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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에큐메니칼운동(Ecumenism)과 세계교회협의회(世界敎會協議會,WCC)
(1) 세계교회협의회(世界敎會協議會,WCC)의 태동과 위상
세계교회협의회(世界敎會協議會), 즉 WCC는 "World Council of Churches"의 약칭으로 교회의 일치와 갱신, 교회들의 대화와 논의, 교단과 교파적 이해관계를 떠난 상호이해의 정신으로 봉사하고 협력할 수 있는 협의단체로 구성되었습니다. WCC는 교회가 아니며, 교회에 대해 명령하거나, 어떠한 지시도 내릴 권한을 갖고 있지 않은 비구속적, 보편적 대화의 조직적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1910년, 에든버러에서 개최된 세계선교협의회(WMC,World Missionary Conference)는 WCC설립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신앙과 질서(Faith and Order), 생활과 사업(Life and Work), 국제선교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의 3대 조직으로 시작된 WMC는 1925년, 스톡홀름에서 1차대회를 개최하였습니다. "교리는 달라도 봉사는 함께"(Doctrine Divides but Service Unites)라는 주제로 개최된 WMC는 1927년, 스위스 로잔느에서 개최된 생활과 사업(Life and Work)위원회와 영국 에든버러에서 개최된 신앙과 질서(Faith and Order)위원회를 통하여 WCC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44개국 147개교단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주를 하나님과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교회들의 연대모임”으로 창설되었습니다. WCC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태동한 에큐메니컬운동(敎會一致運動, Ecumenical movement, ecumenism)의 연장선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생활과 실천운동은 교회활동에 중심을 두었고, 신앙과 직제운동은 교회의 신앙과 조직에 중심을 두었습니다. 이 두가지의 운동이 에큐메니즘(ecumenism)과 결합하면서 단일조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이었습니다. 1937년, 에든버러에서 개최된 신앙과 직제협의회와 옥스퍼드에서 개최된 생활과 실천협의회는 통합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1938년, 네덜란드의 위트레흐트에서 회의를 개최하였습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WCC 1차 총회는 1948년에 개최되었습니다. 1961년에는 국제선교협회가 WCC에 가입하는 등 각각의 단체와 교회들이 WCC에 가입을 하였습니다.
WCC에서 파생된 국제선교협의회(IMC,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는 3차대회인 뉴델리대회에서 공식 추인된 이래 1954년, 에반스톤대회, 1961년, 뉴데일리 대회, 1968년, 웁살라 대회, 나이로비 대회 등에서 교회 조직적 일치와 사회참여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습니다. WCC는 신앙과 질서(Faith and Order)위원회, 생활과 사업(Life and Work)위원회, 국제선교협의회(International Missionary Council)라는 다른 성격의 3대 조직이 상호 경쟁과 연합을 통하여 발전하고 성장해 왔습니다. 1948년, WCC는 "하나의 세계, 하나의 교회"(One World, one Church)라는 주제로 시작되었지만 기독교회의 가견적이며 조직적인 통합을 추구하는 목적 때문에 신학적 자유주의와 혼합주의를 극복할 수 없었으며, 이로 인하여 신념이 다른 구령사업보다 공동의 사회참여에 치중할 수 밖에 없었고, 복음보다 성례전적인면에 치중할 수 밖에 없는 근본적인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계교회협의회, 즉 WCC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성경에 따라 하나님이신 구세주로 고백하며 한 하나님, 한 아들, 한 성령의 영광을 위하여 부르신 공도의 부름을 함께 성취하려고 노력하는 교회들의 협력 단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WCC는 회원교단의 자유로운 교리와 활동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WCC초기 지도자인 템플은 "협의회의 권위란 회원교단들로 하여금 그들 나름대로 활동하도록 최대한 허용하는데 있다"고 명시하였습니다. 