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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사의 영웅과 열사들!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서울의 동쪽 끝 망우리(忘憂里) 공동묘지에 이승만 정권의 ‘사법살인’으로 일생을 마감한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이 묻혀 있다. 묘비 앞면에는 ‘죽산조봉암선생지묘(竹山曺奉岩先生之墓)’라는 비문만 새겨져 있을 뿐 행장(行狀)은커녕 출생일과 사망일조차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의 묘비는 평양 서남쪽 신미리의 ‘애국열사릉’ 한구석에도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조소앙(趙素昻)·홍명희(洪命熹) 등의 묘비와 함께 세워져 있다. 한 사람을 위한 서울과 평양 두 곳의 묘비, 분단시대를 숨막히게 살았던 죽산의 주검이 남과 북에 이렇게 갈라져 있다는 것은 분단시대를 상징하는 민족의 우화(寓話)와 같다.
죽산 조봉암, 그는 식민지에서 8·15해방으로, 그리고 분단과 전쟁과 독재로 이어진 격동의 한국 현대사, 그 굽이굽이에서 정치적 이상만 추구한 데 그치지 않고 현실적 이상을 실현하려 한 드문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일제 식민지 지배 시기에는 공산주의 운동 지도자로, 해방정국에서는 ‘제3전선’ 지도자로, 남한 단독정부 수립 직후에는 초대 농림부장관과 국회부의장으로서, 1950년대에는 이승만 정권과 보수여당에 대립하는 진보적 정당을 이끌어나감으로써 한국 현대사의 중심에 위치했음에도 ‘아웃사이더’로 취급된 정치지도자였다. 무엇보다 1950년대 이승만 백색독재정권 아래 과감하게 전개했던 평화통일운동과 진보당 조직은 ‘정치적 음모에 의한 처형’과 함게 죽산의 짧지만 굵었던 일생을 이 나라 민주주의의 발전과 진보적 정치의 표석으로 남겼다.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은 1899년 경기도 강화군에서 조창규(曺昌奎)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911년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죽산은 농업보습학교(農業補習學校)를 마친 뒤 집안사정으로 군청 사환 등의 일을 하다가, 1919년 3월 강화도 만세시위운동에 가담하여 1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감옥살이에서 민족의식에 눈뜬 죽산은 출옥 후 서울 YMCA 중학부를 거쳐 1921년 일본 중앙대학 정경과에 입학,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 조류 속에 빠져들었다. 당시 일본의 사상계는 그야말로 온갖 사상과 주의의 백화제방(百花齊放) 시대였다. 자유주의·민본주의·무정부주의·사회민주주의·생디칼리즘·페이비어니즘·볼셰비즘 등이 백가쟁명(百家爭鳴)한 시기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조선인 유학생들도 진보적 사상에 급격하게 침윤되었다. 그리하여 1921년 20여명의 조선인 유학생 사이에 흑도회(黑濤會)라는 사상단체가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결성 당시 회원은 김판권(金判權)·권희국(權熙國)·원종린(元鍾麟)·김약수(金若水)·박열(朴烈) 등이었으며 죽산도 여기에 참여했다. 그러나 죽산은 곧 ‘아나키스트들의 관념적 유희’에 만족할 수 없어 소비에트혁명을 통해 구체화되고 현실적인 파워까지 장악한 볼셰비즘으로 기울었다.
흑도회가 해체된 후 죽산은 북성회(北星會)를 조직한 김찬(金燦)·정재달(鄭在達)·김약수 등과 밀접하게 지내다가, 1922년 러시아에서 열린 베르흐노이진스크 대회에 참석했다. 이 대회는 당시 해외 조선인 공산주의 운동의 양대 파벌이던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과 상해파 고려공산당 간의 분파투쟁을 청산하기 위한 연합대회엿으나 양쪽의 의견차이로 회의는 끝내 결렬되었다. 죽산은 그 후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東方勞力者) 공산대학(세칭 모스크바공산대학)에 입학해서 정식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고, 1923년 일본을 거쳐 귀국했다.
죽산은 국내로 돌아온 후 신흥청년동맹(新興靑年同盟)과 화요회(火曜會) 등 공산주의 계열의 운동단체에서 박헌영(朴憲永)·김찬·김단야(金丹冶) 등과 정력적인 활동을 벌였다. 또한 전국 각지의 순회강연을 통해 사회주의 사상을 계몽하고 인권존중과 민족자주 정신을 강조하면서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을 고취했다.
당시 죽산은 민중을 본위로 한 새로운 사회질서의 창조, 민중의 진정한 해방과 행복이 보장되는 민족독립을 강조했다. 죽산은 명사집단에 의한 개량주의적 민족운동의 허구성을 통렬히 비판하면서 민중이 중심 되는 운동을 주창했다. 물산장려운동이나 민입대학 설립운동은 죽산이 보기에 문화주의자들의 민족개량운동에 불과했다. 그는 민중의 존재를 배제한 민족운동이나 관념적 민족지상주의와 민족이기주의에 바탕한 민족운동의 반동성도 엄중히 경계했다.
죽산이 당시 추구한 노선은 단순히 반일(反日)을 통한 국권회복운동이 아니라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으로서 민중계급에 기초한 민족해방운동이었다. 초기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대체로 계급모순에 중요한 의미를 두었던 것과 궤를 같이하는 생각이었다. 식민지 상태에서는 민족문제를 중심축으로 광범한 계급과 계층을 망라한 민족통일전선 구축이 선결과제였다면, 이 시기 사회주의자는 제국주의적 민족해방투쟁을 강조하면서도 부르주아 민족주의자와의 투쟁을 실천적 과제로 설정했다.
1925년 2월 죽산은 김재봉(金在鳳)·박헌영·김단야·권오설(權五卨)·김찬 등과 함께 ‘조선기자대회’와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의하고, 이 기간에 조선공산당을 결성하기로 했다. 그해 4월 17일 조선기자대회 마지막 날에 죽산과 김찬·김약수·유진희(兪鎭熙) 등이 참석한 가운데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을 결성하고, 김재봉을 당의 책임비서로 뽑았다. 이때 죽산은 중앙검사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조선공산당이 결성된 다음 날인 4월 18일 박헌영의 집에서 죽산과 박헌영·임원근·김단야·홍증식·주세죽 등 20여명이 모여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를 조직했다. 죽산과 박헌영 등 7명의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이 국제부를 맡았으며, 죽산이 국제공산청년동맹과 고려공산청년회 사이의 연락임무를 책임졌다.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가 조직된 후 이 두 조직의 중앙집행위원회는 코민테른과 국제공산청년동맹으로부터 승인받기 위해 죽산을 조선공산당 부대표와 고려공산청년회의 대표로 파견하기로 결의했다. 죽산은 1925년 5월 상해를 떠나 6월에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모킨테른과 국제공산청년동맹에서는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를 ‘유일 기초단체’와 ‘지부’로 정식 승인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는 조직된 지 6개월여만에 ‘신의주사변(新義州事變)’이라는 예기치 않은 일로 결정적 타격을 받았다. 신의주사변으로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관계자들이 대거 검거되면서 두 조직은 사실상 와해되었다. 때마침 상해에서 국내와 모스크바 사이의 연락업무를 하던 죽산은 일제의 검거에서 비켜갈 수 있었다.
이때로부터 1932년 말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기까지 약 7년간 죽산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총비서와 상해주재 코민테른 원동부 위원을 맡았으며,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와 상해한국인 반제동맹을 조직하는 등 주로 상해에서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했다.
죽산은 1927년 이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많은 활동을 했다. 특히 상해에서는 부르주아 민족주의를 기초로 항일투쟁을 하던 지사들과 연합하고 공산주의 운동가들을 결집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활동을 대중에 기반을 둔 운동이라기보다는 상층부 인사를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1928년 코민테른이 조선공산당 해체명령을 내리면서 대중에 기초한 공산당 재건을 요구한 뒤 조선공산당에 관계하던 대부분의 공산주의자는 국내에서 당 재건운동에 몰두했다. 만주에서는 중국 공산당 군대와 연합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던 이들이 1931년 이후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독자성을 획득하면서 국내로 진공하기도 했다.
이처럼 상해에서 죽산의 활동이 명망가 중심이었던 데다, 1930년대 주류운동이 국내에서의 공산당 재건운동과 만주에서의 무장투쟁으로 흐르면서 죽산은 사회주의 운동의 주변부로 점점 밀려났다. 그러던 차에 상해 프랑스 조계 안에서의 민족해방운동에 관대했던 프랑스가 1920년대 중반 이후 조선인 민족운동가들의 반일·반제운동을 용납하지 않았다. 1932년 프랑스 경찰이 죽산을 체포해서 일본 경찰에 인도한 것도 이와 같은 사정에서였다. 죽산은 상해를 떠나 인천항으로 압송되었다. 당시《조선일보》는 죽산의 인천항으로의 압송을 자세하게 보도했다.
