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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곡선생 「호연장해(浩然章解)」의 이기일체(理氣一體)와 양국 주왕(兩國朱王)학계의 의의
(2018-2, 2019년 3월 28일)
참고:이경룡,논문 「항재 이광신의 隨事精察心理 심학종지와 하곡 「浩然章」 해석의 계승」
하곡선생은 만년에 심학 관점에서 『맹자』 「浩然章」을 해석하고 「浩然章圖」을 비롯하여 「浩然章解」 5편과 「雜解」 1편을 지었다. 「浩然章解」는 「浩然章」의 章句를 상세하게 해석하고 자신의 관점을 나타냈다. 「雜解」의 41개 조목은 理氣一源(理氣一體) 관점에서 해석한 것을 神理에 귀결시켜 심학 체계를 세운 것이다. 여기에서 주자학이 理氣와 人心道心과 未發已發을 二分한 것도 비판하였다. 하곡선생이 「浩然章解」에서 주장한 심학 본체론의 핵심내용은 心卽理와 理氣一體 둘이며, 여기에 근거하여 맹자의 持志, 集義, 養氣 셋의 공부체계를 해석하였다.
하곡선생의 「浩然章」 해석은 세 가지 학술적 의의를 갖고 있다고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첫째는 心卽理와 理氣一體를 확립하여 조선심학의 학술체계를 세우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이다. 둘째는 송시열이 만년에 「浩然章」에 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주자 만년의 直養 관점에서 재해석하려고 시도하였는데, 오히려 이 재해석이 조선학계에서 논쟁을 일으켰다. 하곡선생의 해석은 송시열의 재해석과 조선학계의 논쟁을 해결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셋째는 중국 양명학계의 부족한 설명을 보완시켰다는 것이다. 왕양명이 세상을 떠날 때 치양지 관점에서 『대학』의 格致誠正 구분이 「호연장」의 集義보다 상세하여 더 낫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심즉리의 본체와 지행합일의 공부 두 관점에서 설명하지 못하였다. 더구나 二程의 해석을 자세하게 설명하거나 계승하지 못하고 주자의 해석도 반박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하곡선생의 「浩然章解」는 心卽理와 理氣一體의 관점에서 왕양명의 부족한 설명을 명료하게 보완시켰고, 정명도 「정성서」의 動靜皆定과 공부의 효과로서의 鳶飛魚躍까지도 설명하였다.
항재선생은 하곡선생의 「浩然章」 해석을 요약하여 「浩然章義(因霞谷說而就加推者)」를 지었다. 항재선생이 하곡선생 해석을 직접 인용하여 주자 해석을 비판한 조목은 모두 3개이며 요지는 2개이다. 첫째 요지는 集義, 持志, 養氣 세 가지 공부에서 義志氣 셋이 하나의 본체(一體)라고 본 것이다. 둘째 요지는 持志와 集義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공부가 아니고 집의공부가 핵심이며 본체를 회복시키는 하나의 공부이며, 이로써 호연지기가 저절로 생긴다는 養氣공부라고 보았다. 항재선생의 2개 요지는 하곡선생의 心卽理와 理氣一體에 근거하여 정리한 것이다.
다시 말해, 첫째 요지는 集義공부의 義가 心에 내재된 본체의 性이 발현된 것이며, 養氣공부의 浩然之氣도 본체의 元氣가 새롭게 발현된 것이라고 본 것이다. 따라서 본체에서 보면 본연의 義와 元氣의 호연지기뿐만 아니라 志까지도 본연의 일체라고 보았다. 둘째 요지는 집의를 중심으로 持志와 集義 둘을 하나로 융합하여야만 본연의 호연지기를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養氣는 후천적 勇氣를 기르는 것이 아니고 본연의 호연지기를 새롭게 생산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새롭게 생산된 본연의 호연지기는 사실상 사람이 타고난 元氣를 회복하여 천지에 가득하도록 확충시키는 것이다. 2개 요지는 持志, 集義, 養氣 셋의 조합과 순서를 설명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지를 집의에 포함시켜서 집의와 양기 둘로 귀결시켰다. 또는 집의를 持志에 포함시키기도 하였으나 중요한 것은 집의공부이다. 그런데 주자는 持志공부를 기초로 삼아 集義하면 養氣할 수 있다고 해석하였다. 하곡선생은 주자 해석이 결국 志와 義를 양분하였다고 비판하였고 항재선생이 이를 계승하였다.