또한 "모든 회원 교단은 각자 본 협의회의 결정과 활동을 거부할 수 있는 합법적인 권리를 가진다"고 정의 하였습니다. 광범위한 종교통합을 위하여 강제성과 제한성을 유보하고 자율적인 협의회로 나아가려는 WCC의 정체성은 WCC 스스로가 복음적 단체가 아님을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WCC가 동성연애에 대하여 관대한 입장을 취하고, 이단, 이교 등 전혀 다른 성격의 종교지도자들까지 연합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추구함으로서 기독교의 본질을 왜곡하고, 진리에 심각한 오염을 제공하는 단체로 추락해 버렸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보수기독교 단체들은 이와같은 WCC를 의구심의 눈길로 바라보고 있으며, 그들의 행보가운데 교회들"Churches"을 제외하여 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2) 복음주의 협회(福音主義協會,NAE)
NAE(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는 1941년 데이비드와 에드윈 라이트는 시카고 무디성경학교에 회집하여 FCC에 대항하는 복음주의 성격의 연합체를 구성하고, 1942년, 미국 34개 교단, 147명의 미국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40여개의 교단과 독립종교단체들, 지역의 개별 교회들, 교회 단체들, 또한 개인적인 기독교인들이 협회에 정식적으로 가입 하였습니다. 소속된 모든 회원들은 성경을 "영감에 의한 유일무이, 절대무오, 절대권위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할 것과, 근본주의적 기독교 교리가 규정하는 범주를 철저히 지킬 것"을 명백히 하는 "신앙진술서"(Statement of Faith)에 반드시 서명을 해야만 가입이 되었습니다.
NAE는 복음전도, 교회부흥과 확장, 지역의 구제, 공공문제, 고등교육, 미션스쿨, 주일학교, 도서출판, 해외선교, 평신도 사역, 라디오 및 텔레비전 방송, 정부기관 기관목사, 국제관계협력, 사회봉사활동, 청지기직, 영적 생활, 신학적 관심 등 기독교 전반분야에서 선교회와 전도를 위한 부속기관을 활용하고 회원단체들의 유익에 선도적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산하 단체인 "복음주의 해외선교협회"와 "전국 기독교 교육협회", "전국기독교방송인 협회"등을 통하여 NAE의 활동을 보다 결속력 있게 하고 정치사회적으로도 영향력 있는 단체로 발전하였습니다. NAE는 일리노이주 휘턴에 행정총괄본부를 두고 워싱턴, 뉴욕, 각 주의 수도등에 각각 연락사무소를 두고 있으며,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한국의 협회 설립에도 적극적인 관여를 하였습니다. 영국 런던에 본부를 두고 있는 세계복음주의연맹(WEF,World Evangelical Fellowship)과 공식적으로 연계되어 있으며, 상호협력관계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1948년, 김재준 계열의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한 조선신학교 51명과 여신학생 10명은 학교를 자퇴하고 신앙동지회를 결성하였습니다. 이들은 보수적 성경의 권위와 정통적 교리를 고수한다는 입장을 공개 천명하며 그 세력을 규합하였습니다. 신앙동지회는 복음적 신앙을 가진 각 교파에 소속된 신도들이 서로 협동하여 주님 안에서 서로 교통하고 동일한 신앙고백에 찬동하는 각 교파의 사람들이 자유롭게 가입할 수 있는 자발적인 신앙협동단체로 규정하였습니다. 1950년, 6.25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보수적 교회연합체인 미국복음주의협회(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 운동과 접촉함으로서 협력과 제휴를 모색하였습니다. 1952년 7월, 정규오 회장을 중심으로 한국복음주의협회를 창립하고 박형룡 고문을 추대하였습니다. 이들은 미국 복음주의협회(NAE)와 세계복음주의협회(WEF)에도 가입하여 1955년, 정식회원단체가 되었습니다.
