부열(傅說)이 상(商)나라에서 한 일과 태공(太公)이 주(周)나라에서 한 일과 공명(孔明)이 한(漢)나라에서 한 일이 이것이다. 그렇기는 하나 쓰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알아야 하는데, 남달리 밝게 볼 줄 알아서 널리 구하는 처음에 잘 살피지못하고, 구차하게 헛소문을 따라 마땅한 사람이 아닌데도 맡긴다면, 무익할 뿐만아니라 도리어 매우 해로와 반드시 정치를 어지럽혀 나라를 그르치고야 말 것이니, 이를테면 송(宋)나라의 왕안석(王安石)이 이것이다.
그러므로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임금이 어진이를 쓰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것처럼 한다. 비천한 자로 하여금 높은 자를 넘게하고, 소원(疏遠)한 자로 하여금 친척을 넘게하려 할 때에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좌우가 다 어질다하여도 아직 쓰지않고, 대부(大夫)들이 모두 어질다하여도 쓰지않으며, 나라사람이 다 어질다하고 나서야 살펴서 어진 것을 알고 나서 쓴다’하였는데, 이 말이 진실하다. 근세에 이르러서는 거짓이 더욱 싹터서 어진이를 쓰는 실효(實效)를 구하지않고, 어진이를 숭상한다는 미명(美名)을 생각할 뿐이다. 진실로 도학(道學)에 뜻을 둔 자가 있다면 그 성덕(成德)의 천심(淺深)을 살피지않고, 그 재구(材具)의 장단(長短)을 묻지않고, 곧 빈사(賓師)의 예(禮)로 대우하여, 도(道)를 행하는 벼슬을 주되, 교서(敎書)가 잇달고 징소(徵召)하여 버려두지않으며, 특별한 명예와 특이한 예우가 뭇 신하들보다 뛰어날 것이다. 그러나 곧 일어나서 명에 응하는 자는 실은 혹 그 명성에 맞지않아서 비었는데도 찼다하고 작은데도 크다 한 것이므로, 마침내 나라를 해치고 자신을 망치고야 말겠지만, 굳이 누워서 나오지않는 자는 나라의 직무를 초모(草茅)처럼 버려두고 천공(天功)을 세월가는대로 비워두는 것이므로, 그 자신을 죄책하기는 하나 또한 나라의 일에 손상을 끼친다.
이 두 가지 경우는 똑같은 실정(失政)이니, 그 근본을 찾으면 다 어진이를 쓰는 것을 삼가지않은 잘못이다. 대저 윤증의 재덕(才德)은 진실로 반드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에게 혜택을 입히지는 못하나, 국가에서 그 어진 것을 환히 알 수 있었다면, 그 정성을 다하여 반드시 오게 했어야 마땅하고, 오지 않으면 또한 관작(官爵)으로 매어두지 말고 그 뜻을 성취하게 하여야 할 것이니, 그 소에 말한 것과 신익상(申翼相)이 청한 것은 다 사실을 상고하는 뜻이다.
또 대저 임금이 어진이를 구하는데에 부지런한 까닭은, 반드시 잘 다스리려는 뜻이 있어서 이것을 근본으로 삼기 때문인데, 반드시 잘 다스리려는 뜻이 없이 한갓 어진이를 구하기에 부지런할 뿐이라면 이는 거짓일 뿐일 것이니, 어찌 참된 선비가 있어도 거짓 구하는 데에 응하겠는가? 응한다면 반드시 참된 선비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일찍이 논하기를, ‘윤증의 문장(文章)과 재기(材氣)는 송시열(宋時烈)만 못하고, 뜻이 경제(經濟)에 부지런한 것은 박세채(朴世采)만 못하나, 재주가 못미치는 것을 알고 시세가 불가한 것이 있는 것을 알아서 확연히 고치지않고 벼슬하지않기를 굳이 지키는 것만은 제자(諸子)보다 어질다.
윤증에게 편드는 자는 혹 윤증이 박세채에게 글을 보내어 송시열을 논한 것을 조금도 과실이 없다하나,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윤증이 교분을 보전할 수 없는 기미를 일찍 알았다면, 아버지와 스승의 의리를 잘 헤아리고 시비의 알맞은 것을 재단(裁斷)하여, 곧바로 알려서 끊고 나쁜 소문을 내지않았으면, 윤증이 그제야 잘못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하지않고서 친분이 두터운 바탕이 없어지지 않고, 스승과 제자의 이름이 없어지지 않았는데, 곧장 옆사람에게 글을 보내어 본원(本原)을 논하여 낮추어 노여움을 건드리고, 점점 원망을 부르는 계제를 일으켜서 마침내 조정에 전하여 올라가고, 사림에 웃음거리를 퍼뜨렸으니, 송시열이 도리에 어그러지게 응대한 것이 이처럼 어지럽더라도, 윤증이 또한 잘못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학문의 근본은 오로지 내수(內修)를 귀중하게 여기는데, 윤증이 자신을 경계하고 집안을 다스린 실속에는 수자(數子)가 미칠 바가 아닌 것이 있으니, 혹 언론에 관한 일이 나타나지 못하고, 의로운 방도가 굳센 것이 모자라기는 하나, 독실하게 논하는 군자 중에는 병통으로 여기지 않고 도리어 그 심잠(深潛)하여 근밀(謹密)한 것을 취하는 자가 있다’하였다.”
註495]주급(周急):궁박한 것을 돌봄.
○丙子/右參贊尹拯陳疏辭職, 且辭周急之命, 上賜優答。
【史臣曰: “王者之急於求賢者, 非苟以禮士爲美名, 蓋將與共天位治天職也, 賢士之受爵不辭者, 非苟利其祿而榮其身, 蓋樂得是君而行其道也。 是故, 有弗求, 求之必其得也, 有弗得, 得之必其用, 有弗用, 用之必其任之不疑也。 夫然後, 上下相得, 國與享其利, 而賢者之功, 著白於世, 如伊、傅之於商, 太公之於周, 孔明之於漢是已。 雖然, 將欲用之, 必先知之, 若無獨見之明, 審於旁求之始, 苟循虛聲, 非其人而任之, 則非徒無益, 爲害反甚, 必至亂政僨國而後已, 若宋之王安石是已。 故孟子有言曰: ‘國君進賢, 如不得已。 將使卑踰尊、踈踰戚, 可不愼歟, 左右皆曰賢, 未可也, 諸大夫皆曰賢, 未可也, 國人皆曰賢然後察之, 見賢焉然後用之。’ 誠哉言乎! 及至近世, 虛僞滋萠, 不求用賢之實效, 徒慕尙賢之美名, 苟有志於道學者, 則不察其成德之淺深, 不問其材具之長短, 卽待之以賓師之禮, 加之以行道之職, 詔札聯翩, 徵召不置, 殊名異禮, 冠絶群僚。 卽起而應命者, 實或不讎其名, 虛而爲盈, 約而爲泰, 卒至害國凶身而後已; 其堅臥不出者, 委邦職於草茅, 曠天功於歲月, 雖其罪悔於一已, 抑亦貽損於國事。 此二者, 均爲失政, 若循其本, 皆進賢不愼之失也。 夫尹拯之才德, 固未必其經邦澤物, 而朝家審能灼見其賢也, 則當盡其誠而必致之, 如其未也, 亦宜毋縻以官爵, 俾遂其志, 其疏所稱, 申翼相所請, 皆是考實之義也。 且夫人君所以勤於求賢者, 由其有必治之志, 爲之本也。 無必治之志, 而徒勤於求賢, 則是虛僞而已矣。 豈有眞儒而應虛僞之求哉, 如其應之, 必非眞儒也。 故嘗論之曰: ‘拯之文章、材氣, 不如宋時烈志勤經濟, 不如朴世采, 惟其知才之不逮, 知時之有所不可, 確然不改, 堅守初服者, 視諸子爲賢耳。 右拯者, 或以拯抵書世采, 論時烈, 爲毫無過失, 獨以爲不然。 使拯早知不可全交之幾, 則審量父師之義, 財斷是非之中, 直告辭絶, 無出惡聲, 則拯於是乎無失矣。 今乃不然, 親厚之素未革, 師生之名未祛, 而徑抵傍人, 論貶本原, 磯觸狠怒, 馴生厲階, 卒乃騰上朝廷, 傳笑士林。 雖時烈應之非道, 爲爾紛紛, 拯亦豈得無失哉, 然學問之本, 專以內修爲重。 拯勑躬齊家之實, 有非數子所及, 則雖或以言論事業之不顯, 義方剛毅之不足, 少拯, 篤論君子, 有不以爲病, 而反取其深潛謹密。’ 云。”】
영조 1권, 즉위년(1724 갑진/청옹정(雍正)2년) 9월 7일(정미) 1번째기사
우승지 이정제가 사관을 보내 정제두를 유소해오게 한 일을 중지할 것에 관해 아룀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찬선(贊善) 정제두(鄭齊斗)를 유소(諭召)하여 함께 오게했었는데, 때마침 강화(江華)에 신임(新任)·구임(舊任)의 유수(留守)가 교체(交遞)하는 때를 당하여 주전(廚傳)41)의 폐단이 있다하여 사관을 소환하도록 명하였다.
우승지(右承旨) 이정제(李廷濟)가 청대(請對)하고 아뢰기를,
“사복(嗣服)한 초기에 어진 덕망이 있는 이를 먼저 초빙한다고 하자, 중외(中外)에서 용동(聳動)하지않는 이가 없었는데, 한 번의 치계(馳啓)로 인하여 곧 명을 도로 거두셨습니다.
비록 민폐(民弊) 때문이라고 하교(下敎)하셨으나, 이미 어진이를 초빙하는 것을 중하게 여기셨으면, 폐단을 이유로 말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합니다”하였다.
임금이 즉시 다른 사관으로 대신 가도록 명하였는데, 이정제가 또 말하기를,
“전하(殿下)께서 재야(在野)의 신하를 만나고자 하신다면, 동강(桐江)의 일42)을 거론해야 할 것이고, 매복(枚卜)의 일을 의논하고자 하신다면 신(莘)·위(渭)43)를 꿈속에 생각하셔야할 것인데, 애통(哀痛)으로 경황이 없으신 가운데 문자(文字)를 바꾸시니, 임금의 말을 출납(出納)하는 직책을 맡고 있으면서 혹시 위대해야 할 말씀이 보고 듣기에 방애가 있을 듯하여 감히 아룁니다”하니,
임금이 위유(慰諭)하고, 물러간 다음에 하교(下敎)하기를,
“임금과 신하사이에는 마음속으로 숨김이 없어야 성의(誠意)를 서로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좌사(左史)의 서계(書啓)에 대한 비답은 애통한 가운데 미처 살피지 못하였었는데, 근밀(近密)의 직임을 맡고 있으면서 마음을 인도하여 환수(還收)하기를 청하였으니, 마음으로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특별히 대호피(大虎皮)1령(領)을 주어 내가 언로(言路)를 넓히는 뜻을 표한다.
아! 온화한 모습으로 겸허하게 받아들임은 나의 한 마음에 달려있는 것이니, 스스로 경책(警責)해야 할 도리에 있어서 감히 소홀히 할 수가 있겠는가?”하였다.
註41]주전(廚傳):주(廚)는 음식, 전(傳)은 거마(車馬)의 뜻. 지방에 나가는 관원에게 경유(經由)하는 역참(驛站)에서 음식과 거마를 제공하던 것.註42]동강(桐江)의 일:동강(桐江)은 중국 부춘현(富春縣)에 있는 동계(桐溪)를 가리킨 것으로, 후한(後漢)때 엄광(嚴光)이 광무제(光武帝)의 간곡한 부름을 물리치고 은퇴하여 낚시로 여생을 보낸 일을 말함.註43]신(莘)·위(渭):신은 신야(莘野)에서 농사짓던 이윤(伊尹)을 가리키고, 위는 위수(渭水)에서 낚시하던 강태공(姜太公)을 가리킴. 각각 탕(湯)임금과 문왕(文王)의 부름을 받아 치세(治世)를 이루었음.
○丁未/上遣史官, 諭召贊善鄭齊斗, 與之偕來, 尋以江華, 當新舊留守之交遞, 廚傳有弊, 命召還史官。 右承旨李廷濟請對奏曰: “嗣服之初, 首招賢德, 中外莫不聳動, 而一番馳啓, 旋卽收還。 雖以民弊爲敎, 然旣以招賢爲重, 則不當言弊也。” 上立命以他史官代之, 廷濟又曰: “殿下欲見在野之臣, 則尙論桐江, 方議枚卜之擧, 則夢想莘、渭, 而哀遑之中, 文字易換, 職在出納, 或恐大哉之言, 有礙觀瞻, 敢稟矣。” 上慰諭之, 旣退敎曰: “君臣之間, 有懷無隱, 然後誠意可以相孚也。 左史書啓之批, 哀疚中未之覺察, 而職在近密, 導達請還, 心甚嘉尙。 特賜大虎皮一領, 以表予廓言路之意。
噫! 和顔虛受, 在予一心, 自警之道, 其敢忽諸,”
영조 2권, 즉위년(1724 갑진/청옹정(雍正)2년) 11월 1일(신축) 4번째기사
봉조하 최규서가 재앙을 그치게 하는 도리 등에 관해 아뢰다
봉조하(奉朝賀) 최규서(崔奎瑞)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숙묘조(肅廟朝)에도 또한 일찍이 재난을 만나면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각각 소견을 아뢰게 하였습니다.
신이 그때, ‘재난을 만나 일시적으로 경동(警動)하는 것은 항상 재난이 없을 때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것만 못합니다. 이러한 마음을 잊지않고 조존(操存)187)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정령(政令)과 시조(施措)의 사이에 저절로 위로는 천심(天心)에 합치될 것이고 아래로는 민정(民情)에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니, 숙묘께서 가납(嘉納)하셨습니다.
지금 재난을 만난 날에 감히 선조(先朝)께 고한 것을 전하께서 거듭 경계하실 것으로 삼는 바입니다”하니,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말하기를,
“원로(元老)는 80노인으로 자주 연석(筵席)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재앙을 그치게 하는 도리를 더욱 상세히 찾아 물으시고 만약 그 말을 채용하신다면, 생각하건대, 그 자신을 등용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하였다. 임금이 최규서에게 이르기를,
“마땅히 말을 다하라”하니,
최규서가 말하기를,
“삼대(三代) 이후로 한(漢)나라의 다스림이 가장 고도(古道)에 가까운데, 순리(循吏)들을 포장(褒奬)하여 그들이 많이 들어와 재상이 되었기 때문이니, 그런 까닭으로 소강(少康)의 다스림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비록 작은 일로 말한다하더라도, 오늘 한 가지 일을 행하고 내일 한 가지 일을 행한다면 저절로 성효(成效)가 있을 것입니다.
근자에 들으니, 산릉(山陵)의 포자(圃子)188)를 재신(宰臣)의 상소로 인해 혁파하고 여가(閭家)를 탈입(奪入)하는 것을 따로 엄하게 신칙(申飭)하셨다고 합니다.
이 두 가지 일에서 또한 백성이 실질적인 은혜를 받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신이 가만히 보건대, 전하의 영명(英明)하심은 천고(千古)에 뛰어나시나 지치(至治)를 구하심이 너무 날카로우시고 일을 하심이 대단히 급하시니, 도리어 해로움이 있게 됩니다.
오직 마땅히 오늘 한 가지 일을 행하고 내일 한가지 일을 행하시어 착실하게 해나가신다면, 저절로 성효가 있게 될 것입니다.
또 전하의 성덕(聖德)은 백왕(百王)보다 훨씬 높으시니, 오늘날 신료들은 무능하여 감당해 낼 수 없을 듯합니다. 따라서 성상의 마음에는 반드시 군하(群下)를 경시하는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堯)·순(舜)의 신하였던 고요(皐陶)·직(稙)·설(契)은 요순에 미치지 못했지만 당우(唐虞)의 다스림을 이루었고, 주(周)무왕(武王)의 십란(十亂)189 )은 반드시 무왕만 못했으나 창업(創業)의 공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또 《서전(書傳)》에는 구덕(九德)190)을 말했지만 삼덕(三德)이 있는 자와 육덕(六德)이 있는 자를 또한 모두 등용했습니다.
삼덕과 육덕을 합하면 구덕이 되니, 인재를 반드시 구해야 하는 것은 아니나, 쓸 곳에 갖추어 쓴다면 저절로 성효가 있을 것입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이 점에 유의하소서”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진달한 말이 유원(悠緩)하고 절실하니 마땅히 깊이 새겨두고 잊지 않겠다”하였다. 이광좌가 말하기를,
“원로가 지치(至治)를 구함이 너무 날카로움을 염려했는데, 이는 참으로 노성(老成)한 사람의 논의입니다. 지금의 형세를 비유하자면 오랜 병을 앓은 사람이 진원(眞元)이 크게 허(虛)해지고 한 번 드러난 증상을 거쳐 기진맥진한 것과 같아 아무리 미법(美法)이 있더라도 가볍게 행하기 매우 어려운 꼴입니다.
원로는 반드시 염려하는 바가 여기에 미쳤기에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그 본말(本末)을 생각하고 헤아려 신중히 살펴서 처리할 뿐입니다. 결코 이 때문에 지치(至治)를 도모하려는 뜻을 물리쳐서는 안될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원로는 오직 날카로운 데로 나아갈가 두려워하고 영상(領相)은 또 물러날까 염려하니, 그 뜻이 모두 좋다. 내가 비록 수성(修省)한 공(工)은 없지만,
마땅히 각별히 유의하겠다”하였다.
註187]조존(操存):인간 본연(本然)의 선심(善心)을 단단히 잘 잡고 있음을 이름.《맹자(孟子)》고자상(告子上)에 “꽉 잡으면 있지만 버리면 없어지고, 때없이 출입하고 어느 곳에 있는지도 모른다고 하였으니, 생각하건대 이것은 마음을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操則存 舍則亡 出入無時 莫知其向 惟心之謂]”하였음.註188]포자(圃子):남새밭 註189]십란(十亂):주(周)무왕(武王)때 나라를 잘 다스린 신하 10인. 곧 주공단(周公旦)·소공석(召公奭)·태공망(太公望)·필공(畢公)·영공(榮公)·태전(太顚)·굉요(閎夭)·산의생(散宜生)·남궁괄(南宮适)·문모(文母:太任)임.註190]구덕(九德):《서경(書經)》우서(虞書) 고요모(皐陶謨)에서 고요가 우(禹)임금에게 말한 아홉 가지 덕, 너그러우면서도 위엄이 있는 것[寬而栗], 부드러우면서도 꿋꿋한 것[柔而立], 성실하면서도 공손한 것[愿而恭], 다스리면서도 공경하는 것[亂而敬], 온순하면서도 굳센 것[擾而毅], 곧으면서도 온화한 것[直而溫], 간략하면서도 세심한 것[簡而廉], 억세면서도 착실한 것[剛而塞], 날래면서도 올바른 것[彊而義]. 이 중 삼덕(三德)을 실천하면 집안을 거느릴 수 있고 육덕(六德)을 실천하면 나라를 거느릴 수 있다 하였음.
○奉朝賀崔奎瑞白上曰: “肅廟朝, 亦當遇災, 使入侍諸臣, 各奏所見。 臣於其時, 以爲遇災而一時警動, 不若恒加戒懼於無災之時。 毋忘此心, 操存不怠, 則政令、施措之間, 自可以上合天心, 下答民情。 肅廟嘉納。 今値遇災之日, 敢以告于先朝者, 爲殿下申戒焉。” 領議政李光佐曰: “元老以八十老人, 不可數入筵席, 弭災之道, 詳加延訪, 苟用其言, 則顧何異於用其身乎,” 上謂奎瑞曰: “宜盡言之。” 奎瑞曰: “三代之後, 漢世之治, 最爲近古者, 以其褒奬循吏, 多入爲相, 故能成少康之治。 雖以小事言之, 今日行一事, 明日行一事, 則自然有成效矣。 近聞山陵圃子, 因宰臣上疏罷之, 閭家奪入, 別爲嚴飭云。 卽此二事, 亦可見其民蒙實惠矣。 臣竊見殿下英明, 卓越千古, 而求治太銳, 作事急遽, 反爲有害。 唯當今日行一事, 明日行一事, 着實爲之, 自至成效矣。 且殿下聖德, 旣高出百王, 則今日臣僚, 似無能以當。 上心必有輕視群下之意, 然堯、舜之臣皐陶、稷、契, 不及於堯、舜, 而做成唐、虞之治, 周武十亂, 必不如武王, 而能成創業之功。 且《書傳》言九德, 而有三德有六德者, 亦皆可用。 三德、六德, 合爲九德, 人不必求, 備用於用處, 則自有其效。 願殿下, 以此留意焉。” 上曰: “所陳之言, 悠緩切實, 當佩服不忘矣。” 光佐曰: “元老以求治太銳爲慮, 此眞老成之論也。 方今之勢, 比如久病之人, 眞元大虛, 一經表症, 易於垂盡, 雖有美法, 切難輕行。 元老必慮及於此, 有此云云, 然但當思量本末, 審愼而處之而巳。 切不可以此, 退托其圖治之志也。” 上曰: “元老惟恐進銳, 領相又慮退托, 其意皆好。 予雖無修省之工, 當各別留意。”
영조 17권, 4년(1728 무신/청옹정(雍正)6년) 4월 8일(무자) 10번째기사
박태후 공초
김옥성(金玉成)을 네 차례 형벌하고 유염(柳淰)을 한 차례 형벌하였으나
모두 승복(承服)하지 않았다.
박태후(朴太厚)를 한 차례 형벌하니, 박태후가 공초하기를,
“이세채(李世彩)가 도적의 초관(哨官)이 되어 도목(都目)을 가지고 신을 유인하기를, ‘정도령(鄭都令)이 장수가 되어 8도(八道)가 모두 응하였다.
네가 비록 나이 늙었으나 강태공(姜太公)3672)은 나이 80세에 오히려 공(功)을 이루었으니, 너는 모름지기 동참(同參)하라’하기에,
신이 이내 따라서 유천(柳川)땅으로 갔더니, 적도(賊徒)가 합쳐 13대(隊)이고 대마다 각각 12명이었습니다.
반역을 도모한 것은 사실입니다”하니, 명하여 효시(梟示)하게 하였다.
註3672]강태공(姜太公):주(周)나라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을 보좌하여 은(殷)나라를 멸망시키고 주(周)나라를 창업(創業)한 공신(功臣).
○刑金玉成四次, 柳淰一次, 幷不服。 刑朴太厚一次, 太厚供: “李世彩爲賊哨官, 持都目而誘引臣以爲: ‘鄭都令爲將, 八道皆應。 汝雖年老, 姜太公八十尙成功, 汝須同參。’ 臣仍隨往柳川地, 則賊徒合十三隊, 每隊各十二名。 謀逆是實。” 命梟示。
영조 20권, 4년(1728 무신/청옹정(雍正)6년) 12월 2일(무인) 2번째기사
교리 김상성이 세자의 장사에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 말 것과 최규서·정제두에게 해 자문받을 것을 말하다
교리(校理) 김상성(金尙星)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일전의 비망기(備忘記)에 우리 저하(邸下)의 지극한 인자와 성대한 은택이 미처 아래로 백성에게 이르지못한 것을 매우 슬퍼하시고 정자각(丁字閣)과 묘석(墓石)의 제도를 예전보다 간략하게 하고 관동(關東)에 배정한 대들보 재목도 요구하지 말라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대저 당당한 천승(千乘)의 나라로서 세자의 송종(送終)4175)을 위하여 한 재목이라도 백성을 번거롭게 할까 성려(聖慮)에서 깊이 걱정하시니, 깊은 산이나 궁벽한 골짜기 가운데에 있더라도 누구인들 우리 전하의 이 분부에 대하여 한 글자마다 한 번 눈물을 흘리지 않겠습니까?
다만 말세의 풍속은 괴이한 것을 좋아하여 기초(祈醮)가 버릇되었으므로, 혹 궁액(宮掖)의 무리가 전하께서 모르시는 가운데에 망령되게 스스로 그런 마음을 일으킨다면 성덕(聖德)에 누를 끼치는 것은 본디 말할 겨를도 없거니와 또한 평소에 정도를 기른 뜻에 어그러지지 않겠습니까?”하고,
또 말하기를,
“봉조하(奉朝賀) 신(臣)최규서(崔奎瑞)·찬선(贊善) 신(臣)정제두(鄭齊斗)는 지금의 대로(大老)입니다. 태산교악(泰山喬岳)이 움직이지는 않더라도 백성이 모두 바라보면 나라에 본받을 바가 있을 것이니, 더욱 정성과 예(禮)를 더하여 경저(京邸)에 들어오도록 권면하여 한결같이 주문왕(周文王)이 태공(太公)을 대우한 것4176)처럼 기덕(耆德)을 우양(優養)하고, 반드시 한(漢)나라 임금이 제갈양(諸葛亮)에게 물은 것처럼 큰일에 대하여 자문하소서.
그러면 성주(聖主)는 의지하여 근심하지 않을 바가 있고 국인(國人)은 믿어서 두렵지 않을 바가 있을 것입니다”하였는데, 도타이 비답(批答)하였다.
註4175]송종(送終):장사(葬事)에 관한 모든 일.註4176]주문왕(周文王)이 태공(太公)을 대우한 것: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조부(祖父)인 고공단보(古公亶父)는 장차 성인이 주나라에 이르면 그 사람의 힘으로 나라가 일어날 것이라고 하였는데, 문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위수(渭水)에서 낚시질하던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을 만나 수레에 태워 돌아와 재상으로 삼았음
○校理金尙星上疏, 略曰:
日昨備忘, 深悼我邸下至仁盛澤, 未及下究於生民, 丁閣、墓石之制, 視古從簡, 而關東所定之樑材, 亦有勿責之敎。 夫以堂堂千乘之國, 爲貳極送終, 而一木之煩民, 猶且深軫聖慮, 雖在深山窮谷之中, 其孰不一字一涕於我殿下此敎乎, 第末俗好怪, 祈醮成習, 或者宮掖之屬, 妄自生意於我殿下不知之中, 則其貽累聖德, 固不暇言, 而亦豈不有乖於平日養正之意耶,
又曰:
奉朝賀臣崔奎瑞、贊善臣鄭齊斗, 今之大老耳。 泰山喬岳, 雖無運動, 而民具爾瞻, 國有所矜, 惟願益加誠禮, 勉入京邸, 優養耆德, 一如周文之待太公, 咨訪大事, 必若漢帝之問諸葛, 則聖主有所倚而不憂, 國人有所恃而不恐矣。
優批以答。
영조 28권, 6년(1730 경술/청옹정(雍正)8년) 10월 4일(기해) 2번째기사
윤유가《역상고성》의 역법은 착오가 있으니, 다시 역법을 알아오게 할 것 등을 아룀
동지겸사은사(冬至兼謝恩使)인 서평군(西平君) 요(橈)와 부사(副使) 윤유(尹游)등이 청대(請對)하여 입시(入侍)하였다.
사행(使行)의 일을 논한 것이 끝나자, 윤유가 아뢰기를,
“신이 관상감(觀象監)에 있을 때에 역법(曆法)을 강희(康熙)의《역상고성(曆象考成)》을 모방하여 썼더니, 점점 착오가 생겨 매년 6,7처(處)의 틀린 곳이 꼭 있었습니다.
감관(監官) 한 사람을 데리고 가서 역법을 알아오게 하여 주소서”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윤유가 다시 아뢰기를,
“신이 근래에는 오래도록 입시하지 못하였습니다. 듣건대, 대신(大臣)이 백성의 구휼과 나라의 경영은 할 줄 모르고 진달한 바가 인물의 서용(敍用)에 관한 일 뿐이라 하니, 성상께서 경시(輕視)할 만합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묘당(廟堂)에는 국사를 담당할 만한 사람이 없는데, 그 허물은 내게 있다”하였다.
대개 근일에 이집(李㙫)·조문명(趙文命)등이 노론(老論)을 위하여 혹은 서용을 청하기도 하고 혹은 방석(放釋)을 청하기도 하면서 어울러 즐기려는 계획을 하니, 윤유가 준론(峻論)으로 못마땅하게 여겼기에 그의 말이 이와같았다. 임금이 이르기를,
“산림(山林)의 선비들은 내가 소외(疎外)시키는 것은 아니니, 양득중(梁得中)은 요사이 무슨 벼슬을 하고 있는가?”하니,
유엄(柳儼)이 답하기를,
“지금 종부시 정(宗簿寺正)으로 있습니다”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어제의 꿈이 허망한 듯하기는 하나, 군신(君臣)사이에 숨길 것이야 있겠는가? 꿈에 양득중을 만났는데 대접하기를 마치 위수(渭叟)5441)대하듯 하였다. 깬 뒤에 혼자 생각하기를, ‘초야(草野)에 혹 재덕(才德)을 가진 자가 있어 양득중을 빌어 현신(現身)한 것이나 아닐런지!’하였다”고 하였다.
윤유가 답하기를,
“꿈에 양득중을 만난 일은 정인(正人)을 얻을 조짐으로, 공손하고 조용히 치도(治道)를 생각하신데서 나온 것입니다. 천거(薦擧)하는 조목을 내걸어 산림의 선비로 하여금 듣고 용동(聳動)케 함이 좋겠습니다”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연석(筵席)에서 한 일이 비록 비밀스러우나, 어찌 듣지 못하겠는가? 천거하는 조목을 내거는 것부터가 바로 형식이다”하였다.
승지 유엄(柳儼)이 말하기를,
“이광좌(李光佐)와 민진원(閔鎭遠)은 모두 지성으로 나라를 생각하고 있는데, 올라오지않는다는 이유로써 버려두면 조정에 나올 기회는 없을 듯합니다”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내가 어찌 이들을 버려두겠는가?”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광좌와 민진원은 참으로 물과 불처럼 정반대되는 사이이다. 이광좌의 말이 옳다면 민진원은 반역이 되는 것이고 민진원의 말이 옳다면 이광좌는 반역이 되는 것이다. 시비(是非)란 뒤섞어서는 안되는 것인데, 하물며 충신(忠臣)과 역적(逆賊)에 있어서이랴! 유엄의 말에 ‘두 사람이 다 지성으로 나라를 위한다.’하였으니, 이것이 무슨 의논이겠는가?”
註5441]위수(渭叟):강태공(姜太公).
○冬至兼謝恩使西平君橈、副使尹游等請對入侍。 論史事訖, 游曰: “臣得罪觀象監, 聞曆法, 以康熙《曆象考成》, 倣而行之, 漸至舛錯, 每年必有六七處違錯。 率往監官一人, 俾得曆法。” 上許之。 游曰: “臣近來久未入侍。 槪聞大臣, 不能爲民憂國計, 所達不過收敍人物, 宜乎上之輕視之也。” 上曰: “卽今廟堂之上, 無做國事之人, 厥咎在予矣。” 蓋近日李㙫、趙文命等, 爲老論, 或請敍或請釋, 以爲調娛之計, 游以峻論恚之, 故其言如此。 上曰: “山林之士, 予非踈之, 梁得中近爲何官耶, 儼曰: “方爲宗簿正矣。” 上曰: “昨夢似誕, 而君臣之間, 何可相隱乎, 夢見梁得中, 待之無異渭叟。 覺後自謂曰: ‘草野或有抱才者, 而托得中見形耶,” 游曰: “梁得中夢見之事, 當得正人之兆, 出於恭默思道。 出擧條, 使山林之士, 聞而聳動可也。” 上曰: “筵說雖秘, 豈不聞之乎, 出擧條, 文具也。” 承旨柳儼曰: “李光佐、閔鎭遠, 俱至誠體國, 以其不上來置之, 則恐無造朝之期矣。” 上曰: “予豈捨之乎,”
【史臣曰: 李光佐、閔鎭遠, 眞水火也。 光佐之言是, 則鎭遠爲逆, 鎭遠之言是, 則光佐爲逆。 是非不可混淆, 況忠逆乎, 柳儼之言曰: ‘兩人俱至誠體國。’ 此何議論乎,”】
영조 47권, 14년(1738 무오/청건륭(乾隆)3년) 2월 14일(병신) 2번째기사
서단이 청과 화친을 청한 글을 논하다.
오명서의 뇌물수수를 대간에게 함문하는 일을 논하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지난번에 나왔던 서단(西靼)에서 청나라와 화친(和親)을 청한 글을 경들은 보았는가?”하자,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아뢰기를,
“신은 보았습니다”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일찍이 듣건대, 피국(彼國)에서 매양 서정(西征)하는 일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지금 이 글을 보니, 사납고 교활하여 억제하기 어려움을 알만하다”하였다. 이광좌가 아뢰기를,
“신이 을미년8939)에 부사로 연경(燕京)에 갔었습니다.
비록 사세를 헤아릴 만한 지혜는 없으나, 그윽이 생각하건대, 이후로 중국에서 곧 진주(眞主)가 나오기는 기필할 수 없고, 다시 다른 오랑캐가 나와서 예악과 문물을 탕진한 후에야 비로소 진인(眞人)이 나올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대개 주(周)나라때 번잡한 문장이 극도에 달하였다가, 진시황(秦始皇)때 분서갱유(焚書坑儒)의 화(禍)8940)가 있은 후에야 한(漢)나라 초기의 순박한 풍속이 이어졌었습니다.
청나라 사람들이 비록 오랑캐 종족이기는 하지만 모든 일이 극도로 문명화하여, 전장(典章)과 문한(文翰)이 모두 명나라[皇明] 때와 같습니다.
다만 나라의 풍속이 간이(簡易)한 점이 조금 달랐는데, 지금에 와서는 사치하는 폐단이 갈수록 심해져서 여대(輿儓)와 같은 천류(賤流)들도 모두 초피(貂皮)를 입으니, 이로 미루어 본다면 부녀들의 사치는 반드시 더 심할 것입니다.
또, 무속(巫俗)이 매우 치성(熾盛)하여 사묘(祠廟)와 사관(寺觀)이 가는 곳마다 있고, 도교(道敎)와 불교가 아울러 퍼져서 귀주(貴州)에는 음사(淫祠)가 72군데나 되도록 많았으며, 심지어 양귀비(楊貴妃)와 안록산(安祿山)의 사당까지도 있었습니다. 몽고(蒙古)는 여진(女眞)보다 더 굳세고 사나워서 만일 중원(中原)에 들어온다면, 우리 나라를 대우하는 도리가 반드시 청나라 사람들만도 못할 것입니다”하고,
우의정 송인명(宋寅明)은 아뢰기를,
“청주(淸主)가 법을 간이하게 세워서 원망하는 백성이 없는 듯하니, 반드시 패망을 재촉하지는 않을 것입니다”하고,
판윤 김시형(金始炯)은 아뢰기를,
“서단(西靼)8941)들이 살고있는 곳은 연경(燕京)과의 거리가 거의 1만여리나 됩니다. 강희(康熙)8942)때에 비록 간혹 변방을 침범했었지만 토벌하면 곧장 물러갔었고, 옹정(雍正)8943)때에는 요좌(遼左)의 군사를 모두 징발(徵發)하여 가서 정벌했었습니다”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서단이 몽고보다 강성한가?”하였는데,
김시형이 아뢰기를,
“몽고나 서단이 모두 청나라 사람들과 10년동안을 서로 버티어 왔는데,
서단이 먼저 귀순할 뜻이 있으므로 옹정이 군사를 철수하여 돌아오고, 단지 1만5천명의 군사를 변경(邊境) 위에 주둔시켜 불우(不虞)에 대비하게 하였습니다. 또 아극돈(阿克敦)을 보내어 왕래하게 했다고 합니다”하고,
이광좌(李光佐)는 아뢰기를,
“여후(呂后)가 묵특(冒頓)8944)의 오만한 글을 용납하여 받아들임으로써 한(漢)나라의 국조(國祚)가 장원(長遠)하게 되었습니다”하고,
호조판서 박사수(朴師洙)가 아뢰기를,
“이들은 진실로 강성한 종류들이어서 강희(康熙) 신미년8945) 무렵에 1만여 리나 출정하였었습니다. 이들은 반드시 천하에 난을 일으킬 자들이니, 우리나라도 자강(自强)에 유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였다.
서단(西靼)에서 화친하기를 청한 글에 대략 이르기를,
“삼황(三皇)이 세대를 교체하였고 오제(五帝)가 종통(宗統)을 선양(禪讓)함은, 어찌 특히 중화(中華)에만 임금이 있고 어찌 이적(夷狄)에게는 임금이 없는 것으로 알 일이겠습니까?
호호탕탕(浩浩蕩蕩)한 천지는 한 사람이 혼자 다스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넓고 거친 우주는 한 사람이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무릇 천하란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고, 곧 천하 사람들의 천하인 것입니다.
신은 나약한 나라에 살고 있어서 성지(城池) 수십자리가 되지않고 봉강(封彊)도 수천여리에 미치지 못합니다마는, 항시 만족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족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은 항시 만족하고 만족하게 여길 줄 모르는 사람은 항시 부족한 법입니다.
폐하께서는 중원에 사시면서 만승(萬乘)의 임금이 되시어 성지가 수백여자리나 되고 봉강도 수만여리가 되는데, 항시 부족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또한 멸하여 없애버리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살기(殺機)를 발동하면 귀신이 소리내어 울고 땅이 살기를 발동하면 용(龍)과 뱀이 은복(隱伏)하고, 사람이 살기를 발동하면 온 천하가 치고 죽이는 법입니다. 요(堯)·순(舜) 때에는 도(道)가 있었으므로 사해(四海)에서 와서 조회하였고, 우·탕(禹湯)이 인(仁)을 베푸니 팔방에서 공수(拱手)하였습니다. 신 또한 어찌 궤도(詭道)로 천안(天顔)을 뵈려고 하겠습니까?
순종하는 사람이라 하여 반드시 살기를 바랄 수 없고, 거역하는 사람이라 하여 꼭 죽도록 구속할 수 없는 법이니, 폐하께서는 일으켜 정벌할 군사가 있지만, 신에게는 방비할 대책이 있습니다.
문(文)을 논하면 공자(孔子)·맹자(孟子)의 문장(文章)이 있고, 무(武)를 논하면 여망(呂望)8946)·손무(孫武)8947)의 병법이 있습니다.
폐하께서 고굉(股肱)과 같은 무사(武士)들을 뽑고 정예(精銳)한 군사를 거느리고 하란산(賀蘭山) 밑에서 서로 만나 한 번 싸움을 벌인다해도 무슨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위에서 이미 인자하지않으면 아래에서도 공손하지 않은 법이고, 군사는 양쪽이 모두 이기는 법이 없고 전쟁이란 양쪽이 모두 패하는 법이 없는 것입니다.
만일 임금이 이기고 신하가 순종하면 상국(上國)으로 일컫는 의리가 생기겠지만, 혹시라도 신하가 이기고 임금이 순종하면 소국(小國)의 수치를 면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예로부터 화친을 청하는 것을 위주로 하는 것은 군사를 해산하고 싸움을 중지하고 생령(生靈)들의 질고(疾苦)를 풀어 주고 여민(黎民)들의 간난(艱難)을 없애는 것만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중화(中華)에 진공(進貢)하고 해마다 약소한 곳에서 신하라고 일컬어 왔습니다.
이제 신(臣) 달리마나(達里麻那)를 보내어 단지(丹墀)에 배알(拜謁)하며 진실로 황공(惶恐)한 마음으로 땅에 닿게 머리를 조아립니다”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 글은 기두(起頭)가 웅장하고 위엄이 있어서 그들의 기상을 볼 수 있다”하니, 송인명이 아뢰기를,
“원(元)나라 때에는 정문(正門)의 이름이 대명문(大明門)이었는데 명(明)나라 때에 태청문(太淸門)이라고 고쳤고, 지금 청나라에서는 또 태극문(太極門)이라고 고쳤습니다. 서단(西靼)에서 국호(國號)를 ‘극(極)’이라고 했다하는데, 이 말이 비록 부회(傅會)한 것 같기는 하지만, 역시 사려(思慮)함이 없지않은 것입니다”하였다.
그 뒤에 유신 이성중(李成中)이 아뢰기를,
“서단에서 청나라에 화친을 통지했다는 글은 본시 중국에 서로 전해오는 고문(古文)으로,《설부(說郛)》·《홍서(鴻書)》에 수록되어 있는데, 일설에는 토번(吐蕃)에서 중국에 화친을 구한 글이라고도 하고 일설에는 일본(日本)에서 중국에 화친을 구한 글이라고도 합니다. 이번에 피인(彼人)들이 우리 역관들을 속이려고 하여 거짓으로 서단의 글이라고 한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것이 이미 거짓임을 알았으면 어찌 기록할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 《승정원일기》에서 삭제하도록 명하였다.
예조판서 송진명(宋眞明)이 아뢰기를,
“전동래부사(東萊府使) 오명서(吳命瑞)의 공사(供辭)에, ‘조정의 고관에게 은밀히 뇌물을 주었다’고 한 일은 준 사람이나 받은 사람이나 모두 암매(暗昧)하여 대간(臺諫)에게 물어보지 않으면 진실로 핵실(覈實)할 길이 없습니다”하니,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하문하였다.
