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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문종실록 2권, 문종 즉위년 7월 16일 무오 3번째기사 1450년 명 경태(景泰) 1년
집현전 응교 이개 등 9인이 박팽년과 함께 벌받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다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 이개(李塏) 등 9인이 상서하기를,
"어제의 일은 신 등과 박팽년(朴彭年)의 죄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데, 박팽년의 고신만을 거두고 신 등은 직에 나오게 하시니, 신 등은 뻔뻔스럽게 직(職)에 나올 수 없습니다. 빌건대 신 등의 직을 파면하소서."
하니, 윤허하지 않았다. 이개(李塏)·이예(李芮)·이승소(李承召)가 또 상서하기를,
"신 등이 여러 번 천청(天聽)을 번거롭게 하여, 직을 면하기를 빌었으나, 아직 윤허를 얻지 못하고, 지금 또 천청을 더럽히니 황공 운월(隕越)하기 그지없습니다. 신 등이 반복하여 생각하니, 무릇 인신(人臣)이 임금에게 올리는 말은 반드시 중정(中情)에서 나오는 것이요, 본래부터 남의 말에 끌려서 구차히 같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 등이 처음에 박팽년과 더불어 상소문을 의논할 때 진실로 의견을 같이한 것인데, 다만 박팽년의 직차(職次)가 머리에 있기 때문에 홀로 그 책망을 받았으니, 직의 고하(高下)로 죄를 다르게 할 수 없습니다. 신 등이 감히 천위(天威)를 무릅쓰고 두 번 세 번 말하는 것은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받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요, 또한 박팽년이 죄를 받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마음속에 혐의스러운 것이 있어서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또 신 등은 생각건대, 인주(人主)가 그 사람의 말을 쓰지 않으면, 그 사람을 자리[位]에 있게 할 것이 아니고, 인신(人臣)도 그 말을 써주지 않으면 다시 그 직에 나아갈 것이 아닙니다. 신 등은 모두 용렬한 사람으로 시종의 직에 있으면서 이미 그 직책에 합당하지 못하고, 또 박팽년과 더불어 죄가 같으므로, 부끄럽고 땀이 나서 감히 뻔뻔스럽게 종사(從事)하지 못하고, 구구하게 청하여 마지 않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 신 등의 직을 파하소서. 지극한 소망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수찬(修撰) 유성원(柳誠源)은 상서하기를,
"옛사람은 말을 올리다가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즉시 물러났습니다. 대개 간하는 말을 들어주고 시행하면 임금과 신하가 다 칭찬을 받는 것이니, 이것은 사군자(士君子)가 평소에 품고 있는 생각입니다. 만일 그 말을 들어주지 아니하는데도 구차하게 직사에 나아가면 이것은 한갓 군상(君上)의 잘못을 드러내고, 자신은 작록(爵祿)을 누리는 것이니, 죄가 이보다 더 클 수 없습니다. 신과 박팽년은 실로 봉사(封事)를 함께 하였습니다. 당초에 발의할 때에 신과 박팽년 두 사람이 주장하였고, 소(疏)를 지은 것도 또한 두 사람이 하였고, 이제 전하께서 누가 먼저 기초(起草)하였느냐고 물으실 때에, 박팽년이, ‘신과 유원성이 함께 하였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죄를 논하면 참으로 털끝과 저울눈만한 차이도 없습니다. 신과 박팽년이 죄가 똑같은데, 신만 홀로 직사에 있으니, 사론(士論)에 부끄러울 뿐만 아니라, 실로 안으로 살피어 괴롭힘이 많습니다. 빌건대 신의 직책도 함께 거두기를 바라 마지 않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36장 A면【국편영인본】 6책 257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사상-불교(佛敎) / 정론-정론(政論)
11.문종실록 2권, 문종 즉위년 7월 26일 무진 5번째기사 1450년 명 경태(景泰) 1년
서연관 이개가 동궁이 사신을 접견할 때 백관들이 뜰 위에 오르기를 요청하다
서연관(書筵官) 이개(李塏)가 아뢰기를,
"동궁(東宮)이 사신을 접견할 때에, 신 등으로 하여금 뜰 아래에 이르러 정지하게 하였는데, 신 등은 뜰 위에서 혹 언동(言動)의 실수가 있을까 염려되니, 청컨대 뜰 위에 따라 올라가 사기(事機)에 임하여 인도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50장 A면【국편영인본】 6책 263면
【분류】
외교-명(明)
12.문종실록 3권, 문종 즉위년 9월 7일 무신 3번째기사 1450년 명 경태(景泰) 1년
공조 판서 정인지가 문과의 가액 선발 절목을 아뢰자 의정부 등과 의논하게 하다
공조 판서(工曹判書) 정인지(鄭麟趾)가 문과(文科)의 가액(加額)777) 과 시험보아 뽑는 절목(節目)을 아뢰니, 의정부(議政府)·예조(禮曹)·집현전(集賢殿)·춘추관(春秋館)으로 하여금 이를 의논하게 하였다.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하연(河演)·예조 판서(禮曹判書) 허후(許詡)·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이선제(李先齊)·예조 참판(禮曹參判) 정척(鄭陟) 등이 의논하기를,
"문과(文科)의 수효는 33인인데도 문관(文官)의 참외(參外)778) 가 55인이므로, 해마다 자리에 결원(缺員)이 많이 있게 되니 메워 보충하지 못한다면 부득이해서 또 별시(別試)를 설치하여 뽑게 됩니다. 이로 말미암아 사자(士子)가 학업(學業)을 배양(培養)할 여가도 없으며, 마음도 또한 부동(浮動)하게 되어, 제배(儕輩)의 저술을 다투어 베껴서 요행을 바라는 풍습(風習)이 크게 일어납니다. 또 지방의 과거(科擧) 보는 선비들이 시험에 참여하지 못하여 선비를 뽑는 길이 넓지 못하니, 마땅히 시험보는 해에 50인을 뽑고, 별시(別試)는 없애고, 그들로 하여금 학업(學業)에 전심(專心)하도록 하소서. 또 주군(州郡)의 교관(敎官)이 결원(缺員)이 있으면 대개 교도(敎導)로써 임명하여 사유(師儒)가 많지 못한 것은 또한 그 폐단입니다."
하였다. 좌참찬(左參贊) 정갑손(鄭甲孫)은 의논하기를,
"33인이 정원(定員)은 《육전(六典)》에 기재되어 있는데, 지금의 인재(人才)가 옛날보다 더 많지도 않고 또 관직을 비우고 결원(缺員)되는 폐단도 없으니, 마땅히 다시 성헌(成憲)을 고칠 수는 없습니다. 시학(視學)779) 하고 선비를 뽑는 것은 조종(祖宗)의 문치(文治)를 숭상하고 학문을 일으키는 성대(盛大)한 행사이니, 50명의 정원을 뽑고서 시학까지 폐지하는 것은 더욱 옳지 못합니다."
하였다. 좌찬성(左贊成) 김종서(金宗瑞)는 의논하기를,
"신이 지난 해에 문과(文科)의 정원 수[額數]를 첨가(添加)하기를 청하니, 세종(世宗)께서 신에게 이르시기를, ‘33인 안에서도 혹시 문리(文理)를 통하지 못한 사람이 있는데, 하물며 감히 많이 뽑을 수가 있는가?’ 하시므로, 신이 또 청하기를, ‘그렇다면 재능에 따라서 선비를 뽑되, 혹은 30명에서 그치기도 하고, 혹은 40명에서 그치기도 하고, 혹은 50명에서 그치기도 하면서, 50명에 지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세종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약 그렇다면 유사(有司)가 된 사람이 비록 혹시 재주가 없는 사람일지라도 반드시 50명을 채워 뽑게 될 것이니, 선거(選擧)가 정도에 지나침이 장차 이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하시므로, 신이 부끄러워 땀을 흘리면서 능히 대답하지 못했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성훈(聖訓)이 매우 간절하고 환하게 명백하므로 감히 경솔히 의논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하연(河演)은 의논하기를,
"문과(文科)의 초장 의의(初場疑義)는 지금에 와서 익히는 것이 아니고, 또 추장(秋場)780) 은 해가 짧으니, 마땅히 표(表) 1장(場), 부(賦) 1장(場), 책(策) 1장(場)만 시험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김종서(金宗瑞)·정갑손(鄭甲孫)·허후(許詡) 등이 의논하기를,
"초장(初場)에는 경학(經學)을 시험하고, 중장(中場)에는 문사(文詞)를 시험하고, 종장(終場)에는 시무(時務)를 시험하게 되니, 과거(科擧)의 격례(格例)에 해가 짧고 긴 이유로써 경학(經學)을 시험보는 것을 폐지할 수는 없습니다. 또 과거 보는 선비가 의의(疑義)를 처음 익히고 난 후에 생원시(生員試)에 나가고, 의의(疑義)를 익히지도 않고서 사부(詞賦)와 책문(策問)을 익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물며 경학(經學)을 밝히는 것은 어찌 반드시 상시로 이습(肄習)한 연후에야 능히 의의(疑義)를 제술할 수가 있겠습니까? 초장(初場)은 그전대로 따라 의의(疑義)로써 시험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선제(李先齊)는 의논하기를,
"추장(秋場)은 해가 짧으니, 초장(初場)의 의의(疑義) 내에서 오경(五經)의 경의(經義)를 각기 1개씩만 시험하고 의문(疑問)은 제외시키고, 중장(中場)의 부·표(賦表) 내에서 표(表)만 시험하고 부(賦)는 제외시키고, 종장(終場)은 그전대로 따라 하게 하소서."
