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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문종실록 13권, 부록 편수관 명단
부록 / 편수관 명단
경태(景泰) 5년001) 갑술 4월에 춘추관(春秋館)에서 왕명(王命)을 받아서 찬술(撰述)하기 시작하여, 경태 6년002) 을해 11월에 마쳤습니다.
찬수관(纂修官) 【전후(前後)의 관직을 아울러 기록한다.】
영관사(領館事)
수충 위사 협찬 정란 동덕 좌익 공신(輸忠衛社協贊靖難同德佐翼功臣) 대광 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영경연예문관서운관사(領經筵藝文館書雲觀事) 세자 사(世子師) 하동 부원군(河東府院君) 신(臣) 정인지(鄭麟趾)
지관사(知館事)
추충 좌익 공신 숭정 대부(推忠佐翼功臣崇政大夫)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 집현전 대제학(集賢殿大提學) 세자 좌빈객(世子左賓客) 겸 판이조사(判吏曹事) 봉원군(蓬原君) 신(臣) 정창손(鄭昌孫)
수충 위사 협찬 정란 좌익 공신(輸忠衛社協贊靖難佐翼功臣) 숭정 대부(崇政大夫) 병조 판서(兵曹判書) 집현전 대제학(集賢殿大提學) 겸 성균 대사성(成均大司成) 세자 이사(世子貳師) 한성군(韓城君) 신(臣) 이계전(李季甸)
정헌대부 예조판서 지경연사(正憲大夫禮曹判書知經筵事) 신(臣) 김조(金銚)
동지관사(同知館事)
수충 위사 협찬 정란 공신(輸忠衛社協贊靖難功臣) 가선 대부(嘉善大夫)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집현전 제학(集賢殿提學)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영성군(寧城君) 신(臣) 최항(崔恒)
가선 대부(嘉善大夫) 예조 참판(禮曹參判) 세자 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 신(臣) 하위지(河緯地)
편수관(編修官)
통정 대부(通政大夫) 이조 참의(吏曹參議) 신(臣) 어효첨(魚孝瞻)
통정 대부(通政大夫) 집현전 부제학 지제교(集賢殿副提學知製敎) 경연 시강관(經筵侍講官) 신(臣) 송처관(宋處寬)
기주관(記注官)
절충 장군(折衝將軍) 의흥 시위사 상호군(義興侍衛司上護軍) 신(臣) 권기(權技)
통정 대부(通政大夫) 집현전 직제학 지제교(集賢殿直提學知製敎)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 신(臣) 이석형(李石亨)
통정 대부(通政大夫) 행 지승문원사(行知承文院事) 신(臣) 김득례(金得禮)
통정 대부(通政大夫) 행 직예문관(行直藝文館) 신(臣) 이비(李棐)
중직 대부(中直大夫)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 신(臣) 안지귀(安知歸)
중직 대부(中直大夫) 사헌 집의(司憲執義) 신(臣) 이예(李芮)
중직 대부(中直大夫) 성균사성지제교(成均司成知製敎) 겸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 신(臣) 유성원(柳誠源)
중직 대부(中直大夫) 행 직집현전 지제교(行直集賢殿知製敎) 경연 검토관(經筵檢討官) 신(臣) 양성지(梁誠之)
중훈 대부(中訓大夫) 집현전 직제학 지제교(集賢殿直提學知製敎)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 신(臣) 김지경(金之慶)
봉정 대부(奉正大夫) 행 종부 소윤(行宗簿少尹) 신(臣) 장계증(張繼曾)
봉정 대부(奉正大夫) 행 종부 소윤(行宗簿少尹) 신(臣) 강로(姜老)
봉열 대부(奉列大夫) 직 집현전 지제교(直集賢殿知製敎) 세자 좌필선(世子左弼善) 겸 좌중호(左中護) 신(臣) 이승소(李承召)
조산 대부(朝散大夫) 집현전 응교 지제교(集賢殿應敎知製敎) 경연 검토관(經筵檢討官) 겸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事) 신(臣) 조근(趙瑾)
조산 대부(朝散大夫) 행 집현전 교리 지제교(行集賢殿校理知製敎) 경연 부검토관(經筵副檢討官) 신(臣) 홍응(洪應)
조산 대부(朝散大夫) 행 교서 교리(行校書校理) 겸 승문원 교리(承文院校理) 신(臣) 성희(成熺)
조봉 대부(朝奉大夫) 수 부지통례문사(守副知通禮門事) 신(臣) 김명중(金命中)
조봉 대부(朝奉大夫) 집현전 응교 지제교(集賢殿應敎知製敎) 경연 검토관(經筵檢討官) 신(臣) 이극감(李克堪)
조봉 대부(朝奉大夫) 행 성균 직강(行成均直講) 신(臣) 이함장(李諴長)
통선랑(通善郞) 행 집현전 부교리 지제교(行集賢殿副校理知製敎) 경연 부검토관(經筵副檢討官) 신(臣) 서강(徐岡)
통선랑(通善郞) 행 이조 좌랑(行吏曹佐郞) 신(臣) 김필(金㻶)
통선랑(通善郞) 행 이조 좌랑(行吏曹佐郞) 신(臣) 김덕원(金德源)
기사관(記事官)
통선랑(通善郞) 행 예조 좌랑(行禮曹佐郞) 신(臣) 이계전(李季專)
봉직랑(奉直郞) 행 공조 좌랑(行工曹佐郞) 신(臣) 이익(李翊)
봉직랑(奉直郞) 행 승문원 부교리(行承文院副校理) 신(臣) 강미수(姜眉壽)
봉직랑(奉直郞) 행 훈련 주부(行訓鍊注簿) 신(臣) 유자문(柳子文)
승의랑(承議郞) 성균 주부(成均注簿) 겸 동부 유학 교수관(東部儒學敎授官) 신(臣) 이유의(李由義)
승의랑(承議郞) 성균 주부(成均注簿) 겸 서부 유학 교수관(西部儒學敎授官) 신(臣) 안중후(安重厚)
선교랑(宣敎郞) 수 성균 주부(守成均注簿) 겸 동부 유학 교수관(東部儒學敎授官) 신(臣) 박찬조(朴纘祖)
승훈랑(承訓郞) 행 예문 봉교(行藝文奉敎) 신(臣) 윤자영(尹子濚)
선무랑(宣務郞) 행 예문 봉교(行藝文奉敎) 신(臣) 이제림(李悌林)
선무랑(宣務郞) 행 예문 봉교(行藝文奉敎) 신(臣) 최한보(崔漢輔)
선무랑(宣務郞) 행 예문 봉교(行藝文奉敎) 신(臣) 민정(閔貞)
선교랑(宣敎郞) 행 예문 봉교(行藝文奉敎) 신(臣) 권이경(權以經)
선교랑(宣敎郞) 행 예문 대교(行藝文待敎) 신(臣) 이문환(李文煥)
계공랑(啓功郞) 행 예문 대교(行藝文待敎) 신(臣) 유질(柳輊)
무공랑(務功郞) 행 예문 검열(行藝文檢閱) 신(臣) 김겸광(金謙光)
통사랑(通仕郞) 행 예문 검열(行藝文檢閱) 신(臣) 안신손(安信孫)
계공랑(啓功郞) 행 예문 검열(行藝文檢閱) 신(臣) 김이용(金利用)
계공랑(啓功郞) 행 예문 검열(行藝文檢閱) 신(臣) 김영견(金永堅)
통사랑(通仕郞) 행 예문 검열(行藝文檢閱) 신(臣) 윤민(尹慜)
【태백산사고본】 6책 13권 34장 A면【국편영인본】 6책 497면
【분류】
역사-편사(編史)
[註 001]
경태(景泰) 5년 : 1454 단종 2년.