이광좌가 아뢰기를,
“대간에게 함문(緘問)하면 끝내 후일의 폐단이 있게 될 것입니다.
일찍이 적과자(賊科者)8948)의 옥사(獄事)에 대간을 초문(招問)한 일이 있었지만, 그 뒤에는 다시 행하지 않았습니다”하고,
송인명은 아뢰기를,
“오명서는 일찍이 시종(侍從)을 지낸 사람입니다. 하물며 소위 조정의 고관을 어찌 아울러 암매(暗昧)한 죄과에 둘 수 있겠습니까?”하고,
이광좌는 아뢰기를,
“만일 대간을 함문한다면, 풍문을 가지고 일을 논하는 길이 끊어져 버릴 것이니, 어찌 뒷날의 폐단이 되지 않겠습니까?”하고,
병조판서 박문수(朴文秀)는 아뢰기를,
“오명서는 사람됨이 지나치게 강직하고 맹렬하여 잠상(潛商)의 길을 엄하게 막았기 때문에, 부임한 뒤에 훼방을 초래하는 사단(事端)이 없지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하고,
이광좌가 아뢰기를,
“일찍이 조태억(趙泰億)을 함문한 일이 있었는데, 이는 부자간에 관계되는 일이었습니다. 조정에서 대각(臺閣)을 이와 같이 대우할 수는 없습니다”하였다. 송인명이 아뢰기를,
“판중추부사 김재로(金在魯)가 일찍이 봉조하(奉朝賀) 최규서(崔奎瑞)의 시호(諡號)에 관한 일로 앙달(仰達)한 바가 있습니다. 그 당시에 시호를 의논하여 ‘충정(忠貞)’을 수망(首望)으로 삼고, ‘문충(文忠)’을 부망(副望)으로 삼은 것은 그 뜻이 비록 충(忠)에 더 비중을 두려는 것이었지만, ‘문(文)’자를 얻지 못한 것은 끝내 결점이 되었습니다”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마땅히 입계(入啓)하기를 기다려 처결하겠다”하였다.
이광좌가 아뢰기를,
“용인(龍仁)의 유생들이 일찍이 최규서의 사당을 세우도록 청했으나, 윤허받지 못했습니다. 성상의 뜻은 비록 뒷날의 폐단을 염려하시는데에서 나왔으나, 이사람의 큰 훈로(勳勞)는 분모열토(分茅裂土)8949)해주어야 옳은데, 어찌 두어 칸의 사당을 아껴야 하겠습니까?”하고,
조현명(趙顯命)이 아뢰기를,
“만약 성상께서 사당을 세우는 것은 폐단이 된다고 여기신다면, 따로 하나의 사당을 세우게 하더라도 불가(不可)하지 않습니다”하니,
임금이 특별히 해조(該曹)에 명하여 그의 집에 따로 사당을 세워 영구히 옮길 수 없는 사당으로 삼도록 하고, 충훈부(忠勳府)로 하여금 제전(祭典) 30결(結)을 주게 하였으며, 자손은 충훈부의 전례에 의하여 대대로 조용(調用)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사당을 세운 다음에는 예관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다. 이광좌가 아뢰기를,
“최규서의 아들 최상정(崔尙鼎)은 그 당시에 와서 그의 아비의 말을 매우 자세하게 전하였는데, 안호(安鎬)와 안호의 종 막실(莫實)을 데리고 왔었으니, 최상정은 진실로 공이 있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에 있어서도 또한 마땅히 수록하여야 하겠지만, 더욱이 봉조하의 아들이겠습니까?”하니,
임금이 특별히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다. 송진명이 아뢰기를,
“듣건대, 감시(監試)의 회시(會試)에서 유생 한 사람이 시권(試券)끝에 혈서(血書)하여 시관(試官)에게 애걸하는 짓을 했다고 합니다.
이는 사습(士習)이 아름답지 못할 뿐만아니라 그의 마음이 지극히 요악한 것이니, 비록 입격(入格)되지 않았다하더라도 마땅히 적발해서 과죄(科罪)하여 다스림으로써 과장(科場)이 엄격해지도록 해야 합니다”하고,
송인명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에 시관은 마땅히 종중 추고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유생은 비록 요악하지만, 어찌 반드시 조사하여 다스려야 하겠습니까?”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사간 이도겸(李道謙)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註8939]을미년:1715 숙종41년.註8940]분서갱유(焚書坑儒)의 화(禍):중국의 진시황(秦始皇)이 즉위 34년에 학자들의 정치비평을 금하기 위하여, 민간에서 가지고 있는 의약(醫藥)·복서(卜筮)·종수(種樹)에 관한 책만을 제외하고 모든 서적을 모아서 불살라 버리고, 이듬해 함양(咸陽)에서 수백(數百)사람의 유생(儒生)을 구덩이에 묻어 죽인 일 註8941]서단(西靼):서달자(西㺚子).註8942]강희(康熙):청나라 성조(聖祖)의 연호.註8943]옹정(雍正):청나라 세종(世宗)의 연호 註8944]묵특(冒頓):흉노(匈奴) 선우두만(單于頭曼)의 아들로 그 아버지를 시해(弑害)하고 자립(自立)하였음. 한(漢)나라 초기에 남하(南下)하여 고조(高祖)를 백등(白登)에서 포위하였고, 다시 혜제(惠帝)때 글을 보내어 여후(呂后)를 모욕(侮辱)하였는데, 한나라에서는 부득이 화친(和親)하고 세폐(歲幣)를 바쳤음.註8945]신미년:1691 숙종17년 註8946]여망(呂望):주(周)나라 초기의 현신(賢臣).註8947]손무(孫武):춘추시대 제(齊)나라의 병법가.註8948]적과자(賊科者):과장(科場)에서 다른 사람의 과거답안을 도둑질하여 본인의 이름을 지우고 자신의 이름을 써넣은 사람. 절과자(竊科者).註8949]분모열토(分茅裂土):천자(天子)가 제후(諸侯)를 봉함을 말함. 천자가 제후를 봉할 때 오행설(五行說)에 의하여 그 방면(方面)의 색깔[東則靑, 西則白, 南則赤, 北則黑, 中央則黃]의 흙을 띠풀[白茅]에 싸서 주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여기에서는 공신이 되어 부원군(府院君)등에 오름을 말함. 모토(茅土).
○上引見大臣備堂。 上曰: “頃者出來西靼請和淸國書, 卿等見之乎,” 領議政李光佐曰: “臣則見之矣。” 上曰: “曾聞彼國每有西征之事, 今見此書, 可知其桀黠難制矣。” 光佐曰: “臣於乙未, 以副使赴燕, 雖無料事之智, 竊謂此後中國未必卽出眞主, 似更出他胡, 蕩盡其禮樂文物, 然後始生眞人矣。 蓋周之煩文已極, 有秦皇焚坑之禍, 然後承之以漢初淳風。 淸人雖是胡種, 凡事極爲文明, 典章文翰, 皆如皇明時。 但國俗之簡易稍異矣, 奢侈之弊, 至今轉甚, 如輿儓賤流, 皆着貂皮。 以此推之, 婦女奢侈, 必有甚焉。 且巫風太熾, 祠廟寺觀處處有之, 道釋竝行, 貴州淫祠, 多至於七十二座, 至有楊貴妃、安祿山祠。 蒙古雄悍, 過於女眞, 若入中原, 則待我之道, 必不如淸人矣。” 右議政宋寅明曰: “淸主之法簡易, 民似無怨, 不必促亡矣。” 判尹金始炯曰: “西靼所居之地, 距燕京幾萬餘里。 康熙時雖或侵邊, 伐之則輒退。 雍正時盡發遼左兵往征矣。” 上曰: “西靼强於蒙古乎,” 始炯曰: “蒙古、西靼皆與淸人十年相持, 西靼先有歸順之意, 雍正撤兵而還, 只屯一萬五千兵於邊上, 以備不虞。 又送阿克敦往來云矣。” 光佐曰: “呂后容受冒頓慢書, 而漢祚綿遠矣。” 戶曹判書朴師洙曰: “此實强盛之種類, 康熙辛未年間, 出征萬餘里。 此必作亂於天下者也, 我國不可不留意於自强也。” 西靼請和書, 略曰:
三皇交世, 五帝禪宗, 豈特中華之有主, 焉知夷狄之無君, 乾坤浩蕩, 非一人之獨治; 宇宙洪荒, 非一人之能守。 夫天下者, 非一人之天下, 乃天下人之天下也。 臣居懦弱之邦, 城池不滿數十餘座, 封疆不及數千餘里, 常懷知足之心, 知足者常足, 不知足者常不足矣。 陛上身居中原, 爲萬乘之君, 城池數百餘座, 封疆數萬餘里, 常有不足之心, 又起滅絶之意。 天發殺機, 神嚎鬼哭; 地發殺機, 龍蛇隱伏; 人發殺機, 天下殺攻。 堯、舜有道, 四海來朝; 禹湯施仁, 八方拱手, 臣豈肯詭道而奉顔乎, 順之者未必冀其生, 逆之者未必拘其死。 陛下有興伐之兵, 臣有備修之策, 論文則孔孟之文章, 論武有呂望、孫武之兵法。 陛下選股肱之士, 率精銳之兵, 相逢賀蘭山下, 聊擺一戰, 有何懼哉, 上旣不慈, 下亦不恭, 兵無兩勝, 戰無兩敗。 如有君勝臣順, 可稱上國之義; 儻若臣勝君順, 難免小國之恥。 自古以來, 請和爲主, 不如罷兵休戰, 解生靈之疾苦, 滅黎首之艱辛。 年年進貢于中華, 歲歲稱臣於弱地。 今遣臣達里麻那謁丹墀, 誠惶誠恐, 稽首按地云矣。
上曰: “此書起頭雄威, 可見其氣象矣。” 寅明曰: “元時正門之號, 乃大明門; 明時則改以太淸門, 今淸則又改以太極門, 西靼之國號爲極云, 此說雖似傅會, 亦不無慮矣。” 其後儒臣李成中奏曰: “西靼通和淸國書, 自是中國相傳之古文, 載於《說郛》、《鴻書》, 一云吐蕃求和中國書, 一云日本求和中國書。 今彼人乃欲誑我象譯, 詐稱西靼書也。” 上曰: “旣知其詐, 則何可載錄,” 仍命刪去於《政院日記》。 禮曹判書宋眞明奏曰: “前東萊府使吳命瑞供辭, 密賂朝貴事, 予受皆在暗昧, 不問於臺諫, 則實無覈實之道矣。” 上下詢諸臣, 光佐曰: “臺諫緘問, 終有後弊。 曾於賊科之獄, 有招問臺諫之擧, 而後不復行矣。” 寅明曰: “吳命瑞曾經侍從之人也。 況所謂朝貴, 豈可竝置暗昧之科乎,” 光佐曰: “若緘問臺諫, 則風聞論事之路絶, 豈不爲後弊乎,” 兵曹判書朴文秀曰: “吳命瑞爲人過於剛猛, 嚴防潛商之路, 故赴任後, 不無致謗之端云矣。” 光佐曰: “曾有趙泰億緘問之擧, 而此則係父子間事也。 朝廷之待臺閣, 不可如此矣。” 寅明曰: “判府事金在魯曾以奉朝賀崔奎瑞謚號事, 有所仰達。 當時議謚以忠貞爲首望, 文忠爲副, 其意雖欲歸重於忠, 而不得文字, 終爲欠事矣。” 上曰: “然則當待入啓而處之矣。” 光佐曰: “龍仁儒生等曾請崔奎瑞建祠, 而未承允許。 聖意雖出於念後弊, 而此人之大勳勞, 分茅裂土可也, 何惜數間祠乎,” 顯命曰: “聖上若謂建祠之有弊, 則使別立一祠, 未爲不可矣。” 上特命該曹別建祠於其家, 爲不遷之廟, 令勳府給祭田三十結, 子孫依勳府例, 世世調用, 而建祠後, 遣禮官致祭。 光佐曰: “奎瑞之子尙鼎, 當時來傳其父言甚悉, 率安鎬及鎬之奴莫實而來, 尙鼎實有功。 在他人亦宜收錄, 況奉朝賀子乎,” 上特命加資。 眞明奏曰: “卽聞監試會試有一儒生, 血書券末, 乞憐於試官云, 不但士習不美, 其心極妖惡。 雖不入格, 當摘發科治, 以嚴科場矣。” 寅明曰: “臣意則試官宜重推, 而儒生雖妖惡, 何必査治乎,” 上可之。 司諫李道謙申前啓, 不允。
영조 57권, 19년(1743 계해/청건륭(乾隆)8년) 2월 19일(계묘) 3번째기사
오광운이 황단에 제사지내겠다는 명을 정지할 것을 청하다
예조참판 오광운(吳光運)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공자께서 조심하신 바는 오로지 제계(齊戒)와 질병이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겸하여 조심할 수 없을 경우 제사는 대행할 수 있지만, 질병은 조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周)나라 천자(天子)가 제(齊)나라에 제사지낸 고기를 내리고 백구(伯舅)10188)는 늙었다하여 뜰아래에 내려가 절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천자가 제후(齊侯)의 늙음을 딱하게 여김이 지극하였습니다. 전하의 존주(尊周)하는 정성으로 보건대, 저 하늘이 성궁(聖躬)을 돌보심이 어찌 주나라 왕보다 아래로 가겠습니까? 바야흐로 성후(聖候)를 조용히 조섭하는 때를 당하였으니, 황단(黃壇)에 친히 제사지내겠다는 명을 정지하심이 마땅하겠습니다.”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는 높이 평가할 만하나 이미 유시하였다. 대행시킬 수 없다”하였다.
註10188]백구(伯舅):옛날에 천자(天子)가 성(姓)이 다른 제후(諸侯)에 대하여 일컫던 말.
○禮曹參判吳光運上疏, 略曰:
孔聖所愼, 惟齊與疾。 而不可一時兼愼, 則祀可攝而疾不可不愼也。 周天子賜胙於齊, 以伯舅耋老, 使無下拜, 則天子所以憫老齊侯者至矣。 以殿下尊周之誠, 皇靈之眷佑聖躬者, 豈下於周王乎, 方當聖候靜攝之時, 宜寢皇壇親享之命。
批曰: “所陳可尙, 而旣諭矣。 不可攝也。”
영조 57권, 19년(1743 계해/청건륭(乾隆)8년) 4월 1일(갑신) 4번째기사
김상복이 임금이 간언을 구할 것을 진달하다
지평 김상복(金相福)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전하의 총명과 예지는 백왕(百王)보다 훨씬 뛰어나시어 군신(群臣)들이 족히 성심(聖心)을 당할 수 없다고 여기시며, 드디어 ‘군하(群下)의 학문은 나만 못하다’고 하셨습니다.
임어(臨御)하신 지 20년동안 전하께서 좋은 말에 절하셨음은 듣지못하였고, 단지 말하는 자가 그 말때문에 죄를 얻었다는 것만 들었습니다.
무릇 천하의 일에 구하지않고도 얻은 경우란 없었습니다.
은(殷)나라 고종(高宗)은 부열(傅說)에 대해, 주(周)나라 문왕(文王)은 여상(呂尙)에 대해, 촉한(蜀漢)의 소열제(昭烈帝)는 제갈양(諸葛亮)에 대해 심히 부지런히 구했던 것이니, 구하지 않았다면 저 세 신하는 반드시 스스로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간언(諫言)을 구하시면 간언이 반드시 이를 것이지만, 간언을 구하지도 아니하는데 절로 이를 그런 이치는 없는 것입니다”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바를 마땅히 힘쓰겠다”하였다.
○持平金相福上疏, 略曰:
殿下聰明睿智, 高出百王, 視群臣無足以當聖心者, 遂曰群下之學, 莫我若也。 臨御二十年之間, 未聞殿下之拜昌言, 而只聞言者之以言獲罪。 凡天下之事, 未有不求而得之者。 殷宗之於傅說, 周文之於呂尙, 漢昭烈之於諸葛亮, 求之甚勤, 不求則彼三臣者必不自來矣。 今殿下求諫, 則諫必至,不求諫而自至,無是理也。
批曰: “所陳宜勉。”
영조 77권, 28년(1752 임신/청건륭(乾隆)17년) 7월 2일(경신) 2번째기사
태묘의 추향과 중궁의 주갑등에 관해 의논하다
우의정 이천보(李天輔)가 비로소 출사(出仕)하자, 임금이 이천보를 인견하였는데, 태묘의 추향(秋享)을 직접 지내는 것을 정침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몸소 태묘에 임하여 종고(鍾鼓)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조금 펴질 듯하니, 모름지기 염려하지 말라”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중궁전의 진하(陳賀)는 동궁의 정례(情禮)에 있어서 하지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청컨대 윤허하여 주소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갑년(甲年)이 되면 중궁에게 행하도록 허락한 일을 그 해에 행하지 아니하겠는가? 올해에 막고 난 뒤에야 뒷날 다른 해에도 막을 수 있을 것이다”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국조(國朝)에 처음 있는 경사이니, 이것은 천리(天理)와 인정상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처음 있다 하는가, 장렬 대비(莊烈大妃)의 주갑(周甲)때에도 하례(賀禮)가 있었다”하므로,
예조판서 이익정(李益炡)이 말하기를,
“중궁전의 주갑은 처음 있는 경사입니다”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영상이 고령(高齡)을 이유로 휴퇴(休退)하려는 뜻이 있어 연달아 사직단자를 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상직(相職)은 유사(有司)의 분주한 직임과는 다르니, 잠시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을 베풀어 휴양토록 하는 것이 좋겠지만 그대로 체직(遞職)을 허락한다면 나랏일은 어찌 되겠습니까?
오늘날 세도(世道)는 만약 노성(老成)한 사람이 없다면 진정시킬 수 없으니, 결코 휴치(休致)를 허락해서는 안될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강태공(姜太公)은 여든에 재상이 되었다. 도(道)를 논하고 나라를 경영하는 의지가 어찌 연로한 것 때문에 혹시라도 쇠잔해질 수 있을 것인가?
경의 말이 옳다”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대리(代理) 이후로 무릇 소장을 일체 금지시키고 계십니다.
그런데 조정의 일에는 대조께 진문(陳聞)할 것도 있고 소조(小朝)께 진문할 것도 있으며, 또 전하의 처분 및 성궁(聖躬)의 궐유(闕遺)에 관계될 경우 감히 소조께 글로 진달하지 못할 것도 있습니다.
동궁께서 비록 대리하고 계시나, 나라의 대사를 감히 스스로 천단(擅斷)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소장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시기 때문에 상하의 정지(情志)가 서로 떨어지고 언로(言路)가 막혔으니, 어찌 걱정스럽지 않겠습니까?”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 마음이 이미 소모되었으니, 이 근력으로 어떻게 나랏일을 볼 수 있겠는가? 지금 믿는 것은 오로지 원량(元良)뿐이다. 상소는 경과 좌상이 맡아 하되, 대신의 것은 답하고, 그 이하는 답하지 않겠다”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오늘날 나랏일은 먼저 소장이란 한 길을 열고 난 뒤에야 다른 일을 의논할 수 있습니다. 언로란 사람의 핏줄과 같은 것입니다.
지금 허다한 대신(臺臣)은 전하께 대해 모두 쓸데없는 관원이니, 전하의 핏줄이 통하고 있다할 수 있겠습니까? 처음에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힘써 간쟁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는데, 신 또한 소장을 받아들이도록 허락하는 것을 급선무로 생각하고 있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소장은 허락하기 어렵다”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한 달에 두 차례 대조께 입시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조가(朝家)에 연고가 많아 오랫동안 폐기되어 있고, 비국 당상과 여러 신하들 중에서는 혹 한 해를 넘기도록 천안(天顔)을 우러러 뵙지 못한 경우도 있으니, 어찌 더욱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이미 몽매함을 무릅쓰고 명을 받들었으니, 삼가 마땅히 한 달에 두 번 입시하겠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한갓 문구가 될 뿐이고 효과가 없을 것이다”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이 또한 유익함이 있을 것이니, 어찌 문구라하여 전혀 폐기할 수 있겠습니까?”하고,
또 말하기를,
“인군(人君)의 사령(辭令)은 심히 소중한 것입니다.
왕의 말이 한번 나오면 사방에 전송(傳誦)되니, 관계되는 바가 어찌 크지않겠습니까? 그런데 전하께서는 사령을 내릴 즈음에 절박하게 하심으로써 실수하는 경우가 많이 있으니, 그 정리를 벗어난 하교를 당하는 뭇 신하가 어찌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요사이의 일로 말하더라도 이규채(李奎采) 무리의 일로 하교하신 것이 있었는데, 그 중 ‘협박’이란 두 글자는 승지의 진달로 인해 즉시 환수하셨습니다만, ‘기관(機關)’이란 두 글자는 왕언(王言)의 체통을 크게 잃은 것입니다.
이규채의 무리는 오찬(吳瓚)과 더불어 이미 같이 일을 했던 사람이니, 감히 급작스레 벼슬길에 나설 수 없었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무슨 기관이 그 사이에 있었겠습니까? 인신(人臣)이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 만약 기관을 쓴다면, 그 죄가 어떤 지경에 이르겠습니까?”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약이 사람을 어지럽게 하지 않으면 그 병이 나을 수 없는 법이니, 경의 말이 간절하다. 두 글자는 환수하겠다”하였다.
이천보가 또 말하기를,
“오찬의 이름이 죄적(罪籍)에 있으니, 곧 극률(極律)입니다.
듣건대 그의 늙은 어미가 직첩을 보고서야 눈을 감겠다고 하니,
그 정리가 참담하고 절절합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은 공정한 마음으로 생각해 보라. 오찬은 불충불효한 사람이다.
어찌 풀어주기를 청할 사람이겠는가?”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이존중(李存中)의 아비는 아들을 생각하다가 병이 나서 그대로 일어나지 못하였다하니, 듣건대 또한 참혹합니다.
오찬의 어미는 미처 직첩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면 반드시 지하에서 원한을 품을 것입니다. 청컨대 오찬에게는 직첩을 돌려주고, 이존중은 돌아가 아비의 장례를 보게 해 주소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정신이 전적으로 여기에 있으니, 어찌 그르지 아니한가?”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신이 어찌 한낱 오찬을 위해 전하를 속이겠습니까?
신이 처음 연석(筵席)에 올라 군부(君父)께 의심을 받았으니, 물러가 부월(斧鉞) 아래에서 복주(伏誅)되기를 청합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때문에 내가 경도(傾倒)하였다. 어찌 인구(引咎)할 필요가 있는가?”하였다. 이천보가 말하기를,
“선조(先朝)때는 목사(牧使)가 된 사람이 몇 사람에 불과했는데, 요새는 현감에서 차례로 승천(陞遷)하여 목사에 이른 자가 많으니, 음로(蔭路)의 조경(躁競)이 모두 이에서 말미암습니다. 이후로는 여러 차례 군과 현에 시험해 본 사람이 아니면 목사에 의망하지 말도록 엄하게 신칙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번에 충주 목사(忠州牧使) 이경조(李景祚)를 단지 부사의 이력으로 목사에 복직시킨 것은 잘못된 일이었으나, 이경조는 평소 성적(聲績)이 있는데다 또 이미 부임하였으니, 지금 인혐하게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전조(銓曹)에 신칙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이천보가 또 말하기를,
“국가의 급선무는 오로지 인재를 수습하는데 있을 뿐입니다.
임상원(林象元)은 평소 문화(文華)가 드러났고 선치(善治)한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연주(筵奏)때의 말이 제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일때문에 끝내 영원히 벼슬길이 막히고 말았으니, 실로 애석합니다.
또 피차를 논할 것도 없이 앞으로 믿고 의지할 사람이 많지 아니합니다.
민백상(閔百祥)은 휴척(休戚)을 같이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기국(器局)과 재유(材猷)가 크게 쓸 만한데, 한때의 망발 때문에 장기(瘴氣)가 있는 바다에서 해를 넘겨 살면서 돌아올 기약이 없습니다.
청컨대 출륙(出陸)시키도록 하소서”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상주 목사(尙州牧使) 서명빈(徐命彬)을 외직(外職)에 보임(補任)시키라는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右議政李天輔始出仕, 上引見天輔, 請寢太廟秋享之親行, 上曰: “身臨太廟, 聽鐘鼓之聲, 則心小伸矣, 須勿慮焉。” 天輔曰: “中宮殿陳賀, 吊宮情禮, 不可不伸。 請賜允許。” 上曰: “予當甲年, 則許行於中宮之事, 不行於其年乎, 防於今年, 然後可以防於他年矣。” 天輔曰: “國朝初有之慶, 此天理、人情之所不可已者也。” 上曰: “何謂初有也, 莊烈大妃周甲, 有賀禮矣。” 禮曹判書李益炡曰: “中宮殿周甲, 則初有之慶也。” 天輔曰: “領相有引年休退之意, 連爲尋單。 而相職異於有司奔走之任, 暫施優老之典, 使之休養則可矣, 仍以許遞, 則其於國事何也, 今日世道, 若無老成之人, 無以鎭定, 不可許其休致也。” 上曰: “姜太公八十爲相。 論道經邦之志, 豈以年老而或衰乎, 卿言是矣。” 天輔曰: “殿下自代理以後, 凡疏章一切禁之。 朝廷事, 有陳聞於大朝者, 有陳聞於小朝者, 且關係殿下處分及聖躬闕遺, 則有不敢書陳於小朝者。 東宮雖代理, 而國之大事其敢自擅自斷, 殿下則不捧疏章, 故上下情志阻隔, 言路杜塞, 豈不可悶乎,” 上曰: “予心已耗, 以此筋力, 何以爲國事, 卽今所恃者, 惟元良矣。 疏則卿與左相爲之, 大臣則答之, 其下則不答矣。” 天輔曰: “今日國事, 先開疏章一路, 然後他事可議。 言路如人之血脈。 卽今許多臺臣, 於殿下則皆是剩官, 殿下血脈, 可謂通乎, 初頭大臣、諸臣, 力爭不得, 而臣亦以疏章之許捧, 爲急先務矣。” 上曰: “章疏則難矣。” 天輔曰: “至於一月兩次大朝入侍, 朝家多故, 久爲廢閣, 而備堂、諸臣, 或有經歲而不瞻天顔者, 尤豈不抑鬱乎, 臣旣冒昧承膺, 謹當一月兩次入侍矣。” 上曰: “徒爲文具而無效矣。” 天輔曰: “此亦有益, 豈以文具, 全然廢閣乎,” 又曰: “人君辭令甚重。 王言一出, 四方傳誦, 所關豈不大哉, 殿下於辭令之間, 多有失於切迫者, 其中情外之敎, 群下當之者, 豈不冤抑乎, 雖以近日事言之, 以李奎采輩事, 有下敎者, 其中迫脅二字, 則因承旨陳達, 旋卽收還, 而至於機關二字, 大失王言之體。 李奎采輩, 與吳瓚旣是同事之人, 則不敢遽然從宦, 不是異事。 有何機關於其間耶, 人臣事君, 若用機關, 則其罪至於何境耶,” 上曰: “若藥不瞑眩, 厥疾不參, 卿言切近矣。 二字則還收焉。” 天輔又曰: “吳瓚名在丹書, 便是極律。 聞其老母欲見職牒而瞑目云, 情理慘切矣。” 上曰: “卿以公心思之。 吳瓚不忠不孝。 豈請放之人乎,” 天輔曰: “李存中之父, 思子成疾, 仍不起云, 聞亦慘矣。 吳瓚之母不及見職牒而死, 則必抱冤於地下。 請吳瓚則給牒, 而李存中使之歸見父葬焉。” 上曰: “卿之精神, 全在於此, 豈不非乎,” 天輔曰: “臣豈爲一吳瓚而欺殿下乎, 臣初登筵席, 見疑於君父, 請退伏斧鉞。” 上曰: “惟卿之故, 予爲傾倒。 何必引咎,” 天輔曰: “先朝時爲牧使者, 不過數人, 而今則自縣監, 連次陞遷, 以至牧使者多, 蔭路躁競, 皆由於此。 此後則嚴飭非屢試郡縣者, 勿擬牧使。 而今忠州牧使李景祚, 只以府使履歷, 復職牧使者非矣, 景祚素有聲績, 且已赴任, 今不可使之引嫌。 而亦宜申飭銓曹”, 上允之。 天輔又曰: “國家急務, 惟在收拾人才。 而林象元素著文華, 且稱善治, 因筵奏之辭不達意, 終爲永枳, 實爲可惜。 且無論彼此, 前頭倚仗之人無多。 而閔百祥生於休戚與共之家, 器局、材猷, 可以大用, 而以一時妄發, 經年瘴海, 生還無期。 請出陸。” 上從之。 又請收還尙州牧使徐命彬外補之命, 從之。
영조 83권, 31년(1755 을해/청건륭(乾隆)20년) 1월 23일(정유) 1번째기사
조영순을 해남현으로 이치하다. 교리 남태회에게 동국총목을 읽히다
조영순(趙榮順)을 해남현(海南縣)으로 옮겨 귀양보냈다.
임금이 교리 남태회(南泰會)를 불러 동국총목(東國摠目)을 읽도록 명하였다. 남태회가 말하기를,
“지금 이존오(李存吾)와 정추(鄭樞)의 일에 대하여 전하께서는 감계(鑑戒)할 만한 것이 있다고 여기시는데, 승국(勝國)13237)의 공민왕(恭愍王)은 나라를 망하게 한 군주입니다. 신돈(辛旽)을 예(禮)로 높이기를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상보(尙父)13238)에게와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관중(管仲)13239)에게 한 것과 다름이 없었는데, 이존오와 정추가 신돈을 논핵(論劾)한 것에 대하여 무장현(茂長縣)으로 귀양보내는데 지나지 않도록 해서 그쳤으니, 여기에서 언관(言官)을 애석히 여겼음을 볼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국사(國事)를〉말한 것때문에 죄를 얻은 자는 번번이 섬으로 귀양 보내었으니, 진실로 성세(聖世)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조영순(趙榮順)같은 자에 이르러서는 그 아비는 신축년13240)·임인년13241)사이에 먼 섬으로 정배(定配)되었으며, 조영순이 그 시기에 태어났다고 하니, 지금 만약 하루아침에 섬 가운데서 죽게 된다면 그의 출생과 사망이 모두 먼 섬에서 이루어지게 될 터이니 어찌 가엾게 여기고 측은하게 여겨야 할 처지가 아니겠습니까?”하니,
임금이 그 말에 감동되어 이런 명이 있었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지난번에 원량(元良)이 나를 본받아 세 사람의 대간(臺諫)을 섬으로 귀양을 보냈는데 배도(倍道)하도록 하였으니, 이것은 내가 그를 인도한 것이다.
이로 인하여 내가 스스로 면려함이 마땅하니 이것을 써서 원량에게 들여 보내어 그로 하여금 나의 뜻을 알도록 하라.
아! 저 당인(黨人)들은 칙이(飭弛)라고 말하지 말라. 비록 땅에다 금을 그어 놓고 감옥이라고 하더라도 마땅히 들어가지 않는 법이다”하였다.
註13237]승국(勝國):자기 나라가 이겨 멸망시킨 나라. 곧 전왕조인 고려를 가리킴.註13238]상보(尙父):주(周)나라의 현신(賢臣)인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의 존호. 주나라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을 보좌하여 은(殷)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창업(創業)한 공신(功臣)임 註13239]관중(管仲):춘추시대 제(齊)나라의 현상(賢相). 환공(桓公)을 섬겨 정승이 됨. 부국강병에 힘쓰고 제후(諸侯)를 규합하여 환공으로 하여금 천하를 광정(匡正)하여 오패(五覇)의 으뜸이 되게 하였음.註13240]신축년:1721 경종원년 註13241]임인년:1722 경종 2년.
○丁酉/移配趙榮順于海南縣。 上召校理南泰會, 瑁《東國摠目》。 泰會曰: “今於李存吾、鄭樞事, 殿下有可以鑑戒者, 勝國恭愍王亡國之主也。 尊禮辛旽, 無異周武、齊桓之於尙父ㆍ管仲, 而李、鄭之論劾旽也, 不過竄逐茂長而止, 此可見愛惜言官也。 殿下卽阼以來, 以言獲罪者, 輒竄海島, 固非聖世美事。 而至若趙榮順, 則其父於辛、壬年間, 定配絶島, 而榮順出於其時云, 今若一朝死於島中, 則其生其死皆在絶島, 豈非矜惻處乎,” 上感其言而有是命。 仍敎曰: “頃者元良效我, 投三臺於海島, 亦令倍道, 此予導之也。 因此予當自勉, 以此書入元良, 使之知我意焉。 噫! 彼黨人莫曰飭弛。 雖畫地囹圄, 宜不入也。”
영조 87권, 32년(1756 병자/청건륭(乾隆)21년) 2월 15일(계축) 1번째기사
명정전에서 반포한 송시열·송준길을 종향하고 반포한 교문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친림(親臨)하여 교문(敎文)을 반포하였다. 대개 문정공 송시열과 문정공 송준길을 14일 사시(巳時)에 문묘(文廟)에 종향(從享)했기 때문이었다. 이르기를,
“왕은 말하노라. 많은 선비를 내어 문왕(文王)을 편안케하니 청아(靑莪)1372 1)는 누조(累朝)의 교화를 흡족케 하였고, 양현(兩賢)을 높여 부자(夫子)께 종향함에 조두(俎豆)는 온 나라의 의논을 채택한 것이로다. 이에 십행(十行)의 사륜(絲綸)을 드날려, 사방(四方)에서 모두 보고 듣게 하노라.
생각건대 세교(世敎)를 부식(扶植)함은, 단지 오도(吾道)를 표장(表章)함에 있도다. 전철(前哲)을 계승하고 후생(後生)을 열어준 공(功)을 본떠 융숭히 포상하는 전례(典禮)를 극진히 하였고, 후학(後學)이 본받을 바탕을 열어 작흥(作興)의 아름다움을 밝혔노라.
아! 성조(聖祖)께서 문치(文治)를 크게 펼치시매, 대현(大賢)이 한 세상에 함께 났도다. 선정(先正) 문정공 송시열은 우뚝 솟은 기상과 바다를 담을 만한 흉회(胸懷)를 가졌으니, 문로(門路)는 정대했고 연원(淵源)은 깊어 지극한 가르침을 일찍이 함장(函丈)13722)에게서 이어받았고, 규모는 크고 문리가 조밀하여 성법(成法)은 한결같이 고정(考亭)13723)을 기준으로 삼았다.
음양(陰陽)이 소장(消長)하는 변환(變換)을 겪었어도 평소의 지조는 이험(夷險)에 변치 않았으며, 춘추(春秋)의 존양(尊攘)하는 의리를 맡음에 촌심(寸心)은 오직 강상(綱常)을 밝혔다. 밝은 임금과 어진 신하가 계합(契合)에 의탁하였으니 요순(堯舜)의 군민(君民)이요, 빈사(賓師)의 높은 자리에 처했으니, 이윤(伊尹)13724)·여망(呂望)13725)과 백중지간(伯仲之間)이었다.
경륜(經綸)은 사학(斯學)을 벗어나지않아 왕도(王道)·패도(覇道)의 구분을 환히 알았고, 전례(典禮)는 제가(諸家)의 것을 절충(折衷)했으니 피사(詖辭)·음사(淫辭)를 확연히 쪼개었다.
뒷사람을 열어 줌에 있어 가르침을 게을리 하지않았으니 대유(大儒)로서 심의(深衣)13726)의 전(傳)함을 받았고, 통서(統緖)가 소전(紹前)에 더욱 빛나니 온 세상이 높은 산처럼 우러러보았다. 재주는 왕자(王者)를 보좌했고, 학문은 성인(聖人)의 무리가 되었다.
또한 선정 문정공 송준길은 누항(陋巷)에 오는 봄이나 염계(濂溪)에 개인 달과 같았다. 자질(資質)이 금정(金精)·옥윤(玉潤)과 같아 사림(士林)이 모두 스승으로 추앙하였고 출처(出處)는 기린이 나타나고 봉황이 숨듯하여 여자와 어린애도 또한 상서로운 줄을 알았다.
복설(復雪)을 스스로 집안의 계책으로 삼았으니, 종당(宗黨)에서 덕을 같이하는 어진 이를 얻었고, 강설(講說)은 자신의 말을 암송하듯 하였으니 빈석(賓席)에서는 임금의 마음을 모두 계옥(啓沃)하는 책임을 다하였다.
순수한 한 덩어리 화기(和氣)가 어린 곳에 훌륭한 재질(才質)이 9분(分)은 성현의 경지에 이르렀도다. 예(禮)를 도타이 하고 풍속에 모범을 보인 것이 실로 수신·제가에 근본을 두었으니 은택이 후세에 끼쳤으며, 사악한 것을 물리치고 도(道)를 호위한 것은 격물(格物)을 궁구(窮究)한 데에 힘입었으니 사문(斯文)에 공이 컸도다.
안정(安定)13727)의 4조(條)는 인재를 가르쳐 각각 성취에 이르게 했고, 속수(涑水)13728)의 한결같은 정성은 자신을 단속하여 평생에 다 쓰지못했노라. 이는 명세(命世)의 자태로 승당(升堂)의 반열에 부끄러움이 없도다.
아! 하남(河南)의 양정(兩程)13729)이 나온 것은 송나라의 덕이 아름답고 밝을 때였고, 낙민(洛민)13730)의 일파가 전해짐은 주학(周學)의 진실됨에 의지하였다.
그 글을 외고 그 세대를 논하매 고금이 서로 부합됨을 알겠으며, 같은 시대에 태어나 같은 스승에게 도를 배웠으니, 또한 하늘의 뜻이 우연한 것이 아니도다. 대개 그 충실한 광휘(光輝)의 아름다움은 언어나 문자로도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조예(造詣)가 모두 지극히 고명(高明)한 데 이르렀으니 문(文)으로 넓히고 예(禮)로 요약하였고, 공화(功化)가 오래도록 민멸되지 않았으니 살아서는 영화로우며 죽어서는 슬퍼했노라.
조가(朝家)의 이증(貤贈)이 비록 융숭하다 할지라도 어진 이를 포상하는 상전(常典)에 불과하고, 향사(鄕社)의 연사(禋祀)를 거의 두루 행했으나 어찌 덕을 사모하는 깊은 정성에 걸맞는다 하겠는가? 이에 현관(賢關)의 연장(連章)이 있어, 곧 성묘(聖廟)의 제향(躋享)을 청했도다.
한번 허락을 아낀 지 이미 3기(紀)가 지났으니 대개 신중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요, 공의(公議)가 정해짐은 백년을 기다리지않아 과연 다같이 호소함을 보게 되었다.
보묵(寶墨)은 원우(院宇)의 게판(揭板)에 빛나니 존상(尊尙)은 선조(先朝) 때부터 시작되었고, 훌륭한 제기(祭器)를 상무(庠廡)에 진설한 것이 엄연하니 숭봉(崇奉)함은 마치 이날을 기다린 듯하다.
온 나라가 고무(鼓舞)함은 이에 말미암은 것이요, 사도(斯道)를 주장함이 나에게 달려 있다. 이에 문정공 송시열·문정공 송준길을 문묘의 동무(東廡)·서무(西廡)에 종사(從祀)하노라.
아! 예의(禮儀)가 이루어지니 달과 별이 밝았고, 반서(班序)에 질서가 있으니 금신(衿紳)이 용동(聳動)하는도다. 대덕(大德)은 반드시 향사(享祀)함을 얻으니 누구인들 보고 느끼는 마음이 없겠는가?
유풍(流風)이 아직도 남아 있으니 새로운 교화를 지음을 기다려 보노라.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니, 마땅히 모두 다 알도록 하라”하였다.
【예문 제학 남유용(南有容)이 지어 올렸다】
註13721]청아(靑莪):청아는《시경》소아(小雅) 청청자아(靑靑者莪)에 나온 ‘다북쑥이 무성하다’는 것으로, 인재를 육성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뜻임 註13722]함장(函丈):스승 註13723]고정(考亭):주자(朱子) 註13724]이윤(伊尹): 은(殷)나라의 현상(賢相). 처음에 농부(農夫)였는데, 탕왕(湯王)이 세 번이나 초빙(招聘)하여 마침내 출사(出仕)하였고, 탕왕을 도와 하(夏)의 걸왕(桀王)을 정복하고 천하를 통일하였음. 탕왕이 죽은 뒤에 그 손자 태갑(太甲)이 무도(無道)하게 행동하므로 이를 3년동안 동궁(桐宮)에 추방하였다가, 태갑이 다시 회개하자 맞아들였음 註13725]여망(呂望):본성은 강씨(姜氏)이며 이름은 상(尙)으로, 그 선조를 여(呂) 땅에 봉했으므로 여씨(呂氏)가 되었음. 위수(渭水)가에 숨어 낚시질로 소일했는데, 주나라 문왕(文王)이 사냥을 나갔다가 만나보고 크게 기뻐하여 말하기를, “우리 태공(太公)이 그대 만나기를 바란 지 오래이다”라고 했으므로, 태공망(太公望)이라고 칭호하였음. 후에 무왕(武王)을 도와 천하를 통일하고 그 공적으로 제(齊)나라에 봉해졌음 註13726]심의(深衣):선비의 웃옷. 흰 베로 소매는 넓게 하고 검은 비단으로 선(線)을 두르는데, 위는 사시(四時)를 상징하여 4폭으로 하고, 아래는 1년 열두 달을 상징하여 12폭으로 만들었다 함 註13727]안정(安定):호원(胡瑗)의 호 註13728]속수(涑水):사마광(司馬光)의 호 註13729]양정(兩程):정호·정이註13730]낙민(洛閩):정자(程子:정호(程顥)와 정이(程頣))는 낙양(洛陽) 사람이고 주자(朱子:주희(朱熹)는 민중(閩中))사람이므로 일컬음.