하였다. 정척(鄭陟)은 의논하기를,
"초장(初場)은 의의(疑義)를 시험하고, 중장(中場)은 부·표(賦表)를 시험하는 것은 《육전(六典)》에 기재된 바이니 다시 고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추장(秋場)은 해가 짧으니, 초장(初場)은 의의(疑義)를 시험하고, 중장(中場)은 표(表)를 시험하고, 종장(終場)은 그전대로 따라 하소서."
하였다.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 신석조(辛碩祖), 직제학(直提學) 노숙동(盧叔仝), 직전(直殿) 이석형(李石亨), 응교(應敎) 김예몽(金禮蒙), 교리(校理) 이개(李塏), 수찬(修撰) 유성원(柳誠源)·이극감(李克堪)·서거정(徐居正), 부수찬(副修撰) 윤기견(尹起畎)·윤자운(尹子雲)·허조(許慥), 박사(博士) 서강(徐岡)·한계희(韓繼禧)·최선복(崔善復),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 김순(金淳)·김지경(金之慶), 기사관(記事官) 김한계(金漢啓)·김명중(金命中) 등은 의논하기를,
"과목(科目)781) 의 정원[額]은 고려(高麗)에서부터 시작하여 시행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진실로 고칠 만한 폐단은 없겠습니다. 지금 시장(試場)의 일을 가지고 살펴본다면 다만 33인만 뽑더라도 정문(程文)782) 이 격식에 맞는 것은 1, 2편(篇)에 지나지 않으므로, 겨우 1, 2분(分)을 얻은 사람까지도 또한 모두 뽑아서 그 수효를 채우게 되니, 지금 만약 정원을 더 보탠다면 아마 취재(取才)할 만한 것이 없을 듯합니다. 만약 문신(文臣) 참외(參外)의 자리에 결원을 보충할 수 없다는 일을 가지고 말한다면, 삼관(三館)783) 의 사무는 바쁘지 않으므로 1식년(式年) 동안에 비록 결원(缺員)이 있더라도 특별히 폐단의 일은 없을 것이니 정원을 더 보탤 필요는 없습니다. 초장(初場)에서 의의(疑義)를 시험하는 것은 그들이 경서(經書)를 강습(講習)했는가를 보려고 하는 것이니 그런 까닭으로 경서(經書)를 강(講)하지 않았으면 반드시 의의(疑義)로써 시험하게 되며, 또 삼장(三場)에는 부·표(賦表)와 책문(策問)으로써 시험하게 되니, 이장(二場)을 하는 것은 많고 적은 것을 참작하여 헤아려 제도를 만든 것인데, 지금 의의(疑義)를 없애고 부·표(賦表)를 가지고 나누어 초장(初場)·중장(中場)을 삼는다면 이는 경서(經書)는 폐지하고서 다만 이장(二場)으로써 선비를 뽑는 것입니다. 만약 추장(秋場)이 해가 짧다고 한다면 책문(策問)을 제술하는 공력(功力)도 부·표(賦表) 양편(兩篇)보다 아래가 되지는 않을 것인데, 책문(策問)을 이미 나눌 수 없는데도 어찌 부·표(賦表)를 나누어 이장(二場)으로 만들 필요가 있겠습니까? 또 중국의 해시(解試)784) 도 모두 가을에 하고, 삼장(三場)의 증감(增減)도 없는데, 하물며 부(賦)는 다만 사장(詞章)의 소기(小技)인데, 부(賦) 1편(篇)을 가지고 책문(策問)에 준하여 나누게 된다면 경중(輕重)이 균등(均等)하지 않으므로 실제로 옳지 않다고 할 수 있으니, 다시 고칠 필요가 없습니다. 하물며 이 두 법은 모두 《육전(六典)》에 기재되어 있으며, 정원을 첨가해야 한다는 일은 또한 세종조(世宗朝)에서도 헤아려 의논했는데도 마침내 시행되지 못했는데, 지금 전하께서 즉위(卽位)하신 처음에 갑자기 조종(祖宗)의 성헌(成憲)을 고치시는 것은 더욱 옳지 못합니다."
하였다. 집현전 행 직제학(集賢殿行直提學) 최항(崔恒), 부교리(副校理) 이예(李芮)·이승소(李承召),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 김윤복(金閏福)·박원정(朴元貞)·전효우(全孝宇)·금이영(琴以詠)·김용(金勇) 등은 의논하기를,
"우리 국조(國朝)의 식년(式年) 과목(科目)의 수효는 시행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니 진실로 구습(舊習)에 따라 행해야 하겠지마는, 그러나 시대에 따라 손익(損益)이 된다면 법도 또한 변경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역대(歷代)의 선비를 뽑는 정원[額]은 많고 적은 것이 정원이 없는데, 우리 국조(國朝)의 33인의 정원은 어디에 의거해서 정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선비를 뽑는 것은 관직에 보충하려고 하는 일인데, 지금에는 문관(文官)의 결원이 많으므로 반드시 변경하여 융통시켜서 그전의 정원보다 조금 증가시켜 관직에 결원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니, 다만 50인으로써만 제한하여 그 얻은 바 정문(程文)에 따라서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할 것입니다. 초장(初場)의 의의(疑義)는 시험에 나가는 사람이 누구나 평소부터 이습(肄習)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종장(終場)의 대책(對策)이 초장(初場)의 의의(疑義)와 중장(中場)의 부·표(賦表)와 많고 적은 것이 서로 비등(比等)하니, 반드시 해가 짧은 이유로써 유독 초장과 중장만을 줄일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 경중(輕重)을 비교하여 그 폐해를 바로잡으려고 한다면 잗다랗고 번거로움이 없지 않을 것이니 삼장(三場)의 제술(製述)하는 법은 진실로 그전대로 따라 시행해야 할 것이며, 별시(別試)는 선비의 마음으로 하여금 경솔히 흔들리게 할 것이니 자주 시행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집현전 교리(集賢殿校理) 양성지(梁誠之)는 의논하기를,
"문과(文科)의 별시(別試)는 본디는 좋은 뜻이었지마는, 그러나 인심(人心)이 부동(浮動)되어 능히 전심(專心)해서 학업을 익힐 수가 없으니 그 폐단이 더욱 심합니다. 지금부터는 별시는 없애고 식년(式年)에 이르러 50인만 뽑아서 일정한 정원[定額]으로 삼도록 하소서. 초장(初場)의 의의(疑義)는 본디는 사서(四書)의 의문(疑問)되는 점과 오경(五經)의 뜻[義]만 상고하였는데, 지금 임시로 강경(講經)을 폐지하고, 또 의의(疑義)까지 없애게 되니, 이는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모두 합쳐서 폐지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부·표(賦表)를 나누어 이장(二場)으로 삼는다면 반드시 모람(冒濫)될 폐단이 있을 것이니, 그전대로 따라 행하여 의의(疑義)로써 시험하게 하소서."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6책 279면
【분류】
인사-선발(選拔)
[註 777]가액(加額) : 첨가한 정원.
[註 778]참외(參外) : 7품 이하의 계급.
[註 779]시학(視學) : 임금이 성균관(成均館)에 거둥하여 유생(儒生)들이 공부하는 상황을 돌아보던 일. 이때 석전(釋奠)을 행하고 유생을 시험하여 인재(人才)를 뽑는 것이 상례였음.
[註 780]추장(秋場) : 가을의 과장(科場).
[註 781]과목(科目) : 과거(科擧).
[註 782]정문(程文) : 과거를 보일 때 독권관(讀券官)이 채점(採點)을 하기 위하여 만들던 모범 답안지(答案紙).
[註 783]삼관(三館) : 성균관(成均館)·교서관(校書館)·예문관(藝文館).
[註 784]해시(解試) : 중국의 향시(鄕試).