또한 항재선생의 隨事精察心理는 사실상 하곡선생 「浩然章」의 해석을 계승한 것이며, 하곡선생의 心卽理와 理氣一體에 근거하여 자신의 체험을 서술한 것이다. 학술적 의의는 하곡선생의 해석을 계승하여 하곡학파의 독자적 심학본체론과 수양공부론을 세웠다는 것이다. 하곡학의 학술종지가 본심이라는 선천적 本源을 직접 깨닫는 것이기 때문에, 왕양명의 성의공부와 비슷하지만 송대 동찰공부와는 다르다고 평가할 수 있다.
조선학계에서는 주자학자 송시열(1607-1689)이 주자의 「호연장」 해석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였고, 心과 直을 중요한 논제로 삼아 문인들에게 자신의 의문을 해결하라고 유언을 남겼다. 心과 直은 한마디로 말해 道心의 直養이다. 사실상 조선학계의 논의는 송시열이 「浩然章」에 관한 주자의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고 尹拯(1629-1714)을 비롯하여 李端夏(1625-1689)와 朴世采(1631-1695)에게 의문을 설명하고 올바른 해석을 요청하였다. 이때부터 논쟁이 시작되었다. 박세당(1629-1703)도 송시열의 재해석에 근거하여 주자의 「호연장」 해석에 대하여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하고 비판하였다. 하곡선생은 일찍이 송시열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이런 의문에 대하여 잘 이해하였다. 따라서 그의 「浩然章」 해석은 송시열과 윤증 및 박세채를 비롯하여 박세당 등 조선학계의 의문을 해결한 것이다.
다시 말해 하곡선생은 일찍부터 송시열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현재 『하곡집』에는 송시열에게 올린 서신이 28살(1676)부터 36살(1684)까지 5통 남아있다. 중요한 것은 송시열이 이 시기에 「호연장」 해석에 치중하였으며 적어도 直養이라는 관점에서 주자학을 재해석하려고 시도하였고, 이러한 재해석을 하곡선생이 계승하여 해결하였다는 것이다. 하곡선생은 28살 송시열에게 올린 서신에서 「定性書」 靜亦定의 寂然不動을 여쭈면서 “心未可無事物,只要無私欲”이라고 해석하였다. 이 해석은 나중에 「호연장」 “必有事焉而勿正” 구절의 해석과 일치한다. 事物이나 事는 集義공부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송시열이 만년에 품었던 直養 문제에 관하여 하곡선생은 주자학 관점에서 재해석하지 않고 주자 해석의 오류를 지적하여 비판하였으며, 심학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하였다. 따라서 하곡학은 송시열 만년의 의문을 계승하여 해결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송시열(1607-1689)은 「浩然章」을 14살에 배우고 17살에는 오륙백 번이나 읽었지만 이해하지 못하였고, 줄곧 관심을 갖고 있다가 67살(1673)에는 尹拯(1629-1714)이 찾아왔을 때 함께 읽었으나 여전히 시원하게 풀지 못하였다. 이듬해 손자의 소개를 받고 손자의 장인 李端夏(1625-1689)를 비롯하여 박세채(1631-1695) 두 사람에게 서신으로 상의하였으나 여전히 주자 해석에 대한 의문이 남아서 「浩然章質疑」를 지었고 이후에도 계속 연구하였다. 83살(1689)에는 전라도 강진에서 문인들과 「浩然章」을 강론하였다.
또한 송시열은 문인들에게 보낸 「告訣書」에서 주자가 죽을 때 남긴 유언의 핵심이 “直” 한 글자이며, 「道性善」、「求放心」、「浩然章」 3章의 핵심도 “直” 한 글자라고 지적하였다. 송시열이 임종을 앞두고 제시한 주자의 直 해석은 중요한 학술적 의의를 갖고 있다. 맹자의 直養은 道義에 따라 浩然之氣를 直養한다는 뜻이다. 또한 주자는 천지가 만물을 낳고 성인이 만사에 응대하는 것도 모두 “直”이라고 설명하였다. 천지와 성인의 直은 본체를 곧바로 당장 발현시킨다는 直現의 뜻이다. 이와 같이 송시열은 주자가 만년에 확정한 견해를 “直” 한 글자라고 새롭게 보았고 直을 자신의 유언으로 삼았다. 道義에 따라 氣를 直養한다는 수양공부는 사실상 道心을 直養하는 것으로 귀결시킬 수 있다.