˝조봉암은 오전 8시 반경에 경관의 호위에 싸여 인천부두에 상륙하자, 미리부터 대기하고 있던 자동차에 호송되어 그의 고향인 강화도를 뒤에 두고 풍우(風雨)같이 돌리어 경성으로 향해 갔다.˝
1933년 선고공판이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열렸다. 체포된 지 1년만으로 징역 7년형이 선고되었다.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간의 투옥생활이 시작되었다. 수감생활중 죽산은 주로 보철(補綴)작업을 했다. 바늘로 걸레를 깁고 수선하는 일이었다. 감옥에서 그는 사서삼경을 읽고 독일어를 공부했다. 동상에 걸려 손가락을 절단하는 고통을 겪기도 했다.
죽산은 수감생활 동안 정상적인 형무소의 규칙과 명령은 따르되, 규정 이외의 인격적 모욕과 박해에는 철저히 저항했다. 그의 이러한 수형태도는 함께 수감된 동지들의 눈에 죽산이 혁명적 열정과 투쟁 의욕을 상실한 채 현실순응적 인간으로 변모한 것으로 비쳤다. 8·15해방 후 죽산이 일제에 전향했다고 혐의를 받은 것도 이러한 수형태도 때문이었다. 그러나 죽산이 전향성명을 냈거나 반공을 천명한 기록이나 사실은 전혀 발견할 수 없다.
죽산은 1939년에 출옥했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인천으로 갔다. 인천에서 죽산은 정미소에서 나오는 왕겨를 수집해서 연료로 공급하는 비강(粃糠)조합 조합장이 되었다. 이 일로 죽산은 그를 비판하는 입장에 선 사람들의 표적이 되었다. ‘출옥 후 이권을 얻어 부자로 살았다’는 것이다. 먹고살 길을 찾은 것이 비판자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던 모양이다.
해방 전 1945년 1월 예비검속으로 일본 헌병대사령부에 구금되었던 죽산은 8월 15일 출감한 뒤 인천보안대를 조직하고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를 조직했다. 건준 인천지부는 곧이어 인천시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으나 죽산은 간부진에 선출되지 않았다. 죽산은 이 무렵 자신의 활동무대를 철저하게 인천에 국한했다.
죽산이 공식적으로 중앙무대에 나타난 때는 1946년이었다. 이해 2월에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29개 정당·사회단체 대표, 지방 대표, 무소속 인사 등이 모여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이란 좌익계의 통일전선을 결성했다. 대회는 의장에 여운형·허헌·박헌영·김원봉·백남운을 뽑았으나, 죽산은 민전 인천지부 의장에 임명됐을 뿐이다.
식민지시대의 민족해방운동사에서 죽산은 어느 누구에 뒤지지 않을 만큼 현저하게 활동했다. 활동의 적극성이나 능력으로 본다면 죽산은 조선공산당이나 인민공화국·민전 등에서 당연히 요직에 앉아야 할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산이 해방 이후 인천으로 활동 영역을 제한한 데는 해방 후 조선공산당 재건과정에서 그에게 가해진 비판 때문인 것 같다. 그러한 비판은 대부분 내부의 헤게모니 쟁탈전의 도구로 쓰였지만, 죽산은 적어도 출옥 후 공산주의운동을 정지했다는 사실에서만은 자기비판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인천에서의 활동이 그 후 죽산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했다는 점이다. 사실 해방 이전부터 민족해방운동전선에 뛰어들었던 사람들은 중앙에서 헤게모니 장악을 통해 자신의 기반을 강화하려 했다. 조선공산당마저도 중앙 정치무대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당시 죽산의 활동이나 구상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바 없기 때문에 그가 대중 속에서 어떻게 활동했는지 세밀한 부분은 알 수 없다. 다만 죽산이 자신의 출신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한 점에 비추어 그가 중앙에서의 세력확장보다는 지방에서 자신의 조직기반을 탄탄하게 다지려 하지 않았나 싶다.
죽산이 민전의 인천지부 의장에 선임된 후 처음 맡은 일은 1946년의 3·1절 기념행사였다. 이날 기념식은 좌우익 정치세력과 사회·종교단체의 연합행사로 열렸으며, 죽산은 민전 인천지부 대표자격으로 참석해서 사회를 보았다.
1946년 3월 중순경 인천지국 CIC(미국군 방첩부대)에서는 민전 인천지부를 습격했다. 이때 죽산이 박헌영에게 보내는 편지의 초고가 압수됐다. 압수된 편지를 반환하겠다는 약속과는 달리, 이 편지는 5월 초《대동신문》과《한성일보》·《동아일보》·《조선일보》등 우익계 신문에 일제히 공개됐다. ‘존경하는 박헌영 동무에게’란 제목이 붙었다.
서신에서 죽산은 “해방되는 그날부터 인천에 틀어박혀 당·노조·정치 등 모든 문제에서 입을 봉하고 오직 당부의 지시하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최대의 정열을 가지고 정성껏 해왔소”라고 전제했다. 그리고 민족통일전선의 대중투쟁문제와 그 운영, 당 인사문제, 반(反)중앙의 움직임, 자신에 대한 비판 등 4개항에 대해 박헌영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자신을 변명했다.
이러한 내용은 조선공산당원으로서, 그리고 일제강점기의 공산주의운동과 그 지위의 연장선에서 죽산이 충분히 개진할 수 있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의 서신이 당내가 아닌 우익신문에 전격적으로 게재되엇다는 것과 발표시점이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된 5월 10일 이전이었다는 점이다. 죽산의 서신은 조선공산당에 대한 미군정과 반탁진영의 공세에 좋은 재료가 되었고, 조선공산당에서는 죽산의 행위를 명백한 반당행위로 규정하였다.
1946년 6월 23일 민전 주최로 ‘미·소 공위 추진 시민대회’가 열려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과 이강국(李康國)·김원윤(金元胤)·성주식(成周寔) 등이 연설했다. 대회가 절정에 달했을 때 죽산 명의의 성명서가 살포되었다. 이 문건은 자본계급의 독재도 반대하지만, 조공의 정책과 인공·인민위원회·민전 등의 정책과 활동도 반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성명서를 통해 죽산은 자신의 청춘을 불살랐던 사회주의적 인생의 전면적 청산을 선언하고 부르주아 독재도 부정함으로써 좌익과 우익을 지양하는 입장을 나타냈다. 그는 또 조속한 국가건설을 위해 연합국, 특히 미국과의 협조를 주장하는 등 표면적으로만 보면 당시 막 등장하기 시작한 좌우합작파의 노선과 일치하는 주장을 펼쳤다.
뒷날 죽산이『나의 정치백서』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그는 민족해방운동의 방편으로 공산주의 운동을 하고 이념을 선택했다고 전제하면서, 조선공산당이 민족의 진로를 위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일대 ‘전환’을 한 것이었다. 죽산 자신은 한 번도 ‘전향’이란 말을 쓰지 않고 공산주의에서 사회민주주의로 ‘지양’했다고 했다.
반면 죽산이 새로운 정치노선을 선택한 것을 두고 이를 ‘전향’이라고 평가하는 시각이 많았다. 죽산이 민전 주최 집회에서 공개적으로 반(反)공산당적 성명서를 발표한 시점이 미군정에 연행됐다가 풀려난 6월 22일 바로 다음 날인 6월 23일이었다는 사실에다, 국내 주요 정치인들의 동향을 주기적으로 파악·보고한 미군정의 문서에 나타난 의문점 등 때문이었다.
죽산은 1946년 말과 1947년 초에 걸쳐 ‘민주주의독립전선(민독)’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새로운 노선에 서서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민독은 좌우합작위원회와는 다른 신중간노선으로, 좌우합작위원회에 참여한 인사들을 제외한 민족주의 좌우파 인사들의 연합전선적 색채를 띠고 결성되었다.