13.문종실록 3권, 문종 즉위년 9월 17일 무오 5번째기사 1450년 명 경태(景泰) 1년
왕세자가 처음으로 서연을 열다. 유성원과 이극감으로 세자의 시학을 삼다
왕세자(王世子)가 비로소 서연(書筵)을 열어 사부(師傅)·빈객(賓客)과 더불어 상회례(相會禮)를 행하고, 사부(師傅)인 하연(河演)·좌빈객(左賓客) 정갑손(鄭甲孫)·우빈객(右賓客) 권맹손(權孟孫)·좌부빈객(左副賓客) 허후(許詡)·우부빈객(右副賓客) 이선제(李先齊)·좌보덕(左輔德) 신석조(辛碩祖)·우보덕(右輔德) 노숙동(盧叔仝)·좌필선(左弼善) 이석형(李石亨)·우필선(右弼善) 김예몽(金禮蒙)·좌문학(左文學) 이개(李塏)·우문학(右文學) 양성지(梁誠之)·좌사경(左司經) 유성원(柳誠源)·우사경(右司經) 이극감(李克堪)·좌정자(左正字) 서강(徐岡)·우정자(右正字) 최선복(崔善復) 등이 앞에 나아가 《소학(小學)》을 강론(講論)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승정원(承政院)에 이르기를,
"내가 동궁(東宮)에 있을 적에는 박중림(朴仲林)과 최만리(崔萬理)가 시학(侍學)이 되었으니 지금도 이 예(例)에 의하여 서연관(書筵官) 중에서 적당한 사람을 선발하도록 하라."
하였더니, 승지(承旨) 등이 서연 당상관(書筵堂上官)으로 하여금 이를 선발하도록 청하였다. 이에 하연(河演)·정갑손(鄭甲孫)·허후(許詡) 등이 유성원(柳誠源)과 이극감(李克堪)을 아뢰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두 사람은 모두 신진(新進)으로서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고 하고는, 의정부(議政府)에 명하여 경연관(經筵官)과 서연관(書筵官)을 구애하지 말고 다시 의망(擬望)824) 하여 아뢰게 하였다. 이에 노숙동·김예몽·유성원·이극감을 의망(擬望)하여 아뢰므로, 임금이 마침내 유성원과 이극감으로 결정을 하게 되었다.
이에 명령하기를,
"이제 그대들을 세자(世子)의 시학(侍學)으로 삼아 세자에게는 붕우(朋友)의 예절로써 대하도록 할 것이니 그대들도 또한 붕우(朋友)처럼 대하여서 두려워하거나 기를 펴지 못하여 할말도 다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그 경서(經書)의 의리(義理)와 고금(古今)의 격언(格言)에 있어서는 조용히 부드럽고 자세하게 설명하여 깨닫는 바가 있도록 하라."
하고는, 이어서 날마다 들어와서 시강(侍講)하도록 명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36장 A면【국편영인본】 6책 282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인사-임면(任免)
[註 824]의망(擬望) : 3품 이상의 당상관(堂上官)을 임명할 때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에서 세 사람의 후보자[三望]를 추천하던 일. 비의(備擬).
14.문종실록 3권, 문종 즉위년 9월 27일 무진 1번째기사 1450년 명 경태(景泰) 1년
죽은 중추 이진이 첩의 아들을 과거에 내보내려고 적처를 버린 일을 의논하다
처음에 졸(卒)한 중추(中樞) 이진(李蓁)의 전처(前妻) 김씨(金氏)가 어리석고 또 계사(繼嗣)가 없는 이유로써 다시 최씨(崔氏)에게 장가들어 두 사람을 한 집 안에 거느리고 산 지가 몇 해나 지나게 되었다. 정묘년917) 가을에 이르러 최씨의 사위가 무과(武科)를 보러 가려고 했으나 훈련관(訓鍊觀)에서 과거 보러가는 것을 허가하지 않았다. 이진이 상언(上言)하여 사정을 호소하니 국가에서 논정(論定)하기를 김씨(金氏)를 적처(嫡妻)로 삼고 최씨(崔氏)를 첩(妾)으로 삼아 이를 이이(離異)918) 시켰는데, 그 후에 이진이 최씨(崔氏)와 이혼(離婚)하지 않으려는 뜻으로써 상언(上言)했더니 세종(世宗)께서 우대하여 이를 허가하여 최씨(崔氏)를 김씨(金氏)와 더불어 처음과 같이 함께 살도록 하였다. 이진이 병이 들어 거의 죽게 되니, 김씨(金氏)의 외백고(外伯姑)인 홍인신(洪仁信)의 아내에게 서신(書信)을 보내기를, ‘저의 아내 김씨(金氏)는 대모(大母)를 전적으로 의뢰(依賴)하고 있습니다.’ 하니, 대답하기를, ‘비록 병인(病人)이지만 기별(棄別)919) 한다는 글도 없으면서 거느리고 오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하므로, 이진이 마지못해서 기별(棄別)한다는 글을 만들고 노비(奴婢)의 문권(文券)까지 합하여 보내 주었는데 얼마 있지 않아서 이진은 죽었다. 이진의 뜻을 추구(推究)한다면 김씨(金氏)를 미워서 버리려고 한 것은 아니고, 다만 최씨(崔氏)를 적처(嫡妻)로 삼아서 자손(子孫)을 쓰려고 한 계책일 뿐이었다. 김씨(金氏)의 조카 김상안(金尙安)이 그 귀종(歸宗)920) 의 설(說)을 인용(引用)하여 사헌부(司憲府)에 호소하니,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이진(李蓁)이 첩의 소산(所産)으로 하여금 사로(仕路)에 통하려고 하여 조강지처(糟糠之妻)를 경솔히 버렸기에, 일찍이 다시 합가(合家)하도록 명령했는데도 거의 죽게 될 때에 다시 내쫓아 족친(族親)에게 호구(糊口)하도록 하였으니, 〈이진은〉 죽어도 또한 죄가 남게 됩니다. 마땅히 김씨(金氏)로 하여금 이진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여 첩의 아들로 하여금 봉양(奉養)하도록 해야 할 것이지만, 그러나 이진이 이미 죽었으므로 다시 합가(合家)시킬 길도 없으며, 의리가 끊어진 남편의 집에 다시 돌려보내는 것도 실로 적당치 못한 일입니다. 첩의 아들 이배인(李培仁)이 김씨(金氏)로써 수양(收養)한 적모(嫡母)로 삼아 아버지의 유언(遺言)을 핑계삼아 집에서 봉양하려고 했지마는, 그러나 김씨(金氏)는 수양(收養)한 아들이 아니라고 물리치고 있으며, 또 이진이 이미 버린 아내로써 아들에게 유언(遺言)하여 집에서 봉양하도록 하는 것이 정리(情理)에 합당하지도 않습니다. 김상안(金尙安)은 김씨(金氏)가 이진(李蓁)과 더불어 동거(同居)할 때에도 상시 진퇴(進退)하여 화목하지 않았는데, 지금 이미 내쫓김을 당하고 연로(年老)하여 후사(後嗣)도 없으면서 죽을 지경에 가까이 있는데, 효도로써 봉양한다고 핑계하고서 서로 송사를 하여 다투게 되어서 그 이익을 탐내어 부끄럼도 없이 노비(奴婢)와 재물을 차지하려는 계책이 환하게 되었으니, 비록 전례(前例)로는 마땅히 귀종(歸宗)시켜야 할 것이지만, 그 뜻대로 노비(奴婢)를 주어서 그 욕심을 이루도록 할 수는 없습니다.
홍인신(洪仁信)의 아들 홍양(洪陽)은 김씨(金氏)에게 이성(異姓)의 소속(疎屬)이 되므로 평소부터 친목(親睦)하는 뜻도 없었는데, 밤을 이용하여 데리고 가서 농장(農場)에 두고서 스스로 죽는 날만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본부(本府)921) 에서 서울에 불러 와서 묻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사고(事故)를 핑계하고서 즐거이 거느리고 오지도 않으며, 노부(老婦)를 몰래 꾀이기를 어린애를 제어하듯이 하니, 그의 음휼(陰譎)한 것이 더할 수 없이 심합니다. 지금 본부(本府)에서 여의(女醫)를 보내어 김씨(金氏)에게 정원(情願)을 물으니, 무릇 일용 행사(日用行事)에 관한 일도 분명히 개설(開說)하지도 못하고, 이진(李蓁)의 성명(姓名)과 존몰(存沒)922) 도 또한 알지 못하고 있으니, 이 일로써 미루어 본다면 그가 홍양(洪陽)의 집에 그대로 거처하고 있다는 말은 김씨(金氏)의 정원(情願)이 아니고, 실상은 홍양의 몰래 꾀인 데서 나온 것입니다. 신(臣) 등은 생각하기를, 이익을 탐내는 무리들이 전민(田民)923) 을 빼앗기를 꾀하여 벌떼처럼 일어나 다투어 송사하게 되니, 선비의 풍습(風習)이 아름답지 못하므로 인륜(人倫)과 풍속에 관계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김씨(金氏)는 이미 노비(奴婢)와 토전(土田)이 있으니 족친(族親)의 집에 우거(寓居)할 필요가 없습니다. 청컨대 노비(奴婢)가 있는 상주(尙州)로 보내소서."
