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요한복음 8장 48~59절
제 별명은 아브라함입니다. 영국에 있을 때 저를 아는 외국인이 저의 한국식 이름이 발음하기 어려우니 영어식 이름을 하나 지으라고 해서 만든 이름입니다. 그땐 단순하게 제 아들 이름이 ‘이삭’이여서 그냥 아브라함이라고 부르라고 했던 이름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깊이 생각해 보니 그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이 보통 이름이 아니더군요. 한 민족의 시조의 이름이요, 또 선택 받은 백성의 근원과 다른 이와의 차별을 나타내는 이름이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브랜드화 된 이름이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상품 중에 나이키, 아디다스, 베네통, 구찌 등과 같이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은 이름 중에도 차별화된 브랜드화 된 이름 중 하나였다는 것이지요. 그건 기독교든 이스람교든 상관이 없나 봅니다.
크로아티아 와서 현지인들에게 제 닉네임을 말하면 사람들 중에는 제가 이슬람교냐?고 묻는 자도 간혹 있습니다. 아마 그 이유는 그 이름이 무슬램 중에서도 유명한 이름이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이렇듯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은 유대인들에게 대단한 존재였습니다. 그들의 살아 숨쉬는 역사의 한 인물이며, 그들의 축복의 시발점이요, 유대인 자신의 존재 자체였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이 땅에 그들이 태어났고, 그의 믿음으로 인해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라 함은 유대인들에게는 인생의 시작과 끝을 관통하는 뗄래야 뗄 수가 없는 그런 존재였다는 것이지요. 하나님 외에 그 보다 큰 이가 이 세상에 없었습니다.
그들 모두 “아브라함 파”였습니다. 아브라함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인정하고, 칭송하는 ‘아사모’(즉,아브라함을 사랑하는 모임)였다는 것이지요.
오늘 성경본문은 ‘아사모’들의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을 사모하는 모임’…
여러분..혹 ‘오빠부대’, ‘박수부대’에 대해서 아시나요? 과거에는 대게 사춘기의 중고등학생 중 여학생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근래에는 중년의 여성들까지도 그런 대열에 끼여 있습니다. 한류의 발달로 일본 및 동남아의 중년 여성들이 특정 배우에게 매료되어 한국으로 관광을 옵니다.
그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배우나 가수에게 일방적인 선물을 보낸다든지, 아니면 공연장에 찾아 가서 폭발적인 응원을 하거나, 특정 연예인이 쓰는 물건이나 액세서리, 옷 등을 똑같이 따라 입고 다니는 등의 행동을 하면서 대리만족을 느낍니다.
만약 그런 사람들에게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에 대해서 비방하거나 욕을 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분위기가 확 달라집니다. 인터넷 상에서 마녀사냥은 물론이고, 심지어 상대에 대해 폭력을 행사하여 다치게 하는 일들도 일어나곤 하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 집착이 극단적으로 강한 사람은 스토크와 같은 삶을 살게 되면, 일상의 삶도 적응하지 못하여, 현실과 비현실 속에서 헤매는 정서적 장애인이 되고 말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51)
그러자 유대인들이 대답합니다.
“지금 네가 귀신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누구라 하느랴”(52-43)
그러니 주님께서 또 대답합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56)
유대인들은 공격적으로 묻습니다.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그러자 주님께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느니라”
그때 어떤 상황이 발생했습니까? 군중들은 순간 폭도로 변해 예수를 돌로 쳐 죽이려고 한 장면이 나타나고 주님은 그들을 피해서 달아나는 모습이 나옵니다.
전쟁에서 작전권은 중대장이나 소대장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작전권은 참모총장이나 국방부 장관에게 있는 것입니다. 기업의 결제권은 과장이나 부장 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업의 회장이나 사장이 그 결제권과 결정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 신앙의 모범은 아브라함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 신앙은 하나님께로부터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모범답안입니다. 아브라함이 위대한 신앙의 선조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하나님 아니라는 것이지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은 것 같이, 유대인들도 아브라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참모총장의 지시를 묵살한 소대나 중대와 같이, 사장님 결정을 무시한 부서와 같이, 하나님을 무시한 체 아브라함이 무엇인가 대단한 것이나 된 듯 그에 대해서 집착하고, 존경하고, 사랑하고, 칭송하며 그것이 다 인 냥하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대적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하나님이 아닌 부차적인 것으로 우리가 ‘하사모’가 아닌 ‘something사모’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something은 사람이 되기도 하고 물건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집사님은 담임 목사님의 열렬한 팬입니다. 그 목사님 가는 집회는 다 따라 다닙니다. 식사도 대접하고 넥타이도 사고, 뭐 다 합니다. 심지어 차 안에서 목사님 옆자리에까지 앉습니다. 사모도 제쳐두고.. 목사를 신앙 안에서 사랑하고 섬기는 것은 좋은 일이나, 그가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자신의 욘사마가 되어서도 안 되는 것이지요. 그건 죄입니다.
