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희지 왕일소(王逸少), 王羲之
출생 : 307년 사망 : 365년
서성(書聖)으로 존경받는 동진의 서예가.초서, 행서, 해서의 실용적 서체를 예술적인 경지로 완성시켰으며, 시집 《난정집서》의 서문인 〈난정아집시서〉가 대표 걸작으로 꼽힌다.대표작으로 해서의 〈악의론〉, 〈황정경〉, 〈동방삭화찬〉, 행서의 〈난정서〉, 〈집자성교서〉, 초서의 〈십칠첩〉, 〈상란첩〉, 〈공시중첩〉 등이 있다.
1. 서예를 예술로 승화시키다
한자의 서체는 전서, 예서, 초서, 해서, 행서순으로 완성되었는데, 이중 행서는 초서를 읽기 쉽고, 해서를 빠르게 쓸 수 있도록 절충하여 만든 서체다. 이를 집대성한 인물이 바로 ‘서성(書聖)’으로 존경받는 동진 시대의 왕희지다. 그는 행서를 완성하고, 해서와 초서를 실용서체에서 예술서체로 승화시켰다. 또한 그는 동진 서법을 완성했다.
왕희지의 자는 일소(逸少)로, 산동성 낭야 임기(臨沂)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 왕상(王祥)은 서진의 고급 관료였고, 아버지 왕광(王曠)은 회남 태수를, 숙부 왕도는 동진의 재상을, 왕돈도 동진 조정의 관료를 지냈다.
왕희지는 일곱 살 때부터 서법(書法)을 익혀 열두 살에는 그 실력이 매우 뛰어났다. 그를 가르친 스승은 큰아버지 왕익과 이모 위부인 위삭(衛鑠)이었다. 위삭은 서진 시대 유명한 여류 화가이자 서예가로 이름이 높았다. 왕희지는 초서는 후한 장지(張芝)의 서법을 따랐고, 해서는 위나라 종요(鍾繇)의 서법을 따라 익혔다. 후에 그는 종요의 서체를 더 발전시켜 왕희지체를 완성했다. 그는 밥을 먹을 때, 길을 걸을 때, 휴식을 취할 때도 서법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여러 종류의 글씨를 구하여 글자체와 필획의 구조 등을 연구했다.
왕희지는 열여섯 살에 치감(郗鑒)의 딸과 결혼했다. 당시 태위였던 치감이 승상 왕도에게 혼담을 넣자 왕도는 직접 사람을 보내 골라보라고 했다. 며칠 뒤 치감은 심부름꾼을 보내 왕씨의 자제들을 살펴보게 했다. 치감의 사위가 되기를 원했던 왕희지의 형제와 사촌들은 치감에게 잘 보이고자 평소와 다르게 고상한 척 행동했다. 하지만 왕희지는 평소대로 평상에 배를 드러내고 누운 채 큰 떡을 먹으며 무심히 손가락으로 자신의 배 위에 뭔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필체를 가다듬는 연습 중이었지만 심부름꾼의 눈에는 그저 떡을 먹고 있는 소년일 뿐이었다. 심부름꾼이 돌아와 주인에게 소상히 알리자 치감은 망설이지 않고 왕희지를 사위로 선택했다. 이 일화에서 ‘배를 드러내고 동쪽 평상에 눕다’라는 ‘탄복동상(坦腹東床)’이라는 성어가 생겼고, 이상적인 사위라는 의미로 통용되었다.
왕희지가 벼슬길에 오를 나이가 되었을 때 숙부 왕돈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멸문지화를 당할 만큼 큰 사건이었으나 최고의 명문가였던 왕씨 일가는 권세를 이용하여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왕돈의 반란이 진정된 후 왕희지는 비로소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왕희지는 비서랑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정서장군의 참장, 장사를 거쳐 340년 영원장군 강주 자사로 승진했다.
351년 그는 우군장군, 회계내사에 임명되어 발령지인 절강성 소흥부로 갔으며 356년까지 4년 동안 관직 생활을 했다. 후에 그가 ‘왕우군(王右軍)’이라고 불리는 것은 이때의 직책으로 인해 생긴 것이다. 당시 한 도사가 많은 예물을 가지고 와 도가의 경서인 《황정경(黃庭經)》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왕희지는 이를 거절했다. 당시 왕희지는 흰 거위를 매우 좋아했는데, 거위 목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서법을 연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이 소문을 들은 도사는 흰 거위와 글씨를 쓸 좋은 비단을 가지고 다시 찾아와 부탁했다. 이에 왕희지는 그가 가져온 비단 위에 《황정경》을 써 주었다고 한다.