하니, 임금이 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승정원(承政院)·집현전(集賢殿)으로 하여금 이를 의논하게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의논하기를,
"홍양(洪陽)은 소원(疎遠)한 족속(族屬)으로서 김씨(金氏)의 전민(田民)을 탐내어 몰래 숨겨서 맞이해 두었으니 지취(志趣)가 탐욕이 많습니다. 사헌부(司憲府)로 하여금 엄하게 징벌(懲罰)하여 귀종(歸宗)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윤형(尹炯)·참판(參判) 기건(奇虔)·참의(參議) 김연지(金連枝)는 의논하기를,
"남편이 죽고 자식이 없는 사람이 귀종(歸宗)하는 것은 고금(古今)의 공통된 의리인데, 그 족친(族親) 중에서 기탁(寄托)할 만한 사람을 골라 그로 하여금 봉양(奉養)하도록 하여 소재지의 관원으로 하여금 일정한 때가 없이 고찰(考察)하여 그 살 곳을 잃지 않도록 하소서."
하였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민신(閔伸)과 참의(參議) 홍심(洪深)은 의논하기를,
"홍양(洪陽)이 소원(疎遠)한 족속(族屬)으로서 평소에는 불쌍히 여겨 돌보지 않고 있다가 이진(李蓁)이 죽은 것을 이용하여 이익을 탐하여 맞이해 청하니 간휼(姦譎)한 것이 더할 수 없이 심합니다. 마땅히 귀종(歸宗)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형조 참판(刑曹參判) 안완경(安完慶)은 의논하기를,
"김상안(金尙安)이 본종(本宗)의 지친(至親)으로서 이익을 탐내어 고소(告訴)했으니 진실로 일컬을 것도 못됩니다. 그러나 여자(女子)가 돌아갈 곳이 없으면 귀종(歸宗)하는 것이 예절이니 본종(本宗)으로 돌아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승지(承旨) 정창손(鄭昌孫)과 김문기(金文起)는 의논하기를,
"만약 반드시 김상안(金尙安)을 따를 수 없다고 한다면 김씨(金氏)의 본종(本宗)의 친족(親族)이 또한 많이 있으니 그들이 자원하여 봉양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부탁하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 최항(崔恒)·직전(直殿) 성삼문(成三問)·교리(校理) 이개(李塏)·부교리(副校理) 이승소(李承召)·부수찬(副修撰) 허조(許慥)·수박사(守博士) 한계희(韓繼禧)는 의논하기를,
"돌아갈 곳이 없으면 귀종(歸宗)하는 것은 고금(古今)의 공통된 의논입니다. 비록 김상안(金尙安)의 의도(意圖)가 완전히 이익을 탐내기 때문에 기탁(寄託)할 수가 없다고 하지마는, 그러나 귀종(歸宗)의 의리가 이미 중요하니 사람이 적당치 않다고 해서 법을 폐지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다른 사람이 돌아갈 만한 이가 있으면 김상안(金尙安)에게 돌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하였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권맹손(權孟孫)은 의논하기를,
"홍양(洪陽)과 김상안(金尙安)이 김씨(金氏)를 서로 봉양하려고 다투는 것이 과연 모두가 효양(孝養)의 성심(誠心)에서 나왔겠습니까? 그렇다면 두 사람의 꾀 가운데 빠져서 김씨(金氏)를 쓸데없는 곳에 버리기보다는 다시 이진(李蓁)의 집으로 보내어 최씨(崔氏)의 아들로 하여금 생존할 때는 봉양하고 죽고 난 후에는 수빈(守殯)시키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형조 판서(刑曹判書) 조혜(趙惠)는 의논하기를,
"김씨(金氏)가 버림을 당하지 않았을 때에 이진(李蓁)의 첩자(妾子)인 이배인(李培仁)을 양육하여 자기 아들로 삼아서 전민(田民)을 나누어 주어서 그 제사를 받들게 하려고 했으니, 마땅히 이배인에게 부탁하여 이진(李蓁)의 적처(嫡妻)와 첩(妾)의 문란한 폐단을 바로잡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만약 옳지 못하다고 한다면 김씨(金氏)를 공처(公處)에 불러 와서 그 정원(情願)을 들어 구처(區處)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승지(承旨) 이사순(李師純)·이계전(李季甸)·김완지(金俒之)·정이한(鄭而漢)은 의논하기를,
"국가의 대법(大法)은 한 사람의 몸이 생존하고 사망한 이유를 가지고 경솔히 버리거나 존치(存置)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이진(李蓁)이 죽지 않았다고 해서 국가에서 이를 의논한다면 마땅히 이진이 이유도 없이 적처(嫡妻)를 버린 죄를 다스려 완취(完聚)하도록 해야 할 것인데, 어찌 이진이 죽은 이유로써 〈김씨(金氏)에게〉 귀종(歸宗)하기를 경솔히 허가하여 국가의 대법(大法)을 폐지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물며 그 적처(嫡妻)와 첩의 구분을 명백히 하여 그들로 하여금 한 집안에서 같이 살도록 한 것은 세종(世宗)의 명령이고, 기별(棄別)하는 일은 이진(李蓁)의 본의(本意)가 아닌 것이겠습니까? 마땅히 그 명칭을 바로잡고 분수(分數)를 정하여 김씨(金氏)를 옛날의 거처에 돌려보내어 최씨(崔氏)의 아들로 하여금 적모(嫡母)로서 봉양하도록 하고, 김씨(金氏)가 죽고 난 후에는 이진(李蓁)의 가묘(家廟)에 합사(合祀)하도록 하는 것이 의리에 정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 김씨(金氏)의 재물과 노비[蒼赤]는 일체 김씨(金氏)의 구처(區處)에 따르게 할 것인데, 만약 최씨(崔氏)의 아들이 정성을 다해서 봉양했는데도 김씨(金氏)가 마침내 구처(區處)함이 없다면 저절로 국가의 성법(成法)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 상주(尙州)를 농토(農土)가 있는 곳이라 해서 김씨(金氏)의 의사를 어겨서 강제로 보낸다면 이것이 어찌 방출(放黜)과 다르겠습니까? 김상안(金尙安)의 송사(訟事)는 과연 대의(大義)를 생각해서 김씨(金氏)를 위한 일이겠습니까? 또한 이익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재물을 탐내고 있다면 김씨(金氏)를 김상안(金尙安)이 거주하는 상주(尙州)의 땅으로 보내는 것은, 이것이 김상안의 꾀 가운데 빠져서 그의 이욕을 탐내는 마음만 이루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김씨가 어리석고 사람의 등류와 같지 않아서 지각(知覺)이 전연 없으므로, 노비[蒼赤]와 재물을 그로 하여금 구처(區處)시킬 수 없으니 상주(尙州)에 보내는 것을 어찌 그의 의사에 어긋난다고 하겠는가?’고 하지마는 이것도 또한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여의(女醫)와 더불어 이야기한 말을 살펴보건대, 그 10분의 안에서 7분은 옳은 말이 되니 진실로 정신이 어두워 망령된 생각으로 인사(人事)를 살피지 못하여 지각(知覺)이 전연 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자기의 재물을 그의 구처(區處)에 맡겨 두는 일이 어찌 옳지 못하겠습니까? 그가 스스로 말하기를, ‘상주(尙州)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니, 그 뜻의 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있는데도 강제로 이를 보내는 것은 옳지 못함이 명백합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진(李蓁)이 생존할 때에 내쫓은 아내를 죽은 후에 완취(完聚)시키는 것은 의리에 어긋남이 있으며, 또 최씨(崔氏)의 아들은 김씨(金氏)로 인하여 서자(庶子)가 되니 어찌 정성을 다해서 그를 받들겠습니까? 귀종(歸宗)시키는 일이 옳은 것만 같지 못합니다.’고 하는데, 신(臣) 등은 생각하기를, 부인(婦人)을 내쫓아 귀종(歸宗)시키는 것이 비록 정론(正論)이라 하지만, 법에 의거하여 완취(完聚)시키는 것은 국가의 대전(大典)인데, 이진(李蓁)이 적처(嫡妻)를 내쫓은 것은 곧 임종시(臨終時)의 난명(亂命)924) 이므로 국가의 죄인(罪人)이 된 것이니 국가에서 그대로 두고 논죄(論罪)하지 않는다면 그만이겠지만, 만약 논죄한다면 어찌 이진(李蓁)이 죽은 이유로써 그 난명(亂命)을 인정하고서 그 대전(大典)을 폐지할 수가 있겠습니까? 