(3) WCC와 한국교회와 한경직 목사의 에큐메니칼운동
1949년, 한국교회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개최된 WCC총회에 김관식 목사를 옵저버 자격으로 파견하였습니다. WCC총회를 스크린한 김관식 목사의 제안과 요청으로 한국교회협의회는 회원으로 정식 가입을 하였습니다. 한국장로교는 고신교단과 기독교장로회로 분열된 후 1954년 8월15일, 미국 일리노이주 에반스톤에서 “세계의 희망은 그리스도다”라는 주제로 개최된 제2차 WCC세계총회에 명신홍, 김현정 등 2명의 대표를 파송하였습니다. 한국교회의 2차총회 파송은 1차 총회이후 WCC가 신자유주의 노선을 표방하며 범종교적인 색채로 전환하고 있다는 전언에 대한 확인이었습니다. 장로교 외에 감리교와 한국기독교연합회와 YMCA 대표를 파송하였으며 김정준은 신문기자 자격으로 참석하였습니다. WCC 제2회 총회는 163개국 132개 기독교교단, 헬라정교회대표 1,242명, 499명의 방청객 등 2,4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에반스톤 노스웨스턴대학에서 개최하였습니다. 김현정 목사는 WCC에 대하여 긍정적인 입장을 견지하였고, 명신홍 목사는 WCC에 대하여 신학적 문제가 있어서 부정적인 입장을 보고하는 등 두사람의 신학적 견해와 지지방향이 달랐습니다. 두사람의 견해차는 한국교회가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북장로교선교회, 호주선교회, 캐나다연합선교회 등 WCC찬성자들은 한국교회가 세계신학조류와 맥을 같이하고 이들과의 유대 필요성을 제기하며 적극적인 참여와 지지를 주장하였습니다. 반대로 WCC와의 교류를 거부하는 남장로교선교회는 “교회의 일치”(Ecumenism,에큐메니칼)를 말하지만 “교회의 연합”을 위한 단체이며 이를 위해 정통적이고 보수적인 신학의 빗장을 열어 새로운 신학조류를 수용하고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성향에 경악을 금하지 못하였습니다.
한국교회에서 최초로 반에큐메니칼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은 1947년, 조선신학교 학생 “51인사건”의 주역 51인과 이들과 동일한 맥락에서 지지하였던 여신학생 10명이었습니다. 이들은 “신앙동지회”를 결성하고 1951년, NAE(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 복음주의협의회 구제위원회를 통해 1952년 7월24일, “한국NAE”를 조직하였습니다. NAE는 전통주의 신앙계승과 함께 다양한 종말론을 수용하면서 사회적 영향력을 회복하며 1942년, 미국에서 결성되었고 한국에는 구호물자를 보내면서 신앙동지회와 연결되었습니다. 1952년 7월24일~31일까지 전남 남평에서 개최된 한국NAE 창립총회에서 정규오 회장, 손치호, 박영창 부회장, 조동진 총무, 김덕수 서기, 신복윤 회계가 선출되었고 박형룡 박사가 고문으로 추대되었습니다. 한국NAE는 문서, 신학, 교육, 전도, 음영, 농촌, 청년, 학생, 재건구제위원회 등 하위분과를 설치하여 활동을 구체화하였습니다. 한국NAE는 복음적 신앙과 일치된 신앙고백을 기본 이념으로 하는 기독교 각 교파소속 신자들의 상호협동, 상호교통, 자발적 신앙협력단체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국NAE는 한국교회협의회(KNCC), 세계교회협의회(WCC), ICCC, 에큐메니칼운동을 반대하였습니다.한국NAE는 1955년 8월, 1951년 런던에서 설립된 “세계복음주의협회”(WEF(World Evangelical Fellowship))에 정식으로 가입하고 장로교와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구세군에게 문호를 확대하였습니다. 이로서 목사 1,200명, 단체회원 15,000명, 개인회원 135,000명, 한국기독학생회(IVF), 복음주의방송국(HLKX)이 회원으로 가입하였습니다. 초대회장 정규오 목사 등 반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이 회장을 역임하였습니다. 195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한국교회는 에큐메니칼운동 지지세력과 반대세력간의 진영으로 재편되었고 장로교와 성결교의 2차분열을 가져왔습니다.