송시열의 입장은 氣보다도 道義를 어떻게 직양하여 본체를 직현시키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다. 直現의 의미는 양명후학의 현성양지에 가깝다. 따라서 송시열은 만년에 심학에 대하여 어느 정도 긍정하려는 관심을 보여주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理氣一體를 확신하기 어려웠던 송시열은 道心의 直養공부를 설명하지 못하였다. 송시열이 제기한 直養의 直에 관하여, 하곡선생은 持志공부와 集義공부가 하나가 되었을 때 본심에서 道義가 활발하게 발현되는 것이 直이라고 해석하였다. 다시 말해 持志의 敬과 集義의 義가 일체화되어야한다는 것이다. 敬義一體는 양명후학이 왕양명의 지행합일에 근거하여 工夫卽本體와 本體卽工夫를 주장한 것과 같은 뜻이다. 따라서 하곡선생은 정명도와 정이천의 敬義 해석을 구분한 뒤 정명도의 敬義一體를 따랐고 정이천의 양분을 배척하였다. 다시 말해 하곡선생의 敬義一體는 주자학이 주장하는 敬義의 夾持와는 다르다.
송시열의 많은 의문들 가운데 중요한 의문 두 가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는 맹자가 不動心의 心을 浩然之氣의 氣에 맞대응시켜서 말한 것을 보면 心이 理라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는 주자가 心이 순수하고 깨끗한 氣라고 보았던 관점과는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고 의문을 가진 것이다. 더구나 주자가 道義는 형이상이고 氣는 형이하라고 보았기 때문에 의문은 더욱 커졌다. 다시 말해 일반적으로 心이 理氣의 合이라고 말하지만, 송시열은 맹자가 부동심의 心이 형이상의 道義라고 여긴 것을 보고 心이 理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心은 순수한 理의 道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心卽理 관점을 긍정할 수 있다는 열린 입장이다. 그러나 心을 형이하의 氣라고 보는 주자학 관점에서는 心을 형의상의 理라고 보기 어려운 것이 의문이었다.
둘째, 그는 氣가 義와 道에 배합되어야만(配義與道) 호연지기를 생산한다는 구절에서 配의 의미는 氣가 道義를 보조한다는 주자의 해석에 의문을 가졌다. 주자는 배합한다는 配의 뜻에는 돕는다는 助와 합치시킨다는 合의 두 가지 뜻이 있다고 보았는데 二程의 해석을 따른 것이다. 결국 형이하의 氣가 형이상의 도의를 돕는다는 뜻인데, 어떻게 형이하가 형이상을 돕는지 의문을 가졌다. 이 의문은 氣가 형이하의 氣에 한정시키고 형이상의 先天之氣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 의문이었다.
따라서 박세채는 송시열의 서신을 받은 뒤에 보낸 답신에서 心을 主理입장에서 볼 수 있더라도 理와 氣를 구분해야한다는 견해를 나타내고 송시열이 心을 理로 보려는 견해를 반대하였다. 김창협은 먼저 형이상의 理와 형이하의 氣의 역할에 관하여 理가 虛弱하고 氣가 實强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理氣가 상호 보조해야한다고 보았다. 김창협은 理氣의 二分을 지키면서 송시열 견해에 억지로 동의하였다. 그러나 형이하의 氣가 형이상의 理를 어떻게 돕는지를 설명하지 않았다. 뒤에 홍대용은 송시열이 心을 理라고 보려는 관점은 나흠순처럼 理氣의 分離를 부정하는 것이며 理氣一物이라고 비난하였다.