[註 002]
경태 6년 : 1455 세조 원년.
19.단종실록 4권, 단종 즉위년 11월 5일 계해 1번째기사 1452년 명 경태(景泰) 3년
이숙번의 처 정씨가 재산을 사위에게 주도록 한 남편의 유서를 고치는 일을 상언하다
앞서 이숙번(李叔蕃)의 처 정씨(鄭氏)가 상언(上言)하기를,
"신(臣)의 부처(夫妻)는 노비(奴婢)·전지(田地)·가사(家舍)·재산(財産)을 함께 서명(署名)하여 문권(文券)을 작성하였고, 맏사위인 전 현감(縣監) 강순덕(姜順德)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남편과 딸이 모두 죽고 난 뒤에 내가 전의 문안(文案)을 고치고자 하여 강순덕으로 하여금 가져오라 하였으나, 강순덕이 이에 따르지 않으므로써 모자(母子)의 의리를 어기었습니다 또 그 조카 강희맹(姜希孟)을 수양(收養)755) 하여 후사(後嗣)로 삼았다고 칭탁하고, 노비를 마음대로 여러 조카에게 나누어 주면서, 나의 자손에게는 1구도 주지 않았으니, 이것은 모두 남편의 원하던 바가 아닙니다."
하였다. 육조(六曹)와 대성(臺省)·집현전(集賢殿)으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니, 공조 판서(工曹判書) 이사철(李思哲)이 의논하기를,
"아내가 남편에 대한 것은 자식이 부모에 대한 것과 한 가지이니, 남편이 죽고 난 뒤에 아내가 남편이 작성해 놓은 문서를 고칠 수 없는 것은 아들이 부모의 문서를 고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정씨가 이숙번이 살았을 때 이미 함께 문서를 작성하여 전지와 노비와 가재(家財)를 여러 자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가, 이숙번이 죽고 난 뒤에 이를 고치려고 하는 것인데, 만약 그와 같이 하는 것을 들어주면 특별히 아내가 그 남편이 한 일을 고칠 수 있게 해 주는 일일 뿐만 아니라, 윤리(倫理)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간사한 아들이 아비의 죽음을 이용하여 그 어미를 꾀이고 농간질하여 아비와 함께 가진 어미의 재산을 침탈하게 되면 풍속을 해치게 되고 장차 분운(紛紜)함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씨의 고소를〉 들어주지 않으면 바르지 못한 아들이 법을 믿고 어미를 업신여겨 불순한 데 이르를 것이니, 이 문제는 실로 세상의 풍교(風敎)에 관계되는 일로서 가볍게 처리할 것이 아닙니다. 바라건대 이숙번의 전지와 노비는 이숙번의 문서에 따르고, 정씨의 토지와 노비는 정씨의 소원에 따르면 양쪽이 모두 편리할 것입니다."
하고, 호조 판서(戶曹判書) 윤형(尹炯)·참판(參判) 이사순(李師純) 등은 의논하기를,
"대저 부모가 자손에게 노비·전지·가사·재물을 마음대로 주고 빼앗을 수 있는 것은 고금(古今)의 공통된 법입니다. 자손이 부모에게 어찌 불순할 이치(理致)가 있겠습니까? 강순덕은 정씨의 사위이고, 강희맹이 강순덕의 후계자이면 이들은 모두 정씨의 자손입니다. 이미 정씨 자손이 되었으면, 무릇 주고 빼앗는 일은 오로지 정씨에게 있습니다. 만약 정씨로 하여금 자기 집의 노비·전지·재물을 마음대로 처리하지 못하게 한다면 강상(綱常)이 무너지고 인정과 이치에 합당치 않게 될 것입니다. 또 옛사람이 말하기를, ‘천하에 옳지 않는 부모는 없다.’ 하였으니, 하나같이 정씨의 정원(情願)에 따라야 강상을 더욱 돈독하게 하고 교화(敎化)를 돈독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승손(李承孫)·참판(參判) 정척(鄭陟)·참의(參議) 김유온(金有溫) 등은 의논하기를,
"이숙번은 아내 정씨와 함께 지난 을미년756) 에 양가(兩家)의 노비를 자녀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숙번은 경신년757) 에 죽었고, 장녀(長女)인 강순덕의 아내가 후사(後嗣)가 없어서 강순덕은 아내 이씨와 함께 의논하여 지난 신유년758) 에 조카 강희맹(姜希孟)을 후사로 세워서 아들로 삼고 노비·전지·재물·가사를 모두 전해 받게 하였습니다. 이씨가 죽은 후 강희맹이 상복을 입고 상제(喪制)를 마친 후 지금까지 제사를 받들었습니다. 지금 정씨가 관부에 고발하여 다시 빼앗으려 하는 것은 오로지 장녀가 후사 없이 죽은 뒤 부부의 노비와 전장(田莊)이 자손 외의 사람에게 전해지고 자손에게 전해지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 꾀가 간사합니다. 그러나 신 등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부모가 아들에게 노비와 재물을 마음대로 주고 빼앗는 것은 고금이 모두 그러합니다. 어미가 비록 노비 1구와 물건 하나를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식된 자가 어찌 원망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만약 정씨의 고장(告狀)이 잘못된 것이라 하고 강순덕이 그대로 재물을 가지는 것이 옳다고 하면 이것은 모자의 은혜를 해치는 것이고 강상(綱常)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이숙번의 살아 생전에 일찍이 준 노비와 전장(田莊), 그리고 한천(韓蕆)이 준 노비와 전장을 추탈(追奪)하는 것은 옳지 못하니, 그대로 강순덕에게 주어 강희맹에게 전하게 하고, 정씨의 자기 노비는 정씨가 구처(區處)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이조 판서(吏曹判書) 민신(閔伸)·참의(參議) 변효경(卞孝敬) 등은 의논하기를,
"이숙번이 정씨와 함께 의논하여 딸인 강순덕의 아내에게 작성해 준 노비 문권(文券) 안에는 자손 이외의 사람에게 주지 말라는 말이 없는데, 남편이 죽고 난 후 도로 빼앗고자 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또 딸이 살아 있을 때 강희맹을 후계로 세웠는데, 이숙번의 전지와 노비까지 아울러 도로 빼앗으려는 것은 더욱 옳지 못합니다. 청컨대 정씨의 노비·전지·가산은 그대로 강희맹에게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고, 겸지사(兼知事) 이축(李蓄)은 의논하기를,
"정씨가 이숙번이 살아 있을 때, 같이 의논하여 문권(文券)을 작성하였고, 또 강순덕 역시 이씨가 살아 있을 때 같이 의논하여 강희맹을 후사로 세웠는데, 강순덕은 지금 정씨가 딸이 죽고 또 후사가 없다는 것으로써 도로 빼앗고자 꾀하는 것이니, 다시 고치게 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였고, 형조 판서(刑曹判書) 조극관(趙克寬)·참의(參議) 이인손(李仁孫) 등은 의논하기를,
"대저 노비를 주고 빼앗는 것은 재물 주인의 구처에 일임하는 것입니다. 지금 강순덕이 정씨의 사위로서 죽은 아내의 노비와 재산을 모두 가지고자 하여 장모[妻母]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것은 비록 자기의 문서에는 간여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역시 모두 노비와 재물은 이미 그가 문권을 작성해 놓고 죽어서 정씨가 함부로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죽고 난 뒤에는 당연히 강희맹에게 전해지는 것이고, 만약 정씨의 노비와 재산을 그 마음대로 처분하지 못하게 한다면 인정과 이치에 합당치 않으니, 마음대로 구처하게 할 것입니다. 또 강순덕이 딸의 남편으로서 다만 오로지 갖고자 하여 장모[妻母]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아서 아뢰어 분쟁을 일으킨 것은 매우 부당한 일입니다. 강희맹이 이미 후사로 세워졌다면 정씨의 외손(外孫)인데, 아직 가서 뵙지도 않았으니, 또한 불순(不順)합니다. 일이 강상(綱常)에 관계되는 것이니, 마땅히 사헌부(司憲府)로 하여금 규명하여 과죄(科罪)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고, 병조 판서(兵曹判書) 정인지(鄭麟趾)가 의논하기를,
"강순덕의 장모 정씨가 노비와 전지의 구처를 장고(狀告)한 것은 사리(事理)에 맞는 일이니, 그 소원대로 허락하소서."