한국 에큐메니칼 운동에는 한경직 목사가 있었습니다. 남한에서 가장 큰 교회인 영락교회의 담임목사인 한경직 목사는 1954년, 숭실대학을 복원하고 학장에 취임하였으며 복음전파와 사회적 책임이라는 교회 목표를 선언하였습니다. 1955년, 제40회 총회장에 취임한 한경직 목사는 1956년, KNCC회장에 취임하며 에큐메니칼 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갔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신학적으로는 보수적 복음주의 노선에 위치하였습니다. 그러나 연합운동에 있어서는 에큐메니칼(교회일치)리즘 노선을 주장하였고 교파주의에서는 중도적인 입장을 견지하였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영락교회에서 성서중심의 복음주의적 신앙과 폭넓은 에큐메니칼 정신을 강조하였습니다. 그가 교회에서 표방한 4대이념은 한경직 목사의 목회적 가치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서중심의 복음주의적 신앙, 경건한 청교도적 생활훈련, 에큐메니칼 정신으로 교회 상호간에 협력과 연합사업, 교회의 대 사회적 양심의 구현”을 통하여 복음과 사회구현이라는 두가지 목적을 달성하려 하였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뉴톤 블레어의 조사로 미국에 유학하여 엠포리아대학과 프린스톤신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구프린스톤보다는 진보적이었습니다. 그는 메이첸 교수를 매우 보수적인 교수로 지명하였고 그 외에 다양한 분야로 망라하는 폭넓은 견지의 교수들을 옹호하였습니다. 한경직은 귀국후에 진보주의자로 알려진 김재준과 함께 조선신학교 설립을 주도하였습니다. 조선신학교 매입을 위해 김재준과 한경직 목사가 주선하는 과정에서 천리교 경성제일교회 건물을 영락교회가 불하받음으로서 김재준측과 한경직 목사측간에는 미묘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김재준과 한경직 목사는 서로 다른 노선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1952년, 고려파의 분열과 성경관 문제로 김재준이 총회에서 이단으로 제명될 때 한경직 목사는 중도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김재준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지 않았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복음적인 입장에서 김재준의 진보주의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전통적이고 성경중심의 사상을 옹호하였습니다. 한편으로 한경직 목사는 “에큐메니칼”을 수용하였습니다. 그는 에큐메니칼이 성경에 14에 걸쳐 기록되어 있음을 근거로 자신을 옹호하였습니다. 에큐메니칼운동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온 세계에 까지 복음을 전파하자는 것이며, 온세계 성도들이 어떻게 해서든 상호 연합해서 하나가 되자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한경직 목사에게서 에큐메니칼 운동은 신신학도 아니고 용공사상도 아니고 오직 교회일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1960년, 에큐메니칼운동은 남미의 해방신학과 제3세계 이념신학으로 등장하였다는 측면에서 우려하였던 경향이 현실화 하였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하려는 노력과 함께 신학의 다양한 생각들을 수용하려는 자세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자신의 생애를 통하여 한경직 목사는 박형룡 박사와 항상 대척점에 위치하였고 자신의 주장과 상관없이 에큐메니칼이 추구하는 방향과 그 노선에 위치하였음을 부인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4) 에큐메니칼운동의 대립과 합동,통합교단 창설
1956년 9월, 제41회 총회에서 에큐메니칼 연구위원회를 발족하고 한경직, 전필순, 유호준, 안광국 등 4명의 찬성측과 박형룡, 박병훈, 황은균, 정규오 등 4명의 반대측 위원 8명의 전문가가 위촉되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는 WCC에 신신학, 단일교회, 용공사상, 범종교사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에큐메니칼운동을 적극 지지하였습니다. WCC는 교회연합운동으로 하나의 교회를 세우려는 단일화 운동이 아니며, 특별한 교리가 없이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구주로 믿는 교파의 연합”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1957년 9월, 42회 총회에서 연구위원회는 그 동안의 조사내용을 보고하였습니다. “에큐메니칼운동 지지자들은 1단일교회 옹호론과 2교회의 친선 및 연합을 목표로 하는 두가지로 대변하였습니다. 