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과 종교적 삶에 관하여 - 이기적인 것에서 해방되는 것이 기적인 것일까?
<시네연구소>라는 곳에서 「루르드」라는 영화를 보았다. 이후에 토크쇼가 있었다. 사실상 토크쇼를 하는 방식이 질서가 없어서 제대로 토크쇼를 하였다는 만족감도 없었고, 또한 영화의 주제와 무관하게 자꾸 정치적인 논쟁으로 나아가는 것 같아서 씁쓸한 점도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새로운 체험을 한 것으로 만족하였다. 그런데 영화의 본질적인 주제와 거리가 멀지만 함께 토크쇼를 진행한 형제가 재미있는 말을 하였다. 그는 “진정한 기적이란 이기주의에서 해방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해방신학을 전공한 사람다운 말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말은 사제들의 강론에서 수없이 들어온 말이라 별로 신선함을 주지 않았다. 좋은 말을 듣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지만 철학하는 사람으로서는 “좋은 말”보다는 “진리”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진정 기적이 “이기주의에서 해방되는 것”일까? 이는 ‘기적’에 대한 언어적 규정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또한 종교적 삶에 대한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기적은 신약성서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 만큼 ‘기적’이라는 사건이 종교적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기적에 연연하는 유대인들을 보면서 철학자 답게 “유대인들은 물이 술로 바뀌는데서 기적을 발견하지만, 나는 매일 아침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기적을 본다”고 하였다. 대개의 무신론적 사상가들은 모든 ‘기적’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자연현상으로 생각하며, 막스 베브 같은 사회학자라면 기적을 운운하는 사람들은 유아적인 종교적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해방신학자들은 당연히 부자들이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희생하는 사건을 가장 큰 기적으로 꼽을 것이다. 그런데 진정한 기적의 의미가 이러한 것일까?
사실상 기적의 근원적인 의미는 신의 손길이 닿아서 자연적으로 불가능한 어떤 사건이 벌어진 것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물이 술로 바뀌고, 장님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걷게 되고 등. 그런데 이러한 명백한 기적이 일어난다고 하여도 만일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기적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는 당연히 이를 믿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적은 오직 신의 손길에 의해서 일어날 텐데 신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만일 그가 의사라면 가급적 신중하게 이 현상을 병리적인 현상으로 이해하고자 할 것이다. 그런데 만일 이를 목격한 사람들이 신을 믿는 사람들이며 신의 손길에 의한 것이라고 믿을 지라도, 왜 이러한 기적이 일어났는가? 왜 저 사람이 아니고, 하필 이 사람인가? 어떻게 행동하면 이러한 기적이 일어나는가? 라는 질문들을 던진다면 그때부터는 그 기적을 보고 있는 사람의 가치관이나 세계관 혹은 그의 실존적인 상황에 따라서 다를 것이다. 만일 그 기적의 의미나 이유에 대해서 진정으로 알고자 한다면, 그것은 그 기적을 체험한 당사자가 그러한 기적을 허락한 신과의 교감을 통해서만 충분히 알려질 수 있을 뿐이다. 만일 여기서 누군가가 그 이유를 말하고자 한다면, 이때부터는 그 사람의 세계관이나 가치관이 그 진정한 원인을 대신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기적에 대해서 우리는 그 원인이나 의미에 대해서 침묵하여야만 할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예술작품의 의미에 대해서 작품을 산출한 작가가 가장 잘 알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든 사람들은 침묵을 지켜야만 하는 것이 아니듯이, 신이 허락한 기적에 대해서도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충분히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왜냐하면 진정한 신앙생활이라면 신과 신앙인 사이의 어떤 최소한의 교감을 가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충분히 자신의 삶에 비추어 유추해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유추가 정답은 아니라는 것을 전제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기적에 공통되는 한 가지 진실이 있다면 그것은 신이 기적을 베푼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며, 신이 인간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현존’의 징표를 보여준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세상이 아무리 바뀌고 시대가 어떻게 달라져도 ‘기적’이 가장 큰 신의 현존에 대한 증거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제 다시 진정한 기적이 “이기주의에서 해방되는 것”이라는 주제로 돌아와 보자. 