좌우합작운동에 뜻을 같이 했지만 참여하지 않은 민족주의 계열의 군소정당인 강순(姜舜)이 이끈 근로대중당(勤勞大衆黨)과 김성숙(金星淑)이 총지휘한 조선민중해방동맹(朝鮮民衆解放同盟) 등은 1947년 초에 민족주의진영의 독자적 세력화를 위한 ‘제3전선’ 결성에 나섰다. 그리하여 이극로(李克魯)의 건민회(健民會)와 죽산의 통일건국회 등이 중심이 되고 근로대중당·사회대중당·조선농민총연맹·조선어학회·조선민중해방동맹 등 29개 단체가 참여한 ‘독립전선’이 결성되었다. 죽산은 독립전선의 상무위원으로 이극로·김찬·배성룡(裵成龍)과 함께 독립전선을 주도했다. 주목할 점은 독립전선에는 과거 공산주의운동에 참여했다가 이탈한 인물이 대거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독립전선은 미군정에서 파악하고 있었던 것처럼 하나의 노선과 강령에 의해 움직일 수 있는 강력한 조직이 아니었다. 독립전선은 1946년에 조직된 좌우합작위원회와의 통합을 모색하기도 했으나, 좌우합위의 ‘민족통일전선’과 독립전선의 ‘제3전선’은 노선차이와 주도권문제로 진척을 보지 못했다. 죽산은 1947년에 결성된 중간파 민족주의자들의 연맹체인 민족자주연맹에 참여하는 것마저 배제됐다.
남북이 분단된 상황에서는 흑백논리만 판쳤고, 그 속에서 이데올로기적 ‘전환’이나 ‘지양’은 좀처럼 허용되지 않았다. 이런 좌우대립의 극한 상황 속에서 과거 공산주의자였던 죽산 조봉암의 역할은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극좌와 극우노선을 모두 배제한 ‘제3전선’을 택했지만, 남북 분단국가 성립은 현실로 다가왔다. 백범(白凡) 김구(金九)와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은 남북 어느 분단국가에도 참가하지 않았고, 조선공산당 중앙의 박헌영은 북쪽 정부에 가담했다.
해방공간에서 남북통일국가 건설을 지향한 죽산은 이때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참가했다. 죽산은『나의 정치백서』에서 “미군정 3년을 지내고 우선 남한만이라도 우리 민족이 정권을 이양 받고 통일을 도모한다는 것은 지극히 단순하고 당연한 일”이라고 주장했지만, 죽산의 분단정권 참가과정에 대한 진실규명을 위해서는 더욱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어쨌든 백범 같은 민족주의자나 안재홍(安在鴻) 같은 중간파 정치인들이 전면적으로 보이콧한 가운데 5·10선거는 치러졌고, 죽산은 인천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제헌국회의 선거결과는 예상을 뒤엎었다. 이승만(李承晩)의 대한독립촉성회(大韓獨立促成會)와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 구성원이 압도적으로 당선되리라 예상했으나, 전체 국회의석 대다수는 죽산을 비롯한 무소속 출마자로 채워졌으며, 이들이 오히려 국회의 주류를 형성하는 결과가 나타났다.
제헌국회가 소집되자 죽산은 약 60여명의 국회의원들과 함께 무소속구락부를 결성하고 6명의 간사 중 하나로 뽑혔다. 죽산은 1948년 6월 국회에서 ‘북한 동포에게 보내는 메세지’를 채택할 때 해방정국에서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이 주장한 내용과 비슷한 의견을 과감하게 천명했다. 그는 미·소 공동위원회와 남북협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의견을 비판하며, “미국은 좋고 소련은 나쁘다든지, 소련은 좋고 미국은 나쁘다든지” 하여 양측을 분열시키고 감정을 격화시키면 완전 자주독립, 즉 자주적 통일민족국가 수립을 이룰 수 없다고 단언했다.
이어서 죽산은 무소속구락부에서 자신의 정치목표를 넷으로 제시했다. 그 첫째가 “우리는 조국의 남북통일, 완전 자주독립을 전취할 것을 최대의 임무로 한다”였다.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무소속 소장파 의원들이 한국주둔 미국군 철수와 반민족행위자 처벌, 지방자치제 등 건국기의 국가형성과 직결된 의안의 처리과정에서 이승만과 한민당의 구상이나 방침과는 확연히 대립했다는 점이다. 죽산은 이에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으나 미국에서는 여전히 죽산을 공산주의자로 판단했다.
제헌국회에서 죽산은 헌법기초위원으로 활동했다. 헌법기초위원회에서 죽산은 삼권분립과 시민의 권리원칙 등 민주주의의 문제, 특히 생활의 기본수요와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 및 토지개혁 등 경제조항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중 토지개혁은 핵심 건국의제 중 하나였다. 죽산은 토지개혁의 본질은 ‘계급으로서의 지주의 몰락 곧 지주·소작농의 계급구조 해체’라고 주장했다.
“(토지개혁은) 소작제도라는 이 수천 년 내려오는 제도를 고치자는 것이에요. 없애 버리자는 것이에요. 이것이 개혁입니다. 그 문자가 결코 무서운 문자가 아니에요. 그런 까닭에 소작제도를 없애고 우리나라의 봉건적 사회조직을 근대적 자본주의제도로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이올시다.”
당시 농민들은 남한인구의 70% 내외로, 농산물은 GNP에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따라서 토지개혁을 통해 구체제의 지배계급이었던 지주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허물어뜨리고 정치적 영향력을 대폭 축소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변혁이었다. 이승만은 그 일을 떠맡을 주무부서인 농림부 장관에 죽산을 임명했다. 세인들을 놀라게 한 사건이었다.
이승만이 죽산을 입각시킨 데는 한민당 세력에 대한 견제, 무소속의 협력을 끌어들이기 위한 제스처, 민주주의적 국정운영의 상징조작 등 여러 요소가 작용한 것 같다. 어쨌든 죽산은 농림부 장관으로서 최선을 다했다. 농민의 자주적 농업협동조합 조직을 추진했고, 양곡 매입에서는 농민의 자발성을 중시했으며, 토지개혁안과 각종 농민·농업정책은 이승만의 견제와 한민당의 집요한 반대에 부딪혀 끝내 실현되지 못하고, 취임 6개월만에 장관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죽산은 1950년 5월 30일에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인천 병구에서 당선되었다. 제2대 총선에는 5·10단독선거에 불참한 민족주의 좌우파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근로대중의 사회·정치·경제적 이익보장과 기회균등, 계획경제 실현에 의한 복지사회 건설, 주요 산업의 국유화 등을 정책으로 내걸었다. 아울러 협상과 민족자주역량에 의한 평화적 통일을 주장했다.
총선결과는 예상을 뒤엎었다. 이승만 직계와 한민당·대한국민당(신익희 그룹)·대동청년단(이청천 그룹)이 연대하여 창당한 민주국민당(민국당)은 전체 국회의원의 3분의 1에도 훨씬 못 미쳤다. 대다수는 민족주의 계열을 포함한 무소속 출신이었다. 명망 있는 민족주의 좌우파 인사들도 대거 당선되었다.
제2대 국회가 개원하자마자 죽산은 국회부의장에 선출되었다. 제헌국회에서 농림부 장관을 지냈고 토지개혁법 토론과정에서 정치역량을 과시한 죽산이 제2대 국회에서 국회부의장에 선출된 것은 국회에서 죽산의 비중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케 한다. 뿐만 아니라 부산정치파동이 일어난 직후인 1952년에도 죽산은 부의장에 당선되어 제2대 국회 회기 내내 부의장으로 활동했다.
5·30선거가 끝나고 국회가 개원한 것이 1950년 6월 19일, 죽산이 활동을 시작한 지 1주일도 채 되지 않아 6·25남북전쟁이 발발했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미처 후퇴하지 못한 62명의 의원 가운데 30명이 피살되고 27명이 납북되거나 월북해 버렸다. 27명 가운데 안재홍·조소앙 등이 포함되어 죽산이 이들 민족주의 좌우파 세력들과 함께 민족적이며 주도적인 정치환경을 조성할 기회가 사라졌다.
6·25전쟁 중이던 1951년 무고한 양민을 공비하고 집단학살한 거창양민학살사건(居昌良民虐殺事件)과 제2국민병을 굶주림과 질병 속에 몰아넣은 국민방위군사건(國民防衛軍事件) 등이 일어났다. 이승만은 전쟁중이던 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위한 ‘부산정치파동’을 일으키고 ‘발췌개헌안’을 강제로 통과시켰다. 이승만에 대적할 대통령선거후보는 좀처럼 나서지 않았다. 이승만은 휴가 당일 대통령선거후보로 인정받기를 기다렸다.
8월 5일의 정·부통령선거를 불과 열흘 앞둔 7월 24일 죽산은 대통령선거후보에 나설 것을 선언했다. 출마이유는 이러했다.