○癸丑/上御明政殿, 親臨頒敎。 蓋以文正公宋時烈、文正公宋浚吉, 十四日巳時, 從享文廟故也。
王若曰。 生多士以寧文王, 菁莪洽累朝之化, 尊兩賢以從夫子, 俎豆采一國之論。 玆颺十行之絲綸, 俾聳四方之瞻聽。 予惟世敎之扶植, 亶在吾道之表章。 象前哲繼開之功, 克盡褒隆之典, 啓後學矜式之地, 丕闡作興之休。 粤聖祖誕敷文治, 而大賢竝生一世。 有若先正文正公宋時烈, 壁立氣像, 海涵胸懷, 門路正而淵源深, 至訓早襲於函丈, 規模大而文理密, 成法一準於考亭。 閱陰陽消長之機, 素履不渝於夷險, 任春秋尊攘之義, 寸心獨炳於綱常。 托明良之契, 則堯、舜君民, 處賓師之尊, 則伊、呂伯仲。 經綸不外於斯學, 洞然王、覇之分, 典禮折中於諸家, 廓如詖、淫之闢。 敎誨不倦於牖後, 大儒受深衣之傳, 統緖益光於紹前, 擧世寓高山之仰。 才則王者之佐, 學爲聖人之徒。 亦粤先正文正公宋浚吉, 陋巷春生, 濂溪月霽, 資質若金精、玉潤, 士林咸推以師, 出處如麟見鳳藏, 婦孺亦知爲瑞。 復雪自成家計, 宗黨得同德之賢, 講說如誦己言, 賓席盡沃心之責。 粹然一團氣和處, 展也九分人地頭。 敦禮範俗, 實本於修、齊, 澤流後世, 闢邪衛道, 式資於窮格, 功大斯文。 安定之四條, 誨人才各臻於成就, 涑水之一誠, 律己用不盡於平生。 是謂命世之姿, 無愧升堂之列。 嗚呼! 河南兩程之出, 際宋德之休明, 洛閩一派之傳, 賴周學之眞的。 誦其書論其世, 知古今之相符, 生同時道同師, 亦天意之非偶。 蓋其充實光輝之美, 有非言語文字所殫。 造詣俱極於高明, 博以文而約以禮, 功化不泯於久遠, 生也榮而死也哀。 朝家之貤贈雖隆, 不過褒賢之常典, 鄕社之禋祀殆遍, 曷稱慕德之深誠, 肆陰有賢關之連章, 乃請聖廟之躋享。 一兪之靳已經三紀, 蓋出愼重之思, 公議之定不待百年, 果見僉同之籲。 寶墨耀院宇之揭, 尊尙粤自先朝, 華籩儼庠廡之陳, 崇奉若待是日。 鼓舞一邦之由此, 主張斯道之在予。 玆以文正公宋時烈、文正公宋浚吉, 從祀于文廟東、西廡。 於戲! 禮儀成而月星明, 班序秩而衿紳聳。 大德必得祀, 孰無觀感之心, 流風尙有存, 佇見作新之化。 故玆敎示, 想宜知悉。
【藝文提學南有容製進。】
영조 93권, 35년(1759 기묘/청건륭(乾隆)24년) 윤6월22일(경자) 3번째기사
왕세손에게 배례를 행한 뒤《소학》을 읽게 하다
임금이 왕세손에게 명하여 배례(拜禮)를 행한 뒤에 전내(殿內)에 들어와서 《소학(小學)》의 제3장(章)을 외우게 하고, 임금이 가탄(嘉歎)하기를 마지않으며 말하기를,
“나이 어린데도 숙성(夙成)하여 부복(俯伏)하는 절조(節措)가 법도에 맞지않는 것이 없으니 신이(神異)하다고 이를 만하다.
옛적에 주나라 무왕(武王)은 면복(冕服)을 입고 단서(丹書)를 사상보(師尙父)14605)에게서 받았다고 하는데 지금 나는 칠장복(七章服)을 입었고, 너는 오장복(五章服)을 입었다. 즉시 글을 써서주고 얼굴을 맞대어 고유(告諭)하니, 너는 모름지기 사상보가 단서를 주는 뜻으로 대신하게 하라.
너는 나이가 어려 마땅히 천근(淺近)한 것으로써 가르치니 모름지기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에게 공손하여 반드시 더 힘쓰도록 하라”하였다.
註14605]사상보(師尙父):여망(呂望)의 존칭.
○上命王世孫拜禮後, 入殿內, 誦《小學》第三章, 上嘉歎不已曰: “年妙夙成, 俯伏節措, 莫不中度, 可謂神異矣。 昔武王服冕受丹書於尙父, 今予爲七章, 汝爲五章之服。 卽書給面諭, 汝須替師尙父授丹書之意焉。 汝在沖年, 當以淺近者敎之, 須以愛親弟長, 必爲加勉焉。”
영조 110권, 44년(1768 무자/청건륭(乾隆)33년) 4월 20일(정축) 5번째기사
평안도관찰사 정실이 강계부의 인삼과 환곡의 폐단에 대해 아뢰다
평안도관찰사 정실(鄭실)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신이 감영에 있을 때부터 강계의 인삼 폐단이 매우 심하여 백성들이 떠돌아다닌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경내에 도착하자 남녀노소들이 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 길에 가득히 나와서 수레를 붙잡고 호소하면서 모두 살려달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청컨대 인삼 폐단의 근원을 대강 논하고 이어서 그 폐단을 구제하지 않아서는 안된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체로 강계부에 처음에는 호세삼(戶稅蔘) 45근만 있었는데, 시행한 지 오래되었으나 폐단이 없었습니다.
그 뒤에 호조에서 이웃 나라와의 교제에 필요하다고 하여 연례삼(年例蔘) 25근을 받았는데, 매 돈쭝[錢]마다 석냥의 값을 쳐서 대금을 주고 받아들였으나, 여전히 부족하여 본부(本府)의 호세삼 10근을 예무조(例貿條)에 옮겨 충당하였습니다.
이밖에 또 미삼(尾蔘) 25근이 있는데, 그 수량이 이미 95근에 이르렀으며, 간혹 별무삼(別貿蔘) 수십근이 있는데, 모두 계산하면 전후로 납부하는 체삼(體蔘)과 미삼(尾蔘)의 수량이 1백15근에 이르니, 그 역(役)이 어찌 번거롭고 또한 무겁지 않겠습니까?
수십년 이후로 인삼이 점차로 더 심하게 귀해지고 봉납(捧納)하는 것은 더욱 많아져서 실로 지탱하기 어려운 걱정이 있었는데, 지난해 가을에 이르러 캐내는 것이 더욱 적어졌습니다.
열 사람이 산에 들어가면 여덟 사람은 빈손으로 돌아옵니다.
상납할 때에는 봉납에 응할 수 있는 수량이 태반이나 부족하므로 백성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북로(北路) 및 본도(本道) 중산(中山)등의 고을에서 구매하고, 동쪽에서 수집하고 서쪽에서 찾아 간신히 채워서 납부합니다.
그러나 부족한 수량은 여전히 수십 근이나 되므로 거의 모두가 허둥지둥하며 어쩔 줄을 모릅니다.
신이 봄에 이런 뜻을 비국에 보고하고 또 호조에 공문을 왕복한 끝에 다행히 기한을 넉넉히 늘렸습니다만, 이는 바로 고식적(姑息的)인 계책입니다.
신이 캐낸 인삼이 옛날에 비해 감축되었다는 말을 들은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가을 산에 들어간 자들의 말을 들으니, 햇수가 오래되어 몸통이 큰 것은 전혀 없고, 캔 것들은 모두 그 몸통이 작으며 가끔 송곳같거나 바늘 같은 것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보건대 실로 멸종의 우려가 있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오직 이 강계부는 관방(關防)의 중요함이 만부(灣府)16919)와 다름이 없는데, 지금 만약 백성들이 견디지못하고 뿔뿔히 흩어져 사방으로 가버린다면 십진(十鎭)의 파수(把守)도 장차 폐지되고 말 것이고, 사군(四郡)의 허술함도 그 또한 극도에 달할 것입니다.
변방의 일을 생각할 때 정말로 한심스럽습니다. 이번에 봉납한 것 중 이른바 호삼(戶蔘)은 즉 강계백성의 대동의 역(役)이기때문에 백성들이 싫어서 회피하지는 않습니다만, 예무(例貿)의 체삼과 미삼 및 별무(別貿)하는 인삼에 있어서는 호조에서 지급하는 값이 근래의 가격에 비해 겨우 3분의 1밖에 안됩니다. 그리고 인삼 값의 폭등이 해마다 증가되고 있는데, 기묘년 이후에는 인삼 종자가 더욱 귀해져 올해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묘년에 3, 4냥하던 값이 지금은 무려 10여냥에 이르고 있습니다.
만약 별무(別貿)할 때를 당하면 일호(一戶)가 납부할 각종 인삼을 값으로 따질 경우 거의 30냥에 가깝기 때문에 온 경내가 아우성을 치며 모두 짐을 꾸리고 대기하고 있습니다.
신이 본 경내에 들어가자 모두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기를, ‘우리 전하께서 구중궁궐에 깊숙이 계시니, 어떻게 이 폐단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을 아시겠습니까? 도신(道臣)과 수령들은 왜 이를 보고하여 성상이 불쌍히 여기는 은택을 입지 못하게 한단 말입니까? 이러한 폐단을 감영에서 변통하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이제부터 떠나겠습니다’하며 눈물을 흘렸는데, 차마 볼 수가 없었습니다.
신이 안정시키에 급급하여 비유를 들어가며 위로하기를 ‘내가 이미 이러한 상황을 목격하였으니, 어찌 조정에 보고하지 않겠는가? 잠시 동안 흩어지지 말고 각자가 보존하고 있으라’는 뜻으로 간곡히 개유(開諭)하였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모두 잠시라도 살았다가 우리 전하의 덕음(德音)이 내려오기를 기다리겠다’고 하였는데, 그 정상(情狀)이 정말로 측은하였습니다.
신이 본부에 들어가서 사정을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지난해와 올해에 줄어든 민호(民戶)가 본부(本府)와 열진(列鎭)을 합하면 6백여 호나 되었습니다.
민호가 줄어들면 호구마다 봉납하는 인삼도 따라서 줄어드는 것이 장차 4, 5근에 이르게 됩니다. 만일 반드시 종전에 상납하는 수량을 채우려고 한다면 지극히 피폐하고 궁색한 호구에 대해 차차 등급을 올리게 되어 봉납하는 것이 반드시 배(倍)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신히 살아 남은 백성들이 도산(逃散)하는 것밖에는 다른 계책이 없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생각하면 어찌 애통스럽지 않겠습니까?
지금 신이 신의 영내로부터 시작하여 병사(兵使) 및 본부와 상의하여 전일(前日)에 약간 봉납했던 것도 알맞게 제감(除減)하였고, 열읍과 각진에서 사적으로 매매하는 폐단도 일체 금지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참으로 별것이 아니어서 한 잔의 물로 땔 나무의 불을 끄는 것과 같습니다. 삼가 백성들이 호소하는 것을 들어 보니 모두 말하기를, ‘내국에 봉진(封進)하는 것은 우리들이 마땅히 힘을 다해 마련하여 납부하겠습니다. 그렇지만 호조와 경상사(京上司)에서 봉납하는 것은 그 수량이 적지않은데다가 또 연례삼(年例蔘)을 첨가하고, 얼마 안되어 또 별무삼(別貿蔘)을 보태어 점차로 증가시키다가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니, 만약 적당히 헤아려 수량을 감면 받게 된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만, 그렇지않을 경우 오직 다시 삼계(蔘契)를 만들어 이 폐단을 구제하고 싶습니다’고 하므로 신이 ‘삼계를 다시 만드는 것은 어렵다. 호조에서 마련한 약간의 돈으로 어떻게 계를 할 사람을 모집하여 담당해 납부할 수 있겠는가?’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호조와 경상사에서 봉납하는 것과 연례조·별무조 중에 미루어 재감(裁減)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만일 비록 3, 4근을 감하더라도 눈앞의 위로하는 방법은 될 것입니다. 연례삼과 별무삼은 비록 교린하는 데에 쓰이지만 별무삼은 해마다 들어가는 물건이 아니니 조정하여 변통하는 방법이 없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호조에서 봉납하는 11근은 비록 용처(用處)가 있으나, 만약 긴요하지 않은 수응(酬應)에서 조금씩 절약한다면 불시의 수요에 대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백성들의 사정이 궁색하여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오직 헤아려 수량을 감해 주기만을 바라고 있으니, 그 또한 측은합니다.
그리고 신이 들으니 예무삼중에 25근의 값은 3냥을 지급하고 10근은 본래 예무삼으로 예무조에서 옮겨채운 것이기 때문에 그 값은 전례에 의거해서 1냥 5전을 지급한다고 합니다.
비록 이것이 호삼(戶蔘)이지만 이미 예무삼에 충당되었으니, 3냥의 가격으로 일체 똑같이 지급하는 것은 사리상 당연한 것인데 반으로 깎아 지급하는 것은 실로 반박(斑駁)의 탄식이 있게 합니다.
지금 예무삼 조에 의거하여 3냥으로 값을 지급할 경우 백성들이 실로 골고루 혜택을 받을 것인데, 그 대금을 계산해 보면 2천4백냥이 됩니다.
이처럼 경비가 모자라는 때에 호조에서 지급하기란 물론 쉬운 일이 아닙니다만, 신에게는 별도로 생각해 본 것이 있습니다.
신이 이번 행차에 들으니 강계부의 환곡(還穀)이 10여만석이 넘고 십진(十鎭)의 환자[還上] 역시 만여석에 밑돌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강계의 백성이나 열진의 병사 할 것없이 적정(糴政)에 시달리다가 이웃과 일가붙이에게 징수하므로 결국 흩어지는 데에 이르고 말았으니, 그 폐단이 끝이 없다고 합니다.
대체로 이는 본부(本府)가 가장 변방에 있어서 많은 양의 환곡을 발매하는 일도 없고 다른 곳으로 옮길 길도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매년마다 모곡(耗穀) 천여석을 제하여 이 2천4백의 수량을 사서 채우게 한다면 변방백성에 있어서는 환곡이 불어나는 폐단을 거의 구제할 수 있을 것이며, 삼호(蔘戶)에 있어서는 값이 불균(不均)하다는 탄식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니, 일거양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강계부는 본래부터 곡물이 천(賤)하니, 만약 호조의 1석(一石)당 3냥을 지급하는 관례로 행한다면 결코 시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본부에서부터 그 부 내에 시행하는 규례에 따라 발매해야만 시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호조가 매년마다 본도의 수세미(收稅米)를 발매하여 인삼 값을 강계부로 보내고 또 호조로 운납(運納)해 온 남은 수량이 있을 것이니, 만약 그 남은 수량을 다시 삼값을 올려 주는 수량에다 충당한다면 일이 매우 편리할 것입니다. 고인이 말하기를 ‘작게 변통시키면 작게 도움이 되고 크게 변통시키면 크게 도움이 된다’고 하였는데, 지금 신이 변통하고자 한 것은 위에 말씀드린 두 건의 일에 불과합니다.
하나는 그 원래 수량을 참작하여 알맞게 줄여 지급하는 것이니 이는 진실로 한 고을을 위로하는 방법이고, 하나는 부족한 수량을 헤아려서 약간 값을 더 올려 주는 것이니 이 역시 일시적으로 급한 것을 구하는 방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히 이렇게 조목조목 열거해 아룀으로써 재택(裁擇)하시는 데에 대비하였습니다.
이 외에 왜역배(倭譯輩)의 간폐(奸弊)도 방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애당초 예무삼을 지정할 때에 원래 인삼의 품질에 대해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해조(該曹)에서 헐값에 따라 관문(關文)을 발행하였기 때문에 좋고 나쁜 것을 막론하고 납부한 대로 봉상(捧上)하였습니다.
대개 이웃 나라와 교제하는 데에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이는 왜역배가 체삼·미삼을 붙여 만들어 보낸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호조의 봉상도 또한 점퇴(點退)16920)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전례를 거슬러 올라가 상고해 보면 본조(本曺)의 봉상시에 1근당 줄어든 양이 1, 2전(錢)에 불과하였는데, 근년에 들어서 점퇴와 줄어드는 폐단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습니다.
지난해 병술년 조로 논하건대, 점퇴한 삼이 10근이나 되었고, 줄어든 삼은 1근당 9전이 줄어들었으며, 정해년 조의 점퇴한 인삼은 5근이나 되었고 줄어든 삼은 1근당 역시 1냥이 넘었습니다.
이는 대체로 지난날 호조에서 직봉(直捧)할 때에는 이러한 폐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번 왜역(倭譯)이 농간을 부린 뒤로부터 점퇴를 조종(操縱)하는 것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으므로 형편상 점퇴한 수량을 다시 나누어 백성들에게 징수해야 되게끔 되었습니다.
불쌍한 강계의 백성들이 장차 모두 죽게 되었으므로 대소의 민정(民情)이 모두 주원(籌員)16921)이 내려와서 가져가기를 원하는데, 그러면 조종하는 폐단이 조금 느슨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폐단을 끝내 제거하지 않을 경우에는 조정에서 비록 진휼하여 구제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들이 갖가지로 조절(操切)하여 중간에서 좀먹는 폐단의 해가 반드시 끝이 없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신의 이 상소를 비국에 하달하여 즉시 변통을 품지(稟旨)16922)케 하되, 수량을 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감하고, 값을 올려 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올려주소서.
그리고 유사(有司)로 하여금 왜역들이 중간에서 농간을 부리는 폐단을 엄히 징계하여 변방의 생민으로 하여금 뿔뿔이 흩어지는 우환이 없게 하여 관방중지(關防重地)가 텅 비는 탄식이 없게끔 하소서.
그러면 그지없는 다행이겠습니다”하니,
비답하기를,
“백성을 위해 소를 올렸으니, 그 정성이 가상하다.
옛날 주나라 무왕이 여상(呂尙)16923)의 말을 듣고 차마 밤을 넘기지 못하고 특별히 사민(四民)을 돌보아 주라고 하였다.
아! 강계의 백성들이 구중궁궐이 깊은 것을 탄식하다니, 내 이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고 그 다음 날 상확(商確)하여 강정(講定)하게 하겠다.
아! 8근의 인삼과 천 석의 쌀은 넓은 바다속에 한 좁쌀과 같다.
어찌 다소를 말하겠는가? 다만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다.
또 우리 강계 백성은 내가 준 혜택이 아니라 옛날을 본받은 효과이다.
그러므로 ‘우리 임금의 혜택이 아니라 이는 실로 옛날의 혜택이다고 한다면 내가 조금 선왕을 계술(繼述)하는 뜻을 펴겠으니, 강계의 백성으로 하여금 이 뜻을 잘 알도록 하라’고 불러주고 쓰게 하다가 여기에 이르자 자리가 눈물로 젖었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하였다.
註16919]만부(灣府):의주 註16920]점퇴(點退):물건을 조사하여 마음에 맞지 않는 것을 물리는 것 註16921]주원(籌員):호조에 딸린 산원(算員)에 대한 별칭 註16922]품지(稟旨):임금께 상주(上奏)하여 분부 받는 것 註16923]여상(呂尙):강태공.
○平安道觀察使鄭宲上疏, 略曰: “臣自在營時, 聞江界蔘弊孔劇, 民不奠居。 及到其境, 男女老少, 聞臣之來, 塡咽道路, 攀轅號訴, 皆願活我。 臣請略論蔘弊之源, 而繼陳其弊之不可不救也。 蓋此府初則只有戶稅蔘四十五斤, 行之已久, 而無弊矣。 其後地部以交隣所需, 捧年例蔘二十五斤, 每錢折錢三兩而給價收捧, 猶患不足, 以本府戶稅蔘十斤, 移充於例貿條。 此外又有尾蔘二十五斤, 厥數已至九十五斤, 間或有別貿蔘數十斤, 統而計之, 則前後所納體尾蔘之數, 至於一百十五斤, 其爲役豈不煩且重哉, 數十年來, 蔘貴漸甚, 而所捧益廣, 實有難支之憂矣, 及至去年秋採, 而所採尤尠矣。 十人入山, 八人空還。 及其上納之時, 應捧之數, 太半不足, 民乃四散, 求貿於北路及本道中山等邑, 東括西覓, 艱辛充納。 而不足之數, 猶至於數十斤, 擧皆遑遑, 罔知攸措。 臣於春間, 以此意報于備局, 且文移往復于地部, 幸得寬限, 此正姑息之計也。 臣聞蔘採之比昔減縮者已多年。 所聞前秋入山者之言, 則年久體大者絶無, 而所採者, 皆是體小者, 間多有如錐如針者云。 以此觀之, 則實有絶種之慮。 然則其將奈何, 惟此江界一府, 其關防之重, 與灣府無異, 今若民不支堪, 散而之四, 則十鎭之把守, 亦將廢矣, 四郡之踈虞, 其亦極矣。 言念邊事, 誠可寒心。 今此所捧中所謂戶蔘, 卽江民大同之役, 故民不厭避, 而如例貿體尾蔘及別貿之蔘, 則地部所給之價, 比近來價本僅爲三分一。 而蔘價之高騰, 年加歲增, 自己卯以後, 蔘種益貴, 至於今年而極矣。 故己卯間三四兩之價, 今至於十餘兩之多。 若當別貿之時, 則各色蔘之一戶所納, 論其價則殆近三十兩, 故一境嗷嗷, 皆荷擔而立。 及臣之涉本境也, 皆泣訴於前曰, ‘惟我殿下, 深居九重, 豈知其弊之至於此乎, 爲道臣守令者, 胡不以此上聞, 得蒙我聖上如傷之恩乎, 如許弊端, 營門如不變通, 則吾輩將從此逝矣。’ 言與淚下, 慘不忍見。 臣急於安集, 寬譬慰諭曰, ‘吾旣目擊此狀, 豈不登聞於朝乎, 姑勿流散, 各自保存’之意, 懇懇開諭。 民人輩‘皆願須臾毋死, 以待我殿下德音之降’, 其情誠〔慼〕矣。 臣入本府, 詳探事情, 則昨今年人戶之見縮者, 合本府與列鎭, 爲六百餘戶。 人戶旣縮, 則逐戶所捧之蔘, 亦隨而縮者, 將至四五斤。 如欲必充其從前上納之數, 則至殘窮戶, 次次陞等, 所捧必倍。 惟此孑遺之民, 逃散之外, 無他策矣。 思之及此, 寧不哀痛, 今臣自臣營爲始, 與兵使及本府相議, 前日之若干所捧, 亦爲量宜除減, 列邑各鎭私貿之弊, 亦當一切禁斷。 而此固零星, 比如勺水之救薪火也。 竊伏聞民人輩所訴, 則皆謂‘內局所封進, 吾屬當竭力備納, 而地部及京上司所捧, 厥數旣不少, 而又添之以年例蔘, 曾未幾何, 又加之以別貿蔘, 次次增加, 至於此境, 如蒙酌量減數則幸甚, 而不然則惟願復設蔘契, 以救此弊’, 臣則答以‘蔘契之復設, 此亦難矣。 以地部所磨錬若干價本, 其何以募得契人, 擔當備納乎’, 惟是地部及京上司所捧及年例條別貿條中, 如有推移裁減之道, 則雖除減三四斤, 亦可爲目前慰悅之道。 年例別貿兩色蔘, 雖是交隣所需, 而別貿則非逐年應用之物, 想不無闊狹變通之道。 至於地部所捧十一斤, 雖有用處, 而若銖累寸積, 一切防塞於閑漫酬應, 則亦可補用於不時之需矣。 民情窮蹙, 計無所出, 惟望其酌量減數者, 其亦慼矣。 且臣伏聞例貿蔘中二十五斤價, 則給以三兩, 而十斤則本以例蔘, 移充於例貿條, 故厥價依前給一兩五錢。 雖是戶蔘, 而旣充於例貿, 則以三兩價一體均給, 事理當然, 而折半以給者, 實有斑駁之歎。 今若依例貿條, 給價以三兩, 則於民實爲均惠, 而計其價則爲二千四百兩。 當此經費匱乏之日, 自地部出給, 固非易事, 而臣則有別般商量者。 臣之今行, 聞江界府還穀過十萬餘石, 十鎭還上亦不下萬餘石。 毋論府民與鎭卒, 因於糴政, 侵徵隣族, 終至於流散, 其爲弊罔有紀極。 蓋本府在於極邊, 許多還穀, 旣無發賣之事, 亦阻移轉之路故也。 若於每年, 除其耗穀千餘石, 貿充此二千四百之數, 則在邊民庶救還穀增衍之弊, 在蔘戶可免價本不均之歎, 可謂一擧而兩得矣。 第此府本來穀賤, 若以地部一石三兩之例施行, 則決是行不得也。 宜自本府, 一從其府內行用之規而出貿, 然後事可行矣。 不然則又有一焉。 地部於每年以本道收稅米, 發賣收送蔘價於江界府, 且有餘數之運納於地部者, 若以其餘數, 更充此添價之數, 則事甚便順。 古人云‘小變則小益, 大變則大益’, 今臣所欲變通者, 不過如右所陳二件事也。 一則參酌其元數而量宜減給, 此固爲一邑慰安之道, 一則商量其不足之數而若干添價, 亦可爲一時救急之方。 故敢此條列以陳, 庸備裁擇。 此外倭譯輩奸弊, 有不可不防。 當初例貿蔘卜定時, 元無蔘品之擧論。 自該曹從歇價發關, 故毋論好否, 而從所納捧上。 蓋雖云交隣所需, 而此不過倭譯輩, 以體尾蔘, 粘付造送者, 故地部捧上, 亦無點退之事。 溯考前例, 則本曹捧上時, 每斤之縮, 不過一二錢, 自近年以來, 退與縮之弊轉甚。 以昨年丙戌條論之, 退蔘至於十斤, 縮蔘則每斤縮九錢, 丁亥條退蔘, 至於五斤, 縮蔘則每斤亦過一兩。 蓋前日自戶曹直捧之時, 則無此弊矣。 一自倭譯用事之後, 操縱點退, 愈往愈甚, 勢將以點退之數, 更爲分徵於民。 哀此江民, 其將盡劉, 大小民情, 皆願依籌員例下來捧去, 則操縱之弊, 庶可少緩云。 此弊終若不除, 則朝家雖有軫恤接濟之擧, 其多般操切, 中間耗蠧之弊, 爲害必無窮矣。 伏願聖上, 下臣此章於備局, 卽令稟旨變通, 其不得不減數者減之, 不得不添價者添之。 且令有司, 嚴懲倭譯從中作奸之弊, 使邊土生靈, 得免離散之患, 而關防重地, 俾無空虛之歎。 不勝萬幸。” 批曰: “爲民陳章, 其誠可嘉。 昔周武王聞呂尙之言, 不忍經夜, 特恤四民。’ 嗚呼! 江民以九重深邃爲歎, 予聞此而垂涕, 翌日商確講定。 嗚呼! 八斤之蔘, 千石之米, 可謂滄海一栗。 豈云多少, 只在乎心。 且謂予江民, 非予之惠也, 卽體昔之效也。 其若曰, 非吾君之惠也, 此實昔年惠澤云爾, 則予少伸繼述之意, 令江民知悉此意焉。
呼寫及此, 不覺涕沾于席。”
영조 120권, 49년(1773 계사/청건륭(乾隆)38년) 1월 2일(임진) 2번째기사
환·과·고·독을 구휼할 일로 이르다
임금이 말하기를,
“여상(呂尙)18457)이 무왕(武王)에게 이르기를, ‘불쌍한 것은 사민(四民)18458)입니다’하였다. 나도 건명문(建明門)에서 사민을 구휼하겠으니 오부(五部)로 하여금 가려서 아뢰게 하라”하고, 건명문에 나아가 사민을 불러 쌀 5두씩을 나누어 주고 홀어미와 고아(孤兒)로서 옷이 없는 자는 동옷[襦衣] 한 벌씩을 덧붙이어 주었다.
註18457]여상(呂尙):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스승. 무왕(武王)을 도와 주(紂)를 쳐서 천하를 얻게 하였다. 성은 강(姜)이요, 이름은 상(尙)인데, 그 선조(先祖)때 여(呂)땅에 봉(封)해졌으므로 여상(呂尙)이라 불렀다. 태공망(太公望) 사상보(師尙父)등으로도 불리어짐. 註18458]사민(四民):여기에서는 사궁민(四窮民)을 뜻하는데, 줄여서 사궁(四窮)이라고도 함. 사궁은 환·과·고·독(鰥寡孤獨), 즉 늙고 아내가 없는 사람, 늙고 남편이 없는 사람, 어리고 아비가 없는 사람, 늙고 자식이 없는 사람을 말함
○上曰: “呂尙謂武王曰: ‘可矜者四民。’ 當於建明門恤四民, 其令五部抄啓。” 上御建明門, 召四民, 給五斗米, 寡女孤兒無衣者, 加紿襦衣一襲。
정조 3권, 1년(1777 정유/청건륭(乾隆)42년) 1월 10일(정축) 4번째기사
재야의 재능있는 선비를 발탁하는 문제등에 대해서 하교하다
하교하기를,
“조정의 진신(縉紳)들이 반드시 모두 어진 것은 아니고 초야(草野)의 인물들이 반드시 모두 어리석은 것은 아니다. 판축(版築)과 조황(釣璜)610)의 어짊에 대해서는 진실로 쉽게 논할 수 없는 것이지만,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십실(十室)쯤되는 작은 고을에도 반드시 충신(忠信)한 사람은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우리나라가 지방이 편소(褊小)하기는 하지만 봉강(封疆)이 천리에 뻗쳐 있으니 이미 십실의 고을에 견줄 정도는 아니다.
따라서 산림(山林) 사이에서 글을 읽는 재능있는 선비가 등용되지 못하고 있으면서 값을 기다리는 사람이 어찌 없겠는가?
제도(諸道)에서 도천(道薦)하는 제도는 곧 주관(周官)의 향거이선(鄕擧里選)611)하는 의의인 것으로, 법이 아름답지않은 것이 아니다.
그런데 만근(挽近) 이래 곧 하찮은 변모(弁髦)처럼 여겨 간혹 하고는 있지만 그 또한 지벌(地閥)에 따라 천거하는 것에 불과할 뿐 아무개는 어떤 행실이 있고 아무개는 어떤 재주가 있어, 수령이 방백에게 천거하고 방백은 조정에 진달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색목(色目)에 익숙하고 습속(習俗)에 구애가 되어 그런 것이다. 이것이 어찌 두루 천거해야 하는 신하에게 기대하던 것이겠는가?
일전에 상신(相臣)의 연주(筵奏)가 비록 있었을지라도 성심을 다하여 구하지 않는다면 다시 전의 습관을 따르는 탄식이 없을지 어찌 알겠는가?
제도(諸道)가운데 영남(嶺南)은 곧 사부(士夫)의 부고(府庫)이며 더구나 추(鄒)·로(魯)의 고장으로 일컫고 있으니, 생각하건대 글을 읽어 덕을 닦은 군자가 있을 것이다. 더욱 유의하여 채방(採訪)해서 보고 듣는대로 등문(登聞)하도록 하라”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풍속(風俗)을 권장하며 돈후하게 하는 것은 인주(人主)의 영전(令典)인 것이다. 우리 조정으로 말하더라도 매양 세수(歲首)가 되면 반드시 경외의 효행(孝行)과 절의(節義)가 월등히 뛰어난 사람이 있을 경우 조정에 아뢰게 하였으니, 당초 법을 설립한 것에서 열성조(列聖朝)의 풍교를 이루려는 성대한 뜻을 알 수 있다.
근래에는 등문한 것이 문득 정부(政府)의 휴지(休紙)가 되어 버릴 뿐이요 거론하여 권장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데, 이는 진실로 명실(名實)이 혹 혼동된 소치이기는 하지만 예(禮)를 사랑하는 뜻에 견주어 본다면 과연 어떠한가? 예조의 신하로 하여금 의정부에 나아가 그 가운데 가장 나은 사람을 뽑아 구별하여 계문(啓聞)해서 격려 권면하는 방도로 삼게 하라.
그리고 다시 제도에 신칙하여 실상에 의거하여 천거할 것이며 혹시라도 외람되고 잡스럽게 하는 폐단이 없게 하라”하였다.
註610]판축(版築)과 조황(釣璜):부열(傅說)과 여상(呂尙)을 말함. 부열은 은(殷)나라 고종(高宗)의 신하로 부암(傅巖)의 들에서 성(城)을 쌓는 사람들 가운데서 찾아내었으며, 여상은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신하로 황계(璜溪)에서 낚시질하다가 발탁된 사람임.註611]향거이선(鄕擧里選):주(周)나라 때의 제도로, 인재 등용법임. 향리에서 재덕(才德)이 있는 사람을 조정에 천거하면 조정에서 기국(器局)에 따라 벼슬을 시키던 일.
○敎曰: “朝廷之彦, 未必皆賢, 草野之人, 未必皆愚。 版築釣璜之賢, 固未易論, 而孔子曰: ‘十室之邑, 必有忠信。’ 我國地方雖褊小, 千里封彊, 旣非十室之比, 則亦豈無山林之間, 讀書之士, 韞櫝而待價者乎, 諸道道薦之制, 卽周官鄕擧里選之意, 法非不美, 而挽近以來, 便歸弁髦, 間有之, 亦不過隨其地閥而薦之, 未聞有某人之有某行, 某人之有某才, 守令擧之方伯, 方伯進之朝廷者。 此無他。 狃於色目, 拘於俗習而然也。 此豈所望於周爰之臣者哉, 日前相臣雖有筵奏, 若不誠心求之, 安知無復循前習之歎乎, 諸道之中, 嶺南卽士夫之府庫, 況是鄒、魯之鄕, 想有絃誦之君子。 尤加着意採訪, 隨聞見登聞。” 又敎曰: “敦風勵俗, 人主之令典。 雖以我朝言之, 每於歲首, 京外必以孝行節義之卓異者, 聞于朝廷, 當初設法, 可見列聖朝作成之盛意也。 近年以來, 其所登聞者, 便作政府之休紙, 未聞擧以奬之, 此固由於名實或混之致, 而其視愛禮之義, 果如何哉, 其令禮曹之臣, 就議政府, 撮其最者, 區別啓聞, 以爲激勸之地。 更飭諸道擧之以實, 無或有猥雜之弊。”
정조 5권, 2년(1778 무술/청건륭(乾隆) 43년) 1월 5일(병인) 2번째기사
윤음을 내리어 유신 송덕상·김양행·김종후등을 돈소하다
윤음(綸音)을 내리어, 유신(儒臣) 송덕상(宋德相)·김양행(金亮行)·김종후(金鍾厚)·유언집(兪彦鏶)을 돈소(敦召)하고 이르기를,
“이 삼원(三元)1022)을 맞이하여 천도(天道)가 바야흐로 새로워졌는데도, 나의 공부(工夫)는 날로 진보함을 보지 못하고 덕업(德業)이 날로 새롭게 되지 못했다. 세색(歲色)은 이미 새로워졌는데도 세속대로의 버릇은 여전하여 묶인 그대로 인순(因循)해 가고 어름어름 억지로 미봉(彌縫)해가며 단지 퇴탁(退托)하는 한탄만 하고 있고 말끔히 파탈(擺脫)해버리는 효과가 없다.
지난해에도 단지 이러한 병통만 있었고 새해에도 또한 이러한 병통이 있어, 한갓 하루를 계산해 보고 한 달을 계산해 보아도 부족하게 될 뿐만이 아니라 비록 한 해를 계산해 보더라도 또한 이처럼 부족하게 될 것이다.
스스로 담책(擔責)한 것을 돌아보건대, 근심스러움과 두렵게 됨을 견딜 수 있는 일이겠느냐? 생각하건대, 나의 한 몸은 만기(萬機)가 연유하게 되는 바이고 온갖 책임이 모여 있는 바이다.
조금이라도 방심하거나 홀만해져 척연(惕然)하기에 게을러지면, 털이 쉽게 타버리듯 하고 바다가 금방 탕연(蕩然)해지듯 하게 되는 것인데, 누가 완화(緩化)해 주고 누가 막아 주겠느냐? 이런 마음을 유지(維持)하게 하고 이 몸을 방비하는 방도는 어찌 공부가 날로 진보해가고 덕이 날로 새로워져 가기에 달려 있지 않겠는가?
이러므로 선왕(先王)들이 걱정을 하시어 사부(師傅)인 관원을 두고 간쟁(諫諍)하는 직위를 두었으며, 앞뒤에 의·승(疑丞)1023)을 두고 좌우에는 보필(輔弼)을 두었다. 수레에는 규(規)가 있고 위저(位宁)에는 전(典)이 있었으며, 의궤(倚几)에는 간(諫)이 있고 거침(居寢)에도 잠(箴)이 있었다.
일에 임할 적에는 도(導)가 있고 연거(燕居)할 적에도 송(誦)이 있었으며 반(盤)에는 명(銘)을 하고 우(盂)에도 명을 하여, 궤(几)·장(杖)·호(戶)·유(牖)에까지 경계가 있지않는데가 없었던 것이다.
성인이면서도 긍긍(兢兢)하고 업업(業業)하여 오히려 자신을 어질게 여기지 않고서 권권(眷眷)하게 신료(臣僚)들에 협조해 주기를 바란 것이 이처럼 지극했었던 것인데, 하물며 나 같은 부덕한 사람이야 어찌 더욱 힘쓰고 힘써야 할 곳이 아니겠느냐?
원조(元朝)에 내린 윤음(綸音)에 나의 심곡(心曲)을 부연해서 보이며 갖가지의 직위에 있는 백관(百官)들에게 보익(輔益)해 주기를 바라는 말을 한 것이, 내가 어찌 차마 듣기 아름답게 하려고만 하여 그런 분부를 한 것이겠느냐? 또 지금 과인(寡人)이 허전하여 편히 앉아있지 못하면서 우우(于于)1024)하게 모여 오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 곧 정초(旌招)1025)의 반열(班列)에 들어 있는 사람들인데, 매매(邁邁)하게 여기고 있는 뜻이 갈수록 더욱 진지(眞摯)해지고만 있다.
너희들은 모두 산림(山林)에서 독서(讀書)하고 있는 선비들로서 반드시 몸으로 실행(實行)해 가며 심득(心得)하게 된 요법(要法)이 있을 것이니, 정히 군덕(君德)의 성취해 가는 일을 담책(擔責)시키는 것이 마땅하다.
옛적에 유자(儒者)들이 반드시 모두 출처(出處)에 있어서 신중했던 것은 혹시라도 의당 나가지않아야 되는데 나가는 혐의가 있게 될까 우려해서이었고, 또 더러는 나갈 수 있기도 하고 나갈 수 없기도 한 사이에 있어서 헤아려 보느라 그랬던 것이다.
만일에 마땅히 나가야 할 때에 있어서는 옛적의 고상(高尙)한 선비들도 또한 되도록 독선기신(獨善其身)의 뜻을 돌리어 징소(徵召)하는 예의에 응하지않는 수가 없었다.
이윤(伊尹)1026)·여상(呂尙)1027)과 정자(程子)1028)·주자(朱子)1029)는 말할 것도 없고, 비록 우리 국조(國朝)의 유현(儒賢)들로 말하더라도 두 이씨(李氏)1030)와 두 송씨(宋氏)1031)가 그런 분들로서, 고사(故事)에 없던 일이 아니다. 고사가 있었는데도 나오지않고 있음은 곧 나의 예절이 부족하고 나의 성의가 신임받지못하는 소치일 것이기에 얼굴이 붉어져 무어라할 말이 없다. 그러나 현자(賢者)를 징초(徵招)하는 나의 성의와 예절은 비록 근간하지 못하다고 할지라도 잘 다스리기를 바라는 나의 지기(志氣)는 나 스스로 게으르지 않다고 여긴다.
어찌 너희들이 한결같이 겸퇴(謙退)하기만 해야 할 때이겠느냐?
