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숙이를 만나다
임이송
그곳에서 삼숙이를 만날 줄은 몰랐다.
간신히 시간을 만들어 떠난 여행이었다.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 절실히 필요했다. 무엇보다도 잃어버린 미각을 찾아야 했다. 멍게 비빔밥과 신선한 회가 먹고 싶었다. 강릉에 도착하자마자 유명하다는, 중앙시장통에 있는 횟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삼숙이를 만났다.
작년에 한 사람을 내게서 완전히 죽여 버렸다. 다시는 내 기억에 되살아나 활보하지 못하도록. 몇 달간, 그의 행적을 곱씹고 또 곱씹어 보았다. 함께한 세월이 20년이 넘은 사람이다. 그가 매주 일요일마다 거룩한 척을 하지 않았더라면 배신감으로 덜 몸서리쳤을 것이다. 일주일간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사람에게서 구역질이 날 수도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그 후로도 좀처럼 입맛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TV에서 멍게 비빔밥을 소개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갓 잡아온 노란 멍게를 초고추장에 쓱쓱 비비는 걸 보는 순간, 입안에 침이 돌았다.
올봄에 또 한 명의 유망정치인의 몰락을 지켜봐야 했다. 그 기사가 나오던 날 저녁에도 식욕을 잃었고 한동안 많이 부대끼었다. 인간은 자신의 꿈이 어려울수록 사회의 큰사람들에게 꿈을 투사시키고 키워나가게 된다. 스스로 대통령을 꿈꾸었던 사람이고 또 많은 사람들이 그가 대통령이 되기를 꿈꿔왔을 것이다. 점점 더 초췌해진 얼굴로 검찰 출두하는 그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나의 무릎도 자꾸만 꺾여갔다.
요즘 들어 종종 누군가의 정수리에 총을 쏘고 또 누군가의 가슴에 칼을 꽂는 버릇이 생겼다. 언젠가부터 ‘너머’를 꿈꾸게 되었다. 내가 ‘넘어’ 갈 수 있는 건 존재할 수 있어도 ‘너머’는 본래 존재하지 않는 허상일지도 모르는데. 아마도 쉰이 넘으면서부터 사람에게 ‘너머’를 기대하는 습성이 생긴 것 같다. 내가 ‘넘어’갈 수 없는 일이 점점 많아지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숭배할 그 무엇이 필요하다. 그래서 더 높고 맑은 것을 향해 기웃거린다. 그도 안 되면 멀리 순례를 떠난다. 순례에서조차 찾지 못하면 마지막으로 늙은 엄마에게로 돌아온다. 그리고는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게 된다.
횟집에는 회가 없었다. ‘생(生)’을 찾고 싶어 한달음에 달려간 그 집에는 정말로 회가 없었다. 화가 나서 식당주인에게 몇 번을 물어보았지만 회를 팔지 않는다고 했다. 이름이 횟집인데 왜 회를 팔지 않느냐고 재차 다그쳐 물어보아도 그는 팔지 않은 지 오래됐다고만 했다. 메뉴는 알탕과 삼숙이탕 딱 둘 뿐이었다. 나는 알탕을 싫어한다. 삼숙이탕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손님들은 ‘탕’을 붙이지 않고 ‘삼숙이’를 외쳐댔고 나처럼 회를 먹으러 외지에서 온 사람들은 주인에게 왜 회를 팔지 않느냐며 실랑이를 벌였다.
기대를 안고 간 혀끝은 이미 맥을 놓았지만 배가 너무 고파 어쩔 수 없이 삼숙이를 시켰다. 매운탕도 아니고 찌개도 아닌 것 같고 해물탕도 아닌, 정체불명의 음식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곤이와 명태알과 대파가 들어간 거무죽죽한 한 대접의 탕이 나왔다. 그릇의 반이 뼈였다. 커다란 앞 접시의 용도를 알만 했다. 뼈를 발라낸 삼숙이의 모습은 요즘의 내 마음 같았다. 살은 으깨지고 부서져 처참했다.
그러나 한 입 떠 넣는 순간, 기대 밖의 작은 기쁨이 입 안에 돋았다. 살은 부드럽고 담백하고 고소했다. 포슬포슬하고 쫀득거리기까지 했다. 전혀 비리지도 않았다. 샐쭉했던 기분이 조금 살아났고 쳐진 입 꼬리도 살짝 올라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삼숙이는 생김새가 너무 망측해서 그간 식탁에 거의 오르지 못했다고 한다. 그물에 걸려도 버려지기 일쑤였다고 한다.
횟집에, 그토록 먹고 싶었던 회는 없었지만 겉만 화려한 생선보다는 반전의 맛이 분명 있었다. 한 달 전, 믿었던 사람에게, 아주 순수한 얼굴을 한 그 사람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사람을 잃으면 영락없이 입맛을 잃어버리는 나에게, 인간 삼숙이가 어디에선가 나타났으면 좋겠다.
임이송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한양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강화 삼량중, 고교 국어교사를 지냈다.
2003년 수필동화 네 살에 태어난 악마를 출간함.