“진정히 민중을 위하여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이 대통령선거후보로 나오기를 바랐으나, 그런 분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미숙한 나라도 고쳐보겠다는 생각으로 입후보한 것이다. 나는 국가의 원수라는 지위를 꿈꿀 처지도 아니며, 과대망상증에 걸린 것도 아니다. 또 높은 지위를 탐내는 것도 아니다.”
죽산이 출마하자 민국당에서는 이시영(李始榮)을 후보로 내세웠다. 민국당은 선거운동과정에서 이승만과 대결하기보다는 죽산을 격렬하게 비난하는 데 열을 올렸다. 민국당의 부통령선거후보로 출마한 조병옥(趙炳玉)은 죽산에 대한 ‘빨갱이몰이’를 극성스럽게 전개하면서 “조봉암 씨에게 대통령 자리를 맡길 것이라면 차라리 김일성과 타협했을 것”이라고 공격을 퍼부었다.
죽산은 정견을 통해 주권강화, 자주외교, 책임과 능력위주의 행정쇄신, 노동자의 권익보장 등으로 국가의 기본기능을 정비·확충하고 ‘피해대중’을 위한 정치를 펼칠 것이라고 천명했다. 또 정강을 통해서 공산당 독재와 자본가·부패분자의 독재 배격, 책임정치로 사회가 건강하게 작동할 수 있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체제를 확립할 것이라고 분명히 했다. 통일을 이루는 데는 화전(和戰) 양면의 정책을 구사하겠다고 함으로써 평화통일 의지를 은연중에 내비쳤다.
대통령선거 결과 예상한 대로 이승만이 당선되었다. 그러나 죽산은 민국당의 이시영보다 표를 많이 얻어 2위를 차지했다. 물론 이러한 선거결과는 미국 대사관 측에서 예측했다. 미국 대사관은 훗날 이 선거에서 이승만의 유일한 경쟁자는 죽산뿐이었다고 평가했다. 이미 1948년에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죽산은 민국당의 대표적 정치인이던 신익희보다 더 높은 지지를 받았다.
특기할 사항은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 이승만과 죽산이 열전을 벌였다는 것이다. 부산 중구에서는 죽산이 이승만을 앞서기까지 햇다. 부산을 포함한 경남 전체를 봐도 이승만은 죽산은 압도적으로 이기지 못했다.
죽산은 1952년의 8·5정·부통령선거에서 패배했지만, 자신의 정치이념과 정견을 선명히 제시하고 분투해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할 수 있었다. 그는 이 선거를 통해 이승만의 대항마(對抗馬)로서의 정치인으로 급속하게 성장했다. 더불어 정치적 위상도 높아졌다. 선거를 전후하여 원로 정치인들이 그의 후원세력이 되었고, 도시의 인텔리와 노동자·농민 및 청장년들이 주위에 몰려들었다.
그러나 반대자들에 의한 모함과 탄압 또한 점증했다. 이승만과 보수정당은 기회만 있으면 죽산을 위기에 몰아넣으려 했다. 죽산에 대한 탄압은 그의 주위에 대한 탄압으로 이어졌다. 8·5정·부통령선거 때 죽산의 선거사무차장이던 김성주(金聖柱)가 1954년 이승만 암살미수사건과 관련되어 살해당했다. 1955년에는 김화산(金華山) 대령 등이 죽산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동해안 반란사건’으로 고발당했으나 터무니없는 정치모략으로 흐지부지되었다.
탄압은 죽산 자신에게도 직접 다가왔다. 1954년 5월 20일로 예정된 제3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죽산은 출마 자체가 봉쇄되었다. 처음에는 인천 을구에 입후보 등록을 하려 했으나 서류 일체가 도중에 탈취당했다. 다음으로 양면작전으로 서울 서대문구와 부산에서 입후보 준비를 했으나 부산의 등록도 실패했다.
서울 서대문구에는 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서류를 제출했으나 시간내에 등록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실격통고를 받았다. 이때 서대문 갑구에 출마한 자는 자유당의 제2인자였던 이기붕(李起鵬)이었다. 대통령선거후보엿던 죽산은 끝내 제3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지도 못한 채 사직동 자택, 세칭 ‘도장궁’에서 은둔생활을 해야만 했다.
1954년 4월 한국의 통일문제를 다룰 국제회의가 제네바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남한과 북한, 유엔군으로 참전한 나라들과 중국·소련 등이 참여할 국제회의에서는 이승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평화적으로 통일하는 방안을 논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승만 정권의 탄압으로 국회의원 출마가 저지된 제3대 총선 직전 죽산은 하나의 야심 찬 정치설계를 구상했다.「우리의 당면과업:대공산투쟁의 승리를 위하여」가 그것이다. 1950년대 중반에 펼칠 ‘제3의 길’의 기본골격이 잘 집약된, 죽산의 정치철학을 담은 글이다. 글을 쓴 시기가 6·25전쟁 직후 이승만 정권의 반공 이데올로기 공세가 극한상황에 이르렀던 때라, 죽산은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하면서 평화통일론을 주장하고 나섰다.
1950년대에는 이승만의 북진통일론 외에 다른 통일논의가 금기시되었다. 이러한 동토(凍土)의 상황에서 죽산의 무력통일, 곧 북진통일에 반대하고 평화통일론을 제시했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었다. 죽산은 또 정치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계층이나 정치세력의 폭을 확장하자고 제안했다. 극우 반공세력이 독점하고 있는 정치의 장을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맞게 다원화하자는 주장이었다. 모든 민주세력이 전면에 등장하여 그 역량을 극대화하자는 것이었다.
나아가 죽산은 민주진영의 역량을 한데 집결할 연합체를 구성하자고 제의했다. 당시의 정치적 분위기 때문에 이승만 정권을 정면비판할 수 없었고 ‘민주진영의 대단결’이란 구도 속에 이승만까지 포함하는 듯했으나, 죽산 자신은 민중의 역량을 총결집할 수 있는 연합전선적 대중조직을 가장 선호하였다.
「우리의 당면과업」은 극우반공체제의 틀이 강화되는 시기에 제3의 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글을 통해 그는 자신의 정치노선과 활동에 관한 매우 중요한 암시를 보였다. 특히 1954년의 사사오입개헌(四捨五入改憲) 이후 그가 비판하던 민국당과 힘을 모아 반이승만을 표방하는 신당결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제3대 총선 이후 이승만은 대통령의 3선 금지조항을 폐지하기 위한 또 한 번의 헌법개정이 필요해서 1954년 사사오입개헌이란 정치폭행을 자행했다. 사사오입개헌은 이승만에게 종신집권의 길을 터준 것이었다. 이에 야당의원들은 호헌동지회(護憲同志會)를 구성한 후 신당 창당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호헌동지회가 결성되었을 때 구성원은 가장 보수적인 층에서부터 상당한 정도로 진보적인 층에 이르기까지 잡다했다. 죽산으로 대표되는 전(前)공산주의자들을 새로운 정당에 참여시키는 문제로 의견이 나뉘었다. 조병옥과 장면, 김준연 등은 조봉암의 참여를 강력히 반대하면서 ‘자유민주파’를 결성했다. 한편 장택상(張澤相)과 신도성(愼道晟), 서상일(徐相日) 등은 신당운동에 조봉암이 반드시 합류해야 하며 그것이 바로 민주대동단결의 핵심이라고 주장하면서 ‘민주대동파’를 결성했다.
죽산 자신은《동아일보》를 통해 민주대동운동에 적극 나설 것이라고 표명했다. 죽산은 “나는 8·15광복 후 즉시 공산당과 절연하고 반공의 편에 섰다”라고 하면서, “이번 신당운동의 주도세력인 호헌동지회의 주요한 분들이 이 운동을 위하여 나의 협조를 구하기에 비록 미력이기는 하지만 지팡이를 짚고서라도 따라갈 것을 작정하고 이 글을 동포 앞에 드리는 바”라며 신당운동에 적극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결국 신당 창당은 죽산을 배제한 채 1955년 9월 민주당을 창당함으로써 이루어졌다. 한민당에서 민국당으로 이어지는 보수정당이 철저하게 친미적이고 반공적이엇다는 점을 감안하면, 민국당이 주도적으로 창당한 민주당이 극우보수적 입장에 서게 되리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민주당은 창당 이후 4·19민중항쟁에 이르기까지 이승만의 무력북진통일정책에 끌려 다녔으며, 진보당이 평화통일론을 주장하다가 등록이 취소됐을 때도 뒷짐만 지고 있었다. 민주당은 또 다양한 파벌의 연합적 성격을 띠었기에 처음부터 극심한 파벌투쟁 가능성을 내포했다. 장면의 신파와 구(舊)민국당 계열을 중심으로 한 구파간의 대결은 4·19혁명 이후 끝내 분당으로 귀결되었다.