박세당(1629-1703)도 주자 해석에 의문을 가졌는데, 그는 「호연장」 “志至焉,氣次焉”의 志帥氣次에 근거하여 “其爲氣也,配義與道;無是,餒也。”의 “無是,餒” 구절을 氣가 至大至剛하더라도 道義가 없으면 氣가 힘이 없다고 해석하였다. 그런데 주자는 “氣가 義를 보조해야한다(主氣爲義助之論)”는 관점을 제시하고 “無是,餒” 구절을 氣가 없으면 배고픈 사람처럼 힘이 없어서 용감하지 못하다고 해석하였다. 주자의 해석은 배고픈 사람처럼 힘이 없는(餒) 주체가 道義라고 오해하도록 하였고, 박세당은 氣라고 명백하게 주장하고 주자 해석의 오해를 부정하였다. 따라서 박세당은 주자의 해석이 맹자의 “志至焉,氣次焉”을 위배한 것이며 결국 道義의 주도적 역할을 약화시킨 것이 가장 큰 잘못이라고 지적하였다. 박세당의 의문과 지적은 사실상 主理와 主氣 관점에서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그렇지만 하곡선생은 심학 관점에서 똑같은 견해를 나타냈다.
하곡선생은 송시열의 첫째 의문에 대하여 심즉리를 주장하여 해결하였다. 송시열은 心이 형이상의 理라고 볼 수 있는 열린 태도를 나타냈고 하곡선생이 적극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둘째 의문에 대하여는 형이상의 先天之氣를 인정한 형이상의 理氣一體를 주장하여 해결하였다. 주목할 것은 서경덕이 淸虛湛一의 先天之氣를 설정하였는데, 하곡선생은 서경덕이 형이상의 先天之氣를 설정한 것은 옳지만, 형이상의 理가 형이상의 氣를 주재하는 것을 빠뜨렸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先天之理의 주재 결여는 하곡선생이 오해한 것이다. 실제로는 서경덕이 선천의 氣를 설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선천의 理가 선천의 氣를 주재한다고 분명하게 밝혔고 주재자로서 理를 대신하여 天地之心을 제시하였다.
하곡선생은 일찍이 28살(1678)에 體用一源 견해를 갖고 있었으며 49살(1697)에 金幹(1646-1732)에게 보낸 서신에서도 서경덕의 주장 가운데 형이상의 理氣一體 관점을 인정하였다. 하곡선생은 형이상의 理氣一體 관점에서 송시열이 형이상의 理와 형이하의 氣 둘을 합일시킬 수 없었던 理氣一物의 문제를 해결하였다. 따라서 하곡선생은 先天之氣 관점에서 서경덕이 설정한 선천의 氣를 인정하고 송시열의 理氣一物 문제도 해결한 것이다. 결국 조선 주자학자들이 나흠순의 理氣一物을 비판하였던 문제를 해결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서경덕과 하곡선생 모두 先天之氣를 설정하고 형이상에서도 理가 氣를 주재한다는 理氣一體를 주장한 것이다. 이것은 심즉리 입장에서 체용일원과 이기일체를 설명한 것이다.
맹자 「浩然章」에 관하여 왕양명의 설명이 부족한 것을 보면, 朴鐔(1652-1707)은 1696년 즈음에 하곡선생에게 보낸 서신에서 왕양명이 격물, 치지, 성의 셋의 수양공부를 구분하지 않았다고 비난하였다. 하곡선생은 왕양명이 57살(1528) 병석에서 聶豹(1487-1563)에게 보낸 둘째 서신을 인용하여 왕양명이 공부를 정밀하게 구분하였다고 반박하였다. 인용한 내용은 왕양명이 섭표에게 격물, 치지, 성의, 정심을 각기 구분하지 말고 하나의 공부로 보아야하되, 치양지 공부 안에서는 넷을 구분하여야하며, 따라서 『대학』의 정밀한 수양공부가 맹자 「호연장」의 개략적인 설명보다 낫다고 주장하였다는 것이다.
