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각오”
한국영화, 개봉:2016.03.17
감독:권혁만, 각본:임미랑, 관객:92,889명(2016.07.04.현재)
제작:KBS한국방송, 주연:이지형
“칼날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한 내가 그 칼날을 향해서 나아가리다 내 앞에는 오직 일사각오의 길만이 있을 뿐입니다”
주기철(1897년11월25일~1944년4월21일)은 한국의 장로교 목사인 동시에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일제시대 일본제국주의의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을뿐만 아니라 반대운동의 선구자로서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순교자의 길을 걸어갔다 1938년 제27차 신사참배를 가결한 장로교총회 이후, 조선예수교장로회 평양노회로부터 1939년 목사면직이라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로부터 59년이 지난 1997년, 예장통합 서울 동노회로부터 목사직 복권을 받고, 2006년 예장통합 평양노회와 장로회신학대학교로부터 학적 복적을 선포하였다 또한 2015년 예장합동과 총신대학교가 목사직을 복권하고 평양신학교 복적을 선포함으로서 주기철목사의 신앙의 명예는 모두 복권되었다
영화 “일사각오”는 2015년12월, 성탄절을 기념하여 제작한 KBS다큐멘터리를 극장에 올린 주기철목사의 이야기이다 일제가 일본 신도사원을 한반도전역에 세워 조선인들의 참배를 강요하면서 50여명의 기독교인들이 순교하고 2,000여명이 감옥에서 수난을 당하는 가운데 우리는 한 사람을 주목하였다 그의 이름은 주기철이었고 산정현 교회의 담임목사였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 메삭과 아벳느고는 풀무불속에 뛰어들었고 다니엘은 사자굴속에 들어갔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고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렸습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는 길.... 누가 능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주기철목사의 설교중에서)
주기철목사는 1897년11월25일, 경남 창원군 웅천면 북부리(현 창원시 진해구 북부동)에서 태어나 창원의 개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16년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하였으나 지병으로 1년만에 중퇴를 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웅천교회의 집사가 되었다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교회활동으로 세월을 보내던 1920년 9월의 어느날, 마산 문창교회에서 열린 김익두목사초청 부흥회에서 “성령을 받으라”는 설교를 듣던중 거듭남의 체험을 하게된 주기철은 남학회를 조직하여 3.1운동에 참가하는가 하면 1926년 장로회신학대학교의 전신이었던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후 부산의 초량교회(1926~31년)와 마산 문창교회(1931~35년)의 담임으로 재직중이던 1936년, 자신의 은사였던 조만식장로로 부터 평양 산정현교회의 담임으로 부임해 줄 것을 요청받고 초빙목사로 부임하였다
“예수를 버리고 사는 것은 정말 죽는 것이요, 예수를 따라 죽는 것은 정말 사는 것입니다. 피로써 전하여 온 부활의 복음을 우리 또한 피로 지키고 피로 전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부활의 복음을 위한 일사각오의 신앙적 신념을 결단해야 합니다”
당시 평양은 한국기독교의 성지라고 할 만큼 신앙적 기초가 탄탄하였으나 이에 대한 일제의 탄압수위도 매우 높은 단계에 있었던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었다 이러한 위험한 상황속에서 부임한 주기철목사는 강단에서 자기희생을 통한 신앙실천을 강조하면서 일사각오의 신념적 신앙심을 지켜 나갈 것을 설교의 지표로 삼았다 이로 인하여 주기철목사는 배일사상과 독립정신, 그리고 신사참배 거부 등과 같은 정치적으로 미묘한 입장차를 분명히 하며 일본군부와 경찰로부터 요주의 대상으로 끊임없이 경계되어 왔다
“신사참배는 십계명의 제 1계명과 같이 여호와의 이름에 대한 범죄요 하나님께 대한 배신입니다” 산정현 교회 첫 번째 부임설교는 주기철목사의 일사각오적 신앙신념이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강한 의지였다
1936년 천주교를 시작으로 성결교, 구세군, 성공회는 일제 신사참배를 결정하였다 마지막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해온 장로회 평북노회가 1938년 2월 신사참배를 결정하였을 때 평양신학생 장흥련이 신학교 정원에 있던 평북노회장 김일선목사의 기념식수를 뽑아 버리고 비석을 부숴버리는 극한 분노가 일어났지만 그 뿐이었다
1938년4월, 주기철목사는 이러한 반일본적 설교로 인하여 1차검속과정에서 일본경찰에 긴급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6월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2개월후인 8월, 농촌재건신앙운동과 관련된 의성농후회 사건연루자로 2차검속에 다시 구속되어 이듬해인 1939년 1월까지 구금되어 있었다 이 기간중인 1938년9월, 평양 서문밖교회에서는 전국 17개 노회대표자들이 회집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있었고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라 국가의식”이라는 결의와 함께 신사참배를 결정한 최악의 수모일이 있었다
1939년10월, 제3차 검속에 다시 체포되었으나 바로 석방되었으며 1939년12월19일 조선예수교장로회 평양노회는 신사참배거부를 이유로 주기철목사를 목사직에서 면직하는 범죄의 오명을 갖게 되었다
1940년2월, 주기철목사는 산정현교회에서 “다섯종목의 나의 기원”이라는 주제로 마지막 설교를 하였으며 그해 9월 4차검속으로 다시 체포되고 1944년4월21일 복역중 고문으로 인한 건강악화로 순교의 길을 걸어갔다
“첫째,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둘째, 장기간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옵소서 셋째, 노모와 처자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넷째, 의에 살고 의에 죽도록 하여 주옵소서 다섯째,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1940년3월24일, 산정현교회가 폐쇠되고 갈 곳을 잃은 주기철목사의 가족들은 극한 빈곤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러한 극한 고난의 시간속에서 하나님이 그에게 허락한 것은 행복한 가정과 풍요로운 식탁이 아니라 일사각오 정신으로 무장된 순교의 길이었다
일본경찰은 주기철목사를 굴복시키기 위해 자신의 아내와 노모와 열 살의 막내아들을 지하 취조실로 부르고 가족들이 보는 눈앞에서 온갖 고문을 자행하였다 노모는 혼절하고 아내는 그 자리에서 기도하였지만 여자로서는 상상할수 없는 온갖 수치를 겪어야 했고 열 살 아들은 실어증에 걸려 3~4년동안 심하게 말을 더듬는 충격에 빠져야 했다
“내 영혼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1944년4월21일 밤9시 하나님은 주기철목사의 마지막 신앙을 바라보며 그의 나라로 그를 인도하였다 한국 기독교사에 빛날 위대한 순교자의 마지막은 이렇게 하나님 여호와만의 인도속에서 이루어 졌다
1963년, 주기철 목사에게 정부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그의 이름은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모범적 표상이 되었다 KBS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일반인의 시각으로 주기철목사라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주기철목사의 삶과 인생을 통하여 하나의 신념을 발견하였고 그것이 “오직 하나님을 향한 일사각오의 신앙”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
영화는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제작되어 감동적인 면에서는 약간의 지루함이 있었다 일반인들이 이 영화를 볼것인가 하는 의문도 함께 있었으며 그들에게 주기철 목사의 본질이 전달될 수 있을까 하는 답답함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선조시대 한사람의 순교정신이 오늘날 기독교를 바르게 세워 나가는 초석이 되었으며 이를 통하여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영화의 흔적을 기록에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