하고, 대사헌(大司憲) 성봉조(成奉祖)·장령(掌令) 이보흠(李甫欽)·박대손(朴大孫)·지평(持平) 김윤복(金閏福) 등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정씨는 또한 강순덕의 아내가 후사 없이 이미 죽었으니, 부부가 함께 준 문권을 가지고 고치려 하는 것은 비록 불순한 것과 같으나, 그러나 정씨가 가난하여 자활(自活)할 수 없고 그 아들 이정(李楨)과 딸인 김해(金眩)의 아내가 모두 살기가 어려워 어미의 빈궁(貧窮)함을 구제할 수 없는데, 가령 강순덕의 아내가 생존해 있다면 그 어미의 정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아내가 비록 죽었더라도 그 전지와 노비를 그대로 가지고 마음대로 부리고 있어서 생업이 이미 풍족하다면 강순덕의 정씨에 대한 모자의 의리가 오히려 아직 끊어지지 않았으니, 정씨의 곤궁(困窮)함을 보았다면 진실로 호소(呼訴)를 기다리지 않고 의리상 마땅히 돌보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 거의 돌보아 줄 마음은 없고, 진(秦)나라가 월(越)나라 보듯이 하다759) 가 호소를 하기에 이르러서도 주지 않으니, 이것은 장모와 더불어 쟁탈(爭奪)하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근본[綱]이 되는 것이 비록 천하의 큰 법칙이지만, 아들의 어미에 대한 의리도 과연 이와 같은 것이겠습니까? 풍속의 야박하고 잔악함이 이보다 심할 수가 없습니다. 가령 이숙번이 오늘의 형세를 본다면 차마 죽은 딸을 사랑하고 살아 있는 처자를 돌보지 않겠습니까? 또 정씨가 강순덕의 전지와 노비·재물을 모두 빼앗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대로 주는 것은 참으로 많고 돌려 받고자 하는 것은 매우 적으며, 다른 무리들이 애증(愛憎)으로써 남편의 명령을 함부로 고치는 것과 비교할 것이 아닙니다. 신 등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강순덕의 전지와 노비를 일체 정씨의 처분에 따르도록 함으로써 모자 사이의 대의(大義)를 보존(保存)하게 하면 부부의 근본[綱]에 있어서도 또한 어긋남이 없을 것입니다."
하고,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 신석조(辛碩祖)·응교(應敎) 양성지(粱誠之)·교리(校理) 이예(李芮)·부교리(副校理) 유성원(柳誠源) 등이 의논하기를,
"부모가 이미 서로 의논하여 노비와 토지를 아들과 사위에게 나누어 준 뒤에 스스로 다시 고치는 자가 세상에 많이 있으니 잘못하는 일이 아니며, 이것은 스스로 한집안 일이니 재주(財主)760) 의 처분대로 맡기는 것이 상례(常例)일 뿐입니다. 이로써 논하면 정씨의 일은 처리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미 남편과 함께 문권(文券)을 작성하였다가 남편이 죽은 뒤에 아내가 마음대로 고치는 것은 옳지 않다.’ 합니다만, 그러나 문권을 작성할 때 남편이 혼자서 하고 아내가 참여할 수 없었다면 논의할 만하지만, 이미 부부가 함께 재주(財主)가 되어 나누어 주었다면, 그 뒤에 다시 고치는 데에 어찌 불가한 것이 있겠습니까? 부모는 일체(一體)이며 같은 재주인데 어찌 아비와 어미 사이에 〈권리〉의 무겁고 가벼움이 있겠습니까? 정씨가 구처하도록 맡기소서."
하고, 부제학(副提學) 최항(崔恒)·직제학(直提學) 박팽년(朴彭年)·직전(直殿) 김예몽(金禮蒙)·응교(應敎) 이개(李塏)·교리(校理) 이승소(李承召)·부교리(副校理) 이극감(李克堪)·부수찬(副修撰) 한계희(韓繼禧)·최선복(崔善復) 등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남편이 이미 그 아내와 더불어 가산(家産)을 함께 나누어 자손에게 주었다면 그 아내는 남편이 죽은 뒤에 변경할 수 없습니다. 또 부모의 명령이 혹 이치에 어긋나더라도 자손은 굽히고 순종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정씨가 이숙번(李叔蕃)이 죽고 난 뒤에 스스로 사의(私意)로써 이미 작성한 문권을 고치고자 하는 것은 〈남편을〉 따르지 않는 아내가 되는 것이며 정씨가 문권을 고치고자 하는데 강순덕이 거부하고 주지 않는 것은 불순한 사위가 되는 것입니다. 혹 말하기를, ‘강순덕이 장모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은 진실로 모자의 도리(道理)에 어긋나는 일이다.’ 합니다만, 정씨가 문권을 고치고자 하는 것도 또한 부부의 근본인, 즉 삼강(三綱)의 하나를 잃는 것입니다. 어찌 전자(前者)의 과실만 중하고 후자의 과실이 가볍다 하겠습니까? 관부(官府)가 깨닫지 못하였다면 그만이지만 깨닫고서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강희맹의 경우는 이미 강순덕의 아들이 되었으므로 정씨가 그 외조모가 되었으니, 외손으로써 논하지 않을 수 없음이 명백합니다. 정씨가 강희맹에게 허물을 돌리는 말은 그 뜻이 사의(私意)에서 나온 것입니다. 후사(後嗣)를 세우는 일은 중요한 법입니다. 어찌 이로 인하여 드디어 뒷날 법이 무너질 단서(端緖)를 열어 놓겠습니까? 마땅히 정씨로 하여금 남편의 명령을 함부로 변경시키지 못하게 하고, 강순덕을 죄 주어서 불순함을 징계하여야 합니다."