왕양명은 맹자의 “必有事焉”과 “集義” 두 공부가 落空을 방지하기 위하여 정신을 바짝 차리는(提撕警覺) 공부에 불과하다고 보았고, 치양지 관점에서 보면 『대학』의 格致誠正 공부가 「호연장」보다 체계적이라고 간략하게 평가하였다. 그러나 왕양명의 평가는 심즉리와 지행합일 두 관점에서는 설명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더구나 정신을 바짝 차리는 공부라고 이해한 것은 본래 정이천과 주자의 견해였다. 따라서 二程과 주자 이래의 해석과 논란맥락을 파악하여 설명한 것은 아니었다.
맹자 「浩然章」에 관한 북송시기 논쟁에 앞서, 동한 말기 趙岐(?-201)의 해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必有事焉而勿正,心勿忘,勿助長也。” 구절의 斷句에 관하여 趙岐는 먼저 “而勿正”의 내용이 “心勿忘,勿助長”이라고 보아 斷句하였다. 仁義를 행하면 반드시 福이 오는데, 조급하게 복이 많이 빨리 오도록 기대하여 조장하지 말고, 마음속으로 복이 온다는 것을 잊지 않고 믿으면서 善行하라고 권장하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그런데 북송시기 성리학자들은 趙岐가 求福과 勸善 뜻으로 해석한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여겼는지 언급하지 않았다.
북송시기 논쟁의 발단은 張載(1020-1077)와 二程이 『맹자』의 이 구절을 논의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두 학자는 간단한 문답 셋을 주고받으며 서로 다른 견해를 내놓았다. 첫째 문답, 장재는 구절의 전체 의미에 대하여 思慮가 사라진 入神의 경지를 나타냈다고 높이 평론하였다. 二程은 할 일이 있으면 思慮하겠지만, 사려가 없다면 떠올리는 일조차 없다. 그런데 반드시 일 삼는 것(必有事焉)이 있는 단계라면, 전체의 뜻은 다만 養氣방법을 설명한 것뿐이며 入神 단계를 설명한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장재 평론을 부정하였다. 둘째, 장재는 勿忘이 靈明을 잘 지키고 있기 때문에 萬事에 잘 대처한다고 해석하였다. 二程은 영명을 지키려는 意와 반드시 일삼아야하는 必이라는 의지가 마음에 남아있는데 이런 마음을 어떻게 靈明이라고 말할 수 있냐고 반박하였다. 셋째, 장재는 영명을 깨닫지 못하였다면 이런 마음을 갖고 어떻게 잘 대처하겠냐면서 다시 반박하였다. 二程은 意必固我의 이기적인 심리적 장애물이 사라진 뒤에도 반드시 일삼는 것이 있다는 것은 학자가 마땅히 盡心의 경지까지 쉼 없이 수양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여기에서 요점은 장재가 영명을 깨달은 성인의 入神 경지라고 해석하였지만, 二程은 오히려 수양공부에 매진하는 학자 지위라고 해석하고, 설사 이기적인 심리 장애를 제거하였더라도 계속 수양공부를 하여 성인의 盡心 지위에 올라야한다고 보았다. 장재는 영명의 入神 경지에 주목하였고 二程은 학자 입장에서 구체적인 이해와 해석을 시도하였다. 장재가 말한 入神 경지의 뜻은 정이천이 精義入神하여 一理를 通貫한 성인의 경지라고 볼 수 있지만, 이밖에도 導引과 吐納을 배운 謝良佐가 선천의 氣와 神이 합일된 경지라고 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사량좌는 入神이 도가의 煉氣化神 단계라고 보았다. 二程의 盡心단계 또는 사량좌의 化神단계에서 보더라도 장재의 入神 경지는 성인의 최고 경지라고 볼 수 있다.