꼭 의리에 합당하므로 어긋남이 없습니다. 최씨(崔氏)의 아들이 능히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받들지 못한다는 의논이 유사하지만, 그러나 국가에서 이미 그 적서(嫡庶)를 분변하였으니 비록 김씨(金氏)가 떠났더라도 최씨(崔氏)의 아들이 마침내 적자(嫡子)가 될 이치가 없으니, 어찌 이로써 혐오(嫌惡)를 삼겠습니까? 또 이진(李蓁)의 아비 이민도(李敏道)는 태조(太祖)를 만나서 개국 공신(開國功臣)의 반열(班列)에 참여하여 벼슬이 재보(宰輔)에 이르렀지만, 그러나 중국(中國)에서 피란(避亂)해 왔기 때문에 이진(李蓁)이 오로지 김씨(金氏)의 노비를 등록하여 문호(門戶)를 세웠으니, 그런 까닭으로 비록 최씨(崔氏)에게 장가 들었지마는 능히 떠나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 김씨(金氏)가 노인(路人)925) 이 된다면 이진(李蓁)의 문호(門戶)는 장차 떨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최씨(崔氏)의 아들이 김씨(金氏)를 봉양하고 제사를 받든다면 김씨(金氏)의 노비도 혹시 차지할 수 있는 이치가 있을 것인데 무엇이 싫고 꺼려서 봉양하는 일에 마음을 쓰지 않겠습니까? 김씨(金氏)로 하여금 다시 옛날의 거처로 돌아가서 처음과 같이 되게 하고, 최씨(崔氏)의 아들로 하여금 적모(嫡母)로서 받들고 몸이 죽고 난 후에는 사당(祠堂)에 합사(合祠)케 한다면 국가의 대법(大法)에도 어긋나지 않고 훈신(勳臣)의 가세(家世)도 잃지 않고, 세종(世宗)께서 동거(同居)하게 한 명령에도 어긋나지 않으며, 김씨(金氏)가 죽은 후에도 또한 제사를 받들 사람이 없는 귀신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허후(許詡)·참판(參判) 정척(鄭陟)·참의(參議) 민공(閔恭)은 의논하기를,
"김씨(金氏)가 전민(田民)이 많이 있으니 비록 거두어 봉양하는 사람이 없더라도 또한 안심(安心)하고 생활할 수가 있는데, 어찌 강제로 모인(某人)으로 하여금 거두어 봉양하게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잠정적으로 다른 데에 의거하여 그만 내버려두고서 논하지 말고 김씨(金氏)로 하여금 서울이든지 지방이든지 갑(甲)에게든지 을(乙)에게든지 그 가는 데로 맡겨 두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하였다. 직제학(直提學) 박팽년(朴彭年)·직집현전(直集賢殿) 이석형(李石亨)·교리(校理) 양성지(梁誠之)·부교리(副校理) 이예(李芮)·수찬(修撰) 유성원(柳誠源)·서거정(徐居正)은 의논하기를,
"어떤 사람은 이성(異姓)으로서, 어떤 사람은 족속(族屬)으로서 수양(收養)926) 과 시양(侍養)927) 을 하는 일이 세상의 풍조(風潮)가 모두 이러한데, 어찌 유독 김씨(金氏)에게만 강제 귀종(歸宗)하도록 하겠습니까? 그만 내버려두고서 논하지 않는 것이 매우 정리(情理)에 합당하겠습니다. 만약 김씨(金氏)가 죽고 난 후에 족인(族人)이 전민(田民)을 다투는 사람에게는 스스로 국법(國法)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공조 판서(工曹判書) 정인지(鄭麟趾)와 참의(參議) 임효신(任孝信)은 의논하기를,
"그 전민(田民)이 스스로 봉양(奉養)할 만하면 그 재산이 넉넉한 종의 집에 부탁하여 그 몸을 마치도록 하고, 만약 몸이 죽은 후에 전민(田民)을 구처(區處)하는 것은 다른 날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였다. 이때에 와서 여러 사람의 의논을 가지고 위에 아뢰니, 임금이 허후(許詡)와 박팽년(朴彭年) 등의 의논에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2책 3권 52장 A면【국편영인본】 6책 290면
【분류】
가족-가족(家族) / 가족-가산(家産) / 윤리(倫理) / 사법-재판(裁判) / 풍속-예속(禮俗) / 신분(身分)
[註 917]정묘년 : 1447 세종 29년.
[註 918]이이(離異) : 서로 이별(離別)시킴.
[註 919]기별(棄別) : 서로 별거시킴.
[註 920]귀종(歸宗) : 사자(嗣子)가 그 본종(本宗)에 돌아감.
[註 921]본부(本府) : 사헌부(司憲府).
[註 922]존몰(存沒) : 생존과 사망.
[註 923]전민(田民) : 논밭과 노비.
[註 924]난명(亂命) : 숨이 질 때 정신없이 하는 유언.
[註 925]노인(路人) : 타인.
[註 926]수양(收養) : 다른 사람의 자식을 거두어서 자기의 성을 주어 길러 자기의 뒤를 잇게 하던 일.
[註 927]시양(侍養) : 양사자(養嗣子)할 목적이 아니고 동성(同姓)·이성(異姓)을 가리지 않고 기르던 일.
15.문종실록 9권, 문종 1년 9월 28일 계해 5번째기사 1451년 명 경태(景泰) 2년
황해도와 개성 및 경기의 각 고을에 행할 여제의 제문을 친히 지어 내리다
황해도(黃海道)의 각 고을과 개성(開城) 및 경기(京畿)의 각 고을 각처에서 행할 여제(厲祭)의 제문(祭文)을 친히 지어 내리니, 이러하였다.
"왕(王)은 말하노라. 이치는 순양(純陽)1364) 만이 아니고 음(陰)이 있고, 만물은 길이 살지 못하고 죽음이 있으며, 오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가는 것이 있고, 신(神)이 있으면 반드시 귀(鬼)가 있는 법이다. 본시 물체의 체(體)가 되어 빠지지 않으니, 어찌 여기(厲氣)에 주(主)가 없으랴? 정(情)이 없는 것을 음양(陰陽)이라 이르고 정이 있는 귀신이라 이른다. 정이 없으면 더불어 말할 수 없고, 정이 있으면 이치로 효유(曉諭)1365)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생각하건대, 수화(水火)는 본래 사람을 기르는 데 필요한 것이지만, 때로는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귀신은 사람을 돕는 것이지만 때로는 사람을 해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을 죽이는 자는 수화가 아니라 곧 사람인 것이며, 사람을 해치는 자도 귀신이 아니라 역시 사람 자신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서·우·양(寒暑雨暘)과 오미(五味)의 식품은 천지(天地)가 사람을 기르는 본연의 능사이나, 사람이 스스로 그 조화(調和)를 잃으면 병의 근원을 만들게 된다. 그러기에 귀신의 덕이 거룩하며, 이치가 하나인 천지임을 알게 한다. 지금의 여기(厲氣)는 실상 귀신이 해를 지음이 이나라, 도리어 사람이 스스로 그 재앙을 지은 것이다. 그러나 마침 한 사람이 지은 재앙으로 인하여 전염되고 널리 확장되어 해를 지나도 그치지 않아서 죄없이 마구 걸려 생명을 잃은 자가 그 몇이던가? 이 어찌 천명(天命)을 받들어 행하는 자가 그 덕을 잃어서 옥석(玉石)이 함께 타버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덕이 박한 사람으로 한 나라의 신인(神人)의 주인이 되어 한 물거이라도 그 있을 바를 얻지 못하는 일이 있지 않을까 항상 두려워하는데, 하물며 우리 백성들이 횡액에 걸려 젊어서 죽는 것을 어찌 차마 보겠는가? 이에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그 여기(厲氣)가 있는 곳에서 정결한 땅을 가려서 단(壇)을 설치하게 하고, 조신(朝臣)을 나누어 파견하여 생례(牲醴)1366) 와 반갱(飯羹)1367) 으로 제사하고, 정녕(丁寧)한 유고(諭告)를 거듭하여 너희들로 하여금 깨닫도록 하노니, 너희 귀신들은 선(善)으로써 선(善)을 이어가도록 괴분(乖憤)1368) 한 기운을 깨끗이 거두고 생생(生生)하는 본래의 덕을 포시(布施)하기 바라노라. 이런 까닭으로 이에 교시(敎示)하니, 의당 이를 다 알아야 할 것이다."
당초 응교(應敎) 이개(李塏)가 제문(祭文)을 지어 바쳤는데, 임금이 ‘내 마음에 합당치 않다.’고 말하고 드디어 손수 이 글을 초(草)해 낸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5책 9권 48장 A면【국편영인본】 6책 440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보건(保健)
[註 1364]순양(純陽) : 순연한 양기.
[註 1365]효유(曉諭) : 깨달아 알도록 타이름.
[註 1366]생례(牲醴) : 희생과 감주.
[註 1367]반갱(飯羹) : 밥과 국.
[註 1368]괴분(乖憤) : 어그러지고 통분함.