하고, 직제학 신숙주(申叔舟)가 의논하기를,
"이숙번이 살았을 때 작성해 둔 문권을 이숙번이 이미 죽었는데 참으로 정씨가 고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씨가 살아 있으면서 자기 집의 전지와 노비를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다는 것도 또한 정리(情理)에 합당치 않은 일입니다. 이숙번의 전지와 노비는 그의 옛 문권에 따르도록 하고, 정씨가 자기집에서 상속 받은 전지와 노비는 그녀가 편할 대로 하도록 허락하면 인정이나 대의(大義)에도 거의 합당할 것입니다."
하고, 부수찬(副修撰) 서강(徐岡)은 의논하기를,
"부처(夫妻)가 문권을 함께 작성하였는데, 남편이 죽은 후 그 아내로 하여금 다시 고칠 수 있게 한다면, 무식한 부인들이 남편이 살았을 때는 그 제대로 마음대로 나누어 주지 못하다가 죽고 난 뒤에 마음대로 변경하여 나누어 주는데, 대개 애증(愛憎)에 따라서 많고 적고 무겁고 가벼움이 서로 크게 다릅니다. 자식 된 자는 비록 억울하여도 의리상 마땅히 스스로 직소하지 못하니, 이로써 관부(官府)에서도 이를 살피지 못하게 됩니다. 대저 자식이나 사위 된 자는 이미 그 어버이를 소송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 어미나 장모로 하여금 그 문권을 고칠 수 있게 하면 이것은 무지한 부인의 마음에 따라 변경하는 단서를 크게 일으키는 일이 되어 그 폐단이 작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정씨가 이숙번과 함께 문권을 같이 작성하여 강순덕에게 주었다가 이숙번이 죽고 난 뒤에 또 이를 빼앗아서 고치고자 하니, 이것은 사의(私意)입니다. 강순덕이 문권을 〈정씨에게〉 바치지 않은 것은 혹 불순이라 할 수도 있으나, 그러나 사위가 장모에게 또한 당연히 직소하지 못하는 것은 어미와 아들의 예로써 논하기 때문입니다. 바라건대, 정씨가 이숙번의 문권을 고치지 못하게 하소서."
하고, 좌사간 대부(左司諫大夫) 임효인(任孝仁)·지 사간원사(知司諫院事) 김길통(金吉通) 등이 의논하기를,
"부부는 일체이며 죽은 아내의 물건은 남편이 주인이 되며 죽은 남편의 물건은 아내가 또한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하물며 정씨는 이미 남편 이숙번과 함께 의논하여 문권을 작성하였는데, 자기의 노비도 역시 아울러 기재(記載)하였습니다. 어찌 오로지 이숙번만의 문서로 보고 정씨를 제외할 수 있겠습니까? 강순덕은 정씨에게 있어서 실로 자식의 도리가 있습니다. 지금 정씨가 원래의 문권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였는데 강순덕이 명을 어기고 돌려주지 않는 것은 지극히 불순한 일입니다. 만약 아내가 남편의 문서를 고칠 수 없다고 하여 정씨로 하여금 다시 주고 빼앗지 못하게 한다면 남편이 죽고 난 뒤에 한 아들만 혼자 부유하고 나머지 아들들은 가난하여 그 어미가 비록 노비를 고쳐 나누어 주고자 하더라도 〈부유한〉 아들이 강순덕의 예를 반드시 빌어서 거절하고 따르지 않게 될 것이니, 어미와 아들의 도리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장차 이로 말미암아 아비가 죽고 나면 자식이 문득 어미를 가볍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게 될까 두려우니, 작은 일이 아닙니다. 혹은 말하기를, ‘부자(父子)와 부부(夫婦)는 함께 삼강(三綱)에 들므로 부인의 도리가 남에게 시집을 가면 남편을 따르는데 있다면 아내가 남편의 문서를 고치는 것이 옳은 일이겠는가?’ 하지만, 신 등의 생각으로는 부부 사이는 만나고 헤어짐이 있으나 부자 사이에는 도리를 끊을 수가 없으니, 어찌 가볍고 무거운 구분이 없겠습니까? 하물며 지금 정씨는 남편의 문서를 불의(不義)를 물리치기 위해서가 아니고 허물을 돌려서 고치려 하는 것입니다.