그리고 친선과 협조만을 위한 에큐메니칼 운동은 앞으로도 계속 참석하지만 단일교회를 지향하는 운동에 대하여는 반대하기로 하였습니다. 또한 각 교회에 에큐메니칼운동에 대한 바른 교육과 홍보를 위해 팜플릿 제작을 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인돈, 마삼락, 명신홍, 김형모 등 4명을 연구위원에 추가로 위촉하였습니다.” 그 후 43회 총회에서는 수많은 논쟁에도 불구하고 연구위원들이 보고할 내용조차 정리되지 못했습니다. 1957년 발생한 총회신학교의 “3천만환사건”은 에큐메니칼운동 반대자들을 매우 위축시키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1953년 8월, 캠블 선교사의 후임으로 신학교 교장에 취임한 박형룡 박사는 당시 총회신학교가 문교부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지 못하고 정식교사도 마련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교사부지 마련이 시급한 때에 당시 신학교 박래승 총무과장이 숭의여자중학교 이신덕 교장으로부터 소개받은 “박호근”이라는 사람이 이재학 국회부의장과 인태식 재무부장관과 친분관계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에게 숭의학교 기지 불하를 의뢰하였습니다. 박형룡 교장은 미국과 북장로교와 특별비와 경상비에 지원받은 30,162,172환이라는 거금을 박호근에게 지급하고 일에 대한 마무리를 요청하였으나 이 모든 것은 박호근의 “사기극”이었습니다. 세상 물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던 박형룡 박사의 실수와 오판이었지만 너무나 큰 금액의 손실이었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박형룡 박사는 교장직을 사임해야 했습니다. 이 사건은 결국 WCC찬성자에게 강력한 빌미를 제공하며 반대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58년, WCC를 놓고 찬반의 대립은 더욱더 심각한 방향으로 향하였습니다. 북장로교, 남장로교, 호주장로교 선교사와 한경직, 전필순, 유호준, 김형모, 계일승, 안광국 등은 WCC에 찬성하며 개방적인 정책을 꾸준히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대영, 박형룡, 명신홍, 이정노, 권연호, 이환수, 김윤찬, 황은균, 박찬목, 조동진, 양화석, 고성모, 정순모, 박종삼, 문재구, 정규오, 박병훈, 노진현 등 교계중진들은 “WCC탈퇴건의서”를 총회에 제출하며 반대하였습니다. WCC반대자들은 탈퇴건의서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주장을 총회에 안건으로 제출하였습니다. “WCC가 동방정교, 로마카톨릭과 3위일체를 부인하는 유니테리안을 포함하여 장로교 기본교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WCC는 단일교회를 지향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모든 제도와 개편작업이 단일교회를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WCC는 에큐메니칼정신으로 혼합된 새로운 보편교리와 초교회적 교회정치제도를 선전하고 이러한 정신을 가진 지도자 양성에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WCC의 에큐메니칼운동은 인문주의적, 사회학적 방법에 의한 세력의 결집과 중세기적 교권을 확립하려고 합니다. WCC는 특별히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1954년, 에반스톤 회의에서 ”성경에 기초하여“ 라는 문구를 삽입하려 하였으나 완전 부결되었습니다. 재림을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신성과 동정녀 탄생을 부인합니다. WCC는 공산주의에 이익이 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유신앙 성직자들을 투옥하고 공산주의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WCC탈퇴건의서는 장로교 내부에서 첨예한 대립을 맞는 양측이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건의서는 찬성자들의 반대에 의해 총회에서 접수만 받은채 상정조차 되지 못하였습니다. WCC찬성자들은 반대자들의 건의서가 무식, 무지에 의한 소치이며 바리새교적인 자들이라고 비판하였습니다. “WCC는 로마카톨릭으로 환원하는 운동이 아니며 극도로 형식화된 교파주의(Sectarianism)와 사상적 근본주의(Fundamentalism)속에서 다시 그리스도를 찾아내려는 세계교회들의 공동적인 노력입니다. WCC에는 칼빈주의 세계장로교회, 개혁정통교회, 가장 보수적이라고 알려진 루터파교회, 장로교회, 침례교회가 참여하고 있습니다. WCC에 참여하는 단체들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동정녀 탄생과 육신적 부활과 재림을 믿고 있습니다. 