범야(汎野) 신당운동이 일부 보수세력들의 집결로 끝나자, 여기에서 제외되었거나 스스로 참여를 거부한 인사들 가운데 진보적 신당을 결성하려는 움직임이 싹텄다. 1950년의 5·30선거에서 승리한 중도파 민족주의세력도 새로운 상황에서 활로를 모색했다. 무엇보다도 1956년에 실시될 예정인 정·부통령선거가 진보적 신당결성에 구심력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1955년 6월경부터 비(非)자유당·비민주당 중심의 혁신세력을 규합하려는 정당운동이 대두했다. 그리하여 1955년 9월 1일 조봉암·서상일·장건상·정화암(鄭華岩) 등 원로와 윤길중(尹吉重)·신도성·김기철 등 신진세력 30~40명이 광릉(光陵)에서 모임을 가졌다. ‘광릉회합’은 범야신당 추진이 분열하여 극우 반공세력을 중심으로 한 야당 창당이 진행될 무렵 죽산이 중심이 되어 진보정당을 만들기 위해 마련한 모임이었다.
광릉회합으로부터 3개월 뒤인 1955년 12월 22일 진보당(가칭) 발기취지문과 강령초안이 발표됐다. 발기인은 조봉암·서상일·이동화·김성숙·박용희·신백우 등 12명이었고, 총무대표위원에 최익환(崔益煥), 선전위원에 윤길중이 선임되었다.
진보당은 발기취지문과 강령을 통해 민주주의적 통일방안, 피해대중의 단결,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제3의 길’을 제시했다. 진보당은 발기취지문에서 “진정한 혁신은 오로지 피해를 받고 잇는 대중 자신의 자각과 단결 위에서만 실현될 수 잇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관료적 특권정치, 자본가적 특권경제를 쇄신하여 진정한 민주책임정치와 대중본위의 균형 있는 경제체제를 확립할 것을 기약하고, 국민대중의 토대 위에 선 신당을 발기하고자 한다”라고 천명했다.
그러나 진보당의 출범은 예정대로 추진되지 못했다. 정치자금 부족, 진보당에 참여할 경우 당할 피해에 대한 우려 등 복합적 요인이 작용했다. 그러다 1956년 3월에 접어들면서 정·부통령선거 문제가 부각되었고, 3월 5일에 자유당은 대통령선거후보에 이승만을, 부통령선거후보에 이기붕을 지명했다. 민주당이나 진보당 측이 전열을 갖추기 전에 조기선거를 실시하겠다는 속셈이었다. 이에 따라 민주당도 대통령선거후보에 신익희, 부통령선거후보에 장면을 지명했다.
진보당추진준비위원회에서는 정·부통령선거가 앞당겨 실시될 상황에서 명실상부한 정당으로 정식출범하기는 어렵다고 판단, 3월 31일 진보당전국추진위원회 대표자회의를 개최하여 당의 정강을 비롯한 여러 안건을 채택하였다. 이어서 정·부통령선거대책위원회를 구성해 대통령선거후보에 조봉암, 부통령선거후보에 서상일을 지명했다. 그러나 서상일의 고사로 부통령선거후보는 나중에 박기출(朴己出)로 교체되었다.
국민들의 관심은 부통령선거후보보다는 대통령선거후보에 쏠렸다. 아울러 정권교체를 위해 야권후보 단일화 요구가 비등했다. 원내의 헌정동지회에서는 4월 6일 민주·진보 양당의 연합을 촉구하고 그 중개역할을 담당하겠다고 밝혔다. 죽산은 “진보당이 지향하는 정강에 야당이 호응하면 정·부통령후보 지명의 백지화는 물론 자신의 입후보를 취소할 용의가 있다”라고 했다.
진보당 선거대책위원회에서는 4월 9일 민주당 측에 ① 책임정치체제 실현, ② 수탈 없는 경제체제 실현, ③ 평화적 방법으로 남북통일을 이룩할 것 등 3개 원칙을 제시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자기 당의 정책노선에서 조금의 변경도 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뿐만 아니라 야당연합전선을 먼저 제의했음에도 진보당에 아무런 통고도 없이 독자적 선거유세에 돌입했다. 난관의 타개를 위해서 헌정동지회와 원로들이 나서 야당의 행동통일을 주장하고 호소했다.
4월 25일 신익희와 조봉암 사이에 비밀회동이 열렸다. 회담에서 조봉암은 대통령선거후보를 양보할 뜻을 밝히고 ① 신당운동 당시 조봉암 등 혁신계를 배제한 점에 대한 적절한 의사표시, ② 신익희가 단일후보가 될 경우 여하한 압력이 있거나 비상사태가 일어나도 끝까지 투쟁할 것, ③ 신익희가 당선될 경우 조병옥과 김준연을 중용하지 않을 것 등을 요구했다.
4월 27일 신익희·장면·조봉암·박기출의 4자회담이 열렸다. 장면은 불참한다. 부통령선거후보를 사퇴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회담은 결렬되었지만, 이날 회담에서 신익희와 조봉암 사이에는 모종의 밀약(密約)이 이루어졌다. 진보당이 부통령후보까지 사퇴하는 대신 진보당의 기본정책 3개항을 민주당의 집권공약에 반영하라는 것과 신당운동 때 혁신계를 배척한 과오에 대해 사과할 것, 조봉암 자신을 공산주의자라고 모략하지 말 것, 민주당 승리 후에 조봉암을 비난하는 조병옥과 김준연을 정부요직에 등용하지 말 것 등이었다.
이러한 토의과정에서 두 사람 사이에 몇 가지 은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진보당 창당의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조봉암과 진보당은 5월 초까지 지방유세를 계속하며 그동안 막후교섭을 통해 민주당은 진보당의 조건을 수락하고 진보당은 후보사퇴를 위한 당내 분위기를 조성할 것, 5월 초 신익희와 조봉암이 회담을 갖고 공동성명을 통해 후보단일화를 발표한다는 것이었다. 후보단일화를 위한 마지막 회담은 5월 6일 전주에서 갖기로 했다.
조봉암은『나의 정치백서』에서 당시의 판단을 올바른 정치행동이었다고 했다. 자신은 진보당의 주장을 대중 앞에 밝혔고 진보당의 발전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다. “선거운동은 선거운동대로 적극적으로 강행하고 마지막 투표일 며칠 앞두고 우리 당 후보의 입후보를 취소하고 야당연합적인 투표를 하게 해서 다수국민의 소원에 응하는 것이 정치적 의의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해공(海公) 선생과는 그러한 조치에 합의를 보아두었던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합의는 한강백사장 연설을 끝낸 신익희가 5월 5일 전주유세를 위해 호남선 열차를 타고 가던 중 갑자기 뇌일혈로 사망함으로써 무산되었다. 신익희는 6일 전주에서 조봉암과 만나 공동성명을 발표할 예정이었다. 신익희의 갑작스런 서거에 위협을 느낀 진보당에서는 조봉암의 지방유세를 중단시키고 서울로 올라오게 해 투표당일까지 은신케 했다. 또 의외의 사태로 조봉암은 후보사퇴를 할 수 없는 상황에 몰렸다.
신익희가 사망함으로써 야권의 대통령선거후보는 자연히 단일화된 것처럼 보였다. 조봉암은 이러한 사태에 대응하기 위하여 부통령선거후보인 박기출로 하여금 후보사퇴 성명서를 발표케 하고 장면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조봉암과 장면’으로 야당 단일후보를 이루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에서는 다른 당 후보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결의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익희에게 추모표를 던지라는 식으로 나왔다. 나중에는 조봉암보다는 이승만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김준연은 노골적으로 “조봉암에게 투표하느니 차라리 이승만에게 투표하라”라는 성명을 발표하여 문제가 되었다. 민주당은 이를 수습하기는커녕 이승만과 조봉암 그 어느 편도 지지할 수 없다고 하면서 부통령선거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조봉암은 아직 정식으로 창당조차 하지 않은 진보당의 기존조직만으로 선거운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자금과 조직 모든 면에서 형편없이 열세인 데다, 이승만 정권의 탄압으로 진보당은 유세다운 유세를 한 번도 제대로 벌일 수 없었다. 이승만은 유세를 통해 사상문제를 들고 나와 조봉암을 비난했다. 자신이 농림부 장관으로 앉힌 조봉암을 ‘공산주의자로 몰아서 죽이기’ 방식을 들고 나온 것이다.