혹은 또 말하기를, ‘이와 같이 되면 누가 즐겨 남의 후사가 되려 하겠는가? 후사를 세우는 법이 이 때문에 스스로 무너질 것이다.’ 합니다만 신 등의 생각으로는 후사를 세우는 법은 국가가 자식이 없는 사람을 동정한 데서 나왔을 뿐입니다. 형제나 친척의 아들로써 후사 세우기를 원하는 자는 스스로 자식이 없음을 슬퍼할 뿐이며 자기의 아들을 형제나 친척의 후사로 허락하는 자도 또한 그 형제나 친척의 자식이 없음을 동정한 것뿐입니다. 어찌 노비와 전장을 전해 주는 것이 없겠으며, 후사가 된 사람도 또한 어찌 이것을 바라고 아들 노릇을 하겠습니까? 강순덕 부부의 노비와 재물을 지금 혹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면 강희맹이 또한 상속받을 것이 없다 하여 후사가 된 것을 그만두겠습니까? 만약 어떤 자의 말과 같이 지금 남의 후사가 된 자가 모두 이익을 탐내어 어버이를 꺼리고 친상(親喪)을 낮추어 입는다면 슬프게도 비루한 일입니다. 어찌 이럴 리가 있겠습니까? 혹자는 또 말하기를, ‘강순덕의 처가 이미 강희맹을 아들로 삼았으니, 그 노비는 반드시 강희맹에게 전해 주고자 할 것이지, 어찌 형제들에게 전해 주고자 하는가? 인정(人情)에 어긋나는 것이다.’라고 합니다만, 신 등의 생각에는 강순덕의 처의 노비가 만약 다른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마땅히 마음대로 구처할 수 있겠지만, 이것은 강순덕의 장모가 본래의 재주(財主)이니, 주고 빼앗을 권한이 그 손에 있는 것이겠습니까? 혹자는 또 말하기를, ‘남편이 생전에 작성한 문서는 지극히 공정한 것인데, 남편이 죽고 난 뒤에 부인이 혹 사사로운 정으로 이를 다시 바꾸는 폐단은 염려할 바가 있다.’ 합니다만, 신 등의 생각으로는 어미가 하는 일이 비록 혹 고르지 않더라도 감히 입을 열어 다툴 수 없는 것은 진실로 천하에 나쁜 부모는 없기 때문이며, 따라서 자식이 그 어미를 비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단지 아비의 문서만을 채택하고 어미의 시비(是非)를 다투는 아들이 계속해서 세상에 나올 것이니, 두렵지 않겠습니까? 혹자는 또 말하기를, ‘이숙번의 노비는 옛 문서에 그대로 따르고 정씨의 노비는 그 마음대로 구처하기를 허락하라.’ 합니다만, 신 등의 생각으로는 정씨가 만약 이에 따르지 않고 이숙번의 노비까지를 화회(和會)해서 다시 나눈다면 그 아들 된 자가 어미의 잘못을 지적하여 관청에 고발할 수 있으며, 관청에서는 또한 이것을 청리(聽理)할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수양자(收養子)761) 나 시양자(侍養子)762) 에게 노비를 나누어 주는 법은 고쳐 줄 수 있게 하는 법식이 《육전(六典)》에 갖추어져 있습니다. 부모의 노비를 나누어 주는 법은 처음부터 언급(言及)하지 않은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일체 정씨의 청원에 따르면 인륜(人倫)에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하고, 좌헌납(左獻納) 송인창(宋仁昌)·우헌납(右獻納) 조원희(趙元禧) 등은 의논하기를,
"이숙번은 이미 아내 정씨와 함께 의논하여 노비와 전지를 자식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고 문권을 작성하였습니다. 지금 이숙번이 이미 죽었으니, 정씨가 함부로 고칠 수 없습니다. 의논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가령 이숙번이 살아 있어도 정씨의 뜻과 같을 것이다.’라고 합니다만, 신 등의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강순덕의 처가 아들이 없어서 장차 강희맹을 후사로 삼아 집에 데려다 길렀고 이숙번도 이것을 눈으로 보았으며, 죽을 때까지 감히 이의가 없었습니다. 정씨가 남편이 살아 있을 때는 함께 의논하여 문서를 고치지 않다가 오늘에 이르러 문득 다른 마음이 생겨서 강희맹을 보고는 자기에게 아무 관계가 없다 하고, 죽은 남편이 이미 작성한 문서를 고치고자 하니, 부인으로서 남편을 따르는 의리가 어떠하겠습니까? 후사를 세우는 법으로 말한다면, 강희맹은 이미 강순덕의 처를 어미로 삼았으니, 이숙번은 그의 외조부이며, 정씨는 외조모입니다. 어찌 자기에게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까? 의논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국가가 법을 세운 뜻이 특히 후사가 없는 것을 동정하여 〈후사를 세워〉 그들로 하여금 제사를 받들게 한 것뿐인데, 어찌 노비의 상속이 있는가 없는가를 헤아렸겠는가?’ 합니다만, 신 등의 생각으로는 이미 후사를 세우는 법을 베풀어서 모든 집안 일에 있어서 모두 자기 아들과 같이 하는데, 어찌 아들이 되었으면서 부모의 노비를 물려받지 않겠습니까? 이것으로 보면, 강순덕 부부의 장획(臧獲)763) 은 강희맹이 참으로 당연히 물려받는 것입니다. 만약 정씨의 소원을 따르면, 신 등은 간악한 무리가 이것을 빙자하여 그 아비가 죽은 후에 어미를 꾀어 남편이 작성한 문서를 어지럽게 변경하게 하고, 심지어는 동기(同氣)를 서로 죽이며 강상(綱常)을 무너뜨리고 습속(習俗)을 어지럽히는 자가 계속해서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또 남의 후사 된 자가 하나뿐이 아닌데, 간혹 정씨와 같은 자가 있어서 이를 본받고 모방하여 딸의 노비를 모두 빼앗으면 그 분운(紛紜)함을 수습할 수 없을까 두렵습니다. 바라건대 이숙번이 이미 작성한 문서에 따라서 부인이 남편을 따르는 의리를 나타내고, 국가의 후사하는 법을 무겁게 하소서."
하였다. 이에 이르러 정씨가 또 상언하기를,
"육조(六曹)와 대성(臺省)에서 의논하여서 계달한 후 지금까지 구처함을 입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의정부(議政府)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는데,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부모가 자손에게 노비·전지·가재를 마음대로 주고 빼앗으면 자손은 한결같이 부모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 고금의 상사(常事)입니다. 강순덕이 정씨의 사위로서 정씨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분재 문권(分財文券)764) 을 감추어 두고 내어 놓지 않는 것은 도리에 어긋남이 매우 심합니다. 정씨의 노비와 가재를 모두 정씨의 구처에 따르며, 이숙번의 노비와 농사(農舍)는 정씨가 생전에는 가지고 있다가 죽고 난 뒤에는 이숙번의 문건에 의하여 물려주고, 한천(韓蕆)의 노비와 가재는 정씨의 정원(情願)에 의하여 구처하며, 또 강순덕의 불순의 죄는 강상(綱常)에 관계되므로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사헌부(司憲府)로 하여금 추핵(推劾)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10장 B면【국편영인본】 6책 551면
【분류】
가족-가족(家族) / 가족-가산(家産) / 윤리-강상(綱常) / 사법-재판(裁判) / 신분-천인(賤人)
[註 755]
수양(收養) : 거두어서 기르는 것.
[註 756]
을미년 : 1415 태종 15년.
[註 757]
경신년 : 1440 세종 22년.
[註 758]
신유년 : 1441 세종 23년.
[註 759]
월(越)나라 보듯이 하다 : 약진시월(若秦視越):진(秦:춘추 시대 섬서성(陜西省)에 있던 나라)이 월(越:춘추 시대 절강성(浙江省)에 있던 나라)과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 아무런 관심이 없이 본다는 뜻으로, 아무 이해 관계가 없이 무심하게 보는 것을 말함.
[註 760]
재주(財主) : 재산의 임자.
[註 761]
수양자(收養子) : 양사자(養嗣子)를 할 목적으로 나이 세 살 전에 거두어다 기르는 아이를 말함.
[註 762]
시양자(侍養子) : 양사자를 할 목적이 아니고 동성(同姓)·이성(異姓)을 가리지 않고 기르는 아이. 대개 권귀(權貴)의 자제를 맡아서 기르던 경우를 말함.
[註 763]
장획(臧獲) : 노비.
[註 764]
분재 문권(分財文券) : 재산(財産)을 자신이나 가족에게 나누어 상속(相續)하기 위하여 부모가 만들어 놓은 문안(文案).