16.단종실록 4권, 단종 즉위년 11월 5일 계해 1번째기사 1452년 명 경태(景泰) 3년
이숙번의 처 정씨가 재산을 사위에게 주도록 한 남편의 유서를 고치는 일을 상언하다
앞서 이숙번(李叔蕃)의 처 정씨(鄭氏)가 상언(上言)하기를,
"신(臣)의 부처(夫妻)는 노비(奴婢)·전지(田地)·가사(家舍)·재산(財産)을 함께 서명(署名)하여 문권(文券)을 작성하였고, 맏사위인 전 현감(縣監) 강순덕(姜順德)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남편과 딸이 모두 죽고 난 뒤에 내가 전의 문안(文案)을 고치고자 하여 강순덕으로 하여금 가져오라 하였으나, 강순덕이 이에 따르지 않으므로써 모자(母子)의 의리를 어기었습니다 또 그 조카 강희맹(姜希孟)을 수양(收養)755) 하여 후사(後嗣)로 삼았다고 칭탁하고, 노비를 마음대로 여러 조카에게 나누어 주면서, 나의 자손에게는 1구도 주지 않았으니, 이것은 모두 남편의 원하던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육조(六曹)와 대성(臺省)·집현전(集賢殿)으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니, 공조 판서(工曹判書) 이사철(李思哲)이 의논하기를,
"아내가 남편에 대한 것은 자식이 부모에 대한 것과 한 가지이니, 남편이 죽고 난 뒤에 아내가 남편이 작성해 놓은 문서를 고칠 수 없는 것은 아들이 부모의 문서를 고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정씨가 이숙번이 살았을 때 이미 함께 문서를 작성하여 전지와 노비와 가재(家財)를 여러 자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가, 이숙번이 죽고 난 뒤에 이를 고치려고 하는 것인데, 만약 그와 같이 하는 것을 들어주면 특별히 아내가 그 남편이 한 일을 고칠 수 있게 해 주는 일일 뿐만 아니라, 윤리(倫理)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간사한 아들이 아비의 죽음을 이용하여 그 어미를 꾀이고 농간질하여 아비와 함께 가진 어미의 재산을 침탈하게 되면 풍속을 해치게 되고 장차 분운(紛紜)함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씨의 고소를〉 들어주지 않으면 바르지 못한 아들이 법을 믿고 어미를 업신여겨 불순한 데 이르를 것이니, 이 문제는 실로 세상의 풍교(風敎)에 관계되는 일로서 가볍게 처리할 것이 아닙니다. 바라건대 이숙번의 전지와 노비는 이숙번의 문서에 따르고, 정씨의 토지와 노비는 정씨의 소원에 따르면 양쪽이 모두 편리할 것입니다."
하고, 호조 판서(戶曹判書) 윤형(尹炯)·참판(參判) 이사순(李師純) 등은 의논하기를,
"대저 부모가 자손에게 노비·전지·가사·재물을 마음대로 주고 빼앗을 수 있는 것은 고금(古今)의 공통된 법입니다. 자손이 부모에게 어찌 불순할 이치(理致)가 있겠습니까? 강순덕은 정씨의 사위이고, 강희맹이 강순덕의 후계자이면 이들은 모두 정씨의 자손입니다. 이미 정씨 자손이 되었으면, 무릇 주고 빼앗는 일은 오로지 정씨에게 있습니다. 만약 정씨로 하여금 자기 집의 노비·전지·재물을 마음대로 처리하지 못하게 한다면 강상(綱常)이 무너지고 인정과 이치에 합당치 않게 될 것입니다. 또 옛사람이 말하기를, ‘천하에 옳지 않는 부모는 없다.’ 하였으니, 하나같이 정씨의 정원(情願)에 따라야 강상을 더욱 돈독하게 하고 교화(敎化)를 돈독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승손(李承孫)·참판(參判) 정척(鄭陟)·참의(參議) 김유온(金有溫) 등은 의논하기를,
"이숙번은 아내 정씨와 함께 지난 을미년756) 에 양가(兩家)의 노비를 자녀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숙번은 경신년757) 에 죽었고, 장녀(長女)인 강순덕의 아내가 후사(後嗣)가 없어서 강순덕은 아내 이씨와 함께 의논하여 지난 신유년758) 에 조카 강희맹(姜希孟)을 후사로 세워서 아들로 삼고 노비·전지·재물·가사를 모두 전해 받게 하였습니다. 이씨가 죽은 후 강희맹이 상복을 입고 상제(喪制)를 마친 후 지금까지 제사를 받들었습니다. 지금 정씨가 관부에 고발하여 다시 빼앗으려 하는 것은 오로지 장녀가 후사 없이 죽은 뒤 부부의 노비와 전장(田莊)이 자손 외의 사람에게 전해지고 자손에게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 꾀가 간사합니다. 그러나 신 등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부모가 아들에게 노비와 재물을 마음대로 주고 빼앗는 것은 고금이 모두 그러합니다. 어미가 비록 노비 1구와 물건 하나를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식된 자가 어찌 원망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만약 정씨의 고장(告狀)이 잘못된 것이라 하고 강순덕이 그대로 재물을 가지는 것이 옳다고 하면 이것은 모자의 은혜를 해치는 것이고 강상(綱常)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이숙번의 살아 생전에 일찍이 준 노비와 전장(田莊), 그리고 한천(韓蕆)이 준 노비와 전장을 추탈(追奪)하는 것은 옳지 못하니, 그대로 강순덕에게 주어 강희맹에게 전하게 하고, 정씨의 자기 노비는 정씨가 구처(區處)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이조 판서(吏曹判書) 민신(閔伸)·참의(參議) 변효경(卞孝敬) 등은 의논하기를,
"이숙번이 정씨와 함께 의논하여 딸인 강순덕의 아내에게 작성해 준 노비 문권(文券) 안에는 자손 이외의 사람에게 주지 말라는 말이 없는데, 남편이 죽고 난 후 도로 빼앗고자 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또 딸이 살아 있을 때 강희맹을 후계로 세웠는데, 이숙번의 전지와 노비까지 아울러 도로 빼앗으려는 것은 더욱 옳지 못합니다. 청컨대 정씨의 노비·전지·가산은 그대로 강희맹에게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고, 겸지사(兼知事) 이축(李蓄)은 의논하기를,
"정씨가 이숙번이 살아 있을 때, 같이 의논하여 문권(文券)을 작성하였고, 또 강순덕 역시 이씨가 살아 있을 때 같이 의논하여 강희맹을 후사로 세웠는데, 강순덕은 지금 정씨가 딸이 죽고 또 후사가 없다는 것으로써 도로 빼앗고자 꾀하는 것이니, 다시 고치게 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였고, 형조 판서(刑曹判書) 조극관(趙克寬)·참의(參議) 이인손(李仁孫) 등은 의논하기를,
"대저 노비를 주고 빼앗는 것은 재물 주인의 구처에 일임하는 것입니다. 지금 강순덕이 정씨의 사위로서 죽은 아내의 노비와 재산을 모두 가지고자 하여 장모[妻母]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것은 비록 자기의 문서에는 간여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역시 모두 노비와 재물은 이미 그가 문권을 작성해 놓고 죽어서 정씨가 함부로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죽고 난 뒤에는 당연히 강희맹에게 전해지는 것이고, 만약 정씨의 노비와 재산을 그 마음대로 처분하지 못하게 한다면 인정과 이치에 합당치 않으니, 마음대로 구처하게 할 것입니다. 또 강순덕이 딸의 남편으로서 다만 오로지 갖고자 하여 장모[妻母]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아서 아뢰어 분쟁을 일으킨 것은 매우 부당한 일입니다. 강희맹이 이미 후사로 세워졌다면 정씨의 외손(外孫)인데, 아직 가서 뵙지도 않았으니, 또한 불순(不順)합니다. 일이 강상(綱常)에 관계되는 것이니, 마땅히 사헌부(司憲府)로 하여금 규명하여 과죄(科罪)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고, 병조 판서(兵曹判書) 정인지(鄭麟趾)가 의논하기를,
"강순덕의 장모 정씨가 노비와 전지의 구처를 장고(狀告)한 것은 사리(事理)에 맞는 일이니, 그 소원대로 허락하소서."
하고, 대사헌(大司憲) 성봉조(成奉祖)·장령(掌令) 이보흠(李甫欽)·박대손(朴大孫)·지평(持平) 김윤복(金閏福) 등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정씨는 또한 강순덕의 아내가 후사 없이 이미 죽었으니, 부부가 함께 준 문권을 가지고 고치려 하는 것은 비록 불순한 것과 같으나, 그러나 정씨가 가난하여 자활(自活)할 수 없고 그 아들 이정(李楨)과 딸인 김해(金眩)의 아내가 모두 살기가 어려워 어미의 빈궁(貧窮)함을 구제할 수 없는데, 가령 강순덕의 아내가 생존해 있다면 그 어미의 정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아내가 비록 죽었더라도 그 전지와 노비를 그대로 가지고 마음대로 부리고 있어서 생업이 이미 풍족하다면 강순덕의 정씨에 대한 모자의 의리가 오히려 아직 끊어지지 않았으니, 정씨의 곤궁(困窮)함을 보았다면 진실로 호소(呼訴)를 기다리지 않고 의리상 마땅히 돌보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거의 돌보아 줄 마음은 없고, 진(秦)나라가 월(越)나라 보듯이 하다759) 가 호소를 하기에 이르러서도 주지 않으니, 이것은 장모와 더불어 쟁탈(爭奪)하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근본[綱]이 되는 것이 비록 천하의 큰 법칙이지만, 아들의 어미에 대한 의리도 과연 이와 같은 것이겠습니까? 풍속의 야박하고 잔악함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습니다. 가령 이숙번이 오늘의 형세를 본다면 차마 죽은 딸을 사랑하고 살아 있는 처자를 돌보지 않겠습니까? 또 정씨가 강순덕의 전지와 노비·재물을 모두 빼앗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대로 주는 것은 참으로 많고 돌려 받고자 하는 것은 매우 적으며, 다른 무리들이 애증(愛憎)으로써 남편의 명령을 함부로 고치는 것과 비교할 것이 아닙니다. 신 등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강순덕의 전지와 노비를 일체 정씨의 처분에 따르도록 함으로써 모자 사이의 대의(大義)를 보존(保存)하게 하면 부부의 근본[綱]에 있어서도 또한 어긋남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 신석조(辛碩祖)·응교(應敎) 양성지(粱誠之)·교리(校理) 이예(李芮)·부교리(副校理) 유성원(柳誠源) 등이 의논하기를,
"부모가 이미 서로 의논하여 노비와 토지를 아들과 사위에게 나누어 준 뒤에 스스로 다시 고치는 자가 세상에 많이 있으니 잘못하는 일이 아니며, 이것은 스스로 한집안 일이니 재주(財主)760) 의 처분대로 맡기는 것이 상례(常例)일 뿐입니다. 이로써 논하면 정씨의 일은 처리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미 남편과 함께 문권(文券)을 작성하였다가 남편이 죽은 뒤에 아내가 마음대로 고치는 것은 옳지 않다.’ 합니다만, 그러나 문권을 작성할 때 남편이 혼자서 하고 아내가 참여할 수 없었다면 논의할 만하지만, 이미 부부가 함께 재주(財主)가 되어 나누어 주었다면, 그 뒤에 다시 고치는 데에 어찌 불가한 것이 있겠습니까? 부모는 일체(一體)이며 같은 재주인데 어찌 아비와 어미 사이에 〈권리〉의 무겁고 가벼움이 있겠습니까? 정씨가 구처하도록 맡기소서."