이에 앞서 너희들의 상소에 비답(批答)한 말에 나의 충곡(衷曲)을 펴 보인 것이 무릇 몇 번이었느냐? 너희들이 조정에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이제는 한 해가 지나가게 되어 허전한 마음 한이 없기에, 따로 사개(使价) 하나를 보내어 다시 이렇게 돈유(敦諭)한다.
너희들이 나의 목마른 사람과 같은 소망을 생각해 보고서 즉시 함께 조정에 나와 나의 협조해 주기를 바라는 뜻에 부응(副應)해 준다면 다행함이 이보다 큰 것이 없겠으니, 너희들은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 보라”하였다.
註1022]삼원(三元):정월 초승을 이름.註1023]의·승(疑丞):상고(上古)때 천자(天子)를 보좌하던 신하 註1024]우우(于于):보행(步行)하는 모양 註1025]정초(旌招):대부(大夫)를 초빙하는데 정당한 예(禮)로 초빙하는 것.《맹자(孟子)》만장편(萬章篇)에 “서인(庶人)은 전(旃)으로 부르고, 사(士)는 기(旂)로 부르고, 대부(大夫)는 정(旌)으로 부른다”고 하였음. 정(旌)은 새 깃[鳥羽]을 깃대끝에 단 기를 말함 註1026]이윤(伊尹):은(殷)나라의 명상(名相).1027]여상(呂尙):주초(周初)의 현신(賢臣)인 태공망(太公望).註1028]정자(程子):송(宋)나라의 정호(程顥)·정이(程頤).註1029]주자(朱子):남송(南宋)의 대 유학자 주희(朱熹).註1030]이씨(李氏):이황(李滉)과 이이(李珥).註1031]송씨(宋氏):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
○下綸音, 敦召儒臣宋德相、金亮行、金鍾厚、兪彦鏶曰: “履玆三元, 天道方新, 而工夫未見其日進, 德業未臻於日新, 歲色已新, 習俗依舊, 纏繞而因循, 姑息而牽補, 但有退托之歎, 了無擺脫之效, 舊歲只有此等病痛, 新歲亦有此等病痛, 非徒日計月計之不足而已, 雖歲以計之, 又如是其不足矣。 自顧擔負, 可勝憂懼, 念予一身, 萬機所由, 百責所萃。 一有放忽, 而怠於惕若, 則燎毛之易, 蕩海之疾, 孰得以緩之, 孰得以禦之, 所以維持此心, 防範此身之道, 豈不在工日進而德日新也耶, 是以先王有憂之, 設師傅之官, 置諫諍之職, 前疑後丞, 左輔右弼。 在輿有規, 位宁有典。 倚几有諫, 居寢有箴。 臨事有導, 燕居有誦。 銘於盤、銘於盂, 以至几、杖、戶、牖, 莫不有戒。 以聖人之兢兢業業, 猶不自聖, 其眷眷求助於臣隣者, 若是其至矣, 矧予否德, 尤豈非勉勉處乎, 元朝綸音, 敷示心曲, 以求輔益於凡百有位, 予豈忍只資聽聞之美, 而有是敎也哉, 且今寡人之虛佇側席, 望其于于者, 卽是在旌招之列者, 而邁邁之意, 愈往愈摰。 噫! 爾等俱以山林讀書之士, 必有躬行心得之要, 政宜責之以君德成就也。 古之儒者, 必皆愼於出處者, 或慮有不當出而出之嫌也, 又或量其可出而不可出之間也。 若其當出之時, 在古高尙之士, 亦莫不勉回獨善之志, 以應徵召之禮焉, 伊、呂、程、朱尙矣。 雖以我朝儒賢言之, 兩李、兩宋是也, 非無故事也。 有故事而不出, 是予禮不足, 而誠未孚之致也, 騂靦之外, 無以爲喩。 然予之招賢之誠禮, 縱曰不勤, 予之求治之志氣, 自謂不怠。 豈爾等一向謙退之時乎, 前此爾等之疏批, 布予衷曲者, 凡幾遭矣, 冀爾等之造朝, 而至于今經歲, 虛徐之極, 另委一价, 復此敦諭。爾等念予如渴之望,共卽造朝,以副予求助之意,則甚大幸也,爾等念之念之。”
정조 5권, 2년(1778 무술/청건륭(乾隆)43년) 5월 2일(신유) 1번째기사
영종등을 태실에 제부(躋祔)하고 공신을 배향한 교서
태실(太室)에서 체제((禘祭)1186)하였는데, 영종대왕(英宗大王)과 정성왕후(貞聖王后)를 13실(室)에다, 진종대왕(眞宗大王)과 효순왕후(孝純王后)를 14실에다 제부(躋祔)하였다.
하루 전에 임금이 면복(冕服)을 갖추어 여(轝)를 타고 명정문(明政門)밖의 악차(幄次)로 나아갔다.
통례(通禮)가 효명전(孝明殿) 신좌(神座)앞으로 나아가 여(轝)를 타도록 계청(啓請)하니 부묘대축(祔廟大祝)이 신주(神主)를 받들어 신여(神轝)에다 안치(安置)하고, 통례(通禮)가 또 휘령전(徽寧殿) 호외(戶外)로 나아가 여(輿)를 타도록 계청하니 부묘내시(祔廟內侍)가 신주를 받들어다가 신여에 안치하고는 책보(冊寶)와 교명(敎命)은 앞에다 놓았다.
신여가 나가자 임금이 자리에 나아가 지영(祗迎)하였고, 이어 여(輿)를 타고 뒤따랐다.
통례(通禮)가 신여에 나아가 여(轝)에서 내려 연(輦)을 타도록 계청하니, 대축(大祝)과 내시(內侍)가 신주를 받들어 연(輦)에다 안치하였다.
임금이 여(輿)에서 내려 연(輦)을 타고 뒤따르니, 종친(宗親)과 문무백관(文武百官)이 반열(班列) 차례대로 뒤따랐다.
당초에 배향(配享)할 공신(功臣)들의 위판(位版)을 홍화문(弘化門)밖 거리의 동쪽에 머물러 놓았다가 대왕(大王)의 신련(神輦)이 나갈 적에 위판(位版)도 또한 뒤따랐다.
드디어 태묘(太廟)로 나아가 묘문(廟門)밖에 이르자, 통례(通禮)가 신련(神輦)으로 나아가 연에서 내려 연(輦)을 타도록 계청하니 대축(大祝)과 내시(內侍)가 신주를 받들어다 연(輦)에다 안치하였다.
임금이 연(輦)에서 내려 여(輿)를 타고 뒤따르다가 악차(幄次)에 당하여는 여(輿)에서 내려 신여의 왼쪽으로 나아갔다. 통례(通禮)가 신여에 나아가 여(轝)에서 내려 악차로 들여 가도록 계청하니, 대축(大祝)과 내시(內侍)가 신주를 받들고 악차로 옮기어 안치하고, 교명(敎命)과 책보(冊寶)는 또한 악차 안에다 펴놓았다.
조금 있다가 진종대왕과 효순왕후의 신련이 연복전(延福殿)에서 묘문(廟門) 밖에 이르러 연(輦)에서 내려 여(轝)에 오르매, 임금이 자리로 나아가 지영하였다.
악차에 이르자 대축(大祝)과 내시(內侍)가 신주를 받들어 악차로 옮기어 안치하기를 모두 처음의 의식(儀式)대로 하고, 종친과 문무 백관들이 묘(廟) 동쪽문 밖으로 나아가 자기 차례로 서있었다.
임금이 면복 차림으로 판위(版位)에 나아가 사배(四拜)하고 드디어 묘(廟) 안으로 들어가 봉심(奉審)하며 제기(祭器)를 살펴보고는 이어 영녕전(永寧殿)으로 나아가 또한 앞에서와 같이 하였고, 악차로 돌아와 원유관(遠遊冠)과 강사포(絳紗袍)로 갈아입고 신문(神門)밖으로 나아가 희생(犧牲)을 살펴보고 악차로 돌아왔다.
약방(藥房)의 3제조(提調)와 여러 승지(承旨)들이 재전(齋殿)에서 미리 재계하기를 주청(奏請)하니, 하교하기를,
“이는 우리 선대왕(先大王)께서 일찍이 하시던 일인데, 소자(小子) 내가 감히 그대로 준수하여 받들지 않을 수 있겠느냐?”하고,
중각(中刻)에 다시 면복 차림으로 어악(御幄)을 봉심(奉審)하였다.
이날 여러 향관(享官)들이 먼저 들어와 자리로 나아갔고, 임금이 면복을 갖추고 들어와 판위(版位)로 나아가니, 통례(通禮)가 신악(神幄)으로 나아가 자리에서 내려와 여(轝)를 타고 부알(祔謁)하기를 계청하니, 대축(大祝)과 내시(內侍)가 영종대왕과 정성왕후의 신주를 받들고 나와 신여에다 안치(安置)하고, 집례(執禮)가 앞에서 인도하여 정문(正門)으로 해서 들어가 부알위(祔謁位)에 이르러 궤(櫃)를 열어 욕석(褥席)에다 안치하고 나자, 통례가 욕위(褥位)의 서쪽으로 나아가 북쪽으로 향하여 꿇어앉아, ‘길신(吉辰)인 오늘 영종 대왕과 정성왕후께서 부알하시게 됨을 아룁니다’하고, 이어 동쪽으로 향하여 여(轝)를 타고 부향(祔享)하기를 계청하니, 대축(大祝)과 내시(內侍)가 신주를 받들어 신여에다 안치하고, 신여가 이미 올라가게 되자 대축과 내시가 인도하여 신실(新室)에 이르러서는, 내시는 왕후의 신주를 받들어다 자리에 안치하고 대축은 대왕의 신주를 받들어다 자리에 안치하며, 묘사(廟司)는 그 소속(所屬)들을 거느리고 각기 고명(誥命)과 책보(冊寶)를 받들어다 탁자에다 들여놓고서 차례대로 반열을 나누고는 선개(扇盖)를 예식대로 하였으며, 조금 있다 또 진종대왕과 효순왕후의 신주를 받들어다 부알(祔謁)하고 입묘(入廟)하기를 위의 의식대로 하고, 드디어 묘내(廟內)로 올라가 봉심(奉審)하고 나서 내려와 자리로 되돌아갔다.
좌의정 송시열(宋時烈)의 위판(位版)을 효종대왕(孝宗大王)의 묘정(廟庭)에 추배(追配)하고,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최규서(崔奎瑞)와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조문명(趙文命)과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의 위판을 영종대왕의 묘정에 배향(配享)하고 나서 독교관(讀敎官)이 교서(敎書)를 읽었다. 그 교서에,
“왕은 말하노라. 은(殷)나라 칠묘(七廟)의 봄직한 것은 처음으로 부조(不祧)하는 예법을 말한 것이고, 순(舜)임금의 오신(五臣)은 그중에도 훌륭하였기에 이에 종사(從祀)하는 예식을 거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상로(霜露)를 밟을 적마다 여애(餘哀)가 바야흐로 깊어지기만 하고 풍운(風雲)을 대할 적마다 추원(追遠)하는 생각이 더욱 결집(結集)하게 된다.
지난 옛날 영릉(寧陵)1187)께서 어극(御極)하셨을 적에 상(商)나라 부암(傅巖)1188)에서 현자(賢者)를 구하려는 것처럼 생각이 부지런하셨었다.
이때에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이 있다가 걸연(傑然)한 왕좌(王佐)의 재질로 세상에 나와 성대(聖代)의 서조(瑞兆)가 되었다.
절벽(絶壁)처럼 서있는 기상은 대개 추성(鄒聖)1189) 이후의 제일인이고, 바다처럼 넓은 흉회(胸懷)는 고정부자(考亭夫子)1190)의 성법(成法)을 그대로 따랐었다. 천지에서 떠받치는 의리는 1부(部)의 인경(麟經)1191)에서 나온 것이고, 군신(君臣)사이의 시원하게 만남은 천재(千載)에 어수(魚水)1192)의 관계이었다.
소장(消長)은 도(道)가 있으므로 하늘이 장차 사문(斯文)을 없애지 않게 되었고 현회(顯晦)는 때에 관계되므로 공론(公論)은 백세(百世)를 기다릴 것이 없었다.
다만 생각하건대, 문묘(文廟)의 양무(兩廡)에 철식(腏食)1193)하게 된 이후에 아직도 무후(武侯)1194)처럼 일체로 제사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지난번에 송(宋)나라 제생(諸生)들처럼 상소하여 호소하는 말이 진실로 나의 마음을 감동시켰었고 마침 주(周)나라 태실(太室)처럼 부례(祔禮)의 때를 당하게 되었으니 마치 이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같이 되었다.
이에 제9실(室)의 배식(配食)하는 반열에 자리를 바로하여 먼 백대(百代)까지라도 훌륭한 계합(契合)을 표양(表揚)한다.
생각하건대, 우리 선조(先朝)의 50년동안의 신화(神化)는 진실로 그 당시에 마음을 같이하는 한두 신하에게 힘입은 것이었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은 안위(安危)할 때에도 기댈 수 있는 인재로서 죽으나 사나 변하지 않는 지조가 있었다. 집에 전해오는 소절(素節)은 태산(泰山)이나 홍모(鴻毛)와 같이 여기는 데에서 대의(大義)를 밝혔고, 나라를 위한 순충(純忠)은 단심(丹心)으로 백발(白髮)이 될 때까지의 일이 신장(宸章)1195) 에서 환하였다.
신축년1196)의 큰 계책을 극력 협찬하고 정유년1197)의 고규(故規)를 차자(箚子)로 진달했었으며, 십행(十行)의 자지(慈旨)를 친히 받고선 순국(殉國)할 뜻을 결정하였고 삼종(三宗)1198)의 정맥(正脈)을 혼자서 보호하였으니, 종사(宗社)를 보위(保衛)하는 공이 컸었다.
강개(慷慨)하게 임명(臨命)한 시(詩)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면 인인(仁人)이나 지사(志士)가 아니고, 조용하게 의리를 성취한 공렬(功烈)은 장차 신하로서 두 마음을 가진 자를 부끄럽게 할 것이다.
한(漢)나라 상산사호(商山四皓)1199)가 저황(儲皇)을 조호(調護)한 것에서 어찌 섬기는데에 미급(未及)한 것을 논하겠으며, 송(宋)나라 한기(韓琦)1200)가 영묘(英廟)를 익대(翊戴)한 것은 진실로 돕는 자리에서 더 앞일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첨의(僉議)가 이미 같게 된 것이고 또한 가까운 사례로 의거할 만한 것이다.
영의정 최규서(崔奎瑞)는 풍의(風儀)는 마치 난곡(鸞鵠)이 우뚝 치솟는 것같고, 식려(識慮)는 시귀(蓍龜)처럼 영감스러웠다.
야도(野渡)1201)에서 고주(孤舟)의 역할은 구추밀(寇樞密)1202)의 오랜 명망보다도 높았고 급류(急流)에서 용퇴(勇退)한 것은 전참정(錢參政)1203)의 높은 풍도보다도 뛰어났다. 무신년1204)에 극적(劇賊)들이 흉계(凶計)를 도모할 때를 당해서는 당시에 이 원로(元老)의 고급(告急)한 것을 힘입어, 3도(道)의 기세를 연합한 군사를 부수게 되었으니, 누가 공(公)과 공로를 다투겠는가?한 가닥 왕업을 부지하게 한 포양(褒揚)을 생각하면 천감(天鑑)에도 소명함이 있다. 각건(角巾)1205)을 쓰고 집으로 돌아와 비록 기린각(麒麟閣)1206)에 화상 그릴 훈공(勳功)을 사양했지만, 문미(門湄)에 보묵(寶墨)을 걸었으니 족히 운대(雲臺)1207)보다 높은 공렬(功烈)을 증험하겠다.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은 규장(珪障)·금옥(金玉)과 같은 자품(資稟)으로 주석(柱石)·동량(棟樑)과 같은 인재이었다.
육경여(陸敬輿)1208)처럼 백독(百牘)의 경륜(經綸)으로 국가의 흥망(興亡)을 염려했고 조승상(趙丞相)1209)과 같이 한 몸의 거취(去就)가 현사(賢邪)의 시비(是非)와 관계가 있었다.
전후로 고심(苦心)한 것은 오직 임금께 대한 모함을 밝히는 한 가지 절의였고, 평생 동안 손을 쓴 일은 오직 충신(忠臣)과 역신(逆臣)을 가리는 큰 관건(關鍵)에 있었다.
왕실(王室)의 폐부(肺腑)로서 공사(公私)의 휴척(休戚)을 함께 하였고, 낭묘(廊廟)에서나 강호(江湖)에서 진퇴(進退)의 우락(憂樂)이 차이가 없었다.
좌의정 조문명(趙文命)은 임금을 잘 보필하는 재질이고 산함(酸醎)을 조정(調停)하는 솜씨이었다. 나라를 활발하게 하는 소지(素志)로 범문정(范文正)12 10)처럼 양의(良醫)가 되기를 원하였고, 당시를 바로 잡으려는 지성(至誠)으로 여급공(呂汲公)1211)처럼 유독 사당(私黨)이 없었다.
언제나 생각에 피차(彼此)의 붕비(朋比)하는 화는 필연코 장차 하늘을 뒤덮으며 요원(燎原)의 불길 같으리라 여기고, 이래서 상하(上下)로 조정하는 논은 자못 영관(纓冠)하거나 피발(被髮)하고라도 하려고 했었다. 나가면 장수가 되고 들어오면 정승이 되어 치우치게 융숭한 임금의 은덕을 입었고, 문장(文章)과 사공(事功)은 없어지지 않고 대중이 전송(傳誦)하게 되었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는 그 마음이 겸손하고 신중하며 청렴하고 소박하였고, 재질(才質)이 통련(通練)하고 총명하였다.
조신이 단정하고 자상하여 진지(進止)가 한 자 한 치의 실수도 없고, 우모(訏謨)가 밀물(密勿)하면서도 미미한 의복과 신발에까지 정신을 썼다.
처음에 희령(熙寧)1212)과 원풍(元豊)1213)때처럼 당적(黨籍)에 관련되어서는 사류(士類)들이 경중(輕重)을 막론하고 믿게되었고, 나중에는 원우(元祐)1214) 때처럼 완인(完人)이 되매 명주(明主)께서 복심(腹心)처럼 의탁했었다.
수십년을 정승으로 있으며 조야(朝野)에 신망이 높았고, 대개 사업은 한두 가지로 셀 수 없는데 민생들에게 혜택이 펼치었다.
이번에 제부(躋祔)하는 성대(盛大)한 의식(儀式) 때에 당하여 모두를 승배(升配)하는 이전(彛典)에 합당하다. 은후(殷后)때 일덕(一德)의 보좌(輔佐)를 생각하면 ‘두터우니 잊지않는다[篤不忘]’고 하였고, 주(周)나라의 원사(元祀)의 글을 고찰해 보아도 마땅히 따라 배향하여야겠다.
이에 온 나라의 공론에 따라 이유(二卣)로 명인(明禋)에서 유식(侑食)하게 한다. 목묘(穆廟)1215)에 문순(文純)1216)을 추배(追配)하니 듣고 보는 이가 모두 용동(聳動)되고, 이어서 인조[長陵]께 군언(群彦)을 배향하니 명석(名碩)이 점점 많아지게 되었다.
아! 하늘에 계신 영령(英靈)을 호위(護衛)하여 이미 좌우에 있게 하니 영세(永世)토록 뒷사람을 계도하여 많은 복과 상서를 내리게 하라”하였다.
【지제교(知製敎) 남학문(南鶴聞)이 지어 올렸다】
효종대왕 묘정(廟庭)에 신(臣) 증(贈)영의정(領議政) 송시열을 배향한 교서(敎書)에,
“왕은 말하노라. 성무(聖廡)에 선정(先正)을 승제(陞躋)하였음은 사문(斯文)을 존대하기 위한 것이고, 세실(世室)에 종신(宗臣)을 추배(追配)하였음은 훌륭한 공렬(功烈)을 포양(褒揚)하기 위한 것이다. 이어 1백년이나 없었던 예전(禮典)을 닦아, 온 나라 대중의 심정(心情)에 답하게 되었다.
내가 생각하건대, 왕정(王政)은 유현(儒賢)을 높이는 일보다 더 먼저 할 것이 없고, 사전(祀典)은 척배(陟配)에 있어서 더욱 신중해야 한다.
만약 목묘(穆廟)에도 가리어 종유(從侑)하는 것을 극진히 하였다면 효종[孝陵]께도 또한 추향(追享)하는 의식을 거행하여야 한다.
단지 나아가 간발(簡拔)하여 묘정(廟庭)에 있게만 한 것이 아니라 도학(道學)을 중히 여겨서인데, 진실로 종사(從祀)일을 모두 질서대로 한 것을 생각하니 방국(邦國)에 광채가 있게 되었다. 하물며 천재(千載)에도 없는 제우(際遇)이었는데 어찌 일체(一體)로 같이하는 전례(典禮)를 늦추겠는가?
오직 경(卿)은 천하(天下)의 대로(大老)이고 해동(海東)의 진유(眞儒)이었다. 일찍부터 현사(賢師)에게 종류(從遊)하여 연원(淵源)이 깊고 문로(門路)가 올바랐고, 크게 성학(聖學)을 천명(闡明)하여 천리(踐履)가 독실하고 법도가 엄격하였다.
땅이 만물을 지고 있고 바다처럼 넓은 도량으로 학문의 규모는 주자(朱子)와 궤범(軌範)을 같이 했고, 산악(山岳)이 높이 솟아있는 듯한 기상(氣像)은 맹씨(孟氏) 이후에 제일인(第一人)이었다.
군현(羣賢)의 것을 집대성(集大成)하여 우뚝하게 사도(斯道)의 극치에 나아갔고, 육합(六合)1217)에 더욱 지강(至剛)한 것은 걸연(傑然)히 호기(豪氣)가 세상을 덮었다. 사풍(士風)이 격려(激勵)되고 사도(師道)가 존엄(尊嚴)해져서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자애(慈愛)를 남기게 되었고, 방례(邦禮)가 바로잡아지고 피사(詖辭)1218)가 사라지면서 옛적의 것에 질정해 보아도 의아스러울 데가 없게 되었다. 무릇 어찌 한 시대만의 괴형(魁衡)이었겠느냐? 또한 진실로 만대(萬代)의 표준이 되었었다.
출처(出處)는 이윤(伊尹)1219)·여상(呂尙)1220)과 더불어 서로 백중(伯仲)이었고 사업은 천지에 높아 일월(日月)처럼 빛났다. 이에 유문(儒門)의 세상에 드문 자품으로 영고(寧考)의 크게 일을 하시려는 뜻을 잘 협찬(協贊)하면서, 감반(甘盤)1221)처럼 빈사(賓師)의 자리에 처한 것은 용잠(龍潛) 때부터였고 제갈양(諸葛亮)처럼 토복(討復)하는 공력을 담당하여 어수(魚水)와 같이 계합(契合)했었다. 천지가 번복(飜覆)된 뒤를 당하여는 일부(一部)《춘추(春秋)》의 의리를 강구(講究)하였고, 일모도원(日暮道遠)의 한탄을 느끼면서도 지업(志業)은 10년동안 와신상담(臥薪嘗膽)1222)하는 것으로 도왔다.
모열(謨烈)을 대양(對揚)하여 중국(中國)을 높이고 이적(夷狄)을 물리쳤고,
강상(綱常)을 부식(扶植)하여 인심(人心)을 바로잡고 천리(天理)를 밝히었다.
은의(恩義)로 말하면 군부(君父)와 신자(臣子)의 사이이고, 계합(契合)으로 말하면 복심(腹心)·고굉(股肱)과 같은 관계이었다.
내린 초구(貂裘) 1습(襲)은 앞날에 풍상(風霜)을 함께 하기 위한 것이고,
이폐(螭陛)1223)에서의 독대(獨對)는 그 힘써 부지런히 한 모유(謨猷)였다. 성지(聖志)에 찬동하여 더욱 수화(水火)의 위태로운 속에서도 격려하였고,
예략(睿略)을 받들어 우주(宇宙)의 깊은 수치를 씻기를 기약했었다.
아! 대업(大業)을 절반도 이루지못해서 그만 하늘이 무너지는 애통에 감싸이게 되었다.
임금의 승하를 만류할 길이 없어[龍髯莫攀] 상천(上天)하는 선어(仙馭)가 이미 멀어져버렸고, 춘추의 의리를 혼자 품고서 한밤중에 혈루(血淚)가〈한없이 옷깃을〉적시었다.
백수(白首)에도 처음에 먹은 마음 황명(皇明)의 일월(日月)을 그대로 이고 있고, 창오(蒼梧)1224) 저문 날에 영릉(寧陵)의 송백(松栢)에서 부질없이 슬프기만 했었다.
황천(皇天)이〈훌륭한 분을〉남겨두지 아니하여 용호(龍虎)의 인물이 사라지고 세상일이 극도로 변하자 호치(狐鴟)의 무리가 방자하게 기세를 떨친다. 만고의 정기(正氣)는 없어지지않아 그래도 난적(亂賊)들이 두려워할 줄 알게 되고, 백세(百世)토록 일정한 공론이 기다리고 있어 참으로 우리의 사도(斯道)가 보존하게 되었다.
문묘(文廟)의 통서(統緖)를 서로 전승(傳承)해 감은 오직 이 큰 도덕을 빛내는 일인데, 조가(朝家)에서 비록 이증(貤贈)하는 일을 했지만 융성(隆盛)했던 계우(契遇)를 현양(顯揚)하는 일은 있지 않았었다.
돌아보건대 선조(先朝)에 욕의(縟儀)를 미처 거행하지못하고 오늘날에 이르도록 예전(禮典)을 차리지 못했으니, 어찌 온 나라 공공(公共)의 의논이 답답하게 펴지지 못함만 있겠는가? 또한 성조(聖祖)의 오소(於昭)하신 영령(英靈)이 애닯게 여기며 기다리고 있겠다.
이에 내가 유서(遺書)를 읽어보며 일찍이 광감(曠感)을 안게되고 위열(偉烈)을 생각하며 오직 먼 계획을 품게 된 바이다.
당초에 황묘(皇廟)의 어필(御筆) 현액(懸額)을 내렸음은 강한(江漢) 조종(朝宗)의 의리를 기록하게 된 것이고, 보찰(寶札)의 단발(短跋)을 새로 지었음은 대개 아름다운 풍운(風雲)의 제회(際會)를 사모한 것이다.
오직 이번의 추승(追陞)하는 의식(儀式)은 곧 계지(繼志)하고 술사(述事)하는 일로서, 곧 존봉(尊奉)하는 도리를 강구하는 것인데 어찌 형식에 구애할 것 있겠는가?
만일에 있지않던 규정(規定)이라 한다면 의기(義起)해도 되는 것이다.
이에 경(卿)을 효종 대왕(孝宗大王)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하거니와, 유명(幽明)은 간격이 없는 법이기에 동심(同心) 동덕(同德)의 신하에게 의지하게 될 것이고, 위서(位序)대로 이어받아 문정(文正)·문경(文敬)의 반열이 엄정(嚴正)해지게 되었다.
기(夔)와 설(契)이 방훈(放勳)1225)과 중화(重華)1226)의 대업을 협찬(協贊)한 것처럼 공로는 짝할 수 없고,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니 마땅히 의거할 수 있는 예법(禮法)이다. 표장(表章)도 이미 손색이 없게 되고 숭봉(崇奉)도 거의 할 말이 있게 되었으니, 성덕(盛德)이 아니라면 누가 이에 참여하겠는가?
자못 하늘의 뜻도 오늘을 기다린 듯하다.
아! 사방에서 보고 듣는 것의 미치는 것을 생각하면 공경하는 마음이 흥기(興起)되지않는 이가 없고 과덕(寡德)하고 암매(暗昧)한 나의 존모(尊慕)하는 성의를 돌아보면 이로 좇아 펼 수 있게 되었다.
천지의 정의(正義)는 실추되지 않는 법이기에 태평한 국운(國運)이 만회되기를 기다리겠고, 광악(光岳)의 정령(精英)은 아직도 그대로 있는 것이기에 국명(國命)이 영구해지도록 음즐(陰騭)【하늘이 은연중에 백성을 안정시킴】해주기 바라겠으니, 우리 선왕(先王)의 척강(陟降)을 계적(啓迪)하고 우리 자손과 여민(黎民)을 보호할찌어다”하였다.【지제교(知製敎) 김희(金憙)가 지어 올렸다】
영종대왕 묘정에 신 영의정 김창집을 배향한 교서에,
“왕은 말하노라. 3년이 되면 제부(躋祔)함은《예경(禮經)》에서 소목(昭穆)의 의식을 밝힌 바이요, 백세(百世)토록 공(功)을 높임은 성왕(聖王)들이 포숭(褒崇)의 전례(典禮)를 소중히 여긴 바이다.
돌아보건대 영묘(英廟)를 보좌하던 양필(良弼) 중에 누가 비궁(閟宮)1227)의 배유(配侑)의 좋은 법을 받아야 하겠는가?
오직 경(卿)은 문정(文正)과 문충(文忠)의 아들이고 손자로서, 순충(純忠)의 큰 절의(節義)는 늠름(凛凛)하게도 앞서의 영신(寧人)이 가전(家傳)해 온 것이고, 백발(白髮)에도 단심(丹心)을 지켰음은 선신후(先神后)의 신장(宸奬)에 환하였다. 특수한 제우(際遇)로 낭묘(廊廟)에 있어서는 임금의 길을 보필하였고, 정론(正論)을 붙잡고 피사(詖邪)를 물리침은 사류(士類)들의 영수(領袖)였다. 종국(宗國)의 안위(安危)와 완급(緩急)에 관한 모든 일은 분발(奮發)하여 담당하고, 자신 하나의 화복과 사생(死生)에 있어서는 계교(計較)하기를 부끄럽게 여기었다.
아! 신축년1228)의 대책(大策)은 누가 감히 갑론(甲論)을박(乙駁)할 수 있는 것이었느냐? 의릉(懿陵)1229)께서 위예(違豫)하실 때에 당하여 국가의 사세가 위기일발(危機一髮)이게 되자,《주역[羲經]》명리(明离)의 괘상(卦象)을 강론하여 대의(大義)를 삼광(三光)처럼 밝혔다.
십행(十行)의 자지(慈旨)를 친히 받들었음은 실로 삼종(三宗)의 혈맥(血脈)을 부익한 것이였고, 일봉(一封)의 연차(聯剳)를 계속해서 올리면서 정유년1230)의 고규(故規)를 준수(遵守)하였다.
종사(宗社)가 이를 힘입어 안정되매 대하(大厦)를 한 목재(木材)에 지탱하게 되었고, 비창(匕鬯)1231)의 주(主)를 두어 보록(寶籙)을 천추(千秋)에 전해 가게 하였다. 어찌 화심(禍心)을 품은 무리들이 이에 국본(國本)을 요동(搖動)하려는 흉계(凶計)를 낼 줄 알았겠는가?
한기(韓琦)1232)와 범중엄(范仲淹)1233)처럼 탁락(卓犖)하게 수립(樹立)하고 있자 억지로 모함을 가하게 되었었고, 요(堯)와 순(舜)처럼 주고받는 것이 광명정대(光明正大)하자 공공연히 방자하게 방해하는 짓을 하게 되었었다.
북문(北門)으로 잠입(潛入)하는 짓을 하였음은 아! 저 흉당(凶黨)들이 장차 어찌 하려는 것이었겠는가? 남쪽 변방에 멀리 머물러 두었던 것은 대개 그들이 생각에 죽여버리고야 말려고 했던 것이다.
아무 사실이 없이 다그친 것은 진실로 비참하게도 장현(戕賢)하려고 계획했던 것인데, 창천(蒼天)이 조림(照臨)하여 순국(殉國)하려는 뜻을 더욱 굳어지게 하였다. 마침내 선왕(先王)을 위하여 한번 죽음으로서 이심(貳心)을 가지는 인신(人臣)을 부끄러워지게 하였다. 임명(臨命)하는 시(詩)에 슬픔이 간절한 것은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눈물 흘렸고 조용하게 취의(取義)했던 행적(行蹟)은 신도(臣道)의 이정표(里程表)가 되는 바이다.
천리(天理)는 본시 되돌아오기 좋아하는 것인지라 마침내 숙원(宿冤)을 말끔히 씻어버리게 되었다.
신감(宸鑑)이 내려다보고서 교일(皎日)을 돌리어 복분(覆盆)의 밑을 비추어 주게 되고, 숨은 억울을 통쾌하게 신설(伸雪)하여 단서(丹書)1234)에서 세척(洗滌)되고 화곤(華袞)의〈은택을〉받게 되었었다.
해와 달이 빛나듯 한 경사를 열었으니 원공(元功)이 그 누구이었겠는가?
음(陰)이 쇠퇴(衰退)하고 양(陽)이 장성(長成)하는 때를 당하여는 국시(國是)가 곧 정해지게 되었었다.
혹시라도 극력 보우(保佑)하는 종신(宗臣)이 없었다면 어떻게〈순제(舜帝)가〉문조(文祖)1235)에게 영원하기를 비는 것처럼 아름다움을 이루었겠는가? 4백년의 기업(基業)이 영장(靈長)하게 되었음도 진실로 경천(擎天)하는 솜씨를 힘입어서이고, 50년동안의 잘 다스린 교화(敎化)가 높다랗고 거창하였음도 욕일(浴日)1236)의 공로가 아닐 수 없었다.
만일에 이극(貳極)1237)을 익부(翼扶)한 충성을 논한다면 계합(契合)이 소융(昭融)했을 뿐만이 아니었는데, 어찌 꼭 일당(一堂)에서 어수(魚水)의 사이처럼 즐거워하는 것만을 기다리겠는가?
바야흐로 명량(明良)이 서로 만난 것이었음을 칭송(稱誦)하고 있는 것이다.
담담(澹澹)해진 이 시기에 즈음하여 더욱 단단(斷斷)하던 그의 정성을 사모하게 되었다. 승부(陞祔)하는 욕례(縟禮)의 날이 어느새 박두하니 여애(餘哀)가 많기만 하고 유좌(侑坐)하는 옛법을 마땅히 따르니 그의 남긴 공렬(功烈)이 높기만하다.
강사(江祠)에다 사상(四相)의 절의(節義)를 포장(褒奬)하였으니 그 누가 동덕(同德)한 순신(純臣)이 아니겠으며 묘정(廟庭)에는 군신 일체(君臣一體)의 예의를 소중히 하니 수공(首功)의 원보(元輔)를 귀중히 여기는 바이다.
오직 나의 뜻이 먼저 정해지기만 한 것이 아니라 또한 첨원(僉員)의 의논도 물어서 같이 한 것이다. 그 반열이 이와 같으니 우리 국조(國朝)의 가까운 사례도 의거할 수 있는 것이고, 오로지 아름답게만 할 수 없으니 송(宋)나라의 그전 사례를 징빙(徵憑)할 수 있다.
남들이 혹은 ‘저군(儲君)을 보호한 공로가 그 당시 일에 미쳐서 다름이 있다’고 했었으나, 나는 그가 종사(宗社)를 보존한 공적이 진실로 선조(先朝)에 종사(從祀)하는 것에 합당한 줄로 안다.
돌아보건대, 이 묘신(眇身)이 당했던 때에도 또한 이미 가진 간난(艱難)과 위험을 모두 겪었고 개탄스럽게도 민이(民彛)가 장차 어두어질 때에는 진실로 대부분 경(卿)의 충정(忠貞)에 있어 광감(曠感)하였다.
그래서 이장(彛章)을 따르고 또 숭례(崇禮)를 펴서, 이에 경을 영종대왕(英宗大王)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한다.
아! 익보(翼輔)하는 훌륭한 절의(節義)는 유명(幽明)에 차이가 없을 줄로 알고 친애(親愛)하며 앙대(仰戴)하던 초심(初心)은 한없이 척강(陟降)할 적마다 호위(扈衛)해 드리기를 바란다. 변두(籩豆)의 향례(享禮)를 곧 갖추어 나의 단충(丹衷)을 표하며, 반석(盤石)과 태산(泰山)처럼 기업(基業)이 영구히 편안하도록 현우(玄祐)해 주기를 기다린다”하였다.【지제교 김희(金憙)가 지었다】
영의정 최규서를 〈배향한〉 교서에,
“왕은 말하노라.
태실(太室)에서 승부(陞祔)하는 예(禮)를 거행하니 겨우 3년의 상제(喪制)를 마치게 되었고 서사(西戺)에 유향(侑享)하는 반열을 따라 이에 일덕(一德)의 현자(賢者)를 가리게 되었으니 진실로 대중의 심정에 따라서 또한 특전을 차리게 된 것이다.
오직 경(卿)은 난새[鸞]가 멈추어 서고 고니[鵠]가 우뚝 솟는 듯하고 윤택한 옥(玉)과 순수한 금(金)의 인품으로, 풍범(風範)이 단중(端重)하여 본래부터 낭묘(廊廟)안에 있어야 할 기국(器局)이고 기우(氣宇)가 명랑하여 자못 연화(煙火) 가운데 사람이 아니었다. 식려(識慮)는 시초(蓍草)와 신귀(神龜)의 영감(靈鑑)이요 그 문장(文章)은 관면(冠冕)·패옥(珮玉)한 사람의 법도였다.
일찍이 명릉(明陵)의 융성(隆盛)한 때를 만나 뛰어나게 소대(昭代)의 명신(名臣)이 되었으며, 청요(淸要)한 직을 두루 거치면서도 뜻은 분화(粉華) 밖에 있었고 옳음과 그름을 반드시 결단하면서도 자신은 당사(黨私)의 와중(渦中)을 멀리했었다. 남쪽의 백성들이 초가삼간(草家三間)의 노래를 부르게 되었음은 조열도(趙閱道)1238)의 간소(簡素)한 행정(行政)과 같고, 북쪽의 오랑캐들이 한마디의 잘못을 사과(謝過)하게 되었었으니 어찌 부정공(富鄭公)1239)이 헌납(獻納)한 간쟁(諫爭)만 못하겠는가?
바야흐로 은권(恩眷)이 융숭(隆崇)하여서는 조석(朝夕)으로 상가지우(商家之雨)가 되어졌고, 약령(弱齡)이 넘기 전에 13차례나 구양공(歐陽公)1240)처럼 소장(疎章)을 올렸었다. 드디어는 급류(急流)에서 물러나 멀리 가버리는 심정(心情)에서 더욱 고산(高山)을 우러러보는 중망(重望)을 지니게 되었었다.
임학(林壑)으로 돌아간들 어찌 대궐을 사모하는 정성을 망각하겠는가? 창상(滄桑)을 격어 왔기에 마침내 보신(保身)하는 지혜를 증험하게 된 것이었다.
신축년1241)에 협복(叶卜)한 날에 당하여는 오히려 필마(匹馬)로 낙양(洛陽)에 들어오기를 지체했었지마는, 선조(先朝)에서 세속을 독려하여 다스릴 적에 이르러서는 특히 일사부정(一絲扶鼎)의 표장을 내리게 되었었다.
그 명량(明良)이 서로 만나게 되는 성사(盛事)에 미쳐서는 양암(諒闇)1242)에서 처음으로 입근(入覲)하는 것이 더욱 두드러져서, 얼굴을 알기 바랬는지라 은례(恩禮)가 상격(常格)보다 뛰어나게 되었고, 손을 잡고서 눈물지으니 상하(上下)의 지성(至誠)이 집중되었다.
20여년만에 다시 수문(脩門)에 들어왔을 적에는 원로(元老)가 백발(白髮)에도 단심(丹心)이 변함이 없는 것이 반가웠고, 탑전(榻前)의 자리에서 앙면(仰勉)했던 하나의 중(重)자는 여타 사람들의 천언만어(千言萬語)가 번거로운 것임을 깨닫게 했었다.
비록 서로 정지(情志)가 통하여 되도록 치사(致仕)하고 쉬려는 간청을 따라 주었었지만, 풍기(風期)1243)가 밀물(密勿)했었기에 두텁게 의비(倚毗)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야외(野外)에서 거룻배를 멋대로 뛰웠으니 이미 가기로 한 뜻을 비록 막을 수 없었지만, 교악(喬嶽)처럼 진수(鎭守)한들 또한 어찌 잠운(潛運)하는 공력이 없었겠는가?
무신년1244) 봄의 잠복된 반란 때에는 기미를 먼저 알고 질년(耋年)의 늙은이로 풀 속을 발섭(跋涉)하여 고급(告急)했었다.
군흉(羣凶)들이 삼도(三道)가 연합한 기세이었으니 호흡(呼吸) 사이에 박두한 위태를 차마 말할 수 있었겠는가마는, 하루에 5사(舍)1245)의 길을 달려 왔었으니 충분(忠憤)이 격발(激發)했었음을 알 수 있는 일이다.