20.단종실록 5권, 단종 1년 3월 15일 임신 1번째기사 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이인손·기건·김승규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인손(李仁孫)을 한성부 윤(漢城府尹)으로, 기건(奇虔)을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으로, 김승규(金承珪)에게는 품계(品階)를 더하여 중훈 대부(中訓大夫)로 하여 전농윤(典農尹)으로, 황보석(皇甫錫)에게는 품계를 더하여 조산 대부(朝散大夫)로 하여 사복 소윤(司僕少尹)으로, 하위지(河緯地)를 사헌 집의(司憲執義)로, 유규(柳規)와 조계팽(趙季砰)을 장령(掌令)으로, 강진(康晉)을 한성 소윤(漢城少尹)으로, 홍일동(洪逸童)에게는 품계를 더하여 봉직 대부(奉直大夫)로 하여 선공 판관(繕工判官)으로, 유성원(柳誠源)을 사헌 지평으로, 평안도 도사(平安道都事) 조충손(趙衷孫)에게는 품계를 더하여 통덕 대부(通德大夫)로 삼았다. 이날 헌부의 관리들은 산릉 도감의 일 때문에 모두 좌천(左遷)되었다. 허후(許詡)는 황보인(皇甫仁)과 김종서의 뜻에 아부(阿附)하여 김승규와 황보석을 세조(世祖)를 수행하였던 공(功)으로 논(論)하고 아울러 홍일동도 계청하여 자급을 더하여 주었으며, 조충손은 이용(李瑢)의 청으로 자급을 더하였다. 강진이 파직되던 때 사림(士林)이 분해하지 않는 이가 없더니 소윤(少尹)을 제수받음에 미치자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스스로 공론(公論)이 있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책 5권 25장 A면【국편영인본】 6책 572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壬申/以李仁孫爲漢城府尹, 奇虔
21.단종실록 5권, 단종 1년 3월 30일 정해 1번째기사 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의정부에서 전시에 친강하지 않는 일과 액수 정하는 일을 의논하여 아뢰다
의정부에서 전시(殿試)에 친강(親講)하지 않는 일과 액수 정하는 일을 의논하여 아뢰기를,
"주상께서 비록 아직 경서를 다 섭렵하지 못하였다고 하여도 친히 강론(講論)을 들으심은 대단히 아름다운 일이니, 청컨대 문종의 고사에 따라 거자(擧子)를 친강하게 하소서. 또 문종조에 있어서 특별히 40인을 뽑은 것은 미리 정하였던 액수가 아니고, 인재의 다소에 따라 임시로 뽑은 것이니, 지금도 역시 액수를 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즉시 지평(持平) 유성원(柳誠源)을 불러 전지하기를,
"대신의 의논이 그 같음을 너희들은 알라."
하였다. 유성원이 아뢰기를,
"문종조에 있어서 모든 강경(講經)에 통달한 여부는 모두 성상의 재결에서 나왔습니다. 금상(今上)께서는 나이가 어리시니 《사서(四書)》에서 단지 2서(二書)만 진강(進講)하고 경서는 오로지 진강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제 만약 강경을 한다면 그 통달한 여부는 모두 신하의 거취(去取)에 달려 있는데 ‘친강’이라 이름하는 것은 명실(名實)이 미덥지 못하지 않습니까? 청컨대 정지하소서. 또 문종께서는 정문(程文)을 친히 보시고 성상의 결재로 시행한 까닭에 특별히 40인을 뽑았고, 또 경오년222) 가을에는 국가에서 의논하여 50인을 뽑았는데, 간혹 반박하여 의논하는 사람이 있어 말하기를, ‘당(唐)나라 이래로 반드시 33인을 뽑아 왔습니다. 천하의 대국도 오히려 이 같은데 더욱 우리 소국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하므로, 드디어 정지하고 행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금상께서는 나이가 어리시니 문종과 같이 정문을 재품(裁品)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모름지기 미리 액수를 정하소서."
하니, 전지하기를,
"내가 마땅히 대신에게 의논하겠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책 5권 35장 B면【국편영인본】 6책 577면
【분류】
인사-선발(選拔)
[註 222]
경오년 : 1450 문종 즉위년.
22.단종실록 6권, 단종 1년 4월 2일 기축 3번째기사 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유성원과 사간원에서 강경을 정파할 것과 미리 정원의 숫자를 정할 것을 청하다
지평(持平) 유성원(柳誠源)이 본부(本府)의 의논을 가지고 아뢰기를,
"매년 봄·가을로 행대(行臺)를 경기좌·우도(京畿左右道)에 나누어 보냈으니, 지금도 또한 나누어 보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또 경상도 상주(尙州)의 군자 창고(軍資倉庫)가 불탔는데, 신 등은 수령이 타다 남은 곡식을 민간(民間)에게 강제로 배분하고 새 곡식을 독촉하여 거두어 들여서 그 숫자를 채울까 두렵습니다. 또 그 흔적을 숨기려고 농사철인 것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백성들을 사역시켜 〈창고를〉 짓는다면 반드시 번거롭고 소요스럽게 될 것입니다. 청컨대 이문(移文)하여 조사해서 묻도록 하소서. 또 지금 전시(殿試)에서 강경(講經)은 폐지할 수가 없으며, 다만 액수(額數)는 신 등이 신미년226) 별시(別試)의 예를 상고하니, 먼저 대책(對策)의 봉명(封名)227) 을 뜯어서 본 뒤에 강경(講經)의 분수(分數)를 참고하여서 그 정원의 숫자를 정하였으나, 금상(今上)께서는 매사(每事)를 걸핏하면 대신들에게 자문(諮問)하시니, 만약 〈정원의 숫자를〉 미리 정하지 않는다면, 혹시 사의(私意)로써 그 수를 증감할까 두렵습니다."
하고, 사간원에서도 또한 강경(講經)을 정파(停罷)할 것과 미리 정원의 숫자를 정할 것을 청하니, 즉시 정부에 의논하도록 하였다. 황보인(皇甫仁)이 말하기를,
"이제 신 등이 건의한 것을 법사(法司)에서 반박하니, 다시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성심(聖心)으로 결단하소서."
하고, 김종서(金宗瑞)는 분연히 말하기를,
"우리들이 건의한 것을 대성(臺省)에서 어찌 의심합니까? 만약 의심하여 믿지 않는다면, 정사(政事)에 대하여서 우리들이 어찌 참여하여 듣겠습니까? 대성(臺省)의 말은 불가합니다."
하였으나, 한확(韓確)만은 홀로 말하기를,
"근년에 과거가 여러 번 있었고, 또 가을 과장[秋場]이 있는데, 삼관(三館)228) 에 궐원(闕員)이 없으니, 법사(法司)의 말이 옳습니다. 청컨대 이를 따르소서."
하니 전지하기를,
"전례(前例)에 의하여 40명으로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책 6권 1장 A면【국편영인본】 6책 578면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금화(禁火) / 인사-선발(選拔) / 정론(政論)
[註 226]
신미년 : 1451 문종 원년.
[註 227]
봉명(封名) : 과거의 답안지에 응시자의 성명·생년월일·주소·사조(四祖) 등을 써서 봉하여 붙이던 일. 봉미(封彌).
[註 228]
삼관(三館) : 교서관(校書館), 성균관(成均館), 예문관(藝文館)을 말함.
