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산(968봉)을 치고 넘으니 왕승(王勝)골 갈림길이다. 마을에서 떠도는 편린(片鱗)들을 모아서 이야기 하자면, 김부(金富)라고 이름진 경순왕은, 재기를 위해 아들 마의태자와 금강산으로 가다가, 중도에 어찌어찌하여 이곳 마을에서 잠시 자리 잡았다. 실제로 마을 곳곳에 커다란 돌무더기가 남아 있는데, 양양군측에서 검증한 결과, 경순왕과 마의태자의 왕궁터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옛날 서당 다니던 시절만 해도 마을 훈장을 통해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신라이야기가 있었다. 지금의 귀둔리에 신라의 군영(軍營)이 있었다고 하고, 귀둔리와 왕승골은 고려군에 밀려난 마의태자가 재기의 기회를 엿보던 곳이었다 한다. ‘둔‘이라는 말이 살 만한 곳을 이르던 말이니, 신라 복원을 꿈꾸던 이들에게는 귀한(貴) 둔(屯)이었다. 마의태자의 소문을 듣고, 고려에 불만을 가졌던 신라 유민들은 귀둔리로 모여들었고,더 깊은 산 속인 필례 원진개에 진을 치고 고려군과의 일전을 준비했다. 망대암은 이때 보초를 세워두던 곳이고 쇠물안골은 귀둔리에서 군량밭으로 곡식을 나르던 소나 말을 먹이던 곳이었다. 마의태자와 관련된 전설은 인제군 남면 김부리까지 이어진다. 김부(金富)라는 이름도 경순왕을 이르던 김부대왕에서 나온 것일 뿐더러 김부대왕각이 있어, 마의태자 후손들인 부안 김씨와 통천 김씨가, 지난 83년부터 매년 음력 9월9일 마의태자를 추모하는 재를 올린다고 한다. 필례에서도 고려에 쫓긴 마의태자는 가리산을 넘어 한계리로 이어지는 필례령을 넘어 한계산성에 진을 쳤다가, 다시 강을 따라 김부리로 갔을지 모를 일이다. 한계산성 어딘가에 있다는 망경대는 마의태자가 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바라보던 곳이다. 원래 이름 왕승(王勝)골인데, 나쁜 일제가 왕이란 말이 일본 왕에게 불경스럽다하여, 旺勝으로 개명했다. 이름은 혼을 담은 것이다. 양양군은 빨리 조치를 취하기 바란다.
왕승골 갈림길에서 산림청 소속 일꾼들을 만났다. 대간길을 손보고 있단다. 지게로 일일히 날라 계단을 보수하고 있다. 이 행위 또한 이 길의 한 역사의 일부가 되어 덧붙여져, 길의 새로움을 불어 넣고 있었다. 중국의 주례(周禮)에 따르면, 우마가 다닐 수 있는 오솔길을 경(經), 큰 수레가 다니는 길을 진(軫), 승거(乘車)가 다닐 수 있는 길을 도(途), 마차 2대가 다니는 길을 도(道), 마차 3대가 다니는 길을 로(路)라 하였단다. 증국에는 사람만 겨우 다니는 길은 길도 아니었나 보다. 우리가 이런 길을 도로라 하지 않듯이 말이다.
왕승골에서 갈전곡봉으로 가는 길은, 지칠 때라 그런지 굉장히 힘들었다. 하나의 산을 넘고 좀 내려간다 싶으면 또 한 산이 가로막고, 여기 넘으면 갈전곡봉이겠지 했는데 더 큰 산이 가로 막는다. 무려 9개의 산과 고개를 넘어서서 겨우 갈전곡봉이 우리를 허락한다. 근데 갈전곡봉(葛田谷峰)이 뭐야! 발음도 어렵고 그냥 칡산이라고 하든지. 칡골산이라고 하면 되지 않나! 투덜거렸지만 내가 이곳에서 얘기해 봐야 뭐가 바뀌겠는가? 정상에 거의 다가가는데 한쌍의 남녀가 후다닥 도망치듯 하산한다. 알고보니 정상에서 배설물을 실례했다.하필이면 실례 장소가 정상표시기 아래이다. 냄새가 진동한다.
갈전곡봉은 가칠봉,월둔고개,구룡덕봉,주억봉, 방태산,그리고 기린면 용포로가는 山群의 시작점이다.
이 구간은 남진보다 북진이 그나마 수월할 듯 싶다. 힘이 있는 초반에 왕승골 까지 가면 후반에 그나마 수월한 구간이다.
샛령(1066m). 이곳에서 갈천약수로 탈출 할 수 있다.
구룡령 옛길이다 .
길은 서로 다른 곳을 연결하는 통로다. 옛길은 차량이 발명되기 전부터 선조들이 사용하던 길이다. 주로 사람과 우마가 다니던 길이었기 때문에 굴곡이 심하고 자연의 조건에 맞추어 조성되었다.구룡령 옛길은 양양군 서면 갈천리에서 홍천군 내면 명개리를 잇는 고갯길이다. 고갯마루가 해발 1,013m로 양양군과 고성군 지방의 옛사람들이 서울에 갈 때 주로 이용했다. 현재 차량이 다니는 구룡령 길이 56번 국도로 개설되면서 옛길은 보행자들이 다녔던 그대로 남아 있다. 구룡령 옛길은 설악산, 점봉산, 오대산 등 백두대간이라는 장벽으로 인해 왕래하기 힘들었던 양양 지역의 영동 사람들과 홍천 방향의 영서 사람들에게 두 지역을 연결해준 유일한 통로였다.
구룡령 옛길은 사람의 보폭과 움직임을 고려해 절묘한 굴곡을 만들어낸 천하의 명승길이다. 사람과 노새가 쉽게 오를 수 있도록 쉬운 경사를 이루고 있다. 이곳은 백두대간에서 가장 산림이 울창한 지역 중 하나인데, 다행스럽게도, 지금까지 원형이 잘 보존되어 왔다. 주변에는 곧게 뻗은 노송이 아름답게 자라고 있고, 깊은 계곡과 천연림은 정취를 더해준다. 이 길을 통해 양양 사람들은 소금, 간수, 고등어, 명태 등을 가지고 영서 지방으로 가서, 콩, 팥, 수수, 녹두, 깨, 좁쌀 등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구룡령 옛길을 바꾸미 고개, 또는 바꾸미 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양양에서 올라가는 구룡령 옛길은 홍천보다 가파르기에 굴곡이 훨씬 더하다. 휘감는 정도가 용이 구불구불 긴 몸통을 휘저으며 고개를 넘어가는 듯한 모양이라고 해서 구룡령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이름에 관한 다른 전설로는 ‘아홉 마리 용이 고개를 넘어가다 지쳐 갈천리 마을 약수터에서 목을 축이고 다시 넘어갔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이와 같은 용에 관한 전설과 고개 이름 때문에 이 지방 사람들은 구룡령을 넘으면 등용문을 통과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가던 양양, 고성 지방의 선비들이 과거의 합격을 기원하며 일부러 이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다시금 세번의 작은 봉우리를 넘어서 드디어 구룡령에 도착한다.
다시 입구와 마찬가지로 데크가 있고
오후 5시다. 12시간 30분 만에 무시히 넘어 왔다. 어찌하든지 쉬운 구간은 하나도 없다. 험한 고개 험한 산 하나 없었지만 쉬운 산 쉬운고개 또한 없다. 위대한 천연계에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