오직 일찌감치 음모(陰謀)을 부서뜨리어서 역적들의 간담(肝膽)이 절로 싸늘해졌을 뿐 아니라, 또한 재빨리 천토(天討)를 거행하였음은 그의 큰 계획을 힘입게 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구름이 흩어져버리고 번개가 없어지듯이 한 첩보(捷報)가 바로 고슴도치 털이 일어서듯 벌 떼가 모이듯 할 때에 있었는데도, 극력 원훈(元勳)을 사양하여 청렴한 지조가 더욱 현저해지게 되었다.
친제(親製)하여 내린 사자(四字)는 어필(御筆)이 유신(維新)하기만 하여, 과연 전대(前代)에 자릉(子陵)1246)을 포양(褒揚)한 것과 같은 것이고, 마침내 후세의 높은 운대(雲臺)의 공렬(功烈)과 부합되는 것이었다.
정방(貞坊)의 보각(寶閣)은 운한(雲漢)의 특이한 광채처럼 찬란하고, 심도(沁都)의 고범(孤帆)에는 각건(角巾)차림의 행색(行色)이 표연(飄然)했었다.
부운(浮雲)처럼 서권(舒卷)을 마음대로 하다가 대성(大星)의 정망(精芒)이 갑자기 떨어져버리듯 하였는데, 90의 질년(耋年)에 귀진(歸眞)하여 과연 신선(神仙)과 멀지 않게 되고, 십행(十行)의 선뢰(宣誄)는 덕업(德業)을 더없이 징험해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아! 노성한 원로의 유풍(遺風)이 아득하기만 한데, 나 소자(小子)가 이 거창한 기업(基業)을 맡게 되어 답답하기만 하다.
유광(流光)이 쉽사리 가버려 거려(居廬)의 상기(喪期)가 이미 끝나고 중월(中月)이 어느새 다가와 태묘(太廟)에 합체(合禘)하는 의례(儀禮)를 장차 거행하게 되었다. 오직 이 신종(愼終)하고 추원(追遠)하는 일에는 유종(侑從)이 더없이 중요한 것인데, 혹시라도 사직(社稷)을 부지(扶持)하고 시대를 바로잡아 간 현자(賢者)가 아니고선 어찌 묘간(妙簡)을 받게 되겠는가?
이에 온 나라의 공론을 물어보건대 이에 삼조(三朝)의 독인(篤人)에게 돌아갔었다. 이리하여 경(卿)을 영종 대왕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하게 되었다. 아! 풍운(風雲)을 상상(想像)하노라니 감개(感慨)가 더해지게 되고, 약사(禴祀)를 살펴보아 잘못이 없게 하겠노라.
권우(眷遇)할 그 당시에 소치(召致)한 뜻이 언제나 근면하셨었으니,
봉위(奉衛)하게 된 오늘날에 어찌 유명(幽明)이 다르게 될 리가 있겠는가?
바라건대 군신 일체(君臣一體)의 명인(明禋)을 흠향하며 영원히 만년토록 명우(冥佑)를 내릴지어다”하였다.【지제교 정지검(鄭志儉)이 지어 올렸다】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을 〈배향한〉 교서에,
“왕은 말하노라. 양암(諒闇)에서 3년 상제(喪制)를 마치니 이에 승부(陞祔)하는 욕의(縟儀)를 거행하게 되었고, 일덕(一德)의 명성이 있는 신신(藎臣)을 찾아내어 배식(配食)하는 이전(彛典)을 거행하는 것이다.
예법(禮法)에 있어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기에 종향(從享)의 발열에 참여케 했다. 오직 경(卿)은 미옥(美玉)·정금(精金)같은 자품과 대하(大厦)의 동량(棟樑) 같은 재국(材局)을 지녔었다. 대대로 충효(忠孝)를 전승(傳承)해 오기에 부형(父兄)의 유풍(遺風)을 그대로 물려받았고, 몸에 안위(安危)를 패복(佩服)하여 일찍부터 공보(公輔)의 중망(重望)을 짊어졌었다.
국가의 흥망(興亡)에 관한 조짐에 있어서 권권(眷眷)하였고 민심의 향배(向背)에 관한 기미에 있어서 근근(勤勤)했었다.
울연(蔚然)히 사림(士林)들의 추앙하는 바가 되었었으니 어찌 가부지친(葭莩之親)1247)으로만 대했겠느냐, 더러는 곤직(袞職)에 잘못이 있게될까 두려워하며 진실로 요(堯)·순(舜)의 도리가 아닌 것은 진달(陳達)하지 않았었다.
그 용지(容止)와 성기(聲氣)의 사이를 살펴보면 참으로 화락(和樂)한 군자(君子)이었고, 헌가(獻可)하고 체부(替否)하게 될 적에 당하여는 진실로 의연(毅然)한 대장부이었다.
군얼(群孼)들이 흉계를 부리는 때를 당해서도 구사(九死)하기로 맹세하고 후회하지 아니하여, 영요(嶺徼)에서 갖가지 풍상(風霜)을 겪었으니 참소하는 사람들의 서로 무함한 것을 차마 말할 수 있었겠으며, 자발(髭髮)이 부강(涪江)에서 보다도 더 나았었으니 정력(定力)이 더욱 확고(確固)했음을 증험할 수 있는 일이었다. 보옥(寶玉)이 불이 지나간 뒤에도 온전하였으니 더욱 비궁(匪躬)1248)의 정성을 다한 것이고, 금구(金甌)1249)로 개현(改絃)1250)하던 처음에 매복(枚卜)하였으니 진실로 가액(加額)하고 바라는 마음에 맞게 되었다. 장차《춘추(春秋)》의 대법(大法)을 신장(伸張)해 가고 홀로 천지의 떳떳한 대경(大經)을 붙잡아 세우게 되었었다.
입조(立朝)한 40년동안의 사업이 오직 정군덕(正君德)·명교화(明敎化)의 6자(字)이였었고, 연석(筵席)에 나와서 수백마디를 진달한 주차(奏箚)는 오로지 변성무(辨聖誣)와 엄징토(嚴懲討)에 관한 한 단서에 있었다.
같은 조정에 충신(忠臣)과 역신(逆臣)이 섞이어 진출(進出)했을 적에는 목욕재계하고서 토죄(討罪)하기 청하였고, 훈유(薰蕕)1251)는 한 그릇에 담길 수 없는 법이기에 거취(去就)를 걸고서 항쟁했었다.
평생 동안 당언(讜言)하기를 저버리지 않았기에 아! 귀역(鬼蜮)들의 화살이 그치게 될 때가 없었고, 간골(奸骨)들이 문득 죽기도 전에 싸늘해지게 되니 비록 석독(螫毒)을 가지고도 또한 나에겐 어찌 할 수 없게 되었었다.
무신년1252)에 역란(逆亂)이 일어난 때에 당해서야 비로소 일에 앞선 명감(明鑑)을 탄복하게 되었고, 계축년1253)에 휴퇴를 고한 뒤에 대궐을 향하여 사모하는 정성이 풀리지 아니하여, 한평생의 지조가 시종(始終) 변함없었고 단충(丹衷)이 평탄할 때나 험악할 때에도 다름 없었다.
어느 해엔가 귀감(龜鑑)을 놓치는 한탄이 생기어 고굉(股肱)으로서의 전포(展布)를 마치지 못하게 되고, 지금도 가목(稼木)의 재해를 통탄스럽게 여겨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사업(事業)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용호(龍虎)의 인물이 가버리자 오래도록 진항(秦巷)에서 절구질을 파하게 되었고, 땅이 갈라지고 하늘이 무너지게 되자 그만 정호(鼎湖)1254)에서 궁검(弓劒)을 안게 되었었다. 장차 태묘(太廟)에 승부(陞祔)하는 의례(儀禮)를 거행하려고 곧 길신(吉辰)을 가리었다.
유좌(侑座)할 현자(賢者)를 논하건대 그 누가 원로(元老)에 참여하게 되겠는가, 하물며 선조(先朝)에서 일찍이 좌우(左右)에 두려고 했었으니, 돌아보건대 신도(神道)에도 유명(幽明)의 차이가 없을 것으로 여긴다.
이에 경(卿)을 영종 대왕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하게 되었다.
아! 국가의 전례(典禮)를 그대로 준행(遵行)하고 보니 경(卿)의 공렬(功烈)이 더욱 현저해졌다. 생전(生前)에도 이미 풍운(風雲)처럼 제회(際會)하여 소융(昭融)했었으니 신후(身後)에도 향화(香火)를 올리어 포숭(褒崇)하는 것이 합당하다. 군신(君臣)이 똑같이 일체(一體)가 되었으니 길이길이 의관지유(衣冠之遊)에 같이 모시고, 천추(千秋)토록 분필(芬苾)을 흠향하며 거듭거듭 임우(霖雨)의 보좌(輔佐)가 될지어다. 더욱 바라거니와 영령(英靈)은 소격(昭格)하여 한없이 종방(宗邦)에 명휴(冥休)를 내리라”하였다.
【지제교 심유진(沈有鎭)이 지어 올렸다】
좌의정 조문명(趙文命)을 〈배향한〉 교서에,
“왕은 말하노라.
길일(吉日)에 승부(陞祔)하는 예의(禮儀)를 거행하여 막 상제(祥制)가 끝나게 되고, 청조(淸朝)에 배식(配食)하는 특전(特典)을 차리어 원신(元臣)을 종향(從享)하였다.
아! 명량(明良)이 그 당시에 서로 만나게 되었던 것이기에 오늘날 제례(祭禮)에 있어서도 함께 참여케 한 것이다. 오직 경(卿)은 산하(山河)의 간기(間氣)이고 동량(棟梁)인 위재(偉材)이었다.
문장(文章)은 정금(精金)·미옥(美玉)과 같아 젊은 나이에 연계방(蓮桂榜)에 장원하였고, 풍의(風儀)는 서린(瑞麟)·상봉(祥鳳)과 같아 청명(淸名)이 오죽비(梧竹扉)에 울리었다.
위포(韋布)때부터 1백년이 되도록 국가를 병들게 하는 근원을 근심하여 범문정(范文正)처럼 의수(醫手)가 되기 원하였고, 경악(經幄)에 있으면서는 붕당(朋黨)을 타파하는 만언(萬言)의 상소를 올리며 여대방(呂大防)처럼 유독 편당하려는 마음이 없었다. 뭇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속에 특립(特立)하고 있다가 드디어 두 차례나 외방(外方)으로 내침을 받았었다.
성조(聖朝)에 오극(五極)의 다스림을 세우는 때를 당하여는 종신(宗臣)도 일덕(一德)을 가진 아름다운 사람임을 가상하게 여기시고서, 일찍이 ‘붕당이 되어 사사로이 경알(傾軋)하는 짓을 함은 반드시 국가에 화를 끼치게 되고야 말 일이다’고 하시고, 이에 언론(言論)이 화평(和平)한 사람임을 들어 한결같이 시사(時事)를 더 맡기며 효과를 내도록 하시었었다.
사원(詞垣)을 맡아보고 오병(五兵)을 거느리니 그 근본은 윤길보(尹吉甫)처럼 문신(文臣)이자 무신(武臣)이었고, 전관(銓官)을 거치어 삼사(三事)로 승진(陞進)하였으니 그 제우(際遇)는 제갈 공명(諸葛孔明)처럼 어수(魚水)와 같은 관계가 되었다.
왕실(王室)의 주석지신(柱石之臣)으로서 폐부(肺腑)처럼 의탁하는 소임을 겸했었고, 무신년1255)의 효경(梟獍)의 발란을 감정(戡定)하여 산려하대(山礪河帶)의 맹세를 더하게 되었었다.
매양 평소에 청렴과 검소를 지켜 온 마음으로 권요(權要)를 겸손하게 사피(辭避)하는 뜻을 깊이 간직하고서, 간절하고 진지한 장독(章牘)으로 여러 차례 훈척(勳戚)의 혐의를 인피(引避)했었고 계합(契合)을 소융(昭融)하여 드디어 안위(安危)에 관한 책임을 지고는, 산함감신(酸醎甘辛)의 사람들이 귀일(歸一)하도록 조제(調劑)하느라 고심(苦心)과 혈성(血誠)을 다하였고 동서남북(東西南北) 어디에도 편파(偏頗)하는 것이 없어 대공지정(大公至正)했었다. 한치규(韓稚圭)처럼 정홀(整笏)하고 서서 국가의 사세가 반석(盤石)과 태산(泰山)같이 안정되게 만들고, 사마광(司馬光)처럼 형평(衡平)을 유지하여 조정에 삭당(朔黨)이니 촉당(蜀黨)이니의 싸움이 가라앉게 했었다.
비록 풍파(風波)가 서로 부딪치어도 지주(砥柱)의 표석(標石)을 흔들게 하지 못하고, 비록 수화(水火)처럼 현수(懸殊)한 사이도 도야(陶冶)해가는 그의 솜씨를 피하지 못하게 되었었다.
이러므로 출장입상(出將入相)하는 수삼(數三)년 동안에 탕평(蕩平)을 거의 8, 9분(分)이나 성취하게 되어, 자못 온 세상이 투실(鬪室)의 무기를 멈추고 또한 군공(羣工)들이 추거(推車)하는 길에 나서게 되었었다.
아! 50년동안의 질륭(郅隆)한 교화(敎化)도 영원히 건중(建中)하는 성모(聖謨)를 남기게 되고 그 한두 신하들이 동인협공(同寅協恭)하는 공력이 있게 된 것도 또한 창시(創始)하기 주창(主唱)하는 의논에 의한 것이었다.
오직 세운(世運)이 바야흐로 일변(一變)하게 되어 한탄스럽게도 경(卿)의 뜻이 중도(中道)에서 마치지 못하게 되어, 유장(遺章)에 위안(威顔)을 뵐 수 없게 되었음을 한탄하였음은 진실로 근외(謹畏)하는 본성(本性)에서 연유한 일이었고, 중신(中宸)에서 계방(季方)을 대할 적마다 눈물을 흘리셨음은 존몰(存沒)의 길이 달라진 사정임을 볼 수 있는 일이었다.
과인(寡人)의 몸이 큰 기업(基業)을 지승(祗承)함에 당하여는 양필(良弼)의 유풍(遺風)을 아득히 생각하게 되었었다.
익실(翼室)의 세월이 여러 차례 바뀌게 될 적마다 어떻게 상로(霜露)의 비정(悲情)을 견딜 수 있었겠는가, 기미(箕尾)의 정령(精靈)이 멀어져버렸지만 임우(霖雨)에 대한 생각이 더욱 간절하기만 하다.
이번에 태실(太室)에 승부(陞祔)하는 성례(盛禮)를 거행하게 되었기에 마땅히 유좌(侑座)를 정하는 이장(彛章)이 있어야 하거니와, 진실로 고굉(股肱)같은 합덕(合德)한 신하가 아니고선 어찌 분필(芬苾)을 함께 흠향하는 은전(恩典)을 받을 수 있겠는가?
지난 날의 보좌(補佐)들을 차례로 세어 보건대 신린(臣隣)들이 없은 것은 아니나, 선조(先朝) 조봉(遭逢)이 가장 성대하였기는 경(卿)보다 더한 사람이 없었다. 이에 경을 영종 대왕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하게 되었다.
아! 훈업(勳業)이 더욱 빛날 수록 전례(典禮)도 잘못됨이 없어야 했다.
증상(烝嘗) 때마다 변두(籩豆)를 들고 모시어 군신 일체(君臣一體)가 되고, 전각(殿桷)에 척강(陟降)할 적마다 시립(侍立)하여 풍운(風雲)처럼 재회(再會)할찌어다.
바라건대 정상(精爽)이 의귀(依歸)하면서 평소처럼 완연(宛然)하게 종위(從衛)하고, 영구히 춘추(春秋)의 향화(香火) 때마다 유좌(侑座)하여 우리 자손과 여민(黎民)을 보우(保佑)할찌어다.”하였다.【지제교 임시철(林蓍喆)이 지었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를 〈배향한〉 교서에,
“왕은 말하노라.
제사에는 배유(陪侑)하는 예절이 중요한 것이기에 옛적의 전장(典章)대로 거행하고, 풍운(風雲)처럼 제회(際會)하셨던 시절을 감모(感慕)하여 그 중에 양보(良輔)를 가리어 올리었다.
현자(賢者)는 임금이 아니면 배식(陪食)하지 않는 법이고, 한 가문(家門)은 나라와 기쁨을 같이하게 되었다.
오직 경(卿)은 우리 왕국(王國)의 신신(藎臣)이고 상문(相門)의 현명한 자손이다. 정강성(鄭康成)1256)과 같이 오로지 학문만 한 젊은 나이에 경학(經學)을 호위(護衛)하느라 항쟁하는 말을 하였고, 범충선(范忠宣)1257)처럼 가문(家門)의 명성을 계승해 가면서 국가를 빛내는 문예(文藝)를 독차지하였음은 여사(餘事)이었다.
심사(心事)는 고인(古人)들에게 물어보더라도 부끄러울 것이 없어 율신(律身)을 청렴 소박하며 근신 겸공하게 하였고, 재식(才識)은 당세(當世)를 구제해 가기에 여유가 있어서 치용(致用)함에 총명(聰明)하고 연달(練達)하였다.
아랫 자리에 있으면서도 이미 높은 여망(輿望)을 지니었고, 삼조(三朝)를 섬기면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게을리하지 않았었다.
신축년1258)과 임인년1259)의 여러 사람들과 당적(黨籍)을 연결하고서 양옥(良玉)이 불타게 될 것을 겁내었고 동남(東南) 일대에서 적봉(賊鋒)을 막아내면서는 퇴파(頹波) 속에 지주(砥柱)가 되었었다.
비록 시운(時運)은 여러 차례 파평(陂平)으로 변하였으나 성의(聖意)의 권주(眷注)1260)가 더욱 근면하게 되었었다. 웅번(雄藩)1261)과 탁지(度支)1262)에 두루 시용(試用)되면서 전곡(錢穀)과 갑병(甲兵)에 있어서 그의 능통한 재주를 폈고, 천관(天官)1263)과 사마(司馬)1264)에 번갈아 있으면서는 인물(人物)을 전형(銓衡)하는 데는 정직한 도리를 고수(固守)하였으며, 질종(秩宗)1265)을 맡아서는 오래전부터 배워온 것을 저버리지 않았고, 관각(館閣)에 등용되어서는 손양(遜讓)하는 뜻이 오직 확고(確固)했었다.
반근착절(盤根錯節)1266)속에 있어서도 뛰어난 공적을 나타내니 성심(聖心)이 특별히 간택하게 되었고, 임금을 보좌하거나 은택을 펴게하는데에 큰 직책을 맡았었기에 여망이 일치하게 되었었다.
음양(陰陽)이 소장(消長)하는 기미에 밝게 살피어 사충(四忠)의 억울함을 신설(伸雪)하는 데에 의리를 앞세웠고, 산함(酸醎)을 조제(調劑)하는 즈음에 어근버근하다 보니 백변(百變)의 간난(艱難)을 겪으며 자신은 늙어버렸었다.
광필(匡弼)은 한결같이 충성(衷誠)에서 나온 것이기에 성주(聖主)께서 그의 숨김이 없는 것을 칭찬하셨고, 모유(謨猷)는 반드시 경학(經學)에 근본한 것이기에 동조(同朝)에서 상고할 수 있음을 힘입게 되었다.
융성하게 원우(元祐)1267)때의 완인(完人)처럼되어 옛적의 영광전(靈光殿)1268 )처럼 우뚝하게 되었었다.
연석(筵席)에서는 자교(慈敎)를 송전(誦傳)하게 되어 연촉(蓮燭)1269)의 특수한 영광(榮光)과 흡사하게 되고 비단에 초상을 그리고 찬(贊)을 쓰도록 명했었으니 어찌 운대(雲臺)의 성사(盛事)만 못하겠는가?
한두 신하들이 정충(貞忠)을 같이한 처지에서 권비(眷毗)를 받은 것이 그를 앞질러 나올 사람이 없었고, 50년동안의 질륭(郅隆)한 다스림 때에 거의 절반이나 균축(勻軸)1270)을 맡아 보았었다.
사사(謝事)를 윤허(允許)받기를 청할 나이가 되어서는 물러나기를 구하는 소심(素心)을 이루게 되었고, 사후(死後)에 은졸(隱卒)1271)의 음신(音信)이 이르렀는데 상사(喪事)에 임하는 구례(舊例)를 하문(下問)하시게 되었었다.
그가 한 사업을 고찰해 보면 간책(簡策)에 분명하게 실려 있고, 그와의 제우(際遇)를 말한다면 처음에서 끝까지 변함이 없었던 것이었다.
이번에 황조(皇祖)에 승부(陞祔)하는 때를 당하였기에 따라서 서사(西戺)에 배유(配侑)하는 전례(典禮)를 닦아야 했다.
은서(殷書)를 고찰해 보건대, 종향(從享)을 함은 숭보(崇報)하는 길이 이에 의존(依存)하게 되어서이었고, 또한 이에 주관(周官)에도 공이 있는 자에게 대증(大烝)1272)을 지낸다고 말하였음은 이런 전례를 중히 여겨서인 것이다. 신어(神御)를 받들고 묘정(廟庭)에 들어갔을 적에 마치 하늘에 계시는 영령(英靈)을 소명하게 뵙는 것같고 동덕(同德)의 사람을 가리어 묘정에 배향(配享)하는 일은 적격자를 신중하게 가리는 도리를 다해야 했다.
따라서 대중의 공론이 모두 이 석보(碩輔)를 추대했었으니 마땅히 오늘날에 그의 종공(宗功)에 보답하는 것이므로, 이에 경(卿)을 영종 대왕(英宗大王)의 묘정(廟庭)에 배향하게 되었다.
아! 약사(禴祀)1273)를 이성(利成)하고 나니 붙들 수 없는 사극(駟隙)1274)속에 애통이 간절하기만 하고, 배위(陪衛)하는 예식을 거행하고 나니 어렴풋이 어수(魚水)가 거듭 화합하게 되는 듯하다. 계합(契合)은 유명(幽明)의 차이가 없을 것이어서 부앙(俯仰)하노라니 감창(感愴)이 더욱 깊어지기만 한다.
천추(千秋)토록 혈식(血食)이 끊어지지 않으니 명신(明神)이 흠격(歆格)하게 되길 바라며, 다 같이 군신 일체(君臣一體)가 되어 음즐(陰騭)하게 되기 바라노라”하였다.【지제교 김희(金憙)가 지어 올렸다】
의식(儀式)대로 행사(行事)하였는데, 그 축문(祝文)에 이르기를,
“거룩하신 우리 성조(聖祖)께서는 탕평책(蕩平策)에 뛰어나셨습니다.
대덕(大德)은 꼭 장수(長壽)하는 법이라 팔질(八袟)을 향유(享有)하셨습니다. 공렬(功烈)은 오직 소저(昭著)하였고 은덕(恩德)은 곧 널리 펼치었습니다.
전조(前祖)에 광영(光榮)이 더해지고 후손에게 은택(恩澤)이 펼치게하여 하늘처럼 높고 땅처럼 두터우셨는데,〈하늘이〉무정하게도 강할(降割)하여 아득히 먼데서 진유(眞遊)하시게 되었습니다.
비록 대상(大祥)과 담사(禫祀)를 마치기는 했지마는 애정(哀情)을 억제할 수 없습니다. 시일에 맞추어 승부(陞祔)하여 일정한 예의(禮儀)대로 따랐습니다. 아! 우리 문모(文母)께서 생존해 계시는 그날 양광(揚光)하시다가 달이 먼저 어두워지듯 선어(仙馭)하시었는데 의덕(懿德)의 짝이었습니다.
오직 고위(考位)나 비위(妣位)께서는 어디나 계시는 듯한데, 명을 받드시며 일체(一體)가 되셨기에 똑같이 태실(太室)에 제부(禘祔)하였습니다.
우리 열조(列祖)에게 승부하고 나니, 소목(昭穆)이 차례로 정연(整然)하게 되었습니다. 변두(籩豆)가 이미 차려지고 종고(鐘鼓)도 장엄하기만 합니다.
영구히 경사(慶事)가 있게하여 거듭 한없이 내려주소서.
훈호처창(焄蒿悽愴)1275)한데 남아있는 애통이 아직도 간절하기만 합니다.
이 자리를 강감(降監)하시면서 형작(泂酌)을 흠향하시기 바랍니다”하였다.
예전(禮典)을 끝내고 나서 환궁(還宮)하였다.
註1186]체제(禘祭):임금이 조상에 제사하는 제사의 이름.註1187]영릉(寧陵) :효종 註1188]부암(傅巖):은(殷)나라의 현신(賢臣)인 부열(傅說)이 숨어있었다는 암혈(巖穴).註1189]추성(鄒聖):맹자.註1190]고정부자(考亭夫子):주자. 註1191]인경(麟經):《춘추》註1192]어수(魚水):물고기와 물과의 관계처럼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친한 사이 註1193]철식(腏食):여러 신(神)을 제향할 때 각 신을 동시에 아울러 제사지내는 것.註1194]무후(武侯):한(漢)나라 제갈양(諸葛亮).註1195]신장(宸章):임금이 직접 쓴 문서, 또는 편지.註1196]신축년: 1721 경종원년.註1197]정유년:1717 숙종43년 註1198]삼종(三宗):효종·현종·숙종.註1199]상산사호(商山四皓):진(秦)나라 말년 전란(戰亂)을 피하여 섬서성(陝西省) 상산(商山)에 은거한 네 사람의 백발노인. 곧 동원공(東園公)·하황공(夏黃公)·녹리선생(用里先生)·기리계(綺里季). 후에 모두 한(漢)나라 혜제(惠帝)의 스승이 되었음.註1200]한기(韓琦):북송(北宋)의 명재상. 영종(英宗)을 후사로 세워 위국공(魏國公)이 되고, 다시 신종(神宗)을 세워 시중(侍中)이 되었음.註1201]야도(野渡):시골의 나루터.註1202]구추밀(寇樞密):송(宋)나라 태종때 사람 구준(寇準).註1203]전참정(錢參政): 송나라 고종(高宗)때 사람 전양신(錢良臣) 註1204]무신년:1728 영조4년.註1205]각건(角巾):처사(處士)나 은자(隱者)가 쓰는 두건.註1206]기린각(麒麟閣):한(漢)나라 무제(武帝)가 기린을 얻고서 지은 각. 선제(宣帝)때에 곽광(霍光)등 공신 11인의 초상을 이 곳에 걸어 두었음. 인각(麟閣) 註1207]운대(雲臺):후한(後漢) 명제(明帝)가 전세(前世)의 공신(功臣)을 추념하여 장수 28인의 초상을 그리게 한 대(臺)의 이름. 운각(雲閣).註1208]육경여(陸敬輿):당나라 덕종(德宗)때 사람 육지(陸贄) 註1209]조승상(趙丞相):송나라 고종때 사람 조정(趙鼎).註1210]범문정(范文正):송나라 인종(仁宗)때 사람 범중엄(范仲淹) 註1211]여급공(呂汲公):송나라 영종(英宗)때 사람 여대방(呂大防).註1212]희령(熙寧):송나라 신종(神宗)의 연호 註1213]원풍(元豊):송나라 신종의 연호.註1214]원우(元祐): 송나라 철종(哲宗)의 연호.註1215]목묘(穆廟):선조(宣祖)의 사당.註1216]문순(文純):이황(李滉).註1217]육합(六合):천지와 사방 註1218]피사(詖辭):편벽된 말.註1219]이윤(伊尹):은(殷)나라의 명상(名相).註1220]여상(呂尙):주초(周初)의 명상, 태공망(太公望).註1221]감반(甘盤):상(商)나라 고종(高宗)때의 현신(賢臣).註1222]와신상담(臥薪嘗膽):섶에 누워 쓸개를 맛본다는 뜻으로 원수를 갚고자 고생을 참고 견디는 일. 춘추시대 오왕 부차(夫差)가 월왕 구천(句踐)을 쳐서 부왕의 원수를 갚고자 매양 섶속에 앉아서 신고(辛苦)를 하였으며 또 월왕 구천은 오나라를 쳐서 회계(會稽)의 치욕을 씻고자 쓸개를 핥으며 보복을 잊지않았다는 고사(故事) 註1223]이폐(螭陛):궁전의 섬돌.註1224]창오(蒼梧):순(舜)임금의 능이 있는 곳. 임금의 승하를 뜻함.註1225]방훈(放勳):요(堯)를 가리킴.註1226]중화(重華):순(舜)을 가리킴.註1227]비궁(閟宮):종묘 註1228]신축년:1721 경종원년.註1229]의릉(懿陵):경종.註1230]정유년:1717 숙종43년.註1231]비창(匕鬯):세자의 지위 또는 그 직책.註1232]한기(韓琦):송(宋)나라 인종(仁宗)때의 현상(賢相).註1233]범중엄(范仲淹):송나라 인종때의 현상.註1234]단서(丹書):죄안(罪案).註1235]문조(文祖):요(堯)의 시조(始祖).註1236]욕일(浴日):국가에 큰 공이 있음.註1237]이극(貳極): 왕세자. 註1238]조열도(趙閱道):송나라 신종(神宗)때 사람.註1239]부정공(富鄭公):송나라 신종때 사람 부필(富弼).註1240]구양공(歐陽公):송나라의 학자 구양수(歐陽修).註1241]신축년:1721 경종원년註1242]양암(諒闇):임금의 거상(居喪).註1243]풍기(風期):임금과 신하사이에 뜻이 서로 통함.註1244]무신년: 1728 영조4년.註1245]사(舍):1사(舍)는 30리임.註1246]자릉(子陵):후한(後漢) 광무제 사람 엄광(嚴光).註1247]가부지친(葭莩之親):아주 엷은 교분(交分).註1248]비궁(匪躬):한 몸의 이해를 돌아보지않음.註1249]금구(金甌):금구 복명(金甌覆名)의 준말로, 새로 재상을 임명하는 일. 당(唐)나라 현종(玄宗)이 재상을 선정하여 그 이름을 책상위에 써 놓고 금사발로 가려 신하에게 맞추게 한 고사에서 온 말임.註1250]개현(改絃):거문고의 가락을 고친다는 뜻으로, 법도를 고침의 비유.註1251]훈유(薰蕕):향기를 내는 풀과 악취를 내는 풀로, 선(善)과 악(惡)을 비유함 註1252]무신년:1728 영조4년.註1253]계축년:1733 영조9년 註1254]정호(鼎湖):황제(黃帝)가 죽은 곳.註1255]무신년: 1728 영조4년.註1256]정강성(鄭康成):이름은 현(玄). 후한(後漢)말의 대학자.註1257]범충선(范忠宣):이름은 순인(純仁). 송나라 철종(哲宗)때 사람.註1258]신축년:1721 경종원년 註1259]임인년:1722 경종2년.註1260]권주(眷注):은총.註1261]웅번(雄藩):강성한 번진(藩鎭).註1262]탁지(度支):호조.註 12 63]천관(天官):이조(吏曹).註1264]사마(司馬):병조판서.註1265]질종(秩宗):예관(禮官).註1266]반근착절(盤根錯節):서린 부리와 얼크러진 마디라는 뜻으로, 복잡하여 처리하기 곤란한 일의 비유.註1267]원우(元祐):송나라 철종(哲宗)의 연호.註1268]영광전(靈光殿):한(漢)나라 경제(景帝)의 아들 공왕(恭王)이 건립한 궁전.註1269]연촉(蓮燭):연꽃 모양의 촛불. 당(唐)나라 선종(宣宗)때 영호도(令狐綯)가 한림(翰林)으로 있었는데, 금중(禁中)에서 야대(夜對)하면서 임금이 수레와 연촉을 보내어 원(院)에서 돌아오게 한 고사.註1270]균축(勻軸):정치를 하는 권리.註1271]은졸(隱卒):임금이 죽은 공신에게 애도의 뜻을 나타내는 일 註1272]대증(大烝):겨울 제사.註1273]약사(禴祀):봄 제사.註1274]사극(駟隙):사마(駟馬)로 벽의 틈을 지나듯이 세월이 빠름을 비유함. 註1275]훈호처창(焄蒿悽愴):향기가 올라가 신령(神靈)의 기(氣)가 사람을 엄습함.