23.단종실록 6권, 단종 1년 4월 3일 경인 2번째기사 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경기에 행대를 보내는 일과 화재 후의 미곡에 관하여 명하다
지평(持平) 유성원(柳誠源)을 불러서 전지하기를,
"경기의 행대(行臺)230) 는 보내는 것이 마땅하다. 상주(尙州)의 군자창(軍資倉)이 불타버린 것은, 이보다 앞서 경주의 군자창도 또한 그러하였으니, 그 불타다 남은 미곡(米穀) 가운데 쓸 수 없는 것은 회계에서 감해 주고, 조금 쓸 만한 것은 민간에 골고루 나누어 주고 값을 감하여 환수(還收)하도록 하라. 이제 상주의 군자(軍資)는 관찰사가 이미 이 예에 의거하여 호조(戶曹)에 이문(移文)하여 시행하였으니, 다른 물을 만한 일이 있다면 이문(移文)하여 핵문(劾問)하는 것이 옳다."
하니, 유성원이 다시 아뢰기를,
"산릉 도감 낭청(山陵都監郞廳)은 이미 〈직사를〉 삼가지 못하였기 때문에 파직(罷職)하였는데, 전일에 품계(品階)를 더한 것은 실로 헛된 상작(賞爵)이었으니, 청컨대 추탈(追奪)하소서. 또 김우묘(金雨畝)는 이미 〈직사를〉 삼가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죄 주었는데, 또 그로 하여금 비각(碑閣)을 감독하여 만들게 하니, 비록 김우묘가 아니더라도 어찌 시킬 만한 자가 없겠습니까? 만약 일을 끝마치기에 이르르면 반드시 상작을 더할 것인데, 파직(罷職)한 지 얼마되지 아니하여 도로 즉시 서용한다면, 사람들이 누가 징계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전지하기를,
"정부에 의논하겠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책 6권 1장 B면【국편영인본】 6책 578면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금화(禁火)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왕실-종사(宗社) / 재정(財政) / 정론(政論)
[註 230]
행대(行臺) : 각 지방에 파견하는 사헌부(司憲府)의 관원
24.단종실록 6권, 단종 1년 4월 9일 병신 3번째기사 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사헌부에서 김우묘의 일로 상소하다
사헌부에서 상소하기를,
"신 등이 근일에 여러 번 아뢰기를, ‘김우묘(金雨畝)는 비석(碑石)을 감독하는 역사에 마땅하지 않다.’고 하였으나 유윤(兪允)을 받지 못하였으니, 그윽이 생각하건대, 유감입니다. 대저 일에 미편한 점이 있으면 비록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말하지 아니할 수가 없고, 말에 혹시 이치가 있으면 비록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따르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김우묘의 일은 작은 일인 것 같으나, 그것이 권선 징악(勸善懲惡)에 관계되니 매우 큰 일입니다. 유사(有司)에서는 마땅히 간(諫)하여 중지시켜야 하고, 전하께서도 또한 마땅히 받아들여서 그대로 행하여야 합니다.
김우묘는 본래 영렬하여 아무 취할 만한 것이 없는 자인데, 토목의 역사로 인연하여 권문(權門)에 의지하고 아부하여 〈임금의〉 눈에 들어서 벼슬을 옮겨 5품에 이르렀고, 드디어 오래도록 그 직임에 있었으나 아직 한 가지 일이라도 특기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지난번에 산릉의 역사에서 토목의 역사에 익숙하다고 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실로 그 일을 주장하게 하였는데, 오히려 삼가고 조심하지 아니하여 큰 일을 잘못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만 직사만을 파면시켰으니, 죄가 그 벌에 합당하지 아니하므로 사람들의 뜻에 맞지 아니하였는데, 하물며 파직한 지 얼마되지 아니하여서 도로 그로 하여금 역사를 감독시키는 경우이겠습니까?
죄를 다스리는데 엄하게 하지도 아니하고서 갑자기 또 직임에 임명하니 상(賞)과 벌(罰)이 합당한 것을 잃었으니, 어찌 후래를 징계하겠습니까? 만약 말하기를, ‘김우묘가 오랫동안 공역(工役)을 맡아서 모든 여러 가지 물건을 모조리 다 맡아서 주관하였으므로 고쳐서 임명하기가 어렵다.’고 하신다면 갑병(甲兵)·전곡(錢穀)·부서(簿書)238) 의 직책 가운데 맡은 일이 번잡한 것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있지만, 죄를 지어서 파면되면 으레 그 사람을 바꾸는 것이지, 맡은 바의 일 때문에 그 사람을 도로 임명한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김우묘가 만약 공장(工匠)이라면 그 죄에 따라서 역사를 시켜도 진실로 방해될 것이 없지만, 그로 하여금 관리를 감독시킨다면 부당하기가 이와 같습니다. 또 비록 김우묘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누군들 이러한 일을 능히 감당하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반드시 도로 임명하고자 하신다면 이 일의 시비가 바뀌어 변별될 것이니, 신 등의 청도 또한 이치가 없는 바가 아닐 것입니다. 전하께서도 또한 신 등의 말을 채용하여서 여러 차례 정부에 의논하였으나, 정부에서 굳이 고치지 말도록 청하였으니, 신 등은 능히 의혹스러움을 풀지 못하여서 감히 이처럼 번거롭게 아룁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다시 성려(聖慮)를 두소서."
하고, 지평(持平) 유성원(柳誠源)이 또 아뢰기를,
"황해도가 조잔(凋殘)한 지 여러 해인데, 그 위에 올해 곡식이 풍년이 들지 아니하여서 민생이 심히 곤란합니다. 이제 안평 대군(安平大君)이 해주 온정(海州溫井)에서 목욕 하면서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는데, 어찌 소요(騷擾)스러움이 없겠습니까? 청컨대 빨리 돌아오도록 명하소서."
하고, 사간원에서도 또한 아뢰기를,
"상작(賞爵)은 인주(人主)의 큰 권한이니, 가볍게 시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종(世宗)께서 순자(循資)의 법239) 을 세워서 비록 일자 일급(一資一級)이라도 일찍이 신중하게 하지 아니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제 수양 대군(首陽大君)을 수종(隨從)한 사람들은 진실로 아무런 공로가 없고, 또 국가에 기쁜 경사(慶事)도 없는데 특별히 상작(賞爵)을 더하는 것은 미편합니다. 조충손(趙衷孫)이 안평 대군을 구료하였다고 하여 또한 품계를 더하도록 하였으나, 만약 고쳐서 바로 잡지 않는다면 비단 상작이 외람될 뿐만 아니라, 드디어 아부하는 풍조를 이루게 되므로 실로 치체(治體)에 관계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전지(傳旨)하기를,
"헌부에서 올린 봉장(封章)과 안평 대군의 일은 내가 마땅히 여러 대신에게 의논하겠다. 사간원에서 아뢴 계품을 더하는 일은 일찍이 헌부의 청에 인하여 바야흐로 대신들에게 의논하고 있는 중이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책 6권 2장 B면【국편영인본】 6책 579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왕실-종사(宗社) / 왕실-종친(宗親) / 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註 238]
부서(簿書) : 장부를 만들어 기재하는 것.