한국교회가 근래에 들어 목회자들로 인해서 심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내 놔라 하는 대형교회의 유명하고 명망 있던 몇 몇의 목회자들이 어느 날 한 순간에 여자 문제, 돈 문제 등으로 인해서 교회에서 쫓겨나고 세간의 지목이 되고 있습니다.
저는 그게 심판이라고 봅니다. 목사들의 실수와 잘못에 대한 심판과 동시에, 목사를 하나님을 섬기는 한 인격체의 목자로 보지 않고, 무슨 신령한 신주단지 같이 떠받들고 섬기던 모든 특정 ‘목사모’들에 대한 하나님의 강한 경고와 깨달음의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일련의 일들은 저와 같은 일반 목회자들에게 굉장히 큰 타격을 줍니다. 비아냥의 대상이 되고 신뢰가 무너지지요. 하지만 그로 인해서 목사나 성직자를 신격화시키는 사탄의 세력에 대해서는 강한 메시지를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또 저를 너무 무시하며 막 대하진 마십시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로마 백부장인 고넬료가 베드로를 청하여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베드로가 그의 집에 도착하니 고넬료가 나아와 발 앞에 엎드리어 절을 하니, 베드로가 그를 보고 하는 말이 이렇습니다.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행10:26)
그렇습니다. 하나님 외의 모든 인간은 숭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사랑하고, 섬기고, 존경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랑과 섬김, 존경이 숭배가 되는 순간, 아니면 집착이 되는 순간 그것은 신령한 것이 아닌 악한 것, 사탄의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세상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리를 자기가 차지하고 신처럼, 숭배를 받고, 속이고 인생들을 착취하며 그들 영혼의 생명을 빨아 먹고 있습니까? 갖은 철학과 속임으로, 지식과 물질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인간 자신의 종을 만들어 부려 먹고 있습니다. 그에 속은 사람들은 어두운 장님과 같이 그것을 찬양하고 기뻐하며 맹목적으로 진리에 대해 귀를 막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둘러 보십시오 이단사상에 빠진 자들이 그러하고, 하나님을 우습게 알고 교만하게 행동하며 살아가는 모든 불신자와 거짓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합니다.
이런 이들이 오늘 본문에서 나타나는 ‘아브라함을 사랑하는 모임’인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의 위대한 조상 아브라함을 이름을 이용하여 이상한 집단을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8:39-40)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 이 말은 그들은 아브라함을 동경하고 사모하는 이상한 ‘오빠 부대’ 또는 ‘스토커 집단’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아브라함이 나기 전에 내가 있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그들은 주님을 돌로 쳐서 죽이려고 한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무슨 “something사모”에 속해 있습니까? 노(노무현)사모입니까? 아니면 이(이명박)사모입니까? 아니면 특정 인물에 대해서 존경하고 사랑하고 그 사람의 모든 말에 대해 순종하고 받아드립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 특정 인물과 하나님을 비교해 보십시오. 주님과 비교해 보십시오.
만약 주님보다 특정 인물의 가르침이나 충고나 위로가 나에게 더 큰 힘이 된다면 여러분은 지금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특정 인물이 여러분 자신 속에 있는 자신의 자아나 자신의 고집입니까? 그건 더 위험한 일일 수 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아사모’는 특정 인물인 아브라함을 사모하는 모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 아닌 다른 어떤 것을 더 사모하고, 존경하고, 칭송하고, 더 잘 보이려고 하고, 그에게 좋은 말을 듣고 싶어하고 하는 그런 모든 something(어떤 것)들에 대한 실례입니다. 그런 류를 존경하고 사모했던 한 대표적인 집단 유대인 집단을 주님은 책망하시고 그들을 피해가셨습니다. 도망가셨습니다. 즉 굴러온 복이 돌아간 것입니다. 은혜가 비켜갔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곳에 있는 여러분이 그런 어리석은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되지 않길 바랍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에게 도도하고 까칠하게 대하는 멋 없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상대를 사랑으로 섬기십시오. 그리고 칭송과 찬양은 그리고 마음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께로만 두시기 바랍니다. 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