민주당의 한 의원은 5·15선거 직후 제일 무서운 것이 “이 동리에서 만약에 야당표가 나온다면 이 동네는 몰살해 버린다. 만약에 우리가 북진할 때는 이 동네의 너희들부터 전부 다 죽이고 간다”라고 주민들을 협박했던 것이라고 국회속기록에서 밝혔다. 이와 같은 협박이 6·25전쟁 발발 후 수많은 양민이 집단학살당하는 것을 본 국민들에게 얼마나 커다란 두려움이 되었을까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956년의 5·15선거는 정책대결의 성격이 뚜렷했다. 정책대결은 선거운동의 모든 면에서 철저하게 불리했던 진보당에서 주로 제기했고, 자유당과 민주당은 소극적인 면을 벗어나지 못했다. 5·15선거에서 진보당은 이승만과 민주당의 무력통일론은 현실과 유리된 주장으로 통일을 단념하자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남북한에 걸쳐 조국의 통일을 저지하고 동족상잔의 유혈극의 재발을 꾀하는 극좌·극우의 불순세력을 억제하고 진보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하여 유엔 보장하에 평화통일을 성취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평화통일에 이어 외교안보정책으로는 집단 안전보장체제의 확립으로 안보문제를 해결하여 국방비를 경감할 것, 호혜 평등주의에 입각한 선린정책으로 민족의 완전 자주독립을 전취할 것을 내걸었다. 죽산은 또한 모든 선량한 사람이 안심하고 살 수 있고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을 약속했다. 그 구체적 방법으로 경찰관 수의 대폭 감축, 행정기구 정비와 업무간소화 단행, 신문지법·국가보안법과 비상사태하의 동원령 밑 일제·군정 법령의 폐지·개정 등을 제시했다.
자유당·민주당과는 대조적으로 죽산은 당시 국유로 된 대규모 산업시설을 계속 국유화하고, 소수 개인이 국가재산을 독점하는 국유재산 불하정책을 폐지하며, 기간산업의 급속한 발전과 국민경제의 자립을 앞당기기 위해 종합적 경제계획을 수립학, 이를 강력히 집행·검열할 관·민 경제계획위원회의 설치를 공약했다.
근로대중을 위하 정치를 천명한 진보당은 수탈 없는 경제의 구체적 방안을 제시한 점에서 다른 당과 차별성을 보였다. 농민에게는 토지소득세 등 현물세를 폐지하고, 농촌고리대를 일정기간 지불유예케 하며, 노동자에게는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을 보장하고, 경영참가와 이익균점을 실현할 것을 약속했다. 또 국민의료제도와 국민연금제도를 확립하고, 제대군인의 취직 알선을 철저히 하며, 교육의 국가보장제 실시를 내세웠다. 중소기업인·기술자·기능인의 협동에 의한 생산조합조직 정려공약도 제시했다.
1956년 5월 15일 선거는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투·개표 과정에서 철저한 부정선거가 이루어졌다. 1960년 3·15정·부통령선거 당시 내무부 장관이던 최인규(崔仁圭)는 훗날 그의『옥중 자서전』에서 강원도에서 이승만 지지표가 90% 이상 나온 것은 조작에 의한 것이며, 그 밖에도 엄청난 부정선거가 있었다고 실토했다.
개표결과가 알려졌을 때 이승만과 자유당은 큰 충격을 받았다. 초대 대통령으로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다고 자부하던 이승만은 총체적인 투·개표 부정을 자행했음에도 전체 유효 투표자수 906만 7천여명 가운데 504만여표를 얻은 것으로 집계되어 55%의 지지밖에 얻지 못했다. 더구나 서울의 경우 60여만명의 투표자 가운데 20여만표를 얻어 겨우 3분의 1의 지지를 받았다.
죽산은 4년전 제2대 대통령선거 득표수의 세 배에 달하는 216만여표를 얻어 총투표수의 23.9%를 차지했고, 총투표수의 20.5%인 185만표에 달하는 무효표는 대부분 신익희의 추모표였다. 죽산이 얻은 총득표수의 4분의 3은 경상도와 전라도 표였다. 부정선거가 자행되지 않았으면 죽산의 득표수는 분명 훨씬 높았을 것이다.
선거가 끝난 지 얼마 안 되는 6월 5일 조병옥은 국회에서 “나는 이번 제3대 대통령선거가 만일 자유분위기 속에서 행해졌더라면 이 대통령이 받은 표는 200만표 내외에 지나지 못하리라고 판단합니다”라고 발언했다. 1958년 법무부 장관이 되어 조봉암과 진보당기소사건(進步黨起訴事件)에 깊숙이 관련되었던 홍진기(洪璡基)는 그의 자서전에서, “개표시간이 빨랐던 일부 도시에서 조봉암 후보가 이승만 대통령의 득표보다 훨씬 앞선 기록이 있는 것을 볼 때 개표부정이 없었더라면 조 후보가 이 대통령에게 졌다고 해도 근소한 차이였을 것이라고 일부에서는 생각했다”고 기술했다.
조봉암 자신은 이를 어떻게 보았는가? 1956년 5월 17일 발표한 담화에서 조봉암은 어려운 환경과 강압적 분위기 속에서 패배했음을 자인하고 이승만의 당선을 축하했다. 그 후 1957년 한 잡지사에서 펴낸《내가 걸어온 길, 내가 걸어갈 길》에서 “선거의 결과는 항용 말하는 것처럼 투표에는 이기고 개표에는 졌습니다”라고 언급했다. 진보당창당추진위원이었던 고정훈(高貞勳)도 어느 글에서 “조봉암 씨는 낙선된 것으로 발표되었다”라고 했다.
1956년 5·15정·부통령선거에서 조봉암이 돌풍을 일으킨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조봉암이 주장한 ‘평화통일론’에 대한 지지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6·25남북전쟁으로 수많은 대중이 전쟁의 실체를 직시해 동족간에 피를 흘리는 전란이 일어나면 파국만 있을 뿐이라는 조봉암의 호소가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대중은 휴전협정 반대, 뉴델리 밀회설을 전후한 제3세력 배격과 북진통일운동, 1955년 8월부터 12월까지 계속된 중립국감시위원단 철수 요구 시위 등 끊이지 않고 계속된 북진통일운동에 등을 돌렸다. 그것이 전시 긴장체제 완화와 맞물려 억압적 권력에 대한 비판의 눈을 뜨게 했으며, 자신이 원하는 지도자와 정당을 선택하는 여유를 갖게 하였고, 평화통일론에 귀를 기울이게 했다.
해방정국을 통해 극좌와 극우를 배제한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이 지피던 불씨가 6·25남북전쟁이라는 극한상황을 경과한 뒤 되살아난 것도 조봉암의 등장을 뒷받침하는 배경이 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반공이데올로기 아래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정치세력에게는 ‘빨갱이’라는 올가미를 씌워 제거했다. 그러나 독립정부 수립에 반대하던 민족주의 좌우파 계열의 인사들은 그때까지도 엄존했고, 조봉암은 ‘평화통일론’과 ‘사회민주주의적’인 ‘제3의 길’을 통해 그들의 불씨를 이어받았다.
재3대 대통령선거 후 조봉암은 광범한 대중적 지지를 바탕으로 범진보세력을 묶어 진보당(進步黨)을 정식으로 발족하려는 움직임을 본격화했다. 조봉암은 대통령선거를 통해 고조된 진보당의 당세를 몰아 1956년 8월에 있을 지방의원 선거를 통해 지방당을 결성하고 그 여세를 몰아 중앙당을 결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진보당추진위원회의 서상일 일파나 진보당추진위원회에 참가하지 않았던 혁신계 일부에서 조봉암을 제2선으로 물러 앉히려고 하는 등 혼선을 빚다가 결국은 지방의회 진출에 참여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 후에도 조봉암 계열과 서상일 계열 사이에 범혁신 신당 태동을 둘러싸고 협상과 대화가 계속되었으나, 결국 두 세력 사이에 파인 골을 메우지 못해 진보당과 민주혁신당 창당으로 제각기 다른 길로 갈라섰다.
진보당은 1956년 11월 10일 진보당창당추진위원회가 구성된 지 약 1년만에 전당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에서는 당위원장에 조봉암, 부위원장에 박기출·김달호, 간사장에 윤길중을 선출했다. 조봉암은 개회사에서 진보당이 ‘제3의 길’을 갈 것이라고 방향을 제시하고, 그 길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다 같이 거부하고 청산하는 길인 동시에, 인류의 새 이상 아래 수렴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는 일을 없애고, 또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일을 없애고, 모든 사람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고, 모든 사람이 착취당하는 일 없이 응분의 노력과 사회적 보장에 의해서 다 같이 평화롭게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세상, 말하자면 우리들의 이상인 복지사회를 건설하자는 것입니다.”