하고, 부제학(副提學) 최항(崔恒)·직제학(直提學) 박팽년(朴彭年)·직전(直殿) 김예몽(金禮蒙)·응교(應敎) 이개(李塏)·교리(校理) 이승소(李承召)·부교리(副校理) 이극감(李克堪)·부수찬(副修撰) 한계희(韓繼禧)·최선복(崔善復) 등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남편이 이미 그 아내와 더불어 가산(家産)을 함께 나누어 자손에게 주었다면 그 아내는 남편이 죽은 뒤에 변경할 수 없습니다. 또 부모의 명령이 혹 이치에 어긋나더라도 자손은 굽히고 순종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정씨가 이숙번(李叔蕃)이 죽고 난 뒤에 스스로 사의(私意)로써 이미 작성한 문권을 고치고자 하는 것은 〈남편을〉 따르지 않는 아내가 되는 것이며 정씨가 문권을 고치고자 하는데 강순덕이 거부하고 주지 않는 것은 불순한 사위가 되는 것입니다. 혹 말하기를, ‘강순덕이 장모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은 진실로 모자의 도리(道理)에 어긋나는 일이다.’ 합니다만, 정씨가 문권을 고치고자 하는 것도 또한 부부의 근본인, 즉 삼강(三綱)의 하나를 잃는 것입니다. 어찌 전자(前者)의 과실만 중하고 후자의 과실이 가볍다 하겠습니까? 관부(官府)가 깨닫지 못하였다면 그만이지만 깨닫고서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강희맹의 경우는 이미 강순덕의 아들이 되었으므로 정씨가 그 외조모가 되었으니, 외손으로써 논하지 않을 수 없음이 명백합니다. 정씨가 강희맹에게 허물을 돌리는 말은 그 뜻이 사의(私意)에서 나온 것입니다. 후사(後嗣)를 세우는 일은 중요한 법입니다. 어찌 이로 인하여 드디어 뒷날 법이 무너질 단서(端緖)를 열어 놓겠습니까? 마땅히 정씨로 하여금 남편의 명령을 함부로 변경시키지 못하게 하고, 강순덕을 죄 주어서 불순함을 징계하여야 합니다."
하고, 직제학 신숙주(申叔舟)가 의논하기를,
"이숙번이 살았을 때 작성해 둔 문권을 이숙번이 이미 죽었는데 참으로 정씨가 고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씨가 살아 있으면서 자기 집의 전지와 노비를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다는 것도 또한 정리(情理)에 합당치 않은 일입니다. 이숙번의 전지와 노비는 그의 옛 문권에 따르도록 하고, 정씨가 자기집에서 상속 받은 전지와 노비는 그녀가 편할 대로 하도록 허락하면 인정이나 대의(大義)에도 거의 합당할 것입니다."
하고, 부수찬(副修撰) 서강(徐岡)은 의논하기를,
"부처(夫妻)가 문권을 함께 작성하였는데, 남편이 죽은 후 그 아내로 하여금 다시 고칠 수 있게 한다면, 무식한 부인들이 남편이 살았을 때는 그 제대로 마음대로 나누어 주지 못하다가 죽고 난 뒤에 마음대로 변경하여 나누어 주는데, 대개 애증(愛憎)에 따라서 많고 적고 무겁고 가벼움이 서로 크게 다릅니다. 자식 된 자는 비록 억울하여도 의리상 마땅히 스스로 직소하지 못하니, 이로써 관부(官府)에서도 이를 살피지 못하게 됩니다. 대저 자식이나 사위 된 자는 이미 그 어버이를 소송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 어미나 장모로 하여금 그 문권을 고칠 수 있게 하면 이것은 무지한 부인의 마음에 따라 변경하는 단서를 크게 일으키는 일이 되어 그 폐단이 작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정씨가 이숙번과 함께 문권을 같이 작성하여 강순덕에게 주었다가 이숙번이 죽고 난 뒤에 또 이를 빼앗아서 고치고자 하니, 이것은 사의(私意)입니다. 강순덕이 문권을 〈정씨에게〉 바치지 않은 것은 혹 불순이라 할 수도 있으나, 그러나 사위가 장모에게 또한 당연히 직소하지 못하는 것은 어미와 아들의 예로써 논하기 때문입니다. 바라건대, 정씨가 이숙번의 문권을 고치지 못하게 하소서."
하고, 좌사간 대부(左司諫大夫) 임효인(任孝仁)·지 사간원사(知司諫院事) 김길통(金吉通) 등이 의논하기를,
"부부는 일체이며 죽은 아내의 물건은 남편이 주인이 되며 죽은 남편의 물건은 아내가 또한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하물며 정씨는 이미 남편 이숙번과 함께 의논하여 문권을 작성하였는데, 자기의 노비도 역시 아울러 기재(記載)하였습니다. 어찌 오로지 이숙번만의 문서로 보고 정씨를 제외할 수 있겠습니까? 강순덕은 정씨에게 있어서 실로 자식의 도리가 있습니다. 지금 정씨가 원래의 문권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였는데 강순덕이 명을 어기고 돌려주지 않는 것은 지극히 불순한 일입니다. 만약 아내가 남편의 문서를 고칠 수 없다고 하여 정씨로 하여금 다시 주고 빼앗지 못하게 한다면 남편이 죽고 난 뒤에 한 아들만 혼자 부유하고 나머지 아들들은 가난하여 그 어미가 비록 노비를 고쳐 나누어 주고자 하더라도 〈부유한〉 아들이 강순덕의 예를 반드시 빌어서 거절하고 따르지 않게 될 것이니, 어미와 아들의 도리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장차 이로 말미암아 아비가 죽고 나면 자식이 문득 어미를 가볍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게 될까 두려우니, 작은 일이 아닙니다. 혹은 말하기를, ‘부자(父子)와 부부(夫婦)는 함께 삼강(三綱)에 들므로 부인의 도리가 남에게 시집을 가면 남편을 따르는데 있다면 아내가 남편의 문서를 고치는 것이 옳은 일이겠는가?’ 하지만, 신 등의 생각으로는 부부 사이는 만나고 헤어짐이 있으나 부자 사이에는 도리를 끊을 수가 없으니, 어찌 가볍고 무거운 구분이 없겠습니까? 하물며 지금 정씨는 남편의 문서를 불의(不義)를 물리치기 위해서가 아니고 허물을 돌려서 고치려 하는 것입니다.
