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직(金宗直 1431∼1492/ 세종 13∼성종 23)은 누구인가?
조선 전기 문신. 호는 점필재. 본관은 善山. 고향은 밀양이다.
고려말 정몽주·길재의 성리학 학풍을 이은 아버지 김숙자로부터 배워 김종직은 사림의 조종祖宗이 되고, 문장과 史學에 두루 능하고, 절의를 중요시하여 道學의 정맥을 이었다. 제자인 김굉필, 정여창, 유호인 등에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김굉필은 趙光祖를 배출시켜 김종직의 학통을 계승했다. 사림학자(신진 정치세력)들이 훈구파(구 정치인, 조선왕조 창업에 기여하고 나라를 이끈 공로자들이었으나 이 때에 이르러 점차 비리와 권세가 나타났다.
성종은 김종직 등의 참신한 재야 사림 세력을 정계에 끌어들여 훈구세력을 견제하려 하는 정치력을 보였다. 그 결과 훈구세력과 사림세력 사이에 큰 정치적 충돌이 일어났다. 그것은 이런바 무오, 갑자, 기묘, 을사의 4대 사화가 연산군~ 명종조에 일어났다.
연산군 때 일어난 첫 사화 기묘사화는 김종직과 관련이 있다. 김종직이 중국 고사를 인용하여 항우에게 해를 당한 초나라 의제를 단종에 비유하면서 세조의 왕위찬탈을 간접적으로 비난한 <조의제문 弔義帝文>을 썼는데, 그의 제자 김일손이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史草에 올린 것이 문제가 됐다. 그 글을 빌미로 훈척계열인 유자광·정문형 등이 사림세력을 공격한 것이 1449년(연산군 4) 무오사화이다. 많은 사림들이 죽거나 귀양을 가게 되었고, 김종직은 이 때 이미 사후였지만,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다.
그의 많은 저술들은 사화 때 많이 없어져서 그의 본 모습을 알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다음과 같은 저서가 남아 있다. 《점필재집》 《청구풍아靑丘風雅》 《당후일기堂後日記》 등이 있으며, 편저로 《일선지一善誌》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