한 번은 왕희지가 회계에서 평상복 차림으로 거리로 나갔다. 거리에서 왕희지는 매우 더운 날씨에 한 노파가 부채를 파는 것을 보았다. 부채 값은 쌌지만 사는 사람이 없어 노파의 모습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이에 왕희지는 노파에게서 부채를 빼앗아 그 자리에서 몇 자 써 주었고, 자신의 부채에 낙서를 한 줄 안 노파가 화를 내자 “이 부채를 제일 잘 보이는 곳에 두시오. 그러면 1백 전은 족히 받을 수 있을 것이오.”라고 말하고 떠났다. 어리둥절해 하던 노파는 왕희지가 시키는 대로 했고, 곧 지나가던 행인이 왕희지의 글씨가 쓰인 부채를 보자마자 선뜻 1백 전을 내고 사 갔다.
이 두 가지 일화는 왕희지가 생전에 이미 서예가로서 명성을 쌓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또한 그가 세상의 영리를 꾀하지 않고 소탈하며 즉흥적인 시작 습관을 가졌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왕희지는 가문의 명성에 비해 높은 벼슬을 하지 못했는데, 이는 그가 정치적 권세와 명성에 관심이 없어 조정의 부름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불어 부패상이 드러나기 시작했던 당시 정세가 그의 성격과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353년 회계 내사를 지냈을 당시 왕희지는 음력 3월경 명사 손작(孫綽), 사안(謝安), 허순(許詢), 지둔(支遁)과 자신의 아들 왕응지(王凝之), 왕휘지(王徽之) 등 41명과 함께 회계 산음에 있는 물가의 난정(蘭亭)에서 봄을 맞는 연회를 열었다. 이때 열린 행사는 곡수연(曲水宴)으로, 9개의 구비에 강물을 끌어들인 후 술잔을 물에 띄워 흘러오는 술잔이 멈춘 자리에 있는 사람이 시를 짓는 놀이다.
이때 지어진 시는 총 37수로, 이를 기념하여 만든 시집이 《난정집서(蘭亭集序)》다. 왕희지가 쓴 〈난정아집시서(蘭亭雅集詩序)〉라는 서문에서는 자유분방하면서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이 정교한 왕희지의 서체를 볼 수 있다. 이는 행서 제일의 서체로 여겨지며 서예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후대에 이 서문을 연구한 이가 20개의 ‘지(之)’ 자를 찾아서 살펴보았는데, 그 각각이 고상하고 아름다움을 지닌 채 서로 다른 방법으로 쓰여 있다고 한다. 또한 이 서문은 왕희지가 취한 상태로 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취기가 사라진 후 자신이 쓴 글씨를 보고 스스로 감탄하여 다시 써 보려고 했으나 그것과 같은 유려한 글씨는 쓰지 못했다고 하는 일화도 전한다.
하지만 이 《난정집서》의 진본은 오늘날 전하지 않는다. 왕희지의 글씨는 그가 살아 있을 당시에도 존경받았지만 남북조 시대를 거쳐 수나라 왕족과 귀족들까지 애호했다. 특히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은 왕희지를 숭배하여 그의 글씨를 늘 곁에 두고 감상했다고 한다. 심지어 그는 왕희지의 글씨를 무덤에 같이 묻어 달라는 유언까지 남겼다. 이런 까닭에 현재는 《난정집서》의 진품이 전해지지 않고 모사품만 전해지고 있다.
대설이 내린 후 날씨가 화창하게 개자 오래 만나지 못한 친구의 안부를 묻는 왕희지의 편지다. 이 편지와 이에 대한 역대 명사들의 찬사가 기록되어 있다. 청의 건륭제가 “천재일우로 이 보물을 내 손에 넣게 되었구나!” 하며 애지중지했다고 전한다.
《난정집서》가 세상에 나온 지 2년이 지나 왕희지는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 후 그는 죽을 때까지 경치가 뛰어난 회계의 산중에서 오로지 자연을 벗 삼아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다가 생을 마감했다.
왕희지의 작품에는 해서의 〈악의론(樂毅論)〉, 〈황정경〉, 〈동방삭화찬(東方朔畵讚)〉, 행서의 〈난정서〉, 〈집자성교서(集字聖敎序)〉, 초서의 〈십칠첩(十七帖)〉, 〈상란첩(喪亂帖)〉, 〈공시중첩(孔侍中帖)〉 등이 있다. 그러나 어느 것이든 진필은 전하지 않으며 현재 왕희지의 필체라고 전하는 것들은 모두 모사품과 탁본일 뿐이다.
왕희지는 동한 시대에 시작된 해서, 행서, 초서의 실용 서체를 예술적인 서체로 완성시켰다. 그는 한 글자를 쓰더라도 여러 서체를 함께 사용해 변화를 주었으며, 글자의 변화는 작품의 통일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도록 했고, 글을 쓸 때는 감성을 따라 쓰되 형식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여 완벽한 형식미를 구사했다.
왕희지의 서법은 일곱째 아들 왕헌지(王獻之)에게 이어졌고, 왕희지 부자는 이왕(二王) 혹은 희헌(羲獻)이라고 일컬어지며 존경받았다.
행정동우회 군산시지부 이 연 수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