조봉암은 그것을 ‘한국의 진보주의’라고 해도 좋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개회사에서 당시의 과제로 평화적 방법에 의한 국토통일로 완전한 자주국가 건설, 혁신적이며 참된 민주주의의 실현, 계획경제로 민족자본 육성과 산업을 부흥하는 것, 사회보장제도의 실시, 교육의 국가보장제도를 점진적으로 실시하는 기반을 조성하는 것 등을 지적했다. 그는 또 진보당은 광범한 근로대중을 사회적 기반으로 하는 피해대중의 당이 될 때 역사적 과업을 수행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진보당은 창당된 지 6개월이 되어서야 정당 등록증을 받았다. 서류미비니 정강정책의 합법성을 검토한다는 구실로 등록이 지연된 것이다. 진보당 조직은 자유당이나 민주당보다 체계적이고 민주적이었다. 간부 중에는 ‘젊은 피’가 많이 수혈되었고, 지식인이나 학생층 사이에 지지인사가 많았다.
진보당은 조봉암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그의 존재가 절대적이었다. 그는 탁월한 이론가이자 뛰어난 조직적 수완을 가지고 있었다. 진보당은 또 당 안팎으로 가해지는 협박·테러·이탈 등으로 말미암아 피라미드형의 민주정당적 모습보다는 조봉암을 유일한 핵으로 하는 단핵원심(單核圓心)적 조직형태를 갖출 수밖에 없었다.
진보당은 출범과 동시에 시련을 겪었다. 당사조차 구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건물주가 번번이 계약을 취소했다. 조직활동은 그야말로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지방의 도당이나 지구당 결성대회 때는 거의 예외 없이 경찰이나 정치깡패들이 테러와 폭력으로 난장판이 되기 일쑤였다. 서울시당 결성 때는 테러리스트와 정복 경찰관들이 몰려들어 대의원과 당원들을 몰아냈다. 전북도당 결성 때는 괴한들이 한밤중에 당원들의 숙소에 난입하여 당원들을 중태에 빠뜨리기도 했다. 전남도당 결성 때는 간부의 집을 습격하여 권총과 칼로 난타하고 찔러 생명이 위태롭게 했다.
이승만 정권은 자신의 정적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굳힌 조봉암을 본격적으로 탄압했다. 과거에는 조봉암의 측근을 간첩으로 몰거나 죽이는 일은 있었으나 조봉암에게 직접 위해를 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957년부터는 사정이 바뀌었다. 그해 가을 조총련계에서 밀파했다는 정우갑(鄭禹甲) 간첩사건이 알려졌을 때 조봉암을 소환했으나 무죄가 선고되었다.
11월 초에는 박정호(朴正鎬) 간첩사건으로 장건상과 최익환 등이 구속될 때 조봉암 연루설 등이 회자되다가 박정호와 조봉암 사이에 아무런 교류가 없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전에 발표되었던 사건까지 포함하여 간첩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조봉암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한 신문은 조봉암이 “내가 간첩과 관련이 있다니!”라고 말하면서 아무런 원망의 기색도 없이 웃어버리더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1958년은 정치권으로 보았을 때 매우 중요한 해였다. 그 해에는 제4대 국회의원선거가 예정된 데다, 2년 뒤에는 제4대 정·부통령선거를 치를 계획이었다. 이승만과 자유당은 조봉암의 돌풍을 우려했다. 민주당 역시 진보당의 열풍으로 제2당의 위치를 위협받고 있었다. 진보당은 제3대 대통령선거의 여세를 몰아 제4대 국회의원선거에서 국회의원을 대거 당선시킬 기세였다.
1958년 1월 11일 박정호 간첩사건을 담당한 조인구(趙寅九) 검사는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을 북괴의 남침구호로 단정하여 엄단할 방침이라고 발표한 데 이어, 1월 12일 새벽 진보당 간부들을 일제히 검거했다. 보수언론은 조봉암이 북괴로부터 공작금조의 인삼이 든 상자를 받았다느니, 조봉암도 간첩과 접선한 사실을 시인했다느니 하면서 여과되지 않은 온갖 보도를 해댔다.
1월 14일 대검찰청은 “조봉암 진보당 중앙위원장 등 일당은 북한괴뢰 김일성의 지령으로 남파된 간첩 박정호·정우갑 등과 수차 밀회하고 동당의 정강정책이 괴뢰집단에서 주장하는 공산 평화통일과 부합된다는 사실을 인정, 그들과 야합할 목적으로 평화통일을 추진했다. …괴뢰집단에서는 작년 9월까지는 평화통일운동을 목표로 간첩을 침투시켰으나, 동 9월 이후의 대남 간첩정책은 진보당 확대공작으로 전환된 사실이 판명되었다”라고 발표했다.
조봉암과 진보당 관계자들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 평화통일론을 주장한 것처럼 조작한 것이다. 수사당국은 계속해서 언론에 중대발표를 흘렸고, 언론은 여론재판 또는 언론테러로 조봉암과 진보당 관계자들을 상대로 ‘빨갱이’몰이에 앞장섰다. 검찰과 경찰은 조봉암과 진보당 탄압을 위해 사전 여론조성작업을 철저하게 준비했다. 미국 대사관에서 예측한 것과 같이 이승만 정권에서도 조봉암과 진보당 관계자들을 구속할 경우 대중의 반발을 예상하여 사전에 정지작업을 했다.
이 무렵 조봉암은 서울 모처에서 은신하던 중 이틀 만에 자진해서 경찰에 출두하기로 했다. 1월 13일 조봉암은 가족과 서울시경에 전화를 걸어 자진출두 의사를 밝힌 뒤 수사기관으로 가던 중 쇠고랑이 채워져 시경분실로 끌려갔다.
1월 하순 조봉암은 “도대체 무엇을 조사하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불명확한 수사를 하고 있다. 처음에는 ‘북진통일’을 제외한 평화통일이 모두 국시(國是)에 위반된다는 것이 수사의 각도였으며, 그것이 성립되지 않으니까 진보당을 ‘폭력혁명단체’라고 규정하여 취조했다”라고 밝히면서 진실은 명백히 드러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윤길중도 구속적부심사에 승리를 자신하며 그동안 무엇 때문에 조사를 받은 것인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2월 25일 오재경 공보실장은 진보당을 불법단체로 규정하고 등록을 취소했다. 등록취소 이유로는 ① 진보당은 대한민국의 국법과 유엔의 결의에 위반되는 통일방안을 주장하고 있다, ② 진보당 간부들은 북한 괴뢰집단이 밀파한 간첩과 밀사와 파괴공작원과 항상 접선했다, ③ 진보당은 북한의 목적달성의 전제단체로서 공산당 비밀당원과 공산당 방조자들을 의회 의원에 당선시켜 대한민국을 파괴하려고 기도했다 등을 제시했다.
진보당에 대한 등록취소 결정은 진보당기소사건 확정판결이 나기 훨씬 전에 내렸다. 게다가 평화통일론과 간첩사건 등은 대법원 확정판결에서 모두 무죄로 판명되었으니, 취소결정이 얼마나 졸속이었으며 법률적 요건을 전혀 구비하지 못한 것이었던가를 미루어 알 수 있다. 더욱이 진보당의 등록취소를 결정한 근거법령은 미군정법령상의 정당등록법이었다.
정당다은 정당을 만들기 위해 노심초사했던 조봉암과 그의 동지들은 전혀 사실과 부합하지 않은 발표로 해산되고 말았다. 자유당과 민주당은 공식논평마저 거부했다. 민주당에서는 오히려 후련하다는 듯이 “밝혀진 범죄사실이 사실이라면 등록취소가 마땅하다”라고 맞장구를 쳤다. 민주당의 한 고위간부는 “지금까지 나타난 진보당 간부의 범죄상을 볼 때 불법화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언명했다.
진보당기소사건(進步黨起訴事件)은 공판이 거듭될수록 처음에 혐의로 내건 평화통일론이나 여러 간첩사건들과 관련된 증거가 점차 효력을 잃었다. 예컨대 당시 변호인들은 평화통일론은 유엔의 결의에 합치되는 것이고, 박장호 간첩사건과 조봉암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판명된 바 있다고 변론했다. 검찰은 더 결정적 증거를 제시해야 했다. 이에 따라 검찰은 남한의 특수부대인 HID의 대북공작원으로 수 차례 북한을 왕래하던 양명산(梁明山)으로 하여금 조봉암과 북한 정부 간의 연락책으로 간첩행위를 했다는 거짓증언을 받아냈다.