사실 이 말은 매우 그럴듯한 교훈적인 말이기는 하지만, 이 말의 의미자체가 매우 모호하다. 우선 ‘이기주의에서 해방 된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는 완전히 이기주의를 벗어나서 이타주의가 되었다는 것일까? 해방이라는 말이 완전히 영향권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오늘부터 영원히 이기주의를 벗어나있다는 말인데, 이는 본성이 바뀐다는 의미일까? 성인이 된다는 의미일까? 성인이라고 해서 완전히 이기적인 성향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만일 이러한 의미라면 사실상 세상에 기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어떻게 평범한 인간이 하루아침에 성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고 이 말의 의미가 순간적으로 신의 영감을 받아서 본성적으로 이기적인 인간이 잠시 이타주의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면, 그리고 이러한 것을 기적이라고 한다면 이 세상에는 기적이 매일같이 발생할 것이며, 이를 굳이 기적이라고 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이러한 순간적으로 감화를 받아서 이타주의가 되는 일은 신이 아니라도 상담사나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얼마든지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더 나아가 본성적으로 이기적인 인간이 교육을 통해서 점차 남을 생각하는 이타적인 인간으로 되어 간다는 것은 윤리 도덕의 근본적인 목적이 아닌가? 따라서 순간적으로 이타적인 되는 것이 기적이라면 힘들게 신에게 나아가기 보다는 차라리 <윤리연구소>나 <철학연구소>에 가는 것이 더 나은 해결책이 아닐까?
장님이 눈을 떠는 것이 자연법칙을 초월하는 기적을 의미한다면, 이러한 기적은 오직 신의 몫이다. 하지만 ‘윤리적인 교화’는 비록 이것이 장님이 눈을 뜨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해도 모든 문명사회가 하고 있는 일이며,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그렇게 되어야 하는 보편적인 삶의 진실이다. 따라서 “이기주의에서 해방되는 것”이 기적이라는 말은 ‘기적’이라는 고유한 의미를 전혀 되살리지 못하는 무의미한 말과도 같다. 사실 자신의 아픔을 감수하고 타인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의 삶의 모습을 기적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실상 기적보다 훨씬 중요한 사건, 즉 사랑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사랑할 능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 기적의 사건이 계기가 될 수는 있지만, 결코 사랑의 행위가 기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사랑은 ‘자유의지’를 통한 한 개인의 숭고한 신앙의 행위이다. 사랑의 주체가 인격체라면 기적의 주체는 신이다. 성경에서도 “의인 아흔아홉보다는 회계하는 죄인하나를 하늘에서 더 기뻐할 것”이라고 한다. 이는 그 어떤 기적의 사건보다도 한 인간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의지를 전환하는 그 사건이 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기적을 인정한다는 것은 신의 현존을 인정한다는 것이며, 사랑을 인정한다는 것은 인간이 의로울 수 있음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기적을 무시할 수도 없고, 사랑을 무시할 수도 없다. 사랑이 기적이라고 하는 말도 믿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사랑이 그렇게 드물지 않기 때문이다. 이기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이 기적이라는 것도 인정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기적은 오직 신의 몫이기 때문이다.
종교적 삶의 진실 그것은 항상 이 세상에는 이기적인 것과 이타적인 것이 섞여 있으며, 병리적인 현상과 기적의 현상이 섞여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에는 이타적인 현상이 너무 드문 것과 마찬가지로 기적의 현상도 너무 드문 것 같다. 그만큼 신을 추구하는 영혼들이 너무나 드물기 때문은 아닐까? 현대는 진정 기적이 너무나 그리운 시대가 되어 버린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