장재와 토론한 학자가 二程 가운데 누구인지 『二程集』에는 기록이 없다. 현재 어록을 비교해보면, “有所事乃有思也,無思則無事”라는 견해에 가까운 내용은 정명도가 侯世興에게 禪宗의 어록을 빌려 “일이 있으면 사려하겠지만, 만약에 일이 없는 데도 어떻든지 사려한다면 틀린 것이다.”는 기록과 함께 「定性書」에서 “內外를 잊으면 마음이 맑아지고 어떤 사려도 일어나지 않는다. 사려가 없으면 定心하게 되고, 정심하면 마음이 밝아진다.”는 기록에 비교해볼 수 있다. 또한 정명도가 「浩然章」을 養氣공부로 보는 것을 반대하고, 도교의 胎息이나 불교의 攝心와는 다르다고 보았던 점도 참고할 수 있다. 養氣가 도교의 태식과 유사하다고 보는 것도 반대하고, 또한 불교의 禪定에 도움이 된다는 것도 반대하였다. 맹자의 存心養氣는 養志를 위주로 삼고 養氣까지 겸수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정명도는 「浩然章」을 養氣공부로 해석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황종희 『孟子師說』은 선종의 어록을 설명한 구절이 정이천과 侯世興의 대화라고 한다. 또한 意必固我의 이기적인 심리 장애물이 제거된 뒤라고 말한 내용은 정이천 어록에 가깝고, 답문의 “必有事焉”에 관하여 집의공부라고 해석한 것도 정이천에 가깝다고 보았다. 이밖에도 斷句를 보면, 장재와 토론한 기록에서는 “而勿正心”이라고 斷句하였는데, 정명도는 정이천이 일찍부터 “而勿正”로 단구하였고 자신도 동의한다고 한다. 단구에 근거하여도 누구의 어록인지 여전히 확정할 수 없다. 그렇지만 정이천이 「浩然章」을 학자 지위의 養氣라고 본 것은 틀림없으며, 정명도가 集義공부에 치중한 것과는 달랐다.
중요한 것은 정명도가 「浩然章」의 浩然之氣를 『역』 곤괘의 “直方大”에 견주고 “必有事焉”을 主一의 持敬공부라고 해석한 것이다. 浩然之氣는 大剛直 三德을 갖고 있으며 곤괘의 直方大에 해당한다고 보았고 정이천도 나중에는 따랐다. 또한 정명도는 “必有事焉”이나 “勿忘”이 “敬以直內,義以方外”의 敬이라고 해석하였다. 사실상 二程은 수양공부에서 忠信進德이 剛健하게 前進하는 乾道에 해당하고, 敬義夾持가 退步하여 收斂하는 곤도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集義공부가 적극적인 건도에 해당하며 動靜을 포함한 動靜皆定이고, 持志공부가 소극적인 收斂의 곤도에 해당하며 靜亦定이라고 볼 수 있다. 二程이 乾坤으로 수양공부를 구분하였는데, 이 관점을 주자가 계승하여 곤도의 養氣공부가 集義공부를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이와 같이 二程은 「浩然章」과 『역』의 수양공부를 각기 해석하여 통합시키려고 시도하였고, 장재와의 토론이 중요한 발단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맥락에서 보면 강건하게 전진하는 忠信進德의 수양공부가 중요한데, 후대학자들은 오히려 收斂을 강조한 持敬공부에 주목하였다. 또한 주자는 養氣가 集義에 도움이 된다고 보았던 관점도 二程에서 비롯되었다. 박세당과 하곡선생은 理가 氣를 주재한다는 志帥氣充 관점에서 주자의 氣爲義助 해석을 비판하였다. 따라서 二程 특히 정명도의 관점을 살펴보면 忠信進德이 動靜皆定에 해당하며 더욱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하곡선생도 이 점을 감안하여 맹자의 養氣는 다만 부차적이며 進德의 集義공부가 중요하며 盡性과 事天命之道가 목적이라고 밝혔다.
앞에서 보았듯이 왕양명은 『대학』의 格致誠正 공부가 「호연장」보다 낫다고 평론하였지만 상세한 과정을 설명하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하곡선생은 맹자의 「호연장」과 정명도의 학술종지를 서로 대응시켜서 忠信進德의 集義공부를 강조하였다. 또한 心의 본체 관점에서 맹자의 義理가 정명도의 천리이며, 맹자의 구방심이 정명도의 求仁공부라고 보았다. 이런 설명은 왕양명이 설명하지 못한 내용을 보완시켰다고 평가할 수 있다. 다만 왕양명의 良知가 道義를 直養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맹자의 集義공부를 二程과 주자보다 더 잘 설명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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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맹자의 구방심이 정명도의 구인 공부이고 이광사 선생이 실천한 수양공부가 바로 앞의 것이네요.
전체적으로 이해는 가능한데요....한번더 선천에 대한 것은 공부해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