1958년 7월 2일 재판부는 1심 판결을 내렸다. 유병진(柳秉震) 재판장은 조봉암에게만 양명산과 똑같이 징역 5년을 선고했을 뿐 진보당 관계 피고인에게는 전원 무죄를 선고했다. 1심 판결이 있은 후 ‘반공애국청년’이라 자칭한 괴한 3백여명이 법원으로 난입하여 “종북판사 유병진을 타도하자”, “조봉암을 간첩죄로 처단하라”며 난장판을 벌였다. 진보당기소사건의 정략적 의미를 감안하면 1심 판결은 이승만의 분통을 터뜨리게 했을 것이다.
재판장이던 유병진은 4·19민중혁명 후에 가진 한 인터뷰에서 “1심에서 조봉암에게 징역 5년도 과중하지 않았던가?”라는 신문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회고했다.
“그쯤 하여두면 상소심에서는 적당한 판결이 내려질 줄 믿었다. 차기 대통령선거에서 조 씨를 제거하기 위해 조 씨를 간첩으로 몰아댔다는 것을 누구나 다 상상할 수 있었을 것이며, 또 기록을 보면 무엇 때문에 조 씨를 간첩이라고 하는가를 엿볼 수 있다. 내가 언도한 5년형이라는 것도 마음이 아픈 판결이었음을 당시나 지금이나 장래에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승만은 진보당 기소사건에서 어떤 태도를 보였는가? 1960년 4·19혁명 후 고정훈은 진보당 기소사건에 대해 이승만이 특무대장 김창룡(金昌龍)을 불러 조봉암은 공산주의자니 없애라고 지시했고, 그것을 쪽지로도 써주었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이 사건 초기부터 분명한 입장을 보였다. 1958년 1월 14일 경무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이 사건의 보고를 받았을 때 이승만은 “조봉암은 벌써 조치되었어야 할 인물이며, 이런 사건은 조사가 완료될 때까지 외부에 발표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3월 11일의 국무회의에서 이승만이 진보당 기소사건에 대해 묻자 법무부장관 홍진기는 “현재 공판중이므로 앞으로 결정될 것이나 그 후 특무대에서 발견한 유력한 확증(양명산 관련)이 있으므로 유죄가 틀림없다”라고 보고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이제 확증이 생겼으니 유죄라면 전에는 증거 없는 것을 기도한 것같이 들린다. 외부에 말할 때는 주의하라”라고 주의를 주었다고 국무회의 기록은 전한다.
2심 재판의 항소심 선고공판은 10월 25일 열렸다. 김용진(金容晉) 재판장은 양명산이 1심에서 자백한 내용을 고문·협박·회유에 못 이겨 허위로 진술한 것이라고 진술을 번복하고 변호인이 증거물과 증인들을 신청했으나 이를 모두 거부하고는 조봉암과 양명산에게 사형을, 다른 진보당 간부들에게는 3년 내지 2년형을 선고했다.
이제 남은 것은 대법원의 판결뿐이었다. 대법원 판결의 주심은 김갑수(金甲洙) 대법관이었다. 1959년 2월 27일 김갑수는 대법원 판결문을 낭독했다. 판결문은 “진보당 강령·정책이……헌법에 위반하는 것이 아니고 평화통일에 관한 주장 역시 언론자유의 한계를 일탈하였다고 볼 수 없다고 봄이 명백할 뿐 아니라”라고 하여 진보당의 강령·정책이나 평화통일론은 합법적이며 무죄라고 판시했다. 그러나 조봉암의 간첩혐의 부분은 명백한 유죄로 판결하고, 진보당은 비록 강령·정책 등이 합법적이라고는 하나 간첩인 조봉암이 조직하고 그가 당수로 되어 있기 때문에 불법화한다는 논지였다.
대법원 판결 직후 조봉암은 가족과 면회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법이 그런 모양이니 별수가 있느냐? 길 가던 사람도 차에 치여 죽기도 하고, 침실에서 자다가 자는 듯이 죽는 사람도 있는데, 육십이 된 나를 처단해야만 하겠다니 이제 별수가 있겠느냐? 과히 상심하지는 말아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조봉암은 주로 독서로 시간을 보내면서 다가올 죽음의 날만 기다렸다. 감방규칙도 잘 지켜 간수들로부터 모범수라고 존경받았다. 그는 자신이 처해 있는 순간 순간을 흐트러짐 없이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삶의 연륜과 세월의 모진 풍상을 겪어낸 사람의 달관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변호인들은 재심을 청구했으나 상고심을 맡았던 그 재판부가 다시 재심을 맡았고, 그나마 재심청구를 이유 없다고 기각했다. 변호인들은 다시 재심을 청구하려고 밤을 새워 긴급하게 서류를 작성했으나, 다음 날인 7월 31일 조봉암은 전격적으로 처형되었다. 전무후무한 ‘사법살인’이었다.
조봉암이 서대문형무소의 사형장으로 향할 때 그의 머리는 단정하게 다듬어졌으며, 평소 입고 있던 모시 바지저고리에 흰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수인번호 2310번을 가슴에 단 채 10시 45분 형장에 도착한 조봉암은 조용히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집행관이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느냐고 하자 조봉암은 이렇게 답했다.
“이승만 박사는 소수가 잘 살기 위한 정치를 하였고, 나와 나의 동지들은 국민 대다수를 고루 잘 살리기 위한 민주주의적 투쟁을 했소.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 살 수 있는 정치운동을 한 것밖에는 없는 것이오. 그런데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가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음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오. 다만 나의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발전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그 희생물로는 내가 마지막이 되기를 바랄 뿐이라오.”
조봉암은 입회목사에게 누가복음 23장 22절을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한 때,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눈을 감은 채 성경구절을 듣고 난 조봉암은 집행관의 안내로 교수대로 다가갔다. 1959년 7월 31일 조봉암은 이미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었다.
이승만 백색독재정권은 조봉암 사형집행 사실마저 철저하게 은폐하고자 했다. 조봉암의 시신은 밤늦게 유족들에게 인도되고, 상가에 오는 조문객의 발길은 철저히 통제되었다. 장례식 당일엔 무장군인과 경찰을 동원하여 삼엄한 감시와 경계 속에 영구차를 호송했다.
조봉암의 시신은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치되었다. 그의 장례식 기사 역시 엄중하게 통제되어 한 신문만 짤막하게 단신으로 보도되었다.
˝지난 7월 31일 상오 사형이 집행된 조봉암의 시체는 2일 하오 3시 서울시내 충현동 그의 집에서 발인되어 하오 5시 반경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혔다.˝
국내에서는 이처럼 보도통제 때문에 여론의 집중적 표출이 억압되었지만, 해외의 언론은 조봉암의 죽음이야말로 한국 보수독재의 구체적 상징이라고 비난하였다.《뉴욕타임스》등 미국 언론들은 조봉암의 사진과 함께 그의 사형소식을 전했고, 영국과 일본의 신문·잡지들도 “이승만 씨의 경찰이 무고한 조봉암 씨의 목에 오랏줄을 매어 정적을 말살했다”고 비난했다.
조봉암이 처형된 지 채 1년이 되지 않아 4월 항쟁이 일어났고,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하와이로 망명길을 떠났다. 해방공간을 통해서 좌우합작운동과 남북협상운동에 연결되어 있던 조봉암의 진보적 민주주의 사상은 극우 보수주의의 동토(凍土) 속에서도 살아남아 4·19혁명 후의 민주화·민족통일운동으로 이어졌다.
현대사를 통해 조봉암이 실시하고자 했던 토지개혁, 반이승만투쟁과 진보당 창당, 피해대중을 위한 민중적 정치지향, 사회적 민주주의와 평화통일론 등은 당대의 역사에서는 항상 한발 앞서간 궤적을 보여준다. 특히 조봉암이 주창한 평화통일노선은 한국 현대사의 모순을 정면으로, 그리고 힘차게 극복하려 했던 전위적 실천운동으로 4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실현되고 있다.
탈냉전과 남북간의 화해·협력의 시대를 재촉하는 오늘, 냉전과 분단의 이데올로기적 한계상황에 과감하게 도전하다 쓰러진 조봉암의 육십평생은 비록 짧은 세월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한국 현대사에 남긴 굵은 족적(足跡)은 분단시대 극복의 새로운 시작으로 기록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