○辛酉/禘于太室。 躋祔英宗大王、貞聖王后于十三室。 眞宗大王、孝純王后于十四室。 前一日, 上具冕服乘輿, 詣明政門外之幄次。 通禮進詣孝明殿神座前, 啓請乘轝。 祔廟大祝, 奉神主, 安於神轝。 通禮又詣徽寧殿戶外, 啓請乘轝。 祔廟內侍, 奉神主, 安於神轝, 冊寶、敎命在前。 神轝出, 上就位祗迎, 乃乘輿隨之。 通禮進詣神轝, 啓請降轝乘輦。 大祝、內侍奉神主安於輦。 上降輿, 乘輦隨之。 宗親、文武百官, 以班序從焉。 初配享功臣位版, 住弘化門外之街東。 大王神輦出, 位版亦從焉。 遂進詣太廟及廟門外。 通禮詣神輦, 啓請降輦乘轝。 大祝ㆍ內侍奉神主, 安於轝。 上降輦, 乘輿隨之。 及幄次降輿, 入就神轝之左。 通禮詣神轝, 啓請降轝入幄。 大祝、內侍, 奉神主移安于幄次, 敎命、冊寶, 亦陳于幄內。 頃之, 眞宗大王、孝純王后神輦, 自延福殿至廟門外, 降輦陞轝。 上就位祗迎及幄次。 大祝、內侍, 奉神主移安于幄次, 竝如初儀。 宗親、文武百官, 就廟東門久序位。 上以冕服, 詣版位四拜, 遂入詣廟內, 奉審省器。 仍詣永寧殿亦如之。 還幄次, 改具遠遊冠、絳紗袍, 詣神門外, 省牲還幄次。 藥房三提調、諸承旨, 請宿戒于齊殿。 敎曰: “此我先大王之所嘗行也。 予小子, 其敢不遵承。” 中刻, 更以冕服, 奉審于御幄。 是日諸享官先入就位。 上具冕服入詣版位。 通禮進詣神幄, 啓請降座、乘轝、祔謁。 大祝、內侍, 奉出英宗大王、貞聖王后神主, 安于轝。 執禮前引由正門入, 至祔謁位, 開櫃安于褥席訖。 通禮進褥位之西北向跪, 啓以今吉辰英宗大王、貞聖王后祔謁, 岑向啓, 請乘轝祔享。 大祝、內侍奉神主安于轝。 神轝旣陞, 大祝、內侍引至新室。 內侍奉門后神主, 安于座。 大祝奉大王神主, 安于座。 廟司率其屬, 各奉誥命、冊寶, 入置于案, 以次分列, 扇蓋如禮。 旣又奉眞宗大王、孝純王后神主, 祔謁入廟如上儀。 遂陞詣廟內, 奉審訖, 降復位。 以左議政宋時烈位版, 追配於孝宗大王廟庭。 以領議政金昌集ㆍ崔奎瑞、左議政閔鎭遠ㆍ趙文命、領議政金在魯位版, 配享於英宗大王廟庭。 讀敎官讀敎書:
王若曰: “殷七廟之可以觀, 肇稱不祧之禮。 舜五臣之於斯盛, 爰與從祀之儀。 方深霜露之餘哀, 冞結風雲之遐想。 粤昔寧陵之御極, 政勤商巖之求賢。 時則有若文正公宋時烈, 傑然以王佐之才, 出而爲聖代之端。 壁立氣像, 蓋是鄒聖氏後一人;海涵胸懷, 悉遵考亭夫子成法。 天地撑柱之義理, 一部麟經;君臣灑落之遭逢, 千載魚水。 消長爭, 將天未喪斯文; 顯晦關時, 公論不待百世。 第玆文廟腏兩廡之後, 尙闕武侯祀一體之規。 迺者宋諸生疏籲之言, 實感予意; 適當周太室禮祔之際, 若待今辰。 肆正第九室配食之班, 庸表廣百代契合之盛。 念我先朝五十年神化, 實賴當時一二臣同心。 領議政金昌集, 以安危可仗之材, 有生死不渝之志。 傳家素節, 炳大義於泰山、鴻毛; 爲國純忠, 煥宸章於丹心白髮。 力贊辛丑大策, 箚陳丁酉故規。 十行之慈旨親承, 殉國志決; 三宗之正脈獨護, 衛社功深。 慷慨臨命之詩, 不流涕非仁人、志士。 從容就義之烈, 將以愧爲臣者貳心。 漢商皓之調護儲皇, 何論逮事之未及;宋韓琦之翊戴英廟, 固知侑坐之莫先, 故僉議之已同, 亦近例之可據。 領議政崔奎瑞風儀, 則若鸞鵠之峙;識慮, 則如蓍龜之靈。 野渡孤舟, 蔚乎寇樞密之宿望; 急流勇退, 超然錢叅政之高風。 逮戊申劇賊之圖凶, 賴當時元老之告急, 破三道連兵之勢。 孰爭公功, 想一絲扶鼎之褒, 有昭天鑑。 角巾歸第, 縱辭盡麟閣之勳, 寶墨揭楣, 足驗高雲臺之烈。 左議政閔鎭遠, 姿是珪璋、金玉, 材則柱石、棟樑。 陸敬輿之百牘經綸, 念國家之興喪; 趙丞相之一身去就, 係賢邪之是非。 前後苦心, 只是辨君誣一節。 平生藉手, 惟在明忠、逆大關。 公私休戚之與同王室肺腑, 進退憂樂之無間廊廟、江湖。 左議政趙文命黼黻彌綸之材, 酸醎調劑之手。 活國素志, 范文正之願爲良醫;匡時至誠, 呂汲公之獨無私黨。 每謂彼此朋比之禍, 必將滔天而燎原; 所以上下調停之論, 殆欲纓冠而被髮。 出入將相, 荷聖眷則偏隆;文章事功, 在輿誦而不泯。 領議政金在魯, 其心則謙愼淸素;以才則通練聰明。 操履端詳, 進止無尺寸之失;訏謨密勿, 精神及裙屐之微。 初聯黨籍於熙ㆍ豊, 士類恃以輕重; 終作完人於元祐, 明主托以腹心。 居輔相凡數十年, 望蔚朝野; 蓋事業難一二計, 澤在生民。 玆當躋祔之盛儀, 俱合升配之彝典。 想殷后一德之佐, 曰篤不忘; 稽周家元祀之文, 宜從與享。 庸循一國之公議, 俾侑二卣之明禋。 追穆廟之配文純, 瞻聆咸聳; 繼長陵之享群彦, 名碩滋多。 於戲! 衛英靈於在天, 旣克左右; 啓人於永世, 崇降福祥。” 【知製敎南鶴聞製進。】
敎孝宗大王廟庭配享臣贈領議政宋時烈書:
王若曰。 聖廡之陞躋先正, 所以尊斯文;世室之追配宗臣, 所以揚盛烈。 爰修百年之曠典, 庸答一國之輿情。 予惟王政莫先於崇賢, 祀典尤愼於陟配。 若穆廟極從侑之選, 亦孝陵揭追享之儀。 非但迪簡在廷, 爾學爲重; 實惟咸秩從祀, 于邦國有光。 矧玆曠千載之遭逢, 詎緩同一體之典禮。 惟卿, 天下大老, 海東眞儒。 早從賢師, 淵源深而門路正; 丕闡聖學, 踐履篤而繩墨嚴。 地負海涵, 規模與朱子同揆; 山高岳峙, 氣像後孟氏一人。 集大成於群賢, 卓乎造道之極; 彌至剛於六合, 傑然蓋世之豪。 士風勵而師道尊, 到于今而遺愛; 邦禮正而詖辭息, 質諸古而無疑。 夫奚但一時之魁衡, 寔亦爲萬代之標準。 出處與伊、呂而相伯仲, 事業軒天地而曜日星。 斯以儒門不世出之姿, 克贊寧考大有爲之志。 甘盤處賓師之位, 粤自龍潛; 諸葛任討復之功, 爰托魚水。 當天翻地覆之後, 講義理於一部《春秋》; 感日暮道遠之歎, 贊志業於十載薪膽。 對楊謨烈, 尊中國, 而攘外夷; 扶植綱常, 正人心而明天理。 以言乎恩義, 則君臣ㆍ父子; 以言乎契合, 則腹心、股肱。 一襲貂裘, 他日風霜之與共; 獨對螭陛, 當時密勿之謨猷。 拚聖志而益勵, 水火之危衷; 奉睿略而期雪, 宇宙之深恥。 嗟! 大業之未半, 奄天崩之纏哀。 龍髯莫攀, 上天之仙馭已邈。 麟經獨抱, 中夜之血淚長沾。 白首初心, 皇明之日月尙戴; 蒼梧暮色, 寧陵之松栢空悲。 皇天不憖遺, 龍亡虎逝。 世事極變, 嬗狐恣鴟張。 萬古之正氣不磨, 猶然亂賊之知畏; 百世之定論以俟, 儘乎吾道之所存。 文廟之統緖相承, 惟是彰道德之大; 朝家之貤贈雖擧, 無以揚契遇之隆。 顧縟儀未遑於先朝, 而曠禮, 式至于今日。 豈有擧國共公之議, 鬱而不伸, 抑亦聖祖於昭之靈, 慼焉有待。 肆予讀遺書, 而夙抱曠感; 緬偉烈, 而維懷永圖。 皇廟之御額初宣, 庸識江漢朝宗之義; 寶札之短跋新製, 蓋慕風雲際會之休。 惟玆追陞之儀, 卽是繼述之事。 爰講尊奉之道, 豈爲文拘, 若論曠絶之規, 可以義起。 玆以卿配享孝宗大王廟庭。 幽明罔間, 猗同心同德之臣; 位序是承, 嚴文正、文敬之烈。 夔、契贊勛、華之業, 功莫與儔; 周、召配文、武之庭, 禮宜可據, 旣表章之無減, 庶崇奉之有辭。 微盛德孰與斯焉, 殆天意若待今者。 於戲! 念四方瞻聆之曁, 莫不起欽; 顧寡昧尊慕之誠, 從此可展。 乾坤之正義未墜, 佇泰運之挽回; 光岳之精英尙留, 庶永命之陰隲。 迪我先王陟降, 保我子孫黎民。”【知製敎金憙製進。】
英宗大王廟庭配享臣領議政金昌集敎書:
王若曰: “三年躋祔, 《禮經》所以明昭穆之儀; 百世功宗, 聖王所以重褒崇之典。 眷焉英廟左右之良弼, 孰膺閟宮配侑之令章, 惟卿, 文正、文忠有子有孫。 純忠大節, 澟乎前寧人家傳; 白髮丹心, 煥然先神后宸奬。 際殊遇而處廊廟, 黼黻王猷; 扶正論而闢詖邪, 領袖士類。 凡係宗國之安危、緩急, 奮然擔當; 至若一身之禍福、死生, 恥爲計較。 猗歟! 辛丑大策, 誰敢甲乙其論, 當懿陵違豫之辰, 國勢危如一髮; 講《羲經》《明离》之象, 大義炳若三光。 十行之慈旨親承, 實扶三宗血脈; 一封之聯箚繼進, 式遵丁酉故規。 宗祊賴安, 支大廈於一木; 匕鬯有主, 緜寶籙於千秋。 豈意包藏禍心之徒, 廼生搖動國本之計, 韓、范之樹立卓犖, 勒加詆誣; 堯、范之授受光明, 公肆沮戲。 北門潛入, 噫! 彼凶將欲何爲, 南芒遠投, 蓋其意欲殺乃己。 白地鍜鍊, 計實憯於戕賢; 蒼天照臨, 志彌堅於殉國。 終焉爲先王一死, 足以愧人臣貳心。 悲切臨命之詩, 國人皆涕; 從容取義之蹟, 臣道攸程。 天理本自好還。 宿冤竟得昭洗。 宸鑑俯燭, 回皎日而照覆盆; 幽枉夬伸, 滌丹書而被華袞。 啓日輝月輪之慶, 元功其誰,; 當陰消、陽長之時, 國是乃定。 倘微宗臣保佑之力, 詎致文祖祈永之休, 四百年基業靈長, 實賴擎天之手; 五十載治化巍蕩, 罔非浴日之功。 若論其翼扶貳極之忠, 不啻昭融之契合; 何必待魚水一堂之樂, 方稱明良之遭逢。 際玆澹澹之期, 益想斷斷之悃。 陞祔之縟禮奄迫, 餘哀廓然; 侑坐之舊典宜遵, 遺烈卓爾。 江祠將四相之節, 孰非同德之純臣; 廟庭重一體之儀, 所貴首功之元輔。 非惟予志之先定, 抑亦僉議之詢同。 若是其班, 我朝之近例可據; 罔俾專美, 有宋之前事足徵。 人或謂: ‘護儲之功, 有異逮事當日。’ 予則知存社之續, 亶合從祀先朝。 顧眇躬之遭時, 亦旣備經艱險; 慨民彝之將晦, 實多曠感忠貞。 爰遵彝章, 用侈崇禮, 玆以卿配享英宗大王廟庭。 於戲! 翊保偉節, 知無間於幽明; 愛戴初心, 庶長衛於陟降。 籩豆之享載備, 式表丹忠; 盤泰之基永綏, 佇待玄祐。 【知製敎金憙製進。】
領議政崔奎瑞敎書:
王若曰: “太室擧陞祔之禮, 甫訖三年之制; 四所從侑享之列, 爰揀一德之賢。 實循輿情, 用侈殊典。 惟卿, 鸞停、鵠峙, 玉潤、金精。 風範端凝, 自是廊廟上器; 氣宇明朗, 殆非烟火中人。 其識慮, 則布蓍、灼龜之靈;其文章, 則冠冕、珮玉之度。 早値明陵盛際, 蔚爲昭代名臣。 淸要遍敭, 而志在紛華之外; 是非必折, 而身遠黨私之中。 南民頌三閒之謠, 恰似趙閱道簡易之政;北虜謝一言之過, 何減富鄭公獻納之爭, 恩眷方隆, 朝夕作商家之雨; 弱齡未暮, 十三上歐陽之章。 遂以退急流之遐情, 益負仰高山之重望。 歸去林壑, 豈忘戀闕之忱; 閱來滄桑, 終驗保身之智。 當辛丑叶卜之日, 尙遲匹馬入洛之行; 逮先朝勵俗之治, 特垂一絲扶鼎之奬。 若其明良際遇之盛, 尤著諒闇入覲之初。 識面是求, 恩禮絶於常格; 執手以泣, 上下藹然至誠。 廾餘載更入修門, 嘉元老白髮丹心之無改; 一重字仰勉前席, 覺他人千言萬語之爲煩。 雖情志交孚, 勉循余致之懇; 而風期密勿, 不替倚毗之隆。 野舟自橫, 縱莫奪已行之志; 喬嶽能鎭, 亦豈無潛運之功, 治戊春莽伏之炳幾, 在耋年草跋之告急。 群凶連三道之勢, 忍言迫呼吸危; 一日踔五舍之程, 可見爲忠憤激。 不惟陰謀之早破, 賊膽自寒; 抑亦天討之亟行, 石畫是賴。 故其雲掃、電滅之捷, 卽在蝟起蜂合之時。 力亂元勳, 淸節冞著; 親製四字, 御墨維新。 果然前日同子陵之褒, 竟符後來高雲臺之烈。 貞坊寶閣, 燦乎雲漢之異光; 沁都孤帆, 飄然角巾之行色。 浮雲自任其舒卷, 大星遽墜其精芒。 九耋歸眞, 果神仙之不遠; 十三宣誄, 尤德業之可徵。 嗟! 老成邈矣遺風, 閔小子, 罹玆巨創。 流光昜邁, 滕廬之喪期已終; 中月奄臻, 周廟之合禘將擧。 惟是愼終追遠之擧, 莫重侑從; 倘非扶社救時之賢, 曷膺妙簡, 玆詢一國之公議, 爰屬三朝之篤人。 玆以卿配享英宗大王廟庭。 於戲! 想風雲而增感, 瞻禴祀而罔愆。 眷遇當時, 意常勤於召致; 奉衛今日, 理豈間於幽明, 庶享一體之明禋, 永垂萬年之冥佑。 【知製敎鄭志儉製進。】
左議政閔鎭遠敎書:
王若曰: “諒闇畢三年之制, 聿修陞祔之縟儀; 藎臣求一德之譽, 爰擧配食之彝典。 禮則然矣, 從與享之。 惟卿, 姿是美玉精金, 材則大廈隆棟。 世傳忠孝, 近襲父兄之遺風; 身佩安危, 早負公輔之重望。 眷眷於邦家興喪之兆, 勤勤於民心向背之幾。 菀爲士林所推, 豈以葭莩親相待, 或恐袞職有闕, 苟非堯、舜道不陳。 觀其容止、聲氣之間, 展也樂只君子。 及至獻可替否之際, 允矣毅然丈夫。 逮群孽之肆凶, 矢九死而靡悔。 風霜備嘗於嶺徼, 忍言讒口之交誣; 髭髮益勝於涪江, 可驗定力之冞確。 寶玉全經火之後, 益殫匪躬之誠; 金甌卜改絃之初, 允叶加額之望。 將伸《春秋》之大法, 獨扶天地之常經。 立朝四十年事業, 只以正君德、明敎化六字; 登筵屢百言奏箚, 專在辨聖誣、嚴懲討一端。 忠逆雜進於同朝, 沐浴而請; 薰蕕難容於一器, 去就以爭。 讜言不負其平生, 嗟! 蜮弩無時可已; 奸(骨)〔猾〕遽寒於未死, 雖螫毒亦奈我何, 當戊申起逆亂之辰, 始服先事之鑑; 至癸丑告余退之後, 靡懈戀闕之忱。 素操不渝於始終, 丹衷罔間於夷險。 何年起亡鑑之嘆, 展布未終於股肱; 至今痛稼木之災, 事業不朽於耳目。 龍亡虎逝, 久矣秦巷之罷舂;地坼天崩, 遽爾鼎湖之抱劍。 將行躋廟之禮, 載涓吉辰。 若論侑座之賢, 孰與元老, 況先朝嘗欲置於左右, 顧神道想無間於幽明。 玆以卿配享英宗大王廟庭。 於戲! 國典式遵, 卿烈愈著。 風雲際會, 旣昭融於生前; 香火薦禋, 合褒崇於身後。 同君臣於一體, 長侍竝冠之遊; 享芬苾於千秋, 重作霖雨之佐。 尙冀英靈之昭格, 永垂宗邦之冥休” 【知製敎沈有鎭製進。】
左議政趙文命敎書:
王若曰: “吉日擧陞祔之儀, 甫訖祥制; 淸朝重配食之典, 庸躋元臣。 猗! 明良相遇於當時, 故祭禮與同於今日。 惟卿, 山河間氣, 棟梁偉材。 文章, 如美玉、精金, 早歲魁蓮桂之榜; 風儀, 若瑞麟、祥鳳, 淸名動梧竹之扉。 自韋布而憂百年病國之源, 范文正願爲醫手; 在經幄而進萬言破朋之疏, 呂大防獨無黨心。 特立衆咻之中, 遂被再黜于外。 逮夫聖朝建五極之治, 嘉乃宗臣同一德之休。 嘗謂: ‘朋鹿傾軋之私, 必禍國家而後已。’ 乃以言議和平之故, 一埤時事而責成。 主詞垣而將五兵, 其本則文武吉甫; 由銓地而進三事, 其遇則魚水孔明。 作王室柱石之臣, 兼之以肺腑之托; 戡戊申梟獍之亂, 加之以帶礪之盟。 每以平昔廉約之心, 深懷權要巽避之意。 章牘懇摰, 屢引勳戚之嫌; 契合昭融, 遂佩安危之責。 酸醎甘辛之同歸調劑, 苦心血誠; 東西南北之無所偏陂, 大公至正。 韓稚圭之整笏, 國勢奠盤泰之安; 司馬公之持衡, 朝著靖朔蜀之鬨。 雖風波相搏, 而不能撓砥柱之標;雖水火懸殊, 而不能逃陶甄之手。 是以出入將相數三歲, 幾乎成就蕩平八九分。 殆一世止鬪室之戈, 亦群工趨推車之路。 猗歟! 五十年郅隆之化, 永貽建中之謨; 若其一二臣寅協之功, 亦賴倡始之論。 惟世運方回於一變, 嗟卿志未卒於半途, 遺章恨威顔之莫瞻, 亶由謹畏本性。 中宸對季方而每涕, 可見存沒殊私。 迨寡躬祗承丕基, 而遺風緬懷良弼。 翼室之歲月屢改, 那堪霜露之悲, 箕尾之精靈云遐, 益切霖雨之想。 玆當躋室之盛禮, 宜有侑座之彝章。 苟非股肱合德之臣, 曷膺芬苾同享之典, 輔佐歷數於昔日, 非乏臣隣; 遭逢最盛於先朝, 無出卿右。 玆以卿配享英宗大王廟庭。 於戲! 勳業愈煥, 典禮罔愆。 陪烝嘗於豆籩, 君臣一體; 侍陟降於殿桷, 風雲再逢。 精爽庶有依歸, 從衛宛如平素。 永侑春秋香火, 以保子孫黎民。 【知製敎林蓍喆製進】
領議政金在魯敎書:
王若曰。 芬苾重陪侑之禮, 庸修舊章; 風雲感際會之期, 聿陟良輔。 賢非后不食, 家與國同休。 唯卿, 王國藎臣, 相門賢子。 鄭康成專門之學, 早歲抗衛經之言; 范忠宣承家之譽, 餘事擅華國之藝。 心事質古人無愧, 律已以淸素謹謙。 才識, 濟當世有餘; 致用, 則聰明練達。 在下位, 而已負巍望。 事三朝, 而匪懈一心。 聯黨籍於辛、壬諸人, 劫火良玉; 捍賊鋒於東南一帶, 砥柱頹波。 雖時運屢變陂平, 而聖意冞勤眷注。 雄藩、度支之歷試, 展通才於錢穀、甲兵; 天官、司馬之迭居, 秉直道於銓衡人物。 典秩宗則宿昔之學不負。 登館閣則遜讓之志惟堅。 著茂績於錯節盤根, 上心簡在; 膺丕責於舟楫霖雨, 輿望翕然。 斤斤乎陰陽消長之幾, 義先雪四忠之枉; 戞戞乎酸醎調劑之際, 身老歷百變之艱。 匡拂一出於衷誠, 聖主稱其無隱; 謨猷必本於經術, 同朝賴以有稽。 蔚爲元祐完人, 巋然靈光古殿。 慈敎誦傳於筵席, 恰似蓮燭之殊榮; 像贊命題於畫綃, 奚讓雲臺之盛事, 一二臣共貞之地, 荷眷毗無出其前; 五十載郅隆之治, 秉勻軸殆居厥半。 年至謝事之請許, 遂求退素心; 身後隱卒之音至, 問臨喪舊例。 考其事業, 則昭載簡策。 言其際遇, 則弗替始終。 玆當皇祖躋祔之辰, 載修西所配侑之典。 若稽殷書之從與享, 崇報斯存; 亦越周官之詔大烝, 典禮攸重。 奉神御而入廟, 如覩昭于天之靈; 簡同德而配庭, 要盡愼其人之道。 肆衆論咸推碩輔, 而今日宜酬宗功。 玆以卿配享英宗大王廟庭。 於戲! 禴祀利成, 慟切駟隙之難及; 陪衛禮擧, 怳若魚水之重歡。 契合罔間於幽明, 感愴冞深於俯仰。 千秋血食之不絶, 冀格明神; 一體君臣之與同, 庶贊陰隲。” 【知製敎金憙製進。】
行事如儀。 祝文曰:
皇矣我祖, 巍乎蕩蕩。 大德必壽, 八秩以享。 功惟昭著, 恩則普被。 光前裕後, 高天厚地, 不弔降割, 眞遊夐邈。 祥禫雖闋, 情則難抑。 陞祔以時, 遵禮之常。 繄我文母, 在昔揚光。 月馭先晦, 懿德之配。 維考維妣, 洋洋如在。 承命從體, 同躋太室。 祔我烈祖, 昭穆秩秩。 籩豆旣陳, 鍾鼓斯皇。 其永有慶, 申鍚無疆。 焄蒿悽愴, 餘哀猶切。 降監在玆, 庶歆泂酌。 禮畢, 還宮。
정조 6권, 2년( 1778 무술/청건륭(乾隆)43년) 9월 10일 병신 1번째기사
부사직 강유가 도성의 방어, 군향미 저축등 국방에 대해 상소하다
부사직 강유(姜游)가 상소하기를,
“도성은 종묘사직이 있는 곳이고 인민(人民)들의 재화(財貨)가 모여있는 곳이므로, 이는 반드시 지켜야 할 땅인데, 의논하는 사람들은 모두 도성은 지킬 수 없다고 합니다.
옛날 임진년1440)과 병자년1441),정축년1442)의 난리를 당했을 적에도 번번이 버리고 갔으며, 이괄(李适)의 변란은 하찮은 역적이었는데도 또한 성을 지키지 않았었습니다.
일단 경급(警急)이 있으면 내가 먼저 동요하여 온 도성에 온통 전파되어 마침내 낭패를 당하였는데, 신은 일찍 계획을 세워 대비하지않은 것을 애석하게 여겼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선대왕께서는 나라의 대계(大計)를 깊이 유념하여 도성 사람들에게 도성은 굳게 지켜야 한다는 뜻을 효유(曉諭)하시고, 드디어 도성을 지키는 절목을 반하하셨으니, 아! 성대한 일입니다.
그러나 성첩(城堞)이 공고하지 못한 것이 다시 전일과 같아서 곳곳에 붕괴될 형세가 있고, 군향(軍餉)의 저축이 없는 것이 다시 전일과 같아서 간간이 칭대(稱貸)하려는 의논이 있으니, 이와 같고서야 어떻게 도성 백성들의 마음을 결집시켜 굳게 지킬 수 있는 계책을 삼을 수 있겠습니까?
강도(江都)는 해마다 성을 수축하면서 도성에 대해서는 태연히 마음을 쓰지 않고 있으며, 남한(南漢)은 해마다 계산하여 곡식을 저축하고 있으면서 도성에는 전혀 남는 저축이 없습니다.
신이 감히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도 오히려 도성은 지킬 수 없고 강도나 남한은 뒷날 진양(晉陽)1443)이 될 수 있다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까?
강도는 사면이 바다로 둘러 싸여 있어서 진실로 육지의 구적(寇賊)을 방어하기에는 이롭지만, 삼면에 배를 정박할 수 있어서 해구(海寇)를 방어하기에는 불리하니, 이는 긴급할 때 반드시 귀의할 수 있는 곳이 못됩니다.
남한은 산세(山勢)가 외따로 떨어져 있어서 군량의 운반을 계속하기 어려운 염려가 있으며, 성안이 비좁아서 많은 군병을 수용하기 어려운 걱정이 있으니, 이곳은 오래도록 지킬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신의 계책으로는 전적으로 도성에만 마음을 쓰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으며, 또 미리 성을 지키는 방책을 강구하고 군향미(軍餉米)를 많이 저축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고 여깁니다. 신은 먼저 성을 지키는 방도를 말씀드리고 그 다음으로 곡식을 저축하는 방도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의논하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도성은 둘레가 매우 넓어서 지킬 수 없고 동남쪽이 험조(險阻)하지 않아서 지킬 수 없다’고 합니다만, 이는 모두 형세만 보고 성을 지키는 방도를 모른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도성은 둘레가 1만보가 못되고, 또 목멱산(木覓山), 인왕산(仁王山), 백악산(白嶽山)이 굳게 삼면을 막고 있으며, 천연적으로 험준한 북한(北漢)이 외부의 성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유독 동쪽과 남쪽의 두 방향에는 말할 만한 험조한 곳이 없습니다마는, 중국의 들판에 있는 성과 견주어보면 험조한 성입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우리나라 사람들은 인심이 함께 성을 지킬 수가 없다’고 합니다만, 진실로 성을 견고하게 하고 군량을 저축해 놓은 다음 사람들이 모두 성을 지키면 반드시 살고, 성을 버리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호월(胡越)1444)이 같은 성에 있더라도 또한 당연히 한마음이 될 것입니다. 더구나 열성조의 깊은 인애(仁愛)와 두터운 은택이 도민(都民)들의 마음에 두루 미치어 있는데다가 또 성을 지키면 살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무슨 성을 지키지 못할 염려가 있겠습니까?
단지 군향미의 저축이 없고 성첩이 견고하지 못한 것이 걱정일 뿐입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도성의 허술한 곳은 개축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깁니다. 이는 신의 말이 아니라 선배들도 이미 이런 의논을 많이 했었습니다.
옛날 숙묘조(肅廟朝)때의 고 상신 이여(李畬)가 도성을 수축할 것을 건의하고 성첩을 두루 순시하면서 완급(緩急)과 원근(遠近)을 헤아려 오군문(五軍門)에 나누어 주어 각각 비용을 절약하고 마음을 다해 수축하게 하기에 이르렀는데, 그가 말하기를, ‘논하는 사람들은 도성이 넓은 것을 병통으로 여기고 있지만, 이는 외로운 군대가 위급한 때에 들어가서 보존하는 경우와는 같지 않다. 임금이 만백성과 함께 같이 지키려면 형편상 협소해서는 안되는 것이다’하였습니다.
유성룡(柳成龍), 정경세(鄭經世), 이정귀(李廷龜)도 모두 도성은 반드시 지켜야 할 곳이라고 여겼는데, 유성룡은 수구문(水口門)밖에 치첩(雉堞)을 설치하고자하여 즉시 돌을 모았었으나, 조정의 의논이 분분한 것으로 인하여 중지하였습니다. 이정귀는 도성을 증축하려 하면서 10년을 기한으로 삼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몸소 변고(變故)를 겪으며 이로운 점과 병통이 되는 점을 직접 보았으니, 규획(規畵)한 바가 어찌 우연한 것이었겠습니까?
그의 소장에는 거의 수백 마디의 말이 있었습니다만, 조정의 의논이 끝내 담당하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구획(區劃)은 이미 정하여 놓고서 일은 마침내 중지되고 그만두었으니, 애석한 일입니다.
대저 성을 쌓는 역사(役事)는 오로지 경조(京曹)에 맡겨야 하는데, 매양 감당하기 어려운 걱정이 있었으니, 중도에 중지하는 것은 사세가 진실로 그러했었습니다. 신의 말대로 행한다면 저절로 점차 완성할 방도가 있을 것이니, 신이 하단에 헤아린 것이 있습니다.
신은 삼가 괴이하게 여기는 바가 있으니, 대저 도성밖의 여덟 문에는 모두 문을 지키는 군사가 있는데, 유독 성을 순찰하는 군사가 없고, 여덟 문은 석축(石築)이 이미 견고하고 철문(鐵門)이 또 견고한데도 오히려 군사를 시켜 지키게 하면서 성은 단지 주먹만한 돌로 포개어 쌓았을 뿐인데도 순찰하는 사람이 없으니, 소홀히 하고 엄밀히 하는 것이 도치(倒置)되었으므로 신은 삼가 애석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마땅히 성을 순찰하는 군사를 배치해야 한다고 아뢰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국력(國力)은 저 피중(彼中)에서 성을 지키는 군사를 많이 배치하는 것처럼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2백보마다 2인씩을 배치한다면, 도성이 1만보이니 마땅히 1백인으로 나누어 배치할 수 있습니다.
만약 혹, ‘태평한 때에 어찌 성을 순찰할 필요가 있겠느냐?’하고, 또, ‘1만 보에 1백인을 배치한다면 힘입을 것이 없다’고 한다면, 무릇 국가에서 설치하는 일이 있을 경우 어찌 반드시 이런 일이 목전에 박두해 있어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참으로 국가를 위하는 방도에 있어서는 대비가 없을 수 없습니다. 작년에 군포군(軍舖軍)이 흉적을 체포한 것이 어찌 군포군을 설치한 공효가 아니겠습니까?
대저 1만보가 되는 성을 1백인이 순찰하는 것은 참으로 적은 것같습니다만, 각 군문의 초관(哨官)에게 2천보씩 맡게하여 5일마다 번(番)을 바꾸게 하고, 순성군(巡城軍)으로 하여금 경(更)마다 성을 순찰한 후에 생(栍)을 영장(領將)에게 바치게 하여 그 근만(勤慢)을 상고하게 한다면, 무사하게 될 수 있습니다.
대저 성축(城築)이 낮에 무너지는 경우에는 금송군(禁松軍)에게 책임을 지우지만, 밤에 무너지는 경우에는 밤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되니, 이는 매우 허술한 일입니다.
이제 순성군을 설치한다면 밤에 무너지는 것도 즉시 방수(防守)할 수 있고, 설령 뜻밖의 염려할 만한 형세가 있더라도 또한 즉시 대비할 수가 있으므로, 1백인이라도 또한 된다고 한 것입니다.
성을 순찰하는 규례는 마땅히 낮에는 나가고 밤에 입직하게 하되, 한 사람이 밤마다 성을 순찰하는 것은 감당할 수 있는 역사가 아니니, 고가(雇價)는 1백인으로 액수(額數)를 정하더라도 2백인에게 1망(望)1445)씩의 고가를 나누어 주고 5일에 한 번씩 교대하게 한다면, 매달 한 사람이 1망씩 번을 감당하게 됩니다.
고가는 궐내 고립군(雇立軍)의 예에 의거하여 매달 4냥(兩)씩 지급하도록 정하여 1인이 1망의 번에 대해 각각 2냥씩 받게 한다면, 2백인이라고 하더라도 번들어 성을 순찰하는 사람은 단지 1백인이 되고, 응당 고가(雇價)를 지급해야 할 사람도 또한 1백인이 됩니다.
이렇게 한 다음 2천보마다 책목(柵木) 1천매(枚)를 비치하게 한다면 1만보 안에 마땅히 다섯 곳이 있게 될 것이고, 다섯 곳에 비치된 것이 마땅히 5천 매가 될 것입니다. 진실로 성을 지킬 때를 당하여 1백 보마다 50매씩 나누어 비치하고, 성축이 무너질 근심이 있을 경우 부근에 있는 책목을 운반해서 가로질러 막는다면, 도적이 성아래에 있다고 할지라도 쳐다보고 공격할 수 없을 것이고, 우리 군사들은 아래를 공격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옛날의 사서(史書)를 두루 살펴보건대, 무너진 성을 목책으로 보전할 수 있었던 경우를 명백하게 상고할 수 있습니다. 만일 목책을 미리 준비해 두지 않는다면 어떻게 급할 때 취판(取辦)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삼가 생각하건대, 성을 지키는 도구 가운데 목책을 미리 준비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고 여깁니다. 성을 순찰하는데 드는 돈과 목책을 비치하는 방도에 이르러서는 신이 또한 하단(下段)에 헤아린 것이 있습니다.
신이 듣건대, 성을 견고하고 두껍게 쌓고, 사민(士民)들이 땔감을 준비하고 음식을 지급받을 수 있으면 이것이 바로 지키는 방법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군사가 이미 오랫동안 머물러 있으며 양식도 없게 되면 백성들이 원망하게 되는데, 이는 위에서 제지할 수가 없다’고 했으니, 이를 통하여 살펴본다면, 성을 지키는 방도는 오직 군량을 저축하는데 달려있으니, 군량은 바로 융정(戎政)의 급선무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도성의 군량은 전혀 남은 저축이 없고 군병의 방료(放料)도 겨우 신년(新年)과 구년(舊年)을 서로 이어갈 수 있을 정도이니, 을미년1446) 봄에는 혜청(惠廳)의 쌀을 빌려다가 지급하려 하기에 이르렀었습니다.
돌아보건대, 지금의 국계(國計)는 한심하다고 할 만하니, 환난을 미리 방비하는 일을 어찌 조금이라도 늦출 수가 있겠습니까?
신이 삼가 성을 지키는데 대한 절목을 살피건대, 이미 삼문(三門)밖의 백성들은 모두 성을 지키는 항오(行伍)에 편입시켰으니, 혹 성을 지킬 때를 당하게 되면 문 밖의 백성들을 또한 거두어 성안으로 들어오게 해야하는데, 사세는 당연히 국가에서 먹여주기를 우러러 바랄 것이니, 성안에 사는 백성들도 장차 음식을 구할 데가 없게 될 것입니다.
작년에 성문을 겨우 며칠동안 닫아 두자마자 성안에서는 이미 곡식값이 등귀하는 걱정이 있었습니다. 혹 성을 지켜야 할 때를 당하게 되면 성안에 사는 백성들의 곡식도 또한 조정에서 걱정해야 되는데, 신은 감히 모르겠습니다만, 혜청의 대동미(大同米)와 각창(各倉)의 군량미가 이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또 더구나 군병들의 요미(料米)로서 강가에 저장되어 있는 것은 또한 가져다 쓸 수가 없으니, 장차 어떻게 계책을 삼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숫자와 곡식의 숫자를 걸맞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는데, 사람의 숫자와 곡식의 숫자를 걸맞게 하려면, 군병들의 평소의 요미(料米) 이외에 따로 10만석을 저축해야 가까스로 8만명이 3개월동안 먹을 수 있는 식량이 됩니다.
도성의 사람은 8만명뿐만이 아니라 10만석이 있어도 오히려 부족하다는 걱정이 있는데, 이 또한 우리나라의 세입(歲入)으로서는 판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구전(舊典)을 수명(修明)하여 각 궁방(宮房)에서 절수(折受)한 것 가운데 환납(還納)한 결수(結數) 또한 혹 애과(捱過)할 수도 있으니, 신은 삼가 생각건대 환납한 결수는 우선 오군문에 주어서 10만석을 충당하게 한 뒤에 탁지(度支)에 돌려보내어 경용(經用)을 보충하게 하여도 또한 늦지 않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각종 공물(貢物)과 각종 군료(軍料)를 한 해 걸러 한 번씩 군향미(軍餉米)로 지급하고, 혜청의 쌀가운데 군병들의 요미(料米)로 새로 받은 것을 그 숫자에 충당시켜 유치하여 놓음으로써 묵은 것은 쓰고 햇곡식은 저축한다면, 어찌 개색(改色)1447)할 길이 없음을 근심하겠습니까?
신이 이미 곡식을 저축하는 방도에 대해 논하였으니 습조(習操)에 대한 이야기를 진달하겠습니다. 한(漢)나라의 신하인 조조(鼂錯)는 말하기를, ‘군병들이 무예를 익히지않으면 장수(將帥)를 적군에게 내주는 것이 된다’하였습니다. 봄, 가을로 조련(操鍊)하게 한 법의(法意)는 매우 중대한 것인데, 종래에는 안으로 각 군문과 밖으로 여러 도신들이 군병들의 폐단을 염려하여 번번이 조습을 정지하였으니, 이것이 목전의 은혜는 되겠지만 결국은 고식적인 정사를 면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신은 평일에 그에 대한 폐단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습은 결단코 폐지할 수 없다고 여겨 왔었습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우리 전하께서 혁연(赫然)히 진쇄(振刷)하여 안으로는 각 군문에서 매달 으레 습조하게 하고 밖으로는 각도에서 봄,가을로 합조(合操)하게 하는 것을 한결같이 정제(定制)에 의거하여 수거(修擧)하였으니, 신은 실로 찬탄하여 마지않았습니다.
생각건대 향군(鄕軍)의 폐단에 대해서도 오히려 진달할 것이 있습니다.
대저 군병의 폐단은 수고로운 것뿐만 아니라 조습할 때 드는 허다한 비용과 먼 곳을 왕래하는 것을 감당하기 어려운 것에 있습니다.
옛날에는 군병을 농정(農政)에 붙였었기 때문에, 64정전(井田)에서 융거(戎車) 1승(乘), 갑사(甲士) 3인, 보졸(步卒) 72인을 갖추어 내게 했었으니, 그렇다면 같은 정전안의 사람들마다 모두 군병이 되는 것이 아니고 단지 같은 정전안에서 자신의 재력(財力)을 내어 군병을 도왔던 것입니다.
대개 군병이란 이미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평민(平民)들을 호위하는 것이니, 평민 또한 마땅히 자신의 재력을 내어 군병을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한가롭게 노는 자들이 군병을 위해 터럭 하나도 뽑지않으려 하므로, 조습할 때를 당하여 비용이 매우 많지만 서로 돕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불쌍한 저 단속하는 군사는 평시에도 드는 비용이 치우치게 과중한 것을 두려워하는데, 어떻게 긴급할 때 힘이 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옛 동정의 제도를 행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대략 그 법규를 모방하여 군병이 조습에 나아갈 때를 당해 그가 살고 있는 동리(洞里)에서 명색(名色)을 논할 것이 없이 적당히 헤아려 분배하여 재력을 거두어 모아 군비를 돕게 한다면, 농사와 군사가 서로 의뢰하는 방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인심은 고상(故常)에 익숙해져 새로운 법령을 내리기만 하면 마구 이의를 제기하여 일을 미처 시작하지 아니하여 폐단이 뒤따르니, 신은 행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도 부득이하다면 그 폐단을 바로잡고 그 비용을 돕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신이 듣건대, 태공(太公)이 전법(戰法)을 가르치는 내용에, ‘한 사람이 전법을 배우면 그 사람이 10인을 가르쳐 완성시킬 수 있고, 10인이 전법을 배우면 1백인을 가르쳐 완성시킬 수 있고, 1백인이 전법을 배우면 1천인을 가르쳐 완성시킬 수 있고, 1만인이 전법을 배우면 삼군(三軍)의 군대를 모아서 가르쳐 완성시킬 수 있다’하였으니, 이로써 말해 본다면 반드시 각 고을의 군병을 다 모아서 절도사(節度使)로 하여금 합조(合操)하게 한 후에야 전법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은 대부분 폐단이 있습니다만 유독 보갑법(保甲法)만은 병가(兵家)의 유의(遺意)를 깊이 체득한 것이니, 시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제도를 다 따를 필요는 없고, 병서(兵書)를 참고해서 대략 변통을 가하여 봄에는 각 고을로 하여금 감영, 병영에서 장문하여 관문(關門)을 보내기를 기다렸다가, 영교(營校)와 함께 안동(眼同)하여 한 고을의 군병을 단속하고, 10인 1백인, 1천인에게 전법을 가르치는 법규에 의거하여 각자 본읍에서 조련하게 하고, 가을에는 절도사가 비로소 전례에 의거하여 합조(合操)하게 한다면, 봄, 가을로 합조하지 않더라도 군병을 조련할 수 있고, 또한 군병들이 한 번 먼 곳을 왕래하는 데 드는 비용을 덜 수 있으니, 이것이 군사의 폐단을 바로잡는 한 가지 방법인 것입니다.
조습할 때에는 으레 군병들에게 호궤(犒饋)하는 것이 있는데 이는 실로 군병을 위로하는 뜻이며, 또 시사하여 상을 주는 것이 있는데 이 또한 장수와 군사들을 격려하여 권면하는 뜻인 것입니다.
이 법이 아름답지않은 것은 아니지만, 도리어 군병들의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대개 군병들은 조습을 파하고 난 뒤에는 모두 즉시 돌아가는 것이 편하지만, 이에 호궤와 시사때문에 즉시 돌아가지 못하는데, 결국 호궤할 때 받는 음식은 모두 헛되이 소모하는데로 돌아가고, 상격(賞格)을 시행하는 것 또한 실효가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호궤는 으레 한 사람마다 쌀 다섯 되가 되는데, 봄, 가을 호궤하는데 드는 쌀이 한 말이니, 상격에 드는 비용까지를 합쳐 모두 쌀로 지급해 주고서 호궤하는 예를 없애는 것을 영원한 정식으로 삼아야 된다고 여깁니다. 군병들이 습조에 나아갈 때를 당하여 각자 그 고을에서 이 쌀을 먼저 내주게 하면, 군병들이 왕래하는데 드는 비용을 도울 수 있고, 또한 조습을 파한 뒤에 지체하는 폐단을 없앨 수 있으니, 이는 군비를 돕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봄의 조습을 정지한다고 하더라도 또한 충분히 군병을 조련할 수 있고 먼 곳을 왕래하는 폐단을 없앨 수 있습니다. 한 말의 쌀이 적지만 또한 충분히 비용을 도울 수 있고, 조가(朝家)에서 진휼(軫恤)하는 뜻을 보일 수 있으니, 이렇게 하면 군병들의 환심을 살 수 있습니다.
마병(馬兵)에 이르러서는 그 폐단이 더욱 극심합니다.
마군(馬軍)이 그들 스스로 어떻게 전마(戰馬)를 마련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습조를 당해 태반이 말을 세내어 감당하고 있는데, 말이 없는 군사를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사람과 말은 서로 균형을 이룬 후에야 쓸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평시에 말을 준비하여 네 발굽을 조심성 있게 딛게 하고, 그 성질에 알맞게 길들여 사람은 말의 성질을 알고, 말은 사람의 뜻을 알게 된다면, 진(陣)에 임하여 물어뜯는 걱정이 없고 싸울 때를 당하여 거꾸러질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마군은 급할 때에 말을 세내어 타고 있으므로, 긴급할 때를 당해서는 진실로 말을 준비할 길이 없으며, 설혹 말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말의 성질을 모르고, 말은 사람의 마음을 몰라서 거꾸러지는 일이 금방 닥치게 되니, 전마를 미리 갖추는 것이 곧 병가(兵家)의 급선무인 것입니다.
아! 신이 전후에 진달한 것을 채택하여 시행해 주기를 바라기는 어렵지만, 혹 한두 가지 쓸 만한 것이 있는데, 소용되는 재력에 이르러서는 참으로 판출해 낼 데가 없습니다.
오로지 전교(傳敎)가운데 용병(冗兵)을 사태(沙汰)시키게 한 것은 군제(軍制)를 장건하게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재용(財用)을 넉넉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옛날 천승(千乘)의 나라에도 갑사(甲士)가 단지 3천인이고 보졸(步卒)이 겨우 7만여인이었는데 우리나라는 속오군(束伍軍)만으로 말하더라도 19만인에 이르도록 많습니다. 옛날에는 임금이 단지 2천8백80인의 군병만을 먹였는데, 우리나라는 도하(都下)에서 양성하고 있는 군사가 몇 명이나 되는지 신이 상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거의 1만인에 이른다고 합니다.
각도의 속오군은 구차스럽게 액수를 충당하고 있어서 노약자(老弱者)가 뒤섞여 있고, 도하의 군병들은 부질없이 늠료(廩料)만 허비하는 것은 물론 간간이 용렬한 사람도 끼어 있습니다.
따라서 군제(軍制)를 강건하게 하지 못하고 국가의 비용을 헛되이 소모시키는 것은 오로지 군액(軍額)이 너무 많은 것으로 말미암고 있습니다.
후주(後周)의 세종(世宗)이 말하기를, ‘군병은 정예롭게 하는데 힘써야 하는 것이요 숫자를 많게 하는데 힘써서는 안된다’하고, 이에 여러 군사들을 크게 간추려 정예로운 자들은 승진시켜 올리고 나약한 자들은 물리쳤습니다.
세종 때를 당하여 국토가 매우 넓어서 적국(敵國)이 많았지만 능히 작은 군대로 많은 군대를 대적하여 가는 곳마다 모두 승리를 거두었으니, 이것이 군병은 숫자가 많은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정예롭게 하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지금 속오군가운데 보군(步軍),마병(馬兵),잡색군(雜色軍)을 지방관으로 하여금 각각 4명가운데 1명을 제감(除減)하되, 그 파기(疤記)1448)에 의거하여 직접 몸소 간심(看審)해서 건장하고 성실한 사람을 선발하게 한다면 줄일 만한 노약자가 마땅히 4만8천인이 되겠지만, 건장하고 성실한 사람이 오히려 15만 명에 가까운 것이니, 군병이 많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노약자로서 제감된 자는 대오(隊伍)에서 뽑아내어 해마다 1냥씩 바치게 한다면, 거의 해마다 낭비하는 반이 될 것이니, 그들도 반드시 기꺼이 따라 원망하는 말이 없을 것입니다.
비록 제감했다 하더라도 면역(免役)만 시키고 명목을 여정(餘丁)이라 하여 전대로 군적(軍籍)에 입속(入屬)시켜서 약한 사람은 점차 나아지기를 기다렸다가 5년마다 다시 간열(簡閱)하여 점차 건실한 군병으로 올리게 한다면, 조가에서는 군액(軍額)의 원수를 잃지않게 되고, 또 한편으로는 조습할 때 호궤(犒饋)하는 쌀 4만8천두(斗)를 줄일 수 있으며, 변란을 당해서는 또 성을 지키거나 군량을 운반할 때 전체를 징발해 붙일 수 있게 됩니다.
경군(京軍)에 이르러서는 이들이 모두 오로지 요포(料布)만 의뢰하고 있으니, 하루아침에 모두 사태(沙汰)하여 그들의 마음을 잃게 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서울은 근본이 되는 곳이니 속오군의 액수를 감하라는 것처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각 군문으로 하여금 궐원(闕員)이 나면 보충하지말게 하여 20명가운데 1명을 줄인다면, 줄어드는 인원이 거의 5백명에 가까울 것입니다. 5백 명을 줄이는 것이 너무 줄이는 듯하지만 각 군문에 분배하여 번들 때마다 각처에 입직하게 한다면, 많고 적은 것이 전에 견주어 매우 서로 현격한 차이가 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5백명분의 요포(料布)가운데 국용(國用)에 쓰이는 것은 쌀이 4천곡(斛)에 가깝고 베가 근 4천필(疋)에 가까운데, 돈으로 계산한다면 마땅히 수만여냥이 될 것이며, 속오군이 바치는 것도 또한 4만8천냥이 될 것입니다.