혹은 또 말하기를, ‘이와 같이 되면 누가 즐겨 남의 후사가 되려 하겠는가? 후사를 세우는 법이 이 때문에 스스로 무너질 것이다.’ 합니다만 신 등의 생각으로는 후사를 세우는 법은 국가가 자식이 없는 사람을 동정한 데서 나왔을 뿐입니다. 형제나 친척의 아들로써 후사 세우기를 원하는 자는 스스로 자식이 없음을 슬퍼할 뿐이며 자기의 아들을 형제나 친척의 후사로 허락하는 자도 또한 그 형제나 친척의 자식이 없음을 동정한 것뿐입니다. 어찌 노비와 전장을 전해 주는 것이 없겠으며, 후사가 된 사람도 또한 어찌 이것을 바라고 아들 노릇을 하겠습니까? 강순덕 부부의 노비와 재물을 지금 혹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면 강희맹이 또한 상속받을 것이 없다 하여 후사가 된 것을 그만두겠습니까? 만약 어떤 자의 말과 같이 지금 남의 후사가 된 자가 모두 이익을 탐내어 어버이를 꺼리고 친상(親喪)을 낮추어 입는다면 슬프게도 비루한 일입니다. 어찌 이럴 리가 있겠습니까? 혹자는 또 말하기를, ‘강순덕의 처가 이미 강희맹을 아들로 삼았으니, 그 노비는 반드시 강희맹에게 전해 주고자 할 것이지, 어찌 형제들에게 전해 주고자 하는가? 인정(人情)에 어긋나는 것이다.’라고 합니다만, 신 등의 생각에는 강순덕의 처의 노비가 만약 다른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마땅히 마음대로 구처할 수 있겠지만, 이것은 강순덕의 장모가 본래의 재주(財主)이니, 주고 빼앗을 권한이 그 손에 있는 것이겠습니까? 혹자는 또 말하기를, ‘남편이 생전에 작성한 문서는 지극히 공정한 것인데, 남편이 죽고 난 뒤에 부인이 혹 사사로운 정으로 이를 다시 바꾸는 폐단은 염려할 바가 있다.’ 합니다만, 신 등의 생각으로는 어미가 하는 일이 비록 혹 고르지 않더라도 감히 입을 열어 다툴 수 없는 것은 진실로 천하에 나쁜 부모는 없기 때문이며, 따라서 자식이 그 어미를 비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단지 아비의 문서만을 채택하고 어미의 시비(是非)를 다투는 아들이 계속해서 세상에 나올 것이니, 두렵지 않겠습니까? 혹자는 또 말하기를, ‘이숙번의 노비는 옛 문서에 그대로 따르고 정씨의 노비는 그 마음대로 구처하기를 허락하라.’ 합니다만, 신 등의 생각으로는 정씨가 만약 이에 따르지 않고 이숙번의 노비까지를 화회(和會)해서 다시 나눈다면 그 아들 된 자가 어미의 잘못을 지적하여 관청에 고발할 수 있으며, 관청에서는 또한 이것을 청리(聽理)할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수양자(收養子)761) 나 시양자(侍養子)762) 에게 노비를 나누어 주는 법은 고쳐 줄 수 있게 하는 법식이 《육전(六典)》에 갖추어져 있습니다. 부모의 노비를 나누어 주는 법은 처음부터 언급(言及)하지 않은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일체 정씨의 청원에 따르면 인륜(人倫)에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하고, 좌헌납(左獻納) 송인창(宋仁昌)·우헌납(右獻納) 조원희(趙元禧) 등은 의논하기를,
"이숙번은 이미 아내 정씨와 함께 의논하여 노비와 전지를 자식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고 문권을 작성하였습니다. 지금 이숙번이 이미 죽었으니, 정씨가 함부로 고칠 수 없습니다. 의논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가령 이숙번이 살아 있어도 정씨의 뜻과 같을 것이다.’라고 합니다만, 신 등의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강순덕의 처가 아들이 없어서 장차 강희맹을 후사로 삼아 집에 데려다 길렀고 이숙번도 이것을 눈으로 보았으며, 죽을 때까지 감히 이의가 없었습니다. 정씨가 남편이 살아 있을 때는 함께 의논하여 문서를 고치지 않다가 오늘에 이르러 문득 다른 마음이 생겨서 강희맹을 보고는 자기에게 아무 관계가 없다 하고, 죽은 남편이 이미 작성한 문서를 고치고자 하니, 부인으로서 남편을 따르는 의리가 어떠하겠습니까? 후사를 세우는 법으로 말한다면, 강희맹은 이미 강순덕의 처를 어미로 삼았으니, 이숙번은 그의 외조부이며, 정씨는 외조모입니다. 어찌 자기에게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까? 의논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국가가 법을 세운 뜻이 특히 후사가 없는 것을 동정하여 〈후사를 세워〉 그들로 하여금 제사를 받들게 한 것뿐인데, 어찌 노비의 상속이 있는가 없는가를 헤아렸겠는가?’ 합니다만, 신 등의 생각으로는 이미 후사를 세우는 법을 베풀어서 모든 집안 일에 있어서 모두 자기 아들과 같이 하는데, 어찌 아들이 되었으면서 부모의 노비를 물려받지 않겠습니까? 이것으로 보면, 강순덕 부부의 장획(臧獲)763) 은 강희맹이 참으로 당연히 물려받는 것입니다. 만약 정씨의 소원을 따르면, 신 등은 간악한 무리가 이것을 빙자하여 그 아비가 죽은 후에 어미를 꾀어 남편이 작성한 문서를 어지럽게 변경하게 하고, 심지어는 동기(同氣)를 서로 죽이며 강상(綱常)을 무너뜨리고 습속(習俗)을 어지럽히는 자가 계속해서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또 남의 후사 된 자가 하나뿐이 아닌데, 간혹 정씨와 같은 자가 있어서 이를 본받고 모방하여 딸의 노비를 모두 빼앗으면 그 분운(紛紜)함을 수습할 수 없을까 두렵습니다. 바라건대 이숙번이 이미 작성한 문서에 따라서 부인이 남편을 따르는 의리를 나타내고, 국가의 후사하는 법을 무겁게 하소서."
하였다. 이에 이르러 정씨가 또 상언하기를,
"육조(六曹)와 대성(臺省)에서 의논하여서 계달한 후 지금까지 구처함을 입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의정부(議政府)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는데,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부모가 자손에게 노비·전지·가재를 마음대로 주고 빼앗으면 자손은 한결같이 부모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 고금의 상사(常事)입니다. 강순덕이 정씨의 사위로서 정씨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분재 문권(分財文券)764) 을 감추어 두고 내어 놓지 않는 것은 도리에 어긋남이 매우 심합니다. 정씨의 노비와 가재를 모두 정씨의 구처에 따르며, 이숙번의 노비와 농사(農舍)는 정씨가 생전에는 가지고 있다가 죽고 난 뒤에는 이숙번의 문건에 의하여 물려주고, 한천(韓蕆)의 노비와 가재는 정씨의 정원(情願)에 의하여 구처하며, 또 강순덕의 불순의 죄는 강상(綱常)에 관계되므로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사헌부(司憲府)로 하여금 추핵(推劾)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6책 551면
【분류】
가족-가족(家族) / 가족-가산(家産) / 윤리-강상(綱常) / 사법-재판(裁判) / 신분-천인(賤人)
[註 755]수양(收養) : 거두어서 기르는 것.
[註 756]을미년 : 1415 태종 15년.
[註 757]경신년 : 1440 세종 22년.
[註 758]신유년 : 1441 세종 23년.
[註 759]월(越)나라 보듯이 하다 : 약진시월(若秦視越):진(秦:춘추 시대 섬서성(陜西省)에 있던 나라)이 월(越:춘추 시대 절강성(浙江省)에 있던 나라)과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 아무런 관심이 없이 본다는 뜻으로, 아무 이해 관계가 없이 무심하게 보는 것을 말함.
[註 760]재주(財主) : 재산의 임자.
[註 761]수양자(收養子) : 양사자(養嗣子)를 할 목적으로 나이 세 살 전에 거두어다 기르는 아이를 말함.
[註 762]시양자(侍養子) : 양사자를 할 목적이 아니고 동성(同姓)·이성(異姓)을 가리지 않고 기르는 아이. 대개 권귀(權貴)의 자제를 맡아서 기르던 경우를 말함.
[註 763]장획(臧獲) : 노비.
[註 764]분재 문권(分財文券) : 재산(財産)을 자신이나 가족에게 나누어 상속(相續)하기 위하여 부모가 만들어 놓은 문안(文案).
17.단종실록 6권, 단종 1년 4월 21일 무신 2번째기사 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유성원이 수양 대군의 종사관에게 상을 준 것과 조충손에게 자품을 더한 것의 불가함을 아뢰다
지평(持平) 유성원(柳誠源)이 본부(本府)의 의논을 가지고 아뢰기를,
"수양 대군의 종사관(從事官)은 조금도 상을 줄 만한 공로가 없으며, 조충손(趙衷孫)이 안평 대군을 구료한 것은 당연히 해야 할 바인데도 아울러 자품(資品)을 더하여 준 것은 매우 옳지 않습니다. 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 등이 《병요(兵要)》를 수찬(修撰)한 공으로써 각각 한 자급을 올려 주었으나, 이것도 또한 작은 일이니 반드시 관직을 상(賞)으로 줄 필요가 없습니다. 청컨대 아울러 고쳐 바로잡으소서."
하니, 임금이 전지(傳旨)하기를,
"종사관(從事官)과 조충손(趙衷孫)의 일은 너희들이 비록 여러번 청하였지만, 그러나, 이미 대신과 숙의(熟議)하여 이를 시행한 것이고, 또 《병요(兵要)》의 글자를 베껴 쓴 사람들에게 이미 자급을 더하였는데, 그 수찬한 사람도 또한 대신과 의논하여 상을 준 것이다."
하였다. 유성원이 다시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2책 6권 7장 A면【국편영인본】 6책 581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정론(政論) / 출판-서책(書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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