[註 239]
순자(循資)의 법 : 벼슬의 품계에 따라서 차례로 승진시키던 법. 곧 근무 연한에 따라 임명하던 제도.
25.단종실록 6권, 단종 1년 4월 9일 병신 3번째기사 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사헌부에서 김우묘의 일로 상소하다
사헌부에서 상소하기를,
"신 등이 근일에 여러 번 아뢰기를, ‘김우묘(金雨畝)는 비석(碑石)을 감독하는 역사에 마땅하지 않다.’고 하였으나 유윤(兪允)을 받지 못하였으니, 그윽이 생각하건대, 유감입니다. 대저 일에 미편한 점이 있으면 비록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말하지 아니할 수가 없고, 말에 혹시 이치가 있으면 비록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따르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김우묘의 일은 작은 일인 것 같으나, 그것이 권선 징악(勸善懲惡)에 관계되니 매우 큰 일입니다. 유사(有司)에서는 마땅히 간(諫)하여 중지시켜야 하고, 전하께서도 또한 마땅히 받아들여서 그대로 행하여야 합니다.
김우묘는 본래 영렬하여 아무 취할 만한 것이 없는 자인데, 토목의 역사로 인연하여 권문(權門)에 의지하고 아부하여 〈임금의〉 눈에 들어서 벼슬을 옮겨 5품에 이르렀고, 드디어 오래도록 그 직임에 있었으나 아직 한 가지 일이라도 특기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지난번에 산릉의 역사에서 토목의 역사에 익숙하다고 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실로 그 일을 주장하게 하였는데, 오히려 삼가고 조심하지 아니하여 큰 일을 잘못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만 직사만을 파면시켰으니, 죄가 그 벌에 합당하지 아니하므로 사람들의 뜻에 맞지 아니하였는데, 하물며 파직한 지 얼마되지 아니하여서 도로 그로 하여금 역사를 감독시키는 경우이겠습니까?
죄를 다스리는데 엄하게 하지도 아니하고서 갑자기 또 직임에 임명하니 상(賞)과 벌(罰)이 합당한 것을 잃었으니, 어찌 후래를 징계하겠습니까? 만약 말하기를, ‘김우묘가 오랫동안 공역(工役)을 맡아서 모든 여러 가지 물건을 모조리 다 맡아서 주관하였으므로 고쳐서 임명하기가 어렵다.’고 하신다면 갑병(甲兵)·전곡(錢穀)·부서(簿書)238) 의 직책 가운데 맡은 일이 번잡한 것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있지만, 죄를 지어서 파면되면 으레 그 사람을 바꾸는 것이지, 맡은 바의 일 때문에 그 사람을 도로 임명한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김우묘가 만약 공장(工匠)이라면 그 죄에 따라서 역사를 시켜도 진실로 방해될 것이 없지만, 그로 하여금 관리를 감독시킨다면 부당하기가 이와 같습니다. 또 비록 김우묘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누군들 이러한 일을 능히 감당하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반드시 도로 임명하고자 하신다면 이 일의 시비가 바뀌어 변별될 것이니, 신 등의 청도 또한 이치가 없는 바가 아닐 것입니다. 전하께서도 또한 신 등의 말을 채용하여서 여러 차례 정부에 의논하였으나, 정부에서 굳이 고치지 말도록 청하였으니, 신 등은 능히 의혹스러움을 풀지 못하여서 감히 이처럼 번거롭게 아룁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다시 성려(聖慮)를 두소서."
하고, 지평(持平) 유성원(柳誠源)이 또 아뢰기를,
"황해도가 조잔(凋殘)한 지 여러 해인데, 그 위에 올해 곡식이 풍년이 들지 아니하여서 민생이 심히 곤란합니다. 이제 안평 대군(安平大君)이 해주 온정(海州溫井)에서 목욕 하면서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는데, 어찌 소요(騷擾)스러움이 없겠습니까? 청컨대 빨리 돌아오도록 명하소서."
하고, 사간원에서도 또한 아뢰기를,
"상작(賞爵)은 인주(人主)의 큰 권한이니, 가볍게 시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종(世宗)께서 순자(循資)의 법239) 을 세워서 비록 일자 일급(一資一級)이라도 일찍이 신중하게 하지 아니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제 수양 대군(首陽大君)을 수종(隨從)한 사람들은 진실로 아무런 공로가 없고, 또 국가에 기쁜 경사(慶事)도 없는데 특별히 상작(賞爵)을 더하는 것은 미편합니다. 조충손(趙衷孫)이 안평 대군을 구료하였다고 하여 또한 품계를 더하도록 하였으나, 만약 고쳐서 바로 잡지 않는다면 비단 상작이 외람될 뿐만 아니라, 드디어 아부하는 풍조를 이루게 되므로 실로 치체(治體)에 관계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전지(傳旨)하기를,
"헌부에서 올린 봉장(封章)과 안평 대군의 일은 내가 마땅히 여러 대신에게 의논하겠다. 사간원에서 아뢴 계품을 더하는 일은 일찍이 헌부의 청에 인하여 바야흐로 대신들에게 의논하고 있는 중이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책 6권 2장 B면【국편영인본】 6책 579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왕실-종사(宗社) / 왕실-종친(宗親) / 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註 238]
부서(簿書) : 장부를 만들어 기재하는 것.
[註 239]
순자(循資)의 법 : 벼슬의 품계에 따라서 차례로 승진시키던 법. 곧 근무 연한에 따라 임명하던 제도
26.단종실록 6권, 단종 1년 4월 21일 무신 2번째기사 1453년 명 경태(景泰) 4년
유성원이 수양 대군의 종사관에게 상을 준 것과 조충손에게 자품을 더한 것의 불가함을 아뢰다
지평(持平) 유성원(柳誠源)이 본부(本府)의 의논을 가지고 아뢰기를,
"수양 대군의 종사관(從事官)은 조금도 상을 줄 만한 공로가 없으며, 조충손(趙衷孫)이 안평 대군을 구료한 것은 당연히 해야 할 바인데도 아울러 자품(資品)을 더하여 준 것은 매우 옳지 않습니다. 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 등이 《병요(兵要)》를 수찬(修撰)한 공으로써 각각 한 자급을 올려 주었으나, 이것도 또한 작은 일이니 반드시 관직을 상(賞)으로 줄 필요가 없습니다. 청컨대 아울러 고쳐 바로잡으소서."
하니, 임금이 전지(傳旨)하기를,
"종사관(從事官)과 조충손(趙衷孫)의 일은 너희들이 비록 여러번 청하였지만, 그러나, 이미 대신과 숙의(熟議)하여 이를 시행한 것이고, 또 《병요(兵要)》의 글자를 베껴 쓴 사람들에게 이미 자급을 더하였는데, 그 수찬한 사람도 또한 대신과 의논하여 상을 준 것이다."
하였다. 유성원이 다시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2책 6권 7장 A면【국편영인본】 6책 581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정론(政論) / 출판-서책(書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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