함경도는 속오군이 2만8천여인이니, 4분의 1을 바치는 것이 마땅히 7천여 냥이 되는데, 본도에는 원래 각종의 상납하는 법규가 없으니, 이를 해당 고을에 받아서 유치시켜 놓고 우선 마병(馬兵)들의 말을 사는 데 쓰게 하소서. 평안도는 속오군이 2만2천여명이니, 이 또한 북도(北道)의 예에 의거하여 바치는 돈 5천5백냥을 제외하고 나머지 유치하여 말을 사는 값으로 쓰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서북(西北) 두 도는 1만2천5백냥을 제외하고 그 나머지 3만5천5백냥은 모두 도하로 실어와서 먼저 이것을 옮겨다 성을 쌓는 비용으로 쓰고 경영문(京營門)에서 감면한 돈으로 해마다 보충하게 한다면, 해마다 5백보(步)의 성을 쌓을 수 있으니, 이렇게 10여년을 하면 도성의 허술한 곳을 죄다 쌓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한 다음 이를 옮겨서 말을 사는 비용에 충당한다면, 해마다 2천 필의 말을 준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군(馬軍)의 원수(元數)는 모두 합쳐 2만6천여인인데, 4분의1을 줄인다면 1만8천5백여인이 됩니다. 말 한마리의 값이 30냥을 주어야하니, 겨우 8년 뒤에는 1만8천5백필의 말을 준비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20년을 기한으로 삼는다면 성을 다 쌓을 수 있고 말도 다 준비할 수 있습니다. 그런 뒤에 또 이를 영문에 유치하는 재화(財貨)로 만들어 둔다면, 성이 무너지는 대로 보수하고 말이 죽는 대로 사서 보충시키는 데 또한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국가가 바야흐로 억만년토록 끝없는 아름다움을 기약하고 있으니, 20여년의 공력이 더디고 오래가는 일인 것같지만, 태산반석같은 안전함을 끝없는 후세에 전할 수 있으니,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이것을 할 수 없는 일로 여긴다면, 또 각도에 있는 조가의 전재(錢財)를 가져다 써야 합니다. 대개 각도의 감영,병영,수영,통영과 송도(松都)에 있는 것은 뒷날 뜻밖에 생기는 환난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고 또한 각처의 공용(公用)에 충당하기 위한 것이지만, 근본이 되는 계책에 견주어 본다면 또한 경중의 차이를 말할 수 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각도에 소재해 있는 돈의 다과를 헤아려 이를 나누어 정하고, 해마다 2만냥씩 가져온다면 해마다 3백보(步)의 성을 축조할 수 있게 됩니다. 더구나 기영(箕營)에서는 매등(每等)에 별도로 준비하는 돈이 5만냥이니, 간혹 기영에서만 가져와도 또한 2만냥의 숫자는 준비할 수가 있습니다.
만일 각처의 전재(錢財)에 이름은 있지만 실제로는 없는 그런 폐단이 있어 계속 잇대어 쓰기 어려운 점이 있다고 한다면, 또 마땅히 저치미(儲置米)나 환곡(還穀) 가운데에서 변통하면 됩니다. 국력이 부족하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외방 고을의 환곡에 대해 의의(擬議)할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의 환곡은 도리어 백성들의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미곡(米穀)이 많은 고을에서는 백성들이 원하지 않아도 또한 억지로 지급하여 주므로 농가에서 1년에 수확하는 곡식이 응당 바쳐야 하는 숫자를 감당할 수 없는데, 해마다 이렇게 하다가 보면 결국 가산을 탕진하고 마니, 이런 경우에는 곡식이 적은 고을에 이송하여 지급하게 하는 것이 가장 편하고 좋은 방법입니다.
각도의 도신으로 하여금 곡식이 많은 고을을 조사해서 곡식이 많은 고을은 해당 고을에서 경용(經用)에 충당하고 있는 저치미를 환곡으로 충당하게 하였다가, 저치미(儲置米)는 돈으로 만들어 상납(上納)하게 하되, 6천석을 한정하여 처음 분정한 고을에서 가져오게 하면, 또 도리어 미곡이 귀하게 되는 걱정이 있을 것인데, 그때에는 해도(海道)에서 다시 곡식이 많은 고을을 조사해서 이송하면 환곡의 다과를 균일하게 하고 조가의 수용(需用)에 응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성을 축조하는 역사가 끝나기를 기다려 드디어 중지하면, 일국의 허다한 곡물을 가지고 해마다 6천석을 가져다 쓰는 것에 무슨 어려울 것이 있겠습니까?
만일 각도의 전재(錢財)와 각 고을의 저치미는 경도(京都)에서 옮겨다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신은 그 점에 대해 의혹스러움이 있습니다.
송(宋)나라의 신하 유공(劉珙)은 말하기를, ‘형주(荊州),양주(襄州)는 사지(四肢)이고 조정은 복심(腹心)이요 원기(元氣)이다’했는데, 이제 원기를 갖출 것은 걱정하지 않고 사지가 건강하지 않은 것만 걱정한다면, 이는 신이 감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각도는 사지이고 도성은 곧 복심인데, 만일 각도의 처지만 위하고 도성을 위한 계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유공부(劉共父)1449)가 애석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아! 지금의 국력은 참으로 손댈 수 있는데가 없는데 군액(軍額)을 변통시킬 수 없다면, 성을 축조하는 역사 또한 조가에서 마땅히 걱정해야 됩니다.
말을 사는 한 가지 일은 사세상 서서히 의논해야 됩니다. 순성군(巡城軍)에게 들어가는 4천8백냥은 신이 듣건대 균역청에서 해마다 남는 것이 거의 1만의 숫자에 가깝다고 하니, 이것을 가져다쓰면 또한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목책(木柵)을 비치하는 방법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기둥이나 들보감의 재목이 아니므로 산협(山峽)에서 가져오게 한다면 무슨 판비하기에 어려움이 있겠는가 싶어 이렇게 망령된 말을 하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나무가 우거진 곳은 간사한 도적이 숨는 곳이요 또 운제(雲梯)와 비루(飛樓)는 바로 성을 공격하는 도구이니, 지금 이 도성밖에 수목이 우거진 것이 병가(兵家)에서 꺼리는 것이 아닌 줄 어찌 알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도성에서 가까운 수목가운데 나무의 높이가 성과 같은 것을 채취해서 책목(柵木)에 보충해도 또한 불가할 것이 없다고 여기는데, 일차 판비(辦備)하여 창고를 지어 저장하여 두면 1백여 년은 지탱할 수 있습니다. 인가(人家)의 재목이 혹 수백년동안 전해져도 썩지않는 것은 잘 저장한 소치인데, 이는 1백년에 한 번 다시 판비하면 되는 것이니 무슨 계속하기 어려움이 있겠습니까?”하니, 묘당에 명하여 품처하게 하였다.
註1440]임진년:1592 선조25년 註1441]병자년:1636 인조14년 註1442]정축년:1637 인조15년 註1443]진양(晉陽):조(趙)나라 임금 조양자(趙襄子)가 지백(智伯)에게 쫓기던 중 신하들은 장자(長子)가 가깝고 성이 견고하니 그곳으로 피하자고 하였으나, 이를 듣지않고 일찍이 윤탁(尹鐸)이 부임하여 관대한 정치로 민심(民心)을 무마시켜 놓은 진양으로 돌아가 회복의 터전을 잡았음. 곧 보장(保障)이 될 수 있는 곳이라는 뜻임 註1444]호월(胡越):중국 북쪽의 호(胡)나라와 남쪽의 월(越)나라라는 뜻으로, 호나라는 북쪽, 월나라는 남쪽에 있었으므로, 서로 멀리 떨어져 있거나 소원(疏遠)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임. 註1445]1망(望):15일.
○丙申/副司直姜游上疏曰:
都城, 乃宗廟社稷之所在, 人民財貨之所萃。 此爲必守之地。 而議者皆以爲都城不可守。 昔當壬辰、丙丁之亂, 輒委而去之。 适變, 小醜, 而亦不城守。 一有警急, 我先搖動, 滿城波蕩, 終致狼狽。 臣當惜其爲計之不早也。 惟我先大王, 深惟國之大計, 曉諭都人, 以固守都城之意, 遂頒下守城節目。 掎歟盛哉! 然而城堞之不固, 猶復前日, 而在在有崩潰之形;軍餉之無儲, 猶復前日, 而間間有稱貸之議。 如是而何以繫都民之心, 爲固守之計乎, 江都則連年築城, 而都城則恬不爲意; 南漢則計年儲穀, 而都城則全無餘蓄。 臣不敢知, 今亦猶以爲都城不可守, 而江都、南漢, 則爲他日之晋陽乎, 江都則四面環海, 固利於禦陸寇。 而三面泊船, 不利於禦海寇。 此非緩急必歸之地。 南漢則山勢孤絶, 糧運有難繼之慮。 城內挾窄, 多兵有難容之憂, 此非持久可守之地。 以臣計之, 莫如專意於都城。 則又莫如預講守城之策, 多儲軍餉之米。 臣請先言守城之道, 次言儲穀之道。 議者曰: ‘我國都城, 周回甚闊, 不可守也。 東南不險, 不可守也。’ 此皆只見其形, 而不知守城之道也。 我國都城, 則周回不滿萬步。 又阻以木覔、仁王、白嶽三面之固, 連以北漢天險外府之城。 獨東南兩隅, 雖無險阻之可言, 而比之於中原野城, 則乃負險之城也。 或曰: ‘我東人心, 不可與守城。’ 而苟使城堅而糧積, 人皆知, 守城必生、去城必死。 則雖使胡越同城, 亦當一心。 而況列聖朝深仁厚澤, 浹於都民之心。 又知其守城而可生, 則豈有不可守之慮乎, 特患軍餉之無儲、城堞之不固耳。 臣竊以爲: ‘都城踈虞處, 則不可不改築也。’ 此非臣之言, 前輩, 已多有此議矣。 昔在肅廟朝, 故相臣李畬建議, 修築都城。 至於巡視城堞, 量緩急、遠邇, 而分授五軍門, 使各節省, 專意築之。 其言曰: ‘論者以城闊爲病。 而此與孤軍臨急入保者不同。 國君與萬民共守, 則勢不可狹小。’ 柳成龍、鄭經世、李廷龜, 皆珥城爲必守之地。 成龍欲設雉於水口門外, 卽聚石。 因朝論紛紜而止。 廷龜欲增築都城, 期以十年。 數臣身經變, 故目見利病, 其所規畫, 豈偶然哉, 其疏, 殆累百言。 廷議終無擔當者, 區畫已定, 而事遂已惜乎, 凡築城之役, 專委於京曹。 而每有難當之憂, 則中止之勢, 固然也。 行臣之言, 則自有漸次就完之道, 臣有商量於下叚者。 臣竊怪夫都城外八門, 皆有守門軍, 而獨無巡城軍也。 八門, 則石築旣堅, 鐵門又固, 而猶且以軍守之。 城築, 則只是拳石之相累者, 而無人巡視, 踈密倒置, 臣竊惜之。 故曰, 當置巡城軍。 我國國力, 雖不能若彼中之多置守城軍。 而每二百步二人, 則都城萬步, 當以百人而分排矣。 如或以爲: ‘平時, 何必巡城爲哉,’ 又以爲: ‘萬步百人, 無所賴焉。’ 凡人國有所設置者, 豈謂必有是事之迫在目下而爲之哉, 誠以爲國之道, 不可以無備也。 昨年, 軍舖軍之捉得凶賊者, 豈非置軍鋪軍之效乎, 夫以萬步之城, 而巡之以百人者, 誠若稀踈。 而每二千步領之, 以各軍門哨官, 使之五日替番, 使巡城軍, 逐更巡城後, 納栍於領將, 考其勤慢, 則足以報無事矣。 夫城築之當晝頹圯者, 雖責之於禁松軍。 而當夜頹圯者, 每於經夜後始知之, 此甚踈漏。 今若置巡城軍, 則當夜之頹圯, 卽可以防守之。 設有意外可慮之形, 亦得以卽備之, 故曰雖百人, 亦可矣。 巡城之規, 當晝出夜直, 而一人每夜巡城, 則此非可堪之役。 雇價, 則雖以百人定額, 而使二百人分受, 一望雇價, 使之五日替當。 則每朔一人, 當爲一望番矣。 雇價, 則依闕內雇立軍之例, 每朔定給四兩, 而每一人一望番, 各受二兩。 則雖曰二百人, 而每番巡城者, 只爲百人, 雇價應下者, 亦爲百人。 然後, 每二千步備置柵木千枚。 則萬步之內, 當爲五所。 五所所置者, 當爲五千枚。 苟當守城之時, 每百步分置五十枚。 如有城築頹圯之患, 則運致附近柵木, 而橫遮之。 則盜雖在下, 無以仰攻, 而我兵則可以下攻矣。 歷觀前史, 毁城之以柵得全者, 班班可考。 如無柵木之預備者, 則其何以倉卒取辦乎, 臣竊以爲, 守城之具, 莫如柵木之預備也。 至若巡城所費之錢、柵木備置之道, 臣亦有商量於下叚者。 臣聞城堅而厚, 士民備薪給食, 此守法也。 又曰: ‘師旣淹久, 糧食無有, 百姓怨咨, 上不能止。’ 由是觀之, 守城之道, 惟在於儲糧。 則軍餉, 乃戎政之先務, 而都城軍餉, 全無餘蓄。 軍兵放料, 僅得以新舊相繼。
乙未春, 則至欲貸惠廳米而給之。 顧今國計, 可謂寒心。 桑土之備, 寧容少緩, 臣謹搜守城節目, 旣以三門外之民, 盡編於守城行伍。 或當守城之時, 則門外之民, 亦當捲而入城內矣。 其勢當仰哺於國, 而城內居民, 亦將無處求食。 昨年城門纔閉數日, 而城中已患穀貴。 或當守城之時, 則城內居民, 亦朝家之憂也。 臣未敢知, 惠廳之大同、各倉之軍米, 其可以當之乎, 且況軍兵料米之在江上者, 又無以取用, 則將何以爲計乎, 莫如以人稱粟。 如欲以人稱粟, 則軍兵常料外, 雖別儲十萬石, 僅爲八萬人三月之食。 都城之人, 不特止於八萬人, 則十萬石猶有不足之慮。 而此亦非我國歲入之所可辦者。 我殿下修明舊典, 各官房折受之還納結數, 亦或可以捱過。 臣竊以爲: ‘還納結數, 則姑歸之五軍門, 以充十萬石, 然後還付之度支, 以補經用, 亦非晩也。 各樣貢物、各樣軍料, 每間年以軍餉, 給之以惠廳米, 軍兵料之新捧者, 充其數而留之, 用舊蓄新, 則何憂乎改色之無路乎, 臣旣論儲穀之道, 請且陳習操之說。 漢臣鼂錯曰: ‘卒不服習, 以其將子敵也。’ 春秋操鍊, 法意甚重。 而向來, 內而各軍門, 外而諸道臣, 爲念軍兵之弊, 輒爲之停操。 雖若爲目下之惠, 終難免姑息之政, 故臣於平日, 稔知其弊, 以爲習操, 決不可廢。 而何幸我殿下, 赫然振刷, 內而各軍門之每月例習, 外而諸各道之春秋合操, 一依定制, 而修擧之, 臣實贊歎之不已。 惟是鄕軍之弊, 猶有可陳者矣。 夫軍兵之弊, 非但其勞也, 以其習操時許多浮費, 遠地往來難當也。 古者, 兵實於農。 故六十四井, 備出戎車一乘, 甲士三人, 步卒七十二人。 然則同井之內, 非人人皆兵也。 特同井之內, 各自出力, 以助軍兵也。 蓋兵者, 旣出其性命, 以衛平民。 則爲平民者, 亦當出其財力, 以助軍兵。 而我東, 則閑遊者不肯爲軍兵落一毛。 故當其習操也, 浮費許多, 而無人相助。 哀彼團束之兵, 雖在平時, 尙恐糜費之偏重。 其何望緩急之得力哉, 今雖不能行古者同井之制, 略倣其規, 當軍兵之赴操也。 自所居洞, 無論名色, 量宜分排, 收聚財力, 以助軍費, 則庶可爲農兵相須之道, 而我東人心, 狃於故常。 新令纔下, 異議橫生, 事未就緖, 弊已隨後。 臣知其不可爲也。 無已則所以捄其弊, 而助其費者, 有二道焉。 何也, 臣聞太公敎戰之法曰: ‘一人學戰, 敎成合之十人;十人學戰, 敎成合之百人;百人學戰, 敎成合之千人;千人學戰, 敎成合之萬人;萬人學戰, 敎成合之三軍之衆’, 以此言之, 則不必盡聚列邑之兵, 使節度使合操, 然後可以敎戰也。 王安石新法, 擧皆有弊, 而獨保甲法, 深得兵家之遺意, 雖行之可也。 今不必盡從其制, 而參之以兵書, 略加變通。 春則使各邑, 待監、兵營狀聞行關, 與營校, 眼同團束, 一邑之軍兵。 依十人、百人、千人學戰之規, 各自操鍊於本邑。 秋則節度使始依例合操。 則雖不春秋合操, 而可以鍊兵, 亦可以除軍兵。 一番遠地往來之費, 此則捄軍弊之一道也。 習操時, 例有軍兵犒饋, 此實慰勞軍兵之意也。 又有試射賞格, 此亦激勸將士之意也。 法非不美, 而反爲軍兵之弊。 蓋軍兵罷操後, 皆以卽歸爲便。 而乃以犒饋、試射, 不得卽歸。 畢竟犒饋之所受者, 徒歸虛糜。 賞格之所施者, 亦無實效。 臣意以爲: 犒饋所入, 每人例五升米。 春秋犒饋, 合爲一斗。 幷賞格所入者, 皆以米劃給。 以乾犒饋例, 永爲定式。’ 當軍兵之赴操也, 自各其邑, 先爲出給, 則可以助軍兵往來之費, 而亦無罷操後遲滯之弊。 此則助軍費之一道也。 春操雖停, 亦足以鍊兵, 而無遠地往來之弊。 斗米雖小, 亦足以助費, 而示朝家軫恤之意。 如此則可鎰軍兵之歡心矣。 至於馬兵, 其弊尤甚。 馬軍, 渠何從而自備戰馬, 故當其習操, 太半貰馬而當之。 無馬之兵, 將焉用哉, 臣聞人馬相稱, 然後可以爲用, 故平時備馬, 落其四下, 適其溫涼, 使之人知馬性, 馬知人意。 則臨陣而無齟齬之慮; 當戰而無顚蹶之患矣。 今之馬軍, 臨急貰馬。 如當緩急, 實無備馬之路。 而設或備馬, 人不知馬性, 馬不知人意, 顚蹶立至。 預備戰馬, 卽兵家急務也。 嗚呼! 臣之前後所陳, 難望其採施。 而如或有一二可用, 則至於所用之財力, 誠無出處。 惟是傳敎中, 汰冗兵, 不但爲壯軍制, 而亦可以裕財用矣。 古者千乘之國, 甲士只三千人, 步卒僅七萬餘人; 而我國則只以束伍言之, 至爲十九萬之多。 古者國君, 只食二千八百八十人; 而我國則都下養兵, 臣雖不得的知其數, 而幾至萬數云。 各道束伍, 苟充額數, 而雜以老弱, 都下軍兵, 徒費廩料, 而間有疲劣, 軍制之不壯, 國用之虛糜, 職由於軍額之太多。 周世宗曰: ‘兵務精, 不務多。’ 乃大簡諸軍, 精銳者升之, 羸弱者斥之。
當世宗時, 幅員甚廣, 敵國雖多, 而能以寡敵衆, 所向皆捷。 此則兵不在多, 而惟責於精。 今若就束伍中, 步軍、馬兵雜色軍, 使地方官, 各除其四之一。 而憑其疤記, 親自看審, 惟選壯實者, 則老弱可減者, 當爲四萬八千人。 而壯實者, 猶近十五萬, 兵非不多也。 老弱之見減者, 使之拔諸隊伍, 歲納一兩, 則僅爲年年浮費之半。 渠輩必樂從, 而無怨言矣。 雖曰除減, 而只令免役。 謂之餘丁名目, 則依前入屬於軍籍, 待弱者之稍長, 每五年更爲簡閱, 使之次次陞實。 則朝家不失軍額元數。 而又可以減習操時犒饋米四萬八千斗。 當變, 則又可以盡數調付於城守、糧運之時矣。 至於京軍, 則此皆專仰於料布。 不宜一朝盡汰, 以失其心。 且是根本之地, 則不必如束伍所減之數。 令各軍門, 有闕勿補, 只減其二十之一, 則所減者殆近五百名矣。 五百名所減, 似爲太縮, 而分排於各軍門, 每番入直各處, 則多寡比前不甚相懸。 而五百名料布之當爲國用者, 米近四千斛, 布近四千疋。 以錢計之, 則當爲數萬餘兩。 束伍所納者, 亦爲四萬八千兩矣。 咸鏡道束伍, 爲二萬八千餘人。 則四之一所納者, 當爲七千兩, 而本道, 元無各樣上納之規。 此則捧置該邑, 先爲馬兵買馬之用。 平安道束伍, 爲二萬二千餘名。 此亦依北道例, 除其所納之錢五千五百兩, 留爲馬價宜矣。 除西北兩道一萬二千五百兩, 而其餘三萬五千五百兩, 則悉輸之都下, 先以此, 移爲築城之用。 而以京營門所減之錢, 逐年補之, 則歲可以築五百步之城。 十餘年, 當盡築都城之踈虞處矣, 然後移爲買馬之用, 則歲可以備得二千馬矣。 馬軍元數, 合爲二萬六千餘人。 若減其四之一, 則當爲一萬八千五百餘人。 一馬價出給三十兩, 則僅八年後, 庶可以備一萬八千五百馬。 限之以二十餘年, 則城可以盡築, 馬可以盡備, 然後又作營門之留財。 則城之隨補, 馬之隨立, 亦無難矣。 國家, 方期以億萬年無彊之休。 則二十餘年之功, 雖若遲久之事, 而盤泰之安, 可以垂之無窮, 豈不休哉, 如以爲此不可爲, 則又當取用於各道朝家錢財矣。 蓋各道監兵、水營、統營、松都之所在者, 雖爲他日不虞之所備, 亦爲各處公用之所賴, 而視之於根本之計, 則亦有輕重之可言者。 臣以爲各道所在錢, 量其多寡而分定之。 歲取二萬兩, 則歲可以築三百步之城矣。 又況箕營, 每等別備爲五萬兩。 間或專取於箕營, 亦可以備二萬之數矣。 如以爲各處錢財, 有名存實無之弊, 有難繼用, 則又當 就儲置米及還穀中變通矣。 國力雖曰不足, 豈可擬議於外邑還穀, 而今之還穀, 反爲民弊。 穀多之邑, 則民雖不願, 而亦强給之, 農家一年之收, 無以當應納之數。 年年如此, 破家而後已, 如令移送於穀少之邑, 最爲便好。 如令各道道臣, 査出穀多之邑, 穀多之邑, 則該邑儲置之當用者, 以還穀當之。 儲置米, 則作錢上納。 限六千石, 取之於初定之邑, 則又反有穀貴之患。 自該道, 更査穀多之邑而移之則可以均還穀之多寡, 應朝家之需用。 而待城築之役訖, 遂已之, 則以一國許多穀物, 何難歲取六千石乎, 如以爲各道錢財、各邑儲置, 非京都之所可移用者。 則臣又有所惑者矣。 宋臣劉珙曰: ‘荊、襄, 四支也;朝廷, 腹心、元氣也。’ 今不憂元氣之備, 而慮四支之不彊, 非臣之所敢知也。 今之各道, 乃四支也, 都城, 卽腹心也。 若爲各道之地, 而不爲都城之計, 則得無爲劉共父之所惜乎。 噫! 今之國力, 誠無着手處。 如不得變通於軍額, 則築城之役, 亦當爲朝家之憂。 買馬一事, 勢當徐議之。 而巡城軍所入四千八百兩, 則臣聞, 均役廳歲餘者, 殆近萬數云。 以此取用, 亦無不可矣。 至若柵木備置之道, 此非棟樑之材。 如取之於山峽, 則何患其難辦, 而爲此妄言哉, 臣聞林木薈蔚者, 伏姦之所。 且雲梯、飛樓, 乃攻城之具。 則今此都城外, 樹木之蔚翳者, 安知非兵家之所忌乎, 臣謂近城樹木之中, 取其高之與城齊者, 以補柵木, 亦無不可矣。 一次辦備, 作廊收藏, 則可以支百餘年。 人家材木, 或傳累百年, 而亦不朽腐者, 善藏之致也。 此不過百年一次改備而已。 有何難繼之憂乎,”
命廟堂稟處。
정조 11권, 5년(1781 신축/청건륭(乾隆)46년) 1월 27일(경자) 4번째기사
동관왕묘에서 제사를 행하고 수복들의 복색도 검열하다
동관왕묘(東關王廟)에 들러서 하교하기를,
“전례(展禮)한 뒤 행제(行祭)하는 것은 곧 응당 행해야 할 일이다.
동남양묘(東南兩廟)2480)에 장신(將臣)을 보내어 행제하는 것은 아까 예를 행할 때 이미 제기하여 말하였다.
한결같이 송(宋)나라에서 무성왕(武成王)2481)의 묘에 제사한 대로 하도록 이미 숙묘(肅廟)2482)의 수교(受敎)가 있어서《보감(寶鑑)》에 기재되어 있으며 선조(先朝)에서도 또한 이에 대한 어제문(御題文)이 있었다.
그런데도 아직껏 준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흠사(欠事)라고 할 수 있다.
삼국(三局)의 대장(大將)은 으레 당상(堂上)을 겸한 예대로 모든 일을 관검(管檢)하도록 하라. 모름지기 수복(守僕)들의 복색(服色)으로 말하더라도 또한 정해진 예(例)가 없으니, 이후로는 다른 수복들의 예에 따르도록 해서 설만(養慢)하다고 탄식하는 일이 없게 하라.
이런 내용을 해조(該曹)로 하여금 자세히 알게 하라”하였다.
註2480]동남양묘(東南兩廟):동관왕묘(東關王廟), 남관왕묘(南關王廟).註2481]무성왕(武成王):태공망(太公望)의 봉호(封號).註2482]숙묘(肅廟):숙종.
○歷臨東關王廟敎曰: “展禮後行祭, 卽是應行之事。 東南兩廟, 遣將臣行祭, 俄於行禮時, 已有提說。 一依宋武成王廟祭, 旣有肅廟受敎, 載《寶鑑》。 先朝亦以此有御製文, 而迄未遵行, 可謂欠事。 三局大將, 依例兼堂上例, 凡事管檢。 雖以守僕服色言之, 亦無定例。 此後依他守僕例, 俾無褺慢之歎事。
令該曹知悉。”
정조 18권, 8년(1784 갑진/청건륭(乾隆)49년) 9월 17일(기사) 2번째기사
왕대비에게 존호를 가상하다
왕대비(王大妃)에게 존호(尊號)를 가상(加上)하였다. 임금이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서 책보(冊寶)를 친히 올렸는데, 옥책문(玉冊文)에 이르기를,
“원량(元良)을 책봉하는 예식을 거행하니, 밝은 운수가 바야흐로 우리 집안에 열려지고, 선대왕(先大王)이 등극한 해를 맞이하니, 훌륭한 칭호를 왕대비[太母]에게 아울러 올립니다.
하루하루 날이 가는 것을 아까와하는 정성을 다하는 것은 천명(天命)이 하늘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주(周)나라 무왕(武王)에게는 강태공(姜太公)과 같은 신하가 있었고, 송(宋)나라에는 순(舜)임금과 같은 선인태후(宣仁太后)가 있었던 것입니다. 영고(寧考)3860)의 훌륭한 정치를 도왔으나, 남모르는 공로가 궁중에서 벗어나지않았고, 인원왕후(仁元王后)의 아름다운 덕망을 이어받아 나라의 형세를 태산의 반석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아! 자성(慈聖)께서 선대왕의 뜻을 잘 대신하였기 때문에 소자(小子)가 오늘에 이르도록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천승(千乘)의 봉양이 비록 높다한들 넓은 하늘과 같은 은덕을 어찌 다 갚겠습니까? 두 글자의 칭호를 거듭 올리는 것으로도 오히려 해와 달의 광명을 다 그릴 수는 없습니다.
이제 갑진년의 60돌[重回]을 당하여 세자를 책봉하는 경사를 다시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거룩한 공적은 5기(紀)동안 높고 컸으나, 덕화는 왕위에 오르던 초기부터 시작되었고, 인자한 소문은 이남(二南)3861)보다 차고 넘치니, 경사는 종묘의 제사를 주관할 큰 아들에게까지 미쳤습니다.
덕망은 하늘과 땅과 짝하시니, 진실로 아름다운 칭호를 함께 올리는 것이 합당하고, 공열(功烈)은 종묘사직에 새겨서, 아름다운 규범을 다시 밝히는 것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아! 저사(儲嗣)를 보호할 계책을 도와서 익연(翼然)하게 깊이 생각하셨으니, 비록 역대의 현명한 후비(后妃)들을 하나하나 손꼽아 보아도 그 공열을 비길 사람이 없습니다. 이에 조정의 의논을 채택하여 떳떳한 전장(典章)을 따르게 됩니다. 삼가 책보(冊寶)를 받들어 존호를 ‘익렬(翼烈)’이라고 더 올립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너무 겸손한 덕을 힘써 억누르시고, 이 훌륭한 칭호를 굽어살피도록 하소서.
높은 나이로 복을 누려서 8천년의 세월을 길이 기약하고, 큰 덕망의 이름을 얻어서 억만년 후대에까지 역사책[竹帛]에 빛나게 내려가도록 하소서”하였다.【양주목사(楊州牧使) 김종수(金鍾秀)가 지었다】
註3860]영고(寧考):영조를 말함.註3861]이남(二南):《시경(詩經)》의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의 두 편명(篇名). 주남은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후비(后妃)가 수신제가(修身齊家)한 일을 노래한 것이고, 소남은 남국(南國)의 제후(諸侯)가 후비의 덕화(德化)를 입은 것을 읊은 것임.
○加上尊號于王大妃。 上御明政殿, 親上冊寶玉冊文曰:
擧元良封冊之禮, 熙運方啓於我家; 値先王登極之年, 丕號竝進於太母。 誠展愛日, 命申自天。 恭惟武有臣姜, 宋曰女舜, 佐寧考至治, 而陰功不出乎壼闈; 嗣仁元徽音, 俾國勢自措於盤泰。 猗! 慈聖克替先旨, 肆小子式至今休。 千乘之養雖隆, 曷以報昊天之德, 二字之號荐上, 猶未盡日月之光。 玆當甲歲之重回, 更覩离輝之繼照。 神功巍蕩於五紀, 化肇踐阼之初辰; 仁聲洋溢於二《南》, 慶流主器之丕子。 德配天地, 固合齊薦徽稱; 功在宗祊, 詎諼申闡懿範, 嗟! 翊護儲嗣之策, 翼然深思; 雖歷數后妃之賢, 烈維無競。 爰採廷議, 式遵彝章。 謹奉冊寶, 加上尊號曰翼烈。 伏惟勉抑撝謙, 俯膺崇貫。 遐齡享祉, 永期八千歲春秋; 大德得名, 昭垂億萬代竹帛。【楊州牧使金鍾秀撰】
정조 30권, 14년(1790 경술/청건륭(乾隆)55년) 4월 16일(병인) 4번째기사
각 군영의 활쏘기에 대해 길이와 너비를 통일되게 하게 하다
수어청이 사강절목(射講節目)을 올렸다. 앞서 상이 이르기를,
“요즈음 각 군영에서의 활쏘기 모임은 그 이름과 실지가 서로 걸맞지않아 점차 놀이나 하는 일처럼 되어가고 있는데, 각 군영 장관들의 활쏘기 기능이 향상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후로는 매월 두 차례 활쏘기를 할 경우에는 한번은 전에 하던대로 천으로 만든 과녁에 쏘게하고, 한 번은 유엽전(柳葉箭)으로 가죽과녁에 쏘게하라.
그리고 한달에 한 번만 할 경우에는 지난달에 천으로 만든 과녁을 쏘았다면 이번달에는 가죽과녁을 쏘게 함으로써 서로 번갈아 시험을 보이게 하라.
이와 같이 한다면 상벌 또한 마땅히 천으로 만든 과녁을 쏘는 것과 차이를 두어야 할 것이다. 각 군영과 상의하여 하나로 결정지어 초기를 올리라. 천으로 만든 과녁의 길이와 너비로 말하더라도 군영마다 각각 다르다.
일찍이 들은 바로는 수어영이 가장 크다고 하니, 각 군영의 장수들이 상의해서 그중에서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게 만든 것을 가져다가 그 척도를 제정하여 각 군영이 균일하게 한 다음 감히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하라. 별군직청(別軍職廳)과 선전관청(宣傳官廳)에서도 활쏘기 모임을 할 때에는 모두 이 규정을 적용하라”하자,
수어청이 아뢰기를,
“전하의 하교에 의하여 각 군영의 장수들과 상의하고 각 군영의 활쏘기 시험보이는 규례를 상고하여 토의를 결정지었습니다. 천으로 만든 과녁의 규격은 훈련도감의 것이 바로 옛날의 규격이므로 그 크기에 의해 일정한 규정을 삼고, 상벌의 절목도 함께 만들어 아룁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연한이 찬 당하관으로서 기한이 없이 참가시키는 것은 너무도 의의가 없다. 만약 강태공(姜太公)이 오늘날까지 살아있다고 한다면 우리나라에서 강받기와 활쏘기를 면제받을 때가 없을 것이다.
이후로는 60세 이상은 강받기를 면제하고, 활쏘기는 저번에 어장(御將)의 활쏘는 재주를 보니 70세 노인도 견디어낼 만하였다.
이것은 이전대로 하되 포상만 논하고 벌은 논하지 말라”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절목을 올려 시행하였다.
○守禦廳進射講節目。 先是, 上曰: “近來各軍門射會, 名實不孚, 漸成戲劇之擧, 各營將官射技之不能進就, 職由於此。 此後每朔如行兩次, 一次依前以小布, 一次以柳葉箭貫革。 一月若一爲, 而前月試小布, 則此月試貫革, 以爲相間輪試之地。 若此則賞罰亦當與小布試取差異, 各營相議指一草記。 雖以小布長廣言之, 營各不同, 曾聞守禦營最大。 各營將臣相議, 就其不大不小之制, 定其尺度, 各營圴一, 無敢違越。 別軍職、宣傳官廳射會, 皆用此規。” 守禦廳啓言: “依聖敎, 相議於各營將臣, 參考各營試射規例, 商確停當。 小布制樣, 則訓局小布, 乃是古制, 故依其尺度, 著爲定式, 幷與賞罰, 成節目以啓。” 敎曰: “年限之堂下, 無期限者, 殊無意義。 若使姜太公至今生存, 我國講射, 將無除免時乎, 此後六十以上除講, 而射則觀於近日御將弓技, 七十老人堪可爲之。 此則仍舊貫, 但論賞勿論罰。” 至是進節目行之。
정조 36권, 16년(1792 임자/청건륭(乾隆)57년) 10월 19일(갑신) 2번째기사
평안도관찰사 홍양호가 중국 돈 무역의 불가를 건의하다
평안도관찰사 홍양호(洪良浩)가 상소하였다.
“신이 삼가 조지(朝紙)를 보니 사역원 초기(草記)에 의해 이번 절사(節使) 편에 중국 돈을 무역해오게 하기위해서 묘당과 의논한 끝에 자문(咨文)을 꾸며 들여보내기로 하였다고 했는데 신은 삼가 그것이 옳지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이란 한 나라의 재보의 원천이며 백성들의 생명줄입니다.
그 권한을 위에서 쥐고 있고 아래서는 그 혜택을 받는 것이라서 남에게 빌려줄 수도 없는 것이고 또 남에게 빌려 달라고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황제(黃帝)가 처음으로 전폐(錢幣)를 만들었고 태공(太公)은 구부(九府)를 두어 돈과 물가를 관리해 왔으나 삼대(三代)의 화폐 제도는 같지않았고 한(漢)·당(唐) 이후로는 나라를 새로 세우면 국호도 바꾸고 곧 새 화폐를 주조하여 한 시대의 이목을 새롭게 하고 사방의 이권을 거두어 들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한 나라에 주는 영향이 그만큼 소중했기 때문에 중국 주위의 여러 나라들도 각기 자기 나라 화폐를 사용하였으며 가령 거북등딱지·자개·칼·가죽 같은 것들을 나라의 돈으로 만들어 백성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였으나 다른 나라와 서로 유통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기씨 시대부터 이미 돈이라는 것이 있었고 고려 시대에는 은병(銀甁)을 화폐로 사용하거나 혹 쇠돈을 주조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나라에 구리가 생산되는 곳이 없기 때문이었지만 고려와 원나라는 의복이며 관직이 한 집안처럼 같았어도 일찍이 중국 돈을 빌려다 쓰지는 않은 것을 보면 형세가 서로 걸맞지 않고 구애됨이 있어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숙종조때 와서 옛날 제도를 고증하여 비로소 동전(銅錢)을 주조하였는데 나라의 재용이 이로 인해 넉넉해지고 백성들이 그 혜택을 입었으며, 시행한 지 1백여년이 되었어도 위아래가 다 편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다만 왜동(倭銅)의 값이 비싸고 주조하는 비용이 많이 들기때문에 돈의 품귀가 근래에 심해졌고 은의 생산도 줄고 하여 장사치와 역관들이 생업을 잃게 되었고 그리하여 그러한 변통책을 쓰려고 한 것이지만 중국 돈의 문제라면 선왕조 만년에 이미 그런 논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정의 논의가 통일되지 않은 것은 사실 근거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쓰고 있는 통보(通寶)는 본시 한 왕조가 제정한 제도로서 마치 의관이나 물건처럼 각기 제도와 법칙이 있어 다른 나라와 서로 혼동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제 소견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연경이나 요동과 가까워 중국 본토나 매한가지이기 때문에 전폐를 통용해도 불가할 것이 없을 것이라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생각해야 할 것은 봉강(封疆)이 이미 나뉘어져 있고 명분과 제도가 각기 다른 이상 규제가 한번 무너지면 갖가지 농간이 쏟아져 나올 것이어서 그것이 첫번째 마땅치 않은 점입니다.
우리나라가 비록 국토는 한쪽에 치우쳐 있지만 면적이 몇 천리이고 산을 끼고 바다에 둘러쌓여 있어 강국으로 호칭되고 있습니다.
겸하여 수륙 물산도 풍요롭고 은과 철(鐵)의 자원도 얼마든지 있어 비록 다른 나라와 유통하지 않더라도 재정을 제대로만 운영한다면 국가 재용의 부족을 걱정하지 않을 것인데 하필 중국에서 빌리겠습니까? 지금 만일 돈을 빌어 나라 재용에 보태 쓴다면 이는 남에게 빈약함을 내보이는 꼴이어서 장차 우리 국력을 넘겨볼 것이니, 그것이 두 번째 마땅치 않은 점입니다.
시험 삼아 이해관계를 말해 보더라도, 지금의 역관 무리들이 중국 동전들이 거리에 가득 널려있는 것을 익히 보았으므로 이것을 곧 기왓장이나 돌맹이 같이 여기고 교환하는 값도 갑절이나 5배의 싼 값으로 사들일 수 있기 때문에 적은 물건을 가지고서 많은 양을 사들여 10에 5의 이익을 남길 수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만일 그러함을 깨닫고서 차츰 그 파는 횟수를 줄여 가격이 서로 대등하게 해버리면 결국 이권은 다른 나라로 돌아갈 것이고 조종하는 것도 남의 손에 달려 있어 몇 해 못가서 이익이라곤 없을 것입니다.
또 서쪽 변경의 백성들이 목전의 많은 이익을 보고서 다투어 은이며 삼이며 비단이며 베 등의 물품을 가지고 금지하는 것을 무릅쓰고 몰래 국경을 넘어 중국 돈을 사들여 오는 것이 마치 터진 시냇물 같고 달리는 사마(駟馬) 같아 막아 낼 수가 없게 된다면 우리나라의 갖가지 물품들이 모두 압록강을 건너가게 되어 백성들의 일용이 날로 궁핍해 질 것이고 나라 재정도 날로 줄어들 것이니 장차 무슨 방법으로 그 뒤를 잘 마무리할 것입니까?
그것이 세 번째 마땅치 않은 점입니다.
이렇게 세 가지 불가한 점이 있는데도 단지 사행의 팔포(八包)를 채워주기 위해서 전대에 없었던 일을 갑자기 만들어 내어 뒷날 무궁한 폐단의 길을 열어놓는다면 그 어찌 중대하고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신이 일찍이《대청회전(大淸會典)》을 보았더니, 동철(銅鐵)은 외국으로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는 문구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더욱이나 보국(寶局)에서 주조한 전폐가 쉽게 새나가도록 길을 열어놓아 나가기만 하고 들어오는 것은 없어도 그대로 내버려두겠습니까?
