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 전형필(1906~1962)
한글을 만든 원리와 문자 사용에 대한 설명과 용례를 밝힌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70호),
고려청자의 백미로 꼽히는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국보 68호),
조선 인물 풍속화의 진수인 신윤복의 ‘혜원풍속도’(국보 135호),
혜원풍속첩 중 단오풍정
조선 세종 때 엮은 음운서인 ‘동국정운’(국보 71호)….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대표적인 문화재들이다.
간송미술관은 국보 12건, 보물 10건, 서울시 지정문화재 4건을 포함해 귀중한 문화유산들을 보유하고 있다. 소장 문화재 면면을 보면 사립미술관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김정희 정선 심사정 김홍도 장승업 신윤복 등 조선시대 주요 화가들의 서화, 서책, 고려 및 조선의 자기, 석탑과 불상 등 소장품 중에는 문화재 지정 신청을 하지 않았을 뿐 국보·보물급 문화재들이 상당수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가히 ‘민족 문화유산의 보물창고’라고 할 수 있다.
정선의 풍악내산총람도
간송미술관이 많은 문화재를 소장할 수 있었던 데는 한 선각자의 열정과 우리 문화재에 소명의식이 자리잡고 있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1926년 휘문고보를 거쳐 29년 일본 와세다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한 전형필은 귀국 후 당대 최고 서예가이자 고서화 감식가였던 오세창(1864∼1953)의 지도를 받아가며 30년대부터 우리 문화재 수집에 뛰어들었다.
보화각 상량 기념사진(왼쪽부터 청이상범, 박종화, 고희동, 안종원, 오세창, 전형필, 박종목, 노수현, 이순황)
1929년 스물넷에 전씨 집안의 유일한 상속자가 되어 서울과 경기·충청·황해도에 논 4만 마지기(800만평)라는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아, 이를 바탕으로 서화와 서책, 도자기, 석조물 등 귀중한 문화재들을 사들였다. 가치가 있고 보존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미술품은 값을 따지지 않았다. 소장자가 요구하는 가격을 깎지 않았으며, 오히려 호가보다 돈을 얹어주다.
당시 기와집 한채값은 1000원 정도.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은 당시 서울 기와집 20채 값에 해당하는 2만원에 사들였고, 일본에 유출됐던 신윤복의 풍속도 ‘혜원전신첩’은 2만5000원에 되사왔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영국 귀족출신 변호사 존 개즈비가 20년 가까이 모은 국보급이 포함된 고려청자 20점은 40만원에 매입해 국내로 들여왔다. 이를 위해 논 1만마지기를 팔았다.
청자 모자 원형 연적
청자상감 유죽연로원앙문 정병
참기름병으로 쓰였던 ‘청화백자 양각진사철재 난국초충문병’(국보 294호)은 1만5000원에, ‘훈민정음 해례본’은 1만원에 각각 사들였다.
그는 특히 일제 말기인 43년 경북 안동에서 사들인 훈민정음에 남다른 애착을 보였다. 일제가 한글을 탄압하던 시기여서 꼭꼭 숨겨뒀다 해방이 된 후에야 훈민정음을 공개한 그는 한국 전쟁 때 피난을 갈 때도 품속에 품고 다녔고 잘 때는 베개 속에 넣어 지켰다.
간송이 수집한 문화재는 삼국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전 시대에 걸쳐 있다. 서화는 물론 조각과 공예 등 조형미술의 모든 분야를 망라한다. 간송미술관 소장품만으로 한국미술사를 서술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는 문화재 수집에 많은 재산을 들인 데다 말년에 자신이 인수한 보성중고등학교의 빚을 갚느라 생활이 어려워 집과 땅을 팔았지만 소장품들은 끝까지 지켜냈다.
그가 38년 서울 성북동에 개관한 한국 최초의 사립박물관 보화각은 66년 간송미술관으로 이름을 바꿔 국내 대표적인 문화재 미술관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국민일보 기사 활용해 편집] 2010. 5. 6
간송 전형필의 활동을 간략하게 정리해봅니다.
1. 사립박물관 보화각 설립
휘문고등보통학교, 일본 와세다 대학 법과를 졸업한 후에 일제 식민 통치 아래 말살되어가는 민족 정기를 되살리기 위하여 우리 민족 문화 전통을 단절시키지 말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민족 문화의 결정체인 미술품을 인멸되지 않게 일당(一堂)에 모아 보호하여야 한다는 비장한 각오로 오세창을 따라다니며 민족 문화재 수집 보호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가 물려받은 막대한 재력과 오세창의 탁월한 감식안, 그리고 이런 문화적 민족 운동에 공명하는 많은 지식인들의 후원을 받았다.
그래서 장차 우리 미술사 연구의 요람을 건설하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당시에는 한적한 교외이던 성북동에 북단장(北壇莊)을 개설하여 필요한 부지를 확보하고(1934), 1938년 일제의 강력한 물자 통제령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북단장 내에 보화각(葆華閣)을 건축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을 설립하였다.
2. 서화 수집
그 사이에 그는 민족 의식이 투철하고 서화에 일가를 이룬 오세창의 측근 문사들과 교유를 하며, 10만석 가산을 탕진한다는 비방을 들을 정도로 오직 문화재 수집에만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김정희와 정선, 심사정, 김홍도, 장승업 등 조선시대 전반에 걸친 그림과 서예 작품까지 총망라하였고, 고려 및 조선 자기와 불상·불구·와전 등에 이르는 문화재들을 방대하게 수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우리 미술사 연구를 위한 인접자료인 중국 역대미술품을 수집하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3. 문헌 자료 수집
문헌 자료의 구비를 위하여 1940년부터는 관훈동 소재 한남서림(翰南書林)을 후원, 경영하면서 문화사 연구에 필요한 전적을 수집하여 한적(漢籍)으로 1만권의 장서를 이루어 놓았고, 당시 국내외에서 발간되는 문화사관계 서적들도 가능한 한 수집하여 장차 연구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4. 교육사업과 미술연구소 설립
그리고 인재양성이 또 하나의 절실한 문제임을 통감하고 1940년 6월 재단법인 동성학원(東成學園)을 설립하여 재정난에 허덕이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육영사업에 착수하였다.