반대자들은 자기의 신앙은 긍정하고 남의 신앙은 부정하는 배타적인 신앙관을 갖고 있습니다. 반대자들은 자기들이 한번도 만난적 없는 사람들을 불신자로 매도하고 그들을 배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WCC에 참여하는 교회 가운데에는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유니테리안교회로서 네덜란드 레몬스트란드 브라더후드교회가 참여하고 있으며, 이 교회는 WCC헌장에서 “예수를 하나님과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모든 교회”라는 구절을 삭제하자고 제안하였습니다. WCC가 태동되었을 때 교회일치운동은 순수하였을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1960년대를 거치면서 세계교회의 방향은 바르트사상과 토착화 운동이 가미되었고 남미의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이 발흥함으로서 순수성을 잃어버리거나 훼손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1959년 1월, 유호준 목사의 WCC옹호와 반대자들을 향한 극한 반응에 2월, 조동진 목사가 다시 반박하고, 이에 대하여 총회장 노진현 목사와 총무 김상권 목사, 이인식, 이대영 등 교단 지도자들이 교회평화의 방안모색이라는 돌파구를 찾으려 하였습니다. “우리는 칼빈주의 신학에 입각한 교회의 전통적인 신조와 정치를 엄수하고 복음정 신앙과 성별의 생활을 고수합니다. 우리는 대한예수교장로회 42회 결의대로 에큐메니칼운동은 교파간 친선과 사업에 한정하고 단일교회운동은 하지 않습니다. NAE운동은 신앙운동과 전도사업에 힘을 기울이고 에큐메니칼과 NAE는 교회정치에 관여할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하한 용공정책과 친공산주의와 세속주의를 단호히 배격합니다. 우리는 성서적인 에큐메니칼운동은 인정하지만 WCC와 다른 기관과 단체가 총회의 순수신앙에 저해될때에는 관계를 단절할 수 있습니다.” 전필순, 한경직, 명신홍, 이호준, 이환수, 강신명, 배명준, 김윤찬, 안광국, 박찬목, 김성준, 채기은(기독공보사) 등 총회의 중재안에 서명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에큐메니칼운동을 지지하였다는 측면에서 우려와 기대가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나 1959년 5월14일, “경기노회 정기노회 총대사건”으로 또다시 재점화 되었습니다. 총회 총대선거에서 총대 28명 가운데 NAE소속이 18명 당선됨으로서 에큐메니칼 지지측이 매우 당황하였습니다. 개표 과정에서 80표를 얻은 황금천 목사가 총대명단에서 누락된 정황이 밝혀지면서 에큐메니칼 지지측이 재투표를 강하게 요구하였습니다. 결국 1959년 6월29일, NAE측이 불참한 임시노회를 개최하여 26명의 에큐메니칼 지지자 측 당선자가 선출되었습니다. 정기노회측과 임시노회측간의 대립이 비화되면서 이러한 반대측간의 적대적 감정은 골이 깊어 갔습니다. 한편 1959년 8월3일, 호남지구선교협의회 주최로 남장로교 선교구역 충남, 대전, 군산, 김제, 전서, 전북, 전남, 순천, 목포, 제주노회 등 10개노회 목사105명, 장로등 500여명의 신자들이 용공사상과 공존사상과 분열의 상징을 이유로 “에큐메니칼 반대와 WCC탈퇴성명서”를 발표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1959년 2월3일,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 임시회의는 크레인(Paul Shields Crane,구바울) 의장과 브라운(George Thompson Brown,부명광) 명의로 성명서를 발표하였습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순결과 평화를 간절히 원하며 대한예수교장로회의 통일을 기원합니다. 미국 남장로교회는 미국교회협의회(NCCC)와 세계교회협의회(WCC)에 가입되어 있으며 복음주의협회(NAE)에도 가입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파송선교사들은 때때로 상의 단체들의 정책과 성명서에 동의하지 않을때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대한예수교장로회안에서 어떤 집단의 분파적 선동에도 찬성하지 않습니다. 총회신학교의 중심성과 발전을 위해 지원하는 일을 중단하지 않고 우리 모두가 함께 이 일에 동참하기를 바랍니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 소속으로 한국에 파견되어 있지만 한국선교사들은 교회외의 어떠한 단체에 있어서 모든 것을 동의하고 수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밝힘으로서 그들의 적지않은 고민을 알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분열을 가져오는 행위와 파괴에 대해서는 반대한다는 입장을 취함으로서 어떠한 경우에도 분파되거나 적대행위를 하는 것은 안된다는 것을 명시하였습니다.
1959년 9월24일, 대전중앙교회당에서 개최된 44회 총회(노진현총회장)는 노회 총대 261명, 선교사 23명, 계 284명 가운데 251명이 참석하였습니다. 경기노회의 정기노회측 총대와 임시노회측 총대문제로 회의 시작과 동시에 상호 고성이 오갔습니다. 총회는 경기노회 총대권 문제를 총대 전체투표로 결정하기로 하고 임시124, 정기119, 기권5표로 임시노회측 총대를 받아들이려 하였으나 26일, 노회법적인 문제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습니다. 결국 경기노회는 양측 모두 회원권을 상실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구조가 발생하고 총회속개가 불가능하였습니다. 총회 노진현 총회장은 10월24일까지 정회를 선포하고 경기노회는 중재안을 마련하여 총회에 상정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이순간 갑자기 WCC지지측 안광국 목사가 단상에 올라가 총회장 불신임안을 낭독하고 일사천리로 가결하는 쿠데타같은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그후 에큐메니칼운동 지지자들은 연동측 149명과 선교사들과 함께 대전 미락식당에 모여 증경총회장 전필순 목사를 준비회장으로, 김광현 목사를 서기로 하여 총회속회 준비회를 구성하고 9월29일, 연동교회에서 총회를 속회하였습니다. 그리고 44회 총회임원이 1명도 참석하지 않은 불법적인 총회를 개최하여 이창규 목사를 총회장에 선출하였습니다. 이에 노현진 총회장은 연동교회에서 불법적으로 개최된 총회를 강력하게 규탄하였습니다. 9월30일, 총회장과 임원회 성명서를 전국 교회에 발송한 노현진 목사는 연동속회의 불법성과 WCC탈퇴와 NAE동시탈퇴를 선언하였습니다. 연동측(WCC지지)과 승동측(WCC반대)의 상호 비방전과 문제가 선교사들의 가세속에 좀처럼 의견이 좁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11월24일, 승동교회에서 27개노회 목사 105명, 장로 104명 등 209명의 총대가 참석한 44회 총회를 속회하였습니다. 총회장 양화석, 부총회장 나덕환, 서기 박찬목, 회록서기 정규오를 선출하고 WCC영구탈퇴, NAE관계 청산을 결의하였습니다. 총회신학교 계일승, 김윤국, 박창환을 해임하고 박형룡, 김치선, 김홍전을 교수로 임명하였습니다. 총회는 남북장로교선교회와 호주장로교선교회에 중립을 지켜 줄 것을 촉구하는 경고문도 결의하였습니다. 연동측과 선교회는 승동측의 회집에 다소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국교회의 분열을 막기위해 미국 남장로교 총무 브래들리 박사와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장인 넬슨 벨이 평화통일 사절로 긴급 내한하였습니다. 12월14일, 전주 예수병원 예배실에서 남장로교 선교사, 평화사절단, 한국인 교계지도자들과 함께 호남선교협의회가 개최되어 교단통일 문제를 논의하였습니다. 브래들리 박사와 넬슨 벨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연동측과 승동측의 대립은 팽팽한 접전이 계속되었습니다. 1954년 이후 WCC가 발화점이 된 문제는 결국 1960년 2월17일, 새문안교회에서 연동측은 이른바 “통합총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연동측이 통합총회라고 명명한 것은 44회 임원 가운데 부회장 나덕환 목사와 부서기 김삼대 목사가 연동총회에 합류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승동교회에게 개최된 승동총회는 에큐메니칼운동을 철저히 반대하며 고려파와의 합동을 통하여 진정한 장로교회의 일치를 위해 합동하겠다는 의지로 “합동총회”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연동측과 승동측의 분열을 포장하는 통합과 합동이라는 양대 정체성이 오늘날에 이르기 까지 교단의 공식명칭이 되었다는 점에서 60년의 해묵은 감정의 골이 얼마나 깊은 것이었는지를 돌아보게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