구구하고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지금 비록 자문를 보내 요청하더라도 거절을 당할 염려가 있는데 그리되면 나라 체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점 더더욱 신중을 기해야 할 것입니다. 신은 직책이 지방관으로서 조정의 논의에는 참가할 입장이 못 되지만 신이 있는 지역이 서쪽 관문이고 문제도 변경의 정사와 관계되기 때문에 백성과 국가의 이해(利害)를 눈으로 보고 감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께서 잘 생각하시어 처리하소서”하니,
비답하기를,
“중국 돈의 통용문제는 세 가지 불가한 점을 지적한 경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것이 전혀 폐단이 없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돈을 화천(貨泉)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을 두루 유통시켜 막힘이 없음을 이른 것이다. 그 길을 트자는 것은 물정에 따른 것이고 그 폐단을 바로잡자면 현실에 맞게 하면 될 것이다. 허락한 것은 시험해보기 위한 것이므로 그만두는 것도 호령 한 번이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경이 소견을 곧바로 아뢴 점은 가상한 일이라 하겠다”하였다.
○平安道觀察使洪良浩上疏曰:
臣卽伏見朝紙, 因司譯院草記, 今此節使之行, 以貿來唐錢事, 往復廟堂, 將有撰咨入送之擧, 臣竊以爲不可也。 夫錢者, 有國之寶源, 生民之命脈。 上操其權而下受其利, 旣不可以假人, 亦不可以求假於人也。 蓋自黃帝, 肇創錢幣, 太公乃造九府, 以權輕重, 而三代不同制。 漢、唐以來, 開國改號, 輒鑄新幣, 以變一代之耳目, 以收四方之利權, 其爲有國之所重如此。 故域外諸國, 各用其國之貨, 如龜、貝、刀、皮之類, 用作國信, 以便民俗, 不相通用也。 惟我東方箕氏之世, 已有古錢, 而麗朝則貨用銀甁, 或鑄鐵錢。 蓋由地無銅産, 而麗之與元, 衣服官職, 事同一家, 亦未嘗借用唐錢, 則可見形格, 而勢拘也。 逮我聖祖朝稽古定制, 始鑄銅錢, 國用以給, 民受其利, 行之百餘年, 上下便之, 而第以倭銅價高, 皷鑄費多, 故錢荒比甚, 銀産又縮, 以致商譯之失業, 有此變通之策, 然唐錢一事, 蓋自先朝晩年, 已有此議, 而朝論之不咸, 誠有所據。 夫我國所用通寶, 自是一王之制, 如衣冠、物采, 各有典章, 不可與他國相混也。 議者雖謂地近燕、遼, 便同內服, 錢幣通用, 似無不可云, 而第念封疆旣分, 名制各殊, 防限一壞, 奸弊百出, 此其不可一也。 我國雖偏壤, 地方數千里, 負山環海, 號稱强國, 兼水陸之饒, 擅銀鐵之利, 雖使不通他國, 苟得理財之方, 國用不患不足, 又何必借貸於中國乎, 今若請錢, 以資國用, 則旣示人以貧弱, 將窺我之淺深, 此其不可二也。 試以利害言之, 今之譯舌輩, 慣見唐錢之遍滿街巷, 便同瓦石, 交易之價, 輒售倍蓰, 故謂以持少易多, 可博什伍之利。 彼若覺其然也, 漸減其沽, 俾與相當, 則利權歸於異域, 操縱在於他手, 不出數年, 將無所利矣。 且西邊之民, 見其目前厚利, 爭以銀蔘紬布等物, 冒禁僭越, 換來唐錢, 譬如川決駟奔, 莫可防遏, 則域中百需, 皆渡鴨水, 而民用日乏, 國計日耗, 將何以善其後耶, 此其不可三也。 以此三不可, 而只爲使行充包之利, 遽創前代未有之擧, 以啓日後無窮之弊, 寧不重且難哉, 然臣嘗見《大淸會典》, 有銅鐵不許外國之文, 則況以寶局鑄成之幣, 輕開尾閭之洩, 一任其有出無入耶, 區區愚意, 今雖咨請, 恐致見格, 則其於國體何如也, 尤不可不愼也。 臣職是外藩, 不宜與論朝議, 而地居西門, 事關邊政, 目見民國利害, 不敢不言。 伏乞聖明, 留神裁處焉。
批曰: “唐錢通用事, 不待卿三不可之說, 而旣料其未必十分無弊, 然貨泉云者, 周通無停礙之謂也。 通其路, 循物情也; 救其弊, 適時宜也。 許之, 欲其試可; 已之, 亦當在一號令間事, 而卿之有懷卽陳, 殊可嘉也。”
정조 47권, 21년(1797 정사/청가경(嘉慶)2년) 12월 13일(무신) 2번째기사
훈련원에서 올린 절목
훈련원에서 본원(本院)의 절목을 올렸다. 그 절목은 다음과 같다.
【“본원의 설치는 옛날 국초(國初)의 성대할 때에 있었는데, 훈련관(訓鍊觀)으로 일컫다가 관(觀)을 고쳐 원(院)으로 하였으며 군자좨주(軍諮祭洒)의 직임과 사마참군(司馬參軍)의 칭호가 질서정연하게 갖추어져 찬란하게 볼 만하였습니다. 한 번 원(院)을 건립하여 관원을 설치한 뒤로부터 무예를 훈련시키고 병사(兵事)를 연습시켰습니다.
예법은 맹추월(孟秋月)에 인사를 선발하는 것을 모방하고 재예(才藝)는 당(唐)나라 장수 학정옥(郝廷玉)이 법을 아는 것보다 많았습니다. 무과를 거쳐 병권을 장악한 이가 모두 이 원(院)과 이 관(觀)에서 출발하였는데 지금 수백 년이 되었습니다.
삼가 문양공(文襄公) 양성지(梁誠之)의 비변(備邊)10책(策)을 살펴보건대 ‘나이 40이하의 내금위(內禁衛)·별시위(別侍衛)의 갑사(甲士)중에 기식(器識)이 있고 문자를 아는 자를 자원에 의해 취하여 훈련관에 입학시키고 입번(入番)하거나 순작(巡綽)하는 날을 제외하고는《무경(武經)》을 습독(習讀)케 하되 그 격식은 성균관의 예를 본받게 해야 할 것입니다’하고, 또 이르기를 ‘지금 훈련관은 곧 송조(宋朝)의 무학(武學)과 같습니다. 바라옵건대 훈련관에 독소(纛所)와 함께 태공망(太公望)의 사당인 무성왕묘(武成王廟)를 세우소서’하고, 또 이르기를 ‘60일동안 훈련관에 나아가 장(杖)을 연습하고, 방패(防牌)쓰는 법도 훈련관에서 연습하게 하소서’하고, 또 이르기를 ‘훈련관습독관(習讀官)은《통감(通鑑)》·《무경(武經)》·《장감(將鑑)》·《병요(兵要)》·《진법(陣法)》·《병장설(兵將說)》을 읽히고 있는데《통감》을 제외하고 혹 《병정(兵政)》을 추가하소서’하였습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이르기를 ‘무과(武科)의 초시(初試)와 원시(院試)는 훈련원에서 이름을 등록하여 시취(試取)한다’하였고, 또 이르기를 ‘내금위(內禁衛)는 병조에서 도총부(都摠府)·훈련원 당상과 같이 시취하며 모든 군사의 시취도 같다. 다만 정병(正兵)의 연재(鍊才)는 훈련원이 시취한다’하였고, 또 이르기를 ‘무과는 문과(文科)의 예에 의하여 제수하되, 별시위(別侍衛)및 훈련원권지(訓鍊院權知)를 나누어 차임한다’하였고, 또 이르기를 ‘2월과 9월의 20일에 본조와 도총부의 당상이 교외(郊外)나 훈련원에서 겸사복(兼司僕)·내금위(內禁衛)·충의위(忠義衛)·족친위(族親衛)·각품(各品)의 반당(伴倘)·장용위(壯勇衛)의 병기를 점고(點考)한다’하였고, 또 이르기를 ‘출직(黜直)하는 군사는 상번(上番)한 군사를 도와 순찰하는 외에는 3일에 하루는 훈련원에 나아가 진법을 연습하고 활을 쏜다. 이것을 관장하는 부장(部長)은 본원의 당하관과 같이 시험을 점검한다’하였습니다.《속대전(續大典)》에 이르기를 ‘금군(禁軍)의 취재(取才)와 내삼청(內三廳) 출신의 취재는 병조·도총부·훈련원이 시재(詩才)한다’하였고, 또 이르기를 ‘무릇 거자(擧子)의 정거(停擧)는 훈련원의 참외(參外)인 시임 3원(員)이 모여 의논한다’하였습니다.
또 고(故) 봉사시정(奉常寺正) 차천로(車天輅)가 지은 본원의 중창상량문(重刱上梁文)을 살펴보니 ‘병조판서월사상공(月沙相公)이 옛것을 개혁하는 데에 마음을 두고 새롭게 하는데에 집중하였다. 층계 섬돌과 넓은 뜰은 한(漢)나라의 평락관(平樂觀)보다 넓고, 굵은 기둥과 큰 집은 위(魏)나라의 화림원(華林園)보다 고대(高大)하다’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관제(官制)의 연혁(沿革)이 일정하지 않고 원해(院廨)의 흥폐(興廢)가 때가 있었다는 것과 도감(都監)의 설치가 이 원(院)에서 비롯되고 종루(鍾漏)의 관장(管掌)을 이 관(觀)에 붙였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 태종조(太宗朝) 17년에 본관(本觀)에서 속전(屬田)을 마련하여 무사를 기르게 할 것을 청하였고, 세조조(世祖朝) 4년에 훈련관에 명하여 진법을 바로잡게 하였습니다.
성종조(成宗朝) 원년에 명하여, 각년(各年)의 무과출신으로 한산(閑散)하여 소속이 없는 자는 품계에 따라 습독권지(習讀權知)로 차임하고, 날마다 본원에 나와 병법을 읽고 활쏘기를 연습하며, 당상이 문·무의 재능이 있는 자를 고찰하여 병조와 도총부에 보고하여 시취(試取)해서 동·서반(東西班)의 수령·첨사(僉使)·만호(萬戶)에 조용(調用)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4년에 본원에서 기로연(耆老宴)을 열어 2품이상으로 나이 70이된 사람은 모두 나오도록 허락하였으며, 도승지에게 명하여 선온(宣醞)하게 하고 드디어 매년 중구일(重九日)을 잔칫날로 삼았습니다.
우리 중종조(中宗朝)에 와서 중흥(中興)의 대업이 실로 본원에 기인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한(漢)나라의 남북군(南北軍)이나 당(唐)나라의 천책부(天策府)와 같은 대열에 서면서 존엄해졌습니다.
인조조(仁祖朝)에 충정공(忠定公) 이귀(李貴)가 능마아청(能麼兒廳)을 설치하여 병서(兵書)의 고강(考講)을 관장하게 하고, 당상과 낭청은 도정(都正)과 습독관(習讀官)이 예겸(例兼)하게 하였습니다.
우리 선조(先朝)때에 와서 상신(相臣)이 강연에서 아뢰자 본원(本院)에 능마아청을 합하였고 특명으로 중수(重修)하여 단청이 일신되었습니다.
하늘이 옥련(玉輦)을 돌리어 왕의 덕화(德化)를 다시 입게 되고 말위(靺韋)가 영광스럽게 움직이니 초목에 빛이 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성상께서 임어하신 이래로 문교(文敎)를 크게 펴시어 억조 백성은 형용하기 어려운 큰 교화를 입고 사방은 소리없는 음악을 듣게 되니, 장수를 누리고 사람을 진작시키는 아름다움이 우주에 성대히 넘쳤습니다. 이윽고 또 한 번 늦추고 한 번 조이는 도를 깊이 생각하시어, 병학(兵學)에 관한 모든 책을 수집하고 무예에 관한 강론을 집성(集成)하였습니다.
그래서 장구한 도인 문무(文武)를 아울러 쓰니 보고 느껴서 사방이 바람처럼 고무되었습니다. 어가(御駕)가 남영(南營)에 임어하시자마자, 따뜻한 윤음(綸音)이 북신(北宸)에서 곧 내려졌는데 자세한 건물을 짓는 책임과 간절한 유지의 방도였습니다. 이에 광대한 건물이 함께 이루어지니 한 원(院)이 굉걸(宏傑)합니다.
날아오를 듯한 건물은 고대(高大)하고 화려하니, 아, 성대합니다.
이곳에 있게 된 사람이라면 어느 누군들 흥기(興起)하고 분발해서 우리 성상의 도야(陶冶)하고 진작시켜 주시는 성대한 덕과 직극한 뜻에 부응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시행해야 할 조건을 아래에 개록(開錄)합니다.
금군(禁軍)을 창설하던 초기에 반드시 이 훈련원에서 무예를 익히고 혹 금중(禁中)에서 열병(閱兵)을 시험하기도 하였으니, 굉원(宏遠)한 계책과 경장(經長)한 도모에 대해 칭송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각영(各營)의 삭조(朔操)와 중일제(中日製)의 예에 의하여 매월 조련(調鍊)을 행하고 가운데 달에는 사습(私習)하는 것으로 정식(定式)을 삼아야 하겠습니다.
병조판서가 교외에서 군대를 훈련하는 것이 군대를 훈련하는 대요(大要)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옛날 용장(龍將)과 호장(虎將)으로 나누어 과습(課習)을 훈련시킨 것이 성대하게 성과가 있었으므로 아직까지도 아름다운 제도로 일컫고 있습니다. 지금 훈련원의 건물이 다시 새롭게 된 상황에서 전례를 참작하여 다시 달마다 연습하는 옛날 규례를 신명(申明)하는 것이야말로 합당하고 실지를 힘쓰는 정사가 될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별장(別將)이 반드시 매월 초하루에 본원(本院)에 모아 나아가고 물러나며 달리고 쫓아가는 절도를 연습시키는 동시에 봄가을에는 병조판서가 교장(敎場)에서 조련을 시행하여 군대의 위용을 떨쳐야 할 것입니다.
교장을 노량(鷺梁)으로 확정한 것은 본래의 옛날 법이 못됩니다.
남소영(南小營)·사아리(沙阿里)·모화관(慕華館)을 막론하고 편리할 대로 설행(設行)함으로써 구례(舊例)를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사습(私習) 및 조련(組鍊)과 관련하여 응당 행해야 할 사례(事例)는 병조로 하여금 절목을 찬성(撰成)하여 계하(啓下)받은 다음 거행하게 하소서.”】
○訓錬院, 進本院節目。【本院之設, 昔在國初盛際, 以訓鍊觀稱而觀改以爲院, 軍諮祭酒之任, 司馬參軍之號, 秩然有備, 煥然可觀。 一自建院而置官于以訓武而鍊戎。 禮倣孟秋月之選士, 才多郝廷王之識法。 由武擧而制戎權者, 莫不叢軔於是院, 是觀累百年于斯。 謹按文襄公梁誠之備邊十策曰: ‘年四十以下內禁、別侍衛甲士中, 有器識解文字者, 取自願入學訓錬觀, 除入番巡綽日外, 《武經》習讀, 略放成均館例。’ 又曰: ‘今訓錬觀卽宋朝武學也。 乞竝纛所于訓錬觀, 而立武成王廟。’又曰: ‘六十日就訓鍊觀習杖, 防牌亦於訓鍊觀習訓之。’ 又曰: ‘訓鍊院習讀官, 讀《通鑑》、《武經》、《將鑑》、《兵要》、《陣法》、《兵將說》, 請除《通鑑》, 或加《兵政》。’ 《經國大典》曰: ‘武科初試院試, 訓鍊院錄名試取。’ 又曰: ‘內禁衛, 本曹同都摠府訓鍊院堂上試取, 凡軍士試取同。 但正兵鍊才則訓鍊院試取。’ 又曰: ‘武科依文科例除授, 分差別侍衛及訓鍊院權知。’ 又曰: ‘二月九月二十日, 本曹都摠府堂上, 於郊外或訓鍊院, 點考兼司僕、內禁衛、忠義衛、族親衛、各品伴倘、壯勇衛戎器。’ 又曰: ‘出直軍士, 助番巡綽外, 三日內一日, 就訓鍊院, 習陣或射帿。 所管部將, 同本院堂下點試。’ 《續大典》曰: ‘禁軍取才, 內三廳出身取才, 本曹、都摠府、訓鍊院試才。’ 又曰: ‘凡擧子停擧, 訓鍊院參外時仕三員會議。’ 又按故奉常正車天輅本院重創上樑文曰: ‘大司馬月沙相公, 留心革舊, 銳意鼎新層。 階廣庭敵, 漢家之平樂厚, 揀大宇巍魏氏之華林。’ 於此可以知官制之沿革無常, 院廨之興廢有時, 都監之設, 權輿於是院, 鍾漏之掌, 奇寓於是觀。 而粤我太宗朝十七年, 本觀請屬田以養武士, 世祖朝四年, 命訓鍊觀, 正陣法。 成宗朝元年, 命各年武科出身, 閑散無所屬者, 隨品差習讀權知, 日赴本院, 讀兵書習射, 堂上考察有文武才者, 報兵曹摠府試取, 調用於東西班守令、僉使、萬戶。 四年設耆老宴于本院, 二品以上年七十者, 竝許赴命, 都承旨宣醞, 遂以每年重九爲宴日。 及至我中宗朝, 中興大業, 實基於本院。 遂與漢之南北軍, 唐之天策府, 竝列而尊嚴。 仁祖朝忠定公李貴, 建能麿兒廳, 掌兵書考講, 堂上郞廳珥正習讀例兼。 逮我先朝, 因相臣之筵奏, 合廳於本院, 而特命重修, 丹〈■〉一新。 天廻玉輦, 雲漢之什庸, 作榮動靺韋, 光生草木。 恭惟我聖上臨御以來, 誕敷文敎, 兆民被難名之化, 四方聞無聲之樂, 壽考作人之休, 洋溢區宇。 而旣又曰咨道軫弛張, 裒輯兵學之通集, 成武藝之譜。 竝用長久觀感風動仙蹕。 才臨於南營, 溫綸載決於北宸, 娓娓乎堂搆之責, 眷眷乎維持之方。 百堵俱興, 一院敝觀。 翬飛鳥翼輸焉奐焉。 猗歟! 盛哉。 凡厥附注之流, 孰不欲興起, 而奮庸以副我聖上陶鑄振作之盛德至意乎。 合行條件, 開錄于左。 禁旅創設之初, 必肄藝是院, 或試閱于禁中, 宏遠之謨, 經長之圖, 不勝攅頌。 而倣各營朔操及中日之例, 每月行操, 仲朔私習, 著爲定式。 司馬之詰戎於郊, 雖曰治兵之大要。 在昔龍將虎將分肄課習, 蔚有成效, 尙稱美制。 趁今院廨之重新, 參酌倚衡, 更申月習之古規者, 誠爲簡當懋實之政。 從今以後, 別將必於每朔初日聚會於本院, 肄習進退馳逐之節, 亦於春秋本兵行操於敎場, 以振軍容。 敎場之以驚梁硬定者, 本非古法。 毋論南小營、沙阿里、慕華館, 從便設行, 以復舊例。 至於私習及組練應行事例, 令兵曹撰成節目, 啓下擧行。】
정조 49권, 22년(1798 무오/청가경(嘉慶) 3년) 10월 5일(을미) 3번째기사
길재의 시호를 바꾸고, 정붕·김육·안준의 시호를 정하게 하다
이익운(李益運)이 아뢰기를,
“고려(高麗)의 충신 길재(吉再)를 금오서원(金烏書院)에서 치제(致祭)하던 날 도내의 유생 수천명이 신에게 정단(呈單)하였는데 바로 길재의 시호(諡號)를 개정하자는 일이었습니다.
옛날 선조(先朝)때에 도신(道臣)이 진달한데 따라 충절(忠節)이라는 시호를 내렸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동방의 성리학(性理學)은 정몽주(鄭夢周)와 길재에 의해 창도(唱導)되었고 그 문하에 이르러서 천명(闡明)되었습니다.
융경(隆慶)6772)초에 조사(詔使) 허국(許國)이 동방의 효열절의(孝烈節義)와 공(孔)·맹(孟)의 심학(心學)을 전수받은 사람에 대해서 물어보았을 때 선정신(臣先正) 이황(李滉)이 예관(禮官)으로서 구별해 대답하면서 길재를 심학쪽에 배치하였으니, 이는 대체로 길재가 이룩한 학문의 공이 절의보다 훨씬 비중이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시호에 단지 충절만 거론한 것은 현인을 본받게 하는 의리에 부족한 점이 있으니 해조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고(故) 교리 정붕(鄭鵬)은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업을 받고 적전(嫡傳)이 되었는데 정밀하게 사색하며 힘써 실천하였습니다.
일찍이 구용(九容)·구사(九思)의 조목에다《단서(丹書)》에서 말한 경태(敬怠)의 분류를 부가해 책상위에 그려서 붙여놓고 반우(盤盂)에서 경계한 뜻을 되새겼는데6773) 선정신 이황이 그의 조예가 정밀한 것을 칭찬하였습니다.
그리고 문목공(文穆公) 신 박영(朴英)이 무인(武人)출신으로서 관직을 버리고 강학(講學)하자 정붕이 장려하고 타이르며 계발시켜 주기도 하였습니다.
문정공(文貞公) 신 김육(金堉)이 지은《기묘록(己卯錄)》에도 정붕의 사적(事蹟)이 실려 있습니다. 대체로 정붕은 기묘명현(己卯名賢)과 마음과 덕을 같이하였는데, 그만은 유독 물여우가 독기를 쏘아대며 몰래 엿보던 때에 장래의 일을 예견하고 초연히 멀리 떠난 결과 제거 대상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금고(禁錮)되고 적몰(籍沒)되는 화를 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과 도는 기묘명현과 같았으니 그야말로 ‘살아서는 뜻을 같이 하고 죽어서는 같은 전(傳)에 실린다[生同志死同傳]’6774)고 한 것과 같다하겠습니다. 따라서 날조된 모함에 걸려들었던 선류(善類)들 거의 모두가 조가(朝家)로부터 포숭(褒崇)되는 의전(儀典)을 받은데 반해 정붕만 유독 빠졌던 것은 단지 그가 기묘년의 화적(禍籍)에 실려있지 않았기 때문일 뿐입니다. 그리고 선산(善山)의 금오서원은 바로 정붕을 연향(聯享)하는 곳이기도 한데 1묘(廟)의 5인가운데 정붕만 시호가 없는 것도 조정의 흠전(欠典)이 될 듯하기에 감히 진달드립니다.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충개공(忠介公) 김제(金濟)를 평해(平海)에서 제사를 올린 것은 해변의 성전(盛典)이었습니다. 이에 영남의 사민(士民)들 거의 모두가 제사를 올린 이곳에 사당을 짓고 매년 제사를 드리려 하면서 신에게 돌아가 아뢰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안준(安俊)은 고려말에 정몽주와 마음을 합해 쓰러지는 나라를 일으켜 세우려하다가 몽주가 죽은 뒤에 우현보(禹玄寶)등과 함께 예천(醴泉)으로 장류(杖流)되었는데 그대로 그곳 노동(蘆洞)에 터를 잡고 살면서 호(號)도 스스로 노포(蘆浦)라고 한 뒤, 늘 도롱이와 삿갓 차림으로 형적을 감추고 살다가 생을 마쳤습니다.
길재가 언젠가 그에게 글을 보냈는데 그 대략에 ‘강산도 옛날과 다르고 경치도 모습이 바뀌었네. 사방을 둘러봄에 온통 부끄러움뿐. 이쪽 오산(烏山) 역시 일월은 그대로나 구름은 자꾸 변하는데, 여기에 초막짓고 낮을 밤삼는다오. 행여나 지인(至人)을 다시 한 번 만났으면’하였으니, 이것을 보아도 그가 길재와 뜻이 같고 도가 합치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태 절혜(節惠)6775)의 의전(儀典)을 받지못했으므로 영외(營外)의 다사(多士)가 연명(聯名)으로 정단(呈單)하기에 감히 진달합니다.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하니, 따랐다.
註6772]융경(隆慶):명목종(明穆宗)의 연호. 註6773]구용(九容)·구사(九思)의 조목에다《단서(丹書)》에서 말한 경태(敬怠)의 분류를 부가해 책상위에 그려서 붙여놓고 반우(盤盂)에서 경계한 뜻을 되새겼는데:구용은 군자의 아홉 가지 용모로서 족용중(足容重)·수용공(手容恭)·목용단(目容端)·구용지(口容止) ·성용정(聲容靜)·두용직(頭容直)·기용숙(氣容肅)·입용덕(立容德)·색용장(色容莊)을 말함. 《예기(禮記)》옥조(玉藻) 구사는 군자가 생각해야 할 아홉 가지 일로서 시사명(視思明)·청사총(聽思聰)·색사온(色思溫)·모사공(貌思恭)·언사충(言思忠)·사사경(事思敬)·의사문(疑思問)·분사난(忿思難)·견득사의(見得思義)를 말함.《논어(論語)》계씨(季氏).《단서》는 태공망(太公望)이 무왕(武王)에게 전해준 글인데, 그 속에서 “공경하는 마음이 태만하는 마음을 이기면 길하고 태만하는 마음이 공경하는 마음을 이기면 멸망한다[敬勝怠者吉怠勝敬者滅]”라고 하였음. 반우는 황제(黃帝)의 사관(史官)인 공갑(孔甲)이 지었다고 하는 명(銘)으로서 26편의 글을 그릇에 써서 경계한 것임.註6774]‘살아서는 뜻을 같이하고 죽어서는 같은 전(傳)에 실린다[生同志死同傳]’:사마군실(司馬君實)과 범경인(范景仁)이 서로 지기가 된 뒤 “우리가 살아서는 뜻을 같이하고 죽어서도 같은 전에 수록될 것인데 천하 사람들이 감히 우열을 가리지못할 것이다”고 한 고사임. 원본의 “생동전사동지(生同傳死同誌)”는 “생동지사동전(生同志死同傳)”의 착오인 듯함.註6775]절혜(節惠):시호(諡號).
○李益運啓言: “高麗忠臣吉再金烏書院致祭之日, 道內屢千章甫, 呈單於臣, 卽吉再改諡事也。 昔在先朝, 因道臣陳聞, 賜諡忠節。 而吾東性理之學, 倡自鄭夢周、吉再, 及其門而闡明之。 隆慶初, 詔使許國, 問東方孝烈節義孔、孟心學之人, 先正臣李滉爲禮官, 區別以對, 而以再置之於心學, 蓋以再學問之功, 尤重於節義故耳。 諡號之只擧忠節, 有欠象賢之義, 令該曹稟處。” 從之。 又啓言: “故校理鄭鵬, 受業於文敬公金宏弼之門, 得其嫡傳, 精思力踐。 嘗以九容、九思之目, 申之以《丹書》敬怠之分, 作爲案上圖, 以寓盤盂之戒, 先正臣李滉, 稱其造詣之精。 文穆公臣朴英, 出自弓馬, 棄官講學, 鵬將諭而啓發之。 文貞公臣金堉所撰《己卯錄》, 亦載鵬之事蹟。 蓋鵬與己卯諸人, 同心同德, 而獨能逆覩於蜮弩潛伺之時, 超然遠擧, 而不入標榜之中, 得免錮籍之禍。 而其心與道, 則與己卯諸人, 眞所謂 ‘生同傳死’ 同誌者也。 善類之絓罹羅織者, 擧蒙朝家褒崇之典, 而鵬獨漏焉者, 特其不載於己卯禍籍故耳。 且善山之金烏書院, 卽鵬聯享之所, 而一廟五人之中, 鵬獨無諡, 恐爲朝家缺典, 敢達請。 令該曹稟處。” 從之。 又啓言: “忠介公金濟之致祭平海, 海上盛典也。 嶺南士民, 擧欲就此致祭之所, 建祠歲祭, 而要臣歸奏。 請令該曹稟處。” 從之。 又啓言: “判奉常寺事安俊, 當麗季, 與鄭夢周, 協心扶顚, 夢周死後, 與禹玄寶等, 同被杖流于醴泉, 因卜居蘆洞, 而自號焉。 嘗着簑笠, 鞱晦以終。 而吉再嘗與書, 略曰: ‘江山殊古, 雲物變熊。 擧目四覩, 無物不靦。 一面烏山, 舊日新雲, 於焉結盧, 以晝爲宵。 倘與至人, 更獲一見。’ 此可謂與再, 珍道合。 而尙未蒙節惠之典, 嶺外多士, 聯名呈單, 故敢達請。 令該曹稟處。” 從之。
정조 52권, 23년(1799 기미/청가경(嘉慶)4년) 8월 29일(을묘) 1번째기사
초야에서 높은 학문을 닦은 선비를 등용하는 것은 중요한 정사임을 전교하다
전교하기를,
“유학으로 나라를 세운 것은 삼대(三代) 때의 아름다운 법도이다.
희공(姬公)7089)은 마땅히 사랑할 사람을 사랑하고 마땅히 존경할 사람을 존경하였으며, 태공(太公)7090)은 어진이를 등용하고 공이 있는 자를 높였으므로 주나라 선비들은 귀하게 대접을 받았다. 한(漢) 고제(高帝)는 후덕한 인물이었는데 소하(蕭何)와 조참(曹參)이 맑고 깨끗한 정치로 보좌하고 문제(文帝)와 경제(景帝)의 순후함이 뒤를 이었으나 오히려 황(黃)·로(老)7091)가 뒤섞였으며, 동한(東漢) 이후로는 더 이상 선왕(先王)의 기풍이 없었다.
홍범(洪範)7092)의 오복(五福)에서는 덕을 좋아하는 것이 네 번째에 들어있고, 태재(太宰)7093)의 팔통(八統)에서는 어진 사람을 등용하는 것이 세 번째로 들어있다. 우리나라는 이것을 크게 숭상한 결과 역복(棫樸)7094)이며 청청자아(菁菁者莪)7095)와 같은 시들이 성황을 이루었다.
이를테면 목릉(穆陵)7096)의 융성하던 때에는 기(夔)·용(龍)7097)처럼 뛰어난 신하들이 조정에 포진해 있었는데 그 당시 문순공(文純公)7098)과 문성공(文成公)7099)이 그 표준이 되었으며, 세상이 아주 잘 다스려졌던 영릉(寧陵)71 00)때는 예악이 꽃을 피워 노래가락에 올려졌는데 그 때도 문경공(文敬公)7101)과 문정공(文正公)7102)이 좌우에서 보좌하여 그 빛나고 성대한 정치는 그 유래가 없을 정도였다. 그리하여 올바른 학문이 밝혀지고 사특한 설은 사라져 우리 해동이 공(孔)·맹(孟)의 나라가 되고 후세에 장횡거(張橫渠)와 주자의 지역이 되었으니, 전해오는 말에 군자의 나라라고 한 것이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옛날의 입장에서 오늘을 본다면 오늘의 현상은 과연 어떠한가?
지금 나라안의 사람을 등용하면서 재정을 맡아볼 사람이 없다느니, 군정을 다스릴 사람이 없다느니 하는 한탄이 많으나 내 생각에는 재정과 군정 따위는 그것을 맡은 유사가 따로 있고 고민되는 것은 초선(抄選)7103)을 오랫동안 실시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
나예장(羅豫章)7104)이 말하기를 ‘경술(經術)7105)은 동생(董生)7106)과 공손홍(公孫弘)이 그 길을 열어놓았으나 주공(周公)·공자의 본심을 잃어버렸다’고 하였다. 대체로 이른바 ‘경술’이란 두 글자는 도를 밝히는 자의 요체가 아니긴 하지만 근래 30, 40년동안에는 그 경술마저도 들어보지 못하였다.
들어보기를 구하지않는 것은 사람에게 매인 것이지만 들으려해도 듣지못한 것은 시대에 관한 것이다.
지금 비록 극히 공평한 마음과 참다운 정성으로 도를 밝혀보자고 발벗고 뛰어드는 공자 맹자같은 사람이 또 나온다하더라도 도저히 손을 쓸 도리가 없게 되었는데, 그 책임은 사람에게 있는가? 시대에 있는가?
지금 특별히 초빙하는 사람으로는 두 유신(儒臣)이 있을 뿐인데 쓸쓸한 산골에 버려져 세상을 멀리하는 마음을 잡아돌리지 못하니, 내 스스로 반성해 마지않는다. 그렇지만 나를 돌아보지 않는다하여 아예 찾지를 않는다면 초야에서 글을 읽은 선비는 장차 등용될 날이 없을 것이다.
선비가 등용되지 않는다면 나라가 과연 다스려질 수 있겠는가? 세상의 도리는 이로 인해 허물어질 것이고 조정의 기상은 이로 인해 파탄이 날 것이고 민간의 풍속은 이로 인해 혼탁해질 것이므로 항상 한밤중에는 근심이 되어 한탄하며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삼대 이후에는 오로지 과거시험으로만 사람을 뽑아왔다.
당나라때 양관(楊綰)과 이덕유(李德裕)가 이미 제도를 고치자는 의논이 있었으나 천년세월을 이어온 잘못을 갑자기 개혁할 수는 없었다.
이 때문에 음관(蔭官)도 과거를 보게하자는 논의가 섣달에 있은 인사행정 석상에서 거론되었던 것이나 이 또한 근본과 시초를 바로잡는 계책은 아니다.
뛰어난 선비 한 사람을 얻으면 충분히 백관들의 귀감이 될 수 있는 법이니 당장 시급한 것은 어진 사람을 구하는 것보다 앞설 것이 없다.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덕있는 자를 우대하고 어진 사람을 믿으면 오랑캐들도 복종할 것이다’하였다. 만약 조정이 유가의 학술을 높이고 장려한다면 어찌 바른 학문이 밝아지지 않을까 걱정하고 간특한 설이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할 것인가? 주자의 글을 전부 모아 하나로 묶어 편집하는 것은 곧 내가 세상을 일깨우고 풍속을 안정시키자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그것을 엮고 손질하는 작업이며 토론하고 밝히는 일은 마땅히 몸을 닦고 실천하는 선비와 함께 하여야 할 것이다.
대체로 이른바 초선(抄選)이란 이름이 나오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 대상자를 엄격하게 가려뽑는다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선대왕조 때에 규정을 정한 뒤에는 법의 의미가 한층 강화되어 그 선발에 일단 들어가면 유일(儒逸)로 대우하였다. 지금 내가 구하는 자는 글을 읽은 선비이다.
그에게 경전의 뜻을 물어 시험해보고 또 내외의 관직을 맡겨 시험해 본 뒤에 과연 초선을 하기에 합당한 인물이라면 묘당과 이조가《통편(通編)》과 수교(受敎)의 규정에 따라 빈청(賓廳)에 모여놓고 그 중에서 선발하여 천거하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그대들 정부의 신하들은 지금 내가 내리는 윤음(綸音)을 잘 받들어 성심껏 찾아내어 각기 차례대로 등용될 수 있게 하라.
그리고 주부자의 저서로 말한다면 곧 천지간에 손꼽히는 문자로서《중용》·《대학》·《논어》·《맹자》와 함께 서로 안팎을 이루는데 그것을 숭상하는 풍속은 지금이 옛날보다 못하다. 이 때문에 나는 그것을 강론하여 드러내기를 옛날 정부자(程夫子)가《예기》속에 들어있는 중용·대학을 끄집어내어 특별히 드러냈던 것처럼 하여 집집마다 사람마다 외우고 익히게 하려 한다.
조정의 선비나 유생으로서 주자의 글을 전문으로 공부한 자에 대해 안으로는 대신 및 이조의 관리와 밖으로는 각도의 감사들에게 각기 자기가 듣고 본대로 이름을 적어 아뢰게 하라.
오늘날 해야 할 실제 정사로서 어찌 이보다 큰 것이 있겠는가?”하고
또 전교하기를,
”경들은 초야에 있으므로 반드시 글을 읽은 선비를 알 것이다.
만약 사람을 천거하는 것을 어렵게 생각한다면 주부자의 글을 전념하여 외우고 익힌 자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자는 우선 즉시 아뢰고 나중에 알아낸 자는 나중에 아뢰어라’라는 내용으로 내각에게 지방에 있는 유신에게 하유하도록 할 것이며, 또 반장(泮長)에게 태학과 사학(四學)의 유생가운데 주부자의 글을 깊이 공부한 사람을 유신과 똑같이 아뢰게 하라”하였다.
註7089]희공(姬公):주공(周公)의 별칭.註7090]태공(太公):주나라 여상(呂尙)의 별칭.註7091]황(黃)·로(老): 황제(黃帝)와 노자(老子). 곧 도가(道家)를 가리킴 註7092]홍범(洪範):《상서(尙書)》의 편명.註7093]태재(太宰):《주례(周禮)》의 편명 註7094]역복(棫樸):《시경》의 편명. 문왕의 덕을 노래한 시. 註7095]청청자아(菁菁者莪):《시경》의 편명. 군자의 의표가 성대한 것을 노래한 시.註7096]목릉(穆陵):선조의 능호.註7097]기(夔)·용(龍):우순(虞舜)의 어진 두 신하의 이름 註7098]문순공(文純公):이황(李滉)의 시호.註7099]문성공(文成公):이이(李珥)의 시호.註7100]영릉(寧陵):효종의 능호. 곧 효종을 말함 註7101]문경공(文敬公):김집(金集)의 시호.註7102]문정공(文正公):송시열(宋時烈)의 시호.註7103]초선(抄選):정승과 이조의 당상관들이 경연관을 골라 뽑는 일 註7104]나예장(羅豫章):송나라 나종언(羅從彦).註7105]경술(經術):경학(經學).註7106]동생(董生):한(漢)나라 동중서(董仲舒).
○乙卯/敎曰: “立國以儒, 三代之懿範也。 姬公親親而尊尊, 太公擧賢而上功, 故周之士也貴。 漢高帝長者也, 蕭、曹以淸凈相之, 繼以文、(章)〔景〕之醇穆, 而猶雜於黃老, 東京以來, 無復先王之風者。 《洪範》五福, 好德居四, 《太宰》八統, 進賢爲三。 惟我朝惇尙於斯, 《樸棫》、《菁莪》之詩, 蔚然以興。 如穆陵盛際, 夔、龍布廷, 而厥有文純、文成爲其標準, 如寧陵在宥, 玉瓚黃流, 播之金石, 而亦粤文敬、文正在其左右, 彬郁之治, 莫之與京。 而正學明, 邪說伏, 鄒魯於左海, 關閩於後代, 傳所稱君子國者是也。 由乎昔而視乎今, 今之時果何如也, 今也域人而用之曰, 官金穀者無人焉, 理卒乘者無人焉, 予則謂金穀卒乘, 則有司存, 所可憫者, 抄選之久曠云耳。 羅豫章之言曰: ‘經術, 自董生、公孫弘啓之, 而失周、孔之心。’ 夫所謂經術二字, 非明道者之目, 而挽近三四十年, 竝與經術而無聞焉。 不求聞在人, 不得聞在時。 雖有至公血誠麤拳大踢, 如孔、孟夫子復出, 到底無着手處, 顧其責在人乎在時乎, 見今旌招之列, 只有二儒臣, 而白駒空谷, 遐心莫挽, 予固自反之不暇。 然而謂莫我顧, 初不求之, 則林下讀書之士, 將無登庸之日。 士不登庸, 國其乂乎, 世道之斁敗, 由於是, 朝象之潰裂, 由於是, 民俗之淆漓, 由於是, 每中夜耿歎, 寤言明發。 三代之後, 專以科目取人。 自楊綰、李德裕已有改制之議, 而悠謬千載, 猝不可以更張。 則此所以蔭吏設科之論, 出於臘政筵上者, 亦非端本正始之策。 得一士足以亮工時之義, 莫先乎求賢。 《書》曰: ‘惇德允元, 蠻夷率服。’ 如使朝廷崇奬儒術, 何憂乎正學之不明, 何患乎邪說之不伏, 朱子書裒輯一統, 卽予牖世靖俗之意, 而編摩之役講明之方, 當與劬躬績行之士共之。 大抵所謂抄選之名出, 而嚴其選而已。 又至于先朝定式之後, 法意尤爲自別, 一入是選, 以儒逸待之。 今吾所求之者, 讀書之士也。 欲試之於經義之顧問, 又試之於內外之官職, 人苟可合於抄選, 則廟堂吏曹, 遵《通編》受敎, 會于賓廳, 就其中以抄選議薦亦可。 咨爾政府之臣, 須體十行之諭, 誠心採訪, 俾各次第彙征。 又若朱夫子書, 卽天地間有數之文字, 而可與《庸》、《學》、《論》、《孟》, 相爲表裏, 尊尙之俗, 今不若古。 予所以講明而表章之, 欲令家家人人, 誦習者, 政若程夫子之表章《庸》、《學》於戴《禮》篇中。 朝士儒生之專治於朱子書者, 內而大臣銓臣, 外而諸道方伯, 各令以聞見錄聞。 今日實政, 豈有過於是也,” 又敎曰: “卿等在林下, 必知讀書之士。 如以薦人爲難之, 則專意誦習朱夫子書者, 須以已知者, 先卽附奏, 追知者, 追後報聞事。 令內閣下諭在外兩儒臣,亦令泮長,太學四學生中, 一體報聞。”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