광복 후에는 잠시 보성중학교장직을 역임하기도 하고(1945.10.∼1946.10.), 문화재보존위원에 피촉되기도 하였으나(1954), 공직에 나가는 것을 피하였다.
1960년 김원룡, 황수영 등과 같이 고고미술동인회를 발기하여 운영의 핵심을 담당하면서 10여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1962년 1월에 죽자, 그해 8월 15일 대한민국문화포장이 추서되고, 1964년 대한민국문화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그뒤 그의 자제와 동학들이 북단장에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설립하고 그가 마련해놓은 연구자료를 토대로 미술사 연구를 활발하게 진행해감으로써 그 유지를 계승하고 있다.
보화각은 간송미술관으로 개칭되어 연구소에 부속되어 있다.
희망나라님 글(http://blog.daum.net/yescheers/8597795) 발췌 일부 수정
간송미술관 가는길
주소 : 서울 성북구 성북동 연락처 : 02) 762 - 0442
주의할 것은 개관은 연중 개관하지 않습니다. 연 2회 개관하는데, 매년 5월초~ 6월 1일, 10월초~ 말까지 두번 개관합니다. 개관 시간은 오전 10시~오후 6시까지 입니다.
입장료는 간송의 유지에 따라 무료입니다.
관람하려는 분들이 많아 긴줄을 서는 것은 기본입니다.
그리고 간송 전형필에 대해 많은 부분과 그 일화를 알고 싶은 분은
김영사에서 나온 "간송 전형필"을 읽어보십시오.
누군가의 헌신으로 역사가 이어지고 있었네요.
간송... 참으로 훌륭하신 역사적 인물을 이제사 알게 되어 부끄럽지만 더 늦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겠어요. 카페지기님도 멋진 헌신자입니다.
수많은 문화유산이 전쟁과 약탈로 인해 소실되고 타국에서 돌아오지 못하는게 가슴아팠는데 이렇게 재산을 아끼지않고 문화재 보존에 힘써주셨다기 참 존경스럽습니다.
정말 멋진 분이시네요. 개관시기에 맞춰 방문해봐야 겠어요. ^^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08.06 22:45
이런 분이 있어 우리나라 역사가 있는거 같습니다. ㅋ
몰랐던분인데... 하나 알아가네요 !!
오오, 꼭 방문해봐야겠습니다.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_^
따가운 볕에서 긴 줄 서서 기다리던 그 때가 벌써 십년전이네요. 자녀와 함께 가면 더 좋을 듯
네. 지난 여름에 읽었네요. 국보68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을 지켜낸 일화가 가장 큰 감동.....그리고
간송은 "숙고는 하지만 장고는 하지 않는다"는 말이 지금까지 남아 있네요.^^
대단하신분이시네요 감사합니다
대단하십니당~
간송미술관 매년가는데 정말 존경스럽고 감사한 분입니다ㅠ
정말 멋진 분이십니다.
언제 시간이 되면 꼭 가보도록 해야겠습니다.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민족의 정기와 문화를 지키고 우리나라를 위해 애쓰신분 같네요.
후손들은 큰 자부심을 가질만한... 아니 한국인 모두가 감사와 자부심을 가질만해요
간송 미술관도 있었네요.
전형필은 예전 시험에서 틀렸었던 인물ㅠ
다시한번 알아갑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진심한번 보고싶다
꼭 한번 가보고 싶네요 감사합니다 ^^*
조만간 간송미술관 가봐야겠어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번에 시험보고 꼭 가보고 싶네요..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이런일도 있었군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존경합니다
기억에 간직하겠습니다
정리 잘 될 것 같습니다.
봄 가을로 간송미술관에서 전시회가 있어요
꼭 가보세요
아이가 크면 같이 손잡고 가봐야겠어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기억에 간직하겠습니다.
전형필에게 그 맑음에서 ‘물 흐를 간(澗)’ 자를, 그리고 변하지 않고 지속되는 뜻을 기리는 『논어』 자한편에 나오는 ‘날씨가 추워진 연후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는 명문에서 ‘소나무 송(松)’을 써 간송이라는 호를 선사했다
요즘 미술간 공사중이던데 끝나면 가봐야겠어요!!
위대한 우리나라 문화재 보호가인 간송 전형필, 놀랍다. 매년 연 2회 관람이라니. 그것 또한 박물관의 관람료가 무료라니. 감사합니다.
한국전쟁 때 훈민정음 해례본을 가슴에 안고 피난을 갔다고 한다. 얼마나 위대하지 않은가?
잘읽었습니다
개관하면 감사한 마음으로 다녀와야겠어요
대단한 분 입니다
잘읽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정말 훌륭하신 분이네요
간송미술관, 꼭 한 번 가보고 싶다.
사실 간송에 대해서 잘 몰랐는데, 중학교 교과서 지문으로 나오더라구요..! 간송이라는 미술가인줄 알았는데ㅠㅠ 부끄럽네요
간송 전형필 선생님께서 한국 역사에 크게 기여하신 점에 대해서는 눈으로 새겨서 봤습니다. 정말로 한국을 위해서 노력해주신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